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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음 메세지] 심령이 가능한 자는 복이 있나니(마5:1-12)

    [복음 메세지] 심령이 가능한 자는 복이 있나니(마5:1-12)

    [말씀 제목]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마5:1-12)

    [설교자] 김세한 목자

    [설교일] 2024년 11월 2일

    19세기 말 지식인들은 앞으로 다가올 20세기를 일컬어 인류의 황금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 장밋빛 미래 예측의 근거는 인간의 과학 기술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작 20세기에 이르렀을 때 그 예측은 크게 빗나갔다. 두 차례에 걸친 세계 대전을 통해 미래가 밝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또 다른 문제들도 있었다. 과학기술의 발달은 산업 혁명을 통해서 물질적 풍요는 이루었지만 빈부의 격차라는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고 또 오늘날에 와서 환경오염, 기후 변화 등의 문제가 인간의 목을 조르고 있다. 인류는 이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개선이 아니라 개악의 상황을 마주하고 있다. 그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사람이 물질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행복과 불행이라는 영혼의 문제를 물질에서 찾을 수 있다는 잘못된 전제와 남보다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높은 곳에 있고자 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들이다.

    인류의 역사도 그렇지만 오늘날 개인의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물질과 육체의 욕망에 집중하며 살면 인생이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한다. 과거 인류의 역사 속에서 그 전제가 틀렸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교훈을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잘못된 전제에 빠져 자기 인생을 허비하고 살아간다. 우리는 창세기에서 그런 어리석은 인간의 전형을 발견한다. 바로 소돔과 고모라 땅을 선택했던 롯이다. 롯은 눈에 끌리는 대로 풍요로워 보이는 소돔 땅을 선택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그 땅은 유황불에 멸망하고 그 멸망과 함께 롯도 모든 것을 잃는다. 욕망하는 것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모두 잃는 모순된 결과를 맞이한다. 이것이 똑똑한 것 같지만 어리석은 인간의 실상이다. 이러한 인간의 어리석음은 또 어디에서 발견되는가? 멀리 있는 유익을 보지 못하고 당장 눈앞에 유익에 집착한다. 자신에게 해가되는 것도 모르고 목숨을 바쳐 쟁취하려고 달려든다. 가장 소중한 것을 옆에 두고 가장 먼 곳에서 그것을 헤매기도 한다. 또 정작 가장 소중한 것을 찾았는데 변덕이 생겨서 그것을 헌신짝처럼 내버리기도 한다. 인간은 이렇게 어리석은 면이 많고 헤매는 존재임을 성경은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사 59:8) 『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며 그들의 행하는 곳에는 공의가 없으며 굽은 길을 스스로 만드나니 무릇 이 길을 밟는 자는 평강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는 어떻게 이런 오류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로서 천국의 백성으로서 평강을 누리고, 가치를 누리고, 하나님께 드릴 아름다운 보석으로 내 인생을 장식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서 나는 먼저 어떤 존재가 되어야할까? 오늘은 산상보훈의 팔복 설교의 첫 구절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는 이 말씀의 뜻을 되새기고 함께 은혜를 나누는 시간을 가지고자 한다.

    오늘 구절에 대해서 문법적으로 살펴보면 먼저 문장 순서가 원문의 것과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원문을 직역하면 “복이 있으리라, 심령이 가난한 자들에게, 왜냐하면 천국이 저희들의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순서로 기록되었다. 복이 있다는 기원의 말이 문장의 맨 앞에 등장하고 복이 주어진 이유를 맨 나중에 기록하고 있다. 주목되는 단어가 있는데 첫째는 심령이란 명사이고 둘째는 가난하다라는 동사이다. 심령이란 명사는 ‘프뉴마’(pneu’ma) 즉 ‘영’(靈)이란 뜻이다. 가난하다란 동사는 ‘프토코스’(ptwcov”)로 ‘가난하다, 불쌍하다, 연약하다, 빈궁하다’라는 뜻이다. 그래서 문자대로 옮기면 ‘심령이 가난하다’라는 것은 곧 영이 빈궁하다.’ ‘영이 결핍되어 있다.’ ‘영이 불쌍하다라는 뜻이다. 우리는 영이란 단어를 안다. 그리고 가난하다라는 단어도 안다. 그런데 ‘영이 가난하다’라는 말은 도대체 어떤 개념인가? 또 영이 가난한 자는 왜 천국이 보장됨을 선언하고 있는가? 여기서 말하는 영이 가난한 자는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가?

    첫째, 세상의 것으로 채울 수 없는 마음이다.

    (사 66: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

    사실 심령이 가난하다는 표현은 예수님이 처음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유사한 표현을 사용했다. 이사야 선지자의 글을 통해 알 수 있는, 영이 가난하다는 뜻은 곧 하나님을 의식하고 그분과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갈망의 마음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존재를 알고, 그분의 말씀을 존중하며, 그분을 경외하기 때문에 가지게 되는 마음의 상태가 바로 영이 가난한 상태이다. 여기서 오해하지 않아야 할 점은 세상 사람들이 흔히 말하기를 “물질은 없어도 마음만은 부자다”라는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음의 풍요가 중요하니 물질적 가난은 중요하지 않다”라는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심령의 가난하다는 개념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다. 하나님을 알고, 그분과 교제하고자 하고, 그분의 손길을 소망하기에 가지게 되는 영혼의 결핍 상태가 바로 심령이 가난한 상태라는 것이다.

    예수님 공생애 초기에 예수님을 밤중에 찾아온 자가 있었다. 바로 니고데모이다. 그는 육신적으로 부족할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산헤드린 공회원이요, 바리새인이요 예수님 장례에 몰약을 백근 쯤 봉헌한 인물이다. 소위 명예와 신분과 재력을 모두 갖춘 자이다. 그런데 그가 뭐가 아쉬워서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는가? 자신이 소유한 것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내적인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천국에 들어가는 길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것을 알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은 거듭 나야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구원의 핵심을 말씀하셨다. 세상 기준으로 보면 다 가졌는데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영혼의 갈급함을 느끼는 자, 이와 같은 사람이 바로 심령이 가난한 자이다.

    또 마태가 있다. 그의 직업은 세리였다. 백성들에게 세금을 거둬서 로마 정부에 일정액만 잘 상납하면 나머지는 자신이 몫이 되었다. 그러니 욕심대로 부를 축적하고 물질의 풍요를 누릴 수 있는 직업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세관에서 일하는 그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신다. 그리고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신다. 마태는 놀랍게도 이 한 마디에 주저 없이 그 자리에서 일어나 예수님을 쫓는다. 가족과 의논하지도 않고 시간을 지체하지도 않았다. 그는 왜 이렇게 행동하고 있는가? 분명한 사실은 그는 그 풍요의 자리에 미련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응답이 즉각적인 것을 보면 그는 세리의 자리를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마태 같은 사람이 심령이 가난한 자이다. 이런 사람의 특징은 그 마음을 세상 것으로 채우지 못하고 하나님으로 채우려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가? 하나님에 대한 욕망보다 세상 물질에 대한 욕망 때문에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마치 쇼핑 중독에 걸린 사람이 물건을 사면 살수록 더 사고 싶고 사서 집에다 쌓아놓으면서 다시 사는 것처럼 물질에 집중하면서 살고 있지 않는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만족하고 이웃과 나누면서 행복한 삶을 사는가? 아니면 세상의 것을 끊임없이 욕망하면서 헛된 노력에 매달리고 있는가? 부디 육체의 욕망에 사로잡혀 물을 보관하지 못하는 터진 웅덩이가 되지 말고 하나님께 갈급하고 하나님 주신 것으로 채우고 만족할 수 있는 영혼이 되시길 바란다.

    (렘 2: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둘째, 세상의 것을 자랑하지 않는 마음이다.

    (왕상 8:27)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

    심령이 가난한 자의 두 번째 특징은 세상의 것으로 자랑하지 않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세상에서 추구하는 것은 한결같다. 자기 물질, 신분, 권세를 추구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것을 얻으면 자랑한다. 그러나 심령이 가난한 자는 그런 것으로 자랑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하나님 앞에 겸손하다.

    솔로몬 왕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둘도 없는 화려한 성전을 지은 인물이다. 그러나 정작 그가 성전을 완성했을 때 그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했다. 하나님은 세상을 초월해서 계시는 분이기 때문에, 자신의 손으로 지은 건물은 그 분을 모실만한 거처가 못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낙성식 기도에서 그는 이 생각을 고백한다. 초기의 솔로몬은 이렇게 심령이 가난한 자였다.

    솔로몬은 육적 성전을 지었지만 신약 시대에 이르러 영적인 성전을 지은 인물이 있다. 바울이다. 그는 바리새인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가말리엘 문하에서 배운 율법사였다. 오늘날 표현을 빌리면 개인적 스펙이 화려한 사람이다. 그러나 바울은 이 모든 것들을 오히려 배설물로 여긴다고 말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고 가장 가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 머리 속의 지식으로만 끝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알기 때문에 핍박과 위험을 감내하며 그분의 몸 된 교회를 세우는 일에 헌신했다. 그렇게 헌신의 삶을 살고 인생의 황혼기에 이르렀을 때 그의 태도는 어떠했는가? 오히려 나의 나 된 것은 주의 은혜로 되었다고 고백했다.

    (고전 15: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심령이 가난한 자의 특징은 자기를 낮춘다. 우리는 때로 세상 것을 포기했다고 말하면서 교회 안에서 세상 것을 추구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경우도 있다. 마치 베드로와 제자들이 배와 그물은 버리고 예수를 쫓았는데 예수님이 유대인의 임금이 되면 좌편과 우편에 앉아서 벼슬 좀 하사 받으려고 했던 것처럼 말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천국의 것을 세상 것 자랑하듯 자랑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 자기의 하찮음을 돌아볼 줄 알고 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잘 알기 때문이다. 부디 하나님이 너무 크심을 알고 자기의 작음을 고백하는 자가 되자.

    (고전 3:21)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셋째, 오로지 하나님만을 소망하는 마음이다.

    (시 42: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공급하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물질이든, 환경이든, 사람이든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면 하나님은 필요한 때 필요한 것을 우리에게 주실 수 있다. 그런데 시편의 기자는 물질도, 환경도, 사람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를 찾기에 갈급한다고 했다. 그래서 ‘주님이 주시는 복을 갈급해 한다’고 기록하지 않고 ‘주님을 찾기에 갈급함’을 노래했다. 이 마음을 어떻게 비유할 수 있을까?

    엄마가 아이에게 말한다. “엄마가 장보고 돌아오기 전까지 집에서 잘 놀고 있거라! 돌아와서 맛있는 과자를 사줄테니 잘 놀고 있거라.” 그런데 아이는 싫다고 울면서 떼를 쓴다. 과자도 싫고 사탕도 싫고 장난감도 싫으니 엄마랑 떨어지지 않겠단다. 마치 어머니에게 함께 있기를 애원하는 이 어린 아기처럼 주님을 찾기에 갈급한 마음은 그런 마음이다. 마치 어린아이가 과자와 사탕과 장남감을 좋아하지만 과자도 사탕도 장난감도 엄마를 대신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이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 2년 동안 청계천 판자촌에서 산 경험이 있다. 그 때의 추억은 한마디로 가난이다. 판자촌은 합판을 덧대서 망치질한 방에 벽면은 도배지 대신 신문지로 발랐고 그렇게 만들어진 방과 방들이 끝없이 연결되어 있었다. 요즘은 한 집에 화장실이 둘도 있지만 그 때는 화장실이 한 집에 하나도 없었다. 화장실은 온 마을 사람이 함께 쓰는 공중 화장실이었다. 마을 앞에는 청계천이 흐르고 어머님은 직장에 다니시면서 매일 동생과 저에게 10원짜리 동전을 쥐어 주셨다. 형제는 행여나 주머니에 넣으면 빠져서 잃어버릴까봐 그냥 손에 꼭 쥐고 하루를 보냈다. 그러다 저녁이 되면 그 돈으로 동네 만화방에 갔다. 왜냐하면 티브이에서 방영하는 재미있는 만화 영화를 보기 위해서다. 만화가 끝날 때 쯤 퇴근하신 어머님은 저희 형제를 데리러 만화방으로 오셨다. 그리고 어머니가 사주시는 붕어빵을 맛있게 먹으며 판자촌 집으로 귀가했다. 이상한 것은 그 가난했던 시절이 지금은 행복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유가 무엇인가? 사랑하는 어머님과 함께한 시간들이었기 때문이다.

