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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음 메세지] 극단의 결과를 가져온 불의의 고리들(삿 20:1-23)

    [말씀 제목] 극단의 결과를 가져온 불의의 고리들(삿 20:1-23)

    [설교자] 김세한 목자

    [설교일] 2023년 1월 21일(토) 안식일 예배

    1787년 에드워드라는 사람이 쓴 ‘로마 제국의 몰락’이라는 책에는 로마 제국 멸망의 이유에 대해 다섯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멸망의 이유 첫째, 이혼의 급속한 증가로 가정이 파괴된 점, 둘째, 사람들이 스포츠와 매춘 등 쾌락주의에 빠져든 점. 셋째, 세금은 점점 높아진 반면 지도자들은 시민들에게 공짜 빵과 서커스를 제공하는 포퓰리즘에 집중한 점. 넷째는 외적의 침입에 대비해 지나치게 군비를 확장한 점. 다섯째 종교의 순수성이 무너져 시민들이 건전한 정신으로 살아가도록 인도하지 못한 점 등이다.

    로마 제국의 멸망의 각각의 원인을 보면 대체 이런 정도 이유로 멸망까지 할 수 있나 싶게 대수롭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각각의 원인들이 합해지고 증폭되니까 예상치 못한 심각한 결과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2008년 금융 위기도 그렇다. 여러 계층의 작은 부정, 부패가 합해져 예기치 못한 심각한 결과에 도달했다. 학자들의 그릇된 경제 이론, 금융기관에서 남발한 부실 채권, 신용평가 기관의 부정직한 평가, 일반 대중들의 탐욕이 한 데 어울어지니까 금융 위기라는 암덩어리로 발병했던 것이다. 개인의 건강도 그렇다. 누구나 한 가지 요소로 건강을 잃지는 않는다. 수면 시간 부족, 영양 섭취의 불균형, 과도한 노동과 스트레스, 건강을 해치는 음주와 흡연, 이런 모든 악습관이 합해져 종합되니까 암같은 심각한 질병이 발병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은 작은 것이 작은 것이 아니다. 영육 간의 독소는 작은 씨앗이 자랄 때 제거해 주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전 10:1) 『죽은 파리가 향기름으로 악취가 나게 하는 것 같이 적은 우매가 지혜와 존귀로 패하게 하느니라』

    우리는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어우러져 살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 생활하느냐가 나 혼자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전체 사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특히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의 모임, 교회 공동체도 마찬가지이다. 성도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살아간다. 그 의미는 나 한사람의 신앙과 믿음이 내 안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한 분의 성도가 자리를 비우면 허전하다. 그분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으면 든든하다. 이런 사실에서 우리는 이미 하나의 공동체임을 증거한다.

    우리는 사회 속에서건 교회 안에서건 내가 속한 공동체 속에서 어떤 의식과 신앙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가? 어떤 의식과 신앙을 가지고 살 때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오늘은 레위인의 첩 사건이 불씨가 되어 베냐민 지파의 멸절하게 된 사건을 살펴보고 이런 문제를 생각하고 은혜를 나누는 시간을 가지고자 한다.

    레위인의 첩이 베냐민 지파 기브아에 속한 비류들에게 욕보임을 당하고 죽는 불행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피해자인 레위인은 마치 짐승의 제물을 각 뜨는 것처럼 여인의 시신을 12조각으로 쪼개어 이스라엘 12지파에게 보낸다. 이스라엘 12지파는 그것을 받고는 이 엽기적인 사건에 대해 경악한다. 그리고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이스라엘 최북단에서 최남단까지 모든 지파가 미스바에 모이게 된다. 그렇게 모여든 지파들 가운데 칼을 빼들고 전쟁하는 정병이 사십 만이나 되었다. 이 모인 규모로 봐서 이것이 이스라엘에 얼마나 큰 충격을 주는 사건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레위인은 그렇게 모인 백성의 장로들에게 그간의 자초지종을 설명한다. 레위인의 설명을 들은 장로들은 베냐민 지파에게 이런 일을 행한 자들을 처벌하겠으니 범죄자들을 내놓으라고 요구한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베냐민 지파는 이 요구에 대해 불응한다. 결국 이스라엘 전체 지파 연합군과 베냐민 지파 사이에 전쟁이 일어난다. 동족 간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일어난 결과는 어찌되었는가? 베냐민 지파의 장정이 거의 몰살하게 되는 상황에 가서야 전쟁이 끝나게 된다. 그리고 모든 사건의 끝에 그 원인에 대해서는 밝히고 있다.

