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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음 메세지]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눅 12:32)

    [복음 메세지]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눅 12:32)

    [말씀 제목]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눅 12:32)

    [설교자] 김세한 목자

    [설교일] 2025.11.22

    분당교회 즉 전 성남 기도소에 첫 부임했을 때의 일이다. 당시 경제적인 형편이 넉넉지 않으니 인테리어 작업을 집사람과 직접했다. 전기톱을 빌려서 계단 하나 높이만한 단을 직접 제단했고 그 위에 붉은 색 융으로 덮었다. 벽면 페인트 칠을 하고 자모 예배실 창문 썬팅 작업도 했다. 그렇게 인테리어 작업을 마친 후 첫 안식일예배를 드려야 하는데 고민이 되었다. 왜냐하면 안식일 오전 예배에 참석할 사람이 몇 명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할머니 한분, 그리고 아기엄마 둘이었다. 게다가 정자동 할머니가 혼자 버스를 타고 40분이나 걸려서 하차한 후 교회까지 걸어오는 것은 불가능했다. 갓난 아기를 막 출산한 두 자매도 아기를 안고 버스를 타고 교회까지 오는 것이 불가능했다. 모든 형제들은 모두 직장에 매여 있었다. 그러니 참석자가 없을 것이 불보듯 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전 예배를 드리기로 결정했다. 금요일 오후까지 예배 준비를 모두 마쳤고 안식일 오전이 밝았다. 그렇게 우리 내외, 할머니, 두 자매와 두 아기 그렇게 7명으로 전세 얻은 회당에서 안식일 오전 첫 예배가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1년 뒤 예배 인원은 15명이 되었고 수세자도 다섯 명이나 되었다. 수세자는 박지영 문지혜 자매와 백소영 어린이 백하영 아기 최종민 아기 이렇게 다섯 사람이었다.

    그 과거를 회상하면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숫자에 관심이 많고 연연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현재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지금보다 나은 미래의 열매를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현재 눈에 보이는 것에 굴복하고 사는가? 아니면 믿음의 눈으로 미래를 보고 있는가? 무엇이 그리스도의 마음에 합당한 눈일까? 오늘은 제자들에게 주셨던 예수님의 말씀 중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라는 이 말씀의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고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우리는 어떤 가치를 평가할 때 많은 사람들이 따르는 의견을 수용하고 소수의 의견은 버린다. 이렇게 다수의 의견에 의해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을 다수결의 원칙이라고 한다. 당연히 민주주의 사회에 태어나 그것에 익숙한 우리는 그것에 매우 친숙하다. 그런데 이 성향은 종교를 선택하는 일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수의 사람이 다니는 교회, 다수의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사상을 따르려고 한다. 그러나 종교를 선택하고 진리를 분별하는 일에는 과연 그것이 합당한 기준인가? 그렇지 않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다수결의 맹점이 발견된다. 20세기까지 지구상의 절반의 나라들은 사회주의 사상에 현혹되어 공산주의 국가체제를 선택했다. 그러나 소련과 동유럽 국가의 붕괴와 함께 그 사상은 환상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이렇게 다수의 사람들이 좇았지만 그것은 허상이고 합당치 않은 것이라는 점이 발견되는 경우가 있다.

    또 중세 역사 속에 마녀사냥이 있었다. 유럽의 종교전쟁과 30년 전쟁, 그리고 페스트에 의한 팬데믹 기간을 경험하면서 사람들은 그 원인을 생각했다. 도대체 이 많은 재난과 재앙의 원인이 무엇일까? 그리고 사람들은 그 원인이 마법사, 마녀같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재난과 재앙이 임했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생각할 수 없는 미신적 결론에 도달한 결과는 암울했다. 죄없는 양민을 마법사나 마녀로 몰려 화형에 처했다. 소위 이것이 마녀사냥이다. 이 마녀사냥은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와 기타 유럽 전역으로 퍼졌고 많은 사람이 죽었다. 우매한 다수의 편견이 만들어낸 범죄의 역사였다.

    그런가하면 과학의 영역에도 다수결의 폐단이 있었다. 르네상스 문예부흥의 시대에 천체를 연구하는 과학자가 있었다. 그는 갈릴레오 갈릴레이였다. 망원경으로 열심히 천체를 관찰하던 그는 태양과 천체가 지구를 중심으로 회전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회전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전자를 천동설, 후자를 지동설이라고 한다. 지금은 지동설이 당연한 과학적 사실이지만 그 무렵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런데 갈릴레이는 지동설 때문에 종교 재판에 회부된다. 지동설을 주장하고 죽을 것이냐 철회하고 살 것이냐의 기로에서 그는 지동설을 철회하고 목숨은 구했다. 그러나 그는 법정에서 물러나면서 혼잣말을 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현대에 와서는 천동설을 믿는 바보는 아무도 없다. 이처럼 과학적 진리의 분별에도 우매한 다수의 판단이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인류 역사 속에 오히려 다수가 미신에 빠져 범죄하고 다수가 우매한 결론에 도달한 사례를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인류의 역사뿐만 아니라 성경의 역사를 살펴보아도 별다르지 않다. 노아 시대에 하나님은 죄악으로 가득찬 세상을 보시며 한탄하셨다. 그래서 부패한 인류를 물로 멸망시키고자 하셨다. 이에 대해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벧전 3: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겨우 여덟 명이라’ 대단히 적은 수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노아 홍수 시대에 절대 다수의 인류는 멸망하고 소수만 구원을 받은 성경의 역사가 있다.

    또 분열왕국 시대 아합 왕의 통치기에 이르러 유사한 사례를 발견한다. 당시 왕과 모든 백성들은 여호와만 섬기는 신앙을 떠나 다른 이방 신도 섬기는 우상숭배에 빠진다. 왕국이 죄악으로 멸망해 가는 그 때에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는 신앙 회복을 위해 갈멜산에서 다수의 거짓 선지자들과 대결한다.

    (왕상 18:22) 『엘리야가 백성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오십 인이로다』

    사백오십 인과 한 사람, 절대 다수와 절대소수가 대조되고 있다. 엘리야 선지자는 바울 선지자 사백오십에 아스다롯 숭배자 사백인을 합해 총 팔백 오십 인과 대결한다. 그 대결에서 승리하고 우상 숭배한 선지자들은 모두 죽임을 당한다.

    이처럼 세상의 인류 역사 속에서도 또 성경의 역사 속에서도 우매한 다수가 얼마나 악한 열매를 맺게 되는지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오히려 다수가 아닌 소수의 분별과 선택이 진리인 경우를 본다. 그렇다고 소수이기 때문에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가?그렇지 않다. 다수가 진리일 수도 거짓일 수도 있듯이 소수도 진리일 수도 있고 거짓일 수도 있다. 초점은 수적인 규모가 진리와 거짓의 기준이 될 수 없다는 점이다.

    진리의 기준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분명한 것은 진리란 시대를 초월해서 변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변하지 않으시듯이 진리를 시대를 초월해서 변하지 않아야 한다. 따라서 진리의 기준도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으로부터 기원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사 8:20)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은 구원과 멸망의 열쇠를 가지고 계신 분이다. 따라서 거짓과 진리의 기준도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다.

    종종 복음을 전할 때 이런 고민에 빠지는 사람들이 있다. “당신들이 전하는 세례에 대해서, 성령에 대해서, 안식일에 대해서 모두 성경과 일치하는 진리인 것은 알겠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 세상에 그렇게 많은 기독교회와 교인들이 다 지옥에 간다는 말입니까?” 이 의문에는 두 개의 생각이 충돌하고 있다.

    한편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라는 것을 안다. 반면 이미 익숙한 다수결의 원리가 기준이라는 생각도 있다. 그래서 이 두 가지가 마음속에서 서로 충돌할 때 이런 의문을 제기한다. 저는 장로교회에서 본교회로 개종하면서 이런 질문을 했었다. 이런 고민의 상황에 처한다면 어디서 해답을 찾을 수 있을까? 우리는 바울 사도의 상황에서 찾을 수 있다. 바울은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인물이다. 그에게도 마음 속에 그러한 고민이 있었다. 그리고 그 고민 가운데 그가 내린 결론은 이것이다.

    (롬 9:27)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로마서에서 바울은 한 가지 난제가 있었다. 그 난제로 고민했다. 그 고민이란 이스라엘 백성들은 택함받은 백성인데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왜 그들은 그분을 거절했는가였다. 하나님은 분명히 그들을 구원하시려고 선민으로 택하셨는데 메시야를 거절했으니 그들에게는 구원이 없는 것이 명확하다. 그래서 바울은 마음 속에 이런 의문이 생겼다. “그러면 유대인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은 헛된 것인가? 모두 거짓말인가?” 바울의 결론은 신실하신 하나님이 그럴 리 없다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남은 자에서 답을 찾아냈다.

    (사 10:20-21) 『[20]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 자기를 친 자를 의뢰치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 여호와를 진실히 의뢰하리니 [21]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남은 자란 바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지 않고 가나안 땅에 남아있던 자들, 또는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다가 본토로 돌아온 자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소수의 사람들이었다. 바울 사도는 이사야서에 기록된 ‘남은 자’를 이렇게 해석하고 있다. 마치 구약 시대에 그 남은 자가 있었듯이 사도시대에도 대부분의 유대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했지만 소수의 유대인들이 받아들이고 믿었다. 그 소수의 유대인들이 바로 사도시대의 ‘남은 자’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해석은 오늘날에도 역시 유효하다. 엘리야 선지자 시대의 남은 자처럼, 바울 사도 시대의 남은 자처럼, 오늘날 하나님의 약속을 떠나지 않고 남아 있는 자들, 복음을 떠나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는 자들이 바로 이 시대의 남은 자인 것이다. 그래서 사도시대의 세례, 사도시대의 성령, 사도시대의 안식일이라는 진리를 붙들고 있는 우리가 오늘 이 시대의 남은 자인 것이다.

    오늘날 우리 성도님들은 바로 내가 이 시대에 남은 자라는 의식이 있는가? 육신의 눈으로 볼 때 참예수교회는 척박한 가나안 땅처럼 보인다. 소수이고 결핍되고 풍요롭지 않다. 그러나 살아계신 성령이 계시고, 진리의 말씀이 있고, 신도들의 순수한 삶의 모습이 있다. 이것이 우리의 소유요 재산이다. 그 소유와 재산의 가치를 깨닫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자.

    엘리야 선지자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의 대결에서 승리했다.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제물을 살랐을 뿐 아니라 칼로 그 우상숭배의 선지자들을 다 죽였다. 그런데도 엘리야는 로뎀나무 아래서 하나님께 죽기를 구했다.

    (왕상 19:4)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 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엘리야 선지자의 이런 비관과 절망의 원인이 무엇이었는가?

    (왕상 19:14)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엘리야의 눈에는 갈멜산의 승리 뒤에 세상에 변화된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아합왕이 재를 뒤집어 쓰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지도 않았다. 백성들이 우상을 다 불태우고 하나님께 돌아온 것도 아니다. 오히려 왕후 이세벨이 죽이겠다고 협박까지 한다. 엘리야는 이런 상황을 놓고 크게 실망했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 나만 남았으니 죽여달라고 했다. 극도의 비관과 절망을 토로한 것이다. 그 때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했다.

    (왕상 19:18)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하나님은 엘리야의 눈에 발견되지 않는 칠천인의 존재를 말씀하셨다. 구약의 엘리야 선지자 시대의 이 사건에 대해서 바울 사도는 로마서를 기록할 때 이렇게 인용한다.

    (롬 11:3-5) 『[3] 주여 저희가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4]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5]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바울사도는 엘리야 시대에 겉으로는 엘리야 선지자 하나만 남은 것으로 보였지만 하나님이 칠천을 남기신 것처럼 오늘날에도 그 수가 많건 적건 남은 자가 있을 것이라고 한다. 만약 바울 사도가 구약 역사에 대한 인식과 해석이 그렇다면 오늘날 참예수교회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해석도 그러해야 한다는 것이다.

    육적인 이스라엘은 세계 인구의 0.25%인 천 이백 만 밖에 안된다. 그러나 역대 노벨상 수상자의 45%가 바로 그들이다. 미국 백대 부호 중에 20%가 유대인이다. 세계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속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며 좌지우지하는 민족이 바로 이 소수의 유대민족이다.

    (신 7:7)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육적인 이스라엘도 이러하나 영적인 이스라엘인 참예수교회도 육적인 눈으로 볼 때 수적으로 얼마 되지 않는다. 지구상의 70억 인구 중에서 60여만 명은 사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비율이다. 절대 소수이다. 그러나 우리가 바로 영적인 이스라엘이요, 인류사의 끝에 있는 남은 자들이다.

    (눅 12:32)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하나님이 신약 시대에 영적 이스라엘을 향해 말씀하신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진리는 소수일 수 있다. 그러나 진리는 없어지거나 죽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가 남은 자로서 믿음을 가지고 있는 한 살아서 역사하실 것이다. 그 미래를 이루기 위해서 성도님들은 말세의 남은 자로 선택되었다. 엘리야 시대에 남은 자처럼, 사도 시대에 남은 자처럼, 하나님은 말세의 남은 자인 우리들을 통해 하나님이 뜻을 이루실 것이다. 그 믿음으로 자기 정체성을 세우시고 복음 전파의 사명을 다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한다.

    https://youtu.be/WxgvNVHMhKU?si=a0TpuieHnMB_2G-W

    글작성 : 김세한 목자

  • [복음메세지] 문안과 축복  (엡 6:21-24)

    [복음메세지] 문안과 축복 (엡 6:21-24)

     [제    목] 문안과 축복 (엡 6:21-24)

     [설교자] 허명도 목자   

     [설교일] 202567일 안식일 오전

     할렐루야,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에베소서 6장 21절-24절 말씀인 “문안과 축복”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증거하겠습니다. 이 시간에는 에베소서 마지막 부분인 6장 21절부터 24절까지의 말씀을 통해 ‘문안’과 ‘축복’이라는 두 가지 큰 주제로 은혜 나누겠습니다.