    (합 3:17-18) 『[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성도님들 오늘 나는 어떤 영혼의 사람인가? 나의 영혼은 세상의 것으로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다. 오로지 그분으로 우리의 마음을 채울 수 있다. 세상의 것으로 대신할 수 없다. 오로지 하나님을 갈망하며 겸허하게 그분과 동행하는 성도가 되자. 이것이 가난한 심령의 사람이다. 부디 이런 마음을 품고 하나님과 교제하시고 동행하시고 하늘의 속한 신령한 것으로 배부르고 만족해하시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길 예수 이름으로 기원한다.

     

  • [복음 메세지] 어디를 가든지 이기게 하셨더라 (삼하8:1-14)

    [복음 메세지] 어디를 가든지 이기게 하셨더라 (삼하8:1-14)

    [말씀 제목]  어디를 가든지 이기게 하셨더라 (삼하8:1-14)

    [설교자]  김세한 목자

    [설교일]  2024년 5월 18일

    제국주의 시대를 논할 때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나라가 있다. 바로 현재의 영국이다. 현재는 유럽 서쪽의 섬나라이지만 소위 대영제국이라 일컫던 황금시대가 있었다. 1607년, 북아메리카의 버지니아주 제임스 타운을 시작으로 전 세계 약소국을 대상으로 정복하고 식민지로 삼아갔다. 그래서 1815년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이하는데 이 기간이 무려 백년이나 지속되었다. 1920년에 이르러 대영제국은 지구상의 모든 식민지를 합하면 면적이 무려 3,550만 제곱미터가 되었다. 이는 대한민국의 355배 되는 면적이고 현재 러시아 땅보다 2배 이상 큰 면적이다. 그래서 가장 잘나가던 때에 세계 육지 면적의 4분의 1이 바로 영국의 것이었다. 그래서 소위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별명이 붙었던 것이다. 그런 대영제국도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많은 빚을 지는 바람에 국력이 쇠퇴해지고 미국에 그 패권을 넘겨주게 되었다. 1997년 홍콩을 중국에 반환하면서 대영제국주의의 잔재는 완전히 정리가 되었다.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지배하고 착취하려는 모습은 작게는 사회 곳곳에서 발견될 수 있는 ‘우리의 현실’이다. 인간관계 속에도 있고, 기업과 기업 사이에도 있고, 단체와 단체 사이에도 갑을 관계가 있다. 이런 일면을 보면 소위 양육강식 적자생존이라는 강자의 법칙이 지배하는 것이 이 세상의 원리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루시려는 나라는 그런 원리가 지배하는 나라도, 사회도, 개인도 아니다. 하나님이 이루시려는 나라는 이 땅에 속하지 않은 원리가 지배하는 나라, 절대 공의와 사랑을 품으신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그런 나라였다. 그것을 이루시기 위해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왕이 되게 하셨고 그를 말씀으로 지도하셨다.

    (시 119:101-102) 『(101) 내가 주의 말씀을 지키려고 발을 금하여 모든 악한 길로 가지 아니하였사오며 (102) 주께서 나를 가르치셨으므로 내가 주의 규례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세움 받은 성도들은 오늘날 어떤 신앙의 길을 가고 있는가? 또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내가 어떤 길을 가고 있다고 고백할 수 있는가? 성도들이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이 이기게 해주시고, 형통한 길을 열어주시고, 땀 흘린 대가로 단 열매를 수확하게 하시기를 원한다. 그러나 육신의 눈으로 발견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영적인 눈을 뜨고 가려진 본질을 보고 있는가? 오늘은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이 이기게 해주셨다는 승리 기사를 통해 함께 생각하고 은혜를 나누는 시간을 가지고자 한다.

    다윗이 왕이 되어 처음 하고자 한 일은 언약궤를 자신의 성으로 모셔 오는 일이었다. 그 과정에서 웃사가 죽는 불미스러운 일도 있었지만 그것은 곧 다윗의 겸손한 영성과 신앙을 발견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언약궤 앞에서 어린 아이처럼 낮아져 춤을 추는 다윗에게 하나님은 소위 ‘다윗 언약’이라고 하는 중요한 언약을 주신다. 다윗은 하나님을 위해서 집을 짓겠다고 했지만 오히려 하나님이 다윗에게 내가 너의 집을 지어주마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 주셨던 것이 바로 다윗 언약이었던 것이다. 그 다윗 언약은 단순히 육적인 면에서 다윗의 혈통에서 왕위를 계승할 것이라는 뜻이 아니었다. 그것은 영적인 면에서 그리스도께서 그 후손 가운데 오실 것이라는 축복의 언약이었다. 이처럼 하나님께 언약을 받은 다윗은 그 언약에 대한 믿음을 품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출정한다. 그리고 블레셋의 도시를 쳐서 항복을 받아낸다. 뿐만 아니라 그 외에 모압과 소바, 아람과 아말렉, 하맛과 에돔 족속까지 굴복시킨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명실공히 팔레스틴에서 주도권을 장악한 최강국으로 부상하게 된다. 그래서 다윗의 이러한 전과에 대해 성경은 6절과 14절에서 두 번씩이나 동일하게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이기게 하시니라” 또 다른 반복구가 있는데 “조공을 드리니라.”(2) “조공을 바치니라.”(6)이다. 이것은 다윗의 이스라엘이 대영제국처럼 다른 나라를 정복해서 착취하고 압제하는 제국주의의 길을 갔다는 뜻이 아니다. 다윗이 이룬 육적 승리를 통해 성도와 교회가 경험해야 할 영적 승리를 표상하고 있다. 다윗을 통해 성도가 신앙의 길을 걸을 때 하나님은 이런 복을 주신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또 그런 복을 받는 자의 태도는 이러해야 한다는 것을 교훈하고 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그 메시지는 어떤 것인가?

    첫째, 약속을 믿으면 부끄러운 과거를 만회케 하신다.

    (삼하 8:1) 『(1) 이 후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쳐서 항복 받고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메덱암마를 빼앗으니라』

    ‘메덱 암마’는 블레셋의 수도였던 가드와 그에 종속되었던 네 성읍, 곧 가사, 아스돗, 아스글론, 에그론을 통칭하는 표현이다. 대상 18:1에서는 그래서 메덱 암마를 ‘가드와 그 동네’라고 기록했다. 이 기록으로 보아 다윗은 블레셋을 완전히 정복했다. 비유하자면 과거에는 블레셋을 다운시켰는데 이제는 블레셋을 아예 K.O시켜 버린 것이다. 그 결과 블레셋이 점유하던 전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이런 승리가 값진 이유는 다윗이 블레셋 가드에서 경험한 뼈아픈 과거 때문이다.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해 도망자 생활할 때 그는 블레셋의 도시 가드 땅에서 아기스 왕을 만나게 된다. 그때 침을 흘리며 미친 척하면서 위기 상황을 넘겼던 치욕의 과거가 있었다. 그런데 다윗은 그 가드에 항복을 받아냈다. 쉽지 않은 결과이다. 왜냐하면 사람에게 과거의 상처는 현재 극복 못하는 핸디캡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윗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나갔을 때 그 치욕의 역사를 만회한 것이다.

    이처럼 다윗이 블레셋의 도시들을 정복할 수 있었던 근원적 힘은 바로 그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붙들었기 때문이다.

    (삼하 7:27-28) 『(27)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의 종에게 알게 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집을 세우리라 하신고로 주의 종이 이 기도로 구할 마음이 생겼나이다 (28) 주 여호와여 오직 주는 하나님이시며 말씀이 참되시니이다 주께서 이 좋은 것으로 종에게 허락하셨사오니』

    이 약속의 말씀이 주어진 직후 다윗은 블레셋 사람들을 쳤다. 그래서 8장 1절에 ‘그 후에’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곧 다윗이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나가니까 블레셋의 도시들이 줄줄이 정복하게 되었고 그 결과 가드 땅에서의 부끄러운 과거를 씻어버리게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 신앙의 길을 가고 있는가? 성도님들 삶 속에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영적인 전쟁을 수행한 결과 나의 ‘메덱 암마’를 정복케 하시고 부끄러운 과거를 씻는 은혜를 주신다. 이런 복이 저와 성도들의 것이 되시기를 바란다.

    둘째,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승리의 열매를 주신다.

    (삼하 8:4) 『(4) 그 마병 일천칠백과 보병 이만을 사로잡고 병거 일백 승의 말만 남기고 그 외의 병거의 말은 다 발의 힘줄을 끊었더니』

    다윗은 소바 왕 하닷에셀에게서 탈취한 말 가운데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발의 힘줄을 끊었다. 똑같은 사건을 기록한 다른 성경을 보자. 역대상 18:3-4을 보면 그때 노획한 병거와 군사와 말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기록하고 있다.

    (대상 18:3-4) 『(3) 소바 왕 하닷에셀이 유브라데 강 가에서 자기 권세를 펴고자 하매 다윗이 저를 쳐서 하막까지 이르고 (4) 그 병거 일천 승과 기병 칠천과 보병 이만을 빼앗고 그 병거 일백 승의 말만 남기고 그 외의 병거의 말은 다 발의 힘줄을 끊었더니』

    다윗은 병거 일천 승, 기병 칠천, 보병 이만을 빼앗았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발견된다. 다윗은 빼앗은 병거 일천 승 가운데 일백 승의 말, 즉 10%만 남기고는 다 발의 힘줄을 끊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었는가? 왜냐하면 모세오경 가운데 한 권인 신명기에 이러한 말씀을 주셨기 때문이다.

    (신 17:16) 『왕 된 자는 말을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말을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말 것이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후에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이라 하셨음이며』

    모세의 율법에 이스라엘의 왕이 된 자는 말을 많이 두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었다. 말을 많이 두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해야지 자기 육신의 능력을 신뢰하지 말라는 뜻이다. 다윗은 신명기의 이 말씀을 기억하고 그대로 실천하고자 말 발목의 힘줄을 끊었던 것이다. 이런 다윗의 행동은 과거 사울왕의 행동과 비교하면 그가 얼마나 말씀에 순종하고 있는지 뚜렷해진다. 사울 왕은 어떠했는가?

    (삼상 15:18-19) 『[18] 또 왕을 길로 보내시며 이르시기를 가서 죄인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되 다 없어지기까지 치라 하셨거늘 [19]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의 악하게 여기시는 것을 행하였나이까』

    이처럼 사울왕의 마음은 탈취하는 일에 모아져 있고 말씀을 순종하는 일은 안중에도 없었다. 반면 다윗은 말의 발목 힘줄을 끊는 행위로 순종의 모습을 보였기에 하나님은 ‘다윗 언약’에 충실하셨던 것이다.

    구약 성경에서 다윗만큼 형통한 다른 한 사람이 있다. 여호수아 선지자이다. 그런데 형통만 같은 것이 아니라 형통의 이유도 똑같다. 그가 항상 승리한 비결이 어디에 있었는가?

    (수 1: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수 11:15) 『여호와께서 그 종 모세에게 명하신 것을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명하였고 여호수아는 그대로 행하여 여호와께서 무릇 모세에게 명하신 것을 하나도 행치 아니한 것이 없었더라』

    여호수아 역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의 명령을 받았고 그 명령대로 모든 것을 행했을 때 항상 승리하고 이길 수 있었다. 이런 사실에서 우리는 말씀에 대한 순종 여부가 항상 승리의 열매와 직결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2007년 3월 18일 서울국제마라톤 남자부 42.195㎞ 레이스에서 막판 1500여m를 남기고 대역전극을 펼치며 1위로 골인한 마라토너가 있다. 바로 이봉주 선수이다. 생애 35번째 풀코스를 완주이고 한국 역대 4위 기록이었다. 그런데 더 의미가 깊은 것은 그가 최근 3년간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해 ‘한물갔다’는 평가를 받던 터였고 38세의 나이는 마라톤 선수로는 환갑에 해당하던 때였다. 그런데 화려한 부활을 알리는 우승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이봉주 선수가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은 코치의 엄격한 지도를 순종했기 때문이다. 코치는 선수에게 시합이 가까워 오면 탄수화물을 피하고 고기만 먹인다. 한동안 고기만 먹이다가 시합 3,4일 전에 탄수화물을 같이 섭취시킨다. 그러면 몸에 축적되는 탄수화물의 양이 많아져서 레이스의 막판 스퍼트까지 끄떡 없이 달리게 된다고 한다. 이봉주 선수는 그 식사가 훈련보다 더 고통스럽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그런 고통을 인내하고 코치의 지도를 따랐기 때문에 우승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운동 선수가 코치의 엄격한 지도를 따라야 승리가 보장되듯이 신앙인은 인생의 코치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때 영적인 승리가 보장된다. 사울 왕처럼 세상의 것들을 취하려는 욕망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려는데 마음을 모으시는 성도가 되자. 거기에 축복의 열쇠가 있다.

