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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관 소개 – 루디아 신도회] 주님의 사랑과 평안이 넘치는 신도회

    [기관 소개 – 루디아 신도회] 주님의 사랑과 평안이 넘치는 신도회

    할렐루야! 주님의 사랑 속에서  평안이 넘치는 루디아 신도회를 소개합니다~ ^^

    청주교회 루디아 신도회는 45~55세 사이의 여성 신도로 구성되어 있으며 구성원은 총 8명입니다. 대부분 가정에서는 엄마와 아내로서, 직장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소임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여러 역할을 감당하면서도 특별히 교회 내 여러 사역의 자리에서 성실히 제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안식일 예배 후 오후에 진행되는 신도회에서는 서로 한 주간의 삶을 이야기하면서 생활 속에서 체험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고 있습니다.

    신도회 예배를 드리면서 항상 느끼는 점은 “나의 형편을 정말 잘 아시는 하나님~ !!” 입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 공의로우신 하나님,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만난 풍성한 생활의 간증을 나누며 기쁨의 웃음이 넘치기도, 감사의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루디아 신도회에서는 특히 기도에 힘쓰고 있는데 신도회 기도 제목을 두고 매주 목요일 정시 기도를 하고 있고 전도는 은사가 아닌 사명이라는 인식으로 매일 태신자와 전도 대상자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또 잃은 양을 위해서 2주에 한 번 정기적으로 문고리 심방을 하고 있습니다. 잃은 양을 생각하며 쓴 엽서에 교회 소식을 알리기도 하고, 말씀을 적기도 하고, 엽서를 읽으면서 먹을 수 있는 간단한 먹거리와 함께 집 문고리에 걸어두고 옵니다. 하나님처럼 그 영혼을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생각하며 하나님 안에서 같이 동행하게 될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음 신도회 소식에서는 잃은 양들이 회복되어 함께 신도회 예배를 드리며 즐겁게 활동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드리고 싶습니다. ^^

    그 밖에도 여러 신도회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봄에는 벚꽃놀이도 가고, 찬양기도회로 다른 신도회와 연합 신도회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다른 지역에 있는 교회를 방문하여 신앙의 교제를 나누는 활동도 꾸준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다음 달에는 광주교회를 방문하려고 합니다. 어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너무 기대가 됩니다.

    이상~! 혼자가 아닌 함께하는 즐거움으로 하나님이 주신 평안함을 마음껏 누리고 있는 루디아 신도회 소개였습니다. 평안, 할렐루야~!!

     

    <2024.6월  루디아 신도회의 광주 참예수교회로 신앙여행 사진>

                

    글작성 : 최영미 자매

  • [교무부] 사청부 영은회 개최

    [교무부] 사청부 영은회 개최

     

         

    할렐루야~

    (골3:1~4)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2024년도 춘계 사청부영은회 일정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진행되었습니다. 이번 영은회는 4.27~28(1박 2일) 일정으로 총회 교육훈련센터에서 실시되었습니다.  ‘위엣 것을 찾으라(골3:1~4)’는 주제로 전홍희 목자님이 강의해주셨으며, 천안교회 김반석 장로님이 특강을 해주셨습니다. 전국교회에서 총 105명 등록하여 참여하였습니다. 

    모든 일정을 은혜 가운데 인도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각지 교회의 사청부들이 교회의 기둥이 되어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고 주의 뜻을 이뤄가며 살아가도록 관심과 기도 부탁드립니다.

  • [복음의 메세지] 이스라엘 백성이 예표하는 참교회

    [복음의 메세지] 이스라엘 백성이 예표하는 참교회

    이스라엘 백성은 교회를 예표합니다

    전홍희 목자(정출부 이사)

    [서론]  

    이스라엘 백성은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은 민족으로서, 그들의 삶과 역사는 교회의 예표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이는 여러 면에서 나타납니다:

    1. 하나님의 기대와 목적

    이스라엘 백성: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특별히 선택하여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성민으로, 그분의 기업이 되는 백성이었습니다. 이는 그들이 세상 다른 민족들과 구별된 존재로,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신 14:2).

    교회: 이와 비슷하게, 교회는 하나님께서 죄악된 세상에서 불러내어 모은 성도들의 모임입니다.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분리된 거룩한 공동체로,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존재합니다 (고전 1:2).

    1. 구원의 목적

    이스라엘 백성: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여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주시기 원하셨습니다. 이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아름답고 광대한 땅으로 묘사되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구원의 상징입니다 (출 3:8).

    교회: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구원하여 천국으로 이끄십니다. 이 과정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가는 여정과 비슷하게, 교회가 죄악된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왕국으로 향하는 여정을 상징합니다.

    [본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떻게 이끄셨는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 인도하셨는지를 살펴보면, 그 과정은 교회의 여정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 애굽에서의 노예 생활

    이스라엘 백성: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노예로 살며 바로의 명령에 따라 국고성을 짓는 등 고된 노동을 했습니다. 그들은 자유를 잃고 억압된 삶을 살았습니다 (출 1:11).

    교회: 이와 유사하게, 세상 사람들은 죄악된 세상에서 마귀의 권세 아래 죄의 종으로 살아갑니다. 성경은 애굽을 영적으로 죄악 세상을 나타내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롬 6:16-17, 계 11:8-9).

    구원의 모습: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출하셨고, 이는 예수님께서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오신 것과 유사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충성한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음을 맛보셨습니다.

    1. 홍해를 건넘

    이스라엘 백성: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홍해를 가르시고, 이스라엘 백성이 마른 땅을 건너도록 하셨습니다. 이는 그들에게 큰 구원의 기적이었으며, 그들은 이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했습니다 (출 14:15-16, 출 15장).

