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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음메시지] 꼭 결혼해야 되나요?(딤전 4:1~3)

    [복음메시지] 꼭 결혼해야 되나요?(딤전 4:1~3)

    [말씀제목] 꼭 결혼해야 되나요?(딤전 4:1~3)

    [설교자] 오희도 목자님

    [설교일] 2025년 9월 6일 안식일 오전 예배

    최근 한국 사회에서 혼인 건수가 10년간 크게 줄었고, 결혼을 왜 해야 하는지 필요성을 묻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성경을 근거로 결혼에 대한 여러가지 논점들을 다뤄보겠습니다. 

    • 결혼의 성경적 기초
    창세기 2장 18절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모든 것이 좋았으나, 아담 하나만 지었을 때는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돕는 배필을 지어 가정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또한 창세기 1장 27-28절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복을 주셨습니다. 

    3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 터이나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디모데전서 4장 1-5절을 보면 후일에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겠지만 이것은 ‘믿음에서 떠난 말’이자 ‘미혹케 하는 영의 가르침’이라고 단호히 경고합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은 선하므로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습니다. 거룩함은 결혼을 안 하거나 특정 음식을 피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 결혼해야 하는 다섯 가지 성경적 이유

    1. 경건한 자손을 얻기 위함(말2:15) : 아담에게 배필을 만들어주실 때 하나님께서는 여러 사람을 만드실 수 있지만 딱 한 명의 하와만 만드셨습니다. 그 이유는 일부일처제 결혼으로 경건한 자손을 얻기 위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믿음 안에서 맺어진 부부를 통해 경건한 자손을 잇게 하려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2. 생명의 은혜를 함께 유업으로 받기 위함(벧전3:7) : 부부는 영원한 생명의 은혜를 함께 유업으로 받을 동반자입니다. 한 겹 줄보다 두 겹 줄이 강하듯이 믿음의 가정은 천국을 향해 함께 걸어가는 강력한 두 겹 줄이 될 수 있습니다. 믿음 안의 결혼을 통해 이 유업을 함께 받고, 부부가 함께하며 믿음의 자녀를 낳아 생명의 은혜를 이어갑니다.
    3.  음행에 빠지지 않기 위함(고전7:1-2) : 바울 사도는 음행을 피하기 위해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고 권면합니다. 이는 금욕으로만 거룩해진다는 주장과 여러 이성을 가까이 해도 된다는 의견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결혼을 통해 정욕을 다스리고 음행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4.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기 위함(엡5:31-32) : 성경에서는 하나님과 교회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많이 비유합니다. 우리를 위해 생명까지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크신 사랑을 우리는 압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처럼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며 결혼생활을 한다면 우리는 가정을 통해 주님의 사랑을 배울 수 있습니다.
    5. 참된 사랑의 기쁨을 맛보기 위함(시128:1-4) : 수고한 대로 먹고, 밥상에 가족이 둘러앉아 누리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복입니다. 일시적 쾌락이 아닌 참된 사랑의 기쁨을 가정에서 맛볼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5-6절처럼 자식의 자식까지 보며 예루살렘의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 결혼의 원칙과 교훈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몸을 이룰지로다(창2:24)

    하나님의 주례사와 같은 이 말씀을 보면 결혼에 순서가 있습니다. 첫째 부모를 떠나(경제적·심리적 독립의 준비가 됨), 둘째 연합하여(사랑의 결합), 셋째 한 몸을 이룹니다(육체적 결합). 그러나 반대로 사탄은 먼저 한 몸부터 이루고, 맞으면 연합하고, 나중에 결혼하라고 유혹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순서를 지켜야 합니다.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니라 내가 혼인하지 아니한 자들과 및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고전7:7-9) 

    바울은 주님의 일에 전념하기 위해 독신이었습니다. 독신의 전제 조건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가 있고, 그 은사를 통해 하나님만을 위해서 살려고 하는 마음이 굳게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못하고, 절제하지 못할 것 같다면 결혼을 하는 것이 낫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 어미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 “하셨습니다. 태생적 고자나 천국을 위해 스스로 된 자(바울처럼)만 독신이 좋다고 하신 것입니다.(마19:10-12)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마지막으로 히브리서 13장 4절을 보시겠습니다. 결혼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귀중한 제도입니다. 만약 인간의 욕망 때문에 침소를 더럽히는 일을 한다면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결혼이라는 하나님의 제도를 통해서 서로를 위하는 돕는 배필의 모습으로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어서 행복을 누리는 저와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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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음메시지] 지혜자의 경제생활(잠6:1–11)

    [복음메시지] 지혜자의 경제생활(잠6:1–11)

    [말씀제목] 지혜자의 경제생활(잠6: 1–11) 

    [설교자] 오희도 목자

    [설교일] 2025. 7.12 안식일 오전 예배

    1. 보증과 담보를 피하라 (1–5)

    지혜자는 남의 재산에 욕심을 품지 않고, 자기 형편에 맞게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흔히 보증을 서주는 사람을 착한 사람이라 생각하지만, 성경은 보증을 요구하는 그 자체가 욕심의 문제를 갖고 있다고 봅니다.

    유대 전통에서는 많은 사람 앞에서 손바닥을 마주치는 행동(하이파이브)이 보증을 서겠다는 표시였습니다. 보증을 요구하는 자는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남의 능력을 빌리고, 보증해 주는 사람은 체면이나 허세를 위해 무리하게 책임을 떠안는 경우도 많죠. 이로 인해 경제생활이 흔들리고 관계도 파괴됩니다.