    (요일 5: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셋째, 감사하는 자에게 더 큰 은혜를 주신다.

    (삼하 8:11-12) 『(11) 다윗 왕이 그것도 여호와께 드리되 저가 정복한 모든 나라에서 얻은 은금 (12) 곧 아람과 모압과 암몬 자손과 블레셋 사람과 아말렉에게서 얻은 것들과 소바 왕 르홉의 아들 하닷에셀에게서 노략한 것과 같이 드리니라』

    다윗은 정복한 나라로부터 조공을 받았다. 그것은 금 은 놋과 같은 귀금속들이었다. 다윗은 그것을 자기 사욕을 채우고자 받았는가? 그렇지 않다. 사울 왕은 전쟁에서 승리하면 탈취물로 자기의 기념비를 세우고 자랑거리로 삼는데 활용했다. 그러나 다윗은 달랐다. 그 물질을 여호와께 봉헌했다. 그래서 이렇게 드려진 금과 은과 놋이 나중에 그의 아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는데 재원으로 소용되었던 것이다.

    (대상 22:14-16) 『[14]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의 전을 위하여 금 십만 달란트와 은 일백만 달란트와 놋과 철을 그 중수를 셀 수 없을만큼 심히 많이 예비하였고 또 재목과 돌을 예비하였으나 너는 더할 것이며 [15] 또 공장이 네게 많이 있나니 곧 석수와 목수와 온갖 일에 익숙한 모든 사람이니라 [16] 금과 은과 놋과 철이 무수하니 너는 일어나 일하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실지로다』

    다윗은 이처럼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을 하나님께 봉헌했다. 그는 자기의 승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봉헌은 바로 그러한 믿음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윗의 그런 믿음에 대해 큰 복으로 다윗에게 내려주셨다. 곧 그 복의 후광이 아들 솔로몬에게까지 계승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성도가 하나님께 헌신의 삶을 살았을 때 하나님이 주시는 흔들리지 않는 복이 있다. 바로 부모의 신앙이 자녀들에게 유산으로 물려지는 것이다. 이 땅에서 이보다 값진 유산은 없다. 부디 이러한 복이 저와 성도들의 것이 되시기를 바란다.

    다윗 왕처럼 세상과의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시는 성도들이 되길 바란다. 언약을 믿고 나가서 과거의 부끄러움을 씻으시고, 말씀에 순종해서 승리의 열매를 수확하고, 감사함으로 복이 계승되게 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나라, 사랑과 공의의 원리가 지배하는 나라가 되는 기적의 목격자가 되시는 저와 성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한다.

     

  • [복음 메세지] 영적 전쟁의 승리 비결(삼상 17:32-50)

    [복음 메세지] 영적 전쟁의 승리 비결(삼상 17:32-50)

    [말씀 제목]  영적 전쟁의 승리 비결 (삼상 17:32-50)

    [설교자]  김세한 목자

    [설교일]  2023년 10월 28일

    1943년 세계 2차 대전에서 연합군의 모 항공대가 매우 특별한 임무를 받게 된다. 그 임무는 ‘모느’라는 댐을 폭파해서 인근 계곡을 침수시키는 것이었어. 그러나 고작 18대에 불과한 비행기로 수행해야 할 작전은 난이도가 매우 높았다. 작전은 구체적으로 비행기들이 시속 380km의 일정한 속도로 유지하다가 정확히 600m를 급강하해야 했다. 그리고 다시 수면 위 20m 높이를 유지하며 공중어뢰를 발사해 댐을 명중시키고 와야하는, 마치 서커스와도 같은 그런 작전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작전은 성공했고 그 결과 연합군은 전쟁에서 유리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 작전을 이끈 깁슨 중령은 훈장을 받는 날 기자가 그에게 이렇게 질문했다. “어쩌면 그렇게 어려운 작전을 성공시킬 수 있었습니까?” 그는 대답하기를 “그것은 바로 철저한 훈련과 모험정신이었습니다. 저희는 준비 기간만 2개월이 걸렸고 2,000시간 동안 연습을 했고 연습하는데만 2,500개의 폭탄을 소모했습니다. 그리고 연습한대로 용감히 실전에 임했습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가야 한다는 말이 있다. 일을 성취하려면 모험을 각오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호랑이굴에 들어갈 용기가 있어도 호랑이를 잡을 능력이 없다면 역시 호랑이를 잡을 수 없다. 반대로 아무리 호랑이를 잡을 수 있는 능력이 있더라도 호랑이 굴에 들어가는 모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역시 호랑이를 잡을 수 없다. 이처럼 능력 없는 모험은 만용에 불과하고 반대로 모험을 감수할 용기가 없으면 아무리 큰 능력도 무용지물이다. 공부도 사업도 세상사도 신앙의 길에도 이 원리는 마찬가지이다.

    (딤전 6: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

    바울사도는 디모데에게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권면했다. 성도의 삶을 믿음의 싸움이라는 관점에서 보고 있다. 전쟁같은 긴급 상황이라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 땅이 재물을 모으기 위해, 명예를 얻기 위해, 더 좋은 자리 차지하기 위해 전쟁한다. 그러나 성도는 다른 차원의 전쟁이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한 영혼이 하나님 앞에 사느냐 죽느냐! 마귀의 지배를 받느냐 하나님의 지배를 받느냐! 성도가 복음으로 세상을 정복하느냐 세속의 가치관에 정복당하느냐의 전쟁이 있다. 성도는 영혼의 눈을 뜨고 이런 전쟁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성도님들은 이 세상 속의 불신자들처럼 밥먹고 사는데만 매달리는 삶을 살고 있는가 아니면 영적인 전쟁이 있음을 알고 승리하기 위해서 땀흘리고 있는가? 만약 실상이 그러하다면 나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오늘은 다윗이 골리앗과의 대결에서 승리한 기사를 통해 그가 면대한 영적 전쟁이 무엇이었는지 살펴보고 은혜를 나누는 시간을 가지고자 한다.

    어느 날 블레셋의 군대와 이스라엘의 군대가 전쟁을 위해 대치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전쟁터에 매우 위협적인 적군이 나타났으니 바로 키가 3m나 되는 거인 골리앗이었다.

    (삼상 17:4-7) 『[4] 블레셋 사람의 진에서 싸움을 돋우는 자가 왔는데 그 이름은 골리앗이요 가드 사람이라 그 신장은 여섯 규빗 한 뼘이요 [5] 머리에는 놋투구를 썼고 몸에는 어린갑을 입었으니 그 갑옷의 중수가 놋 오천 세겔이며 [6] 그 다리에는 놋경갑을 쳤고 어깨 사이에는 놋단창을 메었으니 [7] 그 창자루는 베틀채 같고 창날은 철 육백 세겔이며 방패 든 자는 앞서 행하더라』

    놋 오천 세겔의 갑옷의 무게 환산하면 57kg이다. 창날만 육백세겔의 무게는 7kg이다. 갑옷과 창날의 무게만 합산해서 64kg이니 평균적 성인 남자 몸무게에 이른다. 게다가 다리에 놋 각반을 찼고 머리에 놋투구까지 썼으니 그 위용이 가히 로보캅 수준이다. 이러한 골리앗의 모습을 본 이스라엘은 아마도 간담이 서늘했을 것이다. 감히 누가 나서서 맞설 엄두도 못내고 있을 때 붉은 얼굴의 미소년 다윗이 나타났다. 그리고 물매로 돌을 날려 골리앗을 죽이고 승리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유재석이 강호동과 씨름해서 이겼다는 것이다. 도대체 다윗의 승리 비결은 무엇이며 오늘날 성도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바로 이런 것들이다.

     

    첫째, 작은 승리의 경험들을 쌓아야 한다.

    (삼상 17:34-35) 『[34] 다윗이 사울에게 고하되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35]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 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 죽였었나이다』

    전쟁 영웅 사울 왕도 골리앗 앞에 감히 나서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는 상황에서 일개 어린 소년이 나서서 그와 대결하겠노라고 요청한다. 그는 사울왕에게 연이어 이렇게 말한다.

    (삼상 17:36)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골리앗을 상대하겠다는 이 미소년의 용기가 어디에서 나왔는가? 바로 과거에 곰과 사자와 대결해서 승리했던 경험들에서 나왔다. 다윗은 그 경험을 통해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다.

    이처럼 성도가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평소 작은 승리의 경험들을 쌓아나가야 한다. 여호수아를 보라. 그는 모세의 뒤를 이은 후계자가 되었고 가나안 정복의 과업을 부여받는다. 그런데 그 땅의 일곱 족속과 전쟁해서 몰아내고 정착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일은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그 어려운 과업을 완수했던 것이다. 여호수아가 이렇게 가나안 정복의 임무를 완수한 배경에는 그가 과거 작은 승리의 경험을 쌓아왔기 때문이다. 그는 가나안 족속과의 전쟁 전에 이미 광야에서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실전 경험이 있었다. 모세와 아론과 훌은 기도하고 있었고 칼을 들고 전쟁을 수행한 인물이 바로 여호수아였던 것이다.

    또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베드로는 성전 미문에 하체 장애자를 일으키는 기적을 행한다. 이것은 베드로가 어느 날 우연히 일으킨 기적이 아니다. 과거 승리의 경험들이 쌓인 결과였다.

    (마 10:1) 『예수께서 그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로마는 하루 아침에 완성되지 않았다’는 말이 있듯이 우리의 믿음도 하루아침에 완성되지 않는다. 과거의 작은 열매 작은 성공의 경험들이 모여서 큰 성과를 이룰 수 있다. 과거에는 믿음의 열매가 전혀 없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큰 일꾼이 되어 믿음의 열매를 맺는 일은 없다. 기도의 응답을 경험한 성도가 더 큰 기도의 응답을 확신하고 기도하게 된다. 희생의 경험이 있는 성도가 더 큰 희생의 자리에 헌신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개인이나 교회나 다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첫 번째 조건 바로 현재의 작은 믿음의 싸움에서 승리의 경험을 쌓는 것이다.

    (눅 16:10)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둘째, 멸시를 감내하는 겸손한 인격이 있었다.

    (삼상 17:28) 『장형 엘리압이 다윗이 사람들에게 하는 말을 들은지라 그가 다윗에게 노를 발하여 가로되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들에 있는 몇 양을 뉘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

    다윗이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형들에게 식량을 전달하기 위해서 전쟁터에 왔는데 그의 큰 형 엘리압이 다윗을 나무라고 꾸짖는다. 다윗은 순수한 믿음과 담대한 마음으로 왔는데 형은 교만하고 완악하다고 오해하고 멸시했다. 다윗은 그 멸시의 말을 들었지만 엘리압 형과 다투지 않았다. 의기소침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다윗이 사울왕 앞에 섰을 때 이번에도 다윗은 이런 이야기를 듣는다.

    (삼상 17:33)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기에 능치 못하리니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니라』

    큰 형 엘리압 뿐만 아니라 다윗은 사울왕에게도 멸시를 당한다. 이처럼 계속 멸시를 받았지만 다윗은 결코 분노의 감정을 품거나 다투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이처럼 다윗에게는 골리앗을 상대하기 전에 이미 영적 전쟁이 있었는데 그것은 멸시를 감내하는 겸손한 인격이 있느냐 없느냐였다. 그는 이 내적 전쟁에서 승리했기에 골리앗을 상대할 기회도 잡을 수 있었다.