    교회: 이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 우리가 죄악된 세상을 건널 수 있게 된 것을 상징합니다. 성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넌 것을 세례의 예표로 봅니다 (고전 10:1-4). 이는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새로운 생명을 얻은 것과 같습니다.

     

     

    1. 광야 40년 인도

    이스라엘 백성: 하나님께서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시고, 그들에게 필요한 물과 양식을 공급하셨습니다. 이는 그들이 광야에서 살아남고,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하는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느 9:19-22).

    교회: 이와 마찬가지로,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살아가며, 성령의 인도와 보호를 받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임재를 깨닫게 하고, 말씀을 이해하며, 위로와 사랑을 받도록 도와줍니다. 예를 들어,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느끼고 위로를 받는 경험은 성도들에게 큰 힘이 됩니다.

    1. 요단강을 건넘

    이스라엘 백성: 이스라엘 백성은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 자신을 성결케 하였습니다. 제사장들이 믿음으로 요단강을 건너고, 백성들이 뒤따라 갔습니다 (수 3:14-17). 요단강은 특히 물이 많아 넘실거리는 시기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안전하게 인도하셨습니다.

    교회: 이 사건은 우리가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음을 상징합니다 (행 14:22).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자만이 진정한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눅 14:27). 우리는 믿음으로 굳게 서서 환난을 이겨내야 하며, 이를 통해 천국에 이를 수 있습니다 (계 2:10).

    1. 가나안 땅에 도착

    이스라엘 백성: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이 땅은 그들에게 약속된 축복의 땅이었지만, 여전히 전쟁과 도전이 남아있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교회: 그러나 천국은 가나안 땅의 그림자를 넘어서, 영원한 안식과 기쁨이 있는 곳입니다. 천국에는 죄악과 슬픔, 죽음이 없고, 오직 영원한 기쁨과 평안만이 존재합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서 얻은 축복보다 훨씬 더 크고 완전한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와 같이,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의 여정은 오늘날 교회의 여정을 예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삶과 역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시고 구원하시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교훈을 제공합니다.

  • [복음 메세지] 과부의 두 렙돈 (눅 21:1~4)

    [복음 메세지] 과부의 두 렙돈 (눅 21:1~4)

    제목 : 과부의 두 렙돈
    누가복음 21:1~4

    옛 바리새인들은 너무나 어리석고 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해도, 그들은 늘 예수님을 죽일 생각만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보시며 안타까운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시련과 고통을 주시며 다시 마음을 돌이킬 기회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에수님을 걱정하게 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때에,

    예수님을 감동시킨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오늘날 그 여인을 공개적으로 칭찬하고 격려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선 왜 과부를 칭찬하셨을까요?

    오늘은 그 이유를 알아보고 우리 모두 그 모습을 본받아야겠습니다.

    오늘 성경에는 한 과부가 헌금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눅 21:1~2)

    헌금이란 무엇일까요? 바로 내가 받은 은혜를 재물로 하나님께 돌려 드리는 겁니다.

     

    가난한 과부가 아주 적은 금액의 헌금을 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선 우리가 헌금하는 모습과 마음을 보고 계십니다.

    그 금액이 크든 작든 하나님께선 항상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옛날의 과부는 오늘날의 과부와는 조금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옛날의 과부는 절대로 경제적인 활동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수입이 전혀 없는 신분이었습니다.

    따라서 굉장히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과부가 헌금을 하고 있습니다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돈의 단위인 렙돈은 ‘가장 적은 단위의 돈’ 입니다.

    이 시대에는 한 렙돈을 절대로 헌금하지 말라고 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가작 작은 단위의 돈이기 때문에 헌금으로써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과부는 한 렙돈이 아닌, 두 렙돈을 헌금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자도 헌금을 하고, 가난한 과부도 헌금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들을 어떻게 평가하고 계신가요?

    ‘가난한 과부가 많은 헌금을 하였다’ 고 말씀하셨다.

     

    (3) 심지어 이 가난한 “과부의 헌금이 모든 사람들 보다도 많이 헌금했다!” 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일반적인 생각을 해본다면 상식적이지 않은 말이다. 받은 만큼 돌려드리는 것이다.

    가난한 과부는 받은 은혜가 적기에 적은 금액을 헌금한 것으로 보인다. 이 부분을 잘못 생각하면,

    “아!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만 좋아 하시는 구나” 라고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가난한 과부의 적은 헌금을 칭찬 하셨을까?

     

    지금의 가치로 환산해본다면, 이 가난한 과부는 약 1달러가 되지 않는 금액을 헌금한 것이다.

    그런데 왜 칭찬을 받은 것일까?

     

    (4) 예수님께선 두 가지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첫 번째, 다른이들은 풍족한 상황에서 헌금을 했고,

    가난한 과부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헌금을 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헌금을 할 수 없는 상황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과부가 생활하기에도 부족한 상황속에서,

    예수님께 자신의 ‘전부’를 드린 것입니다.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행동하게 했을까? 바로 그녀의 믿음이 가능하게 한 것이다.

    그녀는 예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일반적인 사람들이라면,

    예수님께 복을 구하면 구했지 자신의 전부를 드릴 생각은 못할 것입니다.

    그만큼 그녀는 예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자신을 돌봐주신 분이 예수님이심을 믿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도 예수님께서 자신을 지켜주실 것이란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선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우리의 모든 상황을 인도하십니다.

    이것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도 과부와 같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성경에 엘리사와 과부가 등장합니다.

