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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음 메시지] 구원의 핵심진리, 안식일

    제목: 구원의 핵심 진리, 안식일

    일시: 2024년 10월 25일 안식일 저녁 예배

    설교자: 장종규 목자

     

    1. 안식일이란?

    성경에 등장하는 ‘안식일’은 무슨 날일까요? “안식”은 ‘자신이 하던 일을 끝내고 쉰다’라는 의미입니다. 안식이라는 단어가 가장 처음 등장하는 성경은 창세기입니다.

    (창2:2)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창세기에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는 내용뿐 아니라 창조하신 일을 다 마치시고 안식하라는 말씀이 기록되었습니다. 안식일의 기원이 사람의 명령이 아닌 창세 때의 하나님의 명령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성경은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음을 기록하는데, 성경이 기록하는 안식일은 일곱째 날, 곧 토요일입니다. 정확히는 저녁부터 하루를 세는 성경의 기준으로 금요일 일몰부터 토요일 일몰에 해당합니다.

     

    2.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이유

    성경은 이 안식일을 지키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에 어떤 의미가 있기 때문에 안식일을 지키라고 말씀하시는 걸까요?

     

    첫째,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출20:8~11)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칠 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출애굽기 20장의 내용은 십계명에 관한 내용입니다. 네 번째 계명에서 하나님 백성들에게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11절에 나오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 일에 쉬셨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기념하기 위해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지키는 가운데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기억할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둘째, 구원자이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신5:12~15)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게 명한 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신명기에서는 앞서 살펴본 출애굽기와 비슷한 내용이지만, 자세히 보면 조금 다른 내용이 있습니다. 바로 출애굽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명기는 과거 애굽에서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백성을 자유민이 되도록 하신 구원을 기억하며 안식일을 지킬 것을 명합니다. 이렇게 안식일에 대한 동일한 두 말씀에서 각자 창조와 구원을 말하시는 것을 통해, 구원은 곧 창조임을 알 수 있습니다. 구원받았다는 것은 애굽(죄)의 종이 아닌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뜻인데, 이러한 신분의 변화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창조됨을 의미합니다. (사43:21).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그 백성을 지키신다고 말씀하십니다(시121:4). 전능하신 하나님이 지키시니 하나님 백성보다 안전한 상태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 삼아 주신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하고 찬양하길 바라십니다.

    셋째, 안식일을 지킴으로 영육 간에 복을 받습니다.

    (창2:3)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하나님께서는 이 안식일에 복을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안식일을 복되게 하셨다는 것으로, 안식일을 지키면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복은 영육 간에 주시는 복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안식일을 지킬 때 만나와 메추리로 그들의 필요를 채우신 것처럼,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특별히 병 고침의 은혜를 베푸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에 모여서 예배할 때 성도에게 필요한 말씀을 주셔서 영의 양식을 채우십니다. 실제로 많은 성도님이 한 주 동안 힘들었다가 안식일에 말씀을 듣고 힘을 얻거나, 말씀을 통해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입니다.

    넷째, 안식일을 거룩하게 구별하셨습니다.

    (출31:13)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로 알게 함이라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나의’ 안식일이라고 말씀하시며 안식일이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표징, 곧 증거가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 곧 하나님의 날을 지키는 것이므로, 이를 하나님 백성인 증거로 보신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백성에서 끊어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출31:14).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분이므로 하나님 안에 거하려면 거룩해야 하는데,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면 점점 거룩함을 잃어서 결국에는 하나님 안에 거하지 못하게 됩니다. 생명이신 하나님 안에 거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죽음을 맞게 됩니다. 즉 안식일은 거룩함을 유지하게 해주는 날로 이를 지키면 구원에 이르게 되지만, 반대로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면 점점 구원에서 멀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섯째, 안식일을 통해 영원한 안식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안식이란 하나님 나라에 가서 누리게 되는 진정한 안식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안식을 누리기 전 세상에 살 동안에 안식일을 통해 그 안식을 준비하도록 하셨습니다.

    (히4:11)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안식일에는 성도가 같이 모여 예배드리고 교제하면서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 힘들었던 부분이 하나님 안에서 해결됨으로 마음의 평안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안식을 통해 영원한 안식을 소망하고, 더욱 하나님 백성으로서 합당한 삶을 살아가도록 안식일을 주셨습니다.

     

    3. 안식일에 대한 오해

    그렇다면 왜 오늘날 많은 사람은 아직도 안식일을 지키지 않을까요?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는 일요일, 즉 주일을 지킵니다. 주일을 지키는 이유는 예수님이 오신 이후에는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으므로 율법의 일부인 안식일을 지킬 필요도 없고, 도리어 예수님이 부활하신 일요일이 의미 있으므로 주일(일요일)을 지켜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주장이 사실일까요?

    (갈3:15-17) 형제들아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나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갈라디아서 말씀은 율법을 주시기 430년 전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언약을 나중에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를 안식일에 동일하게 적용해 보면, 안식일은 천지를 창조하실 때부터 만들어졌기 때문에 나중에 주신 율법에 속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얻게 됩니다. 물론 율법 속에는 안식일에 무엇을 해서는 안 되는지에 대한 방법에 대한 규례가 있고, 이러한 것은 율법에 속한 것이므로 예수님께서 오신 이후 오늘날은 지킬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안식일 그 자체는 율법의 속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십계명에 직접 주신 다른 말씀들도 오늘날까지 지켜야 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안식일도 동일하게 오늘까지도 기억하여 거룩히 지켜야 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한 날이 일요일이라는 주장도 명확한 근거가 없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일요일에 부활했다고 말하지 않고, 단지 사람들이 일요일 새벽에 갔더니 예수님이 보이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설사 예수님께서 일요일에 부활했다고 하더라도 성경 전반에서 아주 중요한 안식일이 다른 날로 변경되는 것이라면 반드시 성경에 언급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일요일에 부활했으므로 안식일을 대신해 일요일을 지킨다는 것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막7:6-8)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

    마가복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사람의 계명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헛되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겉으로는 섬기는 것처럼 보여도, 예수님께서 보시기에는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피조물이 창조주 하나님의 명령을 버리는 일은 있을 수 없는데, 오늘날 성탄절, 부활절 등 성경에 없는 절기를 지키면서 성경에 있는 말씀은 지키지 않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일을 결코 기뻐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사람의 계명을 우선하는 교만함에 진노하십니다.

     

    마무리하며

    (사58:13,14)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이니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날인 안식일을 내 중심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면 위와 같은 복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실제로 이와 같이 안식일을 지키면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받습니다. 안식일을 힘써 지킴으로 하나님 주신 복을 누리기를 원합니다.

