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한옥 자매님께서는 5년전쯤 집 인근 산책로를 오가며 운동하던 중, 송세연 자매님을 처음 만나게 되었습니다. 송세연자매님께서는 오랜 기간 동안 전도심방팀원으로서의 교육과 사역을 해오고 있었습니다. ‘언제든 누구에게라도 전할 수 있도록 항상 주위를 살펴야 한다’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있던 터에, 장한옥 자매님을 길에서 마주치게 된 것입니다.
건강이 안 좋아 보였고 운동을 같이 하고 싶으면 전화번호를 알려 달라 했더니, 장한옥 자매님께서 기꺼이 번호를 알려주었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이후 전도 대상자로 마음에 품고 기도하며 오랜 만남의 세월을 보내고, 이제야 하나님의 때가 되어 값진 결실을 맺게 되었습니다.
더욱 감사한 것은 이번 세례식에 두 따님이 참석을 하였습니다.
사실 교회에 가는 줄 알고(세례식을 하는 줄 모르고) 따라와서 처음 모습은 당황스러워 보이기도 하였으나, 세례식이 끝나고 또래 여신도회와 게임도 하고 차도 한잔하며 아주 가까워졌습니다. 또 한 번의 좋은 기회가 된 것 같습니다.
장한옥자매님께서는 안수를 받으며 펑펑 우셨습니다. 마음이 무척이나 가난해 보였습니다. 이제 막 주님의 자녀로 거듭난 장한옥 자매님의 신앙과 평안을 위해(또한 다시 볼 날일 있을 두 따님을 위해서도)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모든 것을 인도해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할렐루야!
2020년은 인류사에서 잊지 못할 한 해로 기억될 것이다. 중국 우한에서 시작된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 세계로 퍼져 나갔고 이로 인해 수많은 확진자와 사망자를 낳았다. 그로 인해 팬데믹이라는 생소한 용어도 알게 되었고 그것이 얼마나 공포스러운 상황인지도 뼈저리게 알게 되었다. 비록 해제된 지 2년이 지났지만 바이러스로 인한 팬데믹 사건은 오늘 날 세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서 큰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세계의 학자들은 21세기를 코로나 이전 시대와 코로나 이후 시대로 양분한다. 이 사건이 역사의 전환점이 되었다는 뜻이다. 이 결과의 원인이 매우 놀랍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 매우 단순한 구조의 바이러스 때문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팬데믹의 경험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유익이 있다. 첫째는 미래를 예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쉽게 또 순식간에 멸망에 이를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따라서 우리는 경성해야 한다. 둘째 유익은 우리 교회의 가치와 영향력에 대한 낙관이다. 작은 바이러스가 이렇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 눈에 보이지도 않는 군소 교단인 우리 교회도 상상할 수 없었던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미래가 올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현재 다수냐 소수냐는 결코 중요하지 않다. 미래에는 소수가 다수도 될 수 있고 다수가 소수로 전락할 수 있다. 설사 소수의 규모에 머문다 할지라도 그 영향력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규모 때문에 위축될 필요가 없다. 또 이런 말씀도 있기 때문이다.
(눅 12:32)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우리는 지난 시간까지 산상보훈 가운데 팔복 설교를 살펴보았다. ‘복이 있나니’라는 주님의 선언의 내용이 여덟 개의 주제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팔복이라고 했다. 이 여덟 개의 주제는 천국 백성의 속성에 대해 말한다. “천국 백성은 이러한 성품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성품을 가진 자에게 이런 복이 있습니다.”라는 것이 그 내용이다. 거기에 이어서 오늘 말씀이 주어지고 있다. 이러한 성품의 천국 백성은 결국 “세상에 이런 영향력을 미칩니다.” “천국 백성은 이런 역할을 해야 합니다.”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설명하실 때 예수님이 비유를 사용하시고 있다. 바로 소금과 빛이다.
먼저 발견되는 점은 ‘너희는 소금’이다. ‘너희는 빛’이다. 라고 표현되지 않고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렇게 ‘세상의’라는 수식이 붙는 것은 성도란 세상을 등지고 산 속에 들어가 은둔하면서 살면 안된다는 뜻이다. 오히려 세상 속으로 들어가서 타인과 함께 생활하고 그들과 함께 생활하는 환경에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고전 5:10)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과 토색하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그러면 세상 속에서 소금과 빛이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이고 그런 존재가 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난다는 뜻인가? 그 교훈을 얻기 위해 우리는 소금과 빛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소금과 빛의 공통점을 주목하면 그 의미와 이루어질 일에 대해서 가늠할 수 있다. 둘의 공통점은 이렇다.
첫째, 소금과 빛은 부패와 오염을 방지한다.