    엘리사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하나님의 공급이 중단 됐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선 엘리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방인의 땅으로 가라” 그리고 엘리사는 그곳에서 한 과부를 만났습니다.

    엘리사는 그 과부에게 먹을것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 과부는 자기와 자기 아들이 먹을 것 밖에 남지 않았고,

    그것을 먹고 이제 삶을 끝내고자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엘리사는 하나님을 믿고 자신에게 그 음식을 줄 것을 권했습니다.

    과부는 믿음으로 그렇게 행동했고,

    놀랍게도 그 과부와 자식들이 여러날을 먹을 음식이 계속해서 생겨났다.

     

    여러분은 시간이 남아서 교회에 오십니까? 돈이 남아서 하나님께 헌금을 하십니까?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의 삶속에서 어떤것이 중요한지를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의 시간속에서 중요한 시간을 내어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드리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오히려 우리가 어려움 속에 있을수록,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때로 적은 능력과, 적은 축복을 주실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 하나님께 기쁨과 감사를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면 그것은 예수님의 큰 뜻이 있는 것이며, 큰 계획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때마다 믿음으로 신앙생활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선정 하실 때, 세상에서 보는 능력으로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부자도 아니었고, 지식이 뛰어난 사람도 아니었고,

    능력있는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갖고 있지 않은것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믿음” 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부르셨을때 모든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자세로 예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스스로 똑똑하고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예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겸손한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것을 예수님 앞에 바칠 수 있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왜냐면 예수님은 부족한 사람들을 통하여 예수님의 능력을 보여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시의 “가난한 과부의 헌금”은,

    당시 어리석은 바리새인들에게 큰 충격과 가르침을 주는 사건이었습니다.

     

    두 번째, 과부는 “전부”를 드리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이들은 “일부”를 헌금했고, 과부는 “전부를” 헌금했습니다.

    즉, 이것은 최선을 다했는가? 나의 온 마음을 하나님꼐 드렸는가? 를 보고 계신 것입니다.

    과부에게 2개의 동전은 하루를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돈이었습니다.

    자신의 하루, 자신의 삶을 전부 드린 것입니다.

    여기 계신 성도님들은 하나님 앞에 “일부” 를 바치고 있나요? 아니면 “전부”를 바치고 있나요?

    우리는 온 마음을 다하여 예수님 앞에 나아와야 합니다.

    부자들은 자신의 돈과 명예에 집착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 앞에 나아가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우리 역시, 가난한 과부처럼 예수님께 온 마음을 다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앞에 나아갈 때,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손가락질 합니다.

    “저렇게 어리석은 행동을 하다니!, 저것은 낭비다” 라고 말합니다.

    과연 우리는 어리석은 사람들일까요? 예수님은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시지 않습니다

     

    세상에서는 사람을 바라볼 때 결과를 봅니다.

    잘 했는가? 결과물이 훌륭한가? 완벽했는가?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예배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frizeF92ahE

  • [복음메시지] 네가 낫고자 하느냐? (요 5:1-9, 14)

    [복음메시지] 네가 낫고자 하느냐? (요 5:1-9, 14)

    2024년 5월 25일 (토) 오전예배

    설교제목 :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본문말씀 : (요 5:1-9, 14)

    설교자 : 박은진 목자님

     

    ‘베데스다’ : 자비의 집, 긍휼의 집

    당시 의술은 매우 희귀한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처럼 의사에게 치료받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기에 많은 병자들이 이곳 베데스다에 모인 것이다.

    (3-4)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 어떤 사본에는 있고, 어떤 사본에는 없음. 이는 중요하지 않고 우리는 그대로 믿으면 된다.

    당시에 천사가 물을 동하게 하면 가장 먼저 못에 들어간 자는 어떤 병이든지 낫게 된다는 소문이 있었다. 이것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많은 병자들에게 소문으로 퍼졌다.

    소문의 방식은 사실 선착순 방식이다. 그러나 이 선착순 방식은 매우 가혹한 방식일뿐더러 무자비한 방식이다. 그 이유는 서로 경쟁을 부추기게 하기 때문이다.

    베데스다는 늘 아비규환이었을 것이다. 경쟁 속에서 서로를 긍휼히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9)병자’ : 사회적 약자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이 베데스다와 같다. 매일을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자비하게 경쟁하고 있는 것이다.

    5 거기 삼십팔 년 된 병자가 있더라
    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요 5:5-6)

    (5) 30년 된 병자, 네가 낫고자 하느냐 => 예수님은 이미 병자의 형편을 모두 다 알고 계셨다.

    38이란 숫자는 이스라엘에게 고통을 의미하는 숫자이다. (신 2:14) 광야생활 38년

    아무도 그 병자를 도와주지 않았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병자의 형편을 모두 아시고 그 병자를 낫게 해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마 12:20)

    (마 12:20) 상한 갈대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 끄지 않으시는 예수님의 사랑이 이와 같다.

    (8) 경쟁의 자리에서 구할 것은 없다. 오로지 예수님 한분께 나아가야 한다.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 11:28-30)

    (마 11:29-30)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안식처가 되어주신다. 경제, 가족, 취업, 결혼 등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형편을 이미 다 아시고 문제를 해결해주신다.

    해결되지 않는 상황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께 나아가 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14) 예수님께서 그 병자를 다시 만나셨는데 더 심한 고통을 받지 않도록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중요한 것은 영혼의 구원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벧전 1:9) 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이다.

