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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음 메세지] 듣고 말하는 것은 인격입니다 (삼상 25:2-13, 23-35)

    [복음 메세지] 듣고 말하는 것은 인격입니다 (삼상 25:2-13, 23-35)

    [말씀 제목]  듣고 말하는 것은 인격입니다 (삼상 25:2-13, 23-35)

    [설교자]  김세한 목자

    [설교일]  2024년 2월 3일

    2024년 대만 방문 기간 중 낙야 교회에 방문했을 때의 일. 지난 2017년에 수원교회 성도님들과 방문했었는데 그 때도 건축을 위해서 대지를 마련하고 모금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전히 건물이 세워지지는 않았고 모금 중에 있었다. 속으로 ‘7백 평 넘는 땅에 건축이란 시골교회의 능력으로 버거운 일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담임 목자인 백목자가 연합 교류 집회를 가질 때 교회 소개 시간 중 조감도 영상을 보여주며 말했다 “낙야교회는 교회를 건축하려고 합니다. 방문단 여러분도 헌금하세요. 한국 돈도 받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간접적으로 조심스럽게 헌금을 권고하는 것이 아니라 직설적이고 노골적인 헌금 요청에 폭소를 터뜨렸다. 이윽고 청주교회를 소개하는 차례가 되었다.  “청주교회는 회당 수용이 93석입니다. 그런데 지난 주에는 108명이 출석했습니다. 회당이 비좁습니다. 그래서 새롭게 건축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모금해야 합니다. 대만 돈도 받습니다.” 우리는 다시 폭소를 터뜨렸다. 전혀 모르는 남이 헌금하라는 말을 하면 매우 무례하고 상식적이지 않다고 여겼을 텐데 주 안에서 한 몸, 한 형제 자매라는 의식 때문에 오히려 박장대소가 나왔다. 우리가 주 안에서 한 성령을 받은 가족이라는 의식이 발견되는 순간이었다.

    인간관계에서 말하고 듣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 말 잘해서 생명을 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말 잘못해서 생명이 위경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 그런가 하면 들어야 할 말을 오해하는 경우도 있고 듣지 않아야 하는 말을 들어서 마음에 상처를 남기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말하는 사람의 의도대로 잘 듣는 것이 중요하고 또 잘 말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런데 이것이 쉽지 않다. 왜냐하면 듣고 말하는 일은 마음 속에 인격이 결부된 일이기 때문이다. 인격이란 것이 하루 아침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듣는 능력이나 말하는 능력이 한 순간에 변화하지 못한다. 오랜 세월동안 신앙 안에서 성숙한 인격은 남의 말을 듣되 오해하지 않고 듣고 상대의 선의대로 듣는다. 반면 인격이 성숙하지 못하면 좋은 뜻으로 한 말도 악의적으로 받아들인다. 성숙한 인격은 말을 건네되 상대가 오해하지 않도록 배려하는 화법을 구사한다. 반면 성숙하지 않은 인격은 거칠게 말해서 좋은 말도 오해하게 만들고 부정적 감정을 가지게 말한다. 그래서 잘 듣고 잘 말하기 위해서 신앙의 좋은 인격을 닦는 일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잠 12:13) 『악인은 입술의 허물로 인하여 그물에 걸려도 의인은 환난에서 벗어나느니라』