    (삿 21: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참고. 삿 17:6, 삿 18:1 삿 19:1

    동족끼리 칼을 겨누고 베냐민 지파가 멸절당하기까지 죽이고 죽임당한 이 불행한 사건의 원인에 대해서 성경은 근본 원인을 진단하고 있다. 그 원인은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 이다.

    그런데 근본 원인은 그렇다 치고 우리는 이 불행한 결과에 이르기까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 불의의 고리들을 발견한다. 그 가운데 하나만 끊어져도 이런 자리에 도달하지 않았을 텐데 계속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결되다 보니 오늘의 극단적 결과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그 고리 중에 첫 번째, 만약 레위인이 첩을 취하지 않았다면 이런 불상사는 없었을 것이다. 레위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자기의 정욕에 끌려 첩을 취하는 악행이 불씨가 되었다. 또 레위인이 음행한 첩을 데려오겠다고 자기 자리를 떠나 장기간 타지에 체류하는 불성실함이 없었다면 이런 불행은 일어나지 않았다. 또 베냐민 지파가 순순히 기브아 비류들을 이스라엘 족속들 앞에 순순히 내놓았으면 이런 일을 벌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베냐민 자손들이 기브아 비류들을 찾아내서 그들을 징벌하는 것이 마땅치 않았을까? 그런데 베냐민 지파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다.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여러 계층의 부정직과 불의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되니까 나중에 전쟁이라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다는 사실이다. 로마시대 멸망의 이유가 그러했고 또 2008년 세계 금융 위기의 현상이 그렇고 개인이 암이란 질병이 발병하는 과정이 그러한 것처럼 이 악의 고리가 끊어지지 않은데 원인이 있었다. 영적인 세계도 마찬가지이다. 엄청난 사건과 극단적 결과의 이면에는 이렇게 작은 불의, 부정의 요소들이 합해지고 연결되다 보니 최악의 결과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악은 작은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면 오늘의 이 사건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남을 탓하기 전에 너의 흠을 고치라.

    (삿 20:5-6) 『[5] 기브아 사람들이 나를 치러 일어나서 밤에 나의 우거한 집을 에워싸고 나를 죽이려 하고 내 첩을 욕보여서 그로 죽게 한지라 [6] 내가 내 첩의 시체를 취하여 쪼개어 이스라엘 기업의 온 땅에 보내었노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중에서 음행과 망령된 일을 행하였음을 인함이로라

    이 레위인의 말을 보라. ‘그들이 이스라엘 중에서 음행과 망령된 일을 행하였음을 인함이로라’고 말했다. 레위기에 보면 제사장과 대제사장이 기생이나 부정한 여인이나 이혼당한 여인을 취하지 말라고 명령하고 있다(레 21:7, 14). 레위인은 제사장이 임명되는 지파이다. 그런데 레위인이 행음한 첩을 데리고 살려는 그 시도에 대해서 스스로 뉘우치는 모습이 없다. 만약 레위인이 그런 불행을 당했을 때 먼저 자신의 잘못을 바라보았다면 ‘내가 음행과 망령된 일을 했더니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망령된 사건을 만나게 하셨구나!’라고 뉘우치고 회개했을 것이다. 그런데 회개가 없다. 그리고 오히려 베냐민 지파의 비류들만 고발하고 있다.

