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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회 행사] 아동부 포인트 행사

    [교회 행사] 아동부 포인트 행사

    한 학기 동안 아이들의 웃음과 노력이 차곡차곡 쌓여, 아동부에 아주 특별한 하루가 찾아왔습니다.

    바로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동부 포인트 행사입니다.

    이 날은 아이들이 그동안 열심히 참여하며 모은 포인트를 직접 사용해 보고, 기쁨을 마음껏 누리는 축제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아동부들이 모은 포인트는 성경 통독, 예배 출석, 바른 예배 태도, 말씀 암송 등 아이들의 일상적인 신앙 활동 속에서 하나씩 쌓여 왔습니다. 매주 말씀을 읽고, 예배 자리를 지키며, 하나님 앞에 집중하려 애썼던 작은 실천들이 모여 포인트가 되었고, 그 결과가 이날 환한 미소로 돌아왔습니다. 아이들은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면 이런 기쁜이 있구나”를 몸으로 느끼며 성취감을 경험했습니다.

      

    이번 포인트 행사에서는 특히 다양한 음식이 준비되어 분위기를 더욱 즐겁게 만들었습니다. 테이블 위에 놓인 먹거리를 바라보며 어떤 것을 고를지 고민하는 아이들의 눈빛은 설렘으로 가득했고, 계산대 앞에서는 스스로 모은 포인트를 하나하나 확인하며 뿌듯해하는 모습이 이어졌습니다. 친구와 함께 나누어 먹으며 웃는 모습, 서로의 선택을 응원해 주는 장면들은 행사장을 따뜻한 에너지로 채웠습니다.

    무엇보다 이 시간이 더 의미 있었던 이유는, 아이들이 포인트의 숫자보다 그 과정의 즐거움을 더 소중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말씀 외우는 게 재미있었어요”, “예배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했어요” 라는 말 속에는 한 학기 동안 자라난 아이들의 믿음과 자신감이 담겨 있었습니다.

    아동부 포인트 행사는 아이들에게 즐거운 추억을 선물함과 동시에, 신앙 생활이 기쁨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려주는 시간이었습니다. 앞으로도 아이들이 웃음 속에서 믿음을 키워 갈 수 있도록 계속해서 함께 응원해 주세요. 한 학기 동안 수고한 모든 아이들과 이를 함께 도와주신 교사, 부모님 그리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글작성 : 박은우 형제

  • [교회 행사] 여름 세례식 – 새로운 믿음의 발걸음을 내딛다

    [교회 행사] 여름 세례식 – 새로운 믿음의 발걸음을 내딛다

     

    여름 세례식 – 새로운 믿음의 발걸음을 내딛다

     

     뜨거운 여름의 한가운데, 우리 청주 교회는 참으로 기쁜 소식을 함께 나누게 되었습니다. 바로 김우람(부), 조연교(모), 김재윤(첫째 아들), 김연지(둘째 딸) 가족이 같은 날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한 날에 이루어진 특별한 예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오랫동안 예비하신 은혜의 열매라 할 수 있습니다.

        

    세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세례를 통해 죄사함을 받았음을 확증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성례입니다. 이날 한 가족이 함께 세례를 받는 모습은,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우리 눈앞에 생생히 보여주는 장면이었습니다. 오랜 시간 기도하며 전도해 온 성도들의 눈시울과 가슴 속이 뜨거워진 것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이 가족은 결코 하루아침에 교회의 문을 두드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누군가의 인내 어린 기도와 정성, 지속적인 사랑의 손길이 있었기에 오늘의 결실을 맺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화려한 말이나 일시적인 감정이 아니었습니다. 오랜 시간에 걸친 교회의 섬김, 성도들의 따뜻한 교제,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결국 그 은혜가 이 가족을 주님의 품으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세례식 후에는 각 신도회별로 함께 교제를 나누는 시간이 이어졌습니다. 세례를 받은 가족을 축복하며, 신앙의 길에 함께 서겠다는 격려와 환영의 인사가 교회 안에 넘쳐났습니다. 함께 준비한 음식과 따뜻한 나눔 속에서, 교회가 단지 예배만 드리는 곳이 아니라 서로의 삶을 지지해 주는 공동체임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 여름 세례식은 우리 모두에게 믿음의 초심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한때 우리도 주님 앞에서 세례를 받고 새로운 길을 걷기 시작했음을 기억하고 이제 막 그 길을 걷기 시작한 새 가족을 위해 기도하며, 그들의 신앙 여정에 든든한 동행자가 되기를 다짐합니다.

     

     이 가족의 세례는 교회 전체의 기쁨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 확장의 소중한 사건입니다. 앞으로도 우리의 삶과 기도가 누군가의 영혼을 주님께로 이끌 수 있기를 소망하며, 이 여름의 은혜로운 순간을 마음에 깊이 새겨봅니다.

     

    글작성: 박은우 형제 

  • [신앙의 향기] 5주차 특별식 요리사는~?

    [신앙의 향기] 5주차 특별식 요리사는~?

    지난해 2024년부터 참예수교회 청주교회에서는 5주차 마다 특별식으로 저녁식사를 하고 있습니다. 

    사랑과 정성이 담긴 (어쩌면 땀방울 한스푼도 들어간) 맛있는 특별식을 만드는 요리사는 누구일까요??

    11월 5주차: 김밥 진짜 천국

     

     

    3월 5주차: 아빠손 떡볶이 튀김

     

    8월 5주차: 일본 여행? 메밀국수 오꼬노미야끼

     

    무슨 일에든 발 벗고 섬겨주시는 아빠들 여호수아 신도회의 솜씨랍니다~ 

    5주차 특별식만 손꼽아 기다리는 성도가 있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소문난 맛집~

    하나님께서 흠향하시기에 참으로 향기로운 신앙의 향기가 아닐까요?

     

    글작성: 김예영 자매 

  • [성도 간증] 변화와 성장의 의지를 품고 실천하는 신앙인이 되길_김진명 형제

    [성도 간증] 변화와 성장의 의지를 품고 실천하는 신앙인이 되길_김진명 형제

    할렐루야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증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대학부 영은회를 무사히 마치게 해 주시고 간증을 할 수 있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번 영은회를 준비하면서 받은 은혜와 영은회를 참가하며 받은 은혜에 대해 나누고자 합니다.

