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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음 메세지]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마6:13-16)

    [복음 메세지]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마6:13-16)

    [말씀 제목]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마6:13-16)

    [설교자] 김세한 목자

    [설교일] 2025년4월 5일

    스티븐슨이란 작가의 “지킬박사와 하이드씨”라는 소설이 있다. 소설의 내용은 이렇다. 한 마을에 천사 같은 마음의 지킬 박사와 난폭한 성품의 하이드씨가 살고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밤마다 그 마을에 무서운 범죄가 발생하는데 그것은 살인, 방화, 절도, 유괴와 같은 강력 범죄 사건들이었다. 경찰이 범인을 잡으려고 노리는 가운데 어느 날 다시 칼경이라는 유명한 인물이 지팡이에 맞고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경찰은 범행 도구인 지팡이를 단서로 용의자를 추적한 결과 그 지팡이 임자가 바로 지킬 박사임을 알게 된다. 그래서 박사의 집 문을 부수고 들어갔더니 놀랍게도 지킬 박사의 옷을 입은 하이드씨가 자살해 죽어 있더라는 것이다. 결국 천사같은 지킬 박사와 악마 같은 하이드씨는 다른 인물이 아닌 동일인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이 소설 이야기가 명작으로 세인들에게 찬사를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한 인간의 내면에 선한 모습과 악한 모습이 공존하고 있다는 점을 잘 지적했기 때문이다. 이 작가가 지적했듯이 모든 사람은 누구나 그 영혼 안에 지킬 박사같은 선한 모습도 그리고 하이드씨 같은 악한 모습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신자건 불신자건 마찬가지이다. 다만 불신자들은 세상 사람들 앞에 자신의 악한 모습은 감추고 선한 모습만 부각시켜서 인정과 칭찬을 받으려고 노력한다. 왜냐하면 그래야 자신이 꽤 괜찮은 존재로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오히려 자기 연약함을 성찰하고 부족함을 발견해서 하나님 앞에 점점 변화해 가는 존재라는 차이점이 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 신앙인의 내적 상황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했다.

    (롬 7:25-8:2)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성도는 하나님 앞에 자신이 죄인으로 발견되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키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도는 모순과 위선으로 가득찬 자기 모습이 발견되면 그것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뉘우치며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 영혼이 변화되는 축복이 주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신앙의 길을 가고 있는가? 아니면 세상 사람들처럼 자신을 치장하며 꽤 괜찮은 사람으로 기만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오늘은 산상보훈 가운데 구제에 대한 교훈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 나타내야 하는 참 경건의 길이 무엇인지 함께 생각하고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산상보훈에서 5장은 율법에 대한 새로운 정의와 해석에 대한 내용이라고 했다. 이어지는 6장부터는 주제가 조금 달라진다. 5장까지의 주제는 율법에 대한 바른 이해를 세우는 것이었다면 6장부터는 그 바른 율법에 따른 경건 생활과 실천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즉 5장은 이론에 관한 내용이고 6장부터 7장까지는 실천에 관한 내용이다. 그 실천의 내용 가운데 마태는 가장 먼저 유대인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경건생활의 세 가지를 다루고 있다. 그 세 가지는 바로 구제, 기도, 금식이다. 오늘은 세 가지 중 첫 번째로 구제에 대한 교훈의 말씀에 대해서 살펴보자.

    구제란 무엇인가? 넉넉한 자가 불우한 이웃에게 자선을 베푸는 행위이다. 그런데 그 구제에 대해서 이렇게 행해야지 저렇게 행하면 안된다고 교훈하시고 있다.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는 사실 자체가 무엇을 시사하고 있는가? 예수님 당시에 유대 사회는 율법에 대한 이해도 문제점이 있었지만 경건생활의 실천에도 문제가 있었음을 반증한다. 예수님은 그것을 어떻게 바로 잡으시고 있는가? 그리고 그것은 당시의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전달하고 있는가? 특별히 구제에 대해서 예수님이 제시하신 바른 실천의 태도는 이런 것이다.

    첫째, 사람의 영광을 구하지 않아야 한다.