    먼저 경쟁의 자리에서 떠나야 한다. 또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영혼의 구원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유튜브 설교링크

  • [복음 메시지]더욱 간절히 주의하라(히 2:1-4)

    [복음 메시지]더욱 간절히 주의하라(히 2:1-4)

    말씀 제목: 더욱 간절히 주의하라 (히 2:1-4)
    설교자 : 이요셉 목자
    설교일 : 2024년 4월 27일 안식일 오전

     

    본래 히브리서의 제목은 ‘히브리인들에게’ 이다. 히브리인은 ‘건너온 자들’이란 뜻이다. 최초로 히브리인이라 불린 사람은 아브라함이다. 아브라함이 강을 건너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히브리인들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3절의 ‘우리’는 신앙의 2세대를 말하는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고, 이 말씀을 들은 자들이 전하는 것을 들은 이들이 ‘우리’인 것이다. 우리는 신앙의 몇 세대인가? 가정에서 몇 세대인가? 이 세대들이 신앙 안에서 건너는 자들이다. 우리가 신앙 안에서 넘어서야 하는 문제들이 있고, 넘어온 문제들도 있다. 어떤 문제에 걸려있으면 신앙이 성숙할 수 없다. 당시 히브리인들은 어떤 문제들을 넘어서야 했는가?

    (1:4, 3:2) 이때의 성도들은 천사를 너무 크게 여겨서 숭배하려 했었다. (계 22:8-9) 요한 사도도 천사를 경배하려 했었다. 경배는 오로지 하나님께만 드려야 하는 것이다. 이때의 히브리인들은 이런 신앙의 문제에서 넘어서지 못했다. 현재 우리는 이런 걸림돌은 없다. 오히려 지금 성도들은 천사를 우습게 보기도 한다. 이 또한 잘못된 것이다.

    우리도 넘어서야 할 문제들이 있다. 돈의 문제, 관계의 문제, 성공의 문제, 이성과 정욕의 문제들이 그러하다. 그러나 우리는 넘어서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히브리인 이기 때문이다. 당시의 신앙의 2세대들로 보자면, 시대적으로 넘어서야 하는 순간들이 있었다. 사도교회의 시작은 찬란했으나, 끝은 초라하였다. 신앙이 전파되었을 시기에 사단이 틈을 타고 있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일로 이를 알 수 있다. 이 일은 아주 작은 씨앗에 불과했다. 교회가 이렇게 된 일이 그저 사도가 잘못했기 때문일까? 사실 교회가 부패한 일은 하나님의 섭리 아래 있던 일이다. 개개인 모두에게 넘어서야 하는 숙제가 있다. 살아가야 하는 시대에도 문제가 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말씀을 들어야 한다.

    더욱 간절히 주의해야 한다. 신앙에서 서서히 멀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지금은 왜 사도교회 같은 일이 없나? 우리가 대단하기 때문이 아니다. 계시록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단을 잡아 두셨고, 사도시대처럼 전면적으로 미혹하지 못하게 하셨다. 개인적으로 실족하는 일은 있으나, 전면적으로 위험에 빠지는 일은 없다. 그러나 세상에 끝에서는 그런 일이 생기게 된다. 우리가 앞으로 살아야 할 시대는 이와 같다. 우리가 받은 것은 큰 구원이기에 이를 등한히 여기서는 안 된다. 신앙을 가볍게 여기면 안 된다는 것이다. (마22:5) 자신의 상업을 위해 하나님의 초대를 등한히 여기는 부분이 나온다. 우리가 얻은 구원의 은혜가 상대적으로 크기 때문에 생업의 중요성은 비교적 작은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창세 전부터 준비하셨다. 내가 얻은 구원의 크기가 얼마나 크고 얼마나 은혜로운 것인지 생각해보자. 우리는 어떤 언약을 맺었나? 하나님께서는 죄사함, 구원의 은혜를 내려주셨다. 이 언약을 맺는 것조차도 희귀한 일이다. 우리가 이 언약을 얼마나 귀하게 여겨야 합당할까? (갈 3:19) 구약의 율법은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통해 주신 것이다. 그런데 이 율법을 가벼이 여겼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다 죽고 말았다. 천사들을 통해 맺은 이 율법이 얼마나 중한 것인지 안다면, 하나님과 직접 맺은 언약은 얼마나 더 중요한지 알 수 있다. (3-4)지금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은 확실한 것이다. 성령과 간증, 기적들을 생각해보라. 이는 틀리지 않은 것이다. 

  • [성도소개] 정*순 모친을 소개합니다

    할렐루야!

    우리 교회 정*순 모친을 소개합니다.

    1. 간단하게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48년에 태어나 3형제를 낳아 기르고 지금은 손주가 8명, 증손주 2명 있습니다. 아들 3명 중 큰 아들은 강남교회 윤*석 집사 내외와 손주, 증손주들, 막내 아들 내외와 손주들은 하남교회를 같이 다니고 있습니다. 둘째 아들 내외만 일반 교회에 다니고 있습니다.

     

    2. 어떻게 교회에 다니게 되셨나요?

     시골에 살 때 어머니께서 장로교회 다니실 때 따라 다녔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84년도에 이사한 옆집에 황재순 목자님이 살고 계셔서 그 때 당시 은천교회에 다니기 시작했고, 그 이후에 참예수교인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3형제와 안*선 집사님 아들들이 친하게 지냈으면 하는 마음으로 가까워지고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3. 세례와 성령은 언제 받으셨나요?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오충도 목자님께서 오셔서 세례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성령 받았을 때는 혀가 이상하게 내 뜻과 달리 움직이려고 해서 멈춰보려고 노력했는데 계속 방언이 나온 기억이 있습니다.

