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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족례에는 사랑,성결, 겸손, 봉사, 용서의 교훈이 있습니다.

    세족례에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치시려는 교훈이 들어있습니다. 오늘날 나는 그 교훈을 발견하고 세족례를 받을 때마다 마음 속으로 그 뜻을 깊이 새기고 이웃들에게 주님을 닮은 모습을 나타내고 있습니까? 그러면 구체적으로 세족례를 통해 실천해야 하는 주님을 닮은 신앙의 모습이란 어떤 것일까요?

     

    첫째, 예수님이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성도를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세족례를 행하실 무렵 제자들은 예수님이 가시는 길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 십자가에서 피흘리시는 섬김의 왕이 되시고자 하셨지만 제자들은 주님이 로마 제국의 지배로부터 유대 민족을 독립시켜줄 정치적인 임금으로 즉위할 것으로 오해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의 관심은 어떻게 주님의 십자가를 따를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주님 곁에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이냐에 모아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시고 매우 가슴이 아프셨을 것입니다. 그동안 주님을 따라다니며 배웠지만 예수님의 정신과 모범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또 주님이 세 번이나 십자가 수난에 대해서 예언했건만 그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제자들 가운데 세배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의 경우 주의 나라가 임할 때 주의 좌편과 우편에 앉게 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이들의 요청에 대해 분노를 발했습니다. 분노를 느낀다는 것은 그들도 똑같은 관심사를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제자들은 서로 반목하고 하나가 되지 못하는 가운데 있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이는 어리석고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요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둘째, 생활 속에서 자신의 성결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사람은 땅에 발을 디디고 생활하므로 신체 가운데 가장 쉽게 오염될 수 있는 부분이 바로 발입니다. 그래서 매일 씻고 관리하지 않으면 위생적으로 문제가 발생하고 질병에 걸릴 수 있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났다고 해서 성도가 완전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삶 속에서 세속의 여러 가지 부정하고 불결한 것들에 유혹받을 수 있고 부정한 생각을 하고 불결한 행동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근원적으로 범죄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자신을 영적으로 깨끗하게 관리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매일 자신의 발을 닦고 관리하듯이 성도는 매일 자신의 행위를 돌아보고 반성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혹시 자신의 잘못된 행실을 깨닫거나 범죄한 사실이 있다면 주님께 자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렇게 지속적으로 성결을 추구하는 삶을 살았을 때 우리의 영혼은 점점 하나님을 닮은 아름다운 형상의 성도로 점점 변화하게 됩니다. 이처럼 세족례는 이미 물세례는 받았으나 불완전한 성도가 어떻게 성결을 이루는 삶을 살아야하는지에 대한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약 4:8)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셋째, 겸손하게 낮아져서 봉사의 삶을 실천해야 합니다.

    유대 사회에서 외출했던 어떤 사람이 귀가하면 그 발을 닦아주는 일은 그 가정의 종 가운데 가장 비천한 종이 담당하는 몫이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만찬을 가지실 무렵 ‘누가 높으냐’하는 문제로 서로 반목하는 분위기 속에 있던 제자들은 결코 동료들의 발을 씻겨주는 섬김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먼저 대야에 물을 가져다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주’와 ‘선생’이신 예수님이 자신들의 발을 씻기려고 하실 때 제자들은 얼마나 송구스러운 마음이 들었겠습니까? 예수님의 이런 행위가 반목하는 분위기의 제자들에게 어떤 충격을 주었을지 가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신분이 높은 자가 낮은 자의 섬김을 받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천국에서 높아지고자 하는 자는 먼저 자신을 낮추고 남을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교훈의 가르침대로 그분 자신이 세족례를 통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입니다. 이처럼 세족례 안에는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내가 남보다 낮아져 겸손히 봉사해야 한다는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빌 2: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막 10: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마 20: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벧전 4: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넷째, 용납하고 용서하는 마음을 실천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발을 씻기신 열 두 제자들 가운데 가룟 유다가 있습니다. 이 제자는 스승이신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아넘긴 패륜의 인물입니다. 예수님은 그가 스승을 팔려는 악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마음을 품은 유다를 돌이키시려고 간접적으로 수차례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바로 스승을 팔려는 악한 생각을 품었던 가룟 유다를 겨냥한 말씀입니다. 또 만찬 자리에서 다시 한 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도 역시 가룟 유다를 겨냥한 지적입니다. 가룟 유다는 ‘어떻게 내 마음을 아고 계셨지? 아! 내가 죄를 지었구나! 스승님께 용서를 구하자’라고 깨닫고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또 예수님은 최후로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가룟 유다에게 직접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겨냥하여 수차례 돌이키도록 수차례 말씀하시고 지적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내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이 그런 제자의 발을 씻기셨다는 사실을 주목하게 됩니다. 평소 예수님은 원수까지도 용납하고 용서하라는 교훈의 말씀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가르침대로 유다의 발을 씻기시는 행동을 통해서 원수의 죄를 용서하시는 모습을 나타내셨습니다. 이처럼 성도는 세족례를 통해서 그 안에 담긴 주님의 용서와 관용의 정신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성도와의 관계 속에 그것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도는 모두 불완전하기 때문에 때로 성도들 사이에 갈등과 분열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서로 대화하고 이해하면서 해소될 수 있으면 가장 좋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경우 세족례를 통해 주님의 정신을 되새기며 서로 화해와 용서를 도모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골 3:13)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살전 5:13) 저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 성경은 신도생활의 기준입니다.

