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가족은 참 진리가 있는 참예수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마음이 뜨거워져 빨리 이 기쁜 소식을 사랑하는 가족에게 알리고 전도 해야겠다는 마음이 앞섰습니다. 영은전도대회에도 초대하고 설교 말씀도 보내드리고 만날 때마다 권면도 하였지만 그럴수록 부모님들은 더욱더 거리를 두셨습니다.
저희들의 권면이 부담스러우셨는지 한동안 얼굴도 뵙지 못하고서야 너무 성급하게 마음이 앞섰던 게 아니었나 반성이 되었습니다. 이후로는 전략을 바꿔(?) 아예 교회 얘기를 꺼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역으로 질문도 하시는 변화가 생기더라고요, 그래도 여전히 ‘너희 교회에서 잘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는 건 인정하지만 다 옳다고는 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움직여 주신다는 생각에 감사했고 가족 전도는 장기전일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안부 전화를 드리면 화면으로 너희들 잘 지내는 것 보고 있다고 하셔서 무슨 말인가 했더니 청주 교회 유튜브 채널을 구독하시고 설교며 특별 찬양 발표며 간증이며 다 보고 계신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정말 놀랐습니다. 싫으면 그림자도 꼴보기 싫다는데 유튜브 채널을 시청하신다니 저에겐 긍정적인 반응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희는 교회 성도님들과 함께 대만 참예수교회 방문 여행을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출발 전부터 이런저런 이유로 대만에 가는데, 부모님도 언젠가 꼭 같이 가셨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렸고 다녀오고 나서도 대만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그곳의 성도님들께 받은 사랑에 대해 이야기를 드렸는데 굉장히 귀 기울여 들어주셨습니다. 분위기가 좋아지자 주님이 주시는 기회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으로 기도하며 권면했습니다. “마침 오늘 저녁(금요일)에 예배가 있는데 장항서부교회로 함께 가서 예배 드리면 안 될까요?”하고 말이죠~ 저는 무뚝뚝한 사람인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니 애교 섞인 코맹맹이 소리가 절로 나왔습니다. 아버지는 순간 당황하시다가 “그러지 뭐~”라고 응답하셨습니다.
할렐루야 감사주!!
저는 어린아이처럼 팔짝팔짝 뛰며 기뻐했고 뒤늦게 무슨 일이냐며 어머님이 오셨지만 이미 아버지가 약속하셨으니 무르시면 안 된다고 우겼습니다. 어머님도 웃으시며 그러자고 하셨고 맛있게 저녁 식사를 한 뒤 장항서부교회로 향했습니다. 군산인 아버지 댁에서 장항서부교회는 차로 20분 정도 되는 짧은 거리였습니다. 또 마침 그 때 윤석원 목자님께서 장항으로 이사를 오신 날이었고 첫 설교를 하시는 날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0:35 주는 것이 복이다> 라는 말씀이었고 이미 ‘복’이신 하나님 안에 있다면 우리 자체가 복이라고 하시면서 그러니 믿는 성도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가 아닌 “새해 복이 되십시오”라고 인사하자고 하셨습니다. 설교가 끝나자 옆에 앉아 계시던 어머니께서 저에게 “새해에도 복이 되렴.” 하고 인사해 주셨고 저도 화답했습니다. 예배가 어떠셨냐는 질문에 “젊은 목자님께서 말씀을 명료하게 잘 하신다.”라며 칭찬하셨습니다. 돌아가는 차 안에서 “부모님과 함께 예배드린 기념사진을 깜박했어요, 기념으로 꼭 사진을 찍어야 하는데…” 라고 하니 아버지께서 못 이기는 척 “그럼 돌아가서 찍든가.” 하시더군요, 어머니는 웃으시며 너 이거 너희 교회 월말 발자취 영상에 올릴 거지? 하셨고요. 진정 구독자가 맞으시구나 생각했어요.
저는 이런 일이 이렇게 빨리 올 거라고 생각을 못했습니다, 물론 부모님이 당장 참예수교회에 오시겠다고 하신 것도 아니고 세례를 받으신 것도 아니지만 하나님은 내가 잊고 있을 때에도 나의 기도를 잊지 않으시고 일하고 계셨다는 생각에 너무나 감격스러워 눈물이 났습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남편 손을 꼭 잡으며 우리 더 열심히 기도하자고 다짐했습니다. 이 글을 읽으신 성도님들께서도 함께 기도 부탁드리고 저처럼 전도를 위해 기도하시는 분들이 언젠가 이뤄질 기도 응답의 소망을 품고 열심히 전진하시길 저도 기도하겠습니다. 모든 영광 감사 주님께 드립니다, 아멘!
2024년, 청주교회에서는 봄을 맞이하여 영은전도대회를 개최하였습니다. 이번 영은회는 전홍희 목자님께서(現 수원 참예수교회 시무) [충만한 성령으로 강건한 교회]라는 주제로 3일간 설교해 주셨습니다.
특별히 이번 영은회 기간에는 귀한 영혼들이 방문해 주셔서 더 뜻깊었는데요, 그동안 청주교회에서 인근 아파트 경로당에 때마다 믹스커피를 보내며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자 노력해 왔었습니다. 9년간 이어진 그 기도에 응답해주시듯 이번 영은회에 경로당의 어르신들이 무려 아홉 분이나 방문해 주셨고 함께 예배를 드리며 보낸 시간은 우리 모두에게 소중한 추억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사역이 점점 결실을 맺어가는 것을 목격할 수 있는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참예수교회는 인근 주민들에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교회로 인식되기 시작했다고 믿습니다. 우리의 노력과 하나님의 은혜 덕분에, 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되길 원합니다. 이번 영은회는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이 얼마나 큰 사랑으로 우리를 감싸고 계시는지를 다시 한번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가며, 하나님의 사랑을 전파하는 데 더욱 앞장설 것입니다. 참예수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함께 힘을 모아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 위에 확장해 나가기를 기도합니다.