     

    4. 좋아하시는 성경구절과 찬송은?

    찬송가 399장 주의 약속하신 말씀 위에서, 성경은 야고보서를 좋아해서 예전에는 1장~3장까지 외웠었는데 나이가 들어 이제는 가물가물하지만 설교 말씀을 들을 때 야고보서에 나온 말씀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있었습니다.

     

    5. 하나님께 받은 많은 은혜 중 기억나는 간증 짧게 부탁드려요.

     온갖 풍파를 많이 겪었는데 지금까지 지켜주시고 인도해주신 것이 받은 은혜입니다. 자녀들이 믿음 안에서 잘 자라게 해주신 것도 은혜입니다.

     

    6. 신앙의 다짐 한 마디.

     일반 교회 다니는 동생들이 이단교회 다닌다고 이야기하지만 죽는 날까지 하나님 믿으며 믿음 성장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소원이 있다면 시간가는 줄 모르고 기도하는 즐거움을 맛보고 싶습니다.

     

    찬송가 399장 주의 약속하신 말씀 위에서 듣기

  • [복음메세지] 섬기는 자리와 자기를 낮추는 자리 (마 23:1-12)

    (마 23:1)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마 23: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마 23:3)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마 23:4)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마 23:5)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마 23:6)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마 23:7)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마 23:8)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마 23:9)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마 23:10)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마 23:11)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마 23: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 시기 헤롯당, 사두개인, 율법사, 바리새인들과 논쟁을 마치시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실 때 이제 백성들에게 교훈을 주시는 내용이다.

    성전 주변에 사람들이 많았는데 공개적인 장소에서 다 들으라고 유대인의 지도자들을 책망하는 말씀을 하셨다. 사실 이건 굉장히 위험하고, 또 지혜롭지 못한 일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직접 대놓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을 지적하셨을까? 이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셔야 하는 때가 이른 것이다. 예수님이 항상 ‘화 있을찐저!’ 이렇게 말씀하지는 않으셨다. 대부분 온유하고 부드럽게 말씀하시고 질문에 답도 하시고 비유로 설명하시던 예수님이셨다. 하지만 지금은 십자가 죽음을 며칠 앞둔 때이기에 강하게 심판을 경고해야 하는 시점이다.

    마치 계시록 8장부터 하나님께서 천사들에게 나팔을 주셔서 불게 하시는 것과 같다. 천사가 나팔을 차례로 불 때마다 재앙이 일어난다. 독수리가 나와서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화화화가 있으리로다.’ 나팔이 엄청 시끄럽다. 하나님이 땅에 주시는 심판이자 경고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큰 소리로 들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신 이유는 바로 그들이 앉아있었던 자리에서 찾을 수 있다.

    [마 23: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 여러분은 어디에 앉아 계시나? 여러분이 앉아 계신 의자가 어느 의자인지 잘 살펴야 한다. 우리는 어느 의자에 앉아있어야 할까? 오늘 본문의 마지막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그 답을 알려주신다.

     

    [마 23:11-12]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본문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책망하시는 교만한 모습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인지 알 수 있다. 하나 씩 살펴보고 나에게는 이런 모습이 있지 않은지 말씀에 비춰보길 바란다. 사람들의 교만한 모습들을 살펴보자.

     

    1. 언행의 불일치

    [마 23:3-4]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4)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사람의 교만함은, 말로만 하고 정작 스스로는 그 말을 실천하지 않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당시 유대인들의 회당에 ‘모세의 자리’라 불리는 의자가 실제로 있었다고 한다. 어디에 있었을까? 회당 앞쪽, 두루마리 성경, 토라를 보관하는 함 앞에 돌로 만든 의자가 있다. 이 의자에는 누가 앉을까? 율법을 읽고 설명해 줄 사람이 앉는다. 그래서 모세의 자리는 가르치고, 판단하는 사람이 앉는 자리이다.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하고고,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교만이다. 이것은 마치 다른 사람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놓고 자기는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않는 부당한 일이다.

     

    1. 허영심

    [마 23:5]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경문은 유대인들이 손목과 이마에 차던 말씀이 담긴 작은 상자이다. 그것을 가죽 끈으로 묶어서 심장 가까이 왼쪽 팔이나, 머리 위인 앞 이마에 달았다.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또 목숨과 같이 지키려는 다짐 같은 의미이다.

     

    [신 11:18] 이러므로 너희는 나의 이 말을 너희 마음과 뜻에 두고 또 그것으로 너희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너희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며

     

    옷술은 옷의 귀퉁이에 파란 실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게 하는 표이다.

     

    [민 15:38-40]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그들의 대대로 그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 (39) 이 술은 너희로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로 방종케 하는 자기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좇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40) 그리하면 너희가 나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준행하여 너희의 하나님 앞에 거룩하리라

     

    문제는 이것이 사람들에게 내가 얼마나 경건한 사람인지 보여주는 표시가 되었다는 것이다.

     

    1. 높임 받으려는 태도, 탐욕

    [마 23:6-7] (6)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7)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사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어딜가나 존경을 받고 대접을 받았다.

    마 23:8-10 내용을 보면, 랍비라 칭함 받지 말라, 아비라 하지 말라, 지도자라 칭함 받지 말라. 왜냐면 참 선생, 아버지, 지도자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존경하는 마음이나 권위를 부정하시는 것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이런 직분은 하나님이 세우신 것이다. 또 분명히 존경하라 하셨다.