    유튜브 설교방송 링크

    글| 오다은 자매

  • [복음 메세지] 어디를 가든지 이기게 하셨더라 (삼하8:1-14)

    [복음 메세지] 어디를 가든지 이기게 하셨더라 (삼하8:1-14)

    [말씀 제목]  어디를 가든지 이기게 하셨더라 (삼하8:1-14)

    [설교자]  김세한 목자

    [설교일]  2024년 5월 18일

    제국주의 시대를 논할 때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나라가 있다. 바로 현재의 영국이다. 현재는 유럽 서쪽의 섬나라이지만 소위 대영제국이라 일컫던 황금시대가 있었다. 1607년, 북아메리카의 버지니아주 제임스 타운을 시작으로 전 세계 약소국을 대상으로 정복하고 식민지로 삼아갔다. 그래서 1815년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이하는데 이 기간이 무려 백년이나 지속되었다. 1920년에 이르러 대영제국은 지구상의 모든 식민지를 합하면 면적이 무려 3,550만 제곱미터가 되었다. 이는 대한민국의 355배 되는 면적이고 현재 러시아 땅보다 2배 이상 큰 면적이다. 그래서 가장 잘나가던 때에 세계 육지 면적의 4분의 1이 바로 영국의 것이었다. 그래서 소위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별명이 붙었던 것이다. 그런 대영제국도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많은 빚을 지는 바람에 국력이 쇠퇴해지고 미국에 그 패권을 넘겨주게 되었다. 1997년 홍콩을 중국에 반환하면서 대영제국주의의 잔재는 완전히 정리가 되었다.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지배하고 착취하려는 모습은 작게는 사회 곳곳에서 발견될 수 있는 ‘우리의 현실’이다. 인간관계 속에도 있고, 기업과 기업 사이에도 있고, 단체와 단체 사이에도 갑을 관계가 있다. 이런 일면을 보면 소위 양육강식 적자생존이라는 강자의 법칙이 지배하는 것이 이 세상의 원리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루시려는 나라는 그런 원리가 지배하는 나라도, 사회도, 개인도 아니다. 하나님이 이루시려는 나라는 이 땅에 속하지 않은 원리가 지배하는 나라, 절대 공의와 사랑을 품으신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그런 나라였다. 그것을 이루시기 위해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왕이 되게 하셨고 그를 말씀으로 지도하셨다.

    (시 119:101-102) 『(101) 내가 주의 말씀을 지키려고 발을 금하여 모든 악한 길로 가지 아니하였사오며 (102) 주께서 나를 가르치셨으므로 내가 주의 규례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세움 받은 성도들은 오늘날 어떤 신앙의 길을 가고 있는가? 또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내가 어떤 길을 가고 있다고 고백할 수 있는가? 성도들이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이 이기게 해주시고, 형통한 길을 열어주시고, 땀 흘린 대가로 단 열매를 수확하게 하시기를 원한다. 그러나 육신의 눈으로 발견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영적인 눈을 뜨고 가려진 본질을 보고 있는가? 오늘은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이 이기게 해주셨다는 승리 기사를 통해 함께 생각하고 은혜를 나누는 시간을 가지고자 한다.

    다윗이 왕이 되어 처음 하고자 한 일은 언약궤를 자신의 성으로 모셔 오는 일이었다. 그 과정에서 웃사가 죽는 불미스러운 일도 있었지만 그것은 곧 다윗의 겸손한 영성과 신앙을 발견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언약궤 앞에서 어린 아이처럼 낮아져 춤을 추는 다윗에게 하나님은 소위 ‘다윗 언약’이라고 하는 중요한 언약을 주신다. 다윗은 하나님을 위해서 집을 짓겠다고 했지만 오히려 하나님이 다윗에게 내가 너의 집을 지어주마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 주셨던 것이 바로 다윗 언약이었던 것이다. 그 다윗 언약은 단순히 육적인 면에서 다윗의 혈통에서 왕위를 계승할 것이라는 뜻이 아니었다. 그것은 영적인 면에서 그리스도께서 그 후손 가운데 오실 것이라는 축복의 언약이었다. 이처럼 하나님께 언약을 받은 다윗은 그 언약에 대한 믿음을 품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출정한다. 그리고 블레셋의 도시를 쳐서 항복을 받아낸다. 뿐만 아니라 그 외에 모압과 소바, 아람과 아말렉, 하맛과 에돔 족속까지 굴복시킨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명실공히 팔레스틴에서 주도권을 장악한 최강국으로 부상하게 된다. 그래서 다윗의 이러한 전과에 대해 성경은 6절과 14절에서 두 번씩이나 동일하게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이기게 하시니라” 또 다른 반복구가 있는데 “조공을 드리니라.”(2) “조공을 바치니라.”(6)이다. 이것은 다윗의 이스라엘이 대영제국처럼 다른 나라를 정복해서 착취하고 압제하는 제국주의의 길을 갔다는 뜻이 아니다. 다윗이 이룬 육적 승리를 통해 성도와 교회가 경험해야 할 영적 승리를 표상하고 있다. 다윗을 통해 성도가 신앙의 길을 걸을 때 하나님은 이런 복을 주신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또 그런 복을 받는 자의 태도는 이러해야 한다는 것을 교훈하고 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그 메시지는 어떤 것인가?

    첫째, 약속을 믿으면 부끄러운 과거를 만회케 하신다.

    (삼하 8:1) 『(1) 이 후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쳐서 항복 받고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메덱암마를 빼앗으니라』

    ‘메덱 암마’는 블레셋의 수도였던 가드와 그에 종속되었던 네 성읍, 곧 가사, 아스돗, 아스글론, 에그론을 통칭하는 표현이다. 대상 18:1에서는 그래서 메덱 암마를 ‘가드와 그 동네’라고 기록했다. 이 기록으로 보아 다윗은 블레셋을 완전히 정복했다. 비유하자면 과거에는 블레셋을 다운시켰는데 이제는 블레셋을 아예 K.O시켜 버린 것이다. 그 결과 블레셋이 점유하던 전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이런 승리가 값진 이유는 다윗이 블레셋 가드에서 경험한 뼈아픈 과거 때문이다.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해 도망자 생활할 때 그는 블레셋의 도시 가드 땅에서 아기스 왕을 만나게 된다. 그때 침을 흘리며 미친 척하면서 위기 상황을 넘겼던 치욕의 과거가 있었다. 그런데 다윗은 그 가드에 항복을 받아냈다. 쉽지 않은 결과이다. 왜냐하면 사람에게 과거의 상처는 현재 극복 못하는 핸디캡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윗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나갔을 때 그 치욕의 역사를 만회한 것이다.

    이처럼 다윗이 블레셋의 도시들을 정복할 수 있었던 근원적 힘은 바로 그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붙들었기 때문이다.

    (삼하 7:27-28) 『(27)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의 종에게 알게 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집을 세우리라 하신고로 주의 종이 이 기도로 구할 마음이 생겼나이다 (28) 주 여호와여 오직 주는 하나님이시며 말씀이 참되시니이다 주께서 이 좋은 것으로 종에게 허락하셨사오니』

    이 약속의 말씀이 주어진 직후 다윗은 블레셋 사람들을 쳤다. 그래서 8장 1절에 ‘그 후에’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곧 다윗이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나가니까 블레셋의 도시들이 줄줄이 정복하게 되었고 그 결과 가드 땅에서의 부끄러운 과거를 씻어버리게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 신앙의 길을 가고 있는가? 성도님들 삶 속에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영적인 전쟁을 수행한 결과 나의 ‘메덱 암마’를 정복케 하시고 부끄러운 과거를 씻는 은혜를 주신다. 이런 복이 저와 성도들의 것이 되시기를 바란다.