    (마 6:2)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하략>』

    구제는 내가 땀 흘려 모은 것을 남에게 나눠주는 것이다. 땀 흘려 모으려면 시간을 소모해야 하고 시간을 소모하는만큼 내 생명이 줄어드는 것이다. 따라서 구제란 내 생명을 타인에게 나눠주는 행위이다. 내 생명의 촛불을 태워 남에게 빛을 비춰주는 행위라는 뜻이다. 따라서 구제 자체는 매우 선한 일이요 고귀한 일이다. 그런데 그런 고귀한 행동도 잘못될 수 있으니 조심하라고 오늘 교훈을 주시는 것이다. 그런 잘못된 구제 행위를 지적하시면서 외식하는 자를 언급한다. 외식하는 자란 어떤 자인가? 여기서 ‘외식’ 또는 ‘위선’(hypocrite)이란 단어의 사전적인 뜻은 “가면을 쓴 배우”라는 뜻이다. 쉽게 말하자면 무대에 선 어떤 배우가 왕의 복장을 하고 거닐면서 다른 사람의 칭찬을 받는 것 같은 상황을 바로 외식한다 또는 위선이다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한 가지 오해하지 않아야 할 점이 있다. 첫째는 사람을 칭찬하거나 칭찬 받는 일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내가 타인을 칭찬할 수 있고 내가 타인에게 칭찬 받을 수도 있다. 칭찬하고 칭찬 받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다. 사도행전 4장에 보면 착한 사람 바나바가 등장하는데 그는 백성들에게 칭찬받았다. 또 사도행전 6장에 식탁 봉사 직분자는 백성들로부터 칭찬 듣는 자라야 한다는 조건이 제시되었다. 그 조건대로 안립된 스데반 집사는 교회 성도들로부터 칭찬받는 자였다. 어떤 성도는 칭찬에 대해 매우 예민하게 반응한다. 거의 결벽증적인 반응을 보인다. 그분을 칭찬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지 사람을 칭찬한다”고 분노를 나타낼 정도이다. 그렇게 반응할 필요가 없다. 성도가 칭찬하거나 칭찬 받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예수님이 경계하신 것은 사람의 칭찬과 영광을 받으려는 목적을 가지고 구제를 행하지 말라는 것 뿐이다.

    (약 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야고보서 1장 27절의 말씀을 보면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을 언급했다. 그런데 그 경건이 고아와 과부를 환난 중에 돌아보는 것과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즉,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구제 행위가 경건생활과 연관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구제 행위가 예배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마음에는 사람이 드러날 일이 없다. 구제의 대상은 사람이지만 구제의 정신은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마음으로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행전4장 하반부와 5장 전반부를 보면 겉으로 드러난 행동은 같으나 동기는 상반된 두 부류의 신앙인이 등장한다. 하나는 착한 사람 바나바이고 다른 하나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였다. 두 부류는 재산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두는 행위까지는 똑같았다. 그러나 바나바는 가난한 성도들을 사랑하는 착한 뜻으로 행동한 반면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성도들의 존경과 칭찬을 받는 지도자적 위치를 얻으려는 목적에서 행동했다. 만약 이런 부부가 바나바처럼 초대교회 지도자가 되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아마 초대교회는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찬 세속 집단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교회는 순수한 정기도 사라지고 성령의 역사도 멈추고 교회의 성장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런 위기 상황을 방관치 않으시고 그 거짓과 위선이 교회를 지배하지 않도록 심판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남을 구제할 때 나는 무슨 동기로 그를 돕고자 하는가 하고 자신의 동기를 물을 필요가 있다. 또 내 안에 예배의 정신이 있는가를 물을 필요가 있다.

    남을 돕는 구제를 실천할 때 항상 선한 동기를 점검하고 그런 선행의 능력을 주신 하나님께 먼저 감사와 영광을 돌릴 줄 아는 저와 성도가 되길 바란다.

    (골 3: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둘째, 자기의 공로에 대해 잊어야 한다.

    (마 6:3)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예수님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후견인 제도가 있었다. 그래서 부자인 사람이 가난한 사람의 후견인이 되고 가난한 사람은 부자의 피후견인이 된다. 만약 후견인이 피후견인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돌봐주면 그대신 가난한 그 사람은 자기를 돌봐준 부자를 남들 앞에서 칭찬하고 명예를 높여주는 것이 사회의 일반적인 풍습이었다. 그런데 그런 풍습이 일반화된 사회 속에서 예수님은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라고 말씀하신다. 이 교훈은 사람들에게 매우 이상하게 들렸을 것이다. give and take의 세상 이치 속에서는 매우 어리석게 들렸을 것이다.