    007 영화로 잘 알려진 숀코네리란 배우가 있다. 금세기 최고의 흥행작이란 불리는 ‘반지의 제왕’에서 간달프 역을 해달라고 의뢰받았다. 그러나 그는 거만하게도 스토리가 너무 복잡하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그런데 아뿔사! 이 영화를 거절하는 바람에 무려 사천 억 달러의 수입을 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친 것이다.

    이처럼 겸손이라는 인격이 받쳐주지 않으면 임하는 복도 제 발로 차버리는 것이 인생이다. 만약 형 엘리압이 멸시의 말을 할 때 형과 싸우거나 사울왕의 말을 듣고 마음속에 자존심 상해서 토라져 떠나갔다면 아마 골리앗과의 대결은 성사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진짜 싸워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 알았다. 그 대상은 내부의 친형이나 사울왕이 아니라 블레셋의 골리앗임을 알았다.

    세상사에서 신앙 안에서 승리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다. 바로 인격이 받쳐준다는 사실이다. 인격의 결함이 있는 사람은 싸움의 대상을 분별하지 못한다. 그래서 엉뚱한 대상과 싸우다가 힘 다 빼고 정작 자기 사명을 그르친다. 그러나 멸시와 조롱을 인내할 인격이 있는 자는 힘써야할 것을 분별해서 승리의 기회를 경험하게 된다. 사울왕은 그런 차원에서 실패한 인물이다. 왜 실패했는가? 자기가 상대할 적들은 블레셋이고 아말렉 족속인데 허구헛날 다윗 죽이려고 추격한다. 그렇게 다윗 추격하는데 있는 힘 다 빼고는 나중에 기습한 적군에 의해 전사하고 만다. 그래서 어찌보면 능력보다는 인격이 먼저다. 능력이 있으면 무엇하는가? 엉뚱한데서 기운 다 빼는데. 돈 있으면 뭐하는가? 돈 제대로 활용할 인격이 없는데. 세상과의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시기를 원하시는가? 그렇다면 승리를 보장할 바른 인격으로 무장하시는 성도가 되자.

    (잠 12:16) 『미련한 자는 분노를 당장에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

     

    셋째, 적합한 무기를 선택하는 분별력이 있었다.

    (삼상 17:38-40) 『[38] 이에 사울이 자기 군복을 다윗에게 입히고 놋투구를 그 머리에 씌우고 또 그에게 갑옷을 입히매 [39] 다윗이 칼을 군복 위에 차고는 익숙치 못하므로 시험적으로 걸어 보다가 사울에게 고하되 익숙치 못하니 이것을 입고 가지 못하겠나이다 하고 곧 벗고

    로보캅 중무장을 한 골리앗을 상대로 다윗이 갖추고 나가려는 군장과 무기는 무엇이었는가? 아마 사울왕은 골리앗만큼은 아니지만 이 작은 미소년에게 최소한의 군장과 무기는 건네주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사울의 군장을 입어본 다윗은 말한다. 익숙하지 못하니 입고 가지 않겠단다. 그리고 다윗이 선택한 무기는 무엇이었는가?

    [40] 손에 막대기를 가지고 시내에서 매끄러운 돌 다섯을 골라서 자기 목자의 제구 곧 주머니에 넣고 손에 물매를 가지고 블레셋 사람에게로 나아가니라』

    다윗의 군장에는 갑옷도 투구도 검도 방패도 없었다. 오로지 막대기와 돌멩이와 물매였다. 이것이 다윗이 선택한 군장이었다. 사실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가장 허술한 선택인 것처럼 보이지만 깊이 생각해보면 다윗은 가장 지혜로운 선택을 했다. 그는 평소 자기에게 가장 익숙한 무기를 선택한 것이다. 군장의 양면성이 있다. 한편으로는 몸을 보호해주고 적을 공격하는 도구지만 무게가 문제가 된다. 너무 가벼우면 견고성이 떨어져 몸을 보호하지 못하고 너무 무거우면 싸움을 하지 못한다. , 기동성이 떨어지는 것이다. 저는 군대 있을 때 항상 고민한 것이 20kg의 완전군장하고 어떻게 전쟁을 수행하느냐?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다윗은 군장을 아예 벗어버린다. 그는 자신의 장단점을 알고 가장 적합한 무기를 분별하는 지혜가 있었다. 이것이 다윗의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런 지혜가 있는가? 남들이 입어 아름답다고 내가 그 옷 입어서 아름다울 것으로 착각하지 말라. 내게 어울리는 옷은 따로 있다. 그 가정이 이런 저런 것 소유해서 행복해 보인다고 나도 그것 소유하면 행복하겠지?”하고 착각하지 말라. 우리 가정에 맞는 행복의 조건은 따로 있다. 다른 교회에서 그 방법으로 교회가 발전한다고 우리 교회도 똑같이 하면 발전할 것으로 착각하지 말라. 우리에게 어울리는 적합한 길은 따로 있다. 나를 정확히 알고, 내 가정을 정확히 알고, 내 교회를 정확히 알 때 그에 어울리는 행복의 길을 찾을 수 있다.

    소위 균형감각! 내게 적합한 것을 분별하는 능력! 이것이 승리하는 신앙인의 세 번째 열쇠이다. 다윗처럼 이것을 분별하시는 저와 성도가 되자.

    (빌 1:10)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넷째, 하나님 이름을 높이려는 순수한 믿음이 있었다.

    (삼상 17: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사울왕이 골리앗을 이긴 자에게 내건 포상이 있었다. 포상의 내용은 만약 승리하면 왕의 사위라는 특별한 신분을 주고, 많은 재물을 주고, 세금 면제의 특혜를 주겠단다. 그런데 다윗이 골리앗을 상대한 동기는 그런 것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골리앗을 상대한 동기는 포상의 내용이 아니라 가슴 속에 담겨있는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신앙 때문이었다. 바로 하나님을 멸시하고 모욕하는 할례 없는 이방인을 죽여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만천하에 증거하려는 순수한 신앙이 있었다.

    우리가 삶의 현장에서 만나는 영적 전쟁은 어떤 차원에서 하나님이 계시고 안계시고의 문제이다. 불신자들은 성도의 말이나 행동을 통해서 우리 신앙을 저울질 한다. 나아가 우리의 형통과 불행을 통해 하나님이 살아느냐 죽었느냐를 가름하려고 한다. 이것이 영적 전쟁이다. 그런 도전의 상황에서 우리는 하나님은 이렇게 살아계신다고 증거할 수 있어야 한다.

    에스더라는 여인은 민족적인 멸절의 위기 앞에서 말한다. “내가 왕 앞에 나가겠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다.” 이렇게 믿음의 모험을 감수하는 모습이 있었기에 민족의 몰살 위기를 면하고 민족의 구원을 경험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붙들고 모험해야 한다. 모험하지 않으면 승리도 없다. 하나님은 모험하는 자에게 승리도 주시기 때문이다.

    (히 10:35)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이처럼 다윗이 골리앗과 대결해서도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은 과거 승리의 경험을 통한 확신, 멸시함을 참는 인격, 내게 맞는 무기를 분별하는 안목,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순수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성도님들은 오늘날 내 삶이 어떤 영적 전쟁의 상황에 있음을 발견하시고 있는가? 다윗과 같은 믿음과 인격과 담대함으로 마귀의 도전을 물리치고 승리하시는 성도가 되시길 바란다. 이와 같이 축복이 항상 함께하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기원한다.

     

    https://youtu.be/3RrubN1vL80?si=Cw4dZPEe8vyA-MAF

  • [복음 메세지] 살아계시는 하나님(삼상5:1-12)

    [복음 메세지] 살아계시는 하나님(삼상5:1-12)

    [말씀 제목] 살아계시는 하나님 (삼상 5:1-12)

    [설교자] 김세한 목자

    [설교일] 2023년 8월 5일(토) 안식일 예배

    야구 선수들이 타자 역할을 할 때 경계하고 무서워하는 현상이 있다. 그것은 배트로 공을 맞출 때 ‘손이 울리는 현상’이다. 타자가 때 야구 방망이를 꽉 움켜 잡고 휘둘러 맞추어야 하는데 좀 느슨하게 잡은 채 공을 맞추게 되면 손목이 쩌릿하고 울리게 된다. 그 고통이 얼마나 큰지 심한 경우는 한 시즌 내내 출전을 못하는 심각한 상태에 이른다. 그래서 코치들은 타 자에게 “배트를 아주 꽉 잡든지 아니면 맞는 순간 배트를 놓아 버려라!”라고 주문하기도 한다. 꽉 잡으려면 잡고 놓으려면 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도 그렇다. 예수님을 믿으려면 확실히 붙들고 따라야지 어정쩡하게 오히려 좋지 않는 상황에 빠질 수 있다.

     

    성도는 이 세상에 공의가 시행되기를 기대한다. 그래서 의인이 잘되고 악인이 망해야 마땅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때로는 의인이 망하고 악인이 흥하는 것 같은 상황을 만난다. 그러면 우리는 분노하고 절망하게 된다. 또 그런 감정이 깊어지면 과연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가? 하는 의심에 빠지고 그런 상태가 오래되면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기에 이르는 경우도 있다. 그러면 우리는 그런 고민의 상황에 봉착 할 때 어떤 생각과 태도를 가지는 것이 신앙인다운 것일까? 일찍이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의 애가에서 남유다가 바벨론에 멸망하는 현장을 목격하고 절망했던 상황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애 3:26)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바벨론에 나라가 망하고 성전이 무너져 내린 폐허 앞에서 여호와의 구원에 대한 소망을 바라라고 한다. 또 잠잠히 기다리며 인내하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님 의 살아계심을 의심하는 초보 신앙에서 벗어나 성숙한 신앙의 자리에 도달할 수 있을까? 어떻게 상황의 좋고 나쁨에 흔들리지 않고 평강의 마음을 지키며 인내할 수 있을까? 오늘은 블레셋의 진영에서 하나님의 언약궤에 나타난 재앙의 사건들을 통해 오늘날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고 은혜를 나누는 시간을 가지고자 한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하나님의 언약궤가 적국에 넘어갔다. 블레셋은 빼앗은 언약궤를 아스돗이라는 곳에 있는 다곤 신전 안에 놓아둔다. 고대 시대에 두 나라가 전쟁할 경우 그것은 곧 한 나라의 신이 다른 나라의 신에게 패배한 것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블레셋이 이기고 이스라엘이 졌으니까 다곤 신이 여호와를 이긴 것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그래서 블레셋이 언약궤를 다곤 신전 안에 두었다는 것은 다소 의도적이다. 곧 다곤 신 앞에 이스라엘의 신을 무릎 꿇게하는 굴욕의 의미가 있었다. 그런데 언약궤를 신전에 둔 이후 이상한 사건들이 블레셋 땅 에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언약궤를 다곤 신전에 넣어 둔 다음 날 살펴보니까 신전의 우상이 언약궤 앞에 절하듯이 거꾸러져 있더라는 것이다. 블레셋 사람들이 다시 다곤 신 우상을 일으켜 세웠다. 또 하루가 지나고 다음 날 아침 비슷한 상황이 벌어진다. 언약궤 앞에 다곤 신이 넘어져 있는데 이번에는 아예 머리와 손목까지 끊어져 땅에 나뒹굴고 있었다. 게다가 이상한 일은 다곤 신전에서만 벌어지고 있지 않았다. 언약궤가 있는 아스돗이란 성읍에 갑자기 독종이 발생하더니 많은 사람이 죽고 아예 도시가 멸망할 지경에 이른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성읍 사람들은 언약궤를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궤를 가드라는 곳으로 옮겨간다. 그런데 가드에서도 역시 독종이 발생해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다시 언약궤를 가드에서 에그론으로 옮기고자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에그론 사람들이 이를 반대하고 나섰다. 언약궤가 옮겨지는 곳마다 재앙이 임한다는 소문이 돌았으니 반대하는 것이 당연했다.

    우리는 블레셋에 임한 재앙의 사건들을 접하면서 몇 가지 의문을 가지게 된다. 하나님은 왜 언약궤가 빼앗기기 전 이런 기적을 통해 블레셋을 물리치지 않으시고 빼앗긴 후에야 재앙의 기적을 나타내셨는가 하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블레셋의 이방 성읍에서 재앙을 주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냐 하는 점이다. 본문을 통해 오늘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이것이다.