      1. 문안: 사랑의 전령사 두기고

    나의 사정 곧 내가 무엇을 하는지 너희에게도 알게 하려 하노니 사랑을 받은 형제요.주 안에서 진실한 일군인 두기고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우리 사정을 알게 하고 또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기 위하여 내가 특별히 저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라  [6:21-22]

      바울사도 서신에는 보통 많은 사람들의 문안 인사가 나오는데, 에베소서 마지막에는 유독 ‘두기고’라는 한 사람만 언급이 됩니다. 두기고는 아시아 사람이며 바울사도가 마지막 예루살렘을 방문할 때 동행했습니다.골로새서, 에베소서, 디모데 후서를 전달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라 [행 20:4]

     1) 바울사도의 모든 사정을 다 아는 두기고

      – 두기고는 바울사도와 동행하면서 바울사도의 모든 사정을 알았기에 성도들에게 바울사도와 동행하면서 알게 된 사역의 내용과 상황을 전달 할 수 있었습니다. (골 4:7-8)

    2) 사랑을 받은 형제 두기고

      – 바울사도에게 사랑 받는 믿음직한 동역자였으며, 두기고의 진실된 인격은 교회 안팎으로 인정받았습니다.(엡 6:21, 골 4:7)

    3) 주 안에서 진실한 두기고

     – 두기고는 주 안에서 신실하고 변함없이 헌신하며 겸손한 일꾼으로 섬겼습니다. 두기고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어서 디모데를 부르기 위해 에베소로 보내졌으며, 디도에게도 보냈습니다. (딤후 4:12, 딛 3:12)

     4) 사랑의 위로자 두기고

     – 두기고는 감옥에 있는 바울사도를 대신하여 그의 사정을 교회에 알리고 성도들에게 마음의 위로와 격려를 할 수 있었습니다. (엡 6:22, 골 4:8)

      교회에는 두기고 같은 동역자가 꼭 필요합니다. 두기고 같이 모든 사정을 알고, 교회에서 사랑과 섬김으로 성도들을 위로하고, 주 안에서 신실한 일꾼으로 살아갈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바램과 축복: 에베소성도들을 위한 바울 사도의 3가지 축복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부터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이 형제들에게 있을찌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찌어다 [6:23-24]

    1) 평안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 평안은 그리스도인들 간의 사랑을 통해 실현됩니다. 겸손과 온유, 오래 참음,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며 성령 안에서 하나 될 때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하나가 될 때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것은 평안이기에 그 평안을 누리기 위해서는 먼저 기도해야합니다. (엡 4:2-3)

    2) 믿음을 겸한 사랑이 있기를 바랍니다.

    – 사랑은 살아있는 믿음을 전제로 하며, 주 예수 안에서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이 중요합니다. (엡 1:15, 4:5)

    3) 주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자에게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변함없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전하기 위해 ‘썩지 않음, 불멸’을 뜻하는 헬라어 ἀϕθαρσία  ‘아프달시아’를 언급했습니다.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물으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주님을 향한 변함없는 사랑이 있을 때 풍성한 은혜가 넘칠 수 있습니다. (요 21:15-16)

     바울 사도는 에베소 성도들이 성령으로 하나 되어 평안을 누리고, 믿음과 사랑으로 굳건히 서서, 변함없이 주님을 사랑함으로써 주의 풍성한 은혜가 넘치기를 간절히 바라고 축복했습니다. 우리 믿음이 주님 앞에서 진실하고 천국과 영생의 소망이 마음속에 가득 차게 되어 믿음의 확신이 생길 때 이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은혜의 복음 전파의 일을 마치기 위해선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라는 고백이 나오게 될 때 진정으로 사랑을 실현할 수 있다고 합니다. 주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가운데 주의 풍성한 은혜가 넘칠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될 수 있기를 주 예수 이름으로 바랍니다

    ‘문안과 축복 유튜브로 보기’

  • [복음 메세지]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마5:13-16)

    [복음 메세지]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마5:13-16)

    [말씀 제목]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마5:13-16)

    [설교자] 김세한 목자

    [설교일] 2025년 2월 1일

    2020년은 인류사에서 잊지 못할 한 해로 기억될 것이다. 중국 우한에서 시작된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 세계로 퍼져 나갔고 이로 인해 수많은 확진자와 사망자를 낳았다. 그로 인해 팬데믹이라는 생소한 용어도 알게 되었고 그것이 얼마나 공포스러운 상황인지도 뼈저리게 알게 되었다. 비록 해제된 지 2년이 지났지만 바이러스로 인한 팬데믹 사건은 오늘 날 세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서 큰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세계의 학자들은 21세기를 코로나 이전 시대와 코로나 이후 시대로 양분한다. 이 사건이 역사의 전환점이 되었다는 뜻이다. 이 결과의 원인이 매우 놀랍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 매우 단순한 구조의 바이러스 때문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팬데믹의 경험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유익이 있다. 첫째는 미래를 예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쉽게 또 순식간에 멸망에 이를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따라서 우리는 경성해야 한다. 둘째 유익은 우리 교회의 가치와 영향력에 대한 낙관이다. 작은 바이러스가 이렇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 눈에 보이지도 않는 군소 교단인 우리 교회도 상상할 수 없었던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미래가 올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현재 다수냐 소수냐는 결코 중요하지 않다. 미래에는 소수가 다수도 될 수 있고 다수가 소수로 전락할 수 있다. 설사 소수의 규모에 머문다 할지라도 그 영향력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규모 때문에 위축될 필요가 없다. 또 이런 말씀도 있기 때문이다.

    (눅 12:32)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우리는 지난 시간까지 산상보훈 가운데 팔복 설교를 살펴보았다. ‘복이 있나니’라는 주님의 선언의 내용이 여덟 개의 주제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팔복이라고 했다. 이 여덟 개의 주제는 천국 백성의 속성에 대해 말한다. “천국 백성은 이러한 성품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성품을 가진 자에게 이런 복이 있습니다.”라는 것이 그 내용이다. 거기에 이어서 오늘 말씀이 주어지고 있다. 이러한 성품의 천국 백성은 결국 “세상에 이런 영향력을 미칩니다.” “천국 백성은 이런 역할을 해야 합니다.”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설명하실 때 예수님이 비유를 사용하시고 있다. 바로 소금과 빛이다.

    먼저 발견되는 점은 ‘너희는 소금’이다. ‘너희는 빛’이다. 라고 표현되지 않고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렇게 ‘세상의’라는 수식이 붙는 것은 성도란 세상을 등지고 산 속에 들어가 은둔하면서 살면 안된다는 뜻이다. 오히려 세상 속으로 들어가서 타인과 함께 생활하고 그들과 함께 생활하는 환경에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고전 5:10)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과 토색하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그러면 세상 속에서 소금과 빛이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이고 그런 존재가 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난다는 뜻인가? 그 교훈을 얻기 위해 우리는 소금과 빛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소금과 빛의 공통점을 주목하면 그 의미와 이루어질 일에 대해서 가늠할 수 있다. 둘의 공통점은 이렇다.

    첫째, 소금과 빛은 부패와 오염을 방지한다.

    (엡 5:8-9)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소금은 살균력이 있어서 부패를 방지하는 기능이 있다. 그래서 냉장고가 없던 시절에 음식물 오래 보관하는 방법은 바로 소금에 절여 놓는 것이다. 안동에 가면 꼭 먹어봐야 하는 음식 중에 간고등어가 있다. 바닷가로부터 멀리 떨어진 경북 안동 지방 사람들이 생선을 먹으려면 운송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부패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그래서 상하지 않게 하려고 고등어를 소금으로 절였던 것이다. 그래서 안동에서 간고등어가 명물이 되었다.

    애굽에서는 죽은 시체를 미이라로 만들 때 소금물에 넣어두었었다.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그런가 하면 집안 살림 용품 중에 찌든 때를 제거하고 소독 청소하는 ‘락스’라는 제품이 있다. 이 ‘락스’는 화학상의 원료가 바로 소금이다. 이처럼 소금에는 부패와 오염을 방지하는 기능이 있다.

    빛도 마찬가지로 부패를 방지하는 기능이 있다. 지하실 같은 어두운 장소에는 세균이 득실거린다. 그러나 그곳에 햇볕이 내리쬐거나 그곳의 물건들을 햇볕에 내놓으면 태양광 자외선에 의해서 깨끗이 살균된다.

    병원에서는 질병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일에 사용하는 장비가 있다. 방사선을 사용하는 장비이다. 이런 장비는 빛을 고 에너지로 농축시킨다. 그래서 암환자의 환부에 쪼이면 암세포가 사멸하게 된다. 이처럼 빛에는 병을 치료하는 기능이 있다.

    그런가하면 어두운 밤거리를 비추는 방범등이 있다. 방범등은 청색이 많은데 이는 흰색등보다 더 멀리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색등을 방범용으로 활용하면 범죄율이 감소한다는 설이 있다.

    이처럼 빛과 소금에는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부패와 오염을 방지하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성도를 일컬어 “너희가 바로 그런 존재다”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소금이 그런 속성을 가지도록 만드신 것처럼 그리스도인을 그렇게 만드셨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빛 안에 그런 속성을 넣어두신 것처럼 천국 백성 안에 그런 성향을 가지게 하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무엇을 적극적으로 행하라는 뜻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지키라는 뜻이다. 그 정체성에 충실하면 세상 속에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골 4:6)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세상의 인간관계 속에서 들려오는 말에는 냄새나 향기가 있다. 비방의 말, 원망의 말, 남을 깍아내리는 말, 자기 신분에 걸맞지 않은 말은 마치 부패하는 음식 냄새와 같다. 역겨워서 그 자리를 떠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반면 칭찬의 말, 감사의 말, 은혜를 끼치는 말, 자기 신분에 합당한 말은 방향제를 뿌린 것처럼 향기롭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 곁에는 오래도록 함께 하고 싶다.

    이처럼 내가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신분에 맞는 언어를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세상에 긍정적인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 불신자들은 자신들의 무리 속에 경건한 성도가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긴장한다. 그래서 함부로 상스런 말도 못하고 함부로 행동하지 못한다. 부디 썩어져 가는 세상에서 가장 먼저 은혜로운 언어를 통해 부패를 막고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살아가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란다.

    둘째, 소량이지만 끼치는 영향이 매우 크다.

    바다에서 염분의 양은 3.4%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렇게 작은 비율의 염분 때문에 바다물은 썩지 않는다. 염분은 바다를 썩지 않게 할 뿐만 아니라 인체에도 필수적인 광물이다. 염분은 사람의 혈관 벽에 붙어있는 이물질을 제거하고 혈관이 딱딱해지는 것을 방지한다. 또 장내 소화액 분비를 촉진시키고 장의 움직임을 원활하게 해서 장내 음식물이 부패하는 것을 방지한다. 이처럼 아주 작은 양이지만 소금이 미치는 영향력은 매우 크다.

    빛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한 밤중 망망대해에 떠있는 배들은 항구를 찾아오기 위해서 수많은 조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몇 십 개 몇 백 개의 등대가 필요하지 않다. 불이 켜진 한 개의 등대만 있어도 배들이 악천후에도 안전하게 항구로 되돌아오기에 충분하다.

    가로등도 없는 시골길에서 행인이 보행하려면 어느 정도의 빛을 필요할까? 작은 손전등 하나만 있어도 밤길을 가기에는 충분하다. 그것으로 안전하게 보행할 수 있다.

    작은 빛이라도 있다면 우리는 길을 찾을 수 있다. 이처럼 소금이 아무리 그 분량이 적을지라도, 또 빛이 광도가 아무리 미미할지라도 필요한 때에 필요한 곳에서는 그 영향력은 충분하다. 주님은 바로 천국 백성인 성도를 그런 존재로 만드신 것이다. 부디 그런 사실을 이해하고 세상 속에서 신앙인으로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되자.

    (빌 2:15)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셋째, 자기 희생을 통해 유익을 준다.

    팔레스틴의 소금은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소금과는 많이 다르다. 당시 그 사람들은 바다에서 소금을 취한 것이 아니라 육지에서 소금을 취했다. 이것을 암염이라고 하는데 한마디로 돌과 소금이 섞여 있는 것이다. 사해 주변에는 암염이 많이 있다. 이 암염으로부터 소금을 체취하는 과정은 이렇다. 암염을 물에 넣으면 염분 성분은 녹고 돌 성분만 남는다. 그렇게 물로 녹여낸 염분을 다시 증발시키면 소금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물로 염분을 녹이는 일을 반복하면 나중에는 염분이 다 빠지고 돌 성분만 남게 된다. 이렇게 염분이 다 빠졌으니 이제 소금을 얻을 수 없고 그런 암염은 길바닥에 내다버렸던 것이다. 그러면 그 맛잃은 암염이 오가는 사람들의 발에 밟혔던 것이다. 본문 말씀에 맛 잃은 소금이 발에 밟힌다는 뜻은 이런 배경아래 나온 표현이다. 이처럼 암염이 맛을 내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 있다. 그것은 바로 물에 자기를 녹여내는 과정이 필요하다. 바로 자기를 내어주는 희생이다.