(엡 5:8-9)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소금은 살균력이 있어서 부패를 방지하는 기능이 있다. 그래서 냉장고가 없던 시절에 음식물 오래 보관하는 방법은 바로 소금에 절여 놓는 것이다. 안동에 가면 꼭 먹어봐야 하는 음식 중에 간고등어가 있다. 바닷가로부터 멀리 떨어진 경북 안동 지방 사람들이 생선을 먹으려면 운송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부패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그래서 상하지 않게 하려고 고등어를 소금으로 절였던 것이다. 그래서 안동에서 간고등어가 명물이 되었다.
애굽에서는 죽은 시체를 미이라로 만들 때 소금물에 넣어두었었다.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그런가 하면 집안 살림 용품 중에 찌든 때를 제거하고 소독 청소하는 ‘락스’라는 제품이 있다. 이 ‘락스’는 화학상의 원료가 바로 소금이다. 이처럼 소금에는 부패와 오염을 방지하는 기능이 있다.
빛도 마찬가지로 부패를 방지하는 기능이 있다. 지하실 같은 어두운 장소에는 세균이 득실거린다. 그러나 그곳에 햇볕이 내리쬐거나 그곳의 물건들을 햇볕에 내놓으면 태양광 자외선에 의해서 깨끗이 살균된다.
병원에서는 질병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일에 사용하는 장비가 있다. 방사선을 사용하는 장비이다. 이런 장비는 빛을 고 에너지로 농축시킨다. 그래서 암환자의 환부에 쪼이면 암세포가 사멸하게 된다. 이처럼 빛에는 병을 치료하는 기능이 있다.
그런가하면 어두운 밤거리를 비추는 방범등이 있다. 방범등은 청색이 많은데 이는 흰색등보다 더 멀리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색등을 방범용으로 활용하면 범죄율이 감소한다는 설이 있다.
이처럼 빛과 소금에는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부패와 오염을 방지하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성도를 일컬어 “너희가 바로 그런 존재다”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소금이 그런 속성을 가지도록 만드신 것처럼 그리스도인을 그렇게 만드셨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빛 안에 그런 속성을 넣어두신 것처럼 천국 백성 안에 그런 성향을 가지게 하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무엇을 적극적으로 행하라는 뜻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지키라는 뜻이다. 그 정체성에 충실하면 세상 속에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골 4:6)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세상의 인간관계 속에서 들려오는 말에는 냄새나 향기가 있다. 비방의 말, 원망의 말, 남을 깍아내리는 말, 자기 신분에 걸맞지 않은 말은 마치 부패하는 음식 냄새와 같다. 역겨워서 그 자리를 떠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반면 칭찬의 말, 감사의 말, 은혜를 끼치는 말, 자기 신분에 합당한 말은 방향제를 뿌린 것처럼 향기롭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 곁에는 오래도록 함께 하고 싶다.
이처럼 내가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신분에 맞는 언어를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세상에 긍정적인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 불신자들은 자신들의 무리 속에 경건한 성도가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긴장한다. 그래서 함부로 상스런 말도 못하고 함부로 행동하지 못한다. 부디 썩어져 가는 세상에서 가장 먼저 은혜로운 언어를 통해 부패를 막고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살아가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란다.
둘째, 소량이지만 끼치는 영향이 매우 크다.
바다에서 염분의 양은 3.4%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렇게 작은 비율의 염분 때문에 바다물은 썩지 않는다. 염분은 바다를 썩지 않게 할 뿐만 아니라 인체에도 필수적인 광물이다. 염분은 사람의 혈관 벽에 붙어있는 이물질을 제거하고 혈관이 딱딱해지는 것을 방지한다. 또 장내 소화액 분비를 촉진시키고 장의 움직임을 원활하게 해서 장내 음식물이 부패하는 것을 방지한다. 이처럼 아주 작은 양이지만 소금이 미치는 영향력은 매우 크다.
빛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한 밤중 망망대해에 떠있는 배들은 항구를 찾아오기 위해서 수많은 조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몇 십 개 몇 백 개의 등대가 필요하지 않다. 불이 켜진 한 개의 등대만 있어도 배들이 악천후에도 안전하게 항구로 되돌아오기에 충분하다.
가로등도 없는 시골길에서 행인이 보행하려면 어느 정도의 빛을 필요할까? 작은 손전등 하나만 있어도 밤길을 가기에는 충분하다. 그것으로 안전하게 보행할 수 있다.
작은 빛이라도 있다면 우리는 길을 찾을 수 있다. 이처럼 소금이 아무리 그 분량이 적을지라도, 또 빛이 광도가 아무리 미미할지라도 필요한 때에 필요한 곳에서는 그 영향력은 충분하다. 주님은 바로 천국 백성인 성도를 그런 존재로 만드신 것이다. 부디 그런 사실을 이해하고 세상 속에서 신앙인으로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되자.
(빌 2:15)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셋째, 자기 희생을 통해 유익을 준다.
