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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음 메세지]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눅 16:19-31)

    [복음 메세지]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눅 16:19-31)

    [말씀 제목]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눅 16:19-31)

    [설교자] 김세한 목자

    [설교일] 2025.08.16

    간혹 매스컴을 통해 접하는 소식에 의하면 죽음에서 부활한 사람들이 있다. 소위 임사체험을 한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의 진술을 살펴보면 부활한 후 몇 가지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는 매우 강렬한 빛을 목격했다고 진술한다. 그 빛에 따뜻하고 평화로운 느낌이었다고 한다. 둘째는 죽는 순간 길고 좁은 터널 같은 곳을 빠르게 통과하는 느낌을 받는다고 한다. 셋째 부활한 이후 사랑과 용서에 대한 말을 하는 사람이 많다. 과거의 삶을 되돌아보며 상처와 과오에 대해 이야기 한다는 것이다. 넷째, 삶과 죽음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가지게 된다고 한다. 더욱이 죽음 이후의 세계가 있음을 인정하고 그에 대해 말한다는 것이다. 다섯째,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적어지고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된다고 한다.

    하나 더하기 하나가 둘이라는 셈법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무조건 받아들여야 하는 산수의 기본 전제이다. 그 전제를 받아들일 때 비로소 이차방정식, 삼차방정식의 수학 문제를 다루는 것이 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신앙에도 우리가 기본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전제가 있다. 그 신앙의 기본전제 가운데 하나가 바로 내세의 존재이다. 즉 사람이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내세가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만약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신앙생활 한다면 그것은 마치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다. 미래 언젠가는 무너져 내릴 위험이 있다.

    (히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오늘 이 자리에 성도님들은 내세에 대해서 어떤 이해와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만약 우리가 그 미래를 확신한다면 오늘날 우리는 어떤 신앙생활을 해야 마땅할까? 오늘은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통해서 그 교훈에 대해 함께 생각하고 은혜를 나누는 시간을 가지고자 한다.

    오늘 본문에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이 비유가 전달하고 있는 내용은 매우 간단명료하다. 사람이 죽으면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내세가 있어서 사람이 다른 형태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죽어서 좋은 곳에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모두가 행복하고 또 그것이 영원히 지속된다면 정말 좋을 것 같다. 그러나 성경의 목소리는 그렇지 않다. 어떤 사람은 천국에 이르지만 다른 사람은 지옥에 이르러 영원한 고통의 자리에 속하게 된다는 것이다. 성경은 이것을 일관되게 이야기하고 있다. 이 목소리를 변경한 적이 없다. 그렇다면 성도는 그 상황에 대해서 보다 자세히 알 필요가 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것을 알기를 원하신다. 예수님이 부자와 나사로 비유를 통해서 전달하시는 교훈은 이런 것이다.

    첫째, 죽음 이후에는 반드시 두 개의 세계가 존재한다.

    (요 5: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불신자들은 하나님의 존재도 믿지 않듯이 내세의 존재도 믿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다면 내세의 존재도 믿어야 한다. 천국의 존재도 믿고 지옥의 존재도 믿어야 한다. 이 둘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분리할 수 없다. 어떤 불신자들은 내세를 믿지 않는다. 그 심리적인 이유는 천국의 존재를 인정하기보다 지옥의 존재를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천국 갈 자신은 없다. 그렇다고 지옥에 갈 것을 상상하면 끔찍하다. 그래서 죽으면 끝이지 천국과 지옥 같은 것이 어디 있느냐고 생각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세의 존재를 믿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듯이 천국과 지옥의 교리에 부인하는 나름의 논리로 반박한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이렇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지옥을 만들어서 사람들이 고통에 처하게 하십니까? 사랑의 하나님이라면 그것은 모순입니다.” 이처럼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표현과 지옥의 교리를 대조시키면서 마치 기독교가 모순된 종교라고 반박하며 부정한다. 그러나 이런 반문은 사실 성경에 대해서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생각이다.