    어떤 국가든지 그 나라 국민이라면 반드시 준수해야하는 국법이 있는 것처럼 천국의 시민인 성도도 반드시 준수해야 하는 천국의 법이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법 가운데 가장 상위의 법이 헌법이듯이 천국의 법에서 가장 근본적인 핵심의 법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루어주신 구원의 과정 즉,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하늘로 승천하시고, 성령을 내려주셔서 교회를 세우시고, 교회를 통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신 모든 과정에 대해서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란 주님이 우리에게 그와 같은 모든 구원의 과정을 마련해 주셨으니 그 사랑과 은혜를 입은 하늘나라 백성으로서 마땅히 나타낼 성결하고 의로운 삶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그 성결하고 의로운 삶도 우리 자신의 능력과 의지로 이루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안에 부어주신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여 말씀을 순종하는 실천의 의지가 발휘될 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령의 능력을 의지해서 나타낸 의로운 삶을 ‘성령의 열매’라고 부릅니다.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과 및 관절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선 검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속에 추악한 죄악을 제거하며 하나님 앞에서 거룩해지도록 인도합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신체를 그대로 비춰주는 거울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게 도와주고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아 고칠 수 있게 인도합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우리 자신의 영혼을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에 의한 변화의 과정이 없다면 우리는 성숙한 신앙인으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성숙한 신앙인으로 성장할 수 없으면 이웃 사랑의 계명도 실천할 수 없습니다. 마치 미성숙한 어린 아이는 자기보다 어린 동생을 배려하고 돌보아주지 못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처럼 말씀을 통해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한 어린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성도를 배려하고 돌보아주기는커녕 오히려 상처를 주고 아프게 할 수 있습니다(참고. 고전 1:10-13 3:1-4). 따라서 성도는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 뜻을 깨닫고 성령으로 기도하여 영혼의 성장과 성숙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런 노력이 지속될 때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닮은 인격의 사람으로 점점 변화하게 되고 이웃 사랑의 계명을 실천할 수 있게 됩니다.

     