이번 영은회가 마무리되었지만, 우리의 사명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주변의 이웃들과 함께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며, 모두가 하나님의 큰 가족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결실의 선물을 소중히 여기며, 앞으로 더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2024 청주교회 봄 영은전도대회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시고 보여주셨습니다. 이것들을 바탕으로, 우리 모두가 더 나은 믿음의 길을 걸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함께 성장하며, 우리의 믿음이 이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길 소망합니다.
청주교회 루디아 신도회는 45~55세 사이의 여성 신도로 구성되어 있으며 구성원은 총 8명입니다. 대부분 가정에서는 엄마와 아내로서, 직장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소임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여러 역할을 감당하면서도 특별히 교회 내 여러 사역의 자리에서 성실히 제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안식일 예배 후 오후에 진행되는 신도회에서는 서로 한 주간의 삶을 이야기하면서 생활 속에서 체험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고 있습니다.
신도회 예배를 드리면서 항상 느끼는 점은 “나의 형편을 정말 잘 아시는 하나님~ !!” 입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 공의로우신 하나님,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만난 풍성한 생활의 간증을 나누며 기쁨의 웃음이 넘치기도, 감사의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루디아 신도회에서는 특히 기도에 힘쓰고 있는데 신도회 기도 제목을 두고 매주 목요일 정시 기도를 하고 있고 전도는 은사가 아닌 사명이라는 인식으로 매일 태신자와 전도 대상자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또 잃은 양을 위해서 2주에 한 번 정기적으로 문고리 심방을 하고 있습니다. 잃은 양을 생각하며 쓴 엽서에 교회 소식을 알리기도 하고, 말씀을 적기도 하고, 엽서를 읽으면서 먹을 수 있는 간단한 먹거리와 함께 집 문고리에 걸어두고 옵니다. 하나님처럼 그 영혼을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생각하며 하나님 안에서 같이 동행하게 될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음 신도회 소식에서는 잃은 양들이 회복되어 함께 신도회 예배를 드리며 즐겁게 활동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드리고 싶습니다. ^^
그 밖에도 여러 신도회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봄에는 벚꽃놀이도 가고, 찬양기도회로 다른 신도회와 연합 신도회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다른 지역에 있는 교회를 방문하여 신앙의 교제를 나누는 활동도 꾸준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다음 달에는 광주교회를 방문하려고 합니다. 어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너무 기대가 됩니다.
이상~! 혼자가 아닌 함께하는 즐거움으로 하나님이 주신 평안함을 마음껏 누리고 있는 루디아 신도회 소개였습니다. 평안, 할렐루야~!!
제국주의 시대를 논할 때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나라가 있다. 바로 현재의 영국이다. 현재는 유럽 서쪽의 섬나라이지만 소위 대영제국이라 일컫던 황금시대가 있었다. 1607년, 북아메리카의 버지니아주 제임스 타운을 시작으로 전 세계 약소국을 대상으로 정복하고 식민지로 삼아갔다. 그래서 1815년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이하는데 이 기간이 무려 백년이나 지속되었다. 1920년에 이르러 대영제국은 지구상의 모든 식민지를 합하면 면적이 무려 3,550만 제곱미터가 되었다. 이는 대한민국의 355배 되는 면적이고 현재 러시아 땅보다 2배 이상 큰 면적이다. 그래서 가장 잘나가던 때에 세계 육지 면적의 4분의 1이 바로 영국의 것이었다. 그래서 소위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별명이 붙었던 것이다. 그런 대영제국도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많은 빚을 지는 바람에 국력이 쇠퇴해지고 미국에 그 패권을 넘겨주게 되었다. 1997년 홍콩을 중국에 반환하면서 대영제국주의의 잔재는 완전히 정리가 되었다.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지배하고 착취하려는 모습은 작게는 사회 곳곳에서 발견될 수 있는 ‘우리의 현실’이다. 인간관계 속에도 있고, 기업과 기업 사이에도 있고, 단체와 단체 사이에도 갑을 관계가 있다. 이런 일면을 보면 소위 양육강식 적자생존이라는 강자의 법칙이 지배하는 것이 이 세상의 원리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루시려는 나라는 그런 원리가 지배하는 나라도, 사회도, 개인도 아니다. 하나님이 이루시려는 나라는 이 땅에 속하지 않은 원리가 지배하는 나라, 절대 공의와 사랑을 품으신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그런 나라였다. 그것을 이루시기 위해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왕이 되게 하셨고 그를 말씀으로 지도하셨다.
(시 119:101-102) 『(101) 내가 주의 말씀을 지키려고 발을 금하여 모든 악한 길로 가지 아니하였사오며 (102) 주께서 나를 가르치셨으므로 내가 주의 규례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세움 받은 성도들은 오늘날 어떤 신앙의 길을 가고 있는가? 또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내가 어떤 길을 가고 있다고 고백할 수 있는가? 성도들이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이 이기게 해주시고, 형통한 길을 열어주시고, 땀 흘린 대가로 단 열매를 수확하게 하시기를 원한다. 그러나 육신의 눈으로 발견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영적인 눈을 뜨고 가려진 본질을 보고 있는가? 오늘은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이 이기게 해주셨다는 승리 기사를 통해 함께 생각하고 은혜를 나누는 시간을 가지고자 한다.