    빛도 유사한 특징이 있다. 예수님 공생애 시대에 이스라엘의 가옥 구조는 단순했다. 오늘날처럼 채광이 잘되는 구조가 아니다. 출입문이 하나요 창문은 작았다. 그래서 대낮에도 실내는 매우 어두웠다. 그렇다보니 사람들은 주간에도 항상 등잔불을 켜고 생활해야만 했다. 따라서 전기도 없던 그 시절에 등잔은 모든 가정이 구비하는 필수품이었다. 그 등잔에 불을 밝히려면 기름이 필요했는데 그 기름의 원료는 바로 감람유, 올리브유였다. 올리브유는 정제해서 가장 먼저 추출되는 것을 엑스트라 버진이라고 해서 식료품으로 사용한다. 보통 네 차례정도 추출하는데 가장 나중에 추출되는 질이 낮은 올리브 오일을 등불용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이처럼 실내에 빛을 비추려면 등불을 밝혀야 했고 등불을 밝히려면 기름이 태워져야 했다. 즉 자기를 내어주는 희생의 과정이 필요했다.

    이렇듯 소금을 보아도 등잔불을 보아도 녹아지고 태워져야 한다. 녹아지고 태워지는 희생의 과정이 없으면 존재로서의 기능을 할 수 없다. 이처럼 성도가 천국 백성이라는 존재로서 의미가 있으려면, 자기 사명을 완수하려면 반드시 자기희생의 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교훈하고 있다. 그런데 그 희생은 그렇게 거창한 것이 아니다. 첫째는 내가 세상 속에서 신앙인이라는 것을 밝혀야 한다. 소위 커밍 아웃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다운 말과 행동을 통해서 세상과 소통하고 대화하며 사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빛과 소금의 사명을 다하는 참 성도의 모습이다. 만약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살아간다면 그것은 마치 염분이 다 빠진 암염과 같다. 그것은 마치 등잔불에 소쿠리를 덮어 놓은 것과 같다. 부디 자기 정체와 자기 신앙을 세상을 향해 적극적으로 밝히고 드러내는 성도가 되자.

    예)참예수교회의 초기의 발전에 자기희생의 목자님들이 있었다. 세무서 공무원의 안정적인 신분도 마다하고 나아가 순교도 불사하고 목회의 길을 나선 박필선 목자님 같은 분들의 희생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그분 한 분이 아니었다. 한국전쟁 이후 가난하고 어려운 시대에 사회로 나가지 않고 한 달에 쌀 한 포대 정도의 노임만 받고 희생한 원로 목자님들이 있었다. 이렇게 자기를 내어주는 목자님들이 있었기 때문에 참예수교회가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그런 희생의 전통은 끊어지지 않고 대물림 되었다. 어떤 목자님은 사회 속의 안정된 직장을 그만두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위해서 목회의 길을 선택했다. 자기를 내어주는 희생의 정신은 앞으로도 그 전통이 되어 이어질 것이다.

    그런 현실을 볼 때 저는 비록 우리 교회가 소수지만 미래가 매우 밝다고 확신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소금과 빛의 역할이 살아있다는 뜻이고 그것이 살아있으면 우리 교회는 미래에 세상을 변화시키는 큰 결과를 나타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성도님들은 어떻게 소금과 빛의 사명을 다할 수 있을까? 모두 목회자가 되어야할까? 박필선 목자님처럼 다른 원로 목자님들처럼 그렇게 목회자의 길을 가라는 것인가? 순교라도 하라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성도님들은 최전선에서 세상과 접촉하며 영적인 전쟁을 수행하고 있다. 그래서 자기가 소속한 사회와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면 소금과 빛의 사명을 완수하시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기독교인이라는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기를 두려워하지 말자. 그리고 그 자기 정체에 일치하는 삶을 살자. 세상으로부터 저들이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라는 칭찬을 듣자. 여기까지 가면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고전 6: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이 세상의 사람들은 소유를 추구하는 삶을 산다. 그러나 우리는 소유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지 않았다. 세상을 위해 내어주기 위해서 왔다. 주님이 먼저 십자가에서 그 모범을 보여주셨다. 부디 주님이 남기신 모범대로 빛과 소금의 본분을 다하는 성도가 되자. 나를 통해 세상이 변화될 것이다. 그리고 세상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올 것이다. 그 사명을 감당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천국의 기업을 상속하시는 저와 성도가 다 되시길 예수님 이름으로 기원한다.

  • [복음 메시지] 구원의 핵심진리, 안식일

    [복음 메시지] 구원의 핵심진리, 안식일

    제목: 구원의 핵심 진리, 안식일

    일시: 2024년 10월 25일 안식일 저녁 예배

    설교자: 장종규 목자

     

    1. 안식일이란?

    성경에 등장하는 ‘안식일’은 무슨 날일까요? “안식”은 ‘자신이 하던 일을 끝내고 쉰다’라는 의미입니다. 안식이라는 단어가 가장 처음 등장하는 성경은 창세기입니다.

    (창2:2)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창세기에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는 내용뿐 아니라 창조하신 일을 다 마치시고 안식하라는 말씀이 기록되었습니다. 안식일의 기원이 사람의 명령이 아닌 창세 때의 하나님의 명령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성경은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음을 기록하는데, 성경이 기록하는 안식일은 일곱째 날, 곧 토요일입니다. 정확히는 저녁부터 하루를 세는 성경의 기준으로 금요일 일몰부터 토요일 일몰에 해당합니다.

     

    2.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이유

    성경은 이 안식일을 지키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에 어떤 의미가 있기 때문에 안식일을 지키라고 말씀하시는 걸까요?

     

    첫째,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출20:8~11)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칠 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출애굽기 20장의 내용은 십계명에 관한 내용입니다. 네 번째 계명에서 하나님 백성들에게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11절에 나오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 일에 쉬셨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기념하기 위해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지키는 가운데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기억할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둘째, 구원자이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신5:12~15)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게 명한 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신명기에서는 앞서 살펴본 출애굽기와 비슷한 내용이지만, 자세히 보면 조금 다른 내용이 있습니다. 바로 출애굽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명기는 과거 애굽에서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백성을 자유민이 되도록 하신 구원을 기억하며 안식일을 지킬 것을 명합니다. 이렇게 안식일에 대한 동일한 두 말씀에서 각자 창조와 구원을 말하시는 것을 통해, 구원은 곧 창조임을 알 수 있습니다. 구원받았다는 것은 애굽(죄)의 종이 아닌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뜻인데, 이러한 신분의 변화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창조됨을 의미합니다. (사43:21).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그 백성을 지키신다고 말씀하십니다(시121:4). 전능하신 하나님이 지키시니 하나님 백성보다 안전한 상태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 삼아 주신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하고 찬양하길 바라십니다.

    셋째, 안식일을 지킴으로 영육 간에 복을 받습니다.

    (창2:3)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하나님께서는 이 안식일에 복을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안식일을 복되게 하셨다는 것으로, 안식일을 지키면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복은 영육 간에 주시는 복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안식일을 지킬 때 만나와 메추리로 그들의 필요를 채우신 것처럼,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특별히 병 고침의 은혜를 베푸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에 모여서 예배할 때 성도에게 필요한 말씀을 주셔서 영의 양식을 채우십니다. 실제로 많은 성도님이 한 주 동안 힘들었다가 안식일에 말씀을 듣고 힘을 얻거나, 말씀을 통해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입니다.

    넷째, 안식일을 거룩하게 구별하셨습니다.

    (출31:13)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로 알게 함이라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나의’ 안식일이라고 말씀하시며 안식일이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표징, 곧 증거가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 곧 하나님의 날을 지키는 것이므로, 이를 하나님 백성인 증거로 보신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백성에서 끊어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출31:14).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분이므로 하나님 안에 거하려면 거룩해야 하는데,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면 점점 거룩함을 잃어서 결국에는 하나님 안에 거하지 못하게 됩니다. 생명이신 하나님 안에 거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죽음을 맞게 됩니다. 즉 안식일은 거룩함을 유지하게 해주는 날로 이를 지키면 구원에 이르게 되지만, 반대로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면 점점 구원에서 멀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섯째, 안식일을 통해 영원한 안식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안식이란 하나님 나라에 가서 누리게 되는 진정한 안식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안식을 누리기 전 세상에 살 동안에 안식일을 통해 그 안식을 준비하도록 하셨습니다.

    (히4:11)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안식일에는 성도가 같이 모여 예배드리고 교제하면서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 힘들었던 부분이 하나님 안에서 해결됨으로 마음의 평안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안식을 통해 영원한 안식을 소망하고, 더욱 하나님 백성으로서 합당한 삶을 살아가도록 안식일을 주셨습니다.

     

    3. 안식일에 대한 오해

    그렇다면 왜 오늘날 많은 사람은 아직도 안식일을 지키지 않을까요?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는 일요일, 즉 주일을 지킵니다. 주일을 지키는 이유는 예수님이 오신 이후에는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으므로 율법의 일부인 안식일을 지킬 필요도 없고, 도리어 예수님이 부활하신 일요일이 의미 있으므로 주일(일요일)을 지켜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주장이 사실일까요?

    (갈3:15-17) 형제들아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나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갈라디아서 말씀은 율법을 주시기 430년 전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언약을 나중에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를 안식일에 동일하게 적용해 보면, 안식일은 천지를 창조하실 때부터 만들어졌기 때문에 나중에 주신 율법에 속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얻게 됩니다. 물론 율법 속에는 안식일에 무엇을 해서는 안 되는지에 대한 방법에 대한 규례가 있고, 이러한 것은 율법에 속한 것이므로 예수님께서 오신 이후 오늘날은 지킬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안식일 그 자체는 율법의 속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십계명에 직접 주신 다른 말씀들도 오늘날까지 지켜야 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안식일도 동일하게 오늘까지도 기억하여 거룩히 지켜야 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한 날이 일요일이라는 주장도 명확한 근거가 없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일요일에 부활했다고 말하지 않고, 단지 사람들이 일요일 새벽에 갔더니 예수님이 보이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설사 예수님께서 일요일에 부활했다고 하더라도 성경 전반에서 아주 중요한 안식일이 다른 날로 변경되는 것이라면 반드시 성경에 언급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일요일에 부활했으므로 안식일을 대신해 일요일을 지킨다는 것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막7:6-8)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

    마가복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사람의 계명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헛되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겉으로는 섬기는 것처럼 보여도, 예수님께서 보시기에는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피조물이 창조주 하나님의 명령을 버리는 일은 있을 수 없는데, 오늘날 성탄절, 부활절 등 성경에 없는 절기를 지키면서 성경에 있는 말씀은 지키지 않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일을 결코 기뻐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사람의 계명을 우선하는 교만함에 진노하십니다.

     

    마무리하며

    (사58:13,14)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이니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날인 안식일을 내 중심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면 위와 같은 복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실제로 이와 같이 안식일을 지키면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받습니다. 안식일을 힘써 지킴으로 하나님 주신 복을 누리기를 원합니다.

    유튜브 설교방송 링크

    글| 오다은 자매

  • [복음 메세지] 심령이 가능한 자는 복이 있나니(마5:1-12)

    [복음 메세지] 심령이 가능한 자는 복이 있나니(마5:1-12)

    [말씀 제목]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마5:1-12)

    [설교자] 김세한 목자

    [설교일] 2024년 11월 2일

    19세기 말 지식인들은 앞으로 다가올 20세기를 일컬어 인류의 황금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 장밋빛 미래 예측의 근거는 인간의 과학 기술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작 20세기에 이르렀을 때 그 예측은 크게 빗나갔다. 두 차례에 걸친 세계 대전을 통해 미래가 밝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또 다른 문제들도 있었다. 과학기술의 발달은 산업 혁명을 통해서 물질적 풍요는 이루었지만 빈부의 격차라는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고 또 오늘날에 와서 환경오염, 기후 변화 등의 문제가 인간의 목을 조르고 있다. 인류는 이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개선이 아니라 개악의 상황을 마주하고 있다. 그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사람이 물질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행복과 불행이라는 영혼의 문제를 물질에서 찾을 수 있다는 잘못된 전제와 남보다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높은 곳에 있고자 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들이다.

    인류의 역사도 그렇지만 오늘날 개인의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물질과 육체의 욕망에 집중하며 살면 인생이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한다. 과거 인류의 역사 속에서 그 전제가 틀렸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교훈을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잘못된 전제에 빠져 자기 인생을 허비하고 살아간다. 우리는 창세기에서 그런 어리석은 인간의 전형을 발견한다. 바로 소돔과 고모라 땅을 선택했던 롯이다. 롯은 눈에 끌리는 대로 풍요로워 보이는 소돔 땅을 선택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그 땅은 유황불에 멸망하고 그 멸망과 함께 롯도 모든 것을 잃는다. 욕망하는 것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모두 잃는 모순된 결과를 맞이한다. 이것이 똑똑한 것 같지만 어리석은 인간의 실상이다. 이러한 인간의 어리석음은 또 어디에서 발견되는가? 멀리 있는 유익을 보지 못하고 당장 눈앞에 유익에 집착한다. 자신에게 해가되는 것도 모르고 목숨을 바쳐 쟁취하려고 달려든다. 가장 소중한 것을 옆에 두고 가장 먼 곳에서 그것을 헤매기도 한다. 또 정작 가장 소중한 것을 찾았는데 변덕이 생겨서 그것을 헌신짝처럼 내버리기도 한다. 인간은 이렇게 어리석은 면이 많고 헤매는 존재임을 성경은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사 59:8) 『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며 그들의 행하는 곳에는 공의가 없으며 굽은 길을 스스로 만드나니 무릇 이 길을 밟는 자는 평강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는 어떻게 이런 오류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로서 천국의 백성으로서 평강을 누리고, 가치를 누리고, 하나님께 드릴 아름다운 보석으로 내 인생을 장식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서 나는 먼저 어떤 존재가 되어야할까? 오늘은 산상보훈의 팔복 설교의 첫 구절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는 이 말씀의 뜻을 되새기고 함께 은혜를 나누는 시간을 가지고자 한다.