팔레스틴의 소금은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소금과는 많이 다르다. 당시 그 사람들은 바다에서 소금을 취한 것이 아니라 육지에서 소금을 취했다. 이것을 암염이라고 하는데 한마디로 돌과 소금이 섞여 있는 것이다. 사해 주변에는 암염이 많이 있다. 이 암염으로부터 소금을 체취하는 과정은 이렇다. 암염을 물에 넣으면 염분 성분은 녹고 돌 성분만 남는다. 그렇게 물로 녹여낸 염분을 다시 증발시키면 소금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물로 염분을 녹이는 일을 반복하면 나중에는 염분이 다 빠지고 돌 성분만 남게 된다. 이렇게 염분이 다 빠졌으니 이제 소금을 얻을 수 없고 그런 암염은 길바닥에 내다버렸던 것이다. 그러면 그 맛잃은 암염이 오가는 사람들의 발에 밟혔던 것이다. 본문 말씀에 맛 잃은 소금이 발에 밟힌다는 뜻은 이런 배경아래 나온 표현이다. 이처럼 암염이 맛을 내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 있다. 그것은 바로 물에 자기를 녹여내는 과정이 필요하다. 바로 자기를 내어주는 희생이다.
빛도 유사한 특징이 있다. 예수님 공생애 시대에 이스라엘의 가옥 구조는 단순했다. 오늘날처럼 채광이 잘되는 구조가 아니다. 출입문이 하나요 창문은 작았다. 그래서 대낮에도 실내는 매우 어두웠다. 그렇다보니 사람들은 주간에도 항상 등잔불을 켜고 생활해야만 했다. 따라서 전기도 없던 그 시절에 등잔은 모든 가정이 구비하는 필수품이었다. 그 등잔에 불을 밝히려면 기름이 필요했는데 그 기름의 원료는 바로 감람유, 올리브유였다. 올리브유는 정제해서 가장 먼저 추출되는 것을 엑스트라 버진이라고 해서 식료품으로 사용한다. 보통 네 차례정도 추출하는데 가장 나중에 추출되는 질이 낮은 올리브 오일을 등불용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이처럼 실내에 빛을 비추려면 등불을 밝혀야 했고 등불을 밝히려면 기름이 태워져야 했다. 즉 자기를 내어주는 희생의 과정이 필요했다.
이렇듯 소금을 보아도 등잔불을 보아도 녹아지고 태워져야 한다. 녹아지고 태워지는 희생의 과정이 없으면 존재로서의 기능을 할 수 없다. 이처럼 성도가 천국 백성이라는 존재로서 의미가 있으려면, 자기 사명을 완수하려면 반드시 자기희생의 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교훈하고 있다. 그런데 그 희생은 그렇게 거창한 것이 아니다. 첫째는 내가 세상 속에서 신앙인이라는 것을 밝혀야 한다. 소위 커밍 아웃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다운 말과 행동을 통해서 세상과 소통하고 대화하며 사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빛과 소금의 사명을 다하는 참 성도의 모습이다. 만약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살아간다면 그것은 마치 염분이 다 빠진 암염과 같다. 그것은 마치 등잔불에 소쿠리를 덮어 놓은 것과 같다. 부디 자기 정체와 자기 신앙을 세상을 향해 적극적으로 밝히고 드러내는 성도가 되자.
예)참예수교회의 초기의 발전에 자기희생의 목자님들이 있었다. 세무서 공무원의 안정적인 신분도 마다하고 나아가 순교도 불사하고 목회의 길을 나선 박필선 목자님 같은 분들의 희생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그분 한 분이 아니었다. 한국전쟁 이후 가난하고 어려운 시대에 사회로 나가지 않고 한 달에 쌀 한 포대 정도의 노임만 받고 희생한 원로 목자님들이 있었다. 이렇게 자기를 내어주는 목자님들이 있었기 때문에 참예수교회가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그런 희생의 전통은 끊어지지 않고 대물림 되었다. 어떤 목자님은 사회 속의 안정된 직장을 그만두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위해서 목회의 길을 선택했다. 자기를 내어주는 희생의 정신은 앞으로도 그 전통이 되어 이어질 것이다.