    (딤후 3: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1: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성경은 말씀을 가까이하는 것이 복의 근원이라고 말합니다. 성도는 말씀을 열심히 읽고 묵상하고 실천할 때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을 읽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약 52시간 20분, 신약성경은 7시간 40분으로 육십 육권을 모두 읽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약 60시간 정도라고 합니다. 성경 전권을 단기간에 통독하는 일도 유익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적은 분량이라도 매일 일정한 분량을 정하고 정기적으로 읽고 묵상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말씀을 암송하여 마음판에 새기려고 노력하는 것도 좋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암송하면 더 깊은 감동과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3:3) 인자와 진리로 네게서 떠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 성경은 진리를 증명하는 유일한 근거입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책들이 있습니다. 모두 사람들에게 특정한 유익을 주기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사람이 죽은 이후 영생으로 들어가게 할 목적으로 기록된 책은 성경 뿐입니다. 모든 책들 가운데 독특하고도 유일한 목적입니다. 이 성경의 기록 목적은 성경의 주제와 맞닿아 있습니다. 성경의 목적대로 그 주제도 하나님이 인간에게 어떻게 영생을 주시고 어떤 과정을 통해 천국으로 인도하시는지 그 계획과 성취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모아져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과 사건들은 모두 장래에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이 행하실 일들의 예표(예언 등을 미리 보여주는 조짐)입니다. 예를 들면 모세가 애굽 바로 왕의 노예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홍해를 건넌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악 세상의 노예가 된 인간들을 세례를 통해 거듭나게 하시고 구원하시는 일을 예표합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 정복 전쟁을 수행한 여호수아는 신약 시대의 성도들을 이끌고 천국을 침노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인물들과 그분이 장차 하실 일에 대해서 예표하는 사건들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심지어 구약의 모든 내용이 곧 자신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씀하실 정도였습니다.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개신교에서는 천주교와는 달리 오로지 구약 삽십 구권과 신약 이십칠 권만 정경으로 인정하며 그 외의 외경(성경외의 경전)이나 위경(올바른 신앙에서 벗어난 거짓 경전)과 같은 것들은 정경(바른 경전)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외경과 위경에는 본래의 신앙 정신에서 변질되거나 동방 신비 종교의 영향을 받은 이단적인 내용들이 녹아있기 때문입니다. 바른 기독교 신앙을 추구한다면 66권의 경권만 정경(正經)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떤 것은 성경에 포함되고 어떤 것은 제외하는 문제는 이미 기독교 역사 속에서 순수한 신앙의 정기를 소유했던 초대교회에서 판단하고 구별하여 정리되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동일한 신앙의 길을 가는 우리는 육십 육권의 성경만 정경으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8:20)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

     

    (고후 2:17)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고후 4:2)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궤휼 가운데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

  • 성경은 모두 하나님의 감동로 된 것입니다.

    성경은 약 1,500년의 기간 동안 약 40여명의 인간 저자를 통해 기록되었습니다. 그 저자들의 출신, 학문의 정도, 직업, 살았던 시대, 개성 등이 매우 다양합니다. 그 가운데에는 왕족, 제사장도 있었지만 농부, 목동이 직업인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마치 한 사람의 저자가 그 내용을 구성하고 기록한 것처럼 일관된 주제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놀랍습니다. 그 일관된 주제란 바로 인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과 성취입니다. 따라서 이런 사실은 성경의 저자가 눈에 보이는 인간 저자들(이를 제 2저자라고 부름)이 아니라 사실은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이를 제 1저자라고 부름)이시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렇다고 인간의 개성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출신, 학문의 정도, 개성도 고스란히 나타납니다. 따라서 성경은 단순히 ‘하나님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해 감동(영감)된 사람들이 기록한 문서’로 이해하는 것이 옳습니다. 즉 하나님의 신이 인간 저자를 ‘감동’, 또는 ‘영감’시킨 상태에서 그를 도구로 삼아 기록한 것이 성경입니다. 신약 성경의 저자도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헬라어 원어의‘감동’ 또는 ‘영감’(inspiration)이란 의미는 ‘신의 바람을 쏘인’(데오스 퓨뉴스토스)이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의 신(영靈, 바람)에 쏘여져 하나님의 도구가 된 자들의 저작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딤후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벧후1:20-21)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을 가르치실 때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과 그와 관련된 일들을 자주 인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구약 성경을 인용하셨다는 것은 구약 성경의 진실성을 입증합니다(참고. 요5:46). 또 보편적인 유대인들은 구약 성경을 ‘토라’(Torah:율법서) ‘느비임’(Neviim:선지서) ‘크투빔’(Kethoubim:성문서)으로 삼분하는데 예수님도 그와 같이 구약 성경을 셋으로 분류하셨습니다. 위와 같은 사실들로 미루어 보아 예수님은 구약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로 된 글임을 받아들이셨고 그 권위를 인정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을 진실한 분이라고 믿는다면 그분이 구약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셨듯이 우리도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어야 마땅합니다.