    • 첫째, 우연을 믿지 말고 하나님의 섭리를 믿어라.

    (삼상 5:3-4) 『[3] 아스돗 사람이 이튿날 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그 얼굴이 땅에 닿았는 지라 그들이 다곤을 일으켜 다시 그 자리에 세웠더니 [4] 그 이튿날 아침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얼굴이 땅에 닿았고 그 머리와 두 손목은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다곤의 몸둥이만 남았더라』

    다곤 신전 안에 다곤의 머리와 손목이 끊어져 나뒹군 일, 그리고 아스돗, 가드의 여러 성읍들로 옮겼더니 옮겨진 성읍마다 독종의 재앙이 임해서 많은 사람들이 죽은 일, 이것은 우연히 일어난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역사인가? 이에 대해서 블레셋 사람들은 이렇게 의논했다.

    (삼상 6:9) 『보아서 궤가 그 본 지경 길로 올라가서 벧세메스로 가면 이 큰 재앙은 그가 우리에게 내린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를 친 것이 그 손이 아니요 우연히 만난 것인 줄 알리라』

    언약궤를 실은 수레의 소가 만약 벧세메스로 향하면 궤가 내린 재앙이지만 만약 다른 방향으로 가면 우연으로 간주하겠다는 것이 블레셋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이들의 태도는 전형적인 불신자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다곤 신상이 두 번이나 넘어지는 경험을 해도 독종으로 여러 도시에 반복해서 재앙이 임해도 그들은 여전히 우연이라고 믿고 싶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존재를 애써 부인하고 싶었다. 이처럼 세상의 불신자들은 자신에게 임한 곤란한 일들이 우연이라고 믿고자 한다.

    신앙인과 불신자의 두 세계관이 있다. 전자는 창조론이고 후 자는 진화론이다. 창조론의 핵심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기에 세상의 모든 것이 가치가 있고 목적이 있다 는 것이다. 또 그 만물에 하나님이 여전히 섭리하신다는 것이다. 반면 진화론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세상이 그저 우연히 생겨났기에 자연 만물에는 특별히 가치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존재의 목적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창조론을 믿는 신앙이라면 진실을 분별해야 한다.

    가끔 창조론을 믿는다고 하면서 우연을 믿는 사람처럼 행동하면 안된다. 내가 당한 행복과 불행에 대해서 우연으로 여기면 안된다. 만약 우연으로 여기면 그 사람은 자신이 만난 상황을 하나님의 메시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고 하나님의 축복에도 감사하지 못하게 된다. 모든 것을 우연으로 여기는데 감사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자기 잘못을 돌아보고 고치려는 노력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오해하지 말라. 길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때 항상 죄라는 원인으로 연결 지으라는 뜻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불행에 대해 함부로 판단하고 정죄하라는 뜻도 아니다. 다만 내가 만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삼하 6:7)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의 잘못함을 인하여 진노하사 저를 그곳에서 치시니 저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다윗을 보라. 그는 상황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대해 민감했다. 자신의 취임식 때 언약궤를 모셔와 명실상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왕으로 추대 받고자 했다. 그런데 웃사란 신하 가 율법에 어긋나게 몰고 오더니 하나님이 그를 죽이셨다. 취임식에 사람이 죽었으니 얼마나 불미스러운가? 그러나 다윗은 무리하게 언약궤 모셔 오는 것을 강행하지 않았다. 오벧에돔의 집에 궤를 놓아두게 하고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때를 기다렸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경외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윗의 이러한 낮아지는 태도가 바로 믿음이요 겸손이다.

    바울 사도도 상황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민감했다.

    (행 16:10)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 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 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하나님의 음성이 뚜렷하게 임하기도 하지만 민감하게 분별해야 할 만큼 모호한 경우도 있다. 마게도냐 선교 전의 상황이 그랬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이 환상의 의미를 분별했고 판단대로 행동했다. 모호한 하나님의 음성조차 바울 사도도 민감하게 분별했다. 그 분별이 있었기 때문에 빌립보 데살로니가 등 유럽 교회를 세우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처럼 좋은 신앙인들의 공통점이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의 메시지에 민감하다는 점이다. 오늘날 성도도 그러해야 한다. 하나님이 채찍을 대실 때 나의 허물을 돌아보고 그분의 뜻을 찾아야 한다. 또 하나님이 복으로 채워주실 때 그분의 손길을 찬양하고 감사해야 한다. 신앙인에게 우연은 없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알고 경외할 줄 아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자.

    (잠 14:16) 『지혜로운 자는 두려워하여 악을 떠나나 어리석은 자는 방자하여 스스로 믿느니라』

    • 둘째, 인간은 망해도 하나님은 망하시지 않는다.

    (삼상 5:6-7) 『[6] 여호와의 손이 아스돗 사람에게 엄중히 더 하사 독종의 재앙으로 아스돗과 그 지경을 쳐서 망하게 하니 [7] 아스돗 사람들이 이를 보고 가로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와 함께 있게 못할지라 그 손이 우리와 우리 신 다곤을 친다 하고』

    이스라엘이 블레셋에 패했지만 하나님은 블레셋의 땅에서 당신의 살아계심을 나타내셨다. 언약궤가 있는 블레셋 성읍들에 여러 재앙을 내리셨는데 그 재앙들이 나라가 망할 정도로 심 각했다.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먼발치에서 이 뉴스를 접했을 것이다. 이 뉴스를 통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하시려는 음성은 분명했다. “이스라엘아! 내가 무능해서 너희가 전쟁에서 패하고 궤를 빼앗긴 것이 아니라 바로 너희 범죄 때문에 내가 너희를 떠난 것이다. 나는 여전히 이렇게 살아 있다.” 이처럼 여호와 하나님은 결코 패하지도 망하지도 않는다. 잠시 이스라엘을 떠나셨던 것 뿐이다.

    (시 78:58-60) 『[58] 자기 산당으로 그 노를 격동하며 저희 조각한 우상으로 그를 진노케 하였으매 [59] 하나님이 들으시고 분내어 이스라엘을 크게 미워하사 [60] 실로의 성막 곧 인 간에 세우신 장막을 떠나시고』

    불신자들은 성도들이 환난과 고난이 있을 때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의심한다. 성도가 실패하면 하나님이 실패한 것처럼 여긴다. 성도가 망하면 하나님이 망한 것처럼 여긴다. 그러나 성도는 그렇게 생각하면 안된다. 사람은 죽거나 망하거나 실패할지라도 하나님은 죽거나 망하거나 실패하지 않으신다. 다만 하나님이 연단의 목적으로 경외함을 회복케 하시려고 성도들에게 시련을 주시는 경우가 있다. 따라서 우리는 절망을 과장하거나 확대 해석하면 안된다.

    엘리야는 바알과 아스다롯 우상 숭배자 팔백 오십명과 대결해서 승리했다. 그런데 백성들은 여호와께 돌아오지 않았다. 여전히 이세벨을 살기 등등하게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그러니 엘리야는 얼마나 놀라고 절망했을까? 결국 이세벨을 피해서 도망간 엘리야는 하나님께 자신을 죽여달라고 요청했다. 이제 나만 남았는데 내가 살아서 뭐하냐고. 거짓 선지자들과의 대결에서 승리했어도 아무 소용이 없다고. 이제 다 끝났다고.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왕상 19:18)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인을 남기 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성도가 분별이 없어서 불신에 빠지면 함부로 절망과 멸망을 선언한다. 그런 마음에는 염려와 불안만 있고 사명과 소망도 사라지게 된다. 엘리야처럼 말이다.

    블레셋에 빼앗겼던 언약궤는 오래지 않아 이스라엘의 품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처럼 하나님은 결코 망하지 않는다. 환난의 처지에 있는 우리 눈에만 그렇게 보일 뿐이다. 부디 영적인 눈을 뜨고 절망을 딛고 일어서시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자.

    (시 37:17) 『악인의 팔은 부러지나 의인은 여호와께서 붙드시는도다』

    • 셋째,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인정하라.

    (삼상 5:11-12) 『[11] 이에 보내어 블레셋 모든 방백을 모으고 가로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어 본처로 돌아가게 하고 우리와 우리 백성 죽임을 면케 하자 하니 이는 온 성이 사망의 환난을 당함이라 거기서 하나님의 손이 엄중하시므로 [12] 죽지 아니한 사람들은 독종으로 치심을 받아 성읍의 부르짖음 이 하늘에 사무쳤더라』

    블레셋의 땅에 임한 재앙들이 얼마나 치명적이었던지 ‘부르짖음이 하늘에 사무쳤다’고 기록했다. 마치 아이티에 일어났던 지진처럼, 일본 후쿠시마 원전 폭발 사고처럼, 수마트라 섬에 임했던 해일처럼, 그 피해는 크고 치명적이었다. 재앙을 면하고자 언약궤를 아스돗에서 ‘가드’로 다시 가드에서 ‘에그론’으로 보내지만 속수무책이었다. 결국 언약궤가 ‘에그론’에 이르렀을 때 일종의 님비 현상이 발생했다.

    님비현상(not in my back yard)이란 핵발전소 같은 위험시설, 쓰레기장 화장터 같은 혐오시설이 자기 거주지에 들어오게 될 때 지역 주민들이 거부하는 사회적 현상을 일컫는다.

    언약궤가 가는 곳마다 파괴와 질병과 사망의 불미스런 일이 일어나니 에그론 사람이 바보가 아닌 그 궤를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이처럼 하나님이 악인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방법은 바로 재앙과 저주와 심판을 통해서이다. 반면 선민에게 하나님이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방법은 긍휼과 자비와 사랑을 베푸시는 일을 통해서이다.

    오늘날 나는 어떤 신분의 사람인가? 하나님의 백성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죽으신 분으로 여겨서는 안된다. 나는 죽어도 하나님은 죽지 않으신다. 인간은 실패해도 하나님은 실패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의지할 때 실패하지 않는다. 망하지 않는다. 언약궤가 다시 돌아왔듯이 하나님이 다시 돌아오신다. 이것을 믿고 소망을 가지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자.

    (시 37:9-10) 『[9]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 [10] 잠시 후에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하나님은 엘리야 시대에 다윗의 시대에 바울의 시대에 성경의 역사 속에서 살아계셨다. 그리고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살아계신다. 그 동일한 하나님이 오늘 내 삶에도 동행하신다. 내가 만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발견하시고 분별하시고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간증하시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길 바란다.

  • [복음메세지] 십자가 주변의 인물(6)-예수와 동행한 여인들(눅8:1-3, 마27:55-56, 막15:40-41)

    [말씀 제목] 십자가 주변의 인물(6)-예수와 동행한 여인들(눅8:1-3, 마27:55-56, 막15:40-41)

    [설교자] 김세한 목자

    [설교일] 2023년4월8일

    우리는 구약 성경 속에 등장하는 믿음의 인물들 가운데 가끔 여인들의 이름을 발견하곤 한다. 여리고 성의 기생 라합, 사사 시대를 이끌었던 여자 사사 드보라, 서원 기도를 통해 사무엘을 낳은 여인 한나, 시어머니를 위해 희생한 모압 여인 룻, 민족의 위기를 모면하려고 목숨을 걸었던 황후 에스더 등 믿음의 여인들이 있다. 그리고 평범하지만 신앙인들에게 잔잔한 교훈을 전달하는 소박한 믿음의 여인들도 있다. 엘리야 선지자를 접대한 사르밧 과부, 엘리사 선지자를 위해 섬세히 배려한 수넴 여인,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가 병이 낫게 만든 한 이름 없는 소녀 등 이렇게 성경에서는 믿음을 언급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여인들이 발견된다.

    십자가 사건이 있었던 그 때 그 현장에도 여인들이 있었다. 오늘은 십자가 현장의 인물 가운데 주님을 따르고 섬겼고 동행했던 여인들의 족적을 살펴보고 그녀들의 신앙이 오늘날 우리에게 교훈하는 바가 무엇인지 함께 생각하고 은혜를 나누는 시간을 가지고자 한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사시는 기간 동안 그 분 곁에서 섬기는 여인들이 있었다. 누가는 당시 사회적 약자이지만 믿음의 주역인 여인들에 대한 관심이 깊었다. 그래서 마태나 마가와는 달리 여인들의 이름을 나열할 정도로 그 여인들에 대해 상세히 알고 있었다.