     

    [딤전 5:17]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

    [히 13: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하지만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면 안 된다. 교회 안에서 계급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너무 좋은 자리에 욕심을 부리면 안된다. 우리는 모두 세상에서 존귀한 사람들이지만, 이 존귀함은 누가 주신 것인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우리 뒤에 하나님이 계시다. 가장 큰 뒷배이다. 하지만 우리는 겸손하고 서로 섬겨야 한다.

  • [복음 메세지] 우리를 이루자

    [복음 메세지] 우리를 이루자

    2024.5.24 안식일 오전 임성열 목자님 설교

    ㄴ이미지를 클릭하면 해당 설교영상으로 이동됩니다.

     

    ?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가 “우리”라는 연합이 되기를 원하실까 ?

     

    1. “우리”는 아름답기 때문이다.

    (시 133:1) “우리”로써 연합하는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것이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아름다움은 “우리”에 있다.

     

         2. “우리”는 강하기 때문이다.

    개개인은 연약하기에 우리로써 강해질 수 있다.

    (시133:2) “선하다” = 함께함으로써 서로에게 유익이 되고 힘이 된다.

    하지만, 마귀는 우리의 이런 하나되려고 하는 마음을 흩으려고 한다. 흩어지면 약해지니까.

    신앙이라는 것이 혼자할 수 있는 것이었다면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굳이 만들 필요가 없었고, 혼자 있는 아담이 좋지 않게 보일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만드셨고, 혼자 있는 아담이 보기 좋지 않다 여기셔서 하와라는 짝을 만들어주셨다.

    즉, “신앙은 결코 혼자할 수 없는 것이다.”

     

         3. “우리”에는 행복이 있기 때문이다.

    (시 133:3) 하나님께서 교회에 복을 명하셨고, 교회는 곳 우리이기에,

    “우리에게는 행복(=영생)이 있다.”

  • [복음 메세지] 어디를 가든지 이기게 하셨더라 (삼하8:1-14)

    [복음 메세지] 어디를 가든지 이기게 하셨더라 (삼하8:1-14)

    [말씀 제목]  어디를 가든지 이기게 하셨더라 (삼하8:1-14)

    [설교자]  김세한 목자

    [설교일]  2024년 5월 18일

    제국주의 시대를 논할 때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나라가 있다. 바로 현재의 영국이다. 현재는 유럽 서쪽의 섬나라이지만 소위 대영제국이라 일컫던 황금시대가 있었다. 1607년, 북아메리카의 버지니아주 제임스 타운을 시작으로 전 세계 약소국을 대상으로 정복하고 식민지로 삼아갔다. 그래서 1815년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이하는데 이 기간이 무려 백년이나 지속되었다. 1920년에 이르러 대영제국은 지구상의 모든 식민지를 합하면 면적이 무려 3,550만 제곱미터가 되었다. 이는 대한민국의 355배 되는 면적이고 현재 러시아 땅보다 2배 이상 큰 면적이다. 그래서 가장 잘나가던 때에 세계 육지 면적의 4분의 1이 바로 영국의 것이었다. 그래서 소위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별명이 붙었던 것이다. 그런 대영제국도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많은 빚을 지는 바람에 국력이 쇠퇴해지고 미국에 그 패권을 넘겨주게 되었다. 1997년 홍콩을 중국에 반환하면서 대영제국주의의 잔재는 완전히 정리가 되었다.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지배하고 착취하려는 모습은 작게는 사회 곳곳에서 발견될 수 있는 ‘우리의 현실’이다. 인간관계 속에도 있고, 기업과 기업 사이에도 있고, 단체와 단체 사이에도 갑을 관계가 있다. 이런 일면을 보면 소위 양육강식 적자생존이라는 강자의 법칙이 지배하는 것이 이 세상의 원리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루시려는 나라는 그런 원리가 지배하는 나라도, 사회도, 개인도 아니다. 하나님이 이루시려는 나라는 이 땅에 속하지 않은 원리가 지배하는 나라, 절대 공의와 사랑을 품으신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그런 나라였다. 그것을 이루시기 위해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왕이 되게 하셨고 그를 말씀으로 지도하셨다.

    (시 119:101-102) 『(101) 내가 주의 말씀을 지키려고 발을 금하여 모든 악한 길로 가지 아니하였사오며 (102) 주께서 나를 가르치셨으므로 내가 주의 규례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세움 받은 성도들은 오늘날 어떤 신앙의 길을 가고 있는가? 또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내가 어떤 길을 가고 있다고 고백할 수 있는가? 성도들이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이 이기게 해주시고, 형통한 길을 열어주시고, 땀 흘린 대가로 단 열매를 수확하게 하시기를 원한다. 그러나 육신의 눈으로 발견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영적인 눈을 뜨고 가려진 본질을 보고 있는가? 오늘은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이 이기게 해주셨다는 승리 기사를 통해 함께 생각하고 은혜를 나누는 시간을 가지고자 한다.