    (24: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24:27)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예수님 시대의 ‘성경’은 구약 성경에 한정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시대에는 아직 신약 성경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신약 성경을 기록하신 적이 없고 또 제자들에게 기록하라고 명령하신 적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에게 신약이라는 것이 경전으로 존재합니다. 구약 성경은 앞서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수님이 구약성경을 인정하시니까 우리도 구약 성경을 믿고 받아들일 수 있지만 신약 성경은 무엇을 근거로 기독교 경전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이 신약 성경은 예수님 승천 이후 교회의 신앙생활의 소산물로 출현했습니다. 신약 성경은 본래 초대 교회 성도들이 교회를 이루고 신앙생활하는 가운데 예수님의 직계 제자나 그에 준하는 자들이 기록한 문서들입니다. 당시 예수님의 직계제자나 그에 준하는 인물들의 저작을 교회 공동체 내에서 일찍이 신령한 문서로 취급했습니다. 그 증거를 신약 성경 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후서에서 베드로는 바울의 편지를 언급합니다. 이 바울의 편지가 바로 오늘날 바울 서신이라고 일컫는 신약의 경권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는 이 바울의 편지를 마치 구약 성경과 동등한 권위를 가진 경전으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즉, 구약 성경을 억지로 해석하면 안되는 것처럼 바울의 편지(바울 서신)도 억지로 해석하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는 초대 교회가 구약 성경을 다루듯이 바울의 편지를 다루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즉 구약 성경을 권위있는 문서로 보듯이 바울의 편지도 권위있는 문서로 본 것입니다. 이는 조금 확대해서 해석하면 사도들의 편지를 구약 성경처럼 새로운 경전으로 삼게되는 근거가 됩니다. 이렇게 권위있는 문서로 인정받은 문서들이 수집되어 오늘날 우리에게 27권의 신약 경전으로 주어져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성도들을 신뢰합니까? 그러면 우리는 신약 성경을 새로운 언약의 경전으로 믿을 수 있습니다.

    (벧후 3:15-16) [15]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16]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구약 성경)과 같이 그것도(바울의 편지)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았던 사도들이 하나 둘씩 세상을 떠나자 더 이상 그분의 생생한 교훈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이에 교회는 평소 교훈의 내용을 상기시켜 기록으로 남기기 시작했고 오랜 시간이 지나는 동안 기독교 공동체의 신앙을 유지하고 가르치는 경전으로 자리잡았습니다. 그리고 이후 교회 공동체의 동의에 의해 편집이 완료되어 회의를 통해 경전으로 선포하게 됩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않아야할 점은 인간이 만든 회의체에서 성경을 결정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미 초대교회가 과거부터 순수한 신앙의 교본들로 삼았왔던 편지들을 회의의 과정을 통해 경전으로 재확인하고 천명한 것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신약 성경을 신앙의 경전으로 받아들일 수 있고 그 안에 담긴 교훈을 믿을 수 있습니다.

     

  • 예수님은 인류를 구원하실 유일한 구세주이십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모든 인류에게 구원을 줄 수 있으려면 첫째, 전 인류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 하고 둘째, 전 인류를 구원할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사랑이 있더라고 능력이 없으면 아무 것도 줄 수 없습니다. 또 아무리 능력이 있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심으로 인류에 대한 사랑을 증명해 보이셨고 부활하심으로 인류를 구원하실 능력을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인류사에서 어떤 종교의 교주나 훌륭한 성현도 죽음을 경험했거나 죽음에서 부활하였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 없습니다. 더욱이 그 죽음이 인류를 위한 것이고 부활이 또한 인류를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오로지 우리가 믿는 예수님만이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인류에 대한 사랑과 구원의 능력을 증명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류를 구원하실 유일한 구세주가 되실 수 있는 것입니다.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2: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고전 1: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세상은 기독교를 일컬어 독선적이라고 비판합니다. 다른 길은 없고 예수님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유일성에 대한 주장은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선언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분은 언젠가 제자들에게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살펴보면 이 보다 독선적인 선언은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자신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것은 다른 길은 모두 틀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독교라는 종교의 배타성은 바로 이 선언에서 출발합니다. 이와 같은 유일성은 제자들도 분명히 깨닫고 고백한 내용이었습니다. 사도행전에 초대교회를 막 시작한 사도와 성도들은 유대인의 산헤드린 공회(이스라엘의 종교재판소) 앞에서 예수님의 유일성에 대해서 고백했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 사실은 오늘날 우리도 같은 믿음을 가지고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 불신자들은 큰 의문이 있습니다. ‘내가 만나보지도 않은 수천 년 전의 인물 아담 한 사람으로 인해 왜 내가 죄인이 되어야하고 사망의 저주에 놓여야 하는가?’하는 의문입니다. 그런데 이 의문은 예수님을 믿으면 모두 풀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 한 사람으로 인해 일어난 모든 문제를 예수 한 분으로 인해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인류의 첫 번째 아담이 일으킨 문제를 인류의 두 번째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 책임지고 해결하게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을 부당하게 처벌한 것도 아니고 아담의 불행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무책임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십자가로 당신 자신이 모든 것을 책임지시려는 깊은 사랑과 관용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런 상황에 대한 성경의 명료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5: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5:19)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 예수님은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언대로 죽으실 뿐만 아니라 예언대로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구약 성경도 그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직・간접적으로 예언하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 ‘요나’라는 이름의 선지자가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여 도망가다가 하나님의 섭리로 물고기 뱃속에 갇히게 됩니다. 그 후 그가 뉘우치고 회개하자 사흘 만에 물고기가 그를 토해내서 살아납니다. 예수님은 구약 시대의 이 사건을 인용하시면서 곧 자신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할 것에 대한 예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2:40)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시편 16편은 다윗이란 인물이 지은 노래입니다. 그 노래 가운데 예수님의 부활을 예언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10절에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서 ‘내 영혼’이란 겉으로 보면 다윗 자신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행 2:29-31)는 다윗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증거합니다. 그렇게 보는 근거는 다윗은 이미 죽어서 그 무덤이 자신들의 곁에 있으니 다윗에게 적용될 말씀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6:10)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2:31)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이처럼 예수님은 성경의 예언대로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뿐만 아니라 부활도 믿어야 합니다. 만약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많은 모순점들이 발생합니다. 만약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부활도 없다는 뜻이고, 우리의 부활이 없다면 신앙생활의 목적도 사라집니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전하는 복음도 거짓말이라는 뜻이고 예수님과 제자들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정하면 모든 것들을 부정하게 되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긍정하면 모든 것들을 긍정하게 됩니다.