    예수님이 구제를 은밀하게 하라는 이유는 무엇일까? 실제 현실 속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미루어 보건대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내가 선행을 할 때 이를 보고 시기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픈 것이 사람의 악한 본성 중 하나다. 그러니 타인에게 상처되는 말을 듣는 것을 경계하라는 것이다. 따라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것은 너 자신이 상처 받을 수 있는 상황을 만들지 말라는 뜻일 수 있다.

    또 다른 이유는 내가 스스로 시험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처음에는 순수한 동기로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동기와 취지가 변질될 수 있는 연약한 존재이다. 또 처음에는 아무런 보상과 보답을 생각지 않았는데 나중에는 내게 주어질 유익에 관심이 돌아가 구제가 구제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주님은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교훈하시는 것이다.

    그러면 구제를 은밀히 할 수 있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구체적인 실천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나 개인의 명의로 구제를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헌납해서 교회의 이름으로 구제케 하는 것이다. 사도행전 4장의 바나바는 물질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고 했다. 이것은 ‘교회에 헌납했다’는 뜻이다. 교회에 헌납해서 교회의 명의로 구제하는 것이 사도교회의 모습이었다. 교회의 이름으로 하면 자기 이름을 사라지고 하나님의 이름이 높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자신의 공로를 잊고 하나님을 높이는 지혜로운 처신이다. 그런데 교회를 통하지 않고 개인이 하면 시험에 들고 구제가 구제되지 못할 위험성이 있다.

    부디 구제할 때 자신의 이름을 가리고 교회를 통해 구제를 실천해서 구제의 동기도 보호되고 하나님의 이름도 높여지는 지혜로운 저와 성도님들이 되기를 바란다.

    (빌 3:16)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셋째, 하나님이 주실 상급만 소망해야 한다.

    (마 6:2) 『<상략>–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마 6:4)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사람은 누구나 추구하는 것을 얻게 되어 있다. 건강을 추구하는 사람은 건강을, 돈을 추구하는 사람은 돈을, 명예를 추구하는 사람은 결국 명예를 얻는다. 구제의 목적이 사람의 칭찬과 영광에 있었다면 그것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그뿐이다. 사람으로부터 받으려는 것을 받았으니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무엇을 기대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이미 떡을 먹고 배부른 사람이 밥을 찾지 않듯이 사람의 칭찬과 명예에 배부르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큰 상급은 기대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칭찬, 하나님이 주시는 보상에 대해서 얼마나 사모하고 있는가? 사람은 때로 자신의 진실성에 대해서도 어두울 때가 많다. 그래서 내 동기가 순수한지 아니면 저 깊은 곳에 다른 뜻이 깔려 있는지 깨닫지 못할 때가 많다. 자신의 동기가 순수하다는 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만약 선을 행할 때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서운한 감정을 느낀다면 그것은 내가 바른 마음으로 구제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가 만족하고 행복한 모습만으로 충분하다면 나는 바른 마음으로 구제하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어느 자리에 있는가? 부디 사람은 알아주지 않더라도 모든 것을 보시는 하나님이 알아주실 것이고 하나님이 주시는 상이 가장 큰 상이라는 믿음으로 구제를 실천하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자.

    (눅 14:14)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시더라』

    진실 ‘씬서러’(sincere)라는 영어 단어가 있다. 이 영어 단어는 ‘시네 세라’(sine cera)라는 라틴어에서 유래했다. 그 라틴어의 본래 뜻은 “밀칠하지 않은”이라는 의미이다. 영어로 직역하면 ‘sun tested’이다. 즉 “햇빛에 시험해 보다”라는 뜻이 라틴어 ‘시네 세라’ ‘밀칠 하지 않은’이라는 뜻이다. 그 의미는 바로 고대 도자기 산업과 관계된다. 도자기(옹기)는 두꺼운 것보다 얇은 것으로 만들기 어렵고 까다로웠다. 도자기를 두껍게 만들면 불에 구워낼 때 금이 잘 가지 않는다. 그러나 얇게 만들면 불에 굽다가 금이 잘 가는 단점이 있다. 그래도 얇은 도자기가 가볍기 때문에 두꺼운 도자기보다 더 비쌌다. 그런데 만약 도자기 제조 중에 흠이 발견되면 그것은 깨버리는 것이 정상인데 일부 부정직한 도공들은 약한 흠있는 곳에 색소와 밀초를 섞어 틈을 메꾼다. 그리고 다시 유약을 발라 시장에 불량품을 내다 팔았다. 그러나 이런 불량 도자기는 햇빛에 비추어 보면 금방 탄로가 난다. 햇볕에 시험한다는 뜻이 바로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래서 정품 고급도자기에는 밑에 ‘sine cera’라는 글을 새겨 넣어서 품질을 보증했다고 한다. 여기에서 영어 단어 씬서러 ‘sincere’가 나온 것이다.