    우리는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들으며 살고 있는가? 성경의 가르침대로 잘 듣고 잘 말해서 우리 속사람이 갖춘 인격을 나타내고 있는가? 오늘은 다윗과 관련된 한 기사 속에 등장하는 세 인물을 통해 함께 생각하고 은혜를 나누는 시간을 가지고자 한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다윗이 동굴에서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기회에도 그의 겉 옷자락만 베고 살려준 기사를 살펴보았다. 사울왕은 눈물을 흘리며 다윗의 의로움을 인정하고 자신의 잘못을 시인했다. 그러나 사실 완전히 회개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다윗이 사울 왕과 함께 왕궁으로 돌아가지는 않았고 계속 방랑하는 생활을 계속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울왕이 완전히 변화한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사울과 헤어지고 다시 길을 떠난 다윗 일행은 어느 날 갈멜이란 곳에 머물게 되었다. 갈멜은 아시다시피 열왕국 시대에 이르러 엘리야 선지자가 우상의 선지자들과 상대하게 될 바로 그 장소였다. 그런데 그곳에 나발이라는 이름의 목축인이 있었다. 그는 수천마리의 양과 염소를 치는 부자였다. 그 시대는 치안이 미흡한 지라 대규모 목축업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 어려움이란 도적들이 나타나 가축들을 약탈하고 심지어 목동들까지 죽이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런 가운데 다윗과 그의 수하에 육백 명이 나발의 양떼 곁에 머물러 주는 것은 그의 재산을 보호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당시 목축업에 종사하는 자들에게는 양털을 깎는 시기는 농부에게 추수하는 시기와 같았다. 그래서 이 시기에 목자는 이웃과 함께 음식을 나누며 수확의 기쁨을 누렸다. 바로 양털 깍는 그 잔치의 시기에 일이다. 다윗은 나발에게 소년들을 보내어 축복하면서 잔치의 음식을 좀 나누어 줄 것을 요청한다. 그런데 나발은 이를 거절하고 오히려 다윗을 향한 심한 모욕과 경멸의 말을 전한다. 이에 다윗은 분노하게 되고 4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나발과 그 가족들을 몰살시키고자 출정한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나발의 아내 ‘아비가엘’이란 여인이 다윗의 소년들에게 음식을 건네고 다윗 앞에 엎드려 자비를 구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의 지혜로운 말로 다윗은 칼을 거두고 되돌아갔다는 이야기이다.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세 인물을 주목해 볼 수 있다. 바로 나발과 아비가일과 다윗이다. 이 세 인물의 말하고 듣고 칼을 거두는 모습을 통해 우리는 소중한 신앙의 교훈을 받게 된다. 그러면 그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인가?

    첫째, 나발과 같은 우매한 말을 삼가라.

    (삼상 25:6) 『이같이 그 부하게 사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평강하라 네 집도 평강하라 네 소유의 모든 것도 평강하라』

    다윗은 소년 열 명을 나발에게 보내면서 잔치의 음식을 좀 나누어 줄 것을 요구했는데 이것은 이스라엘 풍습으로나, 율법의 가르침으로나 매우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풍습이었다. 6절에서처럼 다윗은 ‘너는 네 집도 네 소유의 모든 것도 평강하라.’는 축복의 말을 건넨다. 다윗이 매우 정중하고 예의를 갖추어 요청했음을 알 수 있다. 또 8절에 ‘네 아들 다윗에게 주기를 원하노라’고 했다. 다윗이 나발에게 아들 뻘이란 뜻이 아니라 그만큼 자기를 낮춰 예의를 갖춘 표현이다. 이렇듯 정중한 인사와 겸손한 태도로 자선과 호의를 구했건만 나발의 태도는 어떠했는가?

    (삼상 25:10-11) 『[10] 나발이 다윗의 사환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뇨 근일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11] 내가 어찌 내 떡과 물과 내 양털 깎는 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가져 어디로서인지 알지도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 한지라』

    율법에는 나그네를 대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기록되어 있다. 이를 생각한다면 다윗의 요청을 들어주는 것이 마땅했다. 더욱이 곁에서 경비원처럼 양떼를 지켜준 노고를 생각한다면 감사한 마음으로 들어주는 것이 마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발은 다윗에게 면박을 주는 말과 더불어 음식을 건네주기를 거절한다. 오해하지 않아야 할 것은 다윗이 무슨 조직 폭력의 보스같이 위협하고 강압으로 요구한 것이 아니다. 정부가 대기업을 압박하면서 정치헌금 강요하듯이 요구한 것이 아니다. 지극히 상식적인 호의를 요구했던 것이다. 그런데 나발의 이러한 발언은 웃는 낮에 침뱉는 행동이었던 것이다.