    둘째,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승리의 열매를 주신다.

    (삼하 8:4) 『(4) 그 마병 일천칠백과 보병 이만을 사로잡고 병거 일백 승의 말만 남기고 그 외의 병거의 말은 다 발의 힘줄을 끊었더니』

    다윗은 소바 왕 하닷에셀에게서 탈취한 말 가운데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발의 힘줄을 끊었다. 똑같은 사건을 기록한 다른 성경을 보자. 역대상 18:3-4을 보면 그때 노획한 병거와 군사와 말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기록하고 있다.

    (대상 18:3-4) 『(3) 소바 왕 하닷에셀이 유브라데 강 가에서 자기 권세를 펴고자 하매 다윗이 저를 쳐서 하막까지 이르고 (4) 그 병거 일천 승과 기병 칠천과 보병 이만을 빼앗고 그 병거 일백 승의 말만 남기고 그 외의 병거의 말은 다 발의 힘줄을 끊었더니』

    다윗은 병거 일천 승, 기병 칠천, 보병 이만을 빼앗았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발견된다. 다윗은 빼앗은 병거 일천 승 가운데 일백 승의 말, 즉 10%만 남기고는 다 발의 힘줄을 끊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었는가? 왜냐하면 모세오경 가운데 한 권인 신명기에 이러한 말씀을 주셨기 때문이다.

    (신 17:16) 『왕 된 자는 말을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말을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말 것이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후에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이라 하셨음이며』

    모세의 율법에 이스라엘의 왕이 된 자는 말을 많이 두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었다. 말을 많이 두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해야지 자기 육신의 능력을 신뢰하지 말라는 뜻이다. 다윗은 신명기의 이 말씀을 기억하고 그대로 실천하고자 말 발목의 힘줄을 끊었던 것이다. 이런 다윗의 행동은 과거 사울왕의 행동과 비교하면 그가 얼마나 말씀에 순종하고 있는지 뚜렷해진다. 사울 왕은 어떠했는가?

    (삼상 15:18-19) 『[18] 또 왕을 길로 보내시며 이르시기를 가서 죄인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되 다 없어지기까지 치라 하셨거늘 [19]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의 악하게 여기시는 것을 행하였나이까』

    이처럼 사울왕의 마음은 탈취하는 일에 모아져 있고 말씀을 순종하는 일은 안중에도 없었다. 반면 다윗은 말의 발목 힘줄을 끊는 행위로 순종의 모습을 보였기에 하나님은 ‘다윗 언약’에 충실하셨던 것이다.

    구약 성경에서 다윗만큼 형통한 다른 한 사람이 있다. 여호수아 선지자이다. 그런데 형통만 같은 것이 아니라 형통의 이유도 똑같다. 그가 항상 승리한 비결이 어디에 있었는가?

    (수 1: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수 11:15) 『여호와께서 그 종 모세에게 명하신 것을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명하였고 여호수아는 그대로 행하여 여호와께서 무릇 모세에게 명하신 것을 하나도 행치 아니한 것이 없었더라』

    여호수아 역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의 명령을 받았고 그 명령대로 모든 것을 행했을 때 항상 승리하고 이길 수 있었다. 이런 사실에서 우리는 말씀에 대한 순종 여부가 항상 승리의 열매와 직결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2007년 3월 18일 서울국제마라톤 남자부 42.195㎞ 레이스에서 막판 1500여m를 남기고 대역전극을 펼치며 1위로 골인한 마라토너가 있다. 바로 이봉주 선수이다. 생애 35번째 풀코스를 완주이고 한국 역대 4위 기록이었다. 그런데 더 의미가 깊은 것은 그가 최근 3년간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해 ‘한물갔다’는 평가를 받던 터였고 38세의 나이는 마라톤 선수로는 환갑에 해당하던 때였다. 그런데 화려한 부활을 알리는 우승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이봉주 선수가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은 코치의 엄격한 지도를 순종했기 때문이다. 코치는 선수에게 시합이 가까워 오면 탄수화물을 피하고 고기만 먹인다. 한동안 고기만 먹이다가 시합 3,4일 전에 탄수화물을 같이 섭취시킨다. 그러면 몸에 축적되는 탄수화물의 양이 많아져서 레이스의 막판 스퍼트까지 끄떡 없이 달리게 된다고 한다. 이봉주 선수는 그 식사가 훈련보다 더 고통스럽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그런 고통을 인내하고 코치의 지도를 따랐기 때문에 우승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운동 선수가 코치의 엄격한 지도를 따라야 승리가 보장되듯이 신앙인은 인생의 코치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때 영적인 승리가 보장된다. 사울 왕처럼 세상의 것들을 취하려는 욕망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려는데 마음을 모으시는 성도가 되자. 거기에 축복의 열쇠가 있다.

    (요일 5: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셋째, 감사하는 자에게 더 큰 은혜를 주신다.

    (삼하 8:11-12) 『(11) 다윗 왕이 그것도 여호와께 드리되 저가 정복한 모든 나라에서 얻은 은금 (12) 곧 아람과 모압과 암몬 자손과 블레셋 사람과 아말렉에게서 얻은 것들과 소바 왕 르홉의 아들 하닷에셀에게서 노략한 것과 같이 드리니라』

    다윗은 정복한 나라로부터 조공을 받았다. 그것은 금 은 놋과 같은 귀금속들이었다. 다윗은 그것을 자기 사욕을 채우고자 받았는가? 그렇지 않다. 사울 왕은 전쟁에서 승리하면 탈취물로 자기의 기념비를 세우고 자랑거리로 삼는데 활용했다. 그러나 다윗은 달랐다. 그 물질을 여호와께 봉헌했다. 그래서 이렇게 드려진 금과 은과 놋이 나중에 그의 아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는데 재원으로 소용되었던 것이다.

    (대상 22:14-16) 『[14]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의 전을 위하여 금 십만 달란트와 은 일백만 달란트와 놋과 철을 그 중수를 셀 수 없을만큼 심히 많이 예비하였고 또 재목과 돌을 예비하였으나 너는 더할 것이며 [15] 또 공장이 네게 많이 있나니 곧 석수와 목수와 온갖 일에 익숙한 모든 사람이니라 [16] 금과 은과 놋과 철이 무수하니 너는 일어나 일하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실지로다』

    다윗은 이처럼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을 하나님께 봉헌했다. 그는 자기의 승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봉헌은 바로 그러한 믿음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윗의 그런 믿음에 대해 큰 복으로 다윗에게 내려주셨다. 곧 그 복의 후광이 아들 솔로몬에게까지 계승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성도가 하나님께 헌신의 삶을 살았을 때 하나님이 주시는 흔들리지 않는 복이 있다. 바로 부모의 신앙이 자녀들에게 유산으로 물려지는 것이다. 이 땅에서 이보다 값진 유산은 없다. 부디 이러한 복이 저와 성도들의 것이 되시기를 바란다.