    우리는 구제할 때 어떤 정신으로 실천하고 있는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정신으로, 변하지 않는 순수한 동기로, 개인의 명의가 아니라 교회의 명의로 실천해야겠다. 이렇게 구제할 때 하나님은 그 구제를 거룩한 산 제사로 흠향하실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선행을 천국 책에 기록하시고 영원히 기억해 주실 것이다. 부디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의 그릇에 ‘시네 세라’ 씬서러 sincere 라고 새겨 넣으시는, 그런 축복된 주님의 자녀가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한다.

     

    글작성 : 김세한 목자

  • [복음 메세지]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라 (마 18:21~35)

    [복음 메세지]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라 (마 18:21~35)

     

    말씀 제목: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라(마18:21-35)
    설교자:이요셉 목자
    설교일:2024년 2월 17일 안식일 오전

    우리나라에는 과거사 정리 위원회라는 기관이 있다 이 기관은 옛날에 있었던 일에 대해 조사하여 진실을 밝혀내는 목적이 있다. 이 기관에 처음 접수된 건이 10860건에 달할 정도로 많이 접수 되었다. 이처럼 사람들은 지금 당장에 할 일 이 아닌 지난 일에 매여 사는 것인가?
    그 이유는 바로 억울함에 있다. 사람의 마음에 억울함이 있으면 매사에 불화가 생기고 의견이 분열되고 또 발전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이러한 것을 해결하기 위에 과거사 정리 위원회라는 기관이 존재한다.
    신앙생활을 할 때 과거를 정리하며 살아가야 한다 하나님 앞에 범죄 한 사실이 있다면 회개기도를 통해 정리 하여야하고 또한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용서를 기억하여 용서를 할 줄 아는 참예수교회 성도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용서란 무엇인가?
    [마18: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원문에서 용서는 풀어주다, 놓아 주다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그 일에 대하여 잊고 놓아주라는 뜻이다. 용서를 하는데 이유가 필요하지 않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잘못을 했을 때에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을 보며 우리도 무조건적인 용서를 해야 한다.

    2.용서의 순서(마5:23~26)
    [마5:26]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죄의 빚을 한 호리(땡전 한 푼)까지 다 갚고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이 순서이다.
    우리가 사람에게 지은 죄는 그 사람에게 용서를 받는 것이 순서라고 하나님은 말씀하고 계신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것이 중요할 지라도 용서를 받지 않는다면 예배를 드리는 것이 소용이 없다. 또한 진실한 사과가 있다면 진실한 용서가 뒤 따라야 한다. 믿음 안에서 사과 하는 것도 의무지만 용서 하는 것도 의무이다.

    3.용서해야 하는 이유(마18:23~34)
    [엡4:32] “서로가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본문에 비유에 따라 성도들의 죄를 하나님이 용서해주시는 것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아무런 이유도 없이 용서해주셨기 때문에 우리도 이와 같이 하나님을 본받아 대가가 있는 것이 아닌 이유 없는 용서를 해야 한다.

    4.용서하지 않는 것의 결말 (마18:34~35)
    [시109:7] “저가 판단을 받을 때에 죄를 지고 나오게 하시며 그 기도가 죄로 변케 하시며”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고 계속 기도를 하게 된다면 그 기도는 죄가 되며 그 죄로 인해 우리는 한번 예수님을 통해 용서를 받았지만 하나님의 재림의 심판에서는 용서를 받지 못해 지옥에 형벌을 받게 된다.

    과거사 정리 위원회가 일한 것처럼 우리가 과거에 있었던 일에 대하여 진실을 밝히고 화해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방법이 아니라 믿음과 사랑으로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방법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용납 하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을 용납 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 [복음메시지] 복음에 빚진 자 (롬 1:8-15)

    [복음메시지] 복음에 빚진 자 (롬 1:8-15)

    2024년 2월 13일 (화) 저녁예배

    설교제목 : 복음에 빚진 자

    본문말씀 : 로마서 1장 8-15절

    설교자 : 박은진 목자님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딤전 1:13) 바울 사도는 복음 믿는 자들을 핍박하는 자였지만 예수님을 만난 후로 복음에 빚진 자로 변화되었다. 심지어 자신의 생명을 바칠 각오로 복음을 위해 힘썼다.