    오늘 구절에 대해서 문법적으로 살펴보면 먼저 문장 순서가 원문의 것과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원문을 직역하면 “복이 있으리라, 심령이 가난한 자들에게, 왜냐하면 천국이 저희들의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순서로 기록되었다. 복이 있다는 기원의 말이 문장의 맨 앞에 등장하고 복이 주어진 이유를 맨 나중에 기록하고 있다. 주목되는 단어가 있는데 첫째는 심령이란 명사이고 둘째는 가난하다라는 동사이다. 심령이란 명사는 ‘프뉴마’(pneu’ma) 즉 ‘영’(靈)이란 뜻이다. 가난하다란 동사는 ‘프토코스’(ptwcov”)로 ‘가난하다, 불쌍하다, 연약하다, 빈궁하다’라는 뜻이다. 그래서 문자대로 옮기면 ‘심령이 가난하다’라는 것은 곧 영이 빈궁하다.’ ‘영이 결핍되어 있다.’ ‘영이 불쌍하다라는 뜻이다. 우리는 영이란 단어를 안다. 그리고 가난하다라는 단어도 안다. 그런데 ‘영이 가난하다’라는 말은 도대체 어떤 개념인가? 또 영이 가난한 자는 왜 천국이 보장됨을 선언하고 있는가? 여기서 말하는 영이 가난한 자는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가?

    첫째, 세상의 것으로 채울 수 없는 마음이다.

    (사 66: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

    사실 심령이 가난하다는 표현은 예수님이 처음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유사한 표현을 사용했다. 이사야 선지자의 글을 통해 알 수 있는, 영이 가난하다는 뜻은 곧 하나님을 의식하고 그분과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갈망의 마음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존재를 알고, 그분의 말씀을 존중하며, 그분을 경외하기 때문에 가지게 되는 마음의 상태가 바로 영이 가난한 상태이다. 여기서 오해하지 않아야 할 점은 세상 사람들이 흔히 말하기를 “물질은 없어도 마음만은 부자다”라는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음의 풍요가 중요하니 물질적 가난은 중요하지 않다”라는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심령의 가난하다는 개념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다. 하나님을 알고, 그분과 교제하고자 하고, 그분의 손길을 소망하기에 가지게 되는 영혼의 결핍 상태가 바로 심령이 가난한 상태라는 것이다.

    예수님 공생애 초기에 예수님을 밤중에 찾아온 자가 있었다. 바로 니고데모이다. 그는 육신적으로 부족할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산헤드린 공회원이요, 바리새인이요 예수님 장례에 몰약을 백근 쯤 봉헌한 인물이다. 소위 명예와 신분과 재력을 모두 갖춘 자이다. 그런데 그가 뭐가 아쉬워서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는가? 자신이 소유한 것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내적인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천국에 들어가는 길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것을 알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은 거듭 나야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구원의 핵심을 말씀하셨다. 세상 기준으로 보면 다 가졌는데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영혼의 갈급함을 느끼는 자, 이와 같은 사람이 바로 심령이 가난한 자이다.

    또 마태가 있다. 그의 직업은 세리였다. 백성들에게 세금을 거둬서 로마 정부에 일정액만 잘 상납하면 나머지는 자신이 몫이 되었다. 그러니 욕심대로 부를 축적하고 물질의 풍요를 누릴 수 있는 직업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세관에서 일하는 그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신다. 그리고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신다. 마태는 놀랍게도 이 한 마디에 주저 없이 그 자리에서 일어나 예수님을 쫓는다. 가족과 의논하지도 않고 시간을 지체하지도 않았다. 그는 왜 이렇게 행동하고 있는가? 분명한 사실은 그는 그 풍요의 자리에 미련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응답이 즉각적인 것을 보면 그는 세리의 자리를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마태 같은 사람이 심령이 가난한 자이다. 이런 사람의 특징은 그 마음을 세상 것으로 채우지 못하고 하나님으로 채우려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가? 하나님에 대한 욕망보다 세상 물질에 대한 욕망 때문에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마치 쇼핑 중독에 걸린 사람이 물건을 사면 살수록 더 사고 싶고 사서 집에다 쌓아놓으면서 다시 사는 것처럼 물질에 집중하면서 살고 있지 않는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만족하고 이웃과 나누면서 행복한 삶을 사는가? 아니면 세상의 것을 끊임없이 욕망하면서 헛된 노력에 매달리고 있는가? 부디 육체의 욕망에 사로잡혀 물을 보관하지 못하는 터진 웅덩이가 되지 말고 하나님께 갈급하고 하나님 주신 것으로 채우고 만족할 수 있는 영혼이 되시길 바란다.

    (렘 2: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둘째, 세상의 것을 자랑하지 않는 마음이다.

    (왕상 8:27)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

    심령이 가난한 자의 두 번째 특징은 세상의 것으로 자랑하지 않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세상에서 추구하는 것은 한결같다. 자기 물질, 신분, 권세를 추구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것을 얻으면 자랑한다. 그러나 심령이 가난한 자는 그런 것으로 자랑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하나님 앞에 겸손하다.

    솔로몬 왕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둘도 없는 화려한 성전을 지은 인물이다. 그러나 정작 그가 성전을 완성했을 때 그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했다. 하나님은 세상을 초월해서 계시는 분이기 때문에, 자신의 손으로 지은 건물은 그 분을 모실만한 거처가 못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낙성식 기도에서 그는 이 생각을 고백한다. 초기의 솔로몬은 이렇게 심령이 가난한 자였다.

    솔로몬은 육적 성전을 지었지만 신약 시대에 이르러 영적인 성전을 지은 인물이 있다. 바울이다. 그는 바리새인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가말리엘 문하에서 배운 율법사였다. 오늘날 표현을 빌리면 개인적 스펙이 화려한 사람이다. 그러나 바울은 이 모든 것들을 오히려 배설물로 여긴다고 말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고 가장 가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 머리 속의 지식으로만 끝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알기 때문에 핍박과 위험을 감내하며 그분의 몸 된 교회를 세우는 일에 헌신했다. 그렇게 헌신의 삶을 살고 인생의 황혼기에 이르렀을 때 그의 태도는 어떠했는가? 오히려 나의 나 된 것은 주의 은혜로 되었다고 고백했다.

    (고전 15: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심령이 가난한 자의 특징은 자기를 낮춘다. 우리는 때로 세상 것을 포기했다고 말하면서 교회 안에서 세상 것을 추구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경우도 있다. 마치 베드로와 제자들이 배와 그물은 버리고 예수를 쫓았는데 예수님이 유대인의 임금이 되면 좌편과 우편에 앉아서 벼슬 좀 하사 받으려고 했던 것처럼 말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천국의 것을 세상 것 자랑하듯 자랑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 자기의 하찮음을 돌아볼 줄 알고 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잘 알기 때문이다. 부디 하나님이 너무 크심을 알고 자기의 작음을 고백하는 자가 되자.

    (고전 3:21)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셋째, 오로지 하나님만을 소망하는 마음이다.

    (시 42: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공급하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물질이든, 환경이든, 사람이든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면 하나님은 필요한 때 필요한 것을 우리에게 주실 수 있다. 그런데 시편의 기자는 물질도, 환경도, 사람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를 찾기에 갈급한다고 했다. 그래서 ‘주님이 주시는 복을 갈급해 한다’고 기록하지 않고 ‘주님을 찾기에 갈급함’을 노래했다. 이 마음을 어떻게 비유할 수 있을까?

    엄마가 아이에게 말한다. “엄마가 장보고 돌아오기 전까지 집에서 잘 놀고 있거라! 돌아와서 맛있는 과자를 사줄테니 잘 놀고 있거라.” 그런데 아이는 싫다고 울면서 떼를 쓴다. 과자도 싫고 사탕도 싫고 장난감도 싫으니 엄마랑 떨어지지 않겠단다. 마치 어머니에게 함께 있기를 애원하는 이 어린 아기처럼 주님을 찾기에 갈급한 마음은 그런 마음이다. 마치 어린아이가 과자와 사탕과 장남감을 좋아하지만 과자도 사탕도 장난감도 엄마를 대신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이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 2년 동안 청계천 판자촌에서 산 경험이 있다. 그 때의 추억은 한마디로 가난이다. 판자촌은 합판을 덧대서 망치질한 방에 벽면은 도배지 대신 신문지로 발랐고 그렇게 만들어진 방과 방들이 끝없이 연결되어 있었다. 요즘은 한 집에 화장실이 둘도 있지만 그 때는 화장실이 한 집에 하나도 없었다. 화장실은 온 마을 사람이 함께 쓰는 공중 화장실이었다. 마을 앞에는 청계천이 흐르고 어머님은 직장에 다니시면서 매일 동생과 저에게 10원짜리 동전을 쥐어 주셨다. 형제는 행여나 주머니에 넣으면 빠져서 잃어버릴까봐 그냥 손에 꼭 쥐고 하루를 보냈다. 그러다 저녁이 되면 그 돈으로 동네 만화방에 갔다. 왜냐하면 티브이에서 방영하는 재미있는 만화 영화를 보기 위해서다. 만화가 끝날 때 쯤 퇴근하신 어머님은 저희 형제를 데리러 만화방으로 오셨다. 그리고 어머니가 사주시는 붕어빵을 맛있게 먹으며 판자촌 집으로 귀가했다. 이상한 것은 그 가난했던 시절이 지금은 행복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유가 무엇인가? 사랑하는 어머님과 함께한 시간들이었기 때문이다.

    (합 3:17-18) 『[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성도님들 오늘 나는 어떤 영혼의 사람인가? 나의 영혼은 세상의 것으로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다. 오로지 그분으로 우리의 마음을 채울 수 있다. 세상의 것으로 대신할 수 없다. 오로지 하나님을 갈망하며 겸허하게 그분과 동행하는 성도가 되자. 이것이 가난한 심령의 사람이다. 부디 이런 마음을 품고 하나님과 교제하시고 동행하시고 하늘의 속한 신령한 것으로 배부르고 만족해하시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길 예수 이름으로 기원한다.

     

  • [복음 메시지] 아름다운 소식 (사40:9-11)

    [복음 메시지] 아름다운 소식 (사40:9-11)

    제목: 아름다운 소식 (사40:9-11)

    일시: 2024년 8월 31일 안식일 오후 ‘열린 예배’

    설교자: 장종규 목자

     

    아름다운 소식이 있을 때 우리는 전하고 싶습니다. 이사야 40장에서 아름다운 소식은 바로 ‘하나님의 통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다스리는 것이 왜 아름다운 소식일까요?

    첫째는 하나님께서 강한 자로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강대국 바벨론의 압제 아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바벨론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되시니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보라 그에게는 열방은 통의 한 방울 물 같고 저울의 적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니” (40:15)

    이스라엘이 바벨론 압제 속에서 사는 것처럼 세상 사람들은 사단의 권세 속에서 살아갑니다. 사단은 내 생각, 내 욕심대로 살게 함으로 평안도 없고 두려움과 불안의 삶을 살게 합니다. 영적인 소경이기 때문에 다만 알지 못할 뿐입니다.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26:17-18)

    둘째로 하나님의 통치가 아름다운 소식인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목자같이 다스리기 때문입니다.

    그는 목자같이 양무리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40:11)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스리기 때문에 우리는 그 은혜 속에 살아갑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10:14-15)

    주님은 우리를 가장 잘 아실 뿐 아니라 당신의 목숨까지도 버려 사랑하셨습니다. 그 선하신 목자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니 우리는 가장 선하고 좋은 곳으로 인도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는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 그 은혜를 경험하고 더 나아가 이 아름다운 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야겠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수 있을까요?

    먼저, 하나님의 나라 안에 들어와야 합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1:13-14)

    흑암의 권세에서 하나님 나라로 옮겨지기 위해서는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바로 세례를 통해 죄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두 번째, 하나님을 왕으로 모셔야 합니다. 내가 아닌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 곧 순종을 하는 것입니다. 그 순종을 돕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겔36:27)라는 말씀처럼 성령은 우리를 도우십니다. 순종함을 통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 살고 그 기쁨을 주변 사람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열왕기하 7장에는 문둥병자의 아름다운 소식이 나옵니다. 그들의 말을 듣고 성 밖으로 나와야 아름다운 소식을 접할 수 있듯이 우리는 우리만의 견고한 성을 부수고 나와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과 맞지 않는 자기만의 생각, 뜻, 사상, 감정, 경험 등에서 나와야 합니다. 이와 같은 것들을 힘써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와 그 다스리심을 받는 복된 자 되길 원합니다.

    유튜브 설교방송 링크

    글| 백현 자매

  • [복음 메세지] 무엇을 뿌리고 계십니까? (삼하14:1-23)

    [복음 메세지] 무엇을 뿌리고 계십니까? (삼하14:1-23)

    [말씀 제목]  무엇을 뿌리고 계십니까? (삼하14:1-23)

    [설교자]  김세한 목자

    [설교일]  2024년 7월 20일

    어떤 퇴임 목자님의 간증이다. 스무 살이 되어 직장을 구하고 생각했다. ‘이제 월급을 받고 집안도 안정될 테니 담배도 좀 피우고 술도 좀 배우고 노래도 좀 배워야겠다!’ 그런데 어느 날 이웃에 친근하신 할머니가 “아무개야! 이제는 교회 나가야지?” 권유하시더란다. 그래서 “예”라고 대답하고 그분을 좇아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인생의 방향이 바뀌었다. 담배도 술도 유행가도 모두 끊고 교회 생활에 빠져든 것이다. 그런데 신앙생활이 어찌나 즐겁던지 나중에는 신학 공부를 하게 되었고 총회로부터 권유 받아 목회자가 되었다. 그리고 평생 하나님의 일꾼으로 섬기다가 정년 퇴임하셨다. 과거를 돌아볼 때 동네 할머니의 한 마디. “아무개야! 이제는 교회 나가야지?” 그 한 마디의 말이 인생의 전환점을 만들었던 것이다.