    오늘날 신용카드, 카드깡 같은 보증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가정의 사례처럼, 홈쇼핑으로 물건을 쌓아놓고 카드값이 남편의 월급을 초과해 이혼 위기까지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성경은 명확히 말합니다. “내 아들아… 네 이웃의 손에서 스스로 구원하라.” (잠 6:3)

    지혜자는 보증을 서지도 않고,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자족하며 살고 자기 형편에 맞게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경제의 지혜입니다.

    2. 게으름을 버리고 부지런히 일하라 (6–11)

    지혜자의 경제생활 두 번째 핵심은 게으르지 않고 부지런히 일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개미를 보라고 합니다.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감독자도 없지만 스스로 부지런히 움직이며, 여름 동안 양식을 예비합니다. 개미굴을 연구한 과학자들은 뜨거운 쇳물을 개미굴에 부어 굳힌 뒤 꺼내어 엄청나게 정교한 구조를 확인했습니다. 양식 저장소, 번식 공간, 거주 공간이 체계적으로 마련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개미에게서 두 가지를 배우라고 합니다. ➀예비함, 즉 미리 준비하는 삶을 지혜라 말합니다. 유대인들이 자녀들에게 먼저 가르치는 것도 돈 쓰는 것이 아니라 모으는 것을 가르칩니다. 지혜로운 자는 필요할 때 쓰기 위해 미리 준비하는 자입니다.

    개미는 ➁스스로 부지런합니다. 게으름은 가난을 부릅니다. 게으른 자는 자기 마음대로 자고 일어나는 사람입니다. 성공한 사람들의 습관을 연구한 결과 그들의 공통점이 부지런한 생활 습관을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서양 사회가 성공한 사람을 존경하는 이유도 그들의 부지런함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내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 (잠 6:10~11)

    가난은 생각보다 훨씬 빨리, 그리고 강하게 우리 삶을 덮칩니다. 그래서 살아 있을 때, 움직일 수 있을 때 부지런히 살아야 합니다. 지혜자의 삶은 부지런함의 삶입니다.

    삶의 간증: 카드 없이 산 30년

    저도 대학교때 신용카드에 빠졌던 적이 있었습니다. 청년들을 데리고 나가면 제가 늘 카드를 긁었습니다. 결혼 후 아내가 카드값을 보더니 저에게 조용히 “카드 좀 잠깐 주세요.” 하더니 잠시 뒤 가위로 싹둑싹둑  카드 잘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그 후로 카드 없이 살았습니다. 처음엔 불편했지만, 점점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없는 대로, 형편껏 사는 삶이 훨씬 자유롭고 평안했습니다.

    이제는 허락받아 카드를 다시 갖게 되었지만, 예전처럼 함부로 쓰지 않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단순한 종교적 교훈을 넘어서,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경제 원칙을 가르칩니다.

    1. 보증을 피하고,

    2. 부지런히 일하며, 미리 준비하는 삶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지혜자의 경제생활입니다.  성도 여러분, 안식일은 거룩하게 지키되, 평일에는 부지런하게 일하며,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복된 경제생활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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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음메시지] 욥이여, 하나님의 기묘하신 일을 궁구하라(욥37:1~14)

    [복음메시지] 욥이여, 하나님의 기묘하신 일을 궁구하라(욥37:1~14)

    [말씀제목] 욥이여, 하나님의 기묘하신 일을 궁구하라(37:1~14)

    [설교자오희도 목자님

    [설교일] 2025524일 안식일 오전 예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말씀 증거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욥기 37장 1절에서 14절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고난의 의미와 그 속에서 우리가 궁구해야 할 하나님의 기묘하신 일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많은 이들이 욥기의 주제를 ‘고난’이라 여기지만, 욥기의 진정한 주제는 고난 자체가 아닙니다.  ‘왜 하나님을 믿는가’,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가’ 이것이 욥기서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입니다. 

    욥기 1장을 보면 욥은 하나님이 인정하는 의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단은 ‘하나님께서 욥을 보호해주시고, 부유하게 해주시기 때문에 욥이 믿음을 가지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욥에게 주신 모든 것을 거두어가시면 하나님을 대적하고 떠날 것이라 말합니다.

    9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10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여러분은 왜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어떤 이는 가족 때문에, 어떤 이는 습관처럼, 또 어떤 이는 삶의 평안을 위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유는 각자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이 닥쳤을 때, 모든 것이 사라졌을 때에도 하나님을 믿는가, 욥기서는 그 신앙의 본질을 묻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고난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 자신의 잘못으로 받는 고난 : 자신이 저지른 죄의 결과로 겪는 어려움입니다.
    • 애매한 고난 : 욥의 경우처럼, 자신의 잘못 없음에도 당하는 고난입니다.
    • 자발적 고난 :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스스로 선택하는 고난입니다.

    욥기는 두 번째, ‘애매한 고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욥은 자신이 당하는 고난의 이유를 몰랐지만, 결코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잃는 극심한 고난 속에서도 욥이 끝까지 하나님을 버리지 않은 바로 그 믿음을 하나님께서는 자랑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제가 30년동안 목회하면서 발견한 한 가지 사실은 고난 없는 가정은 지구상에 단 한 가정도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자신에게만 고난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알고보면 모든 사람이 각자의 고난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적인 고난도 있고, 물질적인 고난도 있고, 영적이고 신앙적인 고난도 있습니다. 그 고난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우리는 욥기를 통해서 배울 수 있습니다.