다윗이 왕이 되어 처음 하고자 한 일은 언약궤를 자신의 성으로 모셔 오는 일이었다. 그 과정에서 웃사가 죽는 불미스러운 일도 있었지만 그것은 곧 다윗의 겸손한 영성과 신앙을 발견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언약궤 앞에서 어린 아이처럼 낮아져 춤을 추는 다윗에게 하나님은 소위 ‘다윗 언약’이라고 하는 중요한 언약을 주신다. 다윗은 하나님을 위해서 집을 짓겠다고 했지만 오히려 하나님이 다윗에게 내가 너의 집을 지어주마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 주셨던 것이 바로 ‘다윗 언약’이었던 것이다. 그 다윗 언약은 단순히 육적인 면에서 다윗의 혈통에서 왕위를 계승할 것이라는 뜻이 아니었다. 그것은 영적인 면에서 그리스도께서 그 후손 가운데 오실 것이라는 축복의 언약이었다. 이처럼 하나님께 언약을 받은 다윗은 그 언약에 대한 믿음을 품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출정한다. 그리고 블레셋의 도시를 쳐서 항복을 받아낸다. 뿐만 아니라 그 외에 모압과 소바, 아람과 아말렉, 하맛과 에돔 족속까지 굴복시킨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명실공히 팔레스틴에서 주도권을 장악한 최강국으로 부상하게 된다. 그래서 다윗의 이러한 전과에 대해 성경은 6절과 14절에서 두 번씩이나 동일하게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이기게 하시니라” 또 다른 반복구가 있는데 “조공을 드리니라.”(2) “조공을 바치니라.”(6)이다. 이것은 다윗의 이스라엘이 대영제국처럼 다른 나라를 정복해서 착취하고 압제하는 제국주의의 길을 갔다는 뜻이 아니다. 다윗이 이룬 육적 승리를 통해 성도와 교회가 경험해야 할 영적 승리를 표상하고 있다. 다윗을 통해 성도가 신앙의 길을 걸을 때 하나님은 이런 복을 주신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또 그런 복을 받는 자의 태도는 이러해야 한다는 것을 교훈하고 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그 메시지는 어떤 것인가?
첫째, 약속을 믿으면 부끄러운 과거를 만회케 하신다.
(삼하 8:1) 『(1) 이 후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쳐서 항복 받고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메덱암마를 빼앗으니라』
‘메덱 암마’는 블레셋의 수도였던 가드와 그에 종속되었던 네 성읍, 곧 가사, 아스돗, 아스글론, 에그론을 통칭하는 표현이다. 대상 18:1에서는 그래서 메덱 암마를 ‘가드와 그 동네’라고 기록했다. 이 기록으로 보아 다윗은 블레셋을 완전히 정복했다. 비유하자면 과거에는 블레셋을 다운시켰는데 이제는 블레셋을 아예 K.O시켜 버린 것이다. 그 결과 블레셋이 점유하던 전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이런 승리가 값진 이유는 다윗이 블레셋 가드에서 경험한 뼈아픈 과거 때문이다.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해 도망자 생활할 때 그는 블레셋의 도시 가드 땅에서 아기스 왕을 만나게 된다. 그때 침을 흘리며 미친 척하면서 위기 상황을 넘겼던 치욕의 과거가 있었다. 그런데 다윗은 그 가드에 항복을 받아냈다. 쉽지 않은 결과이다. 왜냐하면 사람에게 과거의 상처는 현재 극복 못하는 핸디캡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윗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나갔을 때 그 치욕의 역사를 만회한 것이다.
이처럼 다윗이 블레셋의 도시들을 정복할 수 있었던 근원적 힘은 바로 그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붙들었기 때문이다.
(삼하 7:27-28) 『(27)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의 종에게 알게 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집을 세우리라 하신고로 주의 종이 이 기도로 구할 마음이 생겼나이다 (28) 주 여호와여 오직 주는 하나님이시며 말씀이 참되시니이다 주께서 이 좋은 것으로 종에게 허락하셨사오니』
이 약속의 말씀이 주어진 직후 다윗은 블레셋 사람들을 쳤다. 그래서 8장 1절에 ‘그 후에’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곧 다윗이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나가니까 블레셋의 도시들이 줄줄이 정복하게 되었고 그 결과 가드 땅에서의 부끄러운 과거를 씻어버리게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 신앙의 길을 가고 있는가? 성도님들 삶 속에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영적인 전쟁을 수행한 결과 나의 ‘메덱 암마’를 정복케 하시고 부끄러운 과거를 씻는 은혜를 주신다. 이런 복이 저와 성도들의 것이 되시기를 바란다.
둘째,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승리의 열매를 주신다.
(삼하 8:4) 『(4) 그 마병 일천칠백과 보병 이만을 사로잡고 병거 일백 승의 말만 남기고 그 외의 병거의 말은 다 발의 힘줄을 끊었더니』
다윗은 소바 왕 하닷에셀에게서 탈취한 말 가운데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발의 힘줄을 끊었다. 똑같은 사건을 기록한 다른 성경을 보자. 역대상 18:3-4을 보면 그때 노획한 병거와 군사와 말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기록하고 있다.