    이런 간증을 듣노라면 우리의 말과 행동의 영향력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당시에는 대수롭지 않은 말과 행동이었겠지만 그것이 세월이 흘러 먼 미래에 열매를 맺는다. 그것은 선한 길에도 악한 길에도 다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인생은 어쩌면 정원을 가꾸는 일과도 같다. 하나님이 울타리 쳐주신 정원에 씨를 뿌리고 물주고 가꾸는 것이 우리의 몫이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씨를 뿌리고 어떤 관리의 노력을 하느냐에 따라 꽃밭이 되기도 하고 쑥밭이 되기도 하고 텃밭이 되기도 한다. 성도는 내가 현재 내 말과 행동의 씨앗이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성경은 그런 경성함에 대해서 교훈한다.

    (잠 14:15) 『(15) 어리석은 자는 온갖 말을 믿으나 슬기로운 자는 그 행동을 삼가느니라』

    우리는 인생의 정원에 어떤 씨앗을 뿌리고 있는가? 그리고 장래에 그것이 어떤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는가? 오늘은 다윗이 드고아 여인의 비유를 통해 압살롬의 귀환이 허락된 사건에서 그 관련된 인물들이 보여준 모습을 통해 함께 생각하고 교훈을 받는 시간을 가지고자 한다.

    압살롬은 맏형 암논을 살해하고 그술 땅으로 도망했다. 그런데 모든 부모의 마음이 그렇듯이 비록 범죄자였지만 다윗 왕은 압살롬을 향한 애틋한 마음이 있었다. 자식이 악하고 못나도 미워할 수만은 없는 것이 부모 마음이지 않는가? 또 다윗은 아마도 압살롬 모습 속에서 과거 범죄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를 향한 아버지로서의 마음이 더 애틋했을 것이다. 그런데 군대 장관 요압이 그런 다윗의 마음을 눈치챘다. 그래서 압살롬을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할 계략을 꾸미게 된다. 요압은 드고아 출신의 한 여인의 입안에 비유를 넣어주고 다윗 왕 앞에 나가 말하게 한다. 드고아 여인은 마치 자신의 가정 문제를 왕께 호소하는 것처럼 가장해서 이런 비유를 베푼다. “저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서로 싸우다가 한 아들이 다른 아들을 죽였습니다. 율법대로라면 살인한 아들은 사형시켜야 하는데 그러면 저희 집안에 대가 끊기니 한 아들만이라도 살 수 있게 임금님이 특별 조치를 해주십시오”라는 간청이었다. 다윗 왕이 그 청을 들어주겠노라고 대답하니까 비로소 드고아 여인은 자기 정체를 드러낸다. “왕께서 사실은 그 같은 상황에 처해 있지 않습니까?” 지혜로운 다윗왕은 단번에 이 여인이 요압 장군의 사주로 나온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에 다윗 왕은 압살롬 왕자를 귀환시키라고 수락하게 된다. 요압은 도대체 왜 이런 일을 꾸몄을까? 그가 한 일은 어떤 열매를 맺었는가? 또 다윗왕은 여인의 비유 한 마디에 아무런 훈육의 과정 없이 압살롬을 귀환시킨 것은 어떤 열매를 맺었는가? 압살롬은 과거 자신의 과오에 대해 아무런 가책이나 반성 없이 그냥 지나친 것은 그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성경에는 많은 사건과 이야기들이 기록되어 있지만 명확하게 이것이다 저것이다 밝히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런 경우는 독자가 성경 안에서 판단하도록 맡겨진 것이다. 그래서 하나 하나의 사건을 추적하다 보면 말씀 안에서 자연스러운 답을 얻게 되고 ‘아 그 때 뿌려진 것이 좋은 씨였구나! 악한 씨였구나!’ 를 판단하게 된다. 과연 요압과 다윗과 압살롬이 자기 인생에서 뿌린 씨앗은 어떤 씨앗이었고 그로 인해 미래에 어떤 열매를 맺었는가?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교훈하는 바는 무엇인가? 세 인물을 통해 발견하는 교훈은 이렇다.

    첫째, 요압은 야망의 씨앗을 뿌려 상실의 열매를 맺었다.

    (삼하 14:1-2) 『[1]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왕의 마음이 압살롬에게로 향하는줄 알고 [2] 드고아에 보내어 거기서 슬기있는 여인 하나를 데려다가 이르되 청컨대 너는 상제 된 것처럼 상복을 입고 기름을 바르지 말고 죽은 사람을 위하여 오래 슬퍼하는 여인 같이 하고』

    요압 장군은 드고아라는 곳에 있는 한 여인을 통해 압살롬의 귀환을 도모한다. 요압은 왜 압살롬 왕자가 귀환하는 일을 추진하고자 했는가? 왕을 향한 충성심인가?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었는가? 요압과 관련된 기록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요압이 어떤 사람인지 가늠할 수 있다.

    요압은 전쟁에서 아우 아사헬이 전사한 것을 이유로 사울의 군장 아브넬을 죽였다(삼하 3:28-29). 다윗 왕의 입장과 명령보다 개인의 사적인 감정이 앞섰다. 요압은 행동은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그로 인해 백성들은 혹시 다윗 왕이 사주해서 죽인 것 아닌가 하는 오해의 상황이 발생했다.

    또 요압은 다윗 왕이 아들 압살롬의 모반을 피해 도망갔다가 복직되었을 때 다윗은 압살롬을 생포하고 죽이지 말라고 명령했지만 어명에도 불구하고 요압은 주저 없이 압살롬을 죽였다.

    (삼하 18:14) 『요압이 가로되 나는 너와 같이 지체할 수 없다 하고 손에 작은 창 셋을 가지고 가서 상수리나무 가운데서 아직 살아 있는 압살롬의 심장을 찌르니』

    만약 요압이 다윗 왕을 생각하는 순수한 뜻만 있었다면 어명을 어기고 왜 압살롬을 죽이겠는가? 요압은 압살롬을 아끼는 마음도 없었고 왕명을 준수할 충성심에도 결함이 있었다.

    또 요압은 다윗의 사후 솔로몬을 세우고자 하는 다윗 왕의 뜻과 다르게 아도니야를 왕으로 세우려고 했다. 이런 몇 가지 사실을 종합해 보면 요압은 장차 왕이 바뀌더라도 군장이라는 자기 권력과 지위를 유지하려는 욕망에 있었기 압살롬의 귀환을 추진한 것도 그 이유임을 추정하게 한다. 그 의도는 드고아 여인의 비유 안에서도 발견된다.

    드고아 여인의 비유에서 죽은 아들은 어찌할 도리가 없으니 산 아들이 죽지 않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요점이다. 여기서 죽은 아들은 암논을 상징하고 살아야 할 아들은 압살롬을 상징한다. 요압이 이 비유를 통해 다윗 왕에게 전달하는 뜻은 하나님의 산업이 무너지지 않으려면, 즉 다윗의 왕통을 이어가려면 압살롬을 귀환시켜야 하지 않느냐는 뜻이다. 즉 요압은 압살롬을 왕통 계승자로 여겼던 것이다. 이처럼 요압은 장래 왕 후보자의 은인이 되어 자기 입지를 굳게하고 권력을 유지하려는 욕심에 의해 행동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떠했는가?

    (삼하 17:25) 『압살롬이 아마사로 요압을 대신하여 군장을 삼으니라 아마사는 이스라엘 사람 이드라라 하는 자의 아들이라 이드라가 나하스의 딸 아비갈과 동침하여 저를 낳았으며 아비갈은 요압의 어미 스루야의 동생이더라』

    압살롬은 나중에 모반의 과정에서 요압이 아닌 아마사를 군장으로 삼았다. 소위 토사구팽 당한 것이다. 이렇게 요압은 압살롬의 귀환에 직접적인 공로자였지만 그의 야망과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그리고 결국 솔로몬 왕 즉위 후 최후를 맞이한다.

    (왕상 2:34)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가 곧 올라가서 저를 쳐 죽이매 저가 거친 땅에 있는 자기의 집에 매장되니라』

    그래서 잠언 5:22에 말하기를 ‘악인은 자기의 악에 걸리며 그 죄의 줄에 매인다’했다. 이처럼 요압은 자기 욕망을 위해서 씨앗을 심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로 인해 결국 상실이라는 열매를 맺었다.

     

    오늘날 성도님들은 어떤 씨앗을 뿌리고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가? 우리 인생의 정원에 삐뚤어진 욕망의 씨앗을 뿌려서는 안 된다. 그것은 나중에 가시가 되어서 나를 찌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울타리 쳐주신 우리 인생의 정원을 가시밭이 아니라 아름다운 꽃밭이 되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사랑, 공의, 감사, 희락, 선하고 아름답고 좋은 씨앗들로만 뿌리길 바란다. 머지않은 미래에 천국의 향기가 가득한 정원을 가꾸시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자.

    둘째, 다윗은 방관의 씨앗을 뿌려 해악의 열매를 맺었다.

    (삼하 14:14) 『우리는 필경 죽으리니 땅에 쏟아진 물을 다시 모으지 못함 같을 것이오나 하나님은 생명을 빼앗지 아니하시고 방책을 베푸사 내어쫓긴 자로 하나님께 버린 자가 되지 않게 하시나이다』

    드고아 여인의 비유는 나단 선지자의 비유와 비교할 수 있다. 나단 선지자의 비유는 다윗을 책망해서 그 양심과 신앙을 바로 잡았지만 드고아 여인의 비유는 다윗의 판단을 혼미케 해서 공의를 보지 못하게 했다. 즉, 다윗의 부성애와 왕통 계승의 대의명분을 앞세워 압살롬을 귀환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살인에 대한 책임과 처벌의 과정을 아주 조치 없이 덮어버리게 만들었다.

    드고아 여인의 비유에는 현실과 다른 맹점이 숨어 있다. 비유 속 살인한 아들은 우발범이지만 현실의 압살롬은 치밀하게 계획 살인한 자였다. 또 그 아들마저 죽으면 집안의 대가 끊긴다고 했는데 현실의 압살롬은 독자는 아니었다. 압살롬 외에도 다른 왕자가 많다. 아도니야도 있고 솔로몬도 있다. 만약 압살롬이 왕위 계승자로 마땅치 않으면 다른 합당한 아들을 세우면 된다. 즉 압살롬이 유일한 옵션은 아니었다. 이처럼 드고아 여인의 비유는 다윗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었다.

    다윗은 범죄한 압살롬을 아무런 조치 없이 귀환하게 명령한 행동은 공의로 나라를 통치해야 하는 왕으로서 매우 적절치 못한 행동이었던 것이다.

    (잠 16:12) 『악을 행하는 것은 왕의 미워할 바니 이는 그 보좌가 공의로 말미암아 굳게 섬이니라』

    왕통 계승이라는 대의 명분에 하나님의 공의를 등지는 선택을 한 다윗은 결국 제 발등을 찍게 된다. 귀환한 압살롬이 오래지 않아 왕이 되겠다고 모반을 일으킨다. 어제 형제를 죽이더니 오늘은 아버지를 죽이겠단다. 아버지를 죽이고 자신이 왕이 되겠다고 하는 패륜의 길을 걷는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 주변에는 나단이 주는 비유가 있고 드고아 여인의 비유도 들려질 수 있다. 우리는 어디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 우리는 나를 아프게 할지라도 양심과 신앙을 바로 세우는 음성인가 아니면 꿀같이 달고 명분도 세워주는, 그러나 공의와 정의는 무너뜨리는 악한 음성인가? 부디 선한 것에 기울이고 악한 것은 귀를 막고 거절할 줄 아는 분별력이 있어야겠다. 그것이야말로 우리 인생의 정원에 가시와 독초가 자리지 않고 향기롭고 형형색색 아름다운 꽃이 가득하게 하는 비결임을 깨닫는 저와 성도가 되자.

    (욥 34:3-4) 『[3] 입이 식물의 맛을 변별함 같이 귀가 말을 분별하나니 [4] 우리가 스스로 옳은 것은 택하고 무엇이 선한가 우리끼리 알아보자』

    셋째, 압살롬은 분노의 씨앗을 뿌려 파멸의 열매를 맺었다.

    압살롬은 사람이 범죄 했을 때 적절한 징계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얼마나 괴물 같은 존재로 변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성경은 압살롬의 외모에 대해서 기록하기를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흠잡을 데가 없었다고 했다.

    (삼하 14:25) 『(25) 온 이스라엘 가운데 압살롬 같이 아름다움으로 크게 칭찬 받는 자가 없었으니 저는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음이라』

    그의 외모가 이렇게 출중했지만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압살롬은 처음에는 그의 영혼의 정원에 ‘분노’의 씨앗이 심겼다. 그리고 또 다른 씨앗이 뿌려졌다. 왕위에 대한 ‘욕망’이란 씨앗이 뿌려진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혐오’의 씨앗도 뿌려졌다. 이런저런 씨앗이 뿌려졌더니 나중에 시간이 지나니까 영혼의 정원 안에 독초와 가시가 가득했다. 이처럼 형제를 죽인 그 행동이 잘 처리되지 않은 결과 이제는 아버지까지 죽이고 왕이 되려는 패륜아가 되었던 것이다. 만약 암논을 죽인 책임을 지우고 잘 처리했다면 그렇게까지 망가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압살롬은 외모는 훌륭했으나 그의 영혼은 분노와 욕망과 혐오의 감정으로 일그러진 프랑켄슈타인 괴물이 되었던 것이다. 결국 그 괴물은 다윗 왕 측근의 모반 진압 작전에 의해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분노와 욕망과 혐오의 씨앗이 심겨진 그의 인생의 정원은 결국 독초와 가시와 엉겅퀴가 자라 타인의 손에 무너지고 만 것이다.