    욥이 고난을 당하는 동안 찾아온 엘리바스와 빌닷과 소발, 이 세 친구는 서로 주장과 변론을 반복합니다. 그러나 네 번째 인물 엘리후가 등장하여 앞선 친구들과는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2 하나님의 음성 곧 그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들으라 들으라

    엘리후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도 ‘들으라 들으라’라고 강조합니다.
    우리에게 고난이 있을 때, 인생의 문제 앞에서 인간생각과 세상의 논리가 아닌,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도록, 기도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민감한 영성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엘리후는 하나님이 전능하시며, 의인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신다고 말합니다. 의인이라 할지라도 때로는 쇠사슬에 매이거나 환난의 줄에 얽힐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허물과 교만을 알게 하시고, 귀를 열어 교훈을 듣게 하시며, 죄악에서 돌이키게 하시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고난은 단순한 벌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훈과 회복의 과정임을 보여줍니다.(요36:5~11)

    14 욥이여 이것을 듣고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기묘하신 일을 궁구하라

    14절 앞에서 엘리후는 눈, 비, 광풍, 얼음 등 자연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기묘한 일들을 묘사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자연현상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비유적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고난 한가운데서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깊이 생각해보라는 권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징벌을 위해서, 토지(축복)를 위해서, 긍휼을 베푸시기 위해서 비를 내리시듯, 우리의 삶에도 다양한 목적과 뜻을 두고 고난을 허락하십니다.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온 땅에 알리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 앞에서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깊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고난 중인 다른 성도를 쉽게 판단하거나 함부로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실까요?
    고난을 통해서 정금같이 성숙한 신앙인이 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고난을 통해, 우리 인생이 이 땅에서만의 삶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영생을 바라볼 수 있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성도님들이 고난을 주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깨달아, 내가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지, 왜 하나님을 믿는지 돌아보며, 그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되어 하나님께서 자랑스러워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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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음메시지] 시내산 이후, 첫 원망(민11:1~9)

    [복음메시지] 시내산 이후, 첫 원망(민11:1~9)

    [말씀제목] 시내산 이후, 첫 원망(11:1~9)

    [설교자오희도 목자님

    [설교일] 202528일 안식일 오전 예배

    1 백성이 여호와의 들으시기에 악한 말로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여호와의 불로 그들 중에 붙어서 진 끝을 사르게 하시매

    출애굽 후에 시내산 아래에 지내던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을 떠나 광야 길을 걸은 지 3일 만에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민수기 11장 1절에서는 그들이 ‘악한 말로’ 원망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하나님께서 이를 들으시고 진노하셨다고 나옵니다. 시내 산에서 십계명과 율법을 받은 후, 성막을 짓고 제사와 절기에 대한 가르침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은 이제 본격적으로 가나안을 향해 나아가야 했습니다. 하지만 출발한 지 불과 며칠 만에 불평과 불만이 터져나왔고, 하나님은 이에 대해 강하게 반응하셨습니다. 그런데 시내산을 떠나기 전에도 이스라엘 백성은 몇 번이나 원망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에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을까요?

    • 출애굽기 15: 홍해를 건넌 후 3일 동안 마실 물을 찾지 못하자 이스라엘 백성은 원망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라의 쓴 물에 나무를 던지게 하여 물을 마실 수 있게 하셨습니다(22~27절).
    • 출애굽기 16: 배고픔을 호소하며 애굽에서 먹던 음식(고기, 빵 등)을 그리워하며 원망하자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셨습니다(1~36절).
    • 출애굽기 17: 마실 물이 없어 또다시 불평하며 다툼을 벌이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바위를 치게하여 물이 나오게 하셨습니다(1~7절).

    이처럼 시내산에 이르기 전까지는 이스라엘 백성이 원망해도 하나님께서 진노하지 않으시고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시내산을 떠난 이후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원망할 때마다 진노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왜 어느 때에는 원망을 참아주시고, 어느 때에는 진노하셨을까요? 그 시기는 시내산 도착 전과 후로 나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떠나 홍해를 건너 시내산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말씀으로 훈련받기 전이므로(오늘날의 세례 받은 지 얼마 안 된 초신자) 아직 믿음이 자라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의 연약함을 이해하고 필요를 채워주셨습니다.

    그러나 시내산에서 믿음의 훈련을 받은 후(초신자 외의 신도)에도 원망을 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광야에서 영적인 훈련을 받고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애굽(세상)을 그리워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잊고 원망했기 때문에 진노하시고 불로 진 끝을 사르셨습니다. 이는 큰 심판이 아닌 경고로 시내산을 나와서 처음 한 원망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깨우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중보기도를 하자 불이 꺼졌고, 그곳을 ‘다베라’(불에 탄 곳)라 불렀습니다.

    4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가로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5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 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6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도다 하니

    그런데 애굽에서 나올 때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나온 이방인들이 만나에 대해 불평을 하기 시작하자 이스라엘 자손도 울며 또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4절을 보면 이 원망은 탐욕에서 시작됨을 알 수 있습니다. 십계명에서 10번째로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찌니라’라고 했습니다(출20:17). 탐낸다는 것은 마음에서 시작하고 이 탐심이 과해지기 전에 내 안에서 탐심이 힘을 못 쓰도록 해야합니다.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12:15)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4:11~12)

     

    성경에서는 탐심이 아니라 자족하기를 배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에게 주신 것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하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출애굽 시키고, 홍해를 건너게 하고, 바로의 권세에서 해방시키셨는지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오히려 애굽을 그리워했습니다.

    이렇게 탐욕은 받은 은혜를 망각하게 만듭니다. 현재를 만족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감사함을 잊어버리게 합니다. 하나님을 불신하게 만들고 하나님보다 더 좋은 것이 있다고 믿게 만듭니다.

    아무것도 없었던 광야에서 하나님께서는 필요한 것을 다 채워주셨습니다.