    (고전 15:17-19) [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8]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재물, 병나음, 마음의 평안, 출세, 권세와 같은 모든 것들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의 궁극적 목표는 그런 것을 얻고 누리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목표는 영원한 생명을 얻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신앙생활에 힘쓰는 궁극적인 목적이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최고의 복락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처럼 성도도 부활할 미래가 있다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부활한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그 때 나타날 현상과 부활의 과정에 대해서까지 매우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자세히 밝히고 있다는 것은 우리의 부활이 확실하다는 뜻입니다.

    (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도 살리시리라

     

    (살전 4:16-17) [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 하나님이 자기를 부인하는 겸손을 보이셨습니다.

    (요일 4: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2:7) 오히려 자기를 비어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일은 그분의 겸손과 사랑을 증거합니다. 2005년 일본의 아키히토(明仁) 일본왕의 장녀 노리노미야 공주는 평범한 공무원과 결혼하였습니다. 그런데 일본 왕족이 평민과 결혼하게 되면 왕족이라는 자기 신분을 잃고 평민이 되어야 하는 규율이 있습니다. 따라서 결혼하게 되면 과거 왕실에서 누렸던 모든 혜택도 상실하는 상황을 감내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사랑하는 한 남자 때문에 모든 것을 기꺼이 포기하고 결혼을 선택합니다. 이처럼 사랑은 때로 자신의 특권을 기꺼이 내려놓게 만듭니다. 그리고 낮아지게 만듭니다.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인간의 몸이 되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높고 높은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 낮아지신 것을 의미합니다. 또 인간을 사랑하시되 조건없이 베풀어주시는 아가페의 사랑을 나타냅니다.

     

    1) 예수님은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대신 죽으셨습니다.

    출애굽 시대에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달했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이 내려주신 율법을 다 준수하겠노라고 굳게 맹세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때로는 율법을 범할 수 있는 연약한 존재임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율법만 주시지 않고 혹 범죄할 경우 죄책을 면하도록 소, 양, 염소, 비둘기, 곡식가루를 제물로 삼아 속죄의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성막의 제도까지 주셨습니다. 만약 어떤 자가 율법을 범하게 되면 흠이 없는 가축을 성막으로 끌고 와서 그 가축에게 안수하고 죽여서 하나님께 제물로 불살라 드리고 피를 제단 주변에 뿌리는 제사 의식을 행해야했습니다. 그 후에야 비로소 범죄한 자는 하나님께 죄사함을 받고 사망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9: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함이 없느니라

     

    구약 시대 유대인들의 동물 제사 제도는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제사의 그림자입니다. 신약 성경의 저자들은 이천년 전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십자가 사건은 한 유대인 청년의 억울한 죽음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바로 모든 인류의 죄값을 대신 치르신 일종의 제사였다고 말합니다. 또 십자가를 지셨던 예수님 자신도 제자들에게 그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육체를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셔서 인간이 처한 사망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9:13-14) [13] 염소와 황소의 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벧전 1:18-19) [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로 한 것이니라