    (갈 6:8) 『(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오늘날 우리는 어떤 씨앗을 뿌리고 있는가? 또 나중에 언제 어떤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내다보는가? 인생의 정원에 뿌려지는 말의 씨앗, 행동의 씨앗, 생각의 씨앗을 잘 관리해야겠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사람의 음성은 걸러내고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고 받아들여야겠다. 반대로 내가 뿌리는 말과 행동의 씨앗이 타인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도 기억해야겠다.

     

    롱펠로우 시인의 ‘화살과 노래’라는 시.

    내가 쏜 화살은 어디로 날아갔을까?

    한순간에 저 너머로 사라진 그 화살을

    바라본들 볼 수 있을까?

    /내가 부른 노래는 어디로 울려 퍼졌을까?

    한순간에 저 머너로 울려 퍼진 그 노래를

    귀 기울인들 들을 수 있을까?

    /먼 훗날 세월이 흘러 흘러 흐른 뒤에야

    나는 다시 보았네, 떡갈나무 밑동에

    그대로 박혀 있는 옛 모습 그 화살을

    /먼 뒷날 시간이 가고 가고 간 뒤에야

    나는 다시 들었네, 친구의 가슴에서

    그대로 울리고 있는 그 시절 그 노래를

     

    오늘 내가 쏜 화살이 타인의 가슴에 박힌다. 오늘 내가 부른 노래가 타인의 가슴에 남는다. 주님이 공급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면서 항상 지혜롭게 분별하고 바르게 행동하고 신중히 선택하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한다.

     

  • [복음메시지] 목마르지 않는 물 (요4:3-18)

    [복음메시지] 목마르지 않는 물 (요4:3-18)

    제목: 목마르지 않는 물 (요4:3-18)

    일시: 2024년 4월 13일 안식일 오전 예배

    설교자: 장종규 목자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자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물을 주리라 말씀하십니다. 그 물은 어떤 것이며 또 어떻게 해야 먹을 수 있는지 함께 살펴보고 은혜를 얻도록 하겠습니다.

    # 예수님이 사마리아로 가시다

    예수님께서 유대를 떠나서 갈릴리로 가실 때 사마리아로 통과하려 하십니다. 당시 사람들은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 사마리아 땅임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우회해서 갑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부정한 사람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본래 사마리아는 구약시대의 북이스라엘의 수도였습니다. 그러나 앗수르에 의해 멸망을 당하고 이곳에 이방인들을 거주하게 됨으로 혈통적으로 섞이게 됩니다. 혈통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는 유대인들은 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자신의 동족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꺼리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 사마리아로 가시겠다고 하십니다. 바로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시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가시려 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에게는 멸시받고 천대받는 자들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찾으십니다. 사복음서 보게 되면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자주 식사를 하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이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막2:17)”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바로 영적으로 병든 자를 고치시기 위해서, 즉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시려 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자는 소외 받는 사마리아인들 가운데서도 가장 소외받는 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그 사마리아 여자를 일부러 만나 복음을 전하려 하십니다.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이 여기시는 자시니라(약5:11)”

    # 행로에서 곤하신 예수님을 살펴보다

    6절에 보면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한 우물곁에 그대로 앉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여정이 힘드셨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시기 위해서, 그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힘든 길을 기꺼이 가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 곧 내가 내 양을 찾고 찾되… 흐리고 캄캄한 날에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들을 건져낼지라(겔34:11)”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목자가 자신의 잃어버린 양을 위해서 찾고 찾는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때로는 양이 골짜기나 절벽 위, 혹은 아주 위험한 곳에 있을지라도 목자는 그 양을 찾기 위해서 기꺼이 간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예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애쓰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잃어버린 양과 드라크마, 그리고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가 나옵니다. 공통적인 것은 잃어버린 것을 찾기 위해 애를 쓴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주님께서 잃어버린 자를 찾기 위해 쉬지 않고 일하시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잃어버린 양들을 찾으시되 계속해서 쉬지 않고 일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올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계속해서 일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쉬지 않고 계속해서 일하심으로 우리가 이 믿음을 지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피곤하여 우물곁에 앉으신 모습은 또한 우리를 위해 당신의 능력을 내려놓으시고 낮아지신 예수님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사40:28)”라는 말씀처럼 예수님은 피곤치 않고 곤비치 아니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우리와 똑같은 피곤을 느끼시며 육신의 연약함 가운데서 계셨습니다. 바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육신의 몸으로 오신 것입니다. 불완전한 우리를 완전케 하고 연약한 우리를 강하게 하시고 죄 가운데 있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일부러 가난하게 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전8:9)”

    # 예수님이 전도하시다

    9절에서 사마리아 여자는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심을 듣고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냐면서 핀잔을 줍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자에게 말을 건넸을 때의 반응이 호의적이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짐작하셨겠지만 이렇게 말한 것은 그녀를 전도하려고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과정 속에 이런 어려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하게 될 때 상대방은 불편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라(딤후4:5)”는 말씀처럼 복음을 전하는 과정 속에 고난은 불가피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후의 내용을 보게 되면 복음을 받아들인 사마리아 여자가 기뻐하는 내용이 나오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다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10절)”고 말씀하십니다.

    # 하나님의 선물, 성령을 말씀하시다

    그럼 여기서 말씀하시는 그 하나님의 선물은 무엇일까요? 바로 성령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후 베드로 사도가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2:38)”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사도들이 안수함으로 성령 받는 것을 본 시몬이 돈으로 이러한 권세를 사려하자 베드로 사도가 “내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을 주고 살줄로 생각하였으니…(행8:20)”라며 책망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 성령을 가리켜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하나님의 선물도 바로 성령을 말하는 것이며 이것은 또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기에 너무나도 좋은 것임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시면서 또한 생수라고도 말씀하십니다. 생수는 살아있는 물, 곧 생명수를 의미합니다. 성령은 바로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물, 우리 영혼의 갈증을 해결해 주는 그런 물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의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거하지 않는 땅에 거하리라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찌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렘17:6-8)”

    여기 말씀을 보면 두 종류의 사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과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 즉 물가에 심긴 나무처럼 은혜를 받는 사람과 사막의 떨기나무처럼 은혜를 받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물가에 심긴 나무는 언제든지 물을 공급받아 더위가 올지라도 두렵지 않고 잎이 청청하며 가을에도 걱정이 없습니다. 마치 더위가 오더라도 그 뿌리를 강변에 뻗쳐 물을 공급받는 것처럼 우리 삶에 어려움이 있어도 하나님이 공급해 주시는 힘으로 살 수가 있습니다. 바로 영적인 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은혜를 성령을 통해 주십니다. 성령을 우리에게 주셔서 성령이 우리 가운데 있으면서 이러한 물과 같은 은혜를 공급해 주십니다.

    11-12절 말씀을 보면 사마리아 여자는 예수님의 영적인 진리를 잘 못 알아듣습니다.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생수를 얻느냐”고 말하며 예수님에게 야곱보다 큰 자인가를 묻습니다. 니고데모 또한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거듭남의 진리를 말했을 때 “어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느냐” 물으며 이해하지 못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 21절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에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를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지극히 크신 하나님의 뜻을 지극히 낮은 우리 사람들이 알 수가 없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직접 세상에 오셔서 진리를 알게 하셨습니다. 그 진리를 듣고 깨달은 자들이 다시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전도이고 이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 샘물 같은 성령을 받아야 한다

    13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사마리아 여자에게 보다 더 분명하고 더 직접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이 우물을 통해 물을 먹는 사람은 다시 목마르려니와 예수님이 주는 물을 먹으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이 우리 안에서 샘이 되고 그 샘을 통해 끊임없이 생명수가 흘러나온다는 것입니다. 이 생명수를 마시기 위해 먼저 우리는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을 받지 않고는 이것을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7:38)”

    #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다

    성령을 받은 후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증인이 되도록 성령을 주셨고(행1:8) 우리가 그러한 삶을 살게 될 때 성령으로 충만하게 됩니다(요3:34). 그럼 예수님의 증인 된다는 게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믿는 자 안에 성령으로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결국 우리 삶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지금도 살아계심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고 왜 끊임없이 성령을 부어주시는가 그 이유를 분명히 안다면 오늘 우리 삶 속에서 샘솟는 하나님의 은혜를 계속 경험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게 바로 성령의 은혜요, 성령의 능력입니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평상시에 우리의 작은 삶의 습관들이 결국은 우리 삶에 영향을 줍니다. 평상시에 내 생각대로 내 감정대로 내 마음대로 행하는 삶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행하는 삶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런 삶을 살게 될 때 우리 삶이 계속적인 성령의 은혜 가운데 있게 되고 성령의 충만을 입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라는 말씀처럼 내 안에는 내가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이제 우리의 삶을 내 마음과 뜻과 감정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 말씀을 따라서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성령을 충만히 채워주십니다.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끊임없이 성령의 은혜를 공급받을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따라 힘쓰는 삶을 살아감으로 우리 안에 끊임없이 성령이 샘솟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유튜브 설교방송 링크

    글| 백현 자매

  • [복음 메세지] 어디를 가든지 이기게 하셨더라 (삼하8:1-14)

    [복음 메세지] 어디를 가든지 이기게 하셨더라 (삼하8:1-14)

    [말씀 제목]  어디를 가든지 이기게 하셨더라 (삼하8:1-14)

    [설교자]  김세한 목자

    [설교일]  2024년 5월 18일

    제국주의 시대를 논할 때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나라가 있다. 바로 현재의 영국이다. 현재는 유럽 서쪽의 섬나라이지만 소위 대영제국이라 일컫던 황금시대가 있었다. 1607년, 북아메리카의 버지니아주 제임스 타운을 시작으로 전 세계 약소국을 대상으로 정복하고 식민지로 삼아갔다. 그래서 1815년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이하는데 이 기간이 무려 백년이나 지속되었다. 1920년에 이르러 대영제국은 지구상의 모든 식민지를 합하면 면적이 무려 3,550만 제곱미터가 되었다. 이는 대한민국의 355배 되는 면적이고 현재 러시아 땅보다 2배 이상 큰 면적이다. 그래서 가장 잘나가던 때에 세계 육지 면적의 4분의 1이 바로 영국의 것이었다. 그래서 소위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별명이 붙었던 것이다. 그런 대영제국도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많은 빚을 지는 바람에 국력이 쇠퇴해지고 미국에 그 패권을 넘겨주게 되었다. 1997년 홍콩을 중국에 반환하면서 대영제국주의의 잔재는 완전히 정리가 되었다.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지배하고 착취하려는 모습은 작게는 사회 곳곳에서 발견될 수 있는 ‘우리의 현실’이다. 인간관계 속에도 있고, 기업과 기업 사이에도 있고, 단체와 단체 사이에도 갑을 관계가 있다. 이런 일면을 보면 소위 양육강식 적자생존이라는 강자의 법칙이 지배하는 것이 이 세상의 원리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루시려는 나라는 그런 원리가 지배하는 나라도, 사회도, 개인도 아니다. 하나님이 이루시려는 나라는 이 땅에 속하지 않은 원리가 지배하는 나라, 절대 공의와 사랑을 품으신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그런 나라였다. 그것을 이루시기 위해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왕이 되게 하셨고 그를 말씀으로 지도하셨다.

    (시 119:101-102) 『(101) 내가 주의 말씀을 지키려고 발을 금하여 모든 악한 길로 가지 아니하였사오며 (102) 주께서 나를 가르치셨으므로 내가 주의 규례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세움 받은 성도들은 오늘날 어떤 신앙의 길을 가고 있는가? 또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내가 어떤 길을 가고 있다고 고백할 수 있는가? 성도들이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이 이기게 해주시고, 형통한 길을 열어주시고, 땀 흘린 대가로 단 열매를 수확하게 하시기를 원한다. 그러나 육신의 눈으로 발견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영적인 눈을 뜨고 가려진 본질을 보고 있는가? 오늘은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이 이기게 해주셨다는 승리 기사를 통해 함께 생각하고 은혜를 나누는 시간을 가지고자 한다.

    다윗이 왕이 되어 처음 하고자 한 일은 언약궤를 자신의 성으로 모셔 오는 일이었다. 그 과정에서 웃사가 죽는 불미스러운 일도 있었지만 그것은 곧 다윗의 겸손한 영성과 신앙을 발견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언약궤 앞에서 어린 아이처럼 낮아져 춤을 추는 다윗에게 하나님은 소위 ‘다윗 언약’이라고 하는 중요한 언약을 주신다. 다윗은 하나님을 위해서 집을 짓겠다고 했지만 오히려 하나님이 다윗에게 내가 너의 집을 지어주마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 주셨던 것이 바로 다윗 언약이었던 것이다. 그 다윗 언약은 단순히 육적인 면에서 다윗의 혈통에서 왕위를 계승할 것이라는 뜻이 아니었다. 그것은 영적인 면에서 그리스도께서 그 후손 가운데 오실 것이라는 축복의 언약이었다. 이처럼 하나님께 언약을 받은 다윗은 그 언약에 대한 믿음을 품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출정한다. 그리고 블레셋의 도시를 쳐서 항복을 받아낸다. 뿐만 아니라 그 외에 모압과 소바, 아람과 아말렉, 하맛과 에돔 족속까지 굴복시킨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명실공히 팔레스틴에서 주도권을 장악한 최강국으로 부상하게 된다. 그래서 다윗의 이러한 전과에 대해 성경은 6절과 14절에서 두 번씩이나 동일하게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이기게 하시니라” 또 다른 반복구가 있는데 “조공을 드리니라.”(2) “조공을 바치니라.”(6)이다. 이것은 다윗의 이스라엘이 대영제국처럼 다른 나라를 정복해서 착취하고 압제하는 제국주의의 길을 갔다는 뜻이 아니다. 다윗이 이룬 육적 승리를 통해 성도와 교회가 경험해야 할 영적 승리를 표상하고 있다. 다윗을 통해 성도가 신앙의 길을 걸을 때 하나님은 이런 복을 주신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또 그런 복을 받는 자의 태도는 이러해야 한다는 것을 교훈하고 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그 메시지는 어떤 것인가?

