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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음메세지] 십자가 주변의 인물(6)-예수와 동행한 여인들(눅8:1-3, 마27:55-56, 막15:40-41)

    [말씀 제목] 십자가 주변의 인물(6)-예수와 동행한 여인들(눅8:1-3, 마27:55-56, 막15:40-41)

    [설교자] 김세한 목자

    [설교일] 2023년4월8일

    우리는 구약 성경 속에 등장하는 믿음의 인물들 가운데 가끔 여인들의 이름을 발견하곤 한다. 여리고 성의 기생 라합, 사사 시대를 이끌었던 여자 사사 드보라, 서원 기도를 통해 사무엘을 낳은 여인 한나, 시어머니를 위해 희생한 모압 여인 룻, 민족의 위기를 모면하려고 목숨을 걸었던 황후 에스더 등 믿음의 여인들이 있다. 그리고 평범하지만 신앙인들에게 잔잔한 교훈을 전달하는 소박한 믿음의 여인들도 있다. 엘리야 선지자를 접대한 사르밧 과부, 엘리사 선지자를 위해 섬세히 배려한 수넴 여인,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가 병이 낫게 만든 한 이름 없는 소녀 등 이렇게 성경에서는 믿음을 언급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여인들이 발견된다.

    십자가 사건이 있었던 그 때 그 현장에도 여인들이 있었다. 오늘은 십자가 현장의 인물 가운데 주님을 따르고 섬겼고 동행했던 여인들의 족적을 살펴보고 그녀들의 신앙이 오늘날 우리에게 교훈하는 바가 무엇인지 함께 생각하고 은혜를 나누는 시간을 가지고자 한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사시는 기간 동안 그 분 곁에서 섬기는 여인들이 있었다. 누가는 당시 사회적 약자이지만 믿음의 주역인 여인들에 대한 관심이 깊었다. 그래서 마태나 마가와는 달리 여인들의 이름을 나열할 정도로 그 여인들에 대해 상세히 알고 있었다.

    (눅 8:1-3) 『이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반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2)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3) 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

    예수님의 곁에는 열 두 제자 뿐만 아니라 섬기는 여인들도 있었다. 그 여인들 중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여인은 바로 일곱 귀신이 들렸다 나간 자 막달라 마리아였다. 그리고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라는 여인도 있다. 이외에도 다른 여자들도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른 여자들은 구체적으로 누구일까?

    (막 16:1)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우리는 마가복음 16장에서 또 다른 여자들을 발견할 수 있다. 야고보의 어머니인 마리아와 살로메라는 여인이다. 이처럼 예수님의 주변에는 상당히 많은 여인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을 섬기고 있었다. 섬기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 그러면 이 여인들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신앙의 모범을 교훈하고 있는가?

    첫째,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모범.  

    (막 16:9)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누가복음 8장 뿐만 아니라 마가복음 16장에도 막달라 마리아가 첫 이름으로 등장한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처음으로 모습을 보이신 사람이었다. 그녀는 본래 일곱 귀신이 들렸었고, 예수님이 그녀를 치료해 주셨다. 그 은혜를 잊을 수 없어서 그녀는 주를 섬겼고 그 섬김은 주님이 죽으신 이후에도 지속되었던 것이다.

    아마도 막달라 마리아 외에 예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은 여인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예수님 일행을 섬기기 시작한 이유가 어디에 있었는가? 바로 이 여인들의 봉사와 섬김의 이유는 주님께 은혜를 입었고, 그 은혜를 기억하고 있었고, 감사했고 봉사와 섬김의 열매로 나타냈던 것이다. 이것은 주님이 관심을 두시는 열매이기도 하다.

    (눅 17:17-18)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언젠가 예수님이 열 명의 문둥병자를 치유해 주었을 때 그 중 한 사마리아 사람만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하다고 말했다. 또한, 귀신을 쫓아내어준 사람은 여럿 있었다.이렇게 여러 사람이 은혜를 입었지만 지속적으로 주님 곁에서 봉사와 섬김의 삶을 실천한 인물이 막달라 마리아였던 것처럼,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감사하는 일은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은혜 입으면 주님께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는 교훈을 발견할 수 있다.