    지옥은 사실 하나님이 마귀를 벌주기 위해서 만든 것이지 인간을 벌주기 위해서 만든 곳이 아니다. 다만 인간이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마귀의 길을 따르면 결국 마귀와 함께 지옥에 가게 되는 것이다. 이 선택에 대해서는 결코 하나님의 책임이 아니다. 마귀의 길을 따르기로 선택한 인간 자신의 책임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현실은 어떠한가? 세상에는 선한 사람만 존재하지 않는다. 악한 사람도 존재한다. 그래서 악인이 때로 선한 사람에게 손해를 끼치기도 하고 심지어 목숨까지 빼앗기도 한다. 이 세상에 그런 악인이 존재하고 선인의 억울한 일을 당하는 상황이 존재기에 우리는 마음속으로 악인에 대해서 뭔가 응징의 조치가 마땅히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선인에 대해서도 무엇인가 보상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임마누엘 칸트’라는 철학자가 말했다. “천국과 지옥은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부조리와 불공평으로 가득 찬 이 세상을 발견할 때마다 이것을 생각하게 된다. 형통해야 할 사람이 잘못되고 잘못되어야 할 사람이 오히려 형통하는 이런 부조리 때문에라도 천국과 지옥은 반드시 있어야한다”라고 말했다.

    나치 독일의 히틀러라는 미치광이 하나 때문에 수백 만 명의 죄없는 사람이 포로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어야 했다. 만약 내세가 없다면 이런 악인의 횡포에 대해서, 세상의 불의에 대해서 어떻게 그 억울함과 원통함을 해소할 수 있겠는가?이런 질문이다. 이 철학자의 눈에도 세상은 부조리와 불합리로 가득 찬 곳이며 그 부조리와 모순이 해소되려면 반드시 죽음 이후의 내세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칸트’라는 철학자뿐만 아니라 성경의 시편 기자의 노래 속에도 이 세상의 현실에 대해 동일하게 서술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시 73:3-6) 『[3]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4]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5]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6] 그러므로 교만이 저희 목걸이요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며』

    시편 기자는 철학자 ‘칸트’와 마찬가지로 악인이 형통한 현실에 대해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다. 이처럼 의인이 악인에게 해를 입는 사례는 이미 창세기부터 있었다. 아담의 장남 가인이 차남 아벨을 살해했다. 그런데 아벨이 죽음 이후 그 억울함이 어떻게 해소되었다는 기록이 없다. 성경은 이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이사야 예레미야 같은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순교했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의 죽음 이후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세례 요한은 입바른 소리 하다가 헤롯왕에게 참수형 당했다. 그러나 그의 죽음 이후에 어찌되었는지 성경은 침묵하고 있다. 그 외에도 얼마나 많은 성경의 인물들이 억울하게 죽었는지 모른다. 만약 천국과 지옥이 없다면 그 무수한 피해자들은 어떻게 억울함을 풀고 그에 대한 보상받을 수 있을까?

    이처럼 세상의 역사를 보아도, 성경의 역사를 보아도 우리가 사는 세상은 아름답지만은 않다. 악인이 의인을 가해하는 부조리한 상황이 비일비재하다. 여러들은 이런 사실에 대해서 어떤 견해를 가지고 계신가? 만약 내세가 없다면, 만약 천국과 지옥이 없다면 이런 상황을 해소할 방법이 없다. 그래서 지옥은 존재할 수밖에 없다.

    (마 25: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따라서 성도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다면 성경을 믿어야 하고 성경을 믿으면 성경이 말하는 내세의 존재도 믿어야 한다. 그래야 천국을 소망할 수 있고 또 지옥의 형벌을 두려워할 수 있다. 또 다른 영혼들이 그 영원한 형벌에 처하지 않도록 전도할 수 있다. 성도가 천국보다 왜 세상에 몰두하며 살아가는가? 이 기초 신앙이 굳건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도가 왜 가족 친척 전도하는데 미온적인지 아시는가? 내세에 대한 이 신앙이 약하기 때문이다. 부디 죽음 이후에 이 두 세계가 있다는 성경의 선언을 믿으시고 영원한 천국을 준비하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길 원한다.

    둘째, 이생과 내세의 삶은 크게 역전될 수 있다.