    이번 영은회는 그냥 참석할 때와 달리 저에게 맡겨진 일이 있었는데요. 바로 찬양 인도였습니다. 제가 편안하게 느끼는 청주 교회에서도 찬양 인도를 할 때는 떨리는데요. 익숙하지 않은 대전 교회에서 그리고 청주 교회에서 보다 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선 다는 것을 생각만 해도 떨리게 되었습니다. 찬양 인도를 준비하게 되면 저의 옆에서 함께 찬양할 싱어들과 반주자 그리고 ppt를 넘겨줄 사람을 구하게 됩니다. 이를 위해 기도하고 청주 교회 대학부들에게 이 역할을 맡아줄 수 있냐고 물었습니다. 청주 교회 대학부들은 싫다는 말 없이 알겠다는 답변으로 즉각 순종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동역자를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했고 부담이 될 수 있지만 순종하여 준 청주교회 대학부에게 고마웠습니다. 이제는 멘트와 찬양할 곡들을 정해야 하는 순서였습니다. 이번 영은회는 {너희는 내게 거룩할지어다}를 주제로 성막과 제사 그리고 제사장에 대한 말씀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주제와 관련된 멘트와 찬양을 준비하기 위해 기도를 하고 생각 중에 있었습니다. 말할 멘트와 찬양할 곡들이 바로바로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생각만 하다가 대학부 영은회에서만 하는 사전 교재를 하며 세한 목자님께서 성막에 대한 설교를 하신 것이 생각났습니다. 세한 목자님께서 올려주신 자료와 설교를 참고하며 사전교재를 하였고 묵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한 묵상이 저의 멘트가 되었고 찬양할 곡들을 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멘트와 찬양할 곡들을 정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멘트와 곡을 정했다면 이제는 연습할 차례였습니다. 연습을 할 때에 대학부들은 자신이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저의 부족한 점을 채워주며 찬양 연습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동역자들을 보내주신 하나님께 한 번 더 감사하였습니다. 이제 진짜 찬양 인도할 일만 남았습니다. 저의 또래 친구들이 제가 찬양한다는 것을 듣고 제에게 와서 격려의 말과 긴장을 풀어주는 말을 해주었습니다. 그 말들 중에 ‘그냥 하나님께 찬양하면 된다’ 라는 말이 기억에 남았습니다. 연약한 저는 하나님께 찬양드린다는 것에 집중하기보다 사람들 앞에 선다는 것에 더 집중했던 것이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다른 것에 신경 쓰지 않고 하나님만을 찬양할 수 있게 해 주세요.” 라고 기도를 하고 찬양 인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동역자들의 기도와 저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제가 긴장하기보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순종하고 맡았을 때 부족한 저를 도와주시는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었고 아주 감사한 경험이었습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앞으로도 맡겨진 일에 즉각 순종하는 제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이번 대학부 영은회는 저의 두 번째 대학부 영은회였습니다. 첫 번째 대학부 영은회는 적응하느라 꽤나 고생을 했지만 이번 영은회는 쉽게 적응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이번 영은회 주제는 거룩이었습니다. 개회 예배 때 거룩은 구별된 것이라고 말씀을 하시며 세상을 쫓는 것이 아닌 하나님 말씀을 쫓고 추구해야 거룩을 지킬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개회 예배를 들음 이번 영은회는 저에게 필요한 말씀을 주실 것이라 생각을 하며 열심히 들어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강의를 들으며 목자님께서 강조하신 것은 예배에 대한 인식의 변화였습니다. 그렇기에 저의 변화된 예배에 대한 인식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원래 저의 예배에 대한 인식은 하나님 말씀을 듣는 시간이라고만 생각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말씀을 들을 뿐만 아니라 참된 예배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이고, 그 안에서 우리는 변화되고 새로워져서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아가는 시간이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표현이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감사의 표현을 할 수 있도록 해주시지 않았다면 인간인 저희는 세상 사람들이 우상을 대하듯이 하나님을 대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방법으로 하나님께 감사드리고자 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변화된 인식은 삶이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평소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만 의식하고 삶을 통해 하나님을 경배하지 못했기에 반성이 되었습니다. 번제는 전부를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입니다. 저의 일부만 드리는 것이 아닌 저의 모든 삶을 드릴 수 있는 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다음으로 제사장에 대해 배우게 되었습니다. 제사장의 역할 중 하나는 정결의 여부를 판단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세상에서 구별하기보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는 생각을 가지며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이번 영은회를 통해 제가 듣는 것과 보는 것을 구별하여 거룩을 잃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제사장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하는 특권을 가지게 됩니다. 하지만 저는 하나님께서 저를 불러주심으로써 세상에서 구별하시고 감사를 표현하는 방법까지 알려주셨지만 그것에 비해 저는 하나님께 너무 소홀하다고 느꼈고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는 이 특권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저와 성도님들 되기를 소망합니다.

    다음으로는 성막에 대해 배우게 되었습니다. 목자님께서는 집을 보면 그 집에 사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듯이 성막을 통해 하나님에 대하여 알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성막은 다들 아시는 것처럼 거룩한 곳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신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막을 중심으로 성막 가까이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하늘나라의 백성인 저희도 성막을 중심으로 한 예배의 삶을 드려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대학교를 천안에 가게 되면서 천안 교회 생활관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저는 청주에서 살고 싶었기에 천안에서 살게 된 것에 아쉬워하였습니다. 하지만 성막에 대해 배우고 성막을 중심으로 한 예배의 삶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며 천안 교회 생활관에서 사는 것은 축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생활관에서는 비슷한 나이에 형제들끼리 서로 부족한 점을 채워주고 연약한 부분을 도와주는 좋은 점이 있었고 서로 도와주고 배려하며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었다는 것에 감사하였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아쉽다고 여겨졌던 것이 이렇게 변화하였습니다. 천안으로 인도하여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성막을 중심으로 한 예배의 삶을 살아가는 저와 성도님들 되기를 소망합니다.

    강의를 듣고 조별 학습 시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조별 학습 시간에는 서로의 묵상을 나눕니다. 묵상을 나눌 때 고민을 말하기도 하는데요. 이때 말씀으로 답변해 주고 고민을 해결하며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이렇게 서로 교제하고 말씀을 나눌 수 있도록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영은회를 갔다 온 후 저녁 예배 설교 때 목자님께서는 영적 장애가 치유되기 위해 변화와 성장의 의지를 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번 영은회를 통해 배우고 느낀고 다짐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닌 변화와 성장의 의지를 품고 실천해야겠습니다. 사실 저는 영은회를 갔다 온 후 피곤하다는 이유로 잠을 자는 시간이 늘었고 게을러지게 된 것 같습니다. 이번 간증을 기회 삼아서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다짐함으로써 더욱 성장하는 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 모든 영광 하나님께 돌리며 간증 마치겠습니다.

     

    글작성 : 김진명 형제 

  • [복음 메세지]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눅 16:19-31)

    [복음 메세지]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눅 16:19-31)

    [말씀 제목]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눅 16:19-31)

    [설교자] 김세한 목자

    [설교일] 2025.08.16

    간혹 매스컴을 통해 접하는 소식에 의하면 죽음에서 부활한 사람들이 있다. 소위 임사체험을 한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의 진술을 살펴보면 부활한 후 몇 가지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는 매우 강렬한 빛을 목격했다고 진술한다. 그 빛에 따뜻하고 평화로운 느낌이었다고 한다. 둘째는 죽는 순간 길고 좁은 터널 같은 곳을 빠르게 통과하는 느낌을 받는다고 한다. 셋째 부활한 이후 사랑과 용서에 대한 말을 하는 사람이 많다. 과거의 삶을 되돌아보며 상처와 과오에 대해 이야기 한다는 것이다. 넷째, 삶과 죽음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가지게 된다고 한다. 더욱이 죽음 이후의 세계가 있음을 인정하고 그에 대해 말한다는 것이다. 다섯째,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적어지고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된다고 한다.