    나발은 ‘다윗이 누구냐?’라고 말했지만 사실 다윗을 모를 리 없었다. 골리앗을 물리친 용사로 이방인들에게까지 명성이 높았고 왕의 사위가 된 자요, 사울 밑에서 천부장직을 수행한 인물이니 잘 아는 인물이다. 다윗이 분개한 이유는 음식을 주지 않아서가 아니다. 나발이 ‘주인에게 반역하는 못된 종’이라고 모욕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나발은 정치적으로 사울을 추종하는 사람 중에 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옳고 그름을 떠나 사울의 편에서 다윗을 경멸했던 것이다. 그러나 진실을 말하자면 사울을 반역해서 떠난 것이 아니라 사울이 자신을 무고하게 죽이려고 하니까 생존을 위해서 왕의 곁을 떠난 것이었다. 사실 나발은 사실을 왜곡하는 거짓의 입술을 놀렸던 것이다. 사람은 언제 가장 분노하는지 아는가? 자기의 진실이 거짓으로 오해받을 때가 가장 분노하는 순간 중 하나이다. 결국 나발의 이 망언은 다윗의 노를 격동시켰고 목숨이 위태롭게 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잠 12:18) 『혹은 칼로 찌름 같이 함부로 말하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 같으니라』

    오늘날 교회에서 일어나는 불미스러운 일의 대부분은 잘못된 언변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눅 6:45)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고 했다. ‘말’이라는 단어는 ‘마음의 알갱이’라는 뜻이다. 즉 말은 마음에 쌓인 것을 밖으로 드러나는 도구라는 것이다. 마음에 좋은 감정, 좋은 생각, 좋은 뜻을 채우면 좋은 말이 나오고, 나쁜 감정, 나쁜 생각, 나쁜 뜻이 채워지면 나쁜 말이 나온다. 성숙한 인격이란 바로 이것을 잘 통제해서 때로는 삼가고 때로는 말하는 것을 잘 분별하는 사람이다.

    부디 나발과 같은 우매한 입술에서 벗어나는 성도님들이 되자.

    (잠 13:3) 『입을 지키는 자는 그 생명을 보전하나 입술을 크게 벌리는 자에게는 멸망이 오느니라』

    둘째, 아비가일과 같은 지혜로운 입술의 사람이 되라.

    다윗은 나발의 모욕에 참지 못하고 그와 그 일가를 죽이겠다고 칼을 빼어들었다. 그런데 이렇게 격노한 다윗의 마음을 누그러뜨린 한 여인이 있었는데 바로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이었다. 이 여인의 언행은 도대체 어떠했기에 다윗의 분노를 잠재울 수 있었는가?그녀는 상황의 심각성을 감지하고 급하게 종들을 시켜 양식을 준비하게 했다. 그리고 모욕을 말을 건네받은 열 명의 소년들에게 양식을 건네 주었다. 그리고 그 후에 이어진 그녀의 일변은 무엇이었는가?(삼상 25:28-31) 에 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아비가일이 이야기한 내용의 핵심은 이것이다. “다윗 당신은 지금껏 악을 행한 적이 없습니다. 당신의 생명은 하나님이 생명 싸개에 싸서 보호하십니다. 당신은 장차 이스라엘의 임금이 될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선한 싸움을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오늘 무죄한 피를 흘리면 장래에 왕이 되었을 경우 괴로워하고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라는 뜻이다. 아비가일의 말을 통해 발견되는 그녀의 지혜는 이런 것이다. 그녀는 목숨이 경각에 달린 현재의 상황을 잘 알았다. 또 다윗의 의로움, 정직함에 대한 분별력이 있었다. 또 하나님이 그의 생명을 섬세히 보호하고 계신다는 영적인 혜안도 있었다. 게다가 다윗의 미래를 예측하는 안목도 있었다. 그리고 만약 다윗이 칼로 살육하는 실수를 저지르면 그 일이 미래에 어떤 악영향을 가져올지에 대해서 내다볼 줄 알았다. 아비가일은 이런 모든 미래사를 꿰뚫어 보고 다윗에게 그것들을 말했던 것이다.