    첫째, 약속을 믿으면 부끄러운 과거를 만회케 하신다.

    (삼하 8:1) 『(1) 이 후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쳐서 항복 받고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메덱암마를 빼앗으니라』

    ‘메덱 암마’는 블레셋의 수도였던 가드와 그에 종속되었던 네 성읍, 곧 가사, 아스돗, 아스글론, 에그론을 통칭하는 표현이다. 대상 18:1에서는 그래서 메덱 암마를 ‘가드와 그 동네’라고 기록했다. 이 기록으로 보아 다윗은 블레셋을 완전히 정복했다. 비유하자면 과거에는 블레셋을 다운시켰는데 이제는 블레셋을 아예 K.O시켜 버린 것이다. 그 결과 블레셋이 점유하던 전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이런 승리가 값진 이유는 다윗이 블레셋 가드에서 경험한 뼈아픈 과거 때문이다.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해 도망자 생활할 때 그는 블레셋의 도시 가드 땅에서 아기스 왕을 만나게 된다. 그때 침을 흘리며 미친 척하면서 위기 상황을 넘겼던 치욕의 과거가 있었다. 그런데 다윗은 그 가드에 항복을 받아냈다. 쉽지 않은 결과이다. 왜냐하면 사람에게 과거의 상처는 현재 극복 못하는 핸디캡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윗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나갔을 때 그 치욕의 역사를 만회한 것이다.

    이처럼 다윗이 블레셋의 도시들을 정복할 수 있었던 근원적 힘은 바로 그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붙들었기 때문이다.

    (삼하 7:27-28) 『(27)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의 종에게 알게 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집을 세우리라 하신고로 주의 종이 이 기도로 구할 마음이 생겼나이다 (28) 주 여호와여 오직 주는 하나님이시며 말씀이 참되시니이다 주께서 이 좋은 것으로 종에게 허락하셨사오니』

    이 약속의 말씀이 주어진 직후 다윗은 블레셋 사람들을 쳤다. 그래서 8장 1절에 ‘그 후에’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곧 다윗이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나가니까 블레셋의 도시들이 줄줄이 정복하게 되었고 그 결과 가드 땅에서의 부끄러운 과거를 씻어버리게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 신앙의 길을 가고 있는가? 성도님들 삶 속에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영적인 전쟁을 수행한 결과 나의 ‘메덱 암마’를 정복케 하시고 부끄러운 과거를 씻는 은혜를 주신다. 이런 복이 저와 성도들의 것이 되시기를 바란다.

    둘째,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승리의 열매를 주신다.

    (삼하 8:4) 『(4) 그 마병 일천칠백과 보병 이만을 사로잡고 병거 일백 승의 말만 남기고 그 외의 병거의 말은 다 발의 힘줄을 끊었더니』

    다윗은 소바 왕 하닷에셀에게서 탈취한 말 가운데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발의 힘줄을 끊었다. 똑같은 사건을 기록한 다른 성경을 보자. 역대상 18:3-4을 보면 그때 노획한 병거와 군사와 말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기록하고 있다.

    (대상 18:3-4) 『(3) 소바 왕 하닷에셀이 유브라데 강 가에서 자기 권세를 펴고자 하매 다윗이 저를 쳐서 하막까지 이르고 (4) 그 병거 일천 승과 기병 칠천과 보병 이만을 빼앗고 그 병거 일백 승의 말만 남기고 그 외의 병거의 말은 다 발의 힘줄을 끊었더니』

    다윗은 병거 일천 승, 기병 칠천, 보병 이만을 빼앗았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발견된다. 다윗은 빼앗은 병거 일천 승 가운데 일백 승의 말, 즉 10%만 남기고는 다 발의 힘줄을 끊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었는가? 왜냐하면 모세오경 가운데 한 권인 신명기에 이러한 말씀을 주셨기 때문이다.

    (신 17:16) 『왕 된 자는 말을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말을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말 것이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후에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이라 하셨음이며』

    모세의 율법에 이스라엘의 왕이 된 자는 말을 많이 두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었다. 말을 많이 두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해야지 자기 육신의 능력을 신뢰하지 말라는 뜻이다. 다윗은 신명기의 이 말씀을 기억하고 그대로 실천하고자 말 발목의 힘줄을 끊었던 것이다. 이런 다윗의 행동은 과거 사울왕의 행동과 비교하면 그가 얼마나 말씀에 순종하고 있는지 뚜렷해진다. 사울 왕은 어떠했는가?

    (삼상 15:18-19) 『[18] 또 왕을 길로 보내시며 이르시기를 가서 죄인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되 다 없어지기까지 치라 하셨거늘 [19]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의 악하게 여기시는 것을 행하였나이까』

    이처럼 사울왕의 마음은 탈취하는 일에 모아져 있고 말씀을 순종하는 일은 안중에도 없었다. 반면 다윗은 말의 발목 힘줄을 끊는 행위로 순종의 모습을 보였기에 하나님은 ‘다윗 언약’에 충실하셨던 것이다.

    구약 성경에서 다윗만큼 형통한 다른 한 사람이 있다. 여호수아 선지자이다. 그런데 형통만 같은 것이 아니라 형통의 이유도 똑같다. 그가 항상 승리한 비결이 어디에 있었는가?

    (수 1: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수 11:15) 『여호와께서 그 종 모세에게 명하신 것을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명하였고 여호수아는 그대로 행하여 여호와께서 무릇 모세에게 명하신 것을 하나도 행치 아니한 것이 없었더라』

    여호수아 역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의 명령을 받았고 그 명령대로 모든 것을 행했을 때 항상 승리하고 이길 수 있었다. 이런 사실에서 우리는 말씀에 대한 순종 여부가 항상 승리의 열매와 직결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2007년 3월 18일 서울국제마라톤 남자부 42.195㎞ 레이스에서 막판 1500여m를 남기고 대역전극을 펼치며 1위로 골인한 마라토너가 있다. 바로 이봉주 선수이다. 생애 35번째 풀코스를 완주이고 한국 역대 4위 기록이었다. 그런데 더 의미가 깊은 것은 그가 최근 3년간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해 ‘한물갔다’는 평가를 받던 터였고 38세의 나이는 마라톤 선수로는 환갑에 해당하던 때였다. 그런데 화려한 부활을 알리는 우승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이봉주 선수가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은 코치의 엄격한 지도를 순종했기 때문이다. 코치는 선수에게 시합이 가까워 오면 탄수화물을 피하고 고기만 먹인다. 한동안 고기만 먹이다가 시합 3,4일 전에 탄수화물을 같이 섭취시킨다. 그러면 몸에 축적되는 탄수화물의 양이 많아져서 레이스의 막판 스퍼트까지 끄떡 없이 달리게 된다고 한다. 이봉주 선수는 그 식사가 훈련보다 더 고통스럽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그런 고통을 인내하고 코치의 지도를 따랐기 때문에 우승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운동 선수가 코치의 엄격한 지도를 따라야 승리가 보장되듯이 신앙인은 인생의 코치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때 영적인 승리가 보장된다. 사울 왕처럼 세상의 것들을 취하려는 욕망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려는데 마음을 모으시는 성도가 되자. 거기에 축복의 열쇠가 있다.

    (요일 5: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셋째, 감사하는 자에게 더 큰 은혜를 주신다.

    (삼하 8:11-12) 『(11) 다윗 왕이 그것도 여호와께 드리되 저가 정복한 모든 나라에서 얻은 은금 (12) 곧 아람과 모압과 암몬 자손과 블레셋 사람과 아말렉에게서 얻은 것들과 소바 왕 르홉의 아들 하닷에셀에게서 노략한 것과 같이 드리니라』

    다윗은 정복한 나라로부터 조공을 받았다. 그것은 금 은 놋과 같은 귀금속들이었다. 다윗은 그것을 자기 사욕을 채우고자 받았는가? 그렇지 않다. 사울 왕은 전쟁에서 승리하면 탈취물로 자기의 기념비를 세우고 자랑거리로 삼는데 활용했다. 그러나 다윗은 달랐다. 그 물질을 여호와께 봉헌했다. 그래서 이렇게 드려진 금과 은과 놋이 나중에 그의 아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는데 재원으로 소용되었던 것이다.

    (대상 22:14-16) 『[14]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의 전을 위하여 금 십만 달란트와 은 일백만 달란트와 놋과 철을 그 중수를 셀 수 없을만큼 심히 많이 예비하였고 또 재목과 돌을 예비하였으나 너는 더할 것이며 [15] 또 공장이 네게 많이 있나니 곧 석수와 목수와 온갖 일에 익숙한 모든 사람이니라 [16] 금과 은과 놋과 철이 무수하니 너는 일어나 일하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실지로다』

    다윗은 이처럼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을 하나님께 봉헌했다. 그는 자기의 승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봉헌은 바로 그러한 믿음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윗의 그런 믿음에 대해 큰 복으로 다윗에게 내려주셨다. 곧 그 복의 후광이 아들 솔로몬에게까지 계승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성도가 하나님께 헌신의 삶을 살았을 때 하나님이 주시는 흔들리지 않는 복이 있다. 바로 부모의 신앙이 자녀들에게 유산으로 물려지는 것이다. 이 땅에서 이보다 값진 유산은 없다. 부디 이러한 복이 저와 성도들의 것이 되시기를 바란다.

    다윗 왕처럼 세상과의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시는 성도들이 되길 바란다. 언약을 믿고 나가서 과거의 부끄러움을 씻으시고, 말씀에 순종해서 승리의 열매를 수확하고, 감사함으로 복이 계승되게 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나라, 사랑과 공의의 원리가 지배하는 나라가 되는 기적의 목격자가 되시는 저와 성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한다.

     

  • [복음 메세지] 듣고 말하는 것은 인격입니다 (삼상 25:2-13, 23-35)

    [복음 메세지] 듣고 말하는 것은 인격입니다 (삼상 25:2-13, 23-35)

    [말씀 제목]  듣고 말하는 것은 인격입니다 (삼상 25:2-13, 23-35)

    [설교자]  김세한 목자

    [설교일]  2024년 2월 3일

    2024년 대만 방문 기간 중 낙야 교회에 방문했을 때의 일. 지난 2017년에 수원교회 성도님들과 방문했었는데 그 때도 건축을 위해서 대지를 마련하고 모금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전히 건물이 세워지지는 않았고 모금 중에 있었다. 속으로 ‘7백 평 넘는 땅에 건축이란 시골교회의 능력으로 버거운 일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담임 목자인 백목자가 연합 교류 집회를 가질 때 교회 소개 시간 중 조감도 영상을 보여주며 말했다 “낙야교회는 교회를 건축하려고 합니다. 방문단 여러분도 헌금하세요. 한국 돈도 받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간접적으로 조심스럽게 헌금을 권고하는 것이 아니라 직설적이고 노골적인 헌금 요청에 폭소를 터뜨렸다. 이윽고 청주교회를 소개하는 차례가 되었다.  “청주교회는 회당 수용이 93석입니다. 그런데 지난 주에는 108명이 출석했습니다. 회당이 비좁습니다. 그래서 새롭게 건축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모금해야 합니다. 대만 돈도 받습니다.” 우리는 다시 폭소를 터뜨렸다. 전혀 모르는 남이 헌금하라는 말을 하면 매우 무례하고 상식적이지 않다고 여겼을 텐데 주 안에서 한 몸, 한 형제 자매라는 의식 때문에 오히려 박장대소가 나왔다. 우리가 주 안에서 한 성령을 받은 가족이라는 의식이 발견되는 순간이었다.