    하나 더하기 하나가 둘이라는 셈법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무조건 받아들여야 하는 산수의 기본 전제이다. 그 전제를 받아들일 때 비로소 이차방정식, 삼차방정식의 수학 문제를 다루는 것이 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신앙에도 우리가 기본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전제가 있다. 그 신앙의 기본전제 가운데 하나가 바로 내세의 존재이다. 즉 사람이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내세가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만약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신앙생활 한다면 그것은 마치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다. 미래 언젠가는 무너져 내릴 위험이 있다.

    (히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오늘 이 자리에 성도님들은 내세에 대해서 어떤 이해와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만약 우리가 그 미래를 확신한다면 오늘날 우리는 어떤 신앙생활을 해야 마땅할까? 오늘은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통해서 그 교훈에 대해 함께 생각하고 은혜를 나누는 시간을 가지고자 한다.

    오늘 본문에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이 비유가 전달하고 있는 내용은 매우 간단명료하다. 사람이 죽으면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내세가 있어서 사람이 다른 형태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죽어서 좋은 곳에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모두가 행복하고 또 그것이 영원히 지속된다면 정말 좋을 것 같다. 그러나 성경의 목소리는 그렇지 않다. 어떤 사람은 천국에 이르지만 다른 사람은 지옥에 이르러 영원한 고통의 자리에 속하게 된다는 것이다. 성경은 이것을 일관되게 이야기하고 있다. 이 목소리를 변경한 적이 없다. 그렇다면 성도는 그 상황에 대해서 보다 자세히 알 필요가 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것을 알기를 원하신다. 예수님이 부자와 나사로 비유를 통해서 전달하시는 교훈은 이런 것이다.

    첫째, 죽음 이후에는 반드시 두 개의 세계가 존재한다.

    (요 5: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불신자들은 하나님의 존재도 믿지 않듯이 내세의 존재도 믿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다면 내세의 존재도 믿어야 한다. 천국의 존재도 믿고 지옥의 존재도 믿어야 한다. 이 둘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분리할 수 없다. 어떤 불신자들은 내세를 믿지 않는다. 그 심리적인 이유는 천국의 존재를 인정하기보다 지옥의 존재를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천국 갈 자신은 없다. 그렇다고 지옥에 갈 것을 상상하면 끔찍하다. 그래서 죽으면 끝이지 천국과 지옥 같은 것이 어디 있느냐고 생각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세의 존재를 믿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듯이 천국과 지옥의 교리에 부인하는 나름의 논리로 반박한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이렇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지옥을 만들어서 사람들이 고통에 처하게 하십니까? 사랑의 하나님이라면 그것은 모순입니다.” 이처럼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표현과 지옥의 교리를 대조시키면서 마치 기독교가 모순된 종교라고 반박하며 부정한다. 그러나 이런 반문은 사실 성경에 대해서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생각이다.

    지옥은 사실 하나님이 마귀를 벌주기 위해서 만든 것이지 인간을 벌주기 위해서 만든 곳이 아니다. 다만 인간이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마귀의 길을 따르면 결국 마귀와 함께 지옥에 가게 되는 것이다. 이 선택에 대해서는 결코 하나님의 책임이 아니다. 마귀의 길을 따르기로 선택한 인간 자신의 책임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현실은 어떠한가? 세상에는 선한 사람만 존재하지 않는다. 악한 사람도 존재한다. 그래서 악인이 때로 선한 사람에게 손해를 끼치기도 하고 심지어 목숨까지 빼앗기도 한다. 이 세상에 그런 악인이 존재하고 선인의 억울한 일을 당하는 상황이 존재기에 우리는 마음속으로 악인에 대해서 뭔가 응징의 조치가 마땅히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선인에 대해서도 무엇인가 보상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임마누엘 칸트’라는 철학자가 말했다. “천국과 지옥은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부조리와 불공평으로 가득 찬 이 세상을 발견할 때마다 이것을 생각하게 된다. 형통해야 할 사람이 잘못되고 잘못되어야 할 사람이 오히려 형통하는 이런 부조리 때문에라도 천국과 지옥은 반드시 있어야한다”라고 말했다.

    나치 독일의 히틀러라는 미치광이 하나 때문에 수백 만 명의 죄없는 사람이 포로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어야 했다. 만약 내세가 없다면 이런 악인의 횡포에 대해서, 세상의 불의에 대해서 어떻게 그 억울함과 원통함을 해소할 수 있겠는가?이런 질문이다. 이 철학자의 눈에도 세상은 부조리와 불합리로 가득 찬 곳이며 그 부조리와 모순이 해소되려면 반드시 죽음 이후의 내세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칸트’라는 철학자뿐만 아니라 성경의 시편 기자의 노래 속에도 이 세상의 현실에 대해 동일하게 서술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시 73:3-6) 『[3]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4]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5]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6] 그러므로 교만이 저희 목걸이요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며』

    시편 기자는 철학자 ‘칸트’와 마찬가지로 악인이 형통한 현실에 대해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다. 이처럼 의인이 악인에게 해를 입는 사례는 이미 창세기부터 있었다. 아담의 장남 가인이 차남 아벨을 살해했다. 그런데 아벨이 죽음 이후 그 억울함이 어떻게 해소되었다는 기록이 없다. 성경은 이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이사야 예레미야 같은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순교했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의 죽음 이후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세례 요한은 입바른 소리 하다가 헤롯왕에게 참수형 당했다. 그러나 그의 죽음 이후에 어찌되었는지 성경은 침묵하고 있다. 그 외에도 얼마나 많은 성경의 인물들이 억울하게 죽었는지 모른다. 만약 천국과 지옥이 없다면 그 무수한 피해자들은 어떻게 억울함을 풀고 그에 대한 보상받을 수 있을까?

    이처럼 세상의 역사를 보아도, 성경의 역사를 보아도 우리가 사는 세상은 아름답지만은 않다. 악인이 의인을 가해하는 부조리한 상황이 비일비재하다. 여러들은 이런 사실에 대해서 어떤 견해를 가지고 계신가? 만약 내세가 없다면, 만약 천국과 지옥이 없다면 이런 상황을 해소할 방법이 없다. 그래서 지옥은 존재할 수밖에 없다.