(대상 18:3-4) 『(3) 소바 왕 하닷에셀이 유브라데 강 가에서 자기 권세를 펴고자 하매 다윗이 저를 쳐서 하막까지 이르고 (4) 그 병거 일천 승과 기병 칠천과 보병 이만을 빼앗고 그 병거 일백 승의 말만 남기고 그 외의 병거의 말은 다 발의 힘줄을 끊었더니』
다윗은 병거 일천 승, 기병 칠천, 보병 이만을 빼앗았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발견된다. 다윗은 빼앗은 병거 일천 승 가운데 일백 승의 말, 즉 10%만 남기고는 다 발의 힘줄을 끊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었는가? 왜냐하면 모세오경 가운데 한 권인 신명기에 이러한 말씀을 주셨기 때문이다.
(신 17:16) 『왕 된 자는 말을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말을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말 것이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후에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이라 하셨음이며』
모세의 율법에 이스라엘의 왕이 된 자는 말을 많이 두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었다. 말을 많이 두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해야지 자기 육신의 능력을 신뢰하지 말라는 뜻이다. 다윗은 신명기의 이 말씀을 기억하고 그대로 실천하고자 말 발목의 힘줄을 끊었던 것이다. 이런 다윗의 행동은 과거 사울왕의 행동과 비교하면 그가 얼마나 말씀에 순종하고 있는지 뚜렷해진다. 사울 왕은 어떠했는가?
(삼상 15:18-19) 『[18] 또 왕을 길로 보내시며 이르시기를 가서 죄인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되 다 없어지기까지 치라 하셨거늘 [19]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의 악하게 여기시는 것을 행하였나이까』
이처럼 사울왕의 마음은 탈취하는 일에 모아져 있고 말씀을 순종하는 일은 안중에도 없었다. 반면 다윗은 말의 발목 힘줄을 끊는 행위로 순종의 모습을 보였기에 하나님은 ‘다윗 언약’에 충실하셨던 것이다.
구약 성경에서 다윗만큼 형통한 다른 한 사람이 있다. 여호수아 선지자이다. 그런데 형통만 같은 것이 아니라 형통의 이유도 똑같다. 그가 항상 승리한 비결이 어디에 있었는가?
(수 1: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수 11:15) 『여호와께서 그 종 모세에게 명하신 것을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명하였고 여호수아는 그대로 행하여 여호와께서 무릇 모세에게 명하신 것을 하나도 행치 아니한 것이 없었더라』
여호수아 역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의 명령을 받았고 그 명령대로 모든 것을 행했을 때 항상 승리하고 이길 수 있었다. 이런 사실에서 우리는 말씀에 대한 순종 여부가 항상 승리의 열매와 직결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2007년 3월 18일 서울국제마라톤 남자부 42.195㎞ 레이스에서 막판 1500여m를 남기고 대역전극을 펼치며 1위로 골인한 마라토너가 있다. 바로 이봉주 선수이다. 생애 35번째 풀코스를 완주이고 한국 역대 4위 기록이었다. 그런데 더 의미가 깊은 것은 그가 최근 3년간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해 ‘한물갔다’는 평가를 받던 터였고 38세의 나이는 마라톤 선수로는 환갑에 해당하던 때였다. 그런데 화려한 부활을 알리는 우승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이봉주 선수가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은 코치의 엄격한 지도를 순종했기 때문이다. 코치는 선수에게 시합이 가까워 오면 탄수화물을 피하고 고기만 먹인다. 한동안 고기만 먹이다가 시합 3,4일 전에 탄수화물을 같이 섭취시킨다. 그러면 몸에 축적되는 탄수화물의 양이 많아져서 레이스의 막판 스퍼트까지 끄떡 없이 달리게 된다고 한다. 이봉주 선수는 그 식사가 훈련보다 더 고통스럽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그런 고통을 인내하고 코치의 지도를 따랐기 때문에 우승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운동 선수가 코치의 엄격한 지도를 따라야 승리가 보장되듯이 신앙인은 인생의 코치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때 영적인 승리가 보장된다. 사울 왕처럼 세상의 것들을 취하려는 욕망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려는데 마음을 모으시는 성도가 되자. 거기에 축복의 열쇠가 있다.
(요일 5: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셋째, 감사하는 자에게 더 큰 은혜를 주신다.
(삼하 8:11-12) 『(11) 다윗 왕이 그것도 여호와께 드리되 저가 정복한 모든 나라에서 얻은 은금 (12) 곧 아람과 모압과 암몬 자손과 블레셋 사람과 아말렉에게서 얻은 것들과 소바 왕 르홉의 아들 하닷에셀에게서 노략한 것과 같이 드리니라』
다윗은 정복한 나라로부터 조공을 받았다. 그것은 금 은 놋과 같은 귀금속들이었다. 다윗은 그것을 자기 사욕을 채우고자 받았는가? 그렇지 않다. 사울 왕은 전쟁에서 승리하면 탈취물로 자기의 기념비를 세우고 자랑거리로 삼는데 활용했다. 그러나 다윗은 달랐다. 그 물질을 여호와께 봉헌했다. 그래서 이렇게 드려진 금과 은과 놋이 나중에 그의 아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는데 재원으로 소용되었던 것이다.