    성도는 그리스도를 마음 속에 왕으로 모신 존재이다. 그분이 말씀하시는 대로 살고 그분이 말씀하시는 대로 멈춰서야 한다. 그래서 성도들의 마음 속에는 양심이 살아 있어야 한다. 그 양심이 살아있을 때 자기 합리화라는 우물에 빠지지 않고 남을 탓하는 모순에 빠지지 않는다. 그래서 예수님도 산상보훈에서 ‘남의 눈에 있는 티를 빼려고 하지 말고 자기 눈에 있는 들보를 먼저 빼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는가? 또 바울 사도는 디모데 전서에서 ‘남의 죄에 간섭하지 말고 네 자신을 지켜 정결케 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는가?

    이 레위인의 우물안 빠진 모습에서 우리는 교훈을 받을 수 있다. 부디 남을 탓하기 전에 자신을 먼저 돌아보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자.

    (딤전 5:22)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지 말고 네 자신을 지켜 정결케 하라』

    둘째, 인정에 끌리는 것이 아니라 공의로 판단해야 한다.

    (삿 20:13-14) 『[13] 그런즉 이제 기브아 사람 곧 그 비류를 우리에게 붙여서 우리로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하여 버리게 하라 하나 베냐민 자손이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14] 도리어 각 성읍에서 기브아에 모이고 나가서 이스라엘 자손과 싸우고자 하니』

    오늘 본문에 베냐민 지파의 이상한 태도를 발견하게 된다. 베냐민 지파는 기브아 지역의 불량배들을 내놓지 않았다. 그들이 먼저 나서서 죄악을 저지른 불량배들을 징벌하고 공동체의 악을 제거하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의 연합군과 전쟁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성경은 침묵하고 있지만 추정하건대 아마도 베냐민 지파 중 유력한 집안의 자제들이 그 불량배들 가운데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불투명한 사회일수록 옳고 그름의 기준보다 혈연, 지연, 학연과 같은 관계가 그 사회를 지배한다. 그래서 그런 사회는 배경이 있고 연줄이 있으면 안될 일도 되고 반대로 배경도 없고 연줄도 없으면 될 일도 안된다. 사실은 위험한 사회의 공의가 실종된 사회이다. 베냐민 지파의 행동을 보아 그 시대도 그러했던 것 같다. 공의의 기준으로 판결하고 적용한 것이 아니라 인정과 관계에 의해서 감싸고 죄악을 묵인했던 시대였던 것이다. 그래서 베냐민 지파도 이렇게 행동한 것이다.

    오늘날 나나 혹은 내가 속한 공동체가 이런 부패의 길을 걷지 않으려면 어떤 신앙의 길을 가야 할까? 성도 개인이 범죄할 때 그것은 나 혼자만의 상실이 아니라 내가 속한 공동체의 상실임을 알아야 한다. 나 한 사람으로 인해 공동체가 상처받을 수 있고 그 상처는 또 나에게 돌아올 수 있다. 그러니 나에게 순서가 왔을 때 그 고리를 끊어낼 결심이 필요하다.

    때로는 공동체에서 고리를 끊어낼 때 깊은 고민이 있다. 관용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관용에는 항상 악을 용납하는 것이 아닌가에 대한 의문과 부담이 있다. 만약 무조건의 관용이 이루어져 무제한 악이 용납되면 공동체의 악으로 확대될 때 제재할 방법이 없다. 그래서 관용이란 공동체의 질서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의 관용이어야 한다. 그래서 사랑과 공의는 함께 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과적으로 공동체의 존립이 흔들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사건으로 이스라엘 전체 지파가 한자리에 모인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에서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에게 한 몸 의식, 한 공동체 의식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 공동체가 존립하려면 정직과 공의와 공평의 정신이 기초 되어야 한다. 이것이 무너질 때 공동체도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전 이스라엘 지파가 베냐민과 전쟁을 불사한 것이다.

    (고전 12:26-27) 『[26]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고전 5:6)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셋째, 근시안이 아니라 원시안의 안목을 가져라.