    한국 교회 중에 손님 접대로 섬김의 믿음을 실천하는 장로님 내외 분이 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남편인 장로님은 젊었을 때 아내가 대만 손님을 지극히 섬기는 모습을 못 마땅히 여겼다. 또 회당 건축할 때 거금의 헌금을 한 것을 알고 더욱 못마땅해 했다. 그런데 장로님 부부가 대만을 방문해서 귀빈 대접을 받고는 그들의 섬김에 매우 감동했다. 그 섬김의 모습에 감동해서 장로님도 사모님처럼 손님 접대에 섬김을 다하게 되었다. 그리고 대만에서는 한국에 가면 모 장로님을 꼭 찾으라고 소문이 나기도 했다.

    섬기는 일에는 돈, 체력, 시간이 소모된다. 모든 수고와 비용을 상쇄하고도 남는 감사와 즐거움과 기쁨이 있다.

    오늘날 성도님들은 예수님이 내게 주신 구원의 은혜에 대해서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계시는지? 그리고 그 감사의 마음이 어떻게 나타나고 계신지? 막달라 마리아처럼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 수행하는 여러 봉사의 모습을 통해서도 나타낼 수 있다. 형태는 어찌되었건 항상 주님께 구원에 대한 감사의 열매를 나타내시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자.

    (롬 12: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둘째, 주님의 십자가에 동행하는 모범.

    (요 19:25)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예수님의 곁에서 가장 가까운 자로 자처했던 12 제자들은 정작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모두 그분을 떠나갔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 지실 때 울며 골고다의 현장까지 동행한 여인들이 있었다.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셔서 백성들의 주목을 받는 순간에도 십자가에서 가장 비참한 일을 당하는 순간에도 이 여인들은 주님의 곁을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성경은 그 상황에서 여인들이 나타낸 슬픔의 표현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눅 23:27-28) 『[27]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 오는지라 [28]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예수님이 걸어가시는 수난의 길을 좇아간 자들은 남자들이 아닌 여자들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자 이동하신 길에도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신 순간에도 그 곁을 떠나지 않고 동행한 여인들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신앙의 모범을 전달하고 있는가? 일반적인 사람들은 밝고 기쁘고 행복한 일에는 동행하길 원한다. 그러나 어둡고 슬프고 불행한 일에는 동행하길 원하지 않는다. 마음이 슬퍼지고 어둡고 무거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이 원하시는 신앙의 길은 바로 십자가와 동행하는 길이다. 그래서 성도가 슬픈 자들의 슬픔에 동참하고 아픈 자들의 아픔에 동참할 줄 알기를 원하신다. 이 여인들이 십자가와 동행한 모습은 바로 그런 믿음의 모범을 남기고 있다.

    주님은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부디 주님의 기쁨과 희락 뿐만 아니라 주님의 슬픔과 아픔에도  동참할 줄 아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길 바란다.

    (롬 12:15-16) 『[15]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16]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셋째, 복음 전파 사역에 참여하는 모범. 

    (요 20:18-19) 『[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예수님이 무덤에서 부활하셔서 최초로 모습을 나타낸 사람이 누구였는가?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아니라 막달라 마리아라는 여인이었다. 주님이 주신 그 은혜에 너무 감사해서 항상 주님을 따라다니며 섬겼던 여인, 그랬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주님은 부활하신 당신의 모습을 가장 먼저 나타내셨고, 마리아는 그 소식을 다른 이들에게 전파했다.

    누군가 내게 베풀어준 은혜에 대해 감사하고 그 감사를 표현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그런데 그 사람이 죽어서 눈앞에서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은혜를 기리고 감사한다면 더 아름다운 일이다. 다윗 왕은 죽은 친구 요나단에게 입은 은혜를 잊지 않고 다리를 저는 장애를 가진 그 아들 므비보셋에게 호의를 베풀지 않는가?

    하나님은 이런 성품의 사람을 사랑하신다. 또 성도가 모두 그런 신앙을 나타내기를 기대하신다. 우리는 모두 주님의 구원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다. 십자가 사건은 이미 이천년 전 사건이고 내가 세례 받은 사건도 이미 수년 전 사건이지만 감사의 마음을 잃지 않고 항상 그 은혜의 감동 속에서 사는 것 이 또한, 감사의 마음을 품고 사는 것은 아름다운 일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구원의 은혜에 감사할 줄 알고 감사에 합당한 믿음을 나타내야 하는 것이다. 결국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후 그녀는 다른 여인들과 더불어 성령을 구하고 성령을 받고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는 복음 전파자의 삶을 살게 된다.