    다윗이 왕이 되어 처음 하고자 한 일은 언약궤를 자신의 성으로 모셔 오는 일이었다. 그 과정에서 웃사가 죽는 불미스러운 일도 있었지만 그것은 곧 다윗의 겸손한 영성과 신앙을 발견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언약궤 앞에서 어린 아이처럼 낮아져 춤을 추는 다윗에게 하나님은 소위 ‘다윗 언약’이라고 하는 중요한 언약을 주신다. 다윗은 하나님을 위해서 집을 짓겠다고 했지만 오히려 하나님이 다윗에게 내가 너의 집을 지어주마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 주셨던 것이 바로 다윗 언약이었던 것이다. 그 다윗 언약은 단순히 육적인 면에서 다윗의 혈통에서 왕위를 계승할 것이라는 뜻이 아니었다. 그것은 영적인 면에서 그리스도께서 그 후손 가운데 오실 것이라는 축복의 언약이었다. 이처럼 하나님께 언약을 받은 다윗은 그 언약에 대한 믿음을 품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출정한다. 그리고 블레셋의 도시를 쳐서 항복을 받아낸다. 뿐만 아니라 그 외에 모압과 소바, 아람과 아말렉, 하맛과 에돔 족속까지 굴복시킨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명실공히 팔레스틴에서 주도권을 장악한 최강국으로 부상하게 된다. 그래서 다윗의 이러한 전과에 대해 성경은 6절과 14절에서 두 번씩이나 동일하게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이기게 하시니라” 또 다른 반복구가 있는데 “조공을 드리니라.”(2) “조공을 바치니라.”(6)이다. 이것은 다윗의 이스라엘이 대영제국처럼 다른 나라를 정복해서 착취하고 압제하는 제국주의의 길을 갔다는 뜻이 아니다. 다윗이 이룬 육적 승리를 통해 성도와 교회가 경험해야 할 영적 승리를 표상하고 있다. 다윗을 통해 성도가 신앙의 길을 걸을 때 하나님은 이런 복을 주신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또 그런 복을 받는 자의 태도는 이러해야 한다는 것을 교훈하고 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그 메시지는 어떤 것인가?

    첫째, 약속을 믿으면 부끄러운 과거를 만회케 하신다.

    (삼하 8:1) 『(1) 이 후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쳐서 항복 받고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메덱암마를 빼앗으니라』

    ‘메덱 암마’는 블레셋의 수도였던 가드와 그에 종속되었던 네 성읍, 곧 가사, 아스돗, 아스글론, 에그론을 통칭하는 표현이다. 대상 18:1에서는 그래서 메덱 암마를 ‘가드와 그 동네’라고 기록했다. 이 기록으로 보아 다윗은 블레셋을 완전히 정복했다. 비유하자면 과거에는 블레셋을 다운시켰는데 이제는 블레셋을 아예 K.O시켜 버린 것이다. 그 결과 블레셋이 점유하던 전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이런 승리가 값진 이유는 다윗이 블레셋 가드에서 경험한 뼈아픈 과거 때문이다.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해 도망자 생활할 때 그는 블레셋의 도시 가드 땅에서 아기스 왕을 만나게 된다. 그때 침을 흘리며 미친 척하면서 위기 상황을 넘겼던 치욕의 과거가 있었다. 그런데 다윗은 그 가드에 항복을 받아냈다. 쉽지 않은 결과이다. 왜냐하면 사람에게 과거의 상처는 현재 극복 못하는 핸디캡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윗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나갔을 때 그 치욕의 역사를 만회한 것이다.

    이처럼 다윗이 블레셋의 도시들을 정복할 수 있었던 근원적 힘은 바로 그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붙들었기 때문이다.

    (삼하 7:27-28) 『(27)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의 종에게 알게 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집을 세우리라 하신고로 주의 종이 이 기도로 구할 마음이 생겼나이다 (28) 주 여호와여 오직 주는 하나님이시며 말씀이 참되시니이다 주께서 이 좋은 것으로 종에게 허락하셨사오니』

    이 약속의 말씀이 주어진 직후 다윗은 블레셋 사람들을 쳤다. 그래서 8장 1절에 ‘그 후에’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곧 다윗이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나가니까 블레셋의 도시들이 줄줄이 정복하게 되었고 그 결과 가드 땅에서의 부끄러운 과거를 씻어버리게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 신앙의 길을 가고 있는가? 성도님들 삶 속에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영적인 전쟁을 수행한 결과 나의 ‘메덱 암마’를 정복케 하시고 부끄러운 과거를 씻는 은혜를 주신다. 이런 복이 저와 성도들의 것이 되시기를 바란다.

    둘째,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승리의 열매를 주신다.

    (삼하 8:4) 『(4) 그 마병 일천칠백과 보병 이만을 사로잡고 병거 일백 승의 말만 남기고 그 외의 병거의 말은 다 발의 힘줄을 끊었더니』

    다윗은 소바 왕 하닷에셀에게서 탈취한 말 가운데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발의 힘줄을 끊었다. 똑같은 사건을 기록한 다른 성경을 보자. 역대상 18:3-4을 보면 그때 노획한 병거와 군사와 말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기록하고 있다.

    (대상 18:3-4) 『(3) 소바 왕 하닷에셀이 유브라데 강 가에서 자기 권세를 펴고자 하매 다윗이 저를 쳐서 하막까지 이르고 (4) 그 병거 일천 승과 기병 칠천과 보병 이만을 빼앗고 그 병거 일백 승의 말만 남기고 그 외의 병거의 말은 다 발의 힘줄을 끊었더니』

    다윗은 병거 일천 승, 기병 칠천, 보병 이만을 빼앗았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발견된다. 다윗은 빼앗은 병거 일천 승 가운데 일백 승의 말, 즉 10%만 남기고는 다 발의 힘줄을 끊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었는가? 왜냐하면 모세오경 가운데 한 권인 신명기에 이러한 말씀을 주셨기 때문이다.

    (신 17:16) 『왕 된 자는 말을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말을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말 것이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후에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이라 하셨음이며』

    모세의 율법에 이스라엘의 왕이 된 자는 말을 많이 두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었다. 말을 많이 두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해야지 자기 육신의 능력을 신뢰하지 말라는 뜻이다. 다윗은 신명기의 이 말씀을 기억하고 그대로 실천하고자 말 발목의 힘줄을 끊었던 것이다. 이런 다윗의 행동은 과거 사울왕의 행동과 비교하면 그가 얼마나 말씀에 순종하고 있는지 뚜렷해진다. 사울 왕은 어떠했는가?