    다윗 왕처럼 세상과의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시는 성도들이 되길 바란다. 언약을 믿고 나가서 과거의 부끄러움을 씻으시고, 말씀에 순종해서 승리의 열매를 수확하고, 감사함으로 복이 계승되게 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나라, 사랑과 공의의 원리가 지배하는 나라가 되는 기적의 목격자가 되시는 저와 성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한다.

     

  • [복음메세지] 하나님과 나 사이의 표징, 안식일 (출 31:12-18)

    [복음메세지] 하나님과 나 사이의 표징, 안식일 (출 31: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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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씀제목] 하나님과 나 사이의 표징, 안식일 (출 31:12-18)

    [설교자] 유바나바 목자

    [설교일] 2024년 2월 3일(토) 안식일 오전예배

    12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13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줄 너희로 알게 함이라 14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찌니 이는 너희에게 성일이 됨이라 무릇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죽일찌며 무릇 그 날에 일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쳐지리라 15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제 칠일은 큰 안식일이니 일하는 자를 반드시 줄일찌니라 16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켜서 그것으로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 17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며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제 칠일에 쉬어 평안하였음이니라 하라 18여호와께서 시내산 위에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마치신 때에 증거판 둘을 모세에게 주시니 이는 돌판이요 하나님이 친히 쓰신 것이더라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믿고 있을까요? 바로 성경 속에서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약속들을 믿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안식일을 지킵니다. 도대체 이 증표 안에 어떤 뜻과 권한, 축복들이 담겨져 있을까요?

     

    1.하나님께서 창조주라는 증표입니다.

    • (창 2:1-3)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창조물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 (창 1:27-28)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안식일을 지키지 못하는 이유는 먹고 사는 문제 때문입니다. 즉, 우리가 세계에 정복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세계에 있는 것을 다스리며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 (마 6:25-26)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하나님께서 공중의 새를 기르시고 들풀을 먹이실 수 있는 이유는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이 사람은 본인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안식일은 쉬는 날이 아닌 그치는 날입니다. 6일동안 육신을 위해 했던 염려와 근심을 그치는 날이 안식일입니다.

     

    2.나를 구별하셨다는 증표입니다.

    • (신 5:15)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하셨습니다.

    • (벧전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및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세례와 성령을 받은 구별된 자녀입니다. 구원의 증표가 이미 우리에게 찍혀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마땅히 안식일을 지키며 살아야합니다.

     

    3.하나님께서 누리셨던 평안을 누릴 수 있는 증표입니다.

    • (출 31:17) “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며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제 칠일에 쉬어 평안하였음이니라 하라”

    -하나님께서 먼저 제 칠일에 쉬어 평안을 누리셨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닮아 동물과 달리 영적인 존재로 만들어졌습니다. 육신의 일을 쉴 때 영혼이 쉴 수 있습니다.

    • 그렇다면 안식일에 일을 하는 목자님은 안식일을 범하고 있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안식일에 하고 있는 일은 영혼을 위한 일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영혼을 채우는 일을 노력해야합니다.

    • (출 31:14-15)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찌니 이는 너희에게 성일이 됨이라 무릇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죽일찌며 무릇 그 날에 일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쳐지리라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제 칠일은 큰 안식일이니 일하는 자를 반드시 줄일찌니라”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나의 영혼을 살리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온전히 지켜야합니다. 

     

    안식일을 지킬 수 있는 믿음을 위해 기도합시다!

  • [복음 메세지] 영적 전쟁의 승리 비결(삼상 17:32-50)

    [복음 메세지] 영적 전쟁의 승리 비결(삼상 17:32-50)

    [말씀 제목]  영적 전쟁의 승리 비결 (삼상 17:32-50)

    [설교자]  김세한 목자

    [설교일]  2023년 10월 28일

    1943년 세계 2차 대전에서 연합군의 모 항공대가 매우 특별한 임무를 받게 된다. 그 임무는 ‘모느’라는 댐을 폭파해서 인근 계곡을 침수시키는 것이었어. 그러나 고작 18대에 불과한 비행기로 수행해야 할 작전은 난이도가 매우 높았다. 작전은 구체적으로 비행기들이 시속 380km의 일정한 속도로 유지하다가 정확히 600m를 급강하해야 했다. 그리고 다시 수면 위 20m 높이를 유지하며 공중어뢰를 발사해 댐을 명중시키고 와야하는, 마치 서커스와도 같은 그런 작전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작전은 성공했고 그 결과 연합군은 전쟁에서 유리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 작전을 이끈 깁슨 중령은 훈장을 받는 날 기자가 그에게 이렇게 질문했다. “어쩌면 그렇게 어려운 작전을 성공시킬 수 있었습니까?” 그는 대답하기를 “그것은 바로 철저한 훈련과 모험정신이었습니다. 저희는 준비 기간만 2개월이 걸렸고 2,000시간 동안 연습을 했고 연습하는데만 2,500개의 폭탄을 소모했습니다. 그리고 연습한대로 용감히 실전에 임했습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가야 한다는 말이 있다. 일을 성취하려면 모험을 각오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호랑이굴에 들어갈 용기가 있어도 호랑이를 잡을 능력이 없다면 역시 호랑이를 잡을 수 없다. 반대로 아무리 호랑이를 잡을 수 있는 능력이 있더라도 호랑이 굴에 들어가는 모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역시 호랑이를 잡을 수 없다. 이처럼 능력 없는 모험은 만용에 불과하고 반대로 모험을 감수할 용기가 없으면 아무리 큰 능력도 무용지물이다. 공부도 사업도 세상사도 신앙의 길에도 이 원리는 마찬가지이다.

    (딤전 6: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

    바울사도는 디모데에게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권면했다. 성도의 삶을 믿음의 싸움이라는 관점에서 보고 있다. 전쟁같은 긴급 상황이라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 땅이 재물을 모으기 위해, 명예를 얻기 위해, 더 좋은 자리 차지하기 위해 전쟁한다. 그러나 성도는 다른 차원의 전쟁이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한 영혼이 하나님 앞에 사느냐 죽느냐! 마귀의 지배를 받느냐 하나님의 지배를 받느냐! 성도가 복음으로 세상을 정복하느냐 세속의 가치관에 정복당하느냐의 전쟁이 있다. 성도는 영혼의 눈을 뜨고 이런 전쟁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성도님들은 이 세상 속의 불신자들처럼 밥먹고 사는데만 매달리는 삶을 살고 있는가 아니면 영적인 전쟁이 있음을 알고 승리하기 위해서 땀흘리고 있는가? 만약 실상이 그러하다면 나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오늘은 다윗이 골리앗과의 대결에서 승리한 기사를 통해 그가 면대한 영적 전쟁이 무엇이었는지 살펴보고 은혜를 나누는 시간을 가지고자 한다.

    어느 날 블레셋의 군대와 이스라엘의 군대가 전쟁을 위해 대치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전쟁터에 매우 위협적인 적군이 나타났으니 바로 키가 3m나 되는 거인 골리앗이었다.