그런 현실을 볼 때 저는 비록 우리 교회가 소수지만 미래가 매우 밝다고 확신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소금과 빛의 역할이 살아있다는 뜻이고 그것이 살아있으면 우리 교회는 미래에 세상을 변화시키는 큰 결과를 나타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성도님들은 어떻게 소금과 빛의 사명을 다할 수 있을까? 모두 목회자가 되어야할까? 박필선 목자님처럼 다른 원로 목자님들처럼 그렇게 목회자의 길을 가라는 것인가? 순교라도 하라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성도님들은 최전선에서 세상과 접촉하며 영적인 전쟁을 수행하고 있다. 그래서 자기가 소속한 사회와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면 소금과 빛의 사명을 완수하시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기독교인이라는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기를 두려워하지 말자. 그리고 그 자기 정체에 일치하는 삶을 살자. 세상으로부터 저들이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라는 칭찬을 듣자. 여기까지 가면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고전 6: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이 세상의 사람들은 소유를 추구하는 삶을 산다. 그러나 우리는 소유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지 않았다. 세상을 위해 내어주기 위해서 왔다. 주님이 먼저 십자가에서 그 모범을 보여주셨다. 부디 주님이 남기신 모범대로 빛과 소금의 본분을 다하는 성도가 되자. 나를 통해 세상이 변화될 것이다. 그리고 세상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올 것이다. 그 사명을 감당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천국의 기업을 상속하시는 저와 성도가 다 되시길 예수님 이름으로 기원한다.
할렐루야! 이번 청주교회 성도 소개로 김복순 자매님을 소개하려 합니다. 2019년 10월에 세례를 받으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셨고, 올해 2월에 성령을 받으신 김복순 자매님의 이야기를 통해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김복순 자매님은 청주교회 박성호 집사님의 장모님이자, 저(박은우 형제)의 외할머님 되십니다. 저희 어머님은 가정에서 혼자 참예수교회를 나오셔서 신앙생활을 한 순간부터 가정을 전도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셨는데, 신앙 안에서 가정을 이루시고 자녀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기도를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신앙을 가지시기 전까지 김복순 자매님은 세상의 미신이나 세상의 말을 믿으셨고, 하나님 말씀을 잘 들으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셨고, 저희 어머님과 저희 가정의 기도를 들어주셨고 교회로 조금씩 발걸음을 옮기시다가 마침내 2019년 10월 6일에 세례를 받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셨습니다.
세례를 받으신 이후에도 신앙의 어려움이 있으셨지만, 마리아 성도분들과 교회 성도분들의 기도와 하나님의 사랑으로 점점 그 마음을 여셨고 스스로 성경도 읽으시고 기도도 하시고 주기도문을 외우셨습니다. 그리고 성령 받기를 간절히 원하셨고, 기도 중 2024년 2월 3일에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셨습니다. 세례를 받으신 날 저희 가족의 기쁨은 헤아릴 수 없었지만, 성령을 받으신 이 날의 기쁨은 더욱 배가 되었습니다. 저희 가족 뿐 아니라 교회의 모든 성도분들이 기뻐해주셨고 함께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응답하시는 때를 우리는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적절한 시기에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방법으로 응답해주십니다. 우리가 해야할 일은 포기하지 않고 그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딤후 4:2)”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제자들에게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 성령을 받고 증인이 되어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주셨고 오늘날 그 사명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참 교회인 참예수교회로 이어지며 성도된 우리가 증인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청주교회에서는 이번 가을 전도초청집회를 위해 한 달간 모든 성도가 함께 기도로 준비했는데, 그 과정 가운데 있었던 은혜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엡 6:18)”
청주교회에서는 9월 21일, 가을 전도 초청 집회의 선포식을 시작으로 한 달이라는 시간을 두고 전 성도가 함께 정해진 시간에 모여 기도를 했습니다. 월, 수, 목, 일요일은 줌으로 30분씩 기도하였고 화, 금, 토는 예배 말미에 시간을 정해 기도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루도 빠지지 않고 기도한 것이지요. 또 뜻을 모은 성도들은 금식으로 릴레이 기도에 참여했습니다. 혹 정시기도에 참여하지 못할 때는 성도들 각자 하나님 앞에 기도 하며 참여했습니다. 이렇게 청주교회는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준비 했습니다. 또한, 매주 안식일 예배 후에 전도에 대한 현황을 나누고 전도의 의지를 함께 높였고, 신도회 별로 노방전도를 포함한 전도 활동을 진행하며 거리로 나가 참예수교회를 전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교회를 잘 나오지 못한 관리 신도들을 심방하며 전도 초청 집회에 대해 알리고 초대하기 위해 힘을 썼습니다.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행 4:31)”
그렇게 전도 초청 집회의 날이 다가왔고, 하나님께서는 소중한 영혼들을 보내주셨습니다. 무려 12명의 전도 대상자 분들이 방문해 주셨는데, 방문한 분들 중에서는 지난 봄 영은 전도 대회에도 오셨던 교회 옆 뉴타운아파트의 경로당 어르신 분들도 있었습니다.
전도 초청 집회는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감사함과 은혜가 넘치는 시간으로 마무리가 되었지만, 행사가 끝난 것이지 전도가 멈춘 것은 아닙니다. 지금도 방문해 주신 전도 대상자 분들과 각자 품은 전도 대상자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교회를 세우셨고, 교회는 인류구원이라는 하나님의 꿈을 성취하는 곳이자 통로이며, 성도는 그 꿈을 전하는 증인입니다. 참예수교회의 진리가 더욱 널리 퍼져 길을 잃은 영혼들이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와 함께 주님을 예배할 수 있기를 소망하며 글을 마칩니다.