    (눅 16:25)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이 비유에서는 천국과 지옥의 존재뿐만 아니라 부자와 나사로의 인생이 대조되고 있다. 부자는 이생에서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했고 나사로는 상처가 난 곳을 개가 와서 핥을 만큼 생활이 비참했다. 그런데 죽음 이후 이들의 처지가 완전히 역전된다. 부자는 음부의 고통을 당하고 있고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이생과 내세는 전혀 다른 처지로 역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오해하지 않아야 할 점은 부자는 부요하기 때문에 불구덩이 떨어지고 반면 나사로는 가난하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것이 아니다. 니고데모처럼 물질이 풍족해도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있고 오히려 빈궁해도 마음이 교만하고 탐욕스러운 사람도 있다.

    부자는 음부의 고통에 있다고 했는데 여기서 음부는 어떤 곳인가? 음부는 헬라어로 ‘하데스’라고 하는데 이는 죽은 자가 거하는 임시 거처를 가리킨다. 이 음부에 대기하고 있다가 마지막 심판을 받고 지옥에 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음부는 지옥 이전의 임시 체류 장소로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지옥이란 뜻의 헬라어는 ‘게헨나’라고 하는데 이는 ‘힌놈의 골짜기’란 뜻이다. 음부와 지옥은 어휘상 달리 표현되지만 여기서는 같은 의미로 다루겠다. 지옥으로 번역된 게헨나는 예루살렘 동남쪽에 있는 실존 지명이다. 이 장소에 얽힌 역사적인 배경이 있다. 과거 구약시대에 우상 숭배자들은 이곳에서 인신 제사를 드렸다. 그래서 어린 아이를 불태워 우상에게 바쳤던 것이다. 그 후 유대인들은 이 저주스러운 장소에 쓰레기를 가져다 버렸다. 그리고 쓰레기들을 태우기 위해 항상 불을 피워놓았다. 그래서 꺼지지 않고 계속 불이 타오르는 곳이 바로 게헨나이다. 주님은 바로 이 게헨나를 지옥으로 말씀하고 있다.

    (막 9:48)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그래서 한마디로 지옥이란 어떤 곳이냐 바로 꺼지지 않고 항상 불이 붙어 있는 영적 쓰레기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생에서 잠시 동안 아무리 떵떵거리게 산들 저생에서 영원히 고통의 게헨나에 간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또 이생에서 아무리 고통을 받을지라도 저생에서 영원한 안식과 평안을 누릴 수 있다면 이 고통이 뭐 그리 대단한 것이겠는가? 주목할 점은 그 처지가 한 번 정해지면 바뀔 수 없고 영원히 지속된다는 것이다.

    부디 여러분들은 잠시 잠깐의 이생의 행복이나 고통보다 영원히 지속되는 내세에서의 행복과 고통에 더 큰 관심을 두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기원한다.

    셋째, 기억되는 이름과 망각되는 이름이 있다.

    (계 3: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오늘 본문에 부요한 사람은 성도 이름도 기록되지 않고 다만 부자라고 기록했다. 반면에 거지는 ‘나사로’라고 분명히 그 이름을 기록하고 있다. ‘나사로’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의 도우심’이란 뜻이다. 그 이름의 뜻으로 미루어 보건대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소망하며 살아간 신앙인이 아닌가 추측된다.

    이처럼 사람은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이름이 있고 기억하지 않으시는 이름이 있다. 이 사실을 잘 설명하는 성경의 기록이 있다.

    (계 20: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계 21:27)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

    성도는 믿고 세례를 받은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하신다. 말하자면 한국에서는 아기가 태어나면 그 이름이 주민등록부에 등재되듯이 사람은 세례를 받을 때 다시 태어나게 되고 그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미국 시민권이나 스웨덴 같은 복지국가의 시민권을 얻고자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그것이 있으면 육신의 혜택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늘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천국의 시민권은 이 땅의 어떤 시민권과 비교할 수 없다. 비록 이 땅에서 부자와 같이 호화롭고 평안한 생활은 못해도, 티브이에 나오는 유명인사는 못돼도, 가난하고 불편하게 살아도, 질병과 장애를 안고 힘겹게 살아가도 하나님은 우리의 이름을 기억하시고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실 미래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도는 잠깐이면 사라질 이 땅에 이름을 새겨지는 것보다 하늘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신앙을 갖는 저와 성도님들이 다 되기를 바란다.