    (삿 20:35)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앞에서 베냐민을 쳐서 파하게 하시매 당일에 이스라엘 자손이 베냐민 사람 이만 오천일백을 죽였으니 다 칼을 빼는 자이었더라』

    (삿 20:46-47) 『[46] 이 날에 베냐민의 칼을 빼는 자의 엎드러진 것이 모두 이만 오천이니 다 용사더라 [47] 베냐민 육백 명이 돌이켜 광야로 도망하여 림몬 바위에 이르러 거기서 넉 달을 지내었더라』

    민 26:41에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갈 무렵 인구수는 45,600명이었다. 그런데 삿20장에서 베냐민 지파의 죽은 자가 50,100명이었고 남은 자가 고작 육백 명에 불과했다.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베냐민 지파는 가나안 땅에 정착해 살아오는 동안 인구가 오천 명이나 늘어나는 복을 받았다. 그런데 이 전쟁을 통해서 전부 죽고 육백 명만 남았다. 이스라엘 연합군은 이에 대해 이렇게 한탄하고 있다.

    (삿 21:2-3) 『[2] 백성이 벧엘에 이르러 거기서 저녁까지 하나님 앞에 앉아서 대성 통곡하여 [3] 가로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오늘날 이스라엘 중에 어찌하여 한 지파가 이즈러졌나이까 하더니』

    베냐민 지파 뿐 만이 아니라 사실은 이스라엘의 연합군도 피해가 컸다.

    (삿 20:21,25) 『[21] 베냐민 자손이 기브아에서 나와서 당일에 이스라엘 사람 이만 이천을 땅에 엎드러뜨렸으나 [25] 베냐민도 그 이튿날에 기브아에서 그들을 치러 나와서 다시 이스라엘 자손 일만 팔천을 땅에 엎드러뜨렸으니 다 칼을 빼는 자였더라』

    결국 베냐민을 공격했던 이스라엘 지파 연합군도 무려 4만 명이 죽는 비참한 결과를 가져왔다. 거의 한 지파의 인구 규모와 같다. 하나님은 마치 광야에서 우상 숭배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서로 치게 하셔서 그들을 징계하셨던 것처럼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하고 불신의 길을 걸어간 죄과를 이렇게 징벌하셨던 것이다.

    애초에 레위인이 음행한 첩을 취한 잘못의 회개하고 물러섰다면 이런 불행은 일어나지 않았다. 베냐민 지파가 자기 종족의 악을 근절하기 위해서 노력했다면 이런 불행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스라엘 지파가 베냐민과 더욱 대화하려고 하고 원만히 사태를 해결하려고 했다면 이런 불행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들 모두는 이 고리가 끊어지지 않고 계속될 때 수확할 불행의 열매를 분별하는 눈이 없었다. 그리고 그 결과 열매는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가 고스란히 담당해야 했던 것이다.

    어린 아이는 불장난의 위험성을 모른다. 눈앞에 불의 신기한 능력에만 몰입한다. 그러다가 큰 불이 난 후에야 불은 재미있고 유익한 것이지만 정말 위험한 것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체험한다. 이처럼 죄악은 마치 눈 앞에는 작은 불씨에 불과하지만 그것이 확대되고 성장했을 때 엄청난 결과가 있다는 것을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는 분별해야 한다.

    (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옛날에 어느 왕이 부정부패가 심한 신하들을 연회에 초대했다. 그들을 교훈하기 위해서 왕은 모든 신하들에게 한 가지 명령을 내렸다. 그것은 연회에 참석할 때 안주는 왕이 부담하니 술은 신하들이 준비해서 포도주 한 병씩을 꼭 가져오라는 것이다. 모든 신하들의 포도주를 한 항아리에 부어서 함께 연회를 즐기겠다는 계획이었다. 그러자 한 신하가 이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많은 신하들이 포도주를 가져오면 내가 가져가는 포도주 한 병은 얼마나 되겠나! 난 포도주 대신 물을 담아 가야지.” 그리고 이윽고 연회가 열리는 날 왕과 신하들은 진수성찬으로 차려놓고 연회장 가운데 술항아리를 놓고 둘러 앉았다. 왕은 신하들에게 명해서 가져온 포도주들을 항아리에 부으라고 했다. 그리고 항아리에서 포도주를 퍼다가 모든 신하들에게 따라주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인가? 술잔 속에 담긴 것은 포도주가 아니라 물이었다. 나 하나쯤 하는 신하들의 생각이 모아져 술을 맹물로 만든 것이었다.