    (눅 8:1-3) 『이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반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2)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3) 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

    예수님의 곁에는 열 두 제자 뿐만 아니라 섬기는 여인들도 있었다. 그 여인들 중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여인은 바로 일곱 귀신이 들렸다 나간 자 막달라 마리아였다. 그리고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라는 여인도 있다. 이외에도 다른 여자들도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른 여자들은 구체적으로 누구일까?

    (막 16:1)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우리는 마가복음 16장에서 또 다른 여자들을 발견할 수 있다. 야고보의 어머니인 마리아와 살로메라는 여인이다. 이처럼 예수님의 주변에는 상당히 많은 여인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을 섬기고 있었다. 섬기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 그러면 이 여인들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신앙의 모범을 교훈하고 있는가?

    첫째,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모범.  

    (막 16:9)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누가복음 8장 뿐만 아니라 마가복음 16장에도 막달라 마리아가 첫 이름으로 등장한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처음으로 모습을 보이신 사람이었다. 그녀는 본래 일곱 귀신이 들렸었고, 예수님이 그녀를 치료해 주셨다. 그 은혜를 잊을 수 없어서 그녀는 주를 섬겼고 그 섬김은 주님이 죽으신 이후에도 지속되었던 것이다.

    아마도 막달라 마리아 외에 예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은 여인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예수님 일행을 섬기기 시작한 이유가 어디에 있었는가? 바로 이 여인들의 봉사와 섬김의 이유는 주님께 은혜를 입었고, 그 은혜를 기억하고 있었고, 감사했고 봉사와 섬김의 열매로 나타냈던 것이다. 이것은 주님이 관심을 두시는 열매이기도 하다.

    (눅 17:17-18)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언젠가 예수님이 열 명의 문둥병자를 치유해 주었을 때 그 중 한 사마리아 사람만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하다고 말했다. 또한, 귀신을 쫓아내어준 사람은 여럿 있었다.이렇게 여러 사람이 은혜를 입었지만 지속적으로 주님 곁에서 봉사와 섬김의 삶을 실천한 인물이 막달라 마리아였던 것처럼,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감사하는 일은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은혜 입으면 주님께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는 교훈을 발견할 수 있다.

    한국 교회 중에 손님 접대로 섬김의 믿음을 실천하는 장로님 내외 분이 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남편인 장로님은 젊었을 때 아내가 대만 손님을 지극히 섬기는 모습을 못 마땅히 여겼다. 또 회당 건축할 때 거금의 헌금을 한 것을 알고 더욱 못마땅해 했다. 그런데 장로님 부부가 대만을 방문해서 귀빈 대접을 받고는 그들의 섬김에 매우 감동했다. 그 섬김의 모습에 감동해서 장로님도 사모님처럼 손님 접대에 섬김을 다하게 되었다. 그리고 대만에서는 한국에 가면 모 장로님을 꼭 찾으라고 소문이 나기도 했다.

    섬기는 일에는 돈, 체력, 시간이 소모된다. 모든 수고와 비용을 상쇄하고도 남는 감사와 즐거움과 기쁨이 있다.

    오늘날 성도님들은 예수님이 내게 주신 구원의 은혜에 대해서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계시는지? 그리고 그 감사의 마음이 어떻게 나타나고 계신지? 막달라 마리아처럼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 수행하는 여러 봉사의 모습을 통해서도 나타낼 수 있다. 형태는 어찌되었건 항상 주님께 구원에 대한 감사의 열매를 나타내시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자.

    (롬 12: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둘째, 주님의 십자가에 동행하는 모범.

    (요 19:25)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예수님의 곁에서 가장 가까운 자로 자처했던 12 제자들은 정작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모두 그분을 떠나갔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 지실 때 울며 골고다의 현장까지 동행한 여인들이 있었다.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셔서 백성들의 주목을 받는 순간에도 십자가에서 가장 비참한 일을 당하는 순간에도 이 여인들은 주님의 곁을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성경은 그 상황에서 여인들이 나타낸 슬픔의 표현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눅 23:27-28) 『[27]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 오는지라 [28]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예수님이 걸어가시는 수난의 길을 좇아간 자들은 남자들이 아닌 여자들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자 이동하신 길에도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신 순간에도 그 곁을 떠나지 않고 동행한 여인들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신앙의 모범을 전달하고 있는가? 일반적인 사람들은 밝고 기쁘고 행복한 일에는 동행하길 원한다. 그러나 어둡고 슬프고 불행한 일에는 동행하길 원하지 않는다. 마음이 슬퍼지고 어둡고 무거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이 원하시는 신앙의 길은 바로 십자가와 동행하는 길이다. 그래서 성도가 슬픈 자들의 슬픔에 동참하고 아픈 자들의 아픔에 동참할 줄 알기를 원하신다. 이 여인들이 십자가와 동행한 모습은 바로 그런 믿음의 모범을 남기고 있다.

    주님은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부디 주님의 기쁨과 희락 뿐만 아니라 주님의 슬픔과 아픔에도  동참할 줄 아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길 바란다.

    (롬 12:15-16) 『[15]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16]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셋째, 복음 전파 사역에 참여하는 모범. 

    (요 20:18-19) 『[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예수님이 무덤에서 부활하셔서 최초로 모습을 나타낸 사람이 누구였는가?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아니라 막달라 마리아라는 여인이었다. 주님이 주신 그 은혜에 너무 감사해서 항상 주님을 따라다니며 섬겼던 여인, 그랬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주님은 부활하신 당신의 모습을 가장 먼저 나타내셨고, 마리아는 그 소식을 다른 이들에게 전파했다.

    누군가 내게 베풀어준 은혜에 대해 감사하고 그 감사를 표현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그런데 그 사람이 죽어서 눈앞에서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은혜를 기리고 감사한다면 더 아름다운 일이다. 다윗 왕은 죽은 친구 요나단에게 입은 은혜를 잊지 않고 다리를 저는 장애를 가진 그 아들 므비보셋에게 호의를 베풀지 않는가?

    하나님은 이런 성품의 사람을 사랑하신다. 또 성도가 모두 그런 신앙을 나타내기를 기대하신다. 우리는 모두 주님의 구원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다. 십자가 사건은 이미 이천년 전 사건이고 내가 세례 받은 사건도 이미 수년 전 사건이지만 감사의 마음을 잃지 않고 항상 그 은혜의 감동 속에서 사는 것 이 또한, 감사의 마음을 품고 사는 것은 아름다운 일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구원의 은혜에 감사할 줄 알고 감사에 합당한 믿음을 나타내야 하는 것이다. 결국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후 그녀는 다른 여인들과 더불어 성령을 구하고 성령을 받고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는 복음 전파자의 삶을 살게 된다.

    (행 1:14)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사도행전에는 이름은 없고 그저 여자들이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마가의 다락방에서 모여 기도하던 그 여자들 안에 주님을 섬기던 여인들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이처럼 여인들은 주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성령 강림을 준비하며 복음 전파의 사명에도 참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십자가의 현장에 있었던 여인들에 대한 기록을 통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다. 구원에 은혜에 대해 섬김의 삶으로 화답할 줄 아는 저와 성도님들 되시길 바란다. 고통과 슬픔과 아픔의 처지에 있는 성도들과 동행해서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우는 저와 성도님들 되시기 바란다. 하나님이 내게 허락하신 은사와 형편대로 복음 전파의 사역에 참여하고 협력하고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란다. 십자가 현장까지 동행했던 그 여인들의 믿음의 길을 좇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길 예수 이름으로 기원한다.

    https://youtu.be/BGpIMX0VsMs

    글작성 : 김세한 목자님

  • [복음 메세지] 극단의 결과를 가져온 불의의 고리들(삿 20:1-23)

    [말씀 제목] 극단의 결과를 가져온 불의의 고리들(삿 20:1-23)

    [설교자] 김세한 목자

    [설교일] 2023년 1월 21일(토) 안식일 예배

    1787년 에드워드라는 사람이 쓴 ‘로마 제국의 몰락’이라는 책에는 로마 제국 멸망의 이유에 대해 다섯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멸망의 이유 첫째, 이혼의 급속한 증가로 가정이 파괴된 점, 둘째, 사람들이 스포츠와 매춘 등 쾌락주의에 빠져든 점. 셋째, 세금은 점점 높아진 반면 지도자들은 시민들에게 공짜 빵과 서커스를 제공하는 포퓰리즘에 집중한 점. 넷째는 외적의 침입에 대비해 지나치게 군비를 확장한 점. 다섯째 종교의 순수성이 무너져 시민들이 건전한 정신으로 살아가도록 인도하지 못한 점 등이다.

    로마 제국의 멸망의 각각의 원인을 보면 대체 이런 정도 이유로 멸망까지 할 수 있나 싶게 대수롭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각각의 원인들이 합해지고 증폭되니까 예상치 못한 심각한 결과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2008년 금융 위기도 그렇다. 여러 계층의 작은 부정, 부패가 합해져 예기치 못한 심각한 결과에 도달했다. 학자들의 그릇된 경제 이론, 금융기관에서 남발한 부실 채권, 신용평가 기관의 부정직한 평가, 일반 대중들의 탐욕이 한 데 어울어지니까 금융 위기라는 암덩어리로 발병했던 것이다. 개인의 건강도 그렇다. 누구나 한 가지 요소로 건강을 잃지는 않는다. 수면 시간 부족, 영양 섭취의 불균형, 과도한 노동과 스트레스, 건강을 해치는 음주와 흡연, 이런 모든 악습관이 합해져 종합되니까 암같은 심각한 질병이 발병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은 작은 것이 작은 것이 아니다. 영육 간의 독소는 작은 씨앗이 자랄 때 제거해 주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전 10:1) 『죽은 파리가 향기름으로 악취가 나게 하는 것 같이 적은 우매가 지혜와 존귀로 패하게 하느니라』

    우리는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어우러져 살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 생활하느냐가 나 혼자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전체 사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특히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의 모임, 교회 공동체도 마찬가지이다. 성도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살아간다. 그 의미는 나 한사람의 신앙과 믿음이 내 안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한 분의 성도가 자리를 비우면 허전하다. 그분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으면 든든하다. 이런 사실에서 우리는 이미 하나의 공동체임을 증거한다.

    우리는 사회 속에서건 교회 안에서건 내가 속한 공동체 속에서 어떤 의식과 신앙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가? 어떤 의식과 신앙을 가지고 살 때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오늘은 레위인의 첩 사건이 불씨가 되어 베냐민 지파의 멸절하게 된 사건을 살펴보고 이런 문제를 생각하고 은혜를 나누는 시간을 가지고자 한다.

    레위인의 첩이 베냐민 지파 기브아에 속한 비류들에게 욕보임을 당하고 죽는 불행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피해자인 레위인은 마치 짐승의 제물을 각 뜨는 것처럼 여인의 시신을 12조각으로 쪼개어 이스라엘 12지파에게 보낸다. 이스라엘 12지파는 그것을 받고는 이 엽기적인 사건에 대해 경악한다. 그리고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이스라엘 최북단에서 최남단까지 모든 지파가 미스바에 모이게 된다. 그렇게 모여든 지파들 가운데 칼을 빼들고 전쟁하는 정병이 사십 만이나 되었다. 이 모인 규모로 봐서 이것이 이스라엘에 얼마나 큰 충격을 주는 사건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레위인은 그렇게 모인 백성의 장로들에게 그간의 자초지종을 설명한다. 레위인의 설명을 들은 장로들은 베냐민 지파에게 이런 일을 행한 자들을 처벌하겠으니 범죄자들을 내놓으라고 요구한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베냐민 지파는 이 요구에 대해 불응한다. 결국 이스라엘 전체 지파 연합군과 베냐민 지파 사이에 전쟁이 일어난다. 동족 간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일어난 결과는 어찌되었는가? 베냐민 지파의 장정이 거의 몰살하게 되는 상황에 가서야 전쟁이 끝나게 된다. 그리고 모든 사건의 끝에 그 원인에 대해서는 밝히고 있다.

    (삿 21: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참고. 삿 17:6, 삿 18:1 삿 19:1

    동족끼리 칼을 겨누고 베냐민 지파가 멸절당하기까지 죽이고 죽임당한 이 불행한 사건의 원인에 대해서 성경은 근본 원인을 진단하고 있다. 그 원인은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 이다.