    복음에 빚진 자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떤 것이 필요할까?

    ◈ 복음에 빚진 자의 삶

    1. 복음이 전파되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8)

    첫째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8)

    (살전 1:8) 복음에는 놀라운 전파력이 있다. 한 사람의 믿음이 전파되어 넓게 확장된다.

    한국 참예수교회가 그 예이다. 일본에서 복음을 들고 온 한 사람의 믿음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전국에 전파되어 현재 한국 참예수교회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처럼 하나의 씨앗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잊지 않고 감사해야 한다.

     

    2. 쉬지 않고 기도를 해야 한다. (9)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9)

    (고전 3:6-7) 믿음을 자라게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이시다.

    (고전 2:1-5) 전도는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다. 온전히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서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고전 2:4-5)

     

    3. 만나도록 노력해야 한다. (10-15)

    어떠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10)

    기도 후에 해야하는 것은 바로 ‘만남’이다. 만남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주신다.

    전도과정에서 만나려고 할 때 항상 무슨 일이 생길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바울 사도도 감옥 중에도 복음을 위해 힘쓰고 소망했다.

    쉬지 않고 기도했다면 만나야 한다. 그 과정에서 다른 누군가가 복음을 받아들일 수도 있다.

    (행 1:8) 땅 끝에 있는 사람들까지 만나고, 복음을 전해야 한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 1:8)

    모든 이들을 구원해주시는 복음의 능력을 믿고, 기도로써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간구하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유튜브 예배링크

  • [복음 메세지]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요 14:27)

    [복음 메세지]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요 14:27)

    [말씀제목]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설교자] 이요셉 목자

    [설교일] 2023218() 안식일 오전 예배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이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꿀벌이 가장 좋아하는 계절은 꽃이 피는 봄입니다. 반대로 꿀벌이 가장 싫어하는 계절은 장마가 있는 여름입니다. 높은 습도와 병, 부족한 먹이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합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내 일에 집중하고 해야 할 일에 힘을 쓰다보면 세상에서 내가 제일 힘든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나만 힘들까요? 모든 사람을 포함하여 심지어 내가 전혀 생각하지 못한 곤충의 세계에서도 스트레스 받으며 사투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일반적으로 보면 그렇습니다. 학업, 취업, 결혼, 경제적 문제 등과 같은 문제로 어려움을 겪습니다. 병원에서도 병명이 없는, 이유가 없는 병이 많이 생겼습니다. 의사들은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성격적으로 보았을 때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17:22]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

    심령의 근심은 스트레스를 말합니다. 스트레스가 많으면 뼈로 마르게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려고 많은 노력을 하며 살아갑니다. 성도들에게 있어서도 마음의 평안함은 매우 중요하고 하나님께서 이것을 원하시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6: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이 평안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을 보면 더욱 분명해 집니다. 바울사도의 서신에서도 성도들을 축복하는 내용을 보면 예외 없이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라는 표현이 빠지지 않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은혜와 평강을 누리는 것 이것이 하나님께서도 원하시는 것이고 신앙 안에서도 참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구하는 평안은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평안입니다. 오늘 본문 내용에는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현재 예수님의 심적 상태가 평안하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평안하다고 말씀하실 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이 임박함을 알고 계셨던 때였습니다.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예수님의 육신적인 입장에서 보면 십자가에 못 박히는 큰 환란이 오고 있음에도 예수님께서는 평안하다,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누리신 마음의 고요함이 우리의 평안과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괴로운 것, 성가신 것이 없다면 평안할 텐데 라고 생각하겠지만 예수님의 평안은 세상의 것과 같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생각해 보면 세상에도 평안이 있다는 뜻입니다. 중요한 것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평안은 어떨까요? 첫째로 세상의 평안은 온전하지 못합니다. 많은 경우에 나의 평안을 이루기 위해서는 타인의 불행을 담보로 합니다. 누군가의 잘못이 아니라 세상이 왜곡되었기 때문에 내가 웃으려면 누군가는 울어야 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이 세상의 만족과 그것을 인해 찾아오는 평안이 그렇게 고급한 것은 아닙니다.