    (잠 25:11)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니라』

    우리는 인간관계 속에서 때로 대화의 핵심을 벗어나서 헤매는 경우가 있다. 상대의 문제점과 본질을 헤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니 상대의 마음을 알 수 없고 기울여도 깨닫는 지혜가 없으니 상황 전달이 안된다. 그래서 대화는 겉돌고 핵심을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면 오해하게 되고 마음을 터놓을 수 없게 된다. 대화에는 이해하려는 마음, 배려하는 마음이 기초가 되어야 한다. 만약 그것이 없으면 감정에 이끌려 말하게 되고 무례하게 말하게 되고 상대에게 상처를 주게 된다. 아비가일을 보라. 다윗의 마음을 정확하게 헤아리고 상황도 종합적으로 파악하고 미래사도 읽어낼 줄 아니까 그런 지혜로운 말이 나오고 그 말로 인해 치켜올린 다윗의 칼이 점점 내려졌다. 아비가일의 지혜로운 혀가 다윗의 뻣뻣한 감정을 꺾었던 것이다.

    (잠 25:15) 『오래 참으면 관원이 그 말을 용납하나니 부드러운 혀는 뼈를 꺾느니라』

    오늘날 우리도 사랑과 배려가 녹아있는 말 한마디가 사람의 생명까지 살릴 수 있음을 알아야겠다. 그래서 생각하고 말하고, 배려해서 말하고, 부드럽게 말하고, 진실을 말하는 것을 연습하시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란다.

    셋째, 다윗과 같은 열린 귀를 가진 사람이 되라.

    다윗이 나발에 대해 분개한 모습은 사울을 대할 때와는 대조적이다. 다윗은 사울 왕에게 직접 보복하지 않았다. 하나님께 심판을 맡겼다. 그런데 오늘은 나발의 모욕을 참지 못하고 자제력을 잃었다. 그래서 즉시 칼을 차고 벌떡 일어선다. 만약 다윗이 사울 왕과의 관계에서 잘 인내해 왔는데 나발이라는 인물을 죽인다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 수 있는 순간이다. 다윗을 보건대 인간은 이처럼 연약한 존재이다. 만약 다윗이 분노의 감정에만 사로잡혀서 아비가일의 말에 “하찮은 일개 여인이 누구 앞에서 감히 입을 놀리느냐?”고 듣기를 거절했다면 나발과 그 일가는 몰살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에게는 타인의 말을 들을 줄 아는 귀가 있었다.

    다윗은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있음을 알았다. 그런데 아비가일이 그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 싸움이 의로움의 기초가 아니라 죄악의 기초 위에 세워지면 그 나라가 길지 못함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아비가일이 그것을 말한다. 다윗은 칼과 피로 세워지지 않고 하나님의 공의와 뜻으로 나라를 세워야할 사명이 있었다. 그래서 온 백성이 고개를 끄덕이고 기뻐하고 환영하는 가운데 등극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런데 아비가일이 그것을 말한다. 우리는 여기서 아비가일의 지혜로운 발언에 호응하고 받아들일 줄 아는 다윗의 인격을 발견한다. 아무리 분노의 감정이 일어나도 이치에 맞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분노를 누그러 뜨리고 자기 마음을 다스릴 줄 알았다. 마음을 추스린 다윗이 이렇게 말한다.

    (삼상 25:32-33) 『[32] 다윗이 아비가일에게 이르되 오늘날 너를 보내어 나를 영접케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33] 또 네 지혜를 칭찬할지며 또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오늘날 내가 피를 흘릴 것과 친히 보수하는 것을 네가 막았느니라』

    다윗은 이 여인을 통해 위기를 모면하게 해준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했다. 이렇게 잘 말하는 지혜로운 여인 아비가일도 있었지만 그 말에 담긴 진실과 혜안을 분별하는 다윗의 귀가 있었기에 그는 분노의 감정으로 일가를 몰살시키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게 된다.