    (마 25: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따라서 성도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다면 성경을 믿어야 하고 성경을 믿으면 성경이 말하는 내세의 존재도 믿어야 한다. 그래야 천국을 소망할 수 있고 또 지옥의 형벌을 두려워할 수 있다. 또 다른 영혼들이 그 영원한 형벌에 처하지 않도록 전도할 수 있다. 성도가 천국보다 왜 세상에 몰두하며 살아가는가? 이 기초 신앙이 굳건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도가 왜 가족 친척 전도하는데 미온적인지 아시는가? 내세에 대한 이 신앙이 약하기 때문이다. 부디 죽음 이후에 이 두 세계가 있다는 성경의 선언을 믿으시고 영원한 천국을 준비하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길 원한다.

    둘째, 이생과 내세의 삶은 크게 역전될 수 있다.

    (눅 16:25)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이 비유에서는 천국과 지옥의 존재뿐만 아니라 부자와 나사로의 인생이 대조되고 있다. 부자는 이생에서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했고 나사로는 상처가 난 곳을 개가 와서 핥을 만큼 생활이 비참했다. 그런데 죽음 이후 이들의 처지가 완전히 역전된다. 부자는 음부의 고통을 당하고 있고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이생과 내세는 전혀 다른 처지로 역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오해하지 않아야 할 점은 부자는 부요하기 때문에 불구덩이 떨어지고 반면 나사로는 가난하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것이 아니다. 니고데모처럼 물질이 풍족해도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있고 오히려 빈궁해도 마음이 교만하고 탐욕스러운 사람도 있다.

    부자는 음부의 고통에 있다고 했는데 여기서 음부는 어떤 곳인가? 음부는 헬라어로 ‘하데스’라고 하는데 이는 죽은 자가 거하는 임시 거처를 가리킨다. 이 음부에 대기하고 있다가 마지막 심판을 받고 지옥에 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음부는 지옥 이전의 임시 체류 장소로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지옥이란 뜻의 헬라어는 ‘게헨나’라고 하는데 이는 ‘힌놈의 골짜기’란 뜻이다. 음부와 지옥은 어휘상 달리 표현되지만 여기서는 같은 의미로 다루겠다. 지옥으로 번역된 게헨나는 예루살렘 동남쪽에 있는 실존 지명이다. 이 장소에 얽힌 역사적인 배경이 있다. 과거 구약시대에 우상 숭배자들은 이곳에서 인신 제사를 드렸다. 그래서 어린 아이를 불태워 우상에게 바쳤던 것이다. 그 후 유대인들은 이 저주스러운 장소에 쓰레기를 가져다 버렸다. 그리고 쓰레기들을 태우기 위해 항상 불을 피워놓았다. 그래서 꺼지지 않고 계속 불이 타오르는 곳이 바로 게헨나이다. 주님은 바로 이 게헨나를 지옥으로 말씀하고 있다.

    (막 9:48)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그래서 한마디로 지옥이란 어떤 곳이냐 바로 꺼지지 않고 항상 불이 붙어 있는 영적 쓰레기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생에서 잠시 동안 아무리 떵떵거리게 산들 저생에서 영원히 고통의 게헨나에 간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또 이생에서 아무리 고통을 받을지라도 저생에서 영원한 안식과 평안을 누릴 수 있다면 이 고통이 뭐 그리 대단한 것이겠는가? 주목할 점은 그 처지가 한 번 정해지면 바뀔 수 없고 영원히 지속된다는 것이다.

    부디 여러분들은 잠시 잠깐의 이생의 행복이나 고통보다 영원히 지속되는 내세에서의 행복과 고통에 더 큰 관심을 두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기원한다.

    셋째, 기억되는 이름과 망각되는 이름이 있다.

    (계 3: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오늘 본문에 부요한 사람은 성도 이름도 기록되지 않고 다만 부자라고 기록했다. 반면에 거지는 ‘나사로’라고 분명히 그 이름을 기록하고 있다. ‘나사로’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의 도우심’이란 뜻이다. 그 이름의 뜻으로 미루어 보건대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소망하며 살아간 신앙인이 아닌가 추측된다.

    이처럼 사람은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이름이 있고 기억하지 않으시는 이름이 있다. 이 사실을 잘 설명하는 성경의 기록이 있다.

    (계 20: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계 21:27)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

    성도는 믿고 세례를 받은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하신다. 말하자면 한국에서는 아기가 태어나면 그 이름이 주민등록부에 등재되듯이 사람은 세례를 받을 때 다시 태어나게 되고 그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미국 시민권이나 스웨덴 같은 복지국가의 시민권을 얻고자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그것이 있으면 육신의 혜택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늘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천국의 시민권은 이 땅의 어떤 시민권과 비교할 수 없다. 비록 이 땅에서 부자와 같이 호화롭고 평안한 생활은 못해도, 티브이에 나오는 유명인사는 못돼도, 가난하고 불편하게 살아도, 질병과 장애를 안고 힘겹게 살아가도 하나님은 우리의 이름을 기억하시고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실 미래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도는 잠깐이면 사라질 이 땅에 이름을 새겨지는 것보다 하늘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신앙을 갖는 저와 성도님들이 다 되기를 바란다.

    넷째, 이생은 내세를 준비하는 유일한 기회이다.

    (눅 16: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나사로를 살려서 돌려보내면 제 아들들이 믿지 않을까요?” 하고 질문한다. 이에 대해 아브라함은 “모세와 선지자들의 음성을 듣지 않으면 죽었다 살아난 자가 있어도 듣지 않을 것이다.”라고 대답한다. 이 대답으로 보건대 이 땅에서의 삶의 기간은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기를 준비하는 유일한 기회임을 알 수 있다. 죽으면 그 기회는 다시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태평양 어느 섬나라에 오랫동안 내려오는 풍습이 있었다. 그 풍습은 표류한 이방인을 일 년 동안 왕으로 모시다가 그 후 무인도로 추방해서 죽게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곳에 표류해서 왕위에 오른 일 년 동안 온갖 보물을 모아서 자기 집에 채우며 행복하게 생활했다. 그러나 일 년 후 보물은 내려놓고 무인도로 추방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곧 죽었다. 두 번째 사람이 그 섬에 표류했다. 그도 왕으로 추대되어서 일년 간 섬의 온갖 맛있는 음식을 즐기며 좋은 의복을 만들어 입었다. 그리고 일 년이 지나자 그도 무인도로 추방되어 죽었다. 그런데 세 번째 사람이 그 섬에 표류했다. 그는 도착 후 앞서 간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왕이 되자 섬의 백성들에게 명령했다. “저 무인도에 우물을 파고 나무를 심고 밭을 갈고 집을 지어라.” 섬의 백성들은 왕의 명령대로 모두 행했다. 그리고 일 년이 지날 무렵 무인도는 비옥한 곳으로 바뀌어 있었다. 결국 이 사람은 무인도에 추방되었지만 잘 가꾸어진 그 무인도에서 계속 행복하게 살았다.