    (삼상 15:18-19) 『[18] 또 왕을 길로 보내시며 이르시기를 가서 죄인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되 다 없어지기까지 치라 하셨거늘 [19]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의 악하게 여기시는 것을 행하였나이까』

    이처럼 사울왕의 마음은 탈취하는 일에 모아져 있고 말씀을 순종하는 일은 안중에도 없었다. 반면 다윗은 말의 발목 힘줄을 끊는 행위로 순종의 모습을 보였기에 하나님은 ‘다윗 언약’에 충실하셨던 것이다.

    구약 성경에서 다윗만큼 형통한 다른 한 사람이 있다. 여호수아 선지자이다. 그런데 형통만 같은 것이 아니라 형통의 이유도 똑같다. 그가 항상 승리한 비결이 어디에 있었는가?

    (수 1: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수 11:15) 『여호와께서 그 종 모세에게 명하신 것을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명하였고 여호수아는 그대로 행하여 여호와께서 무릇 모세에게 명하신 것을 하나도 행치 아니한 것이 없었더라』

    여호수아 역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의 명령을 받았고 그 명령대로 모든 것을 행했을 때 항상 승리하고 이길 수 있었다. 이런 사실에서 우리는 말씀에 대한 순종 여부가 항상 승리의 열매와 직결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2007년 3월 18일 서울국제마라톤 남자부 42.195㎞ 레이스에서 막판 1500여m를 남기고 대역전극을 펼치며 1위로 골인한 마라토너가 있다. 바로 이봉주 선수이다. 생애 35번째 풀코스를 완주이고 한국 역대 4위 기록이었다. 그런데 더 의미가 깊은 것은 그가 최근 3년간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해 ‘한물갔다’는 평가를 받던 터였고 38세의 나이는 마라톤 선수로는 환갑에 해당하던 때였다. 그런데 화려한 부활을 알리는 우승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이봉주 선수가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은 코치의 엄격한 지도를 순종했기 때문이다. 코치는 선수에게 시합이 가까워 오면 탄수화물을 피하고 고기만 먹인다. 한동안 고기만 먹이다가 시합 3,4일 전에 탄수화물을 같이 섭취시킨다. 그러면 몸에 축적되는 탄수화물의 양이 많아져서 레이스의 막판 스퍼트까지 끄떡 없이 달리게 된다고 한다. 이봉주 선수는 그 식사가 훈련보다 더 고통스럽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그런 고통을 인내하고 코치의 지도를 따랐기 때문에 우승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운동 선수가 코치의 엄격한 지도를 따라야 승리가 보장되듯이 신앙인은 인생의 코치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때 영적인 승리가 보장된다. 사울 왕처럼 세상의 것들을 취하려는 욕망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려는데 마음을 모으시는 성도가 되자. 거기에 축복의 열쇠가 있다.

    (요일 5: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셋째, 감사하는 자에게 더 큰 은혜를 주신다.

    (삼하 8:11-12) 『(11) 다윗 왕이 그것도 여호와께 드리되 저가 정복한 모든 나라에서 얻은 은금 (12) 곧 아람과 모압과 암몬 자손과 블레셋 사람과 아말렉에게서 얻은 것들과 소바 왕 르홉의 아들 하닷에셀에게서 노략한 것과 같이 드리니라』

    다윗은 정복한 나라로부터 조공을 받았다. 그것은 금 은 놋과 같은 귀금속들이었다. 다윗은 그것을 자기 사욕을 채우고자 받았는가? 그렇지 않다. 사울 왕은 전쟁에서 승리하면 탈취물로 자기의 기념비를 세우고 자랑거리로 삼는데 활용했다. 그러나 다윗은 달랐다. 그 물질을 여호와께 봉헌했다. 그래서 이렇게 드려진 금과 은과 놋이 나중에 그의 아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는데 재원으로 소용되었던 것이다.

    (대상 22:14-16) 『[14]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의 전을 위하여 금 십만 달란트와 은 일백만 달란트와 놋과 철을 그 중수를 셀 수 없을만큼 심히 많이 예비하였고 또 재목과 돌을 예비하였으나 너는 더할 것이며 [15] 또 공장이 네게 많이 있나니 곧 석수와 목수와 온갖 일에 익숙한 모든 사람이니라 [16] 금과 은과 놋과 철이 무수하니 너는 일어나 일하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실지로다』

    다윗은 이처럼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을 하나님께 봉헌했다. 그는 자기의 승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봉헌은 바로 그러한 믿음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윗의 그런 믿음에 대해 큰 복으로 다윗에게 내려주셨다. 곧 그 복의 후광이 아들 솔로몬에게까지 계승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성도가 하나님께 헌신의 삶을 살았을 때 하나님이 주시는 흔들리지 않는 복이 있다. 바로 부모의 신앙이 자녀들에게 유산으로 물려지는 것이다. 이 땅에서 이보다 값진 유산은 없다. 부디 이러한 복이 저와 성도들의 것이 되시기를 바란다.

    다윗 왕처럼 세상과의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시는 성도들이 되길 바란다. 언약을 믿고 나가서 과거의 부끄러움을 씻으시고, 말씀에 순종해서 승리의 열매를 수확하고, 감사함으로 복이 계승되게 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나라, 사랑과 공의의 원리가 지배하는 나라가 되는 기적의 목격자가 되시는 저와 성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