    (잠 29:11) 『어리석은 자는 그 노를 다 드러내어도 지혜로운 자는 그 노를 억제하느니라』

    강경화 장관 이야기. 문재인 대통령 시절에 외교부 장관을 역임한 퍼스트 레이디. 김대중 대통령 집권기에도 3년 간 그분의 곁에서 보좌한 경력도 있었다. 그녀는 코비드 19 팬데믹 상황에서 한국의 방역체계를 외국에 홍보해서 국위선양하는데 매우 큰 역할을 했다. 앵커들의 까다로운 질문에도 투명하고 정직하고 정확한 발언으로 한국의 위상을 높인 바로 유명하다. 독일의 앵커가 ‘한국은 봉쇄령으로 인해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아니냐?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것이 아니냐?는 집요하고 까다로운 질문도 모두 잘 설명했다. 인텨뷰 내용에는 구구절절히 그녀의 겸손함이 한국 사람의 겸손함을 대변했다. 그래서 그분의 활약으로 한국의 명예가 매우 드높아지는 계기가 되었다. 현재 국제 사회에서 한국의 높은 위상은 단지 한류의 가수나 탤런트 때문 뿐만 아니라 이런 외교부 장관의 노고와 활약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다른 성도와의 관계에서 혹은 이 세상의 불신자와의 인간관계에서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들으며 살고 있는가? 나발과 같이 우매한 말로 문제를 일으키고 상처를 주는 것이 아니라 아비가일과 같이 지혜의 말로 죄의 싹은 잘라내고 의의 열매가 맺히게 만드는 길을 가시기 바란다. 다윗처럼 타인의 입술을 통해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자가 되자. 이런 아름다운 인격, 이런 향기로운 입술을 가지는 참교회의 성도들이 다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한다.

     

    https://youtu.be/mtIwD-qjRZ0?si=HOvdPGM8-U9QzQXv

     

  • [복음 메세지] 살아계시는 하나님(삼상5:1-12)

    [복음 메세지] 살아계시는 하나님(삼상5:1-12)

    [말씀 제목] 살아계시는 하나님 (삼상 5:1-12)

    [설교자] 김세한 목자

    [설교일] 2023년 8월 5일(토) 안식일 예배

    야구 선수들이 타자 역할을 할 때 경계하고 무서워하는 현상이 있다. 그것은 배트로 공을 맞출 때 ‘손이 울리는 현상’이다. 타자가 때 야구 방망이를 꽉 움켜 잡고 휘둘러 맞추어야 하는데 좀 느슨하게 잡은 채 공을 맞추게 되면 손목이 쩌릿하고 울리게 된다. 그 고통이 얼마나 큰지 심한 경우는 한 시즌 내내 출전을 못하는 심각한 상태에 이른다. 그래서 코치들은 타 자에게 “배트를 아주 꽉 잡든지 아니면 맞는 순간 배트를 놓아 버려라!”라고 주문하기도 한다. 꽉 잡으려면 잡고 놓으려면 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도 그렇다. 예수님을 믿으려면 확실히 붙들고 따라야지 어정쩡하게 오히려 좋지 않는 상황에 빠질 수 있다.

     

    성도는 이 세상에 공의가 시행되기를 기대한다. 그래서 의인이 잘되고 악인이 망해야 마땅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때로는 의인이 망하고 악인이 흥하는 것 같은 상황을 만난다. 그러면 우리는 분노하고 절망하게 된다. 또 그런 감정이 깊어지면 과연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가? 하는 의심에 빠지고 그런 상태가 오래되면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기에 이르는 경우도 있다. 그러면 우리는 그런 고민의 상황에 봉착 할 때 어떤 생각과 태도를 가지는 것이 신앙인다운 것일까? 일찍이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의 애가에서 남유다가 바벨론에 멸망하는 현장을 목격하고 절망했던 상황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애 3:26)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바벨론에 나라가 망하고 성전이 무너져 내린 폐허 앞에서 여호와의 구원에 대한 소망을 바라라고 한다. 또 잠잠히 기다리며 인내하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님 의 살아계심을 의심하는 초보 신앙에서 벗어나 성숙한 신앙의 자리에 도달할 수 있을까? 어떻게 상황의 좋고 나쁨에 흔들리지 않고 평강의 마음을 지키며 인내할 수 있을까? 오늘은 블레셋의 진영에서 하나님의 언약궤에 나타난 재앙의 사건들을 통해 오늘날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고 은혜를 나누는 시간을 가지고자 한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하나님의 언약궤가 적국에 넘어갔다. 블레셋은 빼앗은 언약궤를 아스돗이라는 곳에 있는 다곤 신전 안에 놓아둔다. 고대 시대에 두 나라가 전쟁할 경우 그것은 곧 한 나라의 신이 다른 나라의 신에게 패배한 것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블레셋이 이기고 이스라엘이 졌으니까 다곤 신이 여호와를 이긴 것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그래서 블레셋이 언약궤를 다곤 신전 안에 두었다는 것은 다소 의도적이다. 곧 다곤 신 앞에 이스라엘의 신을 무릎 꿇게하는 굴욕의 의미가 있었다. 그런데 언약궤를 신전에 둔 이후 이상한 사건들이 블레셋 땅 에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언약궤를 다곤 신전에 넣어 둔 다음 날 살펴보니까 신전의 우상이 언약궤 앞에 절하듯이 거꾸러져 있더라는 것이다. 블레셋 사람들이 다시 다곤 신 우상을 일으켜 세웠다. 또 하루가 지나고 다음 날 아침 비슷한 상황이 벌어진다. 언약궤 앞에 다곤 신이 넘어져 있는데 이번에는 아예 머리와 손목까지 끊어져 땅에 나뒹굴고 있었다. 게다가 이상한 일은 다곤 신전에서만 벌어지고 있지 않았다. 언약궤가 있는 아스돗이란 성읍에 갑자기 독종이 발생하더니 많은 사람이 죽고 아예 도시가 멸망할 지경에 이른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성읍 사람들은 언약궤를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궤를 가드라는 곳으로 옮겨간다. 그런데 가드에서도 역시 독종이 발생해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다시 언약궤를 가드에서 에그론으로 옮기고자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에그론 사람들이 이를 반대하고 나섰다. 언약궤가 옮겨지는 곳마다 재앙이 임한다는 소문이 돌았으니 반대하는 것이 당연했다.