(대상 22:14-16) 『[14]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의 전을 위하여 금 십만 달란트와 은 일백만 달란트와 놋과 철을 그 중수를 셀 수 없을만큼 심히 많이 예비하였고 또 재목과 돌을 예비하였으나 너는 더할 것이며 [15] 또 공장이 네게 많이 있나니 곧 석수와 목수와 온갖 일에 익숙한 모든 사람이니라 [16] 금과 은과 놋과 철이 무수하니 너는 일어나 일하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실지로다』
다윗은 이처럼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을 하나님께 봉헌했다. 그는 자기의 승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봉헌은 바로 그러한 믿음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윗의 그런 믿음에 대해 큰 복으로 다윗에게 내려주셨다. 곧 그 복의 후광이 아들 솔로몬에게까지 계승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성도가 하나님께 헌신의 삶을 살았을 때 하나님이 주시는 흔들리지 않는 복이 있다. 바로 부모의 신앙이 자녀들에게 유산으로 물려지는 것이다. 이 땅에서 이보다 값진 유산은 없다. 부디 이러한 복이 저와 성도들의 것이 되시기를 바란다.
다윗 왕처럼 세상과의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시는 성도들이 되길 바란다. 언약을 믿고 나가서 과거의 부끄러움을 씻으시고, 말씀에 순종해서 승리의 열매를 수확하고, 감사함으로 복이 계승되게 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나라, 사랑과 공의의 원리가 지배하는 나라가 되는 기적의 목격자가 되시는 저와 성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한다.
1.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할렐루야~ 저는 청주교회에 다니고 있는 장승환 형제입니다.
2. 청주 참예수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신 계기는?
저는 모태 신앙으로 동부교회에서 23살까지 신앙생활을 하다가 직장 때문에 충남 공주로 오게 되었습니다. 공주에 있을 때는 천안 교회를 다니다가 공군 입대를 하게 되었고, 18년도 5월 군대를 전역한 후, 세종 소방서에서 근무를 하게 되면서 가까운 곳에 있는 교회에서 신앙 생활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침 변상헌 형제님 가정이 세종에 거주 하시는데, 청주교회로 예배를 드리러 같이 한 번 가보자고 하셨습니다. 그때부터 청주교회에서 신앙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3. 이번에 새롭게 교사로 섬기게 되셨는데 각오 한 말씀?
많이 부족하지만, 열심히 노력해서 아동부, 학생반 친구들의 신앙 성장에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교사가 되겠습니다.
4. 요즘 기도 제목은?
어떠한 순간에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앙인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5. 다른 사람에게 참예수교회를 소개한다면?
오직 하나님 말씀, 성경의 가르침을 기준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교회입니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사 6:8)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았고, 여러 사역의 자리로 세움을 입습니다. 그러나 그 사역의 자리에 서기까지 쉬운 과정이 아님을 알기에 선뜻 나서기가 어렵습니다.
그 어려운 길을 감사함과 기쁨으로 걸어가시는 신영길 전도자님의 환송예배가 있었습니다. 눈물과 웃음과 축복의 박수가 함께 했던 그날을 소개합니다.
2008년, 한 영혼이 청주교회에 찾아왔었습니다. 그 분은 종교에 관심이 많으시고 그 모습이 매우 순수했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세례를 결심하고 받으시던 날, 펑펑 눈물을 흘리시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성령을 받으시던 날도 우리는 함께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이 신앙생활을 하시는 모습을 볼 때마다 신앙의 깊이와 믿음의 깊이는 신앙생활의 기간과 상관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을 더욱 알아가고 싶은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지 신앙생활 속의 행복과 즐거움은 어떻게 누려야 하는지 신영길 전도자님을 통해 배웠고 느꼈습니다.
그런 신영길 전도자님이 신학의 길을 걸어가신다고 하셨을 때 청주교회는 정말 크게 기뻐했습니다. 아마 하나님께서는 더 크게 기뻐하셨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5500여 일의 시간. 긴 시간이었지만 짧다고 느껴지게 만드는 ‘이별’. 이제 곁에서 함께 있을 수 없지만, 저희는 슬픔보다는 기쁨이 더 큽니다. 신영길 전도자님이 걸어가시는 길이 어떤 길인지 알기에, 몸으로는 떨어져 있게 되지만, 우리는 주님 안에서 한 가족이고 영으로 하나라는 것을 알기에 오늘 청주교회는 기쁜 마음으로 신영길 전도자님과 아름다운 이별을 했습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입니다. 그리고 함께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동역자입니다. 신영길 전도자님 혼자 걸어가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그 길을 함께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역자에게 가장 큰 힘이 되는 것은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이 글을 읽는 많은 성도님들께서도 신영길 전도자님의 걸어가시는 길에 기도로 함께 동행해 주시길 소망합니다. 아멘.
2024년 1월 21일~26일까지 주님의 보호하심으로 대만 방문단은 5박 6일간 신앙여행 행사를 가졌습니다. 금번 방문단은 청주 25명, 천안 5명, 강남 1명, 제주 2명, 통역 1명 총 34명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여행 일정은 송산 공항으로 입국하여 대만 북부 지역의 교회로부터 고흥 공항으로 출국하여 대만의 남부 지역의 교회를 두루 종주하는 코스였습니다. 비록 우리와 대만 성도들은 서로 사용하는 언어가 달랐지만 깊은 우애와 사랑의 교제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 교제를 통해 한 영을 받은 형제, 자매의 관계가 어떠한지를 체험하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귀한 기회를 허락하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2024년 대만 방문 기간 중 낙야 교회에 방문했을 때의 일. 지난 2017년에 수원교회 성도님들과 방문했었는데 그 때도 건축을 위해서 대지를 마련하고 모금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전히 건물이 세워지지는 않았고 모금 중에 있었다. 속으로 ‘7백 평 넘는 땅에 건축이란 시골교회의 능력으로 버거운 일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담임 목자인 백목자가 연합 교류 집회를 가질 때 교회 소개 시간 중 조감도 영상을 보여주며 말했다 “낙야교회는 교회를 건축하려고 합니다. 방문단 여러분도 헌금하세요. 한국 돈도 받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간접적으로 조심스럽게 헌금을 권고하는 것이 아니라 직설적이고 노골적인 헌금 요청에 폭소를 터뜨렸다. 이윽고 청주교회를 소개하는 차례가 되었다. “청주교회는 회당 수용이 93석입니다. 그런데 지난 주에는 108명이 출석했습니다. 회당이 비좁습니다. 그래서 새롭게 건축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모금해야 합니다. 대만 돈도 받습니다.” 우리는 다시 폭소를 터뜨렸다. 전혀 모르는 남이 헌금하라는 말을 하면 매우 무례하고 상식적이지 않다고 여겼을 텐데 주 안에서 한 몸, 한 형제 자매라는 의식 때문에 오히려 박장대소가 나왔다. 우리가 주 안에서 한 성령을 받은 가족이라는 의식이 발견되는 순간이었다.