    그런데 근본 원인은 그렇다 치고 우리는 이 불행한 결과에 이르기까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 불의의 고리들을 발견한다. 그 가운데 하나만 끊어져도 이런 자리에 도달하지 않았을 텐데 계속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결되다 보니 오늘의 극단적 결과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그 고리 중에 첫 번째, 만약 레위인이 첩을 취하지 않았다면 이런 불상사는 없었을 것이다. 레위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자기의 정욕에 끌려 첩을 취하는 악행이 불씨가 되었다. 또 레위인이 음행한 첩을 데려오겠다고 자기 자리를 떠나 장기간 타지에 체류하는 불성실함이 없었다면 이런 불행은 일어나지 않았다. 또 베냐민 지파가 순순히 기브아 비류들을 이스라엘 족속들 앞에 순순히 내놓았으면 이런 일을 벌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베냐민 자손들이 기브아 비류들을 찾아내서 그들을 징벌하는 것이 마땅치 않았을까? 그런데 베냐민 지파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다.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여러 계층의 부정직과 불의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되니까 나중에 전쟁이라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다는 사실이다. 로마시대 멸망의 이유가 그러했고 또 2008년 세계 금융 위기의 현상이 그렇고 개인이 암이란 질병이 발병하는 과정이 그러한 것처럼 이 악의 고리가 끊어지지 않은데 원인이 있었다. 영적인 세계도 마찬가지이다. 엄청난 사건과 극단적 결과의 이면에는 이렇게 작은 불의, 부정의 요소들이 합해지고 연결되다 보니 최악의 결과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악은 작은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면 오늘의 이 사건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남을 탓하기 전에 너의 흠을 고치라.

    (삿 20:5-6) 『[5] 기브아 사람들이 나를 치러 일어나서 밤에 나의 우거한 집을 에워싸고 나를 죽이려 하고 내 첩을 욕보여서 그로 죽게 한지라 [6] 내가 내 첩의 시체를 취하여 쪼개어 이스라엘 기업의 온 땅에 보내었노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중에서 음행과 망령된 일을 행하였음을 인함이로라

    이 레위인의 말을 보라. ‘그들이 이스라엘 중에서 음행과 망령된 일을 행하였음을 인함이로라’고 말했다. 레위기에 보면 제사장과 대제사장이 기생이나 부정한 여인이나 이혼당한 여인을 취하지 말라고 명령하고 있다(레 21:7, 14). 레위인은 제사장이 임명되는 지파이다. 그런데 레위인이 행음한 첩을 데리고 살려는 그 시도에 대해서 스스로 뉘우치는 모습이 없다. 만약 레위인이 그런 불행을 당했을 때 먼저 자신의 잘못을 바라보았다면 ‘내가 음행과 망령된 일을 했더니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망령된 사건을 만나게 하셨구나!’라고 뉘우치고 회개했을 것이다. 그런데 회개가 없다. 그리고 오히려 베냐민 지파의 비류들만 고발하고 있다.

    성도는 그리스도를 마음 속에 왕으로 모신 존재이다. 그분이 말씀하시는 대로 살고 그분이 말씀하시는 대로 멈춰서야 한다. 그래서 성도들의 마음 속에는 양심이 살아 있어야 한다. 그 양심이 살아있을 때 자기 합리화라는 우물에 빠지지 않고 남을 탓하는 모순에 빠지지 않는다. 그래서 예수님도 산상보훈에서 ‘남의 눈에 있는 티를 빼려고 하지 말고 자기 눈에 있는 들보를 먼저 빼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는가? 또 바울 사도는 디모데 전서에서 ‘남의 죄에 간섭하지 말고 네 자신을 지켜 정결케 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는가?

    이 레위인의 우물안 빠진 모습에서 우리는 교훈을 받을 수 있다. 부디 남을 탓하기 전에 자신을 먼저 돌아보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자.

    (딤전 5:22)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지 말고 네 자신을 지켜 정결케 하라』

    둘째, 인정에 끌리는 것이 아니라 공의로 판단해야 한다.

    (삿 20:13-14) 『[13] 그런즉 이제 기브아 사람 곧 그 비류를 우리에게 붙여서 우리로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하여 버리게 하라 하나 베냐민 자손이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14] 도리어 각 성읍에서 기브아에 모이고 나가서 이스라엘 자손과 싸우고자 하니』

    오늘 본문에 베냐민 지파의 이상한 태도를 발견하게 된다. 베냐민 지파는 기브아 지역의 불량배들을 내놓지 않았다. 그들이 먼저 나서서 죄악을 저지른 불량배들을 징벌하고 공동체의 악을 제거하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의 연합군과 전쟁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성경은 침묵하고 있지만 추정하건대 아마도 베냐민 지파 중 유력한 집안의 자제들이 그 불량배들 가운데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불투명한 사회일수록 옳고 그름의 기준보다 혈연, 지연, 학연과 같은 관계가 그 사회를 지배한다. 그래서 그런 사회는 배경이 있고 연줄이 있으면 안될 일도 되고 반대로 배경도 없고 연줄도 없으면 될 일도 안된다. 사실은 위험한 사회의 공의가 실종된 사회이다. 베냐민 지파의 행동을 보아 그 시대도 그러했던 것 같다. 공의의 기준으로 판결하고 적용한 것이 아니라 인정과 관계에 의해서 감싸고 죄악을 묵인했던 시대였던 것이다. 그래서 베냐민 지파도 이렇게 행동한 것이다.

    오늘날 나나 혹은 내가 속한 공동체가 이런 부패의 길을 걷지 않으려면 어떤 신앙의 길을 가야 할까? 성도 개인이 범죄할 때 그것은 나 혼자만의 상실이 아니라 내가 속한 공동체의 상실임을 알아야 한다. 나 한 사람으로 인해 공동체가 상처받을 수 있고 그 상처는 또 나에게 돌아올 수 있다. 그러니 나에게 순서가 왔을 때 그 고리를 끊어낼 결심이 필요하다.

    때로는 공동체에서 고리를 끊어낼 때 깊은 고민이 있다. 관용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관용에는 항상 악을 용납하는 것이 아닌가에 대한 의문과 부담이 있다. 만약 무조건의 관용이 이루어져 무제한 악이 용납되면 공동체의 악으로 확대될 때 제재할 방법이 없다. 그래서 관용이란 공동체의 질서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의 관용이어야 한다. 그래서 사랑과 공의는 함께 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과적으로 공동체의 존립이 흔들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사건으로 이스라엘 전체 지파가 한자리에 모인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에서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에게 한 몸 의식, 한 공동체 의식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 공동체가 존립하려면 정직과 공의와 공평의 정신이 기초 되어야 한다. 이것이 무너질 때 공동체도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전 이스라엘 지파가 베냐민과 전쟁을 불사한 것이다.

    (고전 12:26-27) 『[26]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고전 5:6)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셋째, 근시안이 아니라 원시안의 안목을 가져라.

    (삿 20:35)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앞에서 베냐민을 쳐서 파하게 하시매 당일에 이스라엘 자손이 베냐민 사람 이만 오천일백을 죽였으니 다 칼을 빼는 자이었더라』

    (삿 20:46-47) 『[46] 이 날에 베냐민의 칼을 빼는 자의 엎드러진 것이 모두 이만 오천이니 다 용사더라 [47] 베냐민 육백 명이 돌이켜 광야로 도망하여 림몬 바위에 이르러 거기서 넉 달을 지내었더라』

    민 26:41에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갈 무렵 인구수는 45,600명이었다. 그런데 삿20장에서 베냐민 지파의 죽은 자가 50,100명이었고 남은 자가 고작 육백 명에 불과했다.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베냐민 지파는 가나안 땅에 정착해 살아오는 동안 인구가 오천 명이나 늘어나는 복을 받았다. 그런데 이 전쟁을 통해서 전부 죽고 육백 명만 남았다. 이스라엘 연합군은 이에 대해 이렇게 한탄하고 있다.

    (삿 21:2-3) 『[2] 백성이 벧엘에 이르러 거기서 저녁까지 하나님 앞에 앉아서 대성 통곡하여 [3] 가로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오늘날 이스라엘 중에 어찌하여 한 지파가 이즈러졌나이까 하더니』

    베냐민 지파 뿐 만이 아니라 사실은 이스라엘의 연합군도 피해가 컸다.

    (삿 20:21,25) 『[21] 베냐민 자손이 기브아에서 나와서 당일에 이스라엘 사람 이만 이천을 땅에 엎드러뜨렸으나 [25] 베냐민도 그 이튿날에 기브아에서 그들을 치러 나와서 다시 이스라엘 자손 일만 팔천을 땅에 엎드러뜨렸으니 다 칼을 빼는 자였더라』

    결국 베냐민을 공격했던 이스라엘 지파 연합군도 무려 4만 명이 죽는 비참한 결과를 가져왔다. 거의 한 지파의 인구 규모와 같다. 하나님은 마치 광야에서 우상 숭배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서로 치게 하셔서 그들을 징계하셨던 것처럼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하고 불신의 길을 걸어간 죄과를 이렇게 징벌하셨던 것이다.

    애초에 레위인이 음행한 첩을 취한 잘못의 회개하고 물러섰다면 이런 불행은 일어나지 않았다. 베냐민 지파가 자기 종족의 악을 근절하기 위해서 노력했다면 이런 불행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스라엘 지파가 베냐민과 더욱 대화하려고 하고 원만히 사태를 해결하려고 했다면 이런 불행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들 모두는 이 고리가 끊어지지 않고 계속될 때 수확할 불행의 열매를 분별하는 눈이 없었다. 그리고 그 결과 열매는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가 고스란히 담당해야 했던 것이다.

    어린 아이는 불장난의 위험성을 모른다. 눈앞에 불의 신기한 능력에만 몰입한다. 그러다가 큰 불이 난 후에야 불은 재미있고 유익한 것이지만 정말 위험한 것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체험한다. 이처럼 죄악은 마치 눈 앞에는 작은 불씨에 불과하지만 그것이 확대되고 성장했을 때 엄청난 결과가 있다는 것을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는 분별해야 한다.

    (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옛날에 어느 왕이 부정부패가 심한 신하들을 연회에 초대했다. 그들을 교훈하기 위해서 왕은 모든 신하들에게 한 가지 명령을 내렸다. 그것은 연회에 참석할 때 안주는 왕이 부담하니 술은 신하들이 준비해서 포도주 한 병씩을 꼭 가져오라는 것이다. 모든 신하들의 포도주를 한 항아리에 부어서 함께 연회를 즐기겠다는 계획이었다. 그러자 한 신하가 이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많은 신하들이 포도주를 가져오면 내가 가져가는 포도주 한 병은 얼마나 되겠나! 난 포도주 대신 물을 담아 가야지.” 그리고 이윽고 연회가 열리는 날 왕과 신하들은 진수성찬으로 차려놓고 연회장 가운데 술항아리를 놓고 둘러 앉았다. 왕은 신하들에게 명해서 가져온 포도주들을 항아리에 부으라고 했다. 그리고 항아리에서 포도주를 퍼다가 모든 신하들에게 따라주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인가? 술잔 속에 담긴 것은 포도주가 아니라 물이었다. 나 하나쯤 하는 신하들의 생각이 모아져 술을 맹물로 만든 것이었다.

    하나님은 사사기라는 성경을 통해 성도에게 교훈하신다. 성도는 하나님을 마음 속의 왕으로 모시고 살아야 한다. 그런 삶을 산다면 하나님 나라에 해를 끼치는 존재가 아니라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존재가 될 것이다. 죄악의 고리를 끊고 선한 영향력의 고리를 형성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공동체가 되자! 하나님이 천국의 문에서 맞아들이실 그 날까지 하나님을 마음속의 왕으로 모시고 경성하며 살아가시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기원한다.