    이처럼 이 땅에서의 삶은 화살과 같고 유수와 같다. 그 짧은 일생 동안 죽음 이후의 삶을 준비해야 한다. 부디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믿음의 기초를 확실히 세우자. 죽음 이후 우리에게 임할 그 때를 준비하자. 이 땅을 사는 동안 내가 거할 하늘 집을 위해서 열심히 땀 흘리며 준비할 뿐만 아니라 지옥을 향해 나아가는 다른 영혼을 구원하고 미래에 모두 함께 영원한 천국에서 영원한 복락을 누리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길 예수 이름으로 기원한다.

     

    글작성 : 김세한 목자

  • [신앙의 향기]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향기를 품은 교회교육 선생님들

    [신앙의 향기]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향기를 품은 교회교육 선생님들

    5월 15일 스승의 날을 맞이하여 교회교육에서 열심으로 애써주시는 선생님들에 대한 감사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새내기 대학생인 예비 교사를 포함한 열 분의 선생님들과 교회교육 시간에 방송을 담당해 주시는 김성민형제님까지

    모두 그간의 노고와 앞으로의 사역을 위해 감사하며 축하했습니다.

    아이들의 영혼을 사랑하고 자신들의 시간을 기꺼이 내어 쓰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품은 우리 선생님들 정말 멋있죠?  

    참예수교회의 아이들은 우리 신앙의 미래이며 선생님들은 그 미래들의 안내자입니다. 

    말씀 속에서 아이들을 잘 인도할 수 있도록 우리 성도님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기도 부탁드립니다.

     

    글작성 : 김예영 자매

  • [성도 간증] 순종의 예스맨_배태준 형제

    할렐루야~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단기신학 간증하겠습니다.

    먼저 단기신학을 무사히 다녀올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단기신학은 총 3년차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저는 이번에 1년차 과정을 신청해서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문득 제가 1년차를 처음 들었던 때를 떠올려보니 5년 전 2020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그때는 단기 신학에서 제일 막내였는데, 어느덧 단기신학에서 나이가 많은 OB쪽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시간이 흘렀어도 단기신학을 통해서 받는 은혜와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큰 것 같습니다.

     

    단기신학에서 받은 은혜와 기쁨을 몇 가지로 나누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교제의 기쁨과 은혜를 받았습니다. 단기신학은 약 2주간의 시간 동안 이루어집니다. 그러다 보니 2주 동안 함께 단기신학을 하는 단기신학생님들 모두의 얼굴을 계속해서 보면서 함께 말씀을 듣고, 함께 찬양하고, 함께 기도하는 시간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이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평소에 살아가는 삶의 자리에서는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 공간에서 2주 동안의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그 자체로 큰 기쁨과 위로와 은혜가 되었습니다. 또한 다른 단기신학생님들께서 하나님 말씀 배우기에 열심을 내고, 온몸과 마음으로 찬양드리고, 힘을 내어 기도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제 스스로의 신앙을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단기신학에 모인 신학생님들의 모습에서 제자도를 정말 충실히 걷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모습과 예수님을 닮아가고자 하는 모습이 보이면서 제 스스로가 부끄럽게 생각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저 또한 조금이라도 더 성장하기 위해서 발버둥치면서 열심히 강의를 듣고 생활했던 것 같습니다.

     

    단기신학에 가는 목적은 결국에 무엇이지요? 물론 다른 신학생님들과 교제하는 시간도 좋고 빼놓을 수 없는 은혜의 시간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할 수 있는 말씀의 은혜와 기쁨이 아니겠습니까? 두 번째로 간증하고자 하는 것은 말씀을 통한 기쁨과 은혜입니다. 1년 차 때 배우는 과목들은, 3년차도 물론 정규와 비교한다고 하면 개론서의 개론의 개론도 안되겠지만, 특히나 1년차는 더욱 개론적인 성격이 강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핑계를 대자면 5년 전에 들어서 그런지 모든 것이 새롭게 느껴졌습니다. 이제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평소에 설교를 듣거나 말씀을 묵상할 때도 느끼는 것이지만, 정말 제가 하나님 말씀에 무지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사실 그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했는데 제 스스로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정말 무지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런 깨달음을 얻은 것도 하나님의 은혜인 것 같습니다.

    제가 학생부 영은회 교사를 준비하다보니 자연스레 족장시대 인물들에 대한 말씀이 더욱 기억에 남는 것 같습니다. 족장 시대 인물들은 모두 개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는데요. 그들의 공통점을 찾아보자면 모두 미숙한 모습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신앙의 길을 포기 하지 않고 끝까지 걸어갈 때 하나님께서 이들을 성숙한 사람으로 만들어주셨고, 히브리서를 살펴보면 미숙한 모습이 아니라 이런 성숙한 모습을 기억하여 주심을 알 수 있습니다. 저도 제 부족함과 미성숙함에 자꾸만 눈길이 가서 신앙의 길을 걸어갈 때 많은 두려움과 주저함이 있었던 것 같은데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도록 격려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개성 넘치는 족장시대 인물들의 신앙의 길이 결국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을 찾아가는 행복의 길임을 알게 되었을 때, 제가 걷고 있는 이 길이 너무나 더욱 감사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이 외에도 신약개론, 구약개론, 사복음서, 민수기, 여호수아, 레위기, 창세기 등을 배우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할 수 있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기쁨을 나누고자 합니다. 말씀을 들었으면 실천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단기신학 중에 목자님께서 “단기 신학생들이 올해는 예스맨이 되었으면 좋겠다”라는 말씀을 하신 적 있습니다. 제가 단기신학을 마치고 본가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금요일 저녁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예배를 드려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안동교회에 가니까 어머니께서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태준아, 오늘 기도회다.” 그래서 저는 “아 그래요? 알겠습니다.”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그냥 오늘 어떤 예배를 드리는지 말씀해주시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자 어머니께서 “그래서 오늘 네가 기도회를 인도해야 한다.” 제가 무엇이라 답했을까요? “예 알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단기신학 때 배웠던 말씀들을 떠올리면서 기도하고, 비록 재탕이지만 단기신학 때 했던 기도회 인도 내용을 가지고 기도회를 인도했습니다. 그리고 기도회가 끝나자 어머니가 또 말씀하시더군요. “태준아, 내일 찬양 인도할 사람이 없다. 오전과 오후 둘 다 준비해 놓아라” 제가 또 무엇이라 답했을까요? “예, 알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순종의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단기신학을 통해서 정말 많은 기쁨과 은혜를 받았던 것 같습니다. 부족함 많은 이런 저를 사랑해주시고, 이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간증할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과 감사돌리며 이상으로 간증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글작성 : 배태준 형제

  • [교회 행사] 2025 봄 영은회를 마치며

    [교회 행사] 2025 봄 영은회를 마치며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 이는 능력이 예수께로 나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러라(눅 6:19)”

    이번 청주교회에서는 5월 22일(목)부터 24일(토)까지 봄 영은전도대회가 열렸습니다. 강사님으로는 현재 전주교회에 목회를 맡고 계신 유바나바 목자님께서 ‘우리 구주! 예수님 만나기를 힘쓰라!’라는 주제로 말씀을 증거해 주셨습니다.