    우리는 블레셋에 임한 재앙의 사건들을 접하면서 몇 가지 의문을 가지게 된다. 하나님은 왜 언약궤가 빼앗기기 전 이런 기적을 통해 블레셋을 물리치지 않으시고 빼앗긴 후에야 재앙의 기적을 나타내셨는가 하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블레셋의 이방 성읍에서 재앙을 주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냐 하는 점이다. 본문을 통해 오늘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이것이다.

    • 첫째, 우연을 믿지 말고 하나님의 섭리를 믿어라.

    (삼상 5:3-4) 『[3] 아스돗 사람이 이튿날 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그 얼굴이 땅에 닿았는 지라 그들이 다곤을 일으켜 다시 그 자리에 세웠더니 [4] 그 이튿날 아침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얼굴이 땅에 닿았고 그 머리와 두 손목은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다곤의 몸둥이만 남았더라』

    다곤 신전 안에 다곤의 머리와 손목이 끊어져 나뒹군 일, 그리고 아스돗, 가드의 여러 성읍들로 옮겼더니 옮겨진 성읍마다 독종의 재앙이 임해서 많은 사람들이 죽은 일, 이것은 우연히 일어난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역사인가? 이에 대해서 블레셋 사람들은 이렇게 의논했다.

    (삼상 6:9) 『보아서 궤가 그 본 지경 길로 올라가서 벧세메스로 가면 이 큰 재앙은 그가 우리에게 내린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를 친 것이 그 손이 아니요 우연히 만난 것인 줄 알리라』

    언약궤를 실은 수레의 소가 만약 벧세메스로 향하면 궤가 내린 재앙이지만 만약 다른 방향으로 가면 우연으로 간주하겠다는 것이 블레셋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이들의 태도는 전형적인 불신자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다곤 신상이 두 번이나 넘어지는 경험을 해도 독종으로 여러 도시에 반복해서 재앙이 임해도 그들은 여전히 우연이라고 믿고 싶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존재를 애써 부인하고 싶었다. 이처럼 세상의 불신자들은 자신에게 임한 곤란한 일들이 우연이라고 믿고자 한다.

    신앙인과 불신자의 두 세계관이 있다. 전자는 창조론이고 후 자는 진화론이다. 창조론의 핵심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기에 세상의 모든 것이 가치가 있고 목적이 있다 는 것이다. 또 그 만물에 하나님이 여전히 섭리하신다는 것이다. 반면 진화론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세상이 그저 우연히 생겨났기에 자연 만물에는 특별히 가치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존재의 목적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창조론을 믿는 신앙이라면 진실을 분별해야 한다.