인간관계에서 말하고 듣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 말 잘해서 생명을 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말 잘못해서 생명이 위경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 그런가 하면 들어야 할 말을 오해하는 경우도 있고 듣지 않아야 하는 말을 들어서 마음에 상처를 남기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말하는 사람의 의도대로 잘 듣는 것이 중요하고 또 잘 말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런데 이것이 쉽지 않다. 왜냐하면 듣고 말하는 일은 마음 속에 인격이 결부된 일이기 때문이다. 인격이란 것이 하루 아침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듣는 능력이나 말하는 능력이 한 순간에 변화하지 못한다. 오랜 세월동안 신앙 안에서 성숙한 인격은 남의 말을 듣되 오해하지 않고 듣고 상대의 선의대로 듣는다. 반면 인격이 성숙하지 못하면 좋은 뜻으로 한 말도 악의적으로 받아들인다. 성숙한 인격은 말을 건네되 상대가 오해하지 않도록 배려하는 화법을 구사한다. 반면 성숙하지 않은 인격은 거칠게 말해서 좋은 말도 오해하게 만들고 부정적 감정을 가지게 말한다. 그래서 잘 듣고 잘 말하기 위해서 신앙의 좋은 인격을 닦는 일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들으며 살고 있는가? 성경의 가르침대로 잘 듣고 잘 말해서 우리 속사람이 갖춘 인격을 나타내고 있는가? 오늘은 다윗과 관련된 한 기사 속에 등장하는 세 인물을 통해 함께 생각하고 은혜를 나누는 시간을 가지고자 한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다윗이 동굴에서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기회에도 그의 겉 옷자락만 베고 살려준 기사를 살펴보았다. 사울왕은 눈물을 흘리며 다윗의 의로움을 인정하고 자신의 잘못을 시인했다. 그러나 사실 완전히 회개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다윗이 사울 왕과 함께 왕궁으로 돌아가지는 않았고 계속 방랑하는 생활을 계속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울왕이 완전히 변화한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사울과 헤어지고 다시 길을 떠난 다윗 일행은 어느 날 갈멜이란 곳에 머물게 되었다. 갈멜은 아시다시피 열왕국 시대에 이르러 엘리야 선지자가 우상의 선지자들과 상대하게 될 바로 그 장소였다. 그런데 그곳에 나발이라는 이름의 목축인이 있었다. 그는 수천마리의 양과 염소를 치는 부자였다. 그 시대는 치안이 미흡한 지라 대규모 목축업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 어려움이란 도적들이 나타나 가축들을 약탈하고 심지어 목동들까지 죽이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런 가운데 다윗과 그의 수하에 육백 명이 나발의 양떼 곁에 머물러 주는 것은 그의 재산을 보호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당시 목축업에 종사하는 자들에게는 양털을 깎는 시기는 농부에게 추수하는 시기와 같았다. 그래서 이 시기에 목자는 이웃과 함께 음식을 나누며 수확의 기쁨을 누렸다. 바로 양털 깍는 그 잔치의 시기에 일이다. 다윗은 나발에게 소년들을 보내어 축복하면서 잔치의 음식을 좀 나누어 줄 것을 요청한다. 그런데 나발은 이를 거절하고 오히려 다윗을 향한 심한 모욕과 경멸의 말을 전한다. 이에 다윗은 분노하게 되고 4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나발과 그 가족들을 몰살시키고자 출정한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나발의 아내 ‘아비가엘’이란 여인이 다윗의 소년들에게 음식을 건네고 다윗 앞에 엎드려 자비를 구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의 지혜로운 말로 다윗은 칼을 거두고 되돌아갔다는 이야기이다.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세 인물을 주목해 볼 수 있다. 바로 나발과 아비가일과 다윗이다. 이 세 인물의 말하고 듣고 칼을 거두는 모습을 통해 우리는 소중한 신앙의 교훈을 받게 된다. 그러면 그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인가?
첫째, 나발과 같은 우매한 말을 삼가라.
(삼상 25:6) 『이같이 그 부하게 사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평강하라 네 집도 평강하라 네 소유의 모든 것도 평강하라』
다윗은 소년 열 명을 나발에게 보내면서 잔치의 음식을 좀 나누어 줄 것을 요구했는데 이것은 이스라엘 풍습으로나, 율법의 가르침으로나 매우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풍습이었다. 6절에서처럼 다윗은 ‘너는 네 집도 네 소유의 모든 것도 평강하라.’는 축복의 말을 건넨다. 다윗이 매우 정중하고 예의를 갖추어 요청했음을 알 수 있다. 또 8절에 ‘네 아들 다윗에게 주기를 원하노라’고 했다. 다윗이 나발에게 아들 뻘이란 뜻이 아니라 그만큼 자기를 낮춰 예의를 갖춘 표현이다. 이렇듯 정중한 인사와 겸손한 태도로 자선과 호의를 구했건만 나발의 태도는 어떠했는가?