     

    예수님 만나 평안을 찾은 사람(마5:25-34), 예수님 만나 만족을 얻은 사람(요4:5-18), 예수님 만나 두려움을 극복한 사람(막4:35-41), 예수님 만나 칭찬받은 사람(마8:5-13)이란 제목의 말씀을 들었고 깨달음과 은혜를 받았습니다.

    영은회 마지막 날은 성찬례와 세족례가 있었습니다. 지난 5월 11일에 세례를 받으신 장한옥 자매님의 세족례가 진행되었는데 모든 성도님들의 축복 속에서 한 영혼이 예수님과 상관을 맺는 은혜를 함께 누렸습니다. 또 성찬례 시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참예하여 주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후 진행된 오후 예배와 저녁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마지막 기도를 하던 중 한 형제님이 성령을 받으셨습니다. 성령을 받은 형제님을 다 함께 축하하고 그 기쁨을 함께 나누며 주님의 은혜를 찬양했습니다.

    또한, 이번 영은회에도 하나님께서는 귀한 영혼들을 보내주셨습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그들 속에 심어진 하나님의 씨앗이 자라 언젠가 그 발걸음이 다시 예수님께로 돌아올 수 있길 소망합니다. 영은회는 마무리가 되었지만 주신 말씀을 기억하고 실천한다면 우리 속에 은혜와 감동은 계속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히 4:12)”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 1:8)”

    영은회의 시작과 끝을 함께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이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립니다. 할렐루야!

     

    글작성 : 박은우 형제

  • [성도 소개] “아빠도 성령 받았다!!!” 장치성 형제님을 소개합니다.

    [성도 소개] “아빠도 성령 받았다!!!” 장치성 형제님을 소개합니다.

    할렐루야! 높으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청주 참예수교회 장치성 형제님은 22년 5월 세례를 받은 지 3년만인 이번 봄 영은회 마지막 날에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날의 생생함을 담은 장치성 형제님의 간증을 성도 여러분들과 나누고자 합니다.

     

    할렐루야! 안녕하세요, 저의 가정은 아내(김연숙자매)와 큰 딸(장아영), 둘째 딸(장아윤), 저 순으로 세례를 받고 참예수교회에서 함께 기쁨으로 신앙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출석하고 말씀을 배울수록 가족이 한 믿음 안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첫째 딸은 올해 아동부 영은회때 먼저 성령을 받았습니다. 주님께 너무 감사했으며 열심히 간구했을 딸이 자랑스러우면서도 아직 성령을 받지 못한 저에게 아주 살짝 자극이 되긴 했습니다.

    그래도 제 나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언젠가 저에게도 성령을 주실거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더욱더 기도에 집중할 수 있었고, 드디어 이번 봄영은회에서 성령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매일 아침 출근 전에 단 몇 분이라도 기도를 했었습니다. 그렇게 아침마다 기도를 하면서 가끔 몸이 떨리고 혀가 꼬이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었지만, 그럴수록 더욱더 “이건 아닐꺼야~~아니야~~기도를 장난식으로하면 안되지~!! ” 부정을 하면서, 더욱더 분명하고 천천히~ “할! 렐! 루! 야!”를 외치고 기도를 멈췄습니다. 저는 제가 아직 성령을 받기에는 부족하다고 느꼈기에,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고 그냥 저의 생각으로 부정하고 거부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몰랐는데, 저의 기도 소리를 아내인 연숙자매가 계속 듣고 있었더라고요. 그러면서 기도 소리가 이상했는지, 이번 영은회 때 목자님께 안수 기도를 부탁했다고 했습니다.

     

    오후 예배 후 안수를 받고, 김세한 목자님께서는 성령의 감동이 있으니 조금 더 간절히 기도하면 성령을 받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아직 잘 모르겠는데요”라고 말씀을 드리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빨리 받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영은회 기간내내 몸살로 몸이 안 좋았고, 마지막 날은 앉아있는것 조차 힘들 정도로 온몸이 쑤시고, 열도 나서 빨리 저녁 예배를 마치고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저녁 예배를 마쳤을 때, 원래는 계획에 없었던 것 같은데 안수 기도를 한다고 하더라구요~ 저를 위해 기도시간을 마련해 주신 것 같아 감사했습니다. 오후에 목자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조금 더 노력하면 성령을 받을 수 있다고 하셨기에, 몸은 힘들었지만 기쁜 마음으로 안수를 받으러 나갔습니다.

    그렇게 앉아있기도 힘들 정도로 아픈 몸이었지만, 무릎을 꿇고 기도 하는데 평안함이 느껴졌습니다. 평안함을 느끼면서 평소에는 몇분만 기도를 해도 다리가 많이 아팠는데 몸이 공중으로 붕~~ 뜨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제 입에서는 저의 의지와 상관없는 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예전 집에서 기도할 때처럼 기도를 멈출 수도 있었지만, 오늘은 그냥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에 맡기면서 기도를 마쳤습니다. 눈가에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조금 맺혀 있었고 자리로 돌아와 앉자 목자님께서 제가 성령을 받았다고 선포해주셨습니다. 기쁜 감정도 있었으나, 좀 얼떨떨하고 정말 내가 성령을 받은 건지 의심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연숙자매한테 얘기를 했더니 목자님 두 분이 맞다고 하면 틀림없는 거니깐 의심하지 말고 더 열심히 기도하라고 얘기해 주더라고요.

    모든 성도님들이 자기 일들처럼 기뻐해 주시고 환호해 주셔서 너무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의심하기 보다는 성령 충만을 위해 기도에 더 집중하자는 생각으로 집에 와서 기도 시간에 더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매일 아침의 일상도 조금 변했습니다. 예전에는 저의 일정에 시간을 조금 내서 기도를 했다면, 이제는 기도 시간에 저의 일정을 맞추고 있습니다. 지금보다 더 성령 충만할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저에게도 이런 축복과 은혜와 사랑을 주신 주님께 감사드리며, 주님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는 성도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주님께 감사드리며 간증 마치겠습니다.