    (삼상 17:4-7) 『[4] 블레셋 사람의 진에서 싸움을 돋우는 자가 왔는데 그 이름은 골리앗이요 가드 사람이라 그 신장은 여섯 규빗 한 뼘이요 [5] 머리에는 놋투구를 썼고 몸에는 어린갑을 입었으니 그 갑옷의 중수가 놋 오천 세겔이며 [6] 그 다리에는 놋경갑을 쳤고 어깨 사이에는 놋단창을 메었으니 [7] 그 창자루는 베틀채 같고 창날은 철 육백 세겔이며 방패 든 자는 앞서 행하더라』

    놋 오천 세겔의 갑옷의 무게 환산하면 57kg이다. 창날만 육백세겔의 무게는 7kg이다. 갑옷과 창날의 무게만 합산해서 64kg이니 평균적 성인 남자 몸무게에 이른다. 게다가 다리에 놋 각반을 찼고 머리에 놋투구까지 썼으니 그 위용이 가히 로보캅 수준이다. 이러한 골리앗의 모습을 본 이스라엘은 아마도 간담이 서늘했을 것이다. 감히 누가 나서서 맞설 엄두도 못내고 있을 때 붉은 얼굴의 미소년 다윗이 나타났다. 그리고 물매로 돌을 날려 골리앗을 죽이고 승리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유재석이 강호동과 씨름해서 이겼다는 것이다. 도대체 다윗의 승리 비결은 무엇이며 오늘날 성도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바로 이런 것들이다.

     

    첫째, 작은 승리의 경험들을 쌓아야 한다.

    (삼상 17:34-35) 『[34] 다윗이 사울에게 고하되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35]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 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 죽였었나이다』

    전쟁 영웅 사울 왕도 골리앗 앞에 감히 나서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는 상황에서 일개 어린 소년이 나서서 그와 대결하겠노라고 요청한다. 그는 사울왕에게 연이어 이렇게 말한다.

    (삼상 17:36)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골리앗을 상대하겠다는 이 미소년의 용기가 어디에서 나왔는가? 바로 과거에 곰과 사자와 대결해서 승리했던 경험들에서 나왔다. 다윗은 그 경험을 통해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다.

    이처럼 성도가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평소 작은 승리의 경험들을 쌓아나가야 한다. 여호수아를 보라. 그는 모세의 뒤를 이은 후계자가 되었고 가나안 정복의 과업을 부여받는다. 그런데 그 땅의 일곱 족속과 전쟁해서 몰아내고 정착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일은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그 어려운 과업을 완수했던 것이다. 여호수아가 이렇게 가나안 정복의 임무를 완수한 배경에는 그가 과거 작은 승리의 경험을 쌓아왔기 때문이다. 그는 가나안 족속과의 전쟁 전에 이미 광야에서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실전 경험이 있었다. 모세와 아론과 훌은 기도하고 있었고 칼을 들고 전쟁을 수행한 인물이 바로 여호수아였던 것이다.

    또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베드로는 성전 미문에 하체 장애자를 일으키는 기적을 행한다. 이것은 베드로가 어느 날 우연히 일으킨 기적이 아니다. 과거 승리의 경험들이 쌓인 결과였다.

    (마 10:1) 『예수께서 그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로마는 하루 아침에 완성되지 않았다’는 말이 있듯이 우리의 믿음도 하루아침에 완성되지 않는다. 과거의 작은 열매 작은 성공의 경험들이 모여서 큰 성과를 이룰 수 있다. 과거에는 믿음의 열매가 전혀 없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큰 일꾼이 되어 믿음의 열매를 맺는 일은 없다. 기도의 응답을 경험한 성도가 더 큰 기도의 응답을 확신하고 기도하게 된다. 희생의 경험이 있는 성도가 더 큰 희생의 자리에 헌신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개인이나 교회나 다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첫 번째 조건 바로 현재의 작은 믿음의 싸움에서 승리의 경험을 쌓는 것이다.

    (눅 16:10)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둘째, 멸시를 감내하는 겸손한 인격이 있었다.

    (삼상 17:28) 『장형 엘리압이 다윗이 사람들에게 하는 말을 들은지라 그가 다윗에게 노를 발하여 가로되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들에 있는 몇 양을 뉘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

    다윗이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형들에게 식량을 전달하기 위해서 전쟁터에 왔는데 그의 큰 형 엘리압이 다윗을 나무라고 꾸짖는다. 다윗은 순수한 믿음과 담대한 마음으로 왔는데 형은 교만하고 완악하다고 오해하고 멸시했다. 다윗은 그 멸시의 말을 들었지만 엘리압 형과 다투지 않았다. 의기소침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다윗이 사울왕 앞에 섰을 때 이번에도 다윗은 이런 이야기를 듣는다.

    (삼상 17:33)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기에 능치 못하리니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니라』

    큰 형 엘리압 뿐만 아니라 다윗은 사울왕에게도 멸시를 당한다. 이처럼 계속 멸시를 받았지만 다윗은 결코 분노의 감정을 품거나 다투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이처럼 다윗에게는 골리앗을 상대하기 전에 이미 영적 전쟁이 있었는데 그것은 멸시를 감내하는 겸손한 인격이 있느냐 없느냐였다. 그는 이 내적 전쟁에서 승리했기에 골리앗을 상대할 기회도 잡을 수 있었다.

    007 영화로 잘 알려진 숀코네리란 배우가 있다. 금세기 최고의 흥행작이란 불리는 ‘반지의 제왕’에서 간달프 역을 해달라고 의뢰받았다. 그러나 그는 거만하게도 스토리가 너무 복잡하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그런데 아뿔사! 이 영화를 거절하는 바람에 무려 사천 억 달러의 수입을 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친 것이다.

    이처럼 겸손이라는 인격이 받쳐주지 않으면 임하는 복도 제 발로 차버리는 것이 인생이다. 만약 형 엘리압이 멸시의 말을 할 때 형과 싸우거나 사울왕의 말을 듣고 마음속에 자존심 상해서 토라져 떠나갔다면 아마 골리앗과의 대결은 성사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진짜 싸워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 알았다. 그 대상은 내부의 친형이나 사울왕이 아니라 블레셋의 골리앗임을 알았다.

    세상사에서 신앙 안에서 승리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다. 바로 인격이 받쳐준다는 사실이다. 인격의 결함이 있는 사람은 싸움의 대상을 분별하지 못한다. 그래서 엉뚱한 대상과 싸우다가 힘 다 빼고 정작 자기 사명을 그르친다. 그러나 멸시와 조롱을 인내할 인격이 있는 자는 힘써야할 것을 분별해서 승리의 기회를 경험하게 된다. 사울왕은 그런 차원에서 실패한 인물이다. 왜 실패했는가? 자기가 상대할 적들은 블레셋이고 아말렉 족속인데 허구헛날 다윗 죽이려고 추격한다. 그렇게 다윗 추격하는데 있는 힘 다 빼고는 나중에 기습한 적군에 의해 전사하고 만다. 그래서 어찌보면 능력보다는 인격이 먼저다. 능력이 있으면 무엇하는가? 엉뚱한데서 기운 다 빼는데. 돈 있으면 뭐하는가? 돈 제대로 활용할 인격이 없는데. 세상과의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시기를 원하시는가? 그렇다면 승리를 보장할 바른 인격으로 무장하시는 성도가 되자.

    (잠 12:16) 『미련한 자는 분노를 당장에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

     

    셋째, 적합한 무기를 선택하는 분별력이 있었다.