    넷째, 이생은 내세를 준비하는 유일한 기회이다.

    (눅 16: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나사로를 살려서 돌려보내면 제 아들들이 믿지 않을까요?” 하고 질문한다. 이에 대해 아브라함은 “모세와 선지자들의 음성을 듣지 않으면 죽었다 살아난 자가 있어도 듣지 않을 것이다.”라고 대답한다. 이 대답으로 보건대 이 땅에서의 삶의 기간은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기를 준비하는 유일한 기회임을 알 수 있다. 죽으면 그 기회는 다시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태평양 어느 섬나라에 오랫동안 내려오는 풍습이 있었다. 그 풍습은 표류한 이방인을 일 년 동안 왕으로 모시다가 그 후 무인도로 추방해서 죽게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곳에 표류해서 왕위에 오른 일 년 동안 온갖 보물을 모아서 자기 집에 채우며 행복하게 생활했다. 그러나 일 년 후 보물은 내려놓고 무인도로 추방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곧 죽었다. 두 번째 사람이 그 섬에 표류했다. 그도 왕으로 추대되어서 일년 간 섬의 온갖 맛있는 음식을 즐기며 좋은 의복을 만들어 입었다. 그리고 일 년이 지나자 그도 무인도로 추방되어 죽었다. 그런데 세 번째 사람이 그 섬에 표류했다. 그는 도착 후 앞서 간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왕이 되자 섬의 백성들에게 명령했다. “저 무인도에 우물을 파고 나무를 심고 밭을 갈고 집을 지어라.” 섬의 백성들은 왕의 명령대로 모두 행했다. 그리고 일 년이 지날 무렵 무인도는 비옥한 곳으로 바뀌어 있었다. 결국 이 사람은 무인도에 추방되었지만 잘 가꾸어진 그 무인도에서 계속 행복하게 살았다.

    이처럼 이 땅에서의 삶은 화살과 같고 유수와 같다. 그 짧은 일생 동안 죽음 이후의 삶을 준비해야 한다. 부디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믿음의 기초를 확실히 세우자. 죽음 이후 우리에게 임할 그 때를 준비하자. 이 땅을 사는 동안 내가 거할 하늘 집을 위해서 열심히 땀 흘리며 준비할 뿐만 아니라 지옥을 향해 나아가는 다른 영혼을 구원하고 미래에 모두 함께 영원한 천국에서 영원한 복락을 누리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길 예수 이름으로 기원한다.

     

    글작성 : 김세한 목자

  • 제5항 성령에 대한 우리의 믿음

    제5항 성령에 대한 우리의 믿음

    성령을 받는 것은 천국의 기업을 얻는 보증이며 방언(영언)을 말하는 것은 성령을 받은 증거가 됨을 믿는다.

    성령이란 ‘거룩하신 영’이라는 뜻으로 하나님의 영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은 이미 구약 시대부터 존재했습니다. 천지 창조 때 하나님의 신(영靈)이 수면 위에 운행하셨고 사사 삼손의 몸에 임하셔서 괴력을 발휘하게도 하시고 여러 선지자들이 기적을 행하는데 역사하셨습니다. 그런데 그와 같이 성령이 역사하시던 구약 시대에 하나님은 예레미야, 에스겔, 요엘 등의 여러 선지자를 통해서 장차 말세에 나의 신(영)을 부어주실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언대로 신약 시대에 오순절이라는 유대인의 절기에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영혼 안에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구약 시대에도 이미 성령이 존재했고 성령의 역사도 있었는데 왜 신약 시대에 와서 굳이 성령을 받아야만 했을까요? 그러면 오순절에 내린 그 성령은 구약 시대의 그것과는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요? 그리고 이렇게 성령을 받은 사람에게는 어떤 하나님의 은혜가 있을까요? 이런 의문점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서 성령의 가치, 역할, 성령을 받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함께 살펴봅시다.

    구약 시대 선지자가 예언한 성령, 사람의 마음 속에 부어주시겠다는 그 성령은 유대인이 중요하게 여기는 세 절기 중 하나인 오순절이라는 절기에 인류 역사 최초로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2:1-2) [1]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오순절에 내린 성령은 구약 시대에도 존재한 성령과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구별됩니다.