    (행 1:14)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사도행전에는 이름은 없고 그저 여자들이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마가의 다락방에서 모여 기도하던 그 여자들 안에 주님을 섬기던 여인들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이처럼 여인들은 주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성령 강림을 준비하며 복음 전파의 사명에도 참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십자가의 현장에 있었던 여인들에 대한 기록을 통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다. 구원에 은혜에 대해 섬김의 삶으로 화답할 줄 아는 저와 성도님들 되시길 바란다. 고통과 슬픔과 아픔의 처지에 있는 성도들과 동행해서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우는 저와 성도님들 되시기 바란다. 하나님이 내게 허락하신 은사와 형편대로 복음 전파의 사역에 참여하고 협력하고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란다. 십자가 현장까지 동행했던 그 여인들의 믿음의 길을 좇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길 예수 이름으로 기원한다.

    https://youtu.be/BGpIMX0VsMs

    글작성 : 김세한 목자님

  • 제1항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죄인을 구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대신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 승천하신 것을 믿으며 그분은 인류의 유일하신 구주시며 천지의 주재시고 홀로 하나이신 참 하나님이심을 믿는다.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초월해서 계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스스로의 감각으로 그분을 볼 수도 들을 수도 만질 수도 없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이 자신의 모습을 계시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역사 속에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해 주시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이천년 전 “예수 그리스도”(그리스도란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께서 이 땅에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이 땅에 오신 하나님 자신 이십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실 때 인간을 만물 가운데 가장 존귀한 피조물(조물주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로 만드셨습니다.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어졌고 그로 인해 그분과 교제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은 인간에게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위임하셨습니다. 이는 다른 피조물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는 인간에게만 주어진 특권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뿐만 아니라 만물에 대한 관리까지 맡기시고 에덴동산 안에서 모든 것을 누리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에게 금지하신 한 가지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동산 중앙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명령이 주어진 것은 하나님 자신이 창조주요, 인간은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뜻도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아담과 하와는 마귀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이 금하신 나무의 실과를 따먹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에덴동산에서 추방되고 이 땅에서 땀흘리며 수고하며 살다가 다시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사망의 굴레에 갇히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 일에 대해서 왜 사망에 이르는 무거운 징벌을 내리셨을까요? 이 일을 통해 아담과 하와는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다스리도록 맡기신 하나님의 말씀보다 마귀의 말을 더 신뢰하는 모순된 모습을 보였습니다. 게다가 마귀가 스스로 교만해져서 하나님처럼 높아진 것처럼 아담과 하와도 피조물의 자리를 지키지 않고 하나님처럼 높아지려는 교만한 마음을 품은 결과로 빚어진 일입니다(참조. 사 14:12 롬5:12-14). 이처럼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결과로 주어진 결과는 인간이 사망의 저주 아래 놓이게 된 것 이외에도 여러 가지 측면에서 그 영향이 끼쳐졌습니다. 그 일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피조물 사이에 분열과 파괴의 현상이 일어납니다. 조화와 질서 가운데 창조된 아름다운 만물은 모두 인간을 위해서 지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한 결과 만물에도 부조화와 무질서가 찾아왔고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파괴되고 최후에는 결국 멸망이 예정된 것입니다. 만물 가운데 가장 존귀한 피조물로 만들어진 인간은 결국 죽음 이후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고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아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9:27)

    비록 인간은 하나님을 반역하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질렀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인간을 사랑하셔서 이 상황을 해결할 방법을 일찍이 계획하셨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셔서 인간을 대신하여 죄의 대가를 치르시는 것이었습니다. 이천 년 전 이 땅에 내려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 자신이시오,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신 조물주 하나님이셨습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요일 1:1)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일 1:14)