    (삼상 17:38-40) 『[38] 이에 사울이 자기 군복을 다윗에게 입히고 놋투구를 그 머리에 씌우고 또 그에게 갑옷을 입히매 [39] 다윗이 칼을 군복 위에 차고는 익숙치 못하므로 시험적으로 걸어 보다가 사울에게 고하되 익숙치 못하니 이것을 입고 가지 못하겠나이다 하고 곧 벗고

    로보캅 중무장을 한 골리앗을 상대로 다윗이 갖추고 나가려는 군장과 무기는 무엇이었는가? 아마 사울왕은 골리앗만큼은 아니지만 이 작은 미소년에게 최소한의 군장과 무기는 건네주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사울의 군장을 입어본 다윗은 말한다. 익숙하지 못하니 입고 가지 않겠단다. 그리고 다윗이 선택한 무기는 무엇이었는가?

    [40] 손에 막대기를 가지고 시내에서 매끄러운 돌 다섯을 골라서 자기 목자의 제구 곧 주머니에 넣고 손에 물매를 가지고 블레셋 사람에게로 나아가니라』

    다윗의 군장에는 갑옷도 투구도 검도 방패도 없었다. 오로지 막대기와 돌멩이와 물매였다. 이것이 다윗이 선택한 군장이었다. 사실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가장 허술한 선택인 것처럼 보이지만 깊이 생각해보면 다윗은 가장 지혜로운 선택을 했다. 그는 평소 자기에게 가장 익숙한 무기를 선택한 것이다. 군장의 양면성이 있다. 한편으로는 몸을 보호해주고 적을 공격하는 도구지만 무게가 문제가 된다. 너무 가벼우면 견고성이 떨어져 몸을 보호하지 못하고 너무 무거우면 싸움을 하지 못한다. , 기동성이 떨어지는 것이다. 저는 군대 있을 때 항상 고민한 것이 20kg의 완전군장하고 어떻게 전쟁을 수행하느냐?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다윗은 군장을 아예 벗어버린다. 그는 자신의 장단점을 알고 가장 적합한 무기를 분별하는 지혜가 있었다. 이것이 다윗의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런 지혜가 있는가? 남들이 입어 아름답다고 내가 그 옷 입어서 아름다울 것으로 착각하지 말라. 내게 어울리는 옷은 따로 있다. 그 가정이 이런 저런 것 소유해서 행복해 보인다고 나도 그것 소유하면 행복하겠지?”하고 착각하지 말라. 우리 가정에 맞는 행복의 조건은 따로 있다. 다른 교회에서 그 방법으로 교회가 발전한다고 우리 교회도 똑같이 하면 발전할 것으로 착각하지 말라. 우리에게 어울리는 적합한 길은 따로 있다. 나를 정확히 알고, 내 가정을 정확히 알고, 내 교회를 정확히 알 때 그에 어울리는 행복의 길을 찾을 수 있다.

    소위 균형감각! 내게 적합한 것을 분별하는 능력! 이것이 승리하는 신앙인의 세 번째 열쇠이다. 다윗처럼 이것을 분별하시는 저와 성도가 되자.

    (빌 1:10)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넷째, 하나님 이름을 높이려는 순수한 믿음이 있었다.

    (삼상 17: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사울왕이 골리앗을 이긴 자에게 내건 포상이 있었다. 포상의 내용은 만약 승리하면 왕의 사위라는 특별한 신분을 주고, 많은 재물을 주고, 세금 면제의 특혜를 주겠단다. 그런데 다윗이 골리앗을 상대한 동기는 그런 것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골리앗을 상대한 동기는 포상의 내용이 아니라 가슴 속에 담겨있는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신앙 때문이었다. 바로 하나님을 멸시하고 모욕하는 할례 없는 이방인을 죽여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만천하에 증거하려는 순수한 신앙이 있었다.

    우리가 삶의 현장에서 만나는 영적 전쟁은 어떤 차원에서 하나님이 계시고 안계시고의 문제이다. 불신자들은 성도의 말이나 행동을 통해서 우리 신앙을 저울질 한다. 나아가 우리의 형통과 불행을 통해 하나님이 살아느냐 죽었느냐를 가름하려고 한다. 이것이 영적 전쟁이다. 그런 도전의 상황에서 우리는 하나님은 이렇게 살아계신다고 증거할 수 있어야 한다.

    에스더라는 여인은 민족적인 멸절의 위기 앞에서 말한다. “내가 왕 앞에 나가겠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다.” 이렇게 믿음의 모험을 감수하는 모습이 있었기에 민족의 몰살 위기를 면하고 민족의 구원을 경험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붙들고 모험해야 한다. 모험하지 않으면 승리도 없다. 하나님은 모험하는 자에게 승리도 주시기 때문이다.

    (히 10:35)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이처럼 다윗이 골리앗과 대결해서도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은 과거 승리의 경험을 통한 확신, 멸시함을 참는 인격, 내게 맞는 무기를 분별하는 안목,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순수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성도님들은 오늘날 내 삶이 어떤 영적 전쟁의 상황에 있음을 발견하시고 있는가? 다윗과 같은 믿음과 인격과 담대함으로 마귀의 도전을 물리치고 승리하시는 성도가 되시길 바란다. 이와 같이 축복이 항상 함께하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기원한다.

     

    https://youtu.be/3RrubN1vL80?si=Cw4dZPEe8vyA-MAF

  • 제8항 안식일에 대한 우리의 믿음

    제8항 안식일에 대한 우리의 믿음

     

    안식일(금요일 일몰부터 토요일 일몰까지)은 하나님께서 복주신 거룩한 날임을 믿는다. 단, 이 날을 은혜아래서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은혜를 기념하고 내세의 영원한 안식을 소망하며 지킨다.

    안식일은 천지 창조의 시기부터 존재했습니다. 하나님은 육일 동안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제 칠일을 안식일로 지정하셨습니다. 사람에게 안식일을 주셔서 안식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자신도 안식하셨습니다. 이 안식일은 현재 일요일이 아닌 토요일이며 초대교회가 지켰던 본래의 기독교 성일입니다. 하나님은 왜 인간에게 안식일을 지키도록 명령하셨을까요? 또 안식일을 지키는 의미는 무엇이며 어떻게 지켜야 할까요?

     

    1)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기념일입니다.

    사람들이 유명한 인물, 역사적 사건을 기리는 마음으로 기념비를 세우곤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기념으로 일곱 째 날을 구별하셔서 안식일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자신이 이날에 안식하셨습니다.

    (2:3)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하나니이 천지창조 직후 안식일을 정하신 일은 곧 하나님이 천지 만물의 창조주라는 선포와도 같습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조물주 하나님이 지키신 것처럼 자신도 그 날에 안식하면 이는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정하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천지창조 때부터 에덴동산에서 시작된 안식일은 아담이 범죄한 이후로 2,500년 동안 잊혀졌다가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을 나올 때부터 다시 역사 속에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안식일을 지킬 것을 명하셨을 뿐만 아니라 십계명의 네 번째 계명으로 지정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를 먹으며 생활하는 동안 안식일 지키도록 훈련하셨습니다. 그 훈련하시는 방법은 곧 만나를 육일 동안만 내려주시고 제 칠일에는 내려주시지 않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다른 날에는 하루만 지나도 만나가 부패했는데 제 육일에는 이틀치 분량을 거두어도 만나는 부패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현상이 40년 간 반복되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 칠일에 안식하는 것이 습관화되었을 것입니다.