19세기 말 지식인들은 앞으로 다가올 20세기를 일컬어 인류의 황금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 장밋빛 미래 예측의 근거는 인간의 과학 기술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작 20세기에 이르렀을 때 그 예측은 크게 빗나갔다. 두 차례에 걸친 세계 대전을 통해 미래가 밝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또 다른 문제들도 있었다. 과학기술의 발달은 산업 혁명을 통해서 물질적 풍요는 이루었지만 빈부의 격차라는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고 또 오늘날에 와서 환경오염, 기후 변화 등의 문제가 인간의 목을 조르고 있다. 인류는 이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개선이 아니라 개악의 상황을 마주하고 있다. 그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사람이 물질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행복과 불행이라는 영혼의 문제를 물질에서 찾을 수 있다는 잘못된 전제와 남보다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높은 곳에 있고자 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들이다.
인류의 역사도 그렇지만 오늘날 개인의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물질과 육체의 욕망에 집중하며 살면 인생이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한다. 과거 인류의 역사 속에서 그 전제가 틀렸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교훈을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잘못된 전제에 빠져 자기 인생을 허비하고 살아간다. 우리는 창세기에서 그런 어리석은 인간의 전형을 발견한다. 바로 소돔과 고모라 땅을 선택했던 롯이다. 롯은 눈에 끌리는 대로 풍요로워 보이는 소돔 땅을 선택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그 땅은 유황불에 멸망하고 그 멸망과 함께 롯도 모든 것을 잃는다. 욕망하는 것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모두 잃는 모순된 결과를 맞이한다. 이것이 똑똑한 것 같지만 어리석은 인간의 실상이다. 이러한 인간의 어리석음은 또 어디에서 발견되는가? 멀리 있는 유익을 보지 못하고 당장 눈앞에 유익에 집착한다. 자신에게 해가되는 것도 모르고 목숨을 바쳐 쟁취하려고 달려든다. 가장 소중한 것을 옆에 두고 가장 먼 곳에서 그것을 헤매기도 한다. 또 정작 가장 소중한 것을 찾았는데 변덕이 생겨서 그것을 헌신짝처럼 내버리기도 한다. 인간은 이렇게 어리석은 면이 많고 헤매는 존재임을 성경은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사 59:8) 『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며 그들의 행하는 곳에는 공의가 없으며 굽은 길을 스스로 만드나니 무릇 이 길을 밟는 자는 평강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는 어떻게 이런 오류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로서 천국의 백성으로서 평강을 누리고, 가치를 누리고, 하나님께 드릴 아름다운 보석으로 내 인생을 장식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서 나는 먼저 어떤 존재가 되어야할까? 오늘은 산상보훈의 팔복 설교의 첫 구절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는 이 말씀의 뜻을 되새기고 함께 은혜를 나누는 시간을 가지고자 한다.
오늘 구절에 대해서 문법적으로 살펴보면 먼저 문장 순서가 원문의 것과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원문을 직역하면 “복이 있으리라, 심령이 가난한 자들에게, 왜냐하면 천국이 저희들의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순서로 기록되었다. 복이 있다는 기원의 말이 문장의 맨 앞에 등장하고 복이 주어진 이유를 맨 나중에 기록하고 있다. 주목되는 단어가 있는데 첫째는 심령이란 명사이고 둘째는 가난하다라는 동사이다. 심령이란 명사는 ‘프뉴마’(pneu’ma) 즉 ‘영’(靈)이란 뜻이다. 가난하다란 동사는 ‘프토코스’(ptwcov”)로 ‘가난하다, 불쌍하다, 연약하다, 빈궁하다’라는 뜻이다. 그래서 문자대로 옮기면 ‘심령이 가난하다’라는 것은 곧 ‘영이 빈궁하다.’ ‘영이 결핍되어 있다.’ ‘영이 불쌍하다’라는 뜻이다. 우리는 영이란 단어를 안다. 그리고 가난하다라는 단어도 안다. 그런데 ‘영이 가난하다’라는 말은 도대체 어떤 개념인가? 또 영이 가난한 자는 왜 천국이 보장됨을 선언하고 있는가? 여기서 말하는 영이 가난한 자는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가?
첫째, 세상의 것으로 채울 수 없는 마음이다.
(사 66: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
사실 심령이 가난하다는 표현은 예수님이 처음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유사한 표현을 사용했다. 이사야 선지자의 글을 통해 알 수 있는, 영이 가난하다는 뜻은 곧 하나님을 의식하고 그분과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갈망의 마음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존재를 알고, 그분의 말씀을 존중하며, 그분을 경외하기 때문에 가지게 되는 마음의 상태가 바로 영이 가난한 상태이다. 여기서 오해하지 않아야 할 점은 세상 사람들이 흔히 말하기를 “물질은 없어도 마음만은 부자다”라는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음의 풍요가 중요하니 물질적 가난은 중요하지 않다”라는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심령의 가난하다는 개념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다. 하나님을 알고, 그분과 교제하고자 하고, 그분의 손길을 소망하기에 가지게 되는 영혼의 결핍 상태가 바로 심령이 가난한 상태라는 것이다.