    첫째, 이 성령은 구약 시대의 것과 구별되는 약속의 성령입니다.

    성령이 이미 존재하셨던 구약 시대부터 하나님은 여러 예언자들을 통해 이 특별한 성령을 약속하셨습니다. 세례 요한도 이 성령에 대해서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고 예언했고 예수님 자신도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保惠師)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라고 성령에 대해서 언급하셨습니다. 이처럼 구약의 선지자들, 세례요한, 그리고 예수님이 예언하신 그 성령을 일컬어 ‘약속의 성령’이라고 표현합니다.

    (31: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36:27)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2:28)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2:33)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둘째, 이 성령은 십자가 사건의 결과로 주어진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오순절날 주어진 ‘약속의 성령’은 구약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성령’은 존재하셨지만 ‘약속의 성령’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구약 시대의 ‘성령’은 사람의 마음을 감동하여 어떤 기적을 일으키는 역사에 머물렀지만 신약 시대 오순절 이후 내린 ‘약속의 성령’은 사람의 마음에 새겨져서(혹은 부어져서) 하나님과 그 사람 사이에 특별한 관계를 맺게 만드는 성령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바로 이 ‘약속의 성령’을 부어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께서 육신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이후에야 ‘약속의 성령’이 이 땅에 임하셨습니다. 따라서 오순절 성령 강림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 부활, 승천의 결과로 주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만약 예수께서 죽었다가 부활하시지 않으셨다면 ‘약속의 성령’도 인간에게 주어질 수 없었습니다. 이점에 대해서 예수님 자신도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요16:7) 만약 구약 시대의 성령만으로 사람이 구원받기에 충분했다면 신약 시대에 ‘약속의 성령’이 주어질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또 구약의 선지자들도 이에 대해서 예언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신약 시대 성도의 구원을 위해 ‘약속의 성령’이 꼭 필요했고 주님은 그것을 위해서 죽었다가 부활하셨습니다.

    (16: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오시리니

     

    셋째, 이 성령은 거듭남의 한 요소인 성령세례입니다.

    요한복음 3장을 살펴보면 밤중에 찾아온 니고데모라는 인물에게 예수님은 거듭남(중생)의 중요함에 대해서 밝히셨습니다.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거듭나야 하는데 그 의미는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여기서 물은 ‘물세례’를 가리키고 성령이란 ‘성령세례’를 가리킵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세례 요한은 자신의 사역이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인 반면 그리스도의 사역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일이라고 대조시켜 말했습니다. 따라서 잠시 뒤에 이어지는 니고데모와의 대화 본문에서 물과 성령의 의미는 곧 ‘물세례’와 ‘성령세례’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그렇다면 오순절에 내린 ‘약속의 성령’ 즉 ‘성령세례’는 매우 중요한 구원의 요소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받아야 천국, 곧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신앙인이 ‘성령세례’ 또는 ‘약속의 성령’을 받는 것은 어떤 가치가 있으며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일까요?

    1)성령을 받는 것은 천국 기업을 상속하는 증거가 됩니다.

    성경은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 여러 가지 비유로 설명하고 있는데 그 중에 하나는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재산 상속받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성도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곧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가치의 유산을 영원히 상속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에 대해서 하나님은 그 약속을 확실히 지키겠다는 뜻으로 인(印 도장)을 찍어 보증해 주셨습니다. 그 인을 찍어 보증하신 일이 바로 ‘약속의 성령’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종종 이 일에 대해 ‘성령으로 인쳤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에서는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고 했고 계시록 7장에는 한 천사가 해돋는 데서부터 올라와서 인을 가지고 선민의 이마에 인치려는 장면을 기록했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성령세례를 통해 하나님이 성도에게 구원을 보증하신 일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1:13-14) [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14]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7:3)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

    (고후 1:22)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고후 5: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하나님은 진실하시고 신실(믿을만한)하신 분이기 때문에 거짓말하지 않으십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약속을 주셨다면 그것은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만약 거짓말하지 않으시는 분이 내게 어떤 약속을 주셨다면 그 약속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때로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원인은 성품이 거짓된 사람이기 때문이거나 혹은 지킬 능력이 없거나 할 처지에 있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심과 동시에 전능하신 분입니다. 따라서 성품적으로나 능력면으로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지키실 수 있고 우리는 그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성령의 인침을 통해 구원의 약속을 받았다는 것은 흔들리지 않는 구원의 소망을 품을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6:17-18) [17]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18]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2)성령은 성도의 신앙생활의  보혜사가 되십니다.