    (16:23)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일은 휴식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안식일이라 너희가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고 그 나머지는 다 너희를 위하여 아침까지 간수하라

     

    (20: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16:26-27) [26] 육일 동안은 너희가 그것을 거두되 제칠일은 안식일인즉 그날에는 없으리라 하였으나 [27] 제칠일에 백성 중 더러가 거두러 나갔다가 얻지 못하니라

    이렇게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 광야시대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안식일을 지키도록 훈련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 안식일 지키는 일을 소홀히 여기게 됩니다. 세대가 바뀌고 세월이 흐를수록 그 후손들은 여호와 신앙을 버리고 우상숭배에 빠져들었고 안식일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왕국시대에 이르러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를 차례로 멸망시키십니다.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의 혼혈정책과 이주정책에 의해 완전히 그 정체성을 상실하게 되고 남 유다 백성은 바벨론에 끌려가 70년 동안 포로로 생활하게 됩니다. 남 유다가 멸망하기 전에 예레미야 선지자는 멸망에 대해서 경고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안식일을 지키지 않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17:27) 너희가 나를 청종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거룩케 아니하여 안식일에 짐을 지고 예루살렘 문으로 들어오면 내가 성문에 불을 놓아 예루살렘 궁전을 삼키게 하리니 그 불이 꺼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할지니라

     

    (20:16) 그들이 마음으로 우상을 좇아 나의 규례를 업신여기며 나의 율례를 행치 아니하며 나의 안식일을 더럽혔음이니라

     

    (대하 36:21) 이에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 같이 안식하여 칠십 년을 지내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응하였더라

     

    바벨론에 70년 간 포로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거 조상들의 과오를 살피고 반성하게 되는데 그들의 멸망 원인이 바로 안식일을 소홀히 여겼던 점에 있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포로 귀환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스라, 느헤미야와 같은 선지자들의 지도 아래 다시 안식일을 철저히 지킵니다.

    (13:18) 너희 열조가 이같이 행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이 이 모든 재앙으로 우리와 이 성읍에 내리신 것이 아니냐 이제 너희가 오히려 안식일을 범하여 진노가 이스라엘에게 임함이 더욱 심하게 하는도다 하고

     

    그렇게 포로귀환 후 수백년 세월이 흐르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무렵 이스라엘 백성들은 또 다른 문제점을 나타냅니다. 안식일을 준수하되 그 본연의 목적과 취지에서는 멀어지고 인간을 속박하는 과격한 금지 조항들이 만들어집니다. 그 조항들이 바로 안식일 39개조 금법입니다. 성경에서는 이를 장로들의 유전(전통)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금법의 조항들은 안식일을 잘 지키려는 본래의 의도와는 달리 하나님이 인간에게 안식일을 주신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나 사람들을 과도하게 속박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위해 안식일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을 위해 사람이 존재하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셔서 안식일의 본질에 대해서 주목하게 하셨습니다.

    (2:27) 또 가라사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13:15)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나 마구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12:1-2) [1]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2]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고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유대인 종교지도자들과 안식일 준수 문제로 많이 충돌하고 변론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해하지 않아야 할 것은 예수님은 결코 안식일 자체를 부정하거나 폐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의 ‘율법적 안식일 준수 방법’에 대해서 부정하신 것입니다. 한국의 일반 개신교회에서는 안식일을 율법 시대에 속한 성일이므로 폐해졌다고 여기는 것이 보편적인 견해이고 신약 시대에는 일요일(주일이라고 표현함)을 개혁된 성일로 지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런 견해에는 오류가 있습니다. 안식일은 시간적으로 살펴볼 때 율법시대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천지창조 때부터 존재했습니다. 따라서 천지 창조 때부터 세워진 안식일이 천지가 없어질 때까지 존속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예수님이 종말론에 대하여 교훈하실 때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사실을 돌이켜 보면 안식일은 ‘말세의 때’까지 존재한다는 뜻이며 그 때까지 지켜져야 한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2)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에는 집안의 종이나 가축 심지어 나그네까지 포함됩니다. 안식일 준수의 범위가 사람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이 포함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온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조물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즉 피조물의 입장에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이 온 천지만물의 주인이라는 신앙 고백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창조 질서에 부합하는 일입니다. 역대하 성경에는 심지어 토지가 안식년을 누림 같이 70년간 그 토지가 황무했다고 기록한 곳도 있습니다.

    (20: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대하 36:21) 이에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 같이 안식하여 칠십 년을 지내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응하였더라

     

    3)사람의 육신과 마음의 평안을 누리게 하기 위해 주셨습니다.

    인간은 흙으로 지어진 연약한 존재입니다. 인간의 몸은 너무 많은 일을 할 수도 없고 너무 오래 일할 수도 없습니다. 너무 지나치게 일하면 면역력도 떨어지고 질병에 걸리기 쉽습니다. 사람은 육신으로 노동하는 존재이며 동시에 정신적으로도 노동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기쁘고 즐겁고 유쾌한 순간도 있지만 그보다는 근심하고 염려하고 불안하고 불만족한 순간들이 더 많습니다. 사람은 삶 속에서 책임감, 좌절감, 절망감 등을 느낄 상황을 만나면 많은 피로를 느낍니다. 몸의 휴식이 필요하듯 마음도 휴식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인간의 연약함을 아시고 영혼과 육체가 쉴 수 있는 은혜의 창구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안식일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세상에 속한 육신의 일을 잊고 몸과 마음의 평안을 누리게 하신 것입니다.

     

    (20:10) 『제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23:12) 너는 육일 동안에 네 일을 하고 제칠일에는 쉬라 네 소와 나귀가 쉴 것이며 네 계집 종의 자식과 나그네가 숨을 돌리리라

     

    4)구원의 은혜를 기억하게 하기 위해서 주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후 5:17)에서 구원의 은혜를 입은 성도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했습니다. 구약 성경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안식일을 준수하도록 명령하신 일이 두 차례 있었습니다. 그것은 천지창조 때 아담에게 명령하셨고, 출애굽 사건 때 선민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선민 이스라엘도 더 이상 바로의 종이 아닌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새 신분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새 생명, 새 신분의 선물을 받았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안식일을 지킬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이처럼 신약 시대의 구원받은 성도가 새 피조물이라면 마치 새롭게 창조된 아담처럼, 새 신분을 얻은 출애굽 백성들처럼 안식일을 지켜야 합니다. 새 피조물에게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하나님의 요구는 과거 천지창조의 시대에 아담과 하와에게 요구하신 것과 같고, 출애굽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신 것과 같습니다. 먼저 창조의 은혜를 주시고 나중에 안식일 준수를 요구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아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성도는 안식일을 지켜야 합니다.