(삼상 25:10-11) 『[10] 나발이 다윗의 사환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뇨 근일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11] 내가 어찌 내 떡과 물과 내 양털 깎는 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가져 어디로서인지 알지도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 한지라』
율법에는 나그네를 대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기록되어 있다. 이를 생각한다면 다윗의 요청을 들어주는 것이 마땅했다. 더욱이 곁에서 경비원처럼 양떼를 지켜준 노고를 생각한다면 감사한 마음으로 들어주는 것이 마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발은 다윗에게 면박을 주는 말과 더불어 음식을 건네주기를 거절한다. 오해하지 않아야 할 것은 다윗이 무슨 조직 폭력의 보스같이 위협하고 강압으로 요구한 것이 아니다. 정부가 대기업을 압박하면서 정치헌금 강요하듯이 요구한 것이 아니다. 지극히 상식적인 호의를 요구했던 것이다. 그런데 나발의 이러한 발언은 웃는 낮에 침뱉는 행동이었던 것이다.
나발은 ‘다윗이 누구냐?’라고 말했지만 사실 다윗을 모를 리 없었다. 골리앗을 물리친 용사로 이방인들에게까지 명성이 높았고 왕의 사위가 된 자요, 사울 밑에서 천부장직을 수행한 인물이니 잘 아는 인물이다. 다윗이 분개한 이유는 음식을 주지 않아서가 아니다. 나발이 ‘주인에게 반역하는 못된 종’이라고 모욕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나발은 정치적으로 사울을 추종하는 사람 중에 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옳고 그름을 떠나 사울의 편에서 다윗을 경멸했던 것이다. 그러나 진실을 말하자면 사울을 반역해서 떠난 것이 아니라 사울이 자신을 무고하게 죽이려고 하니까 생존을 위해서 왕의 곁을 떠난 것이었다. 사실 나발은 사실을 왜곡하는 거짓의 입술을 놀렸던 것이다. 사람은 언제 가장 분노하는지 아는가? 자기의 진실이 거짓으로 오해받을 때가 가장 분노하는 순간 중 하나이다. 결국 나발의 이 망언은 다윗의 노를 격동시켰고 목숨이 위태롭게 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잠 12:18) 『혹은 칼로 찌름 같이 함부로 말하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 같으니라』
오늘날 교회에서 일어나는 불미스러운 일의 대부분은 잘못된 언변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눅 6:45)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고 했다. ‘말’이라는 단어는 ‘마음의 알갱이’라는 뜻이다. 즉 말은 마음에 쌓인 것을 밖으로 드러나는 도구라는 것이다. 마음에 좋은 감정, 좋은 생각, 좋은 뜻을 채우면 좋은 말이 나오고, 나쁜 감정, 나쁜 생각, 나쁜 뜻이 채워지면 나쁜 말이 나온다. 성숙한 인격이란 바로 이것을 잘 통제해서 때로는 삼가고 때로는 말하는 것을 잘 분별하는 사람이다.
부디 나발과 같은 우매한 입술에서 벗어나는 성도님들이 되자.
(잠 13:3) 『입을 지키는 자는 그 생명을 보전하나 입술을 크게 벌리는 자에게는 멸망이 오느니라』
둘째, 아비가일과 같은 지혜로운 입술의 사람이 되라.
다윗은 나발의 모욕에 참지 못하고 그와 그 일가를 죽이겠다고 칼을 빼어들었다. 그런데 이렇게 격노한 다윗의 마음을 누그러뜨린 한 여인이 있었는데 바로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이었다. 이 여인의 언행은 도대체 어떠했기에 다윗의 분노를 잠재울 수 있었는가?그녀는 상황의 심각성을 감지하고 급하게 종들을 시켜 양식을 준비하게 했다. 그리고 모욕을 말을 건네받은 열 명의 소년들에게 양식을 건네 주었다. 그리고 그 후에 이어진 그녀의 일변은 무엇이었는가?(삼상 25:28-31) 에 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아비가일이 이야기한 내용의 핵심은 이것이다. “다윗 당신은 지금껏 악을 행한 적이 없습니다. 당신의 생명은 하나님이 생명 싸개에 싸서 보호하십니다. 당신은 장차 이스라엘의 임금이 될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선한 싸움을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오늘 무죄한 피를 흘리면 장래에 왕이 되었을 경우 괴로워하고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라는 뜻이다. 아비가일의 말을 통해 발견되는 그녀의 지혜는 이런 것이다. 그녀는 목숨이 경각에 달린 현재의 상황을 잘 알았다. 또 다윗의 의로움, 정직함에 대한 분별력이 있었다. 또 하나님이 그의 생명을 섬세히 보호하고 계신다는 영적인 혜안도 있었다. 게다가 다윗의 미래를 예측하는 안목도 있었다. 그리고 만약 다윗이 칼로 살육하는 실수를 저지르면 그 일이 미래에 어떤 악영향을 가져올지에 대해서 내다볼 줄 알았다. 아비가일은 이런 모든 미래사를 꿰뚫어 보고 다윗에게 그것들을 말했던 것이다.