    하나님은 사사기라는 성경을 통해 성도에게 교훈하신다. 성도는 하나님을 마음 속의 왕으로 모시고 살아야 한다. 그런 삶을 산다면 하나님 나라에 해를 끼치는 존재가 아니라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존재가 될 것이다. 죄악의 고리를 끊고 선한 영향력의 고리를 형성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공동체가 되자! 하나님이 천국의 문에서 맞아들이실 그 날까지 하나님을 마음속의 왕으로 모시고 경성하며 살아가시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기원한다.

     

    글작성 : 김세한 목자님

    글편집 : 김예영 자매

  • [복음 메시지]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면 (삿 4:1-22)

    [말씀 제목]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면 (삿 4:1-22)

    [설교자] 김세한 목자

    [설교일] 2022년 7월 2일(토) 안식일 예배

    구약 성경에서 사사시대는 어떤 시대였는가? 여러 가지 특징 중에 하나는 사사의 생존하는 동안에는 천하가 태평하다가 사사가 죽으면 고통이 다시 찾아오는 악순환의 시대였다. 이것은 오늘날 홀로서기하지 못하고 타인 의존적으로 신앙생활하는 연약한 성도들의 모습을 상징한다고 했다. 이끌어줄 사사가 있으면 태평하고 사사가 사라지면 평안이 사라지듯이 나를 이끌어 주는 성도가 있으면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고 나를 이끌어 줄 사람이 없으면 점점 교회도 신앙도 멀어지는 그런 상태의 신앙인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사사시대의 백성들이건 오늘날 성도들이건 선민을 향한 우리 하나님의 뜻이 있다.

    (엡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그 하나님의 뜻이란 바로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성장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 자신이나 교회의 신앙이 스스로 성장하지 못하고 정체된 상태에 있다면 어떻게 그 자리를 벗어나 장성한 분량에까지 성장할 수 있는지,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면 어떤 기적을 경험하고 복의 열매를 수확하는지 오늘은 여자 사사인 드보라와 헤벨의 아내 야엘의 활약상을 통해서 함께 생각하고 은혜를 나누는 시간을 가지고자 한다.

    첫째, 하나님 능력을 의지하면 약한 자도 승리할 수 있다.

    (삿 4:4-5) 『[4] 그 때에 랍비돗의 아내 여선지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는데 [5] 그는 에브라임 산지 라마와 벧엘 사이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 거하였고 이스라엘 자손은 그에게 나아가 재판을 받더라』

    성경을 보면 좋은 믿음을 가진 신앙인들 중에 여성이 많이 등장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의 지배를 벗어나 자유를 누리는 승리의 역사가 한 여자 사사를 통해서 이루어지게 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이 선민 이스라엘을 향한 일종의 풍자이다. 여자 사사 드보라를 당신의 도구로 쓰시면서 선민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아무리 고통 중에 있더라도 다른 신을 버리고 나만 온전히 의지한다면 이렇게 연약한 여자일지라도 승리하게 해주는데 왜 나를 온전히 의지하지 않느냐?”라는 하나님의 음성이다. 일종의 질책이 담겨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당하는 것은 바로 가나안 족속이 강하기 때문도 아니요, 군사와 무기가 열등하기 때문도 아니요, 다만 우상숭배에 빠져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오늘날 우리도 물질이 부족해서, 좋은 가정 출신이 아니어서, 사회적 지위와 권력이 없어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굳은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보편적으로 여자는 남자보다 유약하지만 남자보다 강한 경우가 있다. 신앙 안에서 남자 같은 강건한 믿음만 있다면 하나님은 유약한 여자라도 그를 높이 들어 쓰신다. 그리고 남자들도 이루지 못한 업적을 이루게 하신다. 이런 측면에서 신앙의 세계는 하나님 앞에 남자나 여자나 평등하다고 할 수 있다.