    (5:15)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5)하나님은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심을 알게하기 위해서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고 범죄한 인간은 부정한 존재입니다. 구원이란 부정한 인간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이르는 과정입니다. 하나님은 일곱째 날인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거룩이라는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일과 관계가 있습니다. 인간의 몸이 쉼을 통해 부정한 것이 정화되고 회복되고 마음도 쉼을 통해 세속적인 욕망, 근심, 감정이 정화되고 새롭게 됩니다.

    (20:12) 또 나는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알게 하려 하여 내가 내 안식일을 주어 그들과 나 사이에 표징을 삼았었노라

    (벧후 1: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6)영원한 내세의 안식을 사모하게 하기 위해서 주셨습니다.

    천국을 시간적으로 표현하자면 바로 영원한 안식입니다. 성도가 지상에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바로 천국에서 누리게 되는 영원한 안식과 긴밀한 관계에 있습니다. 땅에서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자는 하늘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지 못합니다. 땅에서 온전한 안식을 누리는 자만이 장차 천국에서 영원한 안식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땅의 성도는 안식일에 예배를 통해 말씀과 기도와 찬송과 선행에 참여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이것이 장차 우리가 하늘에서 영원히 누릴 안식의 연습이요, 훈련입니다.

    (4:11)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은혜의 안식일을 이렇게 지킵니다.

    위에서 살펴 본대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되어야 할까요? 느헤미야 시대 이후 유대인들은 안식일 준수에 대한 과격한 적용을 통해서 안식일 39개조 금법이 형성되었다고 했습니다. 그 엄격한 금지 조항은 하나님이 안식일을 주신 목적과 취지에서 벗어나 사람들이 안식일의 노예가 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안식일 준수에 대한 큰 전제를 말씀하셨습니다.

    참예수교회는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에 유대인들이 지켰던 ‘율법의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자비와 사랑의 정신 아래,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가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말씀에 따라 ‘은혜의 안식일’을 지킵니다. 그래서 안식일을 성일로 지키는 타 교단의 모습과 비교해 보면 본회의 안식일 준수의 모습은 미흡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안식일을 성일로 주장하면서 정작 잘 지키지 않는 교회처럼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안식일’이 아닌 ‘은혜의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자기의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셔서 예배에 참예하셨고 안식일에 병든 자를 고쳐주셨고 선행에 힘쓰셨습니다. 본 교회는 예수님이 복음서에서 보여주셨던 모습대로 은혜 아래서의 안식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금요일 일몰부터 토요일 일몰시까지 현대 이스라엘인들을 지키는 것과 동일한 시간대에 안식일을 지킵니다. 세속적인 오락과 노동을 삼가고 가족들과 함께 예배에 참예합니다. 또 성도들은 교회의 여러 가지 일을 분담하여 봉사합니다. 또 안식일에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교회에 출석하지 못하는 연약한 신도들을 방문하고 교제합니다.

    (58:13-14) [13]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14]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이니라

     

    (56:2)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그 손을 금하여 모든 악을 행치 아니하여야 하나니 이같이 행하는 사람, 이같이 굳이 잡는 인생은 복이 있느니라

     

  • 안식일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입니까?

    이 질문은 안식일은 율법과 함께 폐지되었기 때문에 지킬 필요가 없지 않느냐는 생각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안식일을 반포하시는 것은 맞습니다. 십계명 가운데 명확하게 들어가 있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출20:8)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신5:13)

    하지만 반드시 알아야할 것은 안식일은 율법 이전부터 존재했다는 사실입니다. 안식일은 모세에게 율법을 주실 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실 때부터 정하신 날입니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창2:1-3)

    뿐만 아니라 안식일은 세상 끝 날까지 존재할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마24:2)

    따라서 안식일은 구약시대에만 한시적으로 지켜야 하는 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이 존재하는 동안 변함없이 지켜야 하는 거룩하고 복된 날입니다.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창2:3)

    많은 주일일 준수자들은 기독교인이 은혜로 구원받는 것이기 때문에 십계명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다음의 성경을 보겠습니다.

    1)구원은 율법의 행위가 아닌 예수의 피와 주께 대한 믿음을 통해서입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롬3:25,28)

    2) 성도는 십계명을 폐할 수 없고 계명을 범해서도 안 됩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말하기를 믿음으로 율법을 굳게 세운다고 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롬3:31)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롬6:15)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마19:17)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고전7:19)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계12:17)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계14:12)

    율법의 규례는 십자가에 의해 폐해졌으므로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엡2:15)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골2:14)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골2:16)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히9:10)

    우리는 형식적인 방식으로 의식을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완성은 십계명을 제거하거나 오용하거나 왜곡한다는 뜻이 아니라 성령의 도움을 통해서 율법의 ‘정신’을 지켜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율법의 정신을 지키는 것은 율법의 형식을 지키는 것보다 더 높은 기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문자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새겨진 것입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마5:17-18)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줄 생각나거든 (마5:21-23)

    또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 (히8: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약2:10-12)

    3) 성도가 은혜 아래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구약에서 율법적으로 지키는 것과는 크게 다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의 온 회중을 모으고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사 행하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엿새 동안은 일하고 제 칠일은 너희에게 성일이니 여호와께 특별한 안식일이라 무릇 이날에 일하는 자를 죽일지니 안식일에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불도 피우지 말지니라 (출35:1-3)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 거할 때에 안식일에 어떤 사람이 나무하는 것을 발견한지라 그 나무하는 자를 발견한 자들이 그를 모세와 아론과 온 회중의 앞으로 끌어 왔으나 어떻게 처치할는지 지시하심을 받지 못한 고로 가두었더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그 사람을 반드시 죽일찌니 온 회중이 진 밖에서 돌로 그를 칠찌니라 온 회중이 곧 그를 진 밖으로 끌어내고 돌로 그를 쳐 죽여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하니라 (민15:32-36)

    은혜 아래서의 안식일 준수는 속박과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쌔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고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마12:1-2)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편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막3:1-2)

    에덴동산에서처럼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치료의 안식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안식일을 통해서 주님이 공급하시는 영육의 축복을 즐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창2:3)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일은 휴식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안식일이라 너희가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고 그 나머지는 다 너희를 위하여 아침까지 간수하라 그들이 모세의 명대로 아침까지 간수하였으나 냄새도 나지 아니하고 벌레도 생기지 아니한지라 모세가 가로되 오늘은 그것을 먹으라 오늘은 여호와께 안식일인즉 오늘은 너희가 그것을 들에서 얻지 못하리라 (출16:23-25)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함을 받으리라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사람이 너희를 회당과 정사 잡은 이와 권세 있는 이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 것을 염려치 말라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눅12:9-13)

      (요5:1-18)

  • 참예수교회는 어떤 교단에 속해 있습니까?

    참예수교회는 독립교단으로 ‘참예수교회’라는 이름으로 1961년 12월 5일 행정기관에 정식 등록된 교단입니다. 참예수교회가 토요일(안식일)을 지키기에 안식교단으로 오해되는 경우가 많은데 안식교단과는 전혀 상관없는 교단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약 60여 개 국가에 참예수교회가 세워졌으며 한국에는 약 30여개의 교회가 있습니다. 각 나라에 총회가 있으며 세계연합총회가 미국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