    광야에 만나밖에 없다는 시각이 아니라, 원래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지낼 수 있도록 만나를 내려주신 그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주신 은혜에 만족하지 못하면 탐욕이 되고 원망이 된다는 것을 오늘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보배로운 믿음, 영원한 생명을 주신 은혜에 감사하고 풍성한 마음과 사랑을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25년 한 해에 탐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자족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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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음메시지]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겔37:1~14)

    [복음메시지]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겔37:1~14)

    [말씀제목]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겔37:1~14)

    [설교자] 오희도 목자님

    [설교일] 2024년 9월 14일 안식일 오전 예배

    오늘 말씀의 내용은 에스겔이 하나님께 받은 9가지의 비유 중에 마지막 환상의 비유인 마른 뼈 골짜기 비유입니다.

    1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2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하나님의 영(그 신)이 에스겔을 뼈가 가득한 골짜기 가운데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실제 에스겔의 몸은 바벨론에 있었지만, 환상 중에 데리고 가신 것입니다. 그 골짜기에는 심히 많은 뼈가 있었는데 아주 말랐다고 되어있습니다. 여기에서 아주 마른 뼈는 사망을 상징하는 그림 언어입니다. 살아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사망의 그늘에 오래 빠져있는 해골들을 말하는데, 이것은 영적인 사망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에게 주시는 이 영적 환상을 통해 에덴동산을 떠난 이후 죄를 지은 자들이 많고,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 많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뼈들은 육신은 살아있지만 하나님을 떠나서 영적으로는 죽어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말합니다. (11절)

    3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4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5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6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또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7 이에 내가 명을 좇아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더니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서 뼈들이 서로 연락하더라

    8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하나님께서는 이 마른 뼈들을 살리겠다고 하시고 말씀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에스겔은 명령을 좇아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습니다. 그러자 뼈들이 소리가 나며 움직이더니 서로  결합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뼈에 힘줄과 살과 가죽이 생겼습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가능한 일이 아니지만 하나님께서는 가능하시다는 것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부활이 불가능하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가능하게 하신다는 것을 모두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 뼈는 누가 살린 것일까요? 말을 한 사람은 에스겔이지만,  ‘살리라’고 하신 이는 바로 주 여호와입니다(5절). 에스겔은 그저 대언한 것 뿐입니다.  때때로 치유나 이적기사가 일어날 때, 그것을 행한 사람의 능력으로 아는 분들이 있습니다. 목자나 어떤 사람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어난 일임을 아시고, 마른 뼈들을 살린 이는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에스겔이 이치를 따지지 않고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 것 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과 능력이 있어 회복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을 우리는 세상에 그대로 전해야 합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요6:63)

    9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 하셨다 하라

    10 이에 내가 그 명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11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위 구절들은 성령을 간구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영을 불어넣어서 살아나게 하는 모습은 오늘날의 성령을 주시는 것과 같습니다.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난 모든 성도들이 다시 살아나는 회복과 부활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행2:2-4)

    12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13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한즉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14 내가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살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토에 거하게 하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무덤을 열고 백성들이 나오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부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약에는 부활이라는 단어가 나와 있지 않지만 부활에 대한 개념은 있습니다. 세 곳에 나와 있는데 오늘 본문 말씀이 대표적인 구절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무덤을 열어 백성들을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포로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다시 에덴으로 돌아가는 것, 즉 에덴의 회복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제서야 하나님께서 ‘내 백성들’이라고 부르셨습니다. ‘마른 뼈’에 생기가 넣어져 무덤에서 나오니 그들이 ‘내 백성들’이 되었습니다. 영적인 사망으로부터 부활까지 이르러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 ‘이룰 줄’이 아니라 ‘이룬 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14절)

    그러면 이 환상과 예언이 어떻게 성취되었을까요?

    먼저 이스라엘의 역사적으로 보면 첫 번째로는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지 70년 뒤에 풀려나 다시 돌아와서 성전을 건축하고 성벽을 재건하고 율법을 다시 세웠습니다. 두 번째로는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2500년이나 지난 뒤에 다시 건국되었습니다. 본문에는 이 뼈들이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고 말씀하셨고, 이것이 이루어지면 하나님인 줄 알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불가능한 이스라엘이 회복된 결과를 보며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적으로 보면 성령을 받은 후에 초대교회가 생기고 성장하였지만, 중세시대에 들어서 종교에 정치가 개입되며 교회가 변질되었습니다. 중세 교회의 타락을 통해 성령의 역사가 떠났습니다. 그런데 1917년에 다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에스겔의 환상 속에 마른 뼈가 생기로 살아나듯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사도시대 이후 죽어있던 교회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늦은비 성령)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과 부활을 통해서 무덤을 열어주심을 예표합니다. 에덴동산에서 나온 이후로 어떤 누구도 사망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셔서 음부의 권세를 이기시고 우리들에게 에덴의 회복을 알려주셨습니다.

    내가 저희를 음부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니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음부야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 뉘우침이 내 목전에 숨으리라 (호13:14)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고전15:55)

    태어났을 때 이미 마른 뼈인 우리들입니다. 그런 우리가 살아날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해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마른뼈들이 일어나듯이 사망의 무덤을 열고 부활해서 하늘나라 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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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음메시지] 좋은 무화과, 극히 악한 무화과(렘24: 1~10)

    [복음메시지] 좋은 무화과, 극히 악한 무화과(렘24: 1~10)

     

    [말씀제목] 좋은 무화과, 극히 악한 무화과(렘24:1~10)

    [설교자] 오희도 목자

    [설교일] 2024년 8월 24일(토) 안식일 오전 예배

    예레미야서를 자세히 읽으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과 마지막 날의 모습, 그리고 그때 우리 성도들이 가져야 하는 마음가짐을 배울 수 있습니다.