    둘째로 우리가 세상에서 어떤 하나를 얻었다고 평안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은 골고루 갖추어져야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를 얻었다고 하여 전부를 얻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평안하려면 많은 요소가 필요합니다. 비교적 젊은 청년의 시대에는 골고루 갖추어져야 한다는 것을 잘 깨닫지 못합니다. 한 가지만 있으면 될 줄 알고 그것을 위해서 쫓아가는 과정에서 많은 것들을 놓쳐버리는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평안하려면 돈, 건강, 가족, 지식 등등 많은 것들이 고루 있어야 행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이 어떤 하나만 얻었다고 하여 다 얻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무엇을 얻었다 한들 그것이 모든 것은 아닙니다.

    셋째로 세상의 평안은 일시적이고 기쁨과 함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들은 만족을 얻기 위해서 타인과 나를 비교합니다. 사람들과 비교해서 자신이 나은 곳에 있다고 느끼고 만족을 얻고 기쁨을 얻으려고 합니다. 사진을 찍어서 sns에 올리는 것이 이것입니다. 요즘은 sns을 끊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찍어서 올린 것을 볼 때에 불쾌하고 기분이 나쁘고 그것을 보면서 자신이 불행하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보기 전까지는 문제가 없었는데 그것을 보고 기분이 나빠지고 내 인생이 저급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세상에서 사람이 누리는 평안은 온전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성도님께서 세상을 살아가면서 건강하고, 걱정이 없다면 그것은 좋은 것이고 하나님께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평안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것은 좋은 것이고 세상의 것은 다 더러운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떤 평안을 주실까요? 본문에서는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준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돈이나 건강을 직접적으로 주신다는 뜻일까요? 이것은 상황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바뀌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내가 맺는 신앙의 열매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평안에 도달하기 위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화목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평안이 있는 것이 기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 가운데서 태어났고 자라나며 자기의 욕심을 따라 행동합니다. 사람이 태어나면 죄에 물들어 있고 하나님과 불편한 관계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할 수 없는 관계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떨어져 있는 상태는 마치 고아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 없이, 보호하심 없이 사는 것에 큰 문제를 느끼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세상을 고아처럼 살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과 화평해 지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가 이것이 없이는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 인생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죄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나쁘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예수님께서 화목제물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예수님께서 설립하신 세례를 받음으로 하나님과 화목해졌습니다.

     

    [고후 5:20]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이 말씀은 하나님과 화목한 다음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집 안에 있는 사람인데 하나님의 집 안에 있기 때문에 평안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도 속이 상하고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 있는 백성도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평안하셨던 이유는 하나님과 관계가 좋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모든 것을 예수님께서 다 순종하셨고 말씀하신 것을 하고 있기 때문에 평안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자기 임의대로 살아가면 마음이 평안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나면 불안하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내 마음의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좋은 관계에 있는 사람은 비교적 형통하게 살아가나 그 삶속에 풍랑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세상 속에서도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이 확실합니다.

     

    [4:40]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다른 곳으로 가고 있는 와중에 풍랑을 만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때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의 상태가 매우 고요하고 평안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평안할 수 있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실패는 하나님의 실패가 되기 때문에 그런 일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평안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가장 먼저 하나님과 화평해야 합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하나님과 관계가 좋아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하나님을 잘 헤아려야 합니다.

    이렇게 살다 보면 출렁이는 세상 속에서도 우리가 평안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마음이 너그럽고 평안하면 다른 사람에게도 너그럽고 평안하게 대하는 법입니다.

     

    평안에는 순서가 있고 단계가 있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요동쳐도 예수님께서 주시는 이런 평안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도 마음이 요동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어떤 조건과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에도 나이가 들수록 많은 문제들이 다가오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평안을 배워서 이것으로 믿음을 얻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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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음 메세지] 모자란 인생의 구세주 (요 2:1~11)

    [복음 메세지] 모자란 인생의 구세주 (요 2:1~11)

    [말씀제목] 모자란 인생의 구세주

    [설교자] 이요셉 목자

    [설교일] 2022년 7월 1일(금) 안식일 저녁 예배

    [요2:1-11]

    1 사흘 되던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이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2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인에 청함을 받았더니

    3 포도주가 모자란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4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5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6 거기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두 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7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구까지 채우니

    8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9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10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11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첫 번째 행적입니다.성서 지도를 살펴보면 예수님께서는 가나의 혼인 잔치에 참석하기 위하여 걸으신 거리는 대략 50~60KM 라고 합니다. 이정도 거리를 이틀에 걸쳐 걸으려면 군인들이 행군을 하듯 열심히 걸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마음으로 혼인 잔치에 참석 하셨을까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의 삶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한 가정에 관심을 가지시고 그들을 찾아 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가정을 찾았을 때 그 가정의 상황은 어땠을까요?