     

    (26: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언약의 피니라

     

     

  • 인간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3:23) 모든 사람이 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신 사건은 인간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만약 인간 스스로 구원할 수 있는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하나님이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실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자기 능력으로 극복할 수 없고 반드시 타인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들을 만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가고 있으면 그 사람은 스스로 그 상황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혹 아무리 수영을 잘한다고 해도 급류의 상황에서 헤엄쳐 자신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외부로부터 구조대원이 구조 장비를 통해 도움을 주어야 그 상황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예를 들자면 어떤 노동자가 밖에서만 문을 열 수 있고 안에서는 문이 열리지 않는 냉동 창고에 갇혔다고 합시다. 냉동 창고 안에 들어갔다가 실수로 문이 닫히면 반드시 밖에서 열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그 상황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망의 그늘에 놓인 인간이 그 굴레에서 스스로 빠져 나올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따라서 성육신은 인간 스스로의 능력으로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 하나님은 범죄한 인간을 여전히 사랑하시고 그가 구원받기 원하십니다.

    (딤전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일반적인 사람들은 선한 사람이나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에게 가끔 호의를 베푸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악인을 위해서, 더욱이 내게 해를 입힌 사람에게 호의를 베풀고 희생하는 경우는 매우 드문 경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마귀에게 순종하여 반역의 길을 간 인간에게 최고의 호의를 베푸셨습니다. 그 호의란 사망의 그늘에 놓인 인간의 상황을 해결하시고자 ‘조물주’이신 그분이 ‘피조물’의 형상을 입고 기꺼이 이 땅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육신하신 일은 인간이 비록 범죄했지만 여전히 그를 사랑하시고 불쌍히 여기신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이 땅에 오신 하나님 자신 이십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이 땅에 오신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실 때 인간을 만물 가운데 가장 존귀한 피조물(조물주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로 만드셨습니다.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어졌고 그로 인해 그분과 교제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은 인간에게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위임하셨습니다. 이는 다른 피조물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는 인간에게만 주어진 특권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뿐만 아니라 만물에 대한 관리까지 맡기시고 에덴동산 안에서 모든 것을 누리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에게 금지하신 한 가지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동산 중앙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명령이 주어진 것은 하나님 자신이 창조주요, 인간은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뜻도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아담과 하와는 마귀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이 금하신 나무의 실과를 따먹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에덴동산에서 추방되고 이 땅에서 땀흘리며 수고하며 살다가 다시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사망의 굴레에 갇히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 일에 대해서 왜 사망에 이르는 무거운 징벌을 내리셨을까요? 이 일을 통해 아담과 하와는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다스리도록 맡기신 하나님의 말씀보다 마귀의 말을 더 신뢰하는 모순된 모습을 보였습니다. 게다가 마귀가 스스로 교만해져서 하나님처럼 높아진 것처럼 아담과 하와도 피조물의 자리를 지키지 않고 하나님처럼 높아지려는 교만한 마음을 품은 결과로 빚어진 일입니다(참조. 사 14:12 롬5:12-14). 이처럼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결과로 주어진 결과는 인간이 사망의 저주 아래 놓이게 된 것 이외에도 여러 가지 측면에서 그 영향이 끼쳐졌습니다. 그 일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피조물 사이에 분열과 파괴의 현상이 일어납니다. 조화와 질서 가운데 창조된 아름다운 만물은 모두 인간을 위해서 지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한 결과 만물에도 부조화와 무질서가 찾아왔고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파괴되고 최후에는 결국 멸망이 예정된 것입니다. 만물 가운데 가장 존귀한 피조물로 만들어진 인간은 결국 죽음 이후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고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아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비록 인간은 하나님을 반역하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질렀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인간을 사랑하셔서 이 상황을 해결할 방법을 일찍이 계획하셨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셔서 인간을 대신하여 죄의 대가를 치르시는 것이었습니다. 이천 년 전 이 땅에 내려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 자신이시오,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신 조물주 하나님이셨습니다.

    (요일 1: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1:14)『말씀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이처럼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신 사건을 ‘성육신’(Incarnation 하나님이 태어났다는 표현은 부적절하기 때문에 사용하는 표현)이라고 표현합니다. 구약 성경은 이 성육신 에 대해서 무려 40여 차례나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여러 차례 예언했다는 사실을 보면 성육신은 이미 오래 전부터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성육신은 인간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