    1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냐와 유다 방백들과 목공들과 철공들을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옮긴 후에 여호와께서 여호와의 전 앞에 놓인 무화과 두 광주리로 내게 보이셨는데

    유다 왕 여호야긴이 재위에 있을 때에,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칩입하여 유다 왕, 방백들, 목공들과 철공들을 바벨론으로 사로잡아갔습니다. 이는 바벨론에 건물을 지을 사람들과 바벨론의 전쟁에 동원할 사람을 보충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왕하 24:10~16)

    2 한 광주리에는 처음 익은 듯한 극히 좋은 무화과가 있고 한 광주리에는 악하여 먹을 수 없는 극히 악한 무화과가 있더라

    3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무화과이온데 그 좋은 무화과는 극히 좋고 그 악한 것은 극히 악하여 먹을 수 없게 악하니이다

    그렇게 유다의 많은 사람들이 사로잡혀간 이후,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여호와의 성전 앞의 무화과 두 광주리를 보여주십니다. 한 광주리에는 극히 좋은 무화과, 다른 광주리에는 극히 악한 무화과가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성전에 극히 좋은 무화과도 있고, 극히 악한 무화과도 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마지막 날, 오늘날 교회 안에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무화과와 나쁜 무화과가 있습니다. 성경을 읽으며 세상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좋은 무화과가 되어야겠다는 소망을 갖게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동부교회 성도님 모두가 좋은 무화과가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5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이곳에서 옮겨 갈대아인의 땅에 이르게 한 유다 포로를 이 좋은 무화과 같이 보아 좋게 할 것이라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갈대아인의 땅에 처참히 끌려간 유다 포로를 좋은 무화과 같이 보기에 좋게 할 것이라고 다시 한번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좋은 무화과와 같은 백성들을 왜 포로로 끌려가게 하신 것일까요?

    (창15:6-7)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낸 여호와로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죄 가운데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우상이 창궐한,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곳에서조차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을 떠나자, 하나님께서는 결국 다시 그들을 갈대아 땅으로 돌려보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가나안 정탐을 한 후, 하나님을 원망하자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을 앞에 두고 다시 돌아가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끝까지 회개하지 않자 다시 죄악의 땅으로 돌려보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 가운데서 나오게 구원해 주셨지만, 우리가 회개하지 않고 죄악된 세상을 계속 좇는다면 우리 또한 죄의 근본인 지옥으로 갈 수 있습니다.

    (벧후 2:22)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

    베드로 사도는, 죄 가운데 구원받았으나 다시 죄악 가운데로 돌아가는 이들을 도로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눕는 돼지로 빗대어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서 극히 악한 무화과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우리 동부 교회 성도님들 또한 더러운 죄악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6 내가 그들을 돌아보아 좋게 하여 다시 이 땅으로 인도하고 세우고 헐지 아니하며 심고 뽑지 아니하겠고

    7 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로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오늘 본문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 또한 하나님의 심판이 확정된 이들입니다. 이들은 죗값을 치르기 위해 갈대아인의 땅에서 70년이라는 시간을 채워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 동안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잘 돌보아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를 들어, 다니엘과 같은 국무총리, 에스더와 같은 왕비, 느헤미야와 같은 비서실장을 세우셨듯,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성공하며 살 수 있도록 잘 돌보아주셨습니다. 비록 죗값을 치르게 하셨지만, 그들이 회개하여 좋은 무화과가 되면 그들을 잘 돌보아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8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유다 왕 시드기야와 그 방백들과 예루살렘의 남은 자로서 이 땅에 남아 있는 자와 애굽 땅에 거하는 자들을 이 악하여 먹을 수 없는 악한 무화과같이 버리되

    9 세상 모든 나라 중에 흩어서 그들로 환난을 당하게 할 것이며 또 그들로 내가 쫓아 보낼 모든 곳에서 치욕을 당하게 하며 말거리가 되게 하며 조롱과 저주를 받게 할 것이며

    10 내가 칼과 기근과 염병을 그들 중에 보내어 그들로 내가 그들과 그 열조에게 준 땅에서 멸절하기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시니라

    이어서 하나님께서는 악한 무화과 즉, 말씀을 순종하지 않고 끝까지 자기 생각으로 예루살렘에 남은 자, 애굽 땅으로 도망간 자들을 버리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회개하지 않고 성전 그 자체만을 중시하여 자만에 빠진 자, 죄값을 치르지 않고 도망하는 자들을 버리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자를 멸절하겠다고 하십니다. 우리 또한 우리 신앙에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예언은 실제로 이루어졌을까요. 나쁜 무화과 즉,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예루살렘에 남아있던 자들은 바벨론 군대에 3년 동안 포위당하며 혹독한 기근 가운데 죽게됩니다. 시드기야 왕은 자신이 보는 앞에서 자녀들이 죽임을 당하고, 자신의 두 눈이 뽑혀 짐승같이 살아가는 비참한 말로를 맞이합니다. (왕하 25:1-7) 

    (렘52:31-34) 유다 왕 여호야긴이 사로잡혀간지 삼십 칠년 곧 바벨론 왕 에윌므로닥의 즉위 원년 십이월 이십 오일에 그가 유다 왕 여호야긴을 옥에서 내어놓아 그 머리를 들게 하고 그에게 선히 말하고 그의 위를 그와 함께 바벨론에 있는 왕들의 위보다 높이고 그 죄수의 의복을 바꾸게 하고 그 일평생에 항상 왕의 앞에서 먹게 하였으며 그의 쓸 것은 날마다 바벨론 왕에게서 받는 정수가 있어서 죽는 날까지 곧 종신토록 끊이지 아니하였더라

    한편 유다 왕 여호야긴은 포로로 사로잡혀간지 37년만에 왕의 의복을 입고, 왕의 정수를 받으며 살게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유다 왕 여호야긴을 회복시키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소망을 품게 하셨습니다. (왕하25:27-30) 절망의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은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처럼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마지막까지 그대로 믿는 것입니다. 우리 동부교회 성도님들 또한 어떠한 상황이 와도 하나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여러분들이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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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음메시지] 예수님 손잡고 일어서세요(막5:25~34)