    가끔 창조론을 믿는다고 하면서 우연을 믿는 사람처럼 행동하면 안된다. 내가 당한 행복과 불행에 대해서 우연으로 여기면 안된다. 만약 우연으로 여기면 그 사람은 자신이 만난 상황을 하나님의 메시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고 하나님의 축복에도 감사하지 못하게 된다. 모든 것을 우연으로 여기는데 감사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자기 잘못을 돌아보고 고치려는 노력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오해하지 말라. 길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때 항상 죄라는 원인으로 연결 지으라는 뜻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불행에 대해 함부로 판단하고 정죄하라는 뜻도 아니다. 다만 내가 만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삼하 6:7)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의 잘못함을 인하여 진노하사 저를 그곳에서 치시니 저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다윗을 보라. 그는 상황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대해 민감했다. 자신의 취임식 때 언약궤를 모셔와 명실상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왕으로 추대 받고자 했다. 그런데 웃사란 신하 가 율법에 어긋나게 몰고 오더니 하나님이 그를 죽이셨다. 취임식에 사람이 죽었으니 얼마나 불미스러운가? 그러나 다윗은 무리하게 언약궤 모셔 오는 것을 강행하지 않았다. 오벧에돔의 집에 궤를 놓아두게 하고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때를 기다렸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경외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윗의 이러한 낮아지는 태도가 바로 믿음이요 겸손이다.

    바울 사도도 상황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민감했다.

    (행 16:10)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 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 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하나님의 음성이 뚜렷하게 임하기도 하지만 민감하게 분별해야 할 만큼 모호한 경우도 있다. 마게도냐 선교 전의 상황이 그랬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이 환상의 의미를 분별했고 판단대로 행동했다. 모호한 하나님의 음성조차 바울 사도도 민감하게 분별했다. 그 분별이 있었기 때문에 빌립보 데살로니가 등 유럽 교회를 세우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처럼 좋은 신앙인들의 공통점이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의 메시지에 민감하다는 점이다. 오늘날 성도도 그러해야 한다. 하나님이 채찍을 대실 때 나의 허물을 돌아보고 그분의 뜻을 찾아야 한다. 또 하나님이 복으로 채워주실 때 그분의 손길을 찬양하고 감사해야 한다. 신앙인에게 우연은 없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알고 경외할 줄 아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자.

    (잠 14:16) 『지혜로운 자는 두려워하여 악을 떠나나 어리석은 자는 방자하여 스스로 믿느니라』

    • 둘째, 인간은 망해도 하나님은 망하시지 않는다.

    (삼상 5:6-7) 『[6] 여호와의 손이 아스돗 사람에게 엄중히 더 하사 독종의 재앙으로 아스돗과 그 지경을 쳐서 망하게 하니 [7] 아스돗 사람들이 이를 보고 가로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와 함께 있게 못할지라 그 손이 우리와 우리 신 다곤을 친다 하고』

    이스라엘이 블레셋에 패했지만 하나님은 블레셋의 땅에서 당신의 살아계심을 나타내셨다. 언약궤가 있는 블레셋 성읍들에 여러 재앙을 내리셨는데 그 재앙들이 나라가 망할 정도로 심 각했다.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먼발치에서 이 뉴스를 접했을 것이다. 이 뉴스를 통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하시려는 음성은 분명했다. “이스라엘아! 내가 무능해서 너희가 전쟁에서 패하고 궤를 빼앗긴 것이 아니라 바로 너희 범죄 때문에 내가 너희를 떠난 것이다. 나는 여전히 이렇게 살아 있다.” 이처럼 여호와 하나님은 결코 패하지도 망하지도 않는다. 잠시 이스라엘을 떠나셨던 것 뿐이다.

    (시 78:58-60) 『[58] 자기 산당으로 그 노를 격동하며 저희 조각한 우상으로 그를 진노케 하였으매 [59] 하나님이 들으시고 분내어 이스라엘을 크게 미워하사 [60] 실로의 성막 곧 인 간에 세우신 장막을 떠나시고』

    불신자들은 성도들이 환난과 고난이 있을 때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의심한다. 성도가 실패하면 하나님이 실패한 것처럼 여긴다. 성도가 망하면 하나님이 망한 것처럼 여긴다. 그러나 성도는 그렇게 생각하면 안된다. 사람은 죽거나 망하거나 실패할지라도 하나님은 죽거나 망하거나 실패하지 않으신다. 다만 하나님이 연단의 목적으로 경외함을 회복케 하시려고 성도들에게 시련을 주시는 경우가 있다. 따라서 우리는 절망을 과장하거나 확대 해석하면 안된다.