     

    글작성 : 김세한 목자님

    글편집 : 김예영 자매

  • [복음 메세지] 비천한 자를 존귀한 자로 (삿11:1-11,29-40)

    [말씀 제목] 비천한 자를 존귀한 자로 (삿11:1-11,29-40)

    [설교자] 김세한 목자

    [설교일] 2022년 10월 8일(토) 안식일 예배

    인도라는 나라에는 ‘카스트 제도’라는 뿌리 깊은 신분 제도가 있다. 카스트 제도의 내용은 태어날 때부터 사람을 네 계급으로 나누는데,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가 그것이다. 그런데 네 계급 외에 카스트 제도 안에도 못 들어가는 최하층민이 있다. 이 계층을 불가촉천민으로서 달리트라고 한다. 태생적으로 상호간의 신분 이동은 할 수 없다고 한다. 이는 1950년에 법적으로 폐지되었지만 아직도 인도인의 문화 속에 영향력은 여전하다. 이런 신분 제도의 기원은 흰두교의 원시종교였던 브라만교에서 기원했다. 힌두교가 인도의 지배종교로 지속되는 한 인도 사회에 신분 계급 관념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카스트 제도 같은 태생적 신분 제도는 없지만 자본주의 사회체제를 도입한 결과 자본이 계급이 되는 사회로 변모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최근 유행어를 보면 시대의 가치관을 발견할 수 있는데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 등의 표현들이 자본으로 사람을 분류하려는 씁쓸한 우리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은 그들이 사용하는 용어도 쓰면 안 된다. 세상의 가치와 관념에 휘둘리게 되면 우리는 속게 되기 때문이다. 천국의 가치와 기준으로 자신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와 관념의 잣대로 나 자신을 평가하면서 불행하다고 생각하고 남들도 그렇게 평가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갈 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

    나는 오늘날 나의 존재의 가치에 대해서 하나님이 평가하시는 기준으로 생각하고 행복한 존재임을 발견하고 있는가? 아니면 세상의 가치 기준에 휘둘려서 자신을 불행한 존재로 비하하고 있지 않는가?

    오늘은 비천한 신분의 사람 입다가 사사가 되어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존귀한 자가 될 수 있었던 길이 어디에 있었는지 살펴보고 함께 은혜를 나누는 시간을 가지고자 한다. 사사시대 길르앗이란 사람이 기생에게서 낳은 아들이 있었다. 그 낳은 아들의 이름은 입다였다. 그는 서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집안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학대받았다. 결국 배다른 형제들로부터 쫓겨났고, 쫓겨나면서 재산 한 푼도 받지 못하고 떨려 났다. 혈혈단신 돕이란 땅에 거하게 되었는데 어느덧 이곳저곳을 떠돌던 사람들이 모여들어 부랑민의 우두머리가 된다. 이렇게 태생부터 비천한 처지였던 입다에게 어느 날 기회가 찾아왔다. 하나님은 우상숭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암몬 족속을 보내 괴로움 당하게 하셨고 그것은 전쟁까지 이르게 되었다. 암몬 족속이 쳐들어오는 위기상황에서 길르앗 장로들은 과거에 자신들이 쫓아낸 입다를 찾아가게 된다. 입다에게 전쟁을 수행할 장관이 되어 달라고 부탁을 하는데, 입다는 이스라엘을 인도할 지도자 신분까지 약속받고 그 제안을 수락하게 되고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입다에 대한 이 이야기는 세상 속에서 상처와 아픔으로 얼룩진 비천한 자일지라도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지면 존귀한 자가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도대체 입다는 어떤 사람이었기에 비천함에서 존귀함에 이를 수 있었을까?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이런 것이다.

    첫째, 신앙은 상처와 아픔을 치유하는 명약이다.

    (삿 11:1-2) 『[1] 길르앗 사람 큰 용사 입다는 기생이 길르앗에게 낳은 아들이었고 [2] 길르앗의 아내도 아들들을 낳았더라 아내의 아들들이 자라매 입다를 쫓아내며 그에게 이르되 너는 다른 여인의 자식이니 우리 아버지 집 기업을 잇지 못하리라 한지라』

    사람은 자기가 노력해서 개선할 수 있는 영역이 있고 개선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 스스로 개선할 수 없는 영역 가운데 태생이란 것이 있다. 태생은 자기 선택이나 노력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입다는 태생이 비천했다. 그런데 그의 고통은 여기에서 끝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했다. 그는 배다른 형들로부터 쫓겨났고 자기 몫의 재산은 한 푼도 받지 못했다. 사람이 건실한 인격체로 성장하려면 어렸을 때 가정에서부터 사랑을 경험해야 한다. 그런데 입다는 태어나면서부터 서자라는 낙인과 더불어 가정으로부터 거절당하고 쫓겨나는 상처와 아픔을 경험했다. 본문을 보면 입다의 추방은 한 가정에서가 아니라 한 가문의 차원에서 이루어진 일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입다에 대해서 성경은 ‘서자’라고 먼저 언급하지 않고 본문 1절 말씀처럼 ‘큰 용사’라고 소개하고 있다. 여기서 ‘큰 용사’란 ‘전쟁의 명수’ ‘싸움의 용사’ 즉 전쟁에 익숙한 자를 의미한다. 아마도 그에게는 전쟁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은사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은사 외에 그의 마음 속에 존귀하게 될 수 있는 다른 요소가 들어 있었다.

    (삿 11:9)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데리고 본향으로 돌아가서 암몬 자손과 싸우게 할 때에 만일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붙이시면 내가 과연 너희 머리가 되겠느냐』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한 말에서 우리는 입다의 마음 속에 여호와 신앙이 들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내가 그들과 싸워 이기면’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붙이시면’이라고 말했다. 이 표현은 전쟁의 승패가 내 능력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생각을 반영하고 있다. 그의 마음 속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마음이 있었다. 또 다른 곳에서 여호와 신앙이 발견된다.

    (삿 11:11) 『이에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과 함께 가니 백성이 그로 자기들의 머리와 장관을 삼은지라 입다가 미스바에서 자기의 말을 다 여호와 앞에 고하니라』

    입다가 미스바에서 자기의 말을 다 여호와 앞에 고했다. 이는 입다가 하나님께 기도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는 뜻이다. 여호와께서 전쟁의 승패를 좌지우지한다는 믿음, 여호와 앞에 자기의 말을 다 고하는 사람, 그런 신앙이 있던 사람이 바로 입다였다. 이것이 입다가 비천한 신분에서 존귀한 자가 될 수 있는 첫 번째 비결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비천한 처지였지만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존귀한 자가 되는 예를 많이 발견한다. 그 가운데 역대상에 야베스라는 인물이 있다.

    (대상 4:9) 『야베스는 그 형제보다 존귀한 자라 그 어미가 이름하여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역대상의 이 ‘야베스’란 이름은 ‘고통’이란 뜻이다. 그 어머니가 고통 중에 낳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태생적으로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거나 산모가 순탄하지 않은 탄생의 비화를 가졌던 것 같다. 그러나 야베스는 성장 후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있었다. 그는 하나님께 자신의 지경을 넓혀 달라는 간절한 기도를 드렸고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어주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상 4:10)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입다에게도 야베스와 같은 아픔과 고통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입다의 발목을 잡아 그의 인생을 넘어뜨리지 못했다. 그는 돕 땅에서 여러 사람들을 이끄는 리더가 되었다. 그 비결이 무엇이었는가? 바로 여호와 신앙이다. 신앙에는 이처럼 상처를 극복케 하는 능력이 있다. 신앙을 가진 자는 세상이 자신을 쓰레기 취급해도 ‘너는 내 형상을 닮은 존귀한 자야!’ 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나를 ‘서자’라고 손가락질해도 ‘너는 세례를 통해 하늘에서 태어난 내 아들이야!’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리 깊은 상처와 쓰라린 아픔으로 얼룩진 인생일지라도 하나님을 의지하면 치료되고 회복될 수 있고 존귀하게 될 수 있다. 그래서 믿음은 사람의 영혼을 고치는 명약이다. 과거에 어떤 상처와 아픔이 있더라도 입다가 그러했던 것처럼 오로지 하나님만 섬기는 믿음으로 치유받고 존귀하게 되시는 저와 성도님들 되시길 바란다.

    (시 16:3)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

    둘째, 신앙에는 원수와 화목하게 되는 복이 있다.

    (삿 11:7)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전에 나를 미워하여 내 아버지 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이제 너희가 환난을 당하였다고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입다가 길르앗 백성의 머리와 장관이 된 과정을 주목하자! 기드온처럼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나 그를 부르고 사사로 세운 것이 아니다. 삼손처럼 태중에서부터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것도 아니다. 이스라엘의 길르앗 족속 장로들이 직접 그에게 나아가 ‘장관’이 되어 달라. ‘머리’가 되어 달라는 부탁으로 사사로 발탁된다. 여기에 숨은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다. 입다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그렇게 천대하고 내쫓은 자들이 찾아와서 우두머리가 되어 달라고 부탁했을 때 입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이처럼 나를 힘들게 하고 모욕했던 사람에게 사과받고 화목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다. 입다가 그동안 여호와 하나님만 경외하고 그분을 의뢰하는 신앙을 지켰기 때문에 그에게 주어진 일종의 상급이었던 것이다. 창세기에 보면 믿음의 조상 삼인이 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다. 그런데 이 세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인생의 황혼기에 원수와 화목케 되는 일을 체험했다는 사실이다. 과거에 나를 괴롭히던 자들이 나를 찾아와 화친의 악수를 청했던 것이다.

    (창 21:22) 『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창 26:26-27) 『아비멜렉이 그 친구 아훗삿과 군대장관 비골로 더불어 그랄에서부터 이삭에게로 온지라 (27) 이삭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미워하여 나로 너희를 떠나가게 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창 33:10) 『야곱이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형님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청컨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 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이처럼 성도님들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원수 관계의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미움을 거둘 수 없게 깨져버린 관계가 있을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을 경외하고 올바른 신앙의 길에 가다보면 미래의 언젠가 그가 찾아와 악수하고 화목케 되는 날이 있다는 것이다. 믿음의 조상 삼인에게도, 그리고 오늘 본문의 입다에게 임했던 화평의 복이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는 저와 성도님들의 것이 되기를 기원한다.

    (잠 16:7)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

    셋째, 신앙에는 좋은 성품을 가지는 복이 있다.

    (삿 11:27-28) 『[27] 내가 네게 죄를 짓지 아니하였거늘 네가 나를 쳐서 내게 악을 행하고자 하는도다 원컨대 심판하시는 여호와는 오늘날 이스라엘 자손과 암몬 자손의 사이에 판결하시옵소서 하나 [28] 암몬 자손의 왕이 입다의 보내어 말한 것을 듣지 아니하였더라』

    사람은 상처와 아픔을 경험하면 난폭하고 모난 성격이 되기 쉽다. 남을 원망하거나, 환경을 원망하거나, 부모나 태생을 원망하는 자가 될 수도 있다. 자기를 잃고 방황하는 인생이 되기 쉽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좋은 은사를 받은 사람도 방탕으로 치달아 인생을 망친다. 태생이나 자란 환경으로 볼 때 입다는 그럴 위험성이 높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암몬과 전쟁하기 전에 사신을 보내 담판을 짓는 장면을 보면 얼마나 평화를 사랑하는 좋은 성품의 사람인지 가늠할 수 있다. 그는 암몬 족속과 즉시 전쟁을 수행하지 않았다. 먼저 협상을 통해 전쟁을 피할 수 있는 길을 모색했다. 이처럼 입다는 전쟁보다 협상을 원하는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아마도 신앙을 가졌기에 이런 성품의 사람으로 성장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화평케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이처럼 여호와 신앙의 길을 간 입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또 다른 상급이 있었다. 그 상급이란 하나님 닮은 아름다운 성품이다.

    (잠 4:8) 『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만일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오늘날 우리 성도님들 가운데 입다와 같은 깊은 상처와 쓰라린 아픔의 과거를 가지고 있는 분들이 계신가? 그렇다면 실망하지 말라. 사람도 환경도 원망하지도 말고 하나님의 섭리로 주어진 것임을 믿자. 결심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의 길에 정진하면 비천한 나도 존귀한 자가 되게 하실 것이다. 좋은 성품을 가지고 존귀한 인생을 살게 하실 것이다. 부디 상처와 아픔으로 뒤범벅된 인생의 전쟁터에서 믿음으로 치유받고 승리하시는 입다와 같은 믿음의 ‘큰 용사’가 다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기원한다.

    글작성 : 김세한 목자님

    글편집 : 박은우 형제

    https://youtu.be/7LdzDnn3Ez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