    [복음메시지] 예수님 손잡고 일어서세요(막5:25~34)

    [말씀제목] 예수님 손잡고 일어서세요(막5:25~34)

    [설교자] 오희도 목자

    [설교일] 2024년 4월 20일(토) 안식일 오전 예배

         온 가족 초청전도 집회를 맞이하여 성경에 나온 어려운 환경에서 예수님의 초청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예수님의 손을 붙잡은 한 여인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25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26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인간의 삶 가운데 많은 힘듦이 있지요. 경제적인 가난 때문에 힘들게 살아가기도 하고, 인간관계 속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분들도 계시지만, 마음과 정신까지 무너뜨리는 것은 몸의 병입니다. 몸의 병이 깊이 들었을 때 사람은 점점 희망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성경에 이 여인은 혈루증(만성자궁출혈)을 12년 동안 앓았다고 나와 있습니다. 당시에도 전염병이 많아서 유대인의 사회에서는 유출병을 앓으면 부정하다고 레위기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전염 때문에 유출병을 앓는 자는 공동체와 마을에서 떨어져서 살아야 했습니다. 본문을 보면 여인은 치료를 위해 노력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고칠 수 없어서 점점 병으로 시들어갔습니다.

         그러던 가운데 여인은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27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다른 많은 사람들 또한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들었겠지만, 이 여인에게는 ‘정말 만나야겠다.’라는 결단을 내리게 하는 한 줄기 빛과도 같은 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여인은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가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습니다. 12년간의 만성유출병으로 부정하게 여겨져 온 여인이 공동체에 나타나게 된 것이 드러나면 사람들의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사람들 사이에 몰래 섞여서 온 것은 보통 용기가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 여인으로서는 예수님을 만나거나 대화할 방법이 없으니,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잡겠다고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댑니다. 당시 상황에서 이것 또한 죽을 수 있는 행동이었습니다. 부정한 사람이 고의로 남을 만지면 똑같은 병에 걸리게 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여겨 죽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여인은 목숨을 두 번 건 것이지요. 무리에 섞일 때 한 번, 예수님의 옷을 잡을 때에 또 한 번. 이 여인은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을 때 예수님을 붙잡아야겠다는 생각 외엔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참예수교회에 다니시는 많은 분들이 마음으로 예수님을 붙잡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붙잡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초청받으신 분들에게도 예수님을 붙잡겠다는 마음을 주님께서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 인생은 다 잘 사는 것 같아도 저마다 아픔이 있습니다. 좌절이 있습니다. 절망이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용기를 내어서 예수님께 향하고 예수님의 손을 붙잡기 위해서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29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여인이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을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혈루병이 나은 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본인이 깨달았다는 것은 즉각 나았다는 것이지요. 스스로 즉각 깨달을 정도로 몸이 나았습니다. 여러분들도 예수님을 붙잡으시고 이런 놀라운 축복을 받으시기를 원합니다.

    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이 목숨을 걸고 내민 믿음의 손 때문에 구원을 얻었다고 말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평안히 가라고 하시고 건강의 축복을 해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만난 혈루증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이 여인은 결심을 하고 예수님 뒤에 가서 옷을 붙잡은 것밖에 없지만, 12년 동안 고통의 병 속에서 살다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건강한 몸으로, 구원받은 예수님의 딸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성도님들도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께 손을 내미는 작은 동작으로 여러분의 인생이 놀랍게 변하는, 인생 가운데 예수님의 축복이 임하는 귀한 오늘이 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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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음메시지]우리를 광야의 쓴물로 인도하시는 은혜 (출15:22~27)

    [복음메시지]우리를 광야의 쓴물로 인도하시는 은혜 (출15:22~27)

    ♣ 2024. 01. 20. 안식일 오전 (오희도 목자)

    22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행하였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23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홍해를 건넌 것은 애굽의 손에서 구원받은 의미도 있고 세례를 통해 구원 받았음을 예표합니다. 홍해를 건너고  감사의 노래를 한후(15:1~21)광야길을 3일 행하였으나 이스라엘 백성은 물을 얻지 못합니다. 광야에서 제일 필요한 것은 물인데 마라의 물이 써서 마시지를 못했습니다.

    우리가 세례받고 교회에서 축하해 주고, 찬양하고 기뻐하다가 3일이 됐는데  좋게 변한 게 없어요. 오히려 더 나빠지는 길로 가는 거죠. 삶이 더 팍팍하고 힘들어지는 상황이 된 거지요.

    24백성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출애굽 후 원망이라는 단어가 처음 나온 곳이 이곳입니다.  하나님과 모세를 향해서 백성이 원망한 것이 한 달 후도 아니고 3일!  말하자면 세례받고 3일 만에도 원망이 나올 수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도해 가신 결과입니다.  왜 이렇게 인도하셨을까요?  세상에서 살던 우리의 태도를 고치시고 치유하기 위해서 마라로 인도하십니다. 또다른 이유는 마라의 고통의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은 내면에 절망이 생길 때 심리학적으로 원망하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민14:2~4)  원망은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게 합니다. 인간의 악한 모습이 원망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아주 조용히 이스라엘 백성을 꽃길이 아닌, 쓴물이 있는 곳으로 인도해 가신것은  깊은 섭리와  뜻이 있습니다. 세례받고 거듭난 백성이 됐을 때 알아야 될 깊은 인생의 가치는 광야의 가치입니다. 광야의 시련을 통해서 내가 얼마나 악하고 얼마나 무가치한 존재고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세상에서는 내가 왕이었어요. 내가 제일 잘 나갔어요. 또 그렇게 사는 것이 인생의 멋인 줄 알았어요. 하나님은 그러한 우리를 낮추시고 겸손한 사람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의 귀한 그릇으로 쓰기 위해서 나를 비우게 하기 위해서 쓴물로 조용히 인도해 가십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이 누구며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가를 체험하기 위해서 마라로 인도하십니다.