    엘리야는 바알과 아스다롯 우상 숭배자 팔백 오십명과 대결해서 승리했다. 그런데 백성들은 여호와께 돌아오지 않았다. 여전히 이세벨을 살기 등등하게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그러니 엘리야는 얼마나 놀라고 절망했을까? 결국 이세벨을 피해서 도망간 엘리야는 하나님께 자신을 죽여달라고 요청했다. 이제 나만 남았는데 내가 살아서 뭐하냐고. 거짓 선지자들과의 대결에서 승리했어도 아무 소용이 없다고. 이제 다 끝났다고.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왕상 19:18)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인을 남기 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성도가 분별이 없어서 불신에 빠지면 함부로 절망과 멸망을 선언한다. 그런 마음에는 염려와 불안만 있고 사명과 소망도 사라지게 된다. 엘리야처럼 말이다.

    블레셋에 빼앗겼던 언약궤는 오래지 않아 이스라엘의 품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처럼 하나님은 결코 망하지 않는다. 환난의 처지에 있는 우리 눈에만 그렇게 보일 뿐이다. 부디 영적인 눈을 뜨고 절망을 딛고 일어서시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자.

    (시 37:17) 『악인의 팔은 부러지나 의인은 여호와께서 붙드시는도다』

    • 셋째,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인정하라.

    (삼상 5:11-12) 『[11] 이에 보내어 블레셋 모든 방백을 모으고 가로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어 본처로 돌아가게 하고 우리와 우리 백성 죽임을 면케 하자 하니 이는 온 성이 사망의 환난을 당함이라 거기서 하나님의 손이 엄중하시므로 [12] 죽지 아니한 사람들은 독종으로 치심을 받아 성읍의 부르짖음 이 하늘에 사무쳤더라』

    블레셋의 땅에 임한 재앙들이 얼마나 치명적이었던지 ‘부르짖음이 하늘에 사무쳤다’고 기록했다. 마치 아이티에 일어났던 지진처럼, 일본 후쿠시마 원전 폭발 사고처럼, 수마트라 섬에 임했던 해일처럼, 그 피해는 크고 치명적이었다. 재앙을 면하고자 언약궤를 아스돗에서 ‘가드’로 다시 가드에서 ‘에그론’으로 보내지만 속수무책이었다. 결국 언약궤가 ‘에그론’에 이르렀을 때 일종의 님비 현상이 발생했다.

    님비현상(not in my back yard)이란 핵발전소 같은 위험시설, 쓰레기장 화장터 같은 혐오시설이 자기 거주지에 들어오게 될 때 지역 주민들이 거부하는 사회적 현상을 일컫는다.

    언약궤가 가는 곳마다 파괴와 질병과 사망의 불미스런 일이 일어나니 에그론 사람이 바보가 아닌 그 궤를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이처럼 하나님이 악인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방법은 바로 재앙과 저주와 심판을 통해서이다. 반면 선민에게 하나님이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방법은 긍휼과 자비와 사랑을 베푸시는 일을 통해서이다.

    오늘날 나는 어떤 신분의 사람인가? 하나님의 백성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죽으신 분으로 여겨서는 안된다. 나는 죽어도 하나님은 죽지 않으신다. 인간은 실패해도 하나님은 실패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의지할 때 실패하지 않는다. 망하지 않는다. 언약궤가 다시 돌아왔듯이 하나님이 다시 돌아오신다. 이것을 믿고 소망을 가지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자.

    (시 37:9-10) 『[9]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 [10] 잠시 후에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하나님은 엘리야 시대에 다윗의 시대에 바울의 시대에 성경의 역사 속에서 살아계셨다. 그리고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살아계신다. 그 동일한 하나님이 오늘 내 삶에도 동행하신다. 내가 만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발견하시고 분별하시고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간증하시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