    (성령 받은 장치성 형제님을 축하하는 여호수아 신도회 형제님들)

     

    글작성 : 장치성 형제

  • [복음 메세지]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마6:13-16)

    [복음 메세지]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마6:13-16)

    [말씀 제목]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마6:13-16)

    [설교자] 김세한 목자

    [설교일] 2025년4월 5일

    스티븐슨이란 작가의 “지킬박사와 하이드씨”라는 소설이 있다. 소설의 내용은 이렇다. 한 마을에 천사 같은 마음의 지킬 박사와 난폭한 성품의 하이드씨가 살고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밤마다 그 마을에 무서운 범죄가 발생하는데 그것은 살인, 방화, 절도, 유괴와 같은 강력 범죄 사건들이었다. 경찰이 범인을 잡으려고 노리는 가운데 어느 날 다시 칼경이라는 유명한 인물이 지팡이에 맞고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경찰은 범행 도구인 지팡이를 단서로 용의자를 추적한 결과 그 지팡이 임자가 바로 지킬 박사임을 알게 된다. 그래서 박사의 집 문을 부수고 들어갔더니 놀랍게도 지킬 박사의 옷을 입은 하이드씨가 자살해 죽어 있더라는 것이다. 결국 천사같은 지킬 박사와 악마 같은 하이드씨는 다른 인물이 아닌 동일인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이 소설 이야기가 명작으로 세인들에게 찬사를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한 인간의 내면에 선한 모습과 악한 모습이 공존하고 있다는 점을 잘 지적했기 때문이다. 이 작가가 지적했듯이 모든 사람은 누구나 그 영혼 안에 지킬 박사같은 선한 모습도 그리고 하이드씨 같은 악한 모습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신자건 불신자건 마찬가지이다. 다만 불신자들은 세상 사람들 앞에 자신의 악한 모습은 감추고 선한 모습만 부각시켜서 인정과 칭찬을 받으려고 노력한다. 왜냐하면 그래야 자신이 꽤 괜찮은 존재로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오히려 자기 연약함을 성찰하고 부족함을 발견해서 하나님 앞에 점점 변화해 가는 존재라는 차이점이 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 신앙인의 내적 상황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했다.

    (롬 7:25-8:2)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성도는 하나님 앞에 자신이 죄인으로 발견되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키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도는 모순과 위선으로 가득찬 자기 모습이 발견되면 그것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뉘우치며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 영혼이 변화되는 축복이 주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신앙의 길을 가고 있는가? 아니면 세상 사람들처럼 자신을 치장하며 꽤 괜찮은 사람으로 기만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오늘은 산상보훈 가운데 구제에 대한 교훈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 나타내야 하는 참 경건의 길이 무엇인지 함께 생각하고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산상보훈에서 5장은 율법에 대한 새로운 정의와 해석에 대한 내용이라고 했다. 이어지는 6장부터는 주제가 조금 달라진다. 5장까지의 주제는 율법에 대한 바른 이해를 세우는 것이었다면 6장부터는 그 바른 율법에 따른 경건 생활과 실천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즉 5장은 이론에 관한 내용이고 6장부터 7장까지는 실천에 관한 내용이다. 그 실천의 내용 가운데 마태는 가장 먼저 유대인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경건생활의 세 가지를 다루고 있다. 그 세 가지는 바로 구제, 기도, 금식이다. 오늘은 세 가지 중 첫 번째로 구제에 대한 교훈의 말씀에 대해서 살펴보자.

    구제란 무엇인가? 넉넉한 자가 불우한 이웃에게 자선을 베푸는 행위이다. 그런데 그 구제에 대해서 이렇게 행해야지 저렇게 행하면 안된다고 교훈하시고 있다.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는 사실 자체가 무엇을 시사하고 있는가? 예수님 당시에 유대 사회는 율법에 대한 이해도 문제점이 있었지만 경건생활의 실천에도 문제가 있었음을 반증한다. 예수님은 그것을 어떻게 바로 잡으시고 있는가? 그리고 그것은 당시의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전달하고 있는가? 특별히 구제에 대해서 예수님이 제시하신 바른 실천의 태도는 이런 것이다.

    첫째, 사람의 영광을 구하지 않아야 한다.

    (마 6:2)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하략>』

    구제는 내가 땀 흘려 모은 것을 남에게 나눠주는 것이다. 땀 흘려 모으려면 시간을 소모해야 하고 시간을 소모하는만큼 내 생명이 줄어드는 것이다. 따라서 구제란 내 생명을 타인에게 나눠주는 행위이다. 내 생명의 촛불을 태워 남에게 빛을 비춰주는 행위라는 뜻이다. 따라서 구제 자체는 매우 선한 일이요 고귀한 일이다. 그런데 그런 고귀한 행동도 잘못될 수 있으니 조심하라고 오늘 교훈을 주시는 것이다. 그런 잘못된 구제 행위를 지적하시면서 외식하는 자를 언급한다. 외식하는 자란 어떤 자인가? 여기서 ‘외식’ 또는 ‘위선’(hypocrite)이란 단어의 사전적인 뜻은 “가면을 쓴 배우”라는 뜻이다. 쉽게 말하자면 무대에 선 어떤 배우가 왕의 복장을 하고 거닐면서 다른 사람의 칭찬을 받는 것 같은 상황을 바로 외식한다 또는 위선이다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한 가지 오해하지 않아야 할 점이 있다. 첫째는 사람을 칭찬하거나 칭찬 받는 일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내가 타인을 칭찬할 수 있고 내가 타인에게 칭찬 받을 수도 있다. 칭찬하고 칭찬 받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다. 사도행전 4장에 보면 착한 사람 바나바가 등장하는데 그는 백성들에게 칭찬받았다. 또 사도행전 6장에 식탁 봉사 직분자는 백성들로부터 칭찬 듣는 자라야 한다는 조건이 제시되었다. 그 조건대로 안립된 스데반 집사는 교회 성도들로부터 칭찬받는 자였다. 어떤 성도는 칭찬에 대해 매우 예민하게 반응한다. 거의 결벽증적인 반응을 보인다. 그분을 칭찬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지 사람을 칭찬한다”고 분노를 나타낼 정도이다. 그렇게 반응할 필요가 없다. 성도가 칭찬하거나 칭찬 받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예수님이 경계하신 것은 사람의 칭찬과 영광을 받으려는 목적을 가지고 구제를 행하지 말라는 것 뿐이다.

    (약 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야고보서 1장 27절의 말씀을 보면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을 언급했다. 그런데 그 경건이 고아와 과부를 환난 중에 돌아보는 것과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즉,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구제 행위가 경건생활과 연관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구제 행위가 예배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마음에는 사람이 드러날 일이 없다. 구제의 대상은 사람이지만 구제의 정신은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마음으로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행전4장 하반부와 5장 전반부를 보면 겉으로 드러난 행동은 같으나 동기는 상반된 두 부류의 신앙인이 등장한다. 하나는 착한 사람 바나바이고 다른 하나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였다. 두 부류는 재산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두는 행위까지는 똑같았다. 그러나 바나바는 가난한 성도들을 사랑하는 착한 뜻으로 행동한 반면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성도들의 존경과 칭찬을 받는 지도자적 위치를 얻으려는 목적에서 행동했다. 만약 이런 부부가 바나바처럼 초대교회 지도자가 되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아마 초대교회는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찬 세속 집단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교회는 순수한 정기도 사라지고 성령의 역사도 멈추고 교회의 성장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런 위기 상황을 방관치 않으시고 그 거짓과 위선이 교회를 지배하지 않도록 심판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남을 구제할 때 나는 무슨 동기로 그를 돕고자 하는가 하고 자신의 동기를 물을 필요가 있다. 또 내 안에 예배의 정신이 있는가를 물을 필요가 있다.