    인간관계에서 말하고 듣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 말 잘해서 생명을 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말 잘못해서 생명이 위경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 그런가 하면 들어야 할 말을 오해하는 경우도 있고 듣지 않아야 하는 말을 들어서 마음에 상처를 남기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말하는 사람의 의도대로 잘 듣는 것이 중요하고 또 잘 말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런데 이것이 쉽지 않다. 왜냐하면 듣고 말하는 일은 마음 속에 인격이 결부된 일이기 때문이다. 인격이란 것이 하루 아침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듣는 능력이나 말하는 능력이 한 순간에 변화하지 못한다. 오랜 세월동안 신앙 안에서 성숙한 인격은 남의 말을 듣되 오해하지 않고 듣고 상대의 선의대로 듣는다. 반면 인격이 성숙하지 못하면 좋은 뜻으로 한 말도 악의적으로 받아들인다. 성숙한 인격은 말을 건네되 상대가 오해하지 않도록 배려하는 화법을 구사한다. 반면 성숙하지 않은 인격은 거칠게 말해서 좋은 말도 오해하게 만들고 부정적 감정을 가지게 말한다. 그래서 잘 듣고 잘 말하기 위해서 신앙의 좋은 인격을 닦는 일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잠 12:13) 『악인은 입술의 허물로 인하여 그물에 걸려도 의인은 환난에서 벗어나느니라』

    우리는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들으며 살고 있는가? 성경의 가르침대로 잘 듣고 잘 말해서 우리 속사람이 갖춘 인격을 나타내고 있는가? 오늘은 다윗과 관련된 한 기사 속에 등장하는 세 인물을 통해 함께 생각하고 은혜를 나누는 시간을 가지고자 한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다윗이 동굴에서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기회에도 그의 겉 옷자락만 베고 살려준 기사를 살펴보았다. 사울왕은 눈물을 흘리며 다윗의 의로움을 인정하고 자신의 잘못을 시인했다. 그러나 사실 완전히 회개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다윗이 사울 왕과 함께 왕궁으로 돌아가지는 않았고 계속 방랑하는 생활을 계속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울왕이 완전히 변화한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사울과 헤어지고 다시 길을 떠난 다윗 일행은 어느 날 갈멜이란 곳에 머물게 되었다. 갈멜은 아시다시피 열왕국 시대에 이르러 엘리야 선지자가 우상의 선지자들과 상대하게 될 바로 그 장소였다. 그런데 그곳에 나발이라는 이름의 목축인이 있었다. 그는 수천마리의 양과 염소를 치는 부자였다. 그 시대는 치안이 미흡한 지라 대규모 목축업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 어려움이란 도적들이 나타나 가축들을 약탈하고 심지어 목동들까지 죽이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런 가운데 다윗과 그의 수하에 육백 명이 나발의 양떼 곁에 머물러 주는 것은 그의 재산을 보호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당시 목축업에 종사하는 자들에게는 양털을 깎는 시기는 농부에게 추수하는 시기와 같았다. 그래서 이 시기에 목자는 이웃과 함께 음식을 나누며 수확의 기쁨을 누렸다. 바로 양털 깍는 그 잔치의 시기에 일이다. 다윗은 나발에게 소년들을 보내어 축복하면서 잔치의 음식을 좀 나누어 줄 것을 요청한다. 그런데 나발은 이를 거절하고 오히려 다윗을 향한 심한 모욕과 경멸의 말을 전한다. 이에 다윗은 분노하게 되고 4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나발과 그 가족들을 몰살시키고자 출정한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나발의 아내 ‘아비가엘’이란 여인이 다윗의 소년들에게 음식을 건네고 다윗 앞에 엎드려 자비를 구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의 지혜로운 말로 다윗은 칼을 거두고 되돌아갔다는 이야기이다.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세 인물을 주목해 볼 수 있다. 바로 나발과 아비가일과 다윗이다. 이 세 인물의 말하고 듣고 칼을 거두는 모습을 통해 우리는 소중한 신앙의 교훈을 받게 된다. 그러면 그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인가?

    첫째, 나발과 같은 우매한 말을 삼가라.

    (삼상 25:6) 『이같이 그 부하게 사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평강하라 네 집도 평강하라 네 소유의 모든 것도 평강하라』

    다윗은 소년 열 명을 나발에게 보내면서 잔치의 음식을 좀 나누어 줄 것을 요구했는데 이것은 이스라엘 풍습으로나, 율법의 가르침으로나 매우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풍습이었다. 6절에서처럼 다윗은 ‘너는 네 집도 네 소유의 모든 것도 평강하라.’는 축복의 말을 건넨다. 다윗이 매우 정중하고 예의를 갖추어 요청했음을 알 수 있다. 또 8절에 ‘네 아들 다윗에게 주기를 원하노라’고 했다. 다윗이 나발에게 아들 뻘이란 뜻이 아니라 그만큼 자기를 낮춰 예의를 갖춘 표현이다. 이렇듯 정중한 인사와 겸손한 태도로 자선과 호의를 구했건만 나발의 태도는 어떠했는가?

    (삼상 25:10-11) 『[10] 나발이 다윗의 사환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뇨 근일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11] 내가 어찌 내 떡과 물과 내 양털 깎는 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가져 어디로서인지 알지도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 한지라』

    율법에는 나그네를 대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기록되어 있다. 이를 생각한다면 다윗의 요청을 들어주는 것이 마땅했다. 더욱이 곁에서 경비원처럼 양떼를 지켜준 노고를 생각한다면 감사한 마음으로 들어주는 것이 마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발은 다윗에게 면박을 주는 말과 더불어 음식을 건네주기를 거절한다. 오해하지 않아야 할 것은 다윗이 무슨 조직 폭력의 보스같이 위협하고 강압으로 요구한 것이 아니다. 정부가 대기업을 압박하면서 정치헌금 강요하듯이 요구한 것이 아니다. 지극히 상식적인 호의를 요구했던 것이다. 그런데 나발의 이러한 발언은 웃는 낮에 침뱉는 행동이었던 것이다.

    나발은 ‘다윗이 누구냐?’라고 말했지만 사실 다윗을 모를 리 없었다. 골리앗을 물리친 용사로 이방인들에게까지 명성이 높았고 왕의 사위가 된 자요, 사울 밑에서 천부장직을 수행한 인물이니 잘 아는 인물이다. 다윗이 분개한 이유는 음식을 주지 않아서가 아니다. 나발이 ‘주인에게 반역하는 못된 종’이라고 모욕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나발은 정치적으로 사울을 추종하는 사람 중에 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옳고 그름을 떠나 사울의 편에서 다윗을 경멸했던 것이다. 그러나 진실을 말하자면 사울을 반역해서 떠난 것이 아니라 사울이 자신을 무고하게 죽이려고 하니까 생존을 위해서 왕의 곁을 떠난 것이었다. 사실 나발은 사실을 왜곡하는 거짓의 입술을 놀렸던 것이다. 사람은 언제 가장 분노하는지 아는가? 자기의 진실이 거짓으로 오해받을 때가 가장 분노하는 순간 중 하나이다. 결국 나발의 이 망언은 다윗의 노를 격동시켰고 목숨이 위태롭게 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잠 12:18) 『혹은 칼로 찌름 같이 함부로 말하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 같으니라』

    오늘날 교회에서 일어나는 불미스러운 일의 대부분은 잘못된 언변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눅 6:45)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고 했다. ‘말’이라는 단어는 ‘마음의 알갱이’라는 뜻이다. 즉 말은 마음에 쌓인 것을 밖으로 드러나는 도구라는 것이다. 마음에 좋은 감정, 좋은 생각, 좋은 뜻을 채우면 좋은 말이 나오고, 나쁜 감정, 나쁜 생각, 나쁜 뜻이 채워지면 나쁜 말이 나온다. 성숙한 인격이란 바로 이것을 잘 통제해서 때로는 삼가고 때로는 말하는 것을 잘 분별하는 사람이다.

    부디 나발과 같은 우매한 입술에서 벗어나는 성도님들이 되자.

    (잠 13:3) 『입을 지키는 자는 그 생명을 보전하나 입술을 크게 벌리는 자에게는 멸망이 오느니라』

    둘째, 아비가일과 같은 지혜로운 입술의 사람이 되라.

    다윗은 나발의 모욕에 참지 못하고 그와 그 일가를 죽이겠다고 칼을 빼어들었다. 그런데 이렇게 격노한 다윗의 마음을 누그러뜨린 한 여인이 있었는데 바로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이었다. 이 여인의 언행은 도대체 어떠했기에 다윗의 분노를 잠재울 수 있었는가?그녀는 상황의 심각성을 감지하고 급하게 종들을 시켜 양식을 준비하게 했다. 그리고 모욕을 말을 건네받은 열 명의 소년들에게 양식을 건네 주었다. 그리고 그 후에 이어진 그녀의 일변은 무엇이었는가?(삼상 25:28-31) 에 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아비가일이 이야기한 내용의 핵심은 이것이다. “다윗 당신은 지금껏 악을 행한 적이 없습니다. 당신의 생명은 하나님이 생명 싸개에 싸서 보호하십니다. 당신은 장차 이스라엘의 임금이 될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선한 싸움을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오늘 무죄한 피를 흘리면 장래에 왕이 되었을 경우 괴로워하고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라는 뜻이다. 아비가일의 말을 통해 발견되는 그녀의 지혜는 이런 것이다. 그녀는 목숨이 경각에 달린 현재의 상황을 잘 알았다. 또 다윗의 의로움, 정직함에 대한 분별력이 있었다. 또 하나님이 그의 생명을 섬세히 보호하고 계신다는 영적인 혜안도 있었다. 게다가 다윗의 미래를 예측하는 안목도 있었다. 그리고 만약 다윗이 칼로 살육하는 실수를 저지르면 그 일이 미래에 어떤 악영향을 가져올지에 대해서 내다볼 줄 알았다. 아비가일은 이런 모든 미래사를 꿰뚫어 보고 다윗에게 그것들을 말했던 것이다.

    (잠 25:11)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니라』

    우리는 인간관계 속에서 때로 대화의 핵심을 벗어나서 헤매는 경우가 있다. 상대의 문제점과 본질을 헤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니 상대의 마음을 알 수 없고 기울여도 깨닫는 지혜가 없으니 상황 전달이 안된다. 그래서 대화는 겉돌고 핵심을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면 오해하게 되고 마음을 터놓을 수 없게 된다. 대화에는 이해하려는 마음, 배려하는 마음이 기초가 되어야 한다. 만약 그것이 없으면 감정에 이끌려 말하게 되고 무례하게 말하게 되고 상대에게 상처를 주게 된다. 아비가일을 보라. 다윗의 마음을 정확하게 헤아리고 상황도 종합적으로 파악하고 미래사도 읽어낼 줄 아니까 그런 지혜로운 말이 나오고 그 말로 인해 치켜올린 다윗의 칼이 점점 내려졌다. 아비가일의 지혜로운 혀가 다윗의 뻣뻣한 감정을 꺾었던 것이다.

    (잠 25:15) 『오래 참으면 관원이 그 말을 용납하나니 부드러운 혀는 뼈를 꺾느니라』

    오늘날 우리도 사랑과 배려가 녹아있는 말 한마디가 사람의 생명까지 살릴 수 있음을 알아야겠다. 그래서 생각하고 말하고, 배려해서 말하고, 부드럽게 말하고, 진실을 말하는 것을 연습하시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란다.

    셋째, 다윗과 같은 열린 귀를 가진 사람이 되라.

    다윗이 나발에 대해 분개한 모습은 사울을 대할 때와는 대조적이다. 다윗은 사울 왕에게 직접 보복하지 않았다. 하나님께 심판을 맡겼다. 그런데 오늘은 나발의 모욕을 참지 못하고 자제력을 잃었다. 그래서 즉시 칼을 차고 벌떡 일어선다. 만약 다윗이 사울 왕과의 관계에서 잘 인내해 왔는데 나발이라는 인물을 죽인다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 수 있는 순간이다. 다윗을 보건대 인간은 이처럼 연약한 존재이다. 만약 다윗이 분노의 감정에만 사로잡혀서 아비가일의 말에 “하찮은 일개 여인이 누구 앞에서 감히 입을 놀리느냐?”고 듣기를 거절했다면 나발과 그 일가는 몰살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에게는 타인의 말을 들을 줄 아는 귀가 있었다.

    다윗은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있음을 알았다. 그런데 아비가일이 그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 싸움이 의로움의 기초가 아니라 죄악의 기초 위에 세워지면 그 나라가 길지 못함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아비가일이 그것을 말한다. 다윗은 칼과 피로 세워지지 않고 하나님의 공의와 뜻으로 나라를 세워야할 사명이 있었다. 그래서 온 백성이 고개를 끄덕이고 기뻐하고 환영하는 가운데 등극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런데 아비가일이 그것을 말한다. 우리는 여기서 아비가일의 지혜로운 발언에 호응하고 받아들일 줄 아는 다윗의 인격을 발견한다. 아무리 분노의 감정이 일어나도 이치에 맞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분노를 누그러 뜨리고 자기 마음을 다스릴 줄 알았다. 마음을 추스린 다윗이 이렇게 말한다.

    (삼상 25:32-33) 『[32] 다윗이 아비가일에게 이르되 오늘날 너를 보내어 나를 영접케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33] 또 네 지혜를 칭찬할지며 또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오늘날 내가 피를 흘릴 것과 친히 보수하는 것을 네가 막았느니라』

    다윗은 이 여인을 통해 위기를 모면하게 해준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했다. 이렇게 잘 말하는 지혜로운 여인 아비가일도 있었지만 그 말에 담긴 진실과 혜안을 분별하는 다윗의 귀가 있었기에 그는 분노의 감정으로 일가를 몰살시키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게 된다.

    (잠 29:11) 『어리석은 자는 그 노를 다 드러내어도 지혜로운 자는 그 노를 억제하느니라』

    강경화 장관 이야기. 문재인 대통령 시절에 외교부 장관을 역임한 퍼스트 레이디. 김대중 대통령 집권기에도 3년 간 그분의 곁에서 보좌한 경력도 있었다. 그녀는 코비드 19 팬데믹 상황에서 한국의 방역체계를 외국에 홍보해서 국위선양하는데 매우 큰 역할을 했다. 앵커들의 까다로운 질문에도 투명하고 정직하고 정확한 발언으로 한국의 위상을 높인 바로 유명하다. 독일의 앵커가 ‘한국은 봉쇄령으로 인해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아니냐?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것이 아니냐?는 집요하고 까다로운 질문도 모두 잘 설명했다. 인텨뷰 내용에는 구구절절히 그녀의 겸손함이 한국 사람의 겸손함을 대변했다. 그래서 그분의 활약으로 한국의 명예가 매우 드높아지는 계기가 되었다. 현재 국제 사회에서 한국의 높은 위상은 단지 한류의 가수나 탤런트 때문 뿐만 아니라 이런 외교부 장관의 노고와 활약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다른 성도와의 관계에서 혹은 이 세상의 불신자와의 인간관계에서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들으며 살고 있는가? 나발과 같이 우매한 말로 문제를 일으키고 상처를 주는 것이 아니라 아비가일과 같이 지혜의 말로 죄의 싹은 잘라내고 의의 열매가 맺히게 만드는 길을 가시기 바란다. 다윗처럼 타인의 입술을 통해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자가 되자. 이런 아름다운 인격, 이런 향기로운 입술을 가지는 참교회의 성도들이 다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한다.

     

    https://youtu.be/mtIwD-qjRZ0?si=HOvdPGM8-U9QzQX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