예수님 공생애 초기에 예수님을 밤중에 찾아온 자가 있었다. 바로 니고데모이다. 그는 육신적으로 부족할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산헤드린 공회원이요, 바리새인이요 예수님 장례에 몰약을 백근 쯤 봉헌한 인물이다. 소위 명예와 신분과 재력을 모두 갖춘 자이다. 그런데 그가 뭐가 아쉬워서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는가? 자신이 소유한 것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내적인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천국에 들어가는 길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것을 알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은 거듭 나야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구원의 핵심을 말씀하셨다. 세상 기준으로 보면 다 가졌는데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영혼의 갈급함을 느끼는 자, 이와 같은 사람이 바로 심령이 가난한 자이다.
또 마태가 있다. 그의 직업은 세리였다. 백성들에게 세금을 거둬서 로마 정부에 일정액만 잘 상납하면 나머지는 자신이 몫이 되었다. 그러니 욕심대로 부를 축적하고 물질의 풍요를 누릴 수 있는 직업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세관에서 일하는 그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신다. 그리고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신다. 마태는 놀랍게도 이 한 마디에 주저 없이 그 자리에서 일어나 예수님을 쫓는다. 가족과 의논하지도 않고 시간을 지체하지도 않았다. 그는 왜 이렇게 행동하고 있는가? 분명한 사실은 그는 그 풍요의 자리에 미련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응답이 즉각적인 것을 보면 그는 세리의 자리를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마태 같은 사람이 심령이 가난한 자이다. 이런 사람의 특징은 그 마음을 세상 것으로 채우지 못하고 하나님으로 채우려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가? 하나님에 대한 욕망보다 세상 물질에 대한 욕망 때문에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마치 쇼핑 중독에 걸린 사람이 물건을 사면 살수록 더 사고 싶고 사서 집에다 쌓아놓으면서 다시 사는 것처럼 물질에 집중하면서 살고 있지 않는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만족하고 이웃과 나누면서 행복한 삶을 사는가? 아니면 세상의 것을 끊임없이 욕망하면서 헛된 노력에 매달리고 있는가? 부디 육체의 욕망에 사로잡혀 물을 보관하지 못하는 터진 웅덩이가 되지 말고 하나님께 갈급하고 하나님 주신 것으로 채우고 만족할 수 있는 영혼이 되시길 바란다.
(렘 2: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둘째, 세상의 것을 자랑하지 않는 마음이다.
(왕상 8:27)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
심령이 가난한 자의 두 번째 특징은 세상의 것으로 자랑하지 않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세상에서 추구하는 것은 한결같다. 자기 물질, 신분, 권세를 추구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것을 얻으면 자랑한다. 그러나 심령이 가난한 자는 그런 것으로 자랑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하나님 앞에 겸손하다.
솔로몬 왕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둘도 없는 화려한 성전을 지은 인물이다. 그러나 정작 그가 성전을 완성했을 때 그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했다. 하나님은 세상을 초월해서 계시는 분이기 때문에, 자신의 손으로 지은 건물은 그 분을 모실만한 거처가 못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낙성식 기도에서 그는 이 생각을 고백한다. 초기의 솔로몬은 이렇게 심령이 가난한 자였다.
솔로몬은 육적 성전을 지었지만 신약 시대에 이르러 영적인 성전을 지은 인물이 있다. 바울이다. 그는 바리새인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가말리엘 문하에서 배운 율법사였다. 오늘날 표현을 빌리면 개인적 스펙이 화려한 사람이다. 그러나 바울은 이 모든 것들을 오히려 배설물로 여긴다고 말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고 가장 가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 머리 속의 지식으로만 끝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알기 때문에 핍박과 위험을 감내하며 그분의 몸 된 교회를 세우는 일에 헌신했다. 그렇게 헌신의 삶을 살고 인생의 황혼기에 이르렀을 때 그의 태도는 어떠했는가? 오히려 나의 나 된 것은 주의 은혜로 되었다고 고백했다.
(고전 15: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심령이 가난한 자의 특징은 자기를 낮춘다. 우리는 때로 세상 것을 포기했다고 말하면서 교회 안에서 세상 것을 추구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경우도 있다. 마치 베드로와 제자들이 배와 그물은 버리고 예수를 쫓았는데 예수님이 유대인의 임금이 되면 좌편과 우편에 앉아서 벼슬 좀 하사 받으려고 했던 것처럼 말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천국의 것을 세상 것 자랑하듯 자랑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 자기의 하찮음을 돌아볼 줄 알고 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잘 알기 때문이다. 부디 하나님이 너무 크심을 알고 자기의 작음을 고백하는 자가 되자.