    남을 돕는 구제를 실천할 때 항상 선한 동기를 점검하고 그런 선행의 능력을 주신 하나님께 먼저 감사와 영광을 돌릴 줄 아는 저와 성도가 되길 바란다.

    (골 3: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둘째, 자기의 공로에 대해 잊어야 한다.

    (마 6:3)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예수님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후견인 제도가 있었다. 그래서 부자인 사람이 가난한 사람의 후견인이 되고 가난한 사람은 부자의 피후견인이 된다. 만약 후견인이 피후견인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돌봐주면 그대신 가난한 그 사람은 자기를 돌봐준 부자를 남들 앞에서 칭찬하고 명예를 높여주는 것이 사회의 일반적인 풍습이었다. 그런데 그런 풍습이 일반화된 사회 속에서 예수님은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라고 말씀하신다. 이 교훈은 사람들에게 매우 이상하게 들렸을 것이다. give and take의 세상 이치 속에서는 매우 어리석게 들렸을 것이다.

    예수님이 구제를 은밀하게 하라는 이유는 무엇일까? 실제 현실 속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미루어 보건대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내가 선행을 할 때 이를 보고 시기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픈 것이 사람의 악한 본성 중 하나다. 그러니 타인에게 상처되는 말을 듣는 것을 경계하라는 것이다. 따라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것은 너 자신이 상처 받을 수 있는 상황을 만들지 말라는 뜻일 수 있다.

    또 다른 이유는 내가 스스로 시험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처음에는 순수한 동기로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동기와 취지가 변질될 수 있는 연약한 존재이다. 또 처음에는 아무런 보상과 보답을 생각지 않았는데 나중에는 내게 주어질 유익에 관심이 돌아가 구제가 구제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주님은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교훈하시는 것이다.

    그러면 구제를 은밀히 할 수 있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구체적인 실천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나 개인의 명의로 구제를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헌납해서 교회의 이름으로 구제케 하는 것이다. 사도행전 4장의 바나바는 물질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고 했다. 이것은 ‘교회에 헌납했다’는 뜻이다. 교회에 헌납해서 교회의 명의로 구제하는 것이 사도교회의 모습이었다. 교회의 이름으로 하면 자기 이름을 사라지고 하나님의 이름이 높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자신의 공로를 잊고 하나님을 높이는 지혜로운 처신이다. 그런데 교회를 통하지 않고 개인이 하면 시험에 들고 구제가 구제되지 못할 위험성이 있다.

    부디 구제할 때 자신의 이름을 가리고 교회를 통해 구제를 실천해서 구제의 동기도 보호되고 하나님의 이름도 높여지는 지혜로운 저와 성도님들이 되기를 바란다.

    (빌 3:16)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셋째, 하나님이 주실 상급만 소망해야 한다.

    (마 6:2) 『<상략>–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마 6:4)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사람은 누구나 추구하는 것을 얻게 되어 있다. 건강을 추구하는 사람은 건강을, 돈을 추구하는 사람은 돈을, 명예를 추구하는 사람은 결국 명예를 얻는다. 구제의 목적이 사람의 칭찬과 영광에 있었다면 그것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그뿐이다. 사람으로부터 받으려는 것을 받았으니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무엇을 기대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이미 떡을 먹고 배부른 사람이 밥을 찾지 않듯이 사람의 칭찬과 명예에 배부르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큰 상급은 기대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칭찬, 하나님이 주시는 보상에 대해서 얼마나 사모하고 있는가? 사람은 때로 자신의 진실성에 대해서도 어두울 때가 많다. 그래서 내 동기가 순수한지 아니면 저 깊은 곳에 다른 뜻이 깔려 있는지 깨닫지 못할 때가 많다. 자신의 동기가 순수하다는 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만약 선을 행할 때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서운한 감정을 느낀다면 그것은 내가 바른 마음으로 구제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가 만족하고 행복한 모습만으로 충분하다면 나는 바른 마음으로 구제하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어느 자리에 있는가? 부디 사람은 알아주지 않더라도 모든 것을 보시는 하나님이 알아주실 것이고 하나님이 주시는 상이 가장 큰 상이라는 믿음으로 구제를 실천하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자.

    (눅 14:14)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시더라』

    진실 ‘씬서러’(sincere)라는 영어 단어가 있다. 이 영어 단어는 ‘시네 세라’(sine cera)라는 라틴어에서 유래했다. 그 라틴어의 본래 뜻은 “밀칠하지 않은”이라는 의미이다. 영어로 직역하면 ‘sun tested’이다. 즉 “햇빛에 시험해 보다”라는 뜻이 라틴어 ‘시네 세라’ ‘밀칠 하지 않은’이라는 뜻이다. 그 의미는 바로 고대 도자기 산업과 관계된다. 도자기(옹기)는 두꺼운 것보다 얇은 것으로 만들기 어렵고 까다로웠다. 도자기를 두껍게 만들면 불에 구워낼 때 금이 잘 가지 않는다. 그러나 얇게 만들면 불에 굽다가 금이 잘 가는 단점이 있다. 그래도 얇은 도자기가 가볍기 때문에 두꺼운 도자기보다 더 비쌌다. 그런데 만약 도자기 제조 중에 흠이 발견되면 그것은 깨버리는 것이 정상인데 일부 부정직한 도공들은 약한 흠있는 곳에 색소와 밀초를 섞어 틈을 메꾼다. 그리고 다시 유약을 발라 시장에 불량품을 내다 팔았다. 그러나 이런 불량 도자기는 햇빛에 비추어 보면 금방 탄로가 난다. 햇볕에 시험한다는 뜻이 바로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래서 정품 고급도자기에는 밑에 ‘sine cera’라는 글을 새겨 넣어서 품질을 보증했다고 한다. 여기에서 영어 단어 씬서러 ‘sincere’가 나온 것이다.

    우리는 구제할 때 어떤 정신으로 실천하고 있는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정신으로, 변하지 않는 순수한 동기로, 개인의 명의가 아니라 교회의 명의로 실천해야겠다. 이렇게 구제할 때 하나님은 그 구제를 거룩한 산 제사로 흠향하실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선행을 천국 책에 기록하시고 영원히 기억해 주실 것이다. 부디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의 그릇에 ‘시네 세라’ 씬서러 sincere 라고 새겨 넣으시는, 그런 축복된 주님의 자녀가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한다.

     

    글작성 : 김세한 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