    성령은 천국 기업의 보증으로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성도가 천국을 소망하며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성도에게 여러 가지 실제적인 도움을 주시기 위해서 성령을 주셨습니다. 비록 성도는 천국의 약속은 받은 존재지만 이 땅에서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의 불신자들에게 고난과 어려움이 있는 것처럼 거듭난 성도에게도 역시 고난과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가 불신자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성령을 통해‘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얻었기에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과 보살핌을 받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마치 부모는 타인의 자녀가 아니라 내 자녀에게 온갖 관심을 쏟고 필요를 공급하며 보살피듯이 성령을 받은 자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특별한 보살핌을 받습니다. 그래서 비록 이 땅에서 여러 가지 고난과 어려움을 만나더라도 우리 안에 성령께서 위로하시고 상담해주시며 감당하는 능력과 은혜를 주십니다. 이러한 성령을 일컬어 ‘보혜사’라고 부릅니다. 보혜사란 상담자, 조력자라는 뜻입니다.

    (8: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물세례와 성령세례(성령의 내주)로 거듭난 성도라고 할지라도 그 속에 죄의 유혹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죄의 유혹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성도에게 성령을 부어주신 것은 육체의 소욕에 이끌리지 않고 성령의 소욕에 이끌리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단이 주는 생각이 아니라 성령이 주시는 생각에 순종해서 선한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성도는 의지와 결단을 동원해서 성령께서 주시는 선한 소욕에 순종하면 됩니다. 성령께서는 혹시 죄를 범했을 때 그 죄를 깨닫게 하시고, 십자가 보혈의 은혜를 의지해서 그 죄를 자백하고 회개할 때 우리 죄를 소멸시키시고,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하는 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성령의 풍성한 열매들을 맺게 하십니다.

    (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5:22-23)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성령 세례 즉 약속의 성령은 성도 개인에게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세례를 받은 자들이 이룬 공동체, 즉 교회를 세우는 일에 성령이 이끌어주십니다. 하나님은 성도에게 다양한 성령의 은사를 부어주십니다. 성령으로부터 오는 은사는 지혜의 은사, 지식의 은사, 믿음의 은사, 병고침의 은사, 능력의 은사, 예언의 은사, 각종 방언의 은사, 방언 통역의 은사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은사를 내려주시는 목적은 성도 개인이 자랑하고, 자기 만족하게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의 덕을 세우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4:11-12) [1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고전 12:1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3)방언이 성령을 받은 확실한 증거입니다.

    그러면 성령의 내주를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승천 직후 오순절 절기에 인류 역사상 최초로 성령이 내리실 때처럼 방언(또는 영언)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방언을 성령 받은 증거로 삼아야 할까요?

     

    첫째, 믿는 것이 곧 성령 받은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개신교회는 믿으면 곧 성령 받은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내용들을 살펴 볼 때 믿는다고 곧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믿음과 성령의 내주는 별개의 사건입니다. 사도행전 19장 2절에 보면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서 만난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그 질문을 받은 제자들은 대답하기를 아직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했고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도 받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그 후 안수하자 성령을 받았다고 기록했습니다.

    (19:2)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19:6-7) [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7]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둘째, 세례를 받은 것이 곧 성령을 받은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에서 빌립에게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다시 베드로와 요한이 내려가서 성령받기 위해 안수 기도했습니다. 만약 예수를 믿었거나 세례를 받은 것으로 충분했다면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에 내려가서 성령을 구하며 안수한 것은 너무도 이상한 행동이 됩니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사마리아의 제자들이 세례 받은 것으로 불충분하고 성령을 받게 하기 위해서 안수받아야 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본문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8:16)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

     

    셋째, 선행을 한다고 성령 받은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고넬료는 하나님이 그의 기도와 구제를 기억하실 만큼 신실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성령은 받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시고 그를 지시하셔서 베드로를 만난 후에야 비로소 그 가족들이 성령세례와 물세례를 받게 됩니다. 고넬료가 그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께 기억되는 신앙으로 구원받기에 충분했다면 굳이 하나님이 고넬료에게 천사를 보내 지시하시고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여주셔서 두 사람이 만나도록 주선하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베드로의 고넬료 가정 방문한 일의 결말은 그 가정이 성령세례를 받고 이어서 물세례까지 받은 것으로 일단락되고 있습니다.