(고전 3:21)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셋째, 오로지 하나님만을 소망하는 마음이다.
(시 42: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공급하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물질이든, 환경이든, 사람이든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면 하나님은 필요한 때 필요한 것을 우리에게 주실 수 있다. 그런데 시편의 기자는 물질도, 환경도, 사람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를 찾기에 갈급한다고 했다. 그래서 ‘주님이 주시는 복을 갈급해 한다’고 기록하지 않고 ‘주님을 찾기에 갈급함’을 노래했다. 이 마음을 어떻게 비유할 수 있을까?
엄마가 아이에게 말한다. “엄마가 장보고 돌아오기 전까지 집에서 잘 놀고 있거라! 돌아와서 맛있는 과자를 사줄테니 잘 놀고 있거라.” 그런데 아이는 싫다고 울면서 떼를 쓴다. 과자도 싫고 사탕도 싫고 장난감도 싫으니 엄마랑 떨어지지 않겠단다. 마치 어머니에게 함께 있기를 애원하는 이 어린 아기처럼 주님을 찾기에 갈급한 마음은 그런 마음이다. 마치 어린아이가 과자와 사탕과 장남감을 좋아하지만 과자도 사탕도 장난감도 엄마를 대신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이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 2년 동안 청계천 판자촌에서 산 경험이 있다. 그 때의 추억은 한마디로 가난이다. 판자촌은 합판을 덧대서 망치질한 방에 벽면은 도배지 대신 신문지로 발랐고 그렇게 만들어진 방과 방들이 끝없이 연결되어 있었다. 요즘은 한 집에 화장실이 둘도 있지만 그 때는 화장실이 한 집에 하나도 없었다. 화장실은 온 마을 사람이 함께 쓰는 공중 화장실이었다. 마을 앞에는 청계천이 흐르고 어머님은 직장에 다니시면서 매일 동생과 저에게 10원짜리 동전을 쥐어 주셨다. 형제는 행여나 주머니에 넣으면 빠져서 잃어버릴까봐 그냥 손에 꼭 쥐고 하루를 보냈다. 그러다 저녁이 되면 그 돈으로 동네 만화방에 갔다. 왜냐하면 티브이에서 방영하는 재미있는 만화 영화를 보기 위해서다. 만화가 끝날 때 쯤 퇴근하신 어머님은 저희 형제를 데리러 만화방으로 오셨다. 그리고 어머니가 사주시는 붕어빵을 맛있게 먹으며 판자촌 집으로 귀가했다. 이상한 것은 그 가난했던 시절이 지금은 행복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유가 무엇인가? 사랑하는 어머님과 함께한 시간들이었기 때문이다.
(합 3:17-18) 『[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성도님들 오늘 나는 어떤 영혼의 사람인가? 나의 영혼은 세상의 것으로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다. 오로지 그분으로 우리의 마음을 채울 수 있다. 세상의 것으로 대신할 수 없다. 오로지 하나님을 갈망하며 겸허하게 그분과 동행하는 성도가 되자. 이것이 가난한 심령의 사람이다. 부디 이런 마음을 품고 하나님과 교제하시고 동행하시고 하늘의 속한 신령한 것으로 배부르고 만족해하시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길 예수 이름으로 기원한다.
A.청주교회 성도님들의 따뜻한 인사에 감동을 받아 우리 모두가 정말 주 안에서 한 가족인 것을 느꼈어요. 그리고 청주교회는 아동과 학생부들의 예배 참석이 꾸준하다는 점이 인상 깊었어요. 또 성도님들께서 전도에 관심이 많고 적극적이신 것 같아서 본받고 싶습니다. 최근에 제가 교회에서 교사 사역을 맡기 시작했는데 기도가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하나님께서 저를 이곳 청주로 인도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Q.대학 생활 중 어려운 점이 있다면?
A.크게 어려운 점은 없는 것 같아요.
Q.이루고 싶은 목표와 앞으로 신앙생활의 목표가 있다면?
A.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면 나중에 외국으로 나가 공부를 해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 마지막 날에 영생을 얻는 것이 제 신앙생활의 목표입니다.
Q.다른 사람들에게 참예수교회를 소개한다면?
A.참이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세우신 교회, 참 진리가 있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교회라고 소개할 것 같아요.
대학 진학을 위해 자신이 살고 있던 정든 고향을 떠나 타 지역으로 가는 많은 청년들의 모습을 보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고향을 떠나서 자신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땅으로 간 아브라함이 생각납니다. 아브라함이 여러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삶을 살았고 믿음의 조상이 된 것처럼, 자신의 집을 떠나 타 지역에서 대학생활을 하는 모든 참예수교회 청년들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신앙에서 떠나지 않고 오히려 더욱 굳건한 믿음으로 세워지는 시간이 되길 기도합니다.