    [요2:3] 포도주가 모자란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포도주가 모자란지라…’ 이 짧은 말로 그 가정이 처한 위기를 말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포도주는 매우 특별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물이 맑거나 깨끗하지 않아 포도주를 음료로 많이 대용하고 있습니다. 한 랍비는 “포도주가 없으면 기쁨이 없다” 라고까지 표현을 하였습니다. 이렇듯이 만약에 혼인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진다는 것은매우 큰 실례이며 손님에 대한 모독, 주인에게 아주 큰 수치가 됩니다. ‘포도주가 모자란지라’ 이 표현은 인간의 삶에 대해서 단편적으로 이야기 한것으로, 인간의 인생이 어떤것인지 이야기를 하고 있는것입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지으신 인간의 삶은 모든 것이 풍족하였습니다. 하지만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풍요의 시대가 끝나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인간이 살게된 인생은 요한복음 에서는 마치 포도주가 모자란 것 같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생의 본질입니다.

    인생의 본질은 하나님과 단절되었기 때문에 공급이 원활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부족합니다. 부족하기 때문에 경쟁이 생기게 되었고 그로인해 우리는 경쟁속에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포도주가 모자라다는 사실을 받아 들여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부족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여야 합니다.

         

    [눅15:14-17]

    14 다 없이한 후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위 말씀속의 탕자는 자신이 궁핍 하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렇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부족한 것을 모르거나 내가 조금 더 노력하면 다 채울 수 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탕자는 자신이 스스로 부족함을 채울 수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돌이킬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나의 스스로 부족함을 채울 수 없음을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이킬 수 있어야 합니다. 부족함이 있다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부족함을 모르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고 어리석은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하나님을 의지해서 채워야만 합니다.

     여러분들은 부족함이 있을 때 하나님께 어떻게 요청 드립니까? 마리아는 부족함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나아갔습니다.

    [요2:3-5]

    3 포도주가 모자란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4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5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본문 말씀을 보면 마리아는 포도주의 부족함을 가지고 예수님께 간절히 해결을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예수님께 포도주가 없다고만 고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는 어려움에 처한 상황에 대한 무관심을 표현하신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하시는 일에 인간이 관여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는 초월자 이십니다, 만약 어느 한 가정에 어려움이 생겼다면 하나님께서는 그일에 대해 이미 다 아시고 그 가정에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이는 인간의 요청에 따라 하는게 아니라 하나님의 때의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어려움이 있을 때 간절히 기도해야 할 일이 있을 것 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아야 할 일도 있습니다.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맡겨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잘 분별하여 신앙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 해결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부족함을 예수님께 고하였습니다. 성도는 어려움의 때에 간절히 구해야 할 줄도 알아야하고 잠잠히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고 일 하시는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요2:6-10]

    6 거기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두 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7 예수께서 저희에게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구까지 채우니

    8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9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10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예수님께서는 포도주를 채워 주실 때 본래 포도주를 담았던 통이 아니라 유대인의 결례에 사용되는 돌 항아리에 채워주셨습니다, 이것은 손님이 집에 올 때 손 발을 씻는 항아리입니다. 이런 방식을 택한 것 에도 예수님의 뜻이 있었습니다. 먼저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유대인을 어떻게 바라보시는지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계2: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예수님께서는 유대인을 사단의 회라고 표현 하시며 우리와 분리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결례에 사용되는 항아리에 물을 붇고 그것으로 포도주를 만든 것은 유대인의 방식으로는 모자란 인생에서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인간의 삶은 모자란 삶입니다, 인간들은 많은 것이 부족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이고 인정할 때 우리가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우리는 부족함 가운데서 간구 할 수 있어야 하지만 마리아처럼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길줄 알아야 합니다.

    ‘무엇을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이 말은 좋은 방법을 알려주실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어떤 것이라도 받아들이라 라는 뜻입니다. 

     내 인생이 무엇이 부족한지 알고 이것을 간구해야 하는것인지, 잠잠히 신뢰하며 믿고 기다려야 하는지 분별하는 지혜가 있는 성도여러분이 되길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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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부산교회 김은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