    (10:4)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가로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가로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고넬료 가정의 전도는 오순절 사건 이후 대략 10년 정도 세월이 흐른 뒤에 나타난 사건으로 추정합니다. 그렇다면 성령세례는 오순절 제자들에게만 임한 대표적 사건이거나 일시적 사건도 아닙니다. 나중에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여러 장로들에게 보고하는 자리에서 베드로는 고넬료 가정에 내린 성령세례가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라고 증거했습니다. 고넬료 가정도 오순절 제자들이 체험한 것과 똑같은 체험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날에도 오순절과 똑같은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오늘날에도 사도 시대와 같은 현상은 여전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2: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11:15)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넷째,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했다고 성령 받은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언젠가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고린도 전서에서 바울은 성령이 아니면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고전 12:3). 그러나 베드로가 그 때 약속의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 오순절 절기에야 비로소 성령을 받았습니다. 오순절 성령이 ‘성령 세례’로서의 성령이며 구원의 보증이 되는‘약속의 성령’입니다. 오순절 이전에 구약 시대부터 성령께서 감동하시는 역사는 존재하듯이 베드로가 예수님을 주로 고백한 것은 감동의 역사에 불과한 것입니다. 만약 베드로가 예수님을 주로 고백한 것만으로 구원이 보장되었다면 오순절에 다시 ‘성령의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것만으로 ‘성령의 세례’를 받은 것으로 간주할 수 없습니다. 오순절과 같은 동일한 체험으로 받는 것입니다.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4)사도행전에서 성령을 받을 때는 방언을 말했습니다.

    위와 같은 내용을 살펴볼 때 우리는 예수님을 믿지만 물세례나 성령세례를 받지 않은 불완전한 단계의 신앙인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또 그런 신앙인들에 대해서 세례와 성령을 받게 한 사도들의 노력을 보면 반드시 성령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요한의 세례만 알고, 선행하는 믿음으로 구원이 충분히 보장된다면 사도들은 굳이 물세례와 성령세례를 베풀려고 사람을 만나고 안수를 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받는 것은 무엇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까? 신약 성경에서 유일한 역사서로 분류되는 사도행전에만 성령 받는 순간 나타나는 구체적 현상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째, 오순절 날의 사도들의 체험에서(행 2:1-4), 둘째, 고넬료 가정에서의 체험에서(행 10:44-48), 셋째, 에베소 교인들의 체험에서(행 19:1-5) 그 현상을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 발견되는 성령세례의 공통적 현상은 방언을 말하는 것입니다.

    (2:3-4) [3]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10:45-46) [45]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46]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19:5-7) [5]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7]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빌립이 사마리아 선교한 사도행전 8장의 기사에는 성령이 내려오실 때 방언을 말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다만 그 정황상 방언을 말했을 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모든 것을 자세히 기록하지 않고 때로는 생략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도들은 사마리아를 선교할 때 백성들이 성령을 받을 수 있도록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안수했습니다. 그런데 마술사 시몬이 사도들에게 돈을 드려 자신도 그런 능력을 소유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는 베드로와 요한이 안수할 때 물세례만 받고 성령세례를 받지 않은 신도들에게 마술사란 직업인이 탐낼만한 어떤 현상이 있었다는 것을 추론하게 합니다.

    (8:18-20) [18]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함으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19] 가로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20] 베드로가 가로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위와 같은 사실로 미루어보아 오순절 날 제자들에게 임했던 성령 강림은 구약의 성령의 역사와는 뚜렷이 구별됩니다. 그리고 성령세례의 구체적인 증거는 방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을 받을 때 방언을 말하는 현상은 이천년이 지난 오늘날 사도교회를 계승하는 본 교회 안에서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는 현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