(잠 25:11)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니라』
우리는 인간관계 속에서 때로 대화의 핵심을 벗어나서 헤매는 경우가 있다. 상대의 문제점과 본질을 헤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니 상대의 마음을 알 수 없고 기울여도 깨닫는 지혜가 없으니 상황 전달이 안된다. 그래서 대화는 겉돌고 핵심을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면 오해하게 되고 마음을 터놓을 수 없게 된다. 대화에는 이해하려는 마음, 배려하는 마음이 기초가 되어야 한다. 만약 그것이 없으면 감정에 이끌려 말하게 되고 무례하게 말하게 되고 상대에게 상처를 주게 된다. 아비가일을 보라. 다윗의 마음을 정확하게 헤아리고 상황도 종합적으로 파악하고 미래사도 읽어낼 줄 아니까 그런 지혜로운 말이 나오고 그 말로 인해 치켜올린 다윗의 칼이 점점 내려졌다. 아비가일의 지혜로운 혀가 다윗의 뻣뻣한 감정을 꺾었던 것이다.
(잠 25:15) 『오래 참으면 관원이 그 말을 용납하나니 부드러운 혀는 뼈를 꺾느니라』
오늘날 우리도 사랑과 배려가 녹아있는 말 한마디가 사람의 생명까지 살릴 수 있음을 알아야겠다. 그래서 생각하고 말하고, 배려해서 말하고, 부드럽게 말하고, 진실을 말하는 것을 연습하시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란다.
셋째, 다윗과 같은 열린 귀를 가진 사람이 되라.
다윗이 나발에 대해 분개한 모습은 사울을 대할 때와는 대조적이다. 다윗은 사울 왕에게 직접 보복하지 않았다. 하나님께 심판을 맡겼다. 그런데 오늘은 나발의 모욕을 참지 못하고 자제력을 잃었다. 그래서 즉시 칼을 차고 벌떡 일어선다. 만약 다윗이 사울 왕과의 관계에서 잘 인내해 왔는데 나발이라는 인물을 죽인다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 수 있는 순간이다. 다윗을 보건대 인간은 이처럼 연약한 존재이다. 만약 다윗이 분노의 감정에만 사로잡혀서 아비가일의 말에 “하찮은 일개 여인이 누구 앞에서 감히 입을 놀리느냐?”고 듣기를 거절했다면 나발과 그 일가는 몰살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에게는 타인의 말을 들을 줄 아는 귀가 있었다.
다윗은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있음을 알았다. 그런데 아비가일이 그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 싸움이 의로움의 기초가 아니라 죄악의 기초 위에 세워지면 그 나라가 길지 못함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아비가일이 그것을 말한다. 다윗은 칼과 피로 세워지지 않고 하나님의 공의와 뜻으로 나라를 세워야할 사명이 있었다. 그래서 온 백성이 고개를 끄덕이고 기뻐하고 환영하는 가운데 등극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런데 아비가일이 그것을 말한다. 우리는 여기서 아비가일의 지혜로운 발언에 호응하고 받아들일 줄 아는 다윗의 인격을 발견한다. 아무리 분노의 감정이 일어나도 이치에 맞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분노를 누그러 뜨리고 자기 마음을 다스릴 줄 알았다. 마음을 추스린 다윗이 이렇게 말한다.
(삼상 25:32-33) 『[32] 다윗이 아비가일에게 이르되 오늘날 너를 보내어 나를 영접케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33] 또 네 지혜를 칭찬할지며 또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오늘날 내가 피를 흘릴 것과 친히 보수하는 것을 네가 막았느니라』
다윗은 이 여인을 통해 위기를 모면하게 해준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했다. 이렇게 잘 말하는 지혜로운 여인 아비가일도 있었지만 그 말에 담긴 진실과 혜안을 분별하는 다윗의 귀가 있었기에 그는 분노의 감정으로 일가를 몰살시키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게 된다.
(잠 29:11) 『어리석은 자는 그 노를 다 드러내어도 지혜로운 자는 그 노를 억제하느니라』
강경화 장관 이야기. 문재인 대통령 시절에 외교부 장관을 역임한 퍼스트 레이디. 김대중 대통령 집권기에도 3년 간 그분의 곁에서 보좌한 경력도 있었다. 그녀는 코비드 19 팬데믹 상황에서 한국의 방역체계를 외국에 홍보해서 국위선양하는데 매우 큰 역할을 했다. 앵커들의 까다로운 질문에도 투명하고 정직하고 정확한 발언으로 한국의 위상을 높인 바로 유명하다. 독일의 앵커가 ‘한국은 봉쇄령으로 인해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아니냐?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것이 아니냐?는 집요하고 까다로운 질문도 모두 잘 설명했다. 인텨뷰 내용에는 구구절절히 그녀의 겸손함이 한국 사람의 겸손함을 대변했다. 그래서 그분의 활약으로 한국의 명예가 매우 드높아지는 계기가 되었다. 현재 국제 사회에서 한국의 높은 위상은 단지 한류의 가수나 탤런트 때문 뿐만 아니라 이런 외교부 장관의 노고와 활약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다른 성도와의 관계에서 혹은 이 세상의 불신자와의 인간관계에서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들으며 살고 있는가? 나발과 같이 우매한 말로 문제를 일으키고 상처를 주는 것이 아니라 아비가일과 같이 지혜의 말로 죄의 싹은 잘라내고 의의 열매가 맺히게 만드는 길을 가시기 바란다. 다윗처럼 타인의 입술을 통해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자가 되자. 이런 아름다운 인격, 이런 향기로운 입술을 가지는 참교회의 성도들이 다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