    이처럼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신 사건을 ‘성육신’(Incarnation 하나님이 태어났다는 표현은 부적절하기 때문에 사용하는 표현)이라고 표현합니다. 구약 성경은 이 성육신 에 대해서 무려 40여 차례나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여러 차례 예언했다는 사실을 보면 성육신은 이미 오래 전부터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성육신은 인간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첫째, 하나님은 범죄한 인간을 여전히 사랑하시고 그가 구원받기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딤전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일반적인 사람들은 선한 사람이나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에게 가끔 호의를 베푸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악인을 위해서, 더욱이 내게 해를 입힌 사람에게 호의를 베풀고 희생하는 경우는 매우 드문 경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마귀에게 순종하여 반역의 길을 간 인간에게 최고의 호의를 베푸셨습니다. 그 호의란 사망의 그늘에 놓인 인간의 상황을 해결하시고자 ‘조물주’이신 그분이 ‘피조물’의 형상을 입고 기꺼이 이 땅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육신하신 일은 인간이 비록 범죄했지만 여전히 그를 사랑하시고 불쌍히 여기신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둘째, 인간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3:23) 모든 사람이 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신 사건은 인간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만약 인간 스스로 구원할 수 있는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하나님이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실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자기 능력으로 극복할 수 없고 반드시 타인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들을 만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가고 있으면 그 사람은 스스로 그 상황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혹 아무리 수영을 잘한다고 해도 급류의 상황에서 헤엄쳐 자신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외부로부터 구조대원이 구조 장비를 통해 도움을 주어야 그 상황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예를 들자면 어떤 노동자가 밖에서만 문을 열 수 있고 안에서는 문이 열리지 않는 냉동 창고에 갇혔다고 합시다. 냉동 창고 안에 들어갔다가 실수로 문이 닫히면 반드시 밖에서 열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그 상황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망의 그늘에 놓인 인간이 그 굴레에서 스스로 빠져 나올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따라서 성육신은 인간 스스로의 능력으로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셋째, 하나님이 자기를 부인하는 겸손을 보이셨습니다.

    (요일 4: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2:7) 오히려 자기를 비어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일은 그분의 겸손과 사랑을 증거합니다. 2005년 일본의 아키히토(明仁) 일본왕의 장녀 노리노미야 공주는 평범한 공무원과 결혼하였습니다. 그런데 일본 왕족이 평민과 결혼하게 되면 왕족이라는 자기 신분을 잃고 평민이 되어야 하는 규율이 있습니다. 따라서 결혼하게 되면 과거 왕실에서 누렸던 모든 혜택도 상실하는 상황을 감내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사랑하는 한 남자 때문에 모든 것을 기꺼이 포기하고 결혼을 선택합니다. 이처럼 사랑은 때로 자신의 특권을 기꺼이 내려놓게 만듭니다. 그리고 낮아지게 만듭니다.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인간의 몸이 되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높고 높은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 낮아지신 것을 의미합니다. 또 인간을 사랑하시되 조건없이 베풀어주시는 아가페의 사랑을 나타냅니다.

     

    1) 예수님은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대신 죽으셨습니다.

    출애굽 시대에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달했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이 내려주신 율법을 다 준수하겠노라고 굳게 맹세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때로는 율법을 범할 수 있는 연약한 존재임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율법만 주시지 않고 혹 범죄할 경우 죄책을 면하도록 소, 양, 염소, 비둘기, 곡식가루를 제물로 삼아 속죄의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성막의 제도까지 주셨습니다. 만약 어떤 자가 율법을 범하게 되면 흠이 없는 가축을 성막으로 끌고 와서 그 가축에게 안수하고 죽여서 하나님께 제물로 불살라 드리고 피를 제단 주변에 뿌리는 제사 의식을 행해야했습니다. 그 후에야 비로소 범죄한 자는 하나님께 죄사함을 받고 사망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9: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함이 없느니라

     

    구약 시대 유대인들의 동물 제사 제도는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제사의 그림자입니다. 신약 성경의 저자들은 이천년 전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십자가 사건은 한 유대인 청년의 억울한 죽음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바로 모든 인류의 죄값을 대신 치르신 일종의 제사였다고 말합니다. 또 십자가를 지셨던 예수님 자신도 제자들에게 그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육체를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셔서 인간이 처한 사망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9:13-14) [13] 염소와 황소의 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벧전 1:18-19) [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로 한 것이니라

     

    (26: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언약의 피니라

     