    25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쌔

     마라로 인도하지 않았으면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을까요?  우리가 세례받고 구원받았으면서도  고통과 아픔이 없으면 기도할 줄 모릅니다. 아픔이 있는 성도들은 기도의 모습이 달라요. 눈물을 흘리고 간절해집니다.  우리를 기도하게 만든다는 것은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을 보면 직접 물을 주시지 아니하고  한 나무를 지시하셨어요.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은 뭔가를 지시할 거예요.  이 나무는 영적인 눈이 있어야 보여요. 우리가 영적인 눈을 뜨지 않으면 하나님이 지시하는 것이 안 보여요. 영적인 눈을 뜨게 하는  훈련을 위해 마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한 나무는  성경 전체적으로 보면 십자가입니다.(벧전 2:24)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이 지시하는 것은 십자가를 바라보라는 거예요.  우리가 고난 속에서 십자가를 바라볼 때 십자가가 드디어 나의 십자가가  됩니다. 그 십자가가 나의 십자가가 될 때 물은 단물로 변해질 줄 믿습니다. 십자가를 고난 속에서 발견하십시오. 마라로 간 것은 고통, 고난이 아니고 영적으로는 은혜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했다고 돼 있어요.  하나님이 지시한 곳을 바라보는지를 시험하시겠다는 거예요.  

    26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는지(들을청,  따를종)를 보는 것이  첫 번째 시험이에요.   두번째는 하나님 보시기에 이 땅에서 의를 행하라는 거에요. 세번째는 하나님의 계명에 귀를 기울이라는 것입니다.  네번째는 내 모든 규례를 지키는지 본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 말씀을 순종 하는지를 보시는 것이  첫 번째 시험이자 최종의 시험이기도 해요.

    그렇게 순종하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을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 임이니라. (여호와 라파) 하나님이 신기해요. 물이 써서 원망했는데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라고 표현했어요.  하나님 나라의 질병은 바로 원망입니다.  원망!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하는 마음을 치유해 주시겠다는 말이 들어있는 거예요. 원망이 나올때에  치료받을 수 있는 비결이 하나님을 청종하는 것입니다. 우리교회가 여호와 라파의 교회가 되길 원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시험의 장소이자 치유하는 장소입니다.

    27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 물샘 열 둘과 종려 칠십 주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그들이 치유가 되고 그들이 회복이 됐을 때 하나님의 보상은, 그들을 엘림에 이르게 합니다. 엘림에 이른 후 마라로 인도한 게 아니라 마라로 인도하시고 , 치유하신후  엘림으로 보내셨어요. 엘림에 먼저 갔으면 그들은 치유되지 않았을 거예요. 엘림에 이르니 거기 하나님께서  물샘 12와 종려 70주를 주셨어요. 광야에서 제일 또 필요한 게 물과 그늘이에요. 거기서 그들이 물 곁에 장막을 칩니다.

    오늘 본문 짧은 구절 속에서 하나님의 깊은 뜻을 발견하길 바랍니다. 2024년 우리가 삶의 꽃길은 아니더라도 나의 이러한 마라같이 쓴 인생 속에 하나님의 시험을 깨닫고 다 통과해서 엘림의 보상이 열릴 수 있는 놀라운 축복의 자리가 되는 2024년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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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음메시지]그리스도의 심판대 (고후5:1-10)

    [복음메시지]그리스도의 심판대 (고후5:1-10)

    ♣ 2023. 11. 25. 안식일 오전 (오희도 목자)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고후 5:1)

    1절 말씀을 보면 두 개의 집이 나온다.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 &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 장막집은 임시 거하는 처소이다.(고후4:18) 내가 살았던 집도 나의 몸도 결국 무너진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영원한 집이 있다.(요14:2) 하나님의 백성이 내집 마련의 꿈을 어떻게 이룰수 있는가?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은  하나님께서 지으신다.  사람의 으로 짓는 것이 아니다.  손으로 짓는 것은 실수가 많고, 엉망으로 짓기도 한다. 그러나 영원하고 완전한 집이 우리에게 있다. 이 땅에 집이 없어도 소망을 가질수 있고  살아가는 의미가 된다. 이것이 인생의 중요한 결론이다.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고후 5:2)

    우리는 땅에 있으면서 탄식한다.  부정적인 탄식이 아닌 하늘에 있는 영원한 처소를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탄식이다. 또한  삶의 고단함과 정욕과 욕심으로 인해 나약한 자기의 모습을 보며 탄식한다.  하늘의 처소는  이 땅의 장막집이 무너져야 들어간다. 그러나 바울사도는 하늘의 영원한 처소를 이 땅에 살아갈때 덧입는다고 표현하고 있다.

    덧입는다는 것이 무엇일까?  하늘나라의 영원한 집은 두 구조가 있다. 하늘나라에 가서 거하는 처소도 있지만  이 땅에 살아갈 때 하늘나라의 영원한 집을 영적으로 덧입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3)

    벗은 자들로 발견되는 시점은 죽었을 때이다. 하나님 믿지 않고 죽으면 마치 벗은자들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이 땅에서 영원한 처소를 사모하고 믿었던 자들은 영원한 처소가  덧입혀져 있다.