    둘째,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면 영광을 얻게 된다.

    (삿 4:8-9) 『[8] 바락이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내가 가려니와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나는 가지 않겠노라 [9] 가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가리라 그러나 네가 이제 가는 일로는 영광을 얻지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여인의 손에 파실 것임이니라 하고 드보라가 일어나 바락과 함께 게데스로 가니라』

    드보라의 명령을 들은 바락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일만 명을 데리고 다볼산으로 가라니까 “드보라 당신이 함께 간다면 나도 가고 당신이 함께 가지 않으면 안가겠다.”고 말한다. 마치 초등학교 1학년 어린 아이가 부모님이 함께 가면 학교 가고 함께 가지 않으면 안가겠다고 떼 쓰는 모습과 같다.

    우리는 때로 바락처럼 하나님께 조건부 순종을 내걸기도 한다. 내가 원하는 만큼 해주시면 순종하고 안 해주시면 순종하지 않겠다는 심산을 가진다. 순종의 정신이 사라지고 상거래의 정신이 남는다. 그런 삐딱한 믿음에는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복이 없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믿는 만큼 복 주신다. 믿음으로 행하는만큼 영광을 누리게 하신다. 드보라같이 대장부의 신앙을 나타내면 대장부의 상급을 주시고 바락같이 졸장부 신앙을 나타내면 영광에서 제외된다.

    셋째,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면 큰 승리를 경험한다.

    (삿 4:12-13) 『[12]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이 다볼 산에 오른 것을 혹이 시스라에게 고하매 [13] 시스라가 모든 병거 곧 철병거 구백 승과 자기와 함께 있는 온 군사를 이방 하로셋에서부터 기손 강으로 모은지라』

    철병거 900승을 소유한 야빈의 군대에 대행해서 싸운다는 것은 오늘날로 말하면 소총부대가 탱크부대를 상대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다. 그야말로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만큼 무모한 짓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예언을 믿고 실천했을 때 계란으로 바위를 깨뜨리는 것 같은 기적은 일어났다. 바락이 드보라의 명령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알고 납달리와 스불론의 일만 명을 모아 가나안 족속과 전쟁하려고 다볼산에 올랐던 것이다. 비록 불완전했지만 바락이 그 말씀을 믿었으니까 이렇게 행동한 것이다. 이런 정도의 믿음도 하나님은 칭찬해주신다. 그 믿음을 인정하신다는 증거는 히브리서 기자가 바락을 칭찬하고 있기 때문이다.

    (히 11:32)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무엇을 교훈하고 있는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전략이 승리를 가져온다. 그래서 여인이 전하든, 어린이가 전하든 그 말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포되는 것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만약 바락이 드보라의 말을 여자라고 무시했다면 이 기적은 없었다. 누가 전하든 하나님 말씀으로 받을 줄 아는 겸손이 있어야 한다.

    우리 삶의 승리는 겸손히 말씀에 순종하는데서 시작된다. 때로 번지점프하는 것처럼 무모해 보이지만 말씀이라는 동아줄을 믿고 뛰어내려야 한다. 실제 번지 점프에서는 때로 끊어지는 사고가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끊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말씀에 의지해서 자신을 맡길 줄 아는 성도가 되자. 그러면 인생이 평안하고 기대치 않은 축복의 열매들로 가득할 것이다.

    (시 37:5-6) 『[5]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6]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졸장부 믿음이 아니라 대장부 믿음으로 무장할 때 내 삶의 장애물인 철병거가 사라지고 영광을 누리는 꽃마차에 올라타게 될 것이다. 이런 믿음으로 승리하시고 천국의 영광에 참여하시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기원한다.

    글작성 : 김세한 목자님

    글편집 : 박은우 형제

     https://youtu.be/b6rzCKe8Wr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