저희 가족은 참 진리가 있는 참예수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마음이 뜨거워져 빨리 이 기쁜 소식을 사랑하는 가족에게 알리고 전도 해야겠다는 마음이 앞섰습니다. 영은전도대회에도 초대하고 설교 말씀도 보내드리고 만날 때마다 권면도 하였지만 그럴수록 부모님들은 더욱더 거리를 두셨습니다.
저희들의 권면이 부담스러우셨는지 한동안 얼굴도 뵙지 못하고서야 너무 성급하게 마음이 앞섰던 게 아니었나 반성이 되었습니다. 이후로는 전략을 바꿔(?) 아예 교회 얘기를 꺼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역으로 질문도 하시는 변화가 생기더라고요, 그래도 여전히 ‘너희 교회에서 잘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는 건 인정하지만 다 옳다고는 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움직여 주신다는 생각에 감사했고 가족 전도는 장기전일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안부 전화를 드리면 화면으로 너희들 잘 지내는 것 보고 있다고 하셔서 무슨 말인가 했더니 청주 교회 유튜브 채널을 구독하시고 설교며 특별 찬양 발표며 간증이며 다 보고 계신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정말 놀랐습니다. 싫으면 그림자도 꼴보기 싫다는데 유튜브 채널을 시청하신다니 저에겐 긍정적인 반응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희는 교회 성도님들과 함께 대만 참예수교회 방문 여행을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출발 전부터 이런저런 이유로 대만에 가는데, 부모님도 언젠가 꼭 같이 가셨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렸고 다녀오고 나서도 대만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그곳의 성도님들께 받은 사랑에 대해 이야기를 드렸는데 굉장히 귀 기울여 들어주셨습니다. 분위기가 좋아지자 주님이 주시는 기회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으로 기도하며 권면했습니다. “마침 오늘 저녁(금요일)에 예배가 있는데 장항서부교회로 함께 가서 예배 드리면 안 될까요?”하고 말이죠~ 저는 무뚝뚝한 사람인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니 애교 섞인 코맹맹이 소리가 절로 나왔습니다. 아버지는 순간 당황하시다가 “그러지 뭐~”라고 응답하셨습니다.
할렐루야 감사주!!
저는 어린아이처럼 팔짝팔짝 뛰며 기뻐했고 뒤늦게 무슨 일이냐며 어머님이 오셨지만 이미 아버지가 약속하셨으니 무르시면 안 된다고 우겼습니다. 어머님도 웃으시며 그러자고 하셨고 맛있게 저녁 식사를 한 뒤 장항서부교회로 향했습니다. 군산인 아버지 댁에서 장항서부교회는 차로 20분 정도 되는 짧은 거리였습니다. 또 마침 그 때 윤석원 목자님께서 장항으로 이사를 오신 날이었고 첫 설교를 하시는 날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0:35 주는 것이 복이다> 라는 말씀이었고 이미 ‘복’이신 하나님 안에 있다면 우리 자체가 복이라고 하시면서 그러니 믿는 성도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가 아닌 “새해 복이 되십시오”라고 인사하자고 하셨습니다. 설교가 끝나자 옆에 앉아 계시던 어머니께서 저에게 “새해에도 복이 되렴.” 하고 인사해 주셨고 저도 화답했습니다. 예배가 어떠셨냐는 질문에 “젊은 목자님께서 말씀을 명료하게 잘 하신다.”라며 칭찬하셨습니다. 돌아가는 차 안에서 “부모님과 함께 예배드린 기념사진을 깜박했어요, 기념으로 꼭 사진을 찍어야 하는데…” 라고 하니 아버지께서 못 이기는 척 “그럼 돌아가서 찍든가.” 하시더군요, 어머니는 웃으시며 너 이거 너희 교회 월말 발자취 영상에 올릴 거지? 하셨고요. 진정 구독자가 맞으시구나 생각했어요.
저는 이런 일이 이렇게 빨리 올 거라고 생각을 못했습니다, 물론 부모님이 당장 참예수교회에 오시겠다고 하신 것도 아니고 세례를 받으신 것도 아니지만 하나님은 내가 잊고 있을 때에도 나의 기도를 잊지 않으시고 일하고 계셨다는 생각에 너무나 감격스러워 눈물이 났습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남편 손을 꼭 잡으며 우리 더 열심히 기도하자고 다짐했습니다. 이 글을 읽으신 성도님들께서도 함께 기도 부탁드리고 저처럼 전도를 위해 기도하시는 분들이 언젠가 이뤄질 기도 응답의 소망을 품고 열심히 전진하시길 저도 기도하겠습니다. 모든 영광 감사 주님께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