    2) 예수님은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언대로 죽으실 뿐만 아니라 예언대로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구약 성경도 그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직・간접적으로 예언하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 ‘요나’라는 이름의 선지자가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여 도망가다가 하나님의 섭리로 물고기 뱃속에 갇히게 됩니다. 그 후 그가 뉘우치고 회개하자 사흘 만에 물고기가 그를 토해내서 살아납니다. 예수님은 구약 시대의 이 사건을 인용하시면서 곧 자신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할 것에 대한 예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2:40)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시편 16편은 다윗이란 인물이 지은 노래입니다. 그 노래 가운데 예수님의 부활을 예언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10절에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서 ‘내 영혼’이란 겉으로 보면 다윗 자신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행 2:29-31)는 다윗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증거합니다. 그렇게 보는 근거는 다윗은 이미 죽어서 그 무덤이 자신들의 곁에 있으니 다윗에게 적용될 말씀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6:10)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2:31)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이처럼 예수님은 성경의 예언대로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뿐만 아니라 부활도 믿어야 합니다. 만약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많은 모순점들이 발생합니다. 만약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부활도 없다는 뜻이고, 우리의 부활이 없다면 신앙생활의 목적도 사라집니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전하는 복음도 거짓말이라는 뜻이고 예수님과 제자들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정하면 모든 것들을 부정하게 되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긍정하면 모든 것들을 긍정하게 됩니다.

    (고전 15:17-19) [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8]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재물, 병나음, 마음의 평안, 출세, 권세와 같은 모든 것들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의 궁극적 목표는 그런 것을 얻고 누리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목표는 영원한 생명을 얻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신앙생활에 힘쓰는 궁극적인 목적이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최고의 복락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처럼 성도도 부활할 미래가 있다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부활한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그 때 나타날 현상과 부활의 과정에 대해서까지 매우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자세히 밝히고 있다는 것은 우리의 부활이 확실하다는 뜻입니다.

    (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도 살리시리라

     

    (살전 4:16-17) [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3) 예수님은 인류를 구원하실 유일한 구세주이십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모든 인류에게 구원을 줄 수 있으려면 첫째, 전 인류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 하고 둘째, 전 인류를 구원할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사랑이 있더라고 능력이 없으면 아무 것도 줄 수 없습니다. 또 아무리 능력이 있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심으로 인류에 대한 사랑을 증명해 보이셨고 부활하심으로 인류를 구원하실 능력을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인류사에서 어떤 종교의 교주나 훌륭한 성현도 죽음을 경험했거나 죽음에서 부활하였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 없습니다. 더욱이 그 죽음이 인류를 위한 것이고 부활이 또한 인류를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오로지 우리가 믿는 예수님만이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인류에 대한 사랑과 구원의 능력을 증명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류를 구원하실 유일한 구세주가 되실 수 있는 것입니다.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2: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고전 1: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세상은 기독교를 일컬어 독선적이라고 비판합니다. 다른 길은 없고 예수님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유일성에 대한 주장은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선언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분은 언젠가 제자들에게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살펴보면 이 보다 독선적인 선언은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자신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것은 다른 길은 모두 틀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독교라는 종교의 배타성은 바로 이 선언에서 출발합니다. 이와 같은 유일성은 제자들도 분명히 깨닫고 고백한 내용이었습니다. 사도행전에 초대교회를 막 시작한 사도와 성도들은 유대인의 산헤드린 공회(이스라엘의 종교재판소) 앞에서 예수님의 유일성에 대해서 고백했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 사실은 오늘날 우리도 같은 믿음을 가지고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 불신자들은 큰 의문이 있습니다. ‘내가 만나보지도 않은 수천 년 전의 인물 아담 한 사람으로 인해 왜 내가 죄인이 되어야하고 사망의 저주에 놓여야 하는가?’하는 의문입니다. 그런데 이 의문은 예수님을 믿으면 모두 풀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 한 사람으로 인해 일어난 모든 문제를 예수 한 분으로 인해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인류의 첫 번째 아담이 일으킨 문제를 인류의 두 번째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 책임지고 해결하게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을 부당하게 처벌한 것도 아니고 아담의 불행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무책임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십자가로 당신 자신이 모든 것을 책임지시려는 깊은 사랑과 관용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런 상황에 대한 성경의 명료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5: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5:19)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