    우리는 이 장막에 살면서 무거운 인생의 짐에 눌려 지게를 지고 살아가는 것과 같다.  헬라적인 사고는 육신과 영혼을 분리해서 생각했다. 이원론적인 사고이다. 극단적으로는 영혼은 이미 하늘나라에 가 있기 때문에 육신은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고 생각을 했다.  매우 위험한 생각이다.

    육신을 갖고 있을때 무슨 일을 했는지에 따라 그것을 근거로 구원이 결정된다. 육과 영이 분리되어 있는것이 아니다.  육신의 행위와 함께 하나님 앞에 심판 받는것이다.

    죽을 몸이 생명에게 삼킨자 된자들은 영원한 처소를 덧입는 자가 된다. 세례받으면 주의 죽으심과 함께 장사되었고 물에서 올라오는 순간 새생명 가운데 살게 된다.(롬6:4) 이 일을 하나님이 이루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주셨다.(5절) 성령을 받은 우리는 속으로 탄식하며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린다.(롬8:18~23) 성령은 영원한 삶을 보증해주기 때문에 우리는 이 땅에서 담대하게 살 수 있다.(6절)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이 본질임을 깨달을 때 담대해진다. 세례받고 올라올때 이미 내집 마련이 되었다.  우리는 주님과 살기 위해 빨리 떠나기를 바라지만(8절) 이 땅에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게 하기를 힘써야 한다.(9절)  고린도 성도들은 자신을 기쁘게 하기에 바빴다. 교회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고후 5:9~10)

    우리는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날 것이다.(10절) 벗어날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교회의 수많은 문제가 생기는 이유는 심판대가 있음을 생각지 못해서이다.  영원한 세계에 들어가는 순간 서야 할 곳이 심판대이다. 그때에는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 날마다 주를 기쁘게 하는 자가 되고 담대히 주님 오시는 날을 기다리며 주안에서 날마다 행복한 신앙 생활 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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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음메시지]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낫습니다 (전7:1~10)

    [복음메시지]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낫습니다 (전7:1~10)

    ♣ 2023. 7. 22. 안식일 오전 (오희도 목자)

     

    “죽는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2절)”  

    성경은 이상한  말을 하지요?  이해가 잘 안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성경 전체의 문맥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사실 인생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달려갑니다. 안죽는 사람은 없습니다. 죽음은 죽음 이후를 생각하고 준비하게 합니다. 오늘 본문은 전도서 6:12의 답변으로, 죽음 이후를 고민하게 만듭니다. 

    헛된 생명의 모든 날을 그림자 같이 보내는 일평생에 사람에게 무엇이 낙인지 누가 알며 그 신후에 해 아래서 무슨 일이 있을 것을 누가 능히 그에게 고하리요 (전 6:12)

    신후의 일을 깨닫게 되면 죽는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훨씬 좋은 날임을 알게 됩니다.

    *신후(身後) : 죽음 이후.

    죽음 이후에 가는 곳은 하늘나라입니다. 또다른 시작입니다. 신후사를 알게 되면 태어난 날보다 죽는날이 훨씬 중요해집니다.

    *신후사(身後事) : 죽음 이후의 일.

    사람은 미래보다는 과거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신후사를 향해 갑니다. 죽음 이후의 일을 생각하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죽음 이후를 알면 출생한 날보다 하늘나라 가는 날이 훨씬 낫다는 것을 압니다. 1절은 이 땅에서 부자로 사는 것(보배로운 기름)보다 하늘나라의 생명책에 녹명된 아름다운 내 이름이 더 귀하다고 말합니다.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전7:1)

    그래서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낫습니다.(2절) 장례식장에 가면 인생의 실존의 마지막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인간의 본질을 묵상하게 됩니다. 인간은 한줌의 재로 변합니다.  인생의 마지막! 신후사를 고민하고, 생각하고 준비하게 됩니다.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기 때문입니다. 나도 결국 죽습니다. 산자는 이것에 유심해야 합니다.

    *유심(留心) : 마음에 담는것.

    성경은 죽음 자체를 예찬하는 것이 아닙니다. 허무주의도 아닙니다. 죽음 이후의 일(신후사)을 정확히 알아서, 신후사가 마음속 깊이 남아있는 자가 지혜롭게 살게된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죽음에 대해 유심한다면 주어진 하루하루의 삶이 귀해지고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이름을 남길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내 이름을 아름답게 남기는 날들로 채워지길 원합니다. 죽음으로 인한 마음의 슬픔(3절)은 인생의 본질을 깨닫는 기회가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죽음 이후의 천국을 생각한다면 슬픔속에서도 마음이 좋게 됩니다.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함으로 마음이 좋게 됨이니라 (전 7:3)

    성도의 죽음은 하늘나라에 보내드리는 천국 환송식입니다. 육신의 이별이 슬프지만,  알고 보면 천국 보내드리는 환송예배입니다. 나중에 그 자리에 나도 누워있게 됩니다.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마음을 둡니다. 어리석은 자의 마음은 잔치하는 집에 있고, 그들의 목표도 잘먹고 잘사는 것에 있습니다.(4절)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 (전 7:4)

    우매자의 웃음소리는 가시나무 타는 소리 같습니다.(6절) 박자를 잘 맞게 탑니다. 전세계 문화의 코드는 웃음입니다. 재미주의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희화되고 신후사의 일에 대해 유심하기를 싫어하는 성향으로 변해갑니다. 웃음이 나쁜 것은 아니나 신후사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왕년은 지나간 것입니다. 옛날이 오늘보다 낫다고 말하는 것은 지혜가 아닙니다. (10절) 앞으로의 일이 훨신 더 좋은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믿는 성도들에게는 신후사의 일이 훨씬 더 인생의 하이라이트입니다. 내 인생의 하이라이트는  위에 있다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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