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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음 메세지] 영적 전쟁의 승리 비결(삼상 17:32-50)

    [말씀 제목]  영적 전쟁의 승리 비결 (삼상 17:32-50)

    [설교자]  김세한 목자

    [설교일]  2023년 10월 28일

    1943년 세계 2차 대전에서 연합군의 모 항공대가 매우 특별한 임무를 받게 된다. 그 임무는 ‘모느’라는 댐을 폭파해서 인근 계곡을 침수시키는 것이었어. 그러나 고작 18대에 불과한 비행기로 수행해야 할 작전은 난이도가 매우 높았다. 작전은 구체적으로 비행기들이 시속 380km의 일정한 속도로 유지하다가 정확히 600m를 급강하해야 했다. 그리고 다시 수면 위 20m 높이를 유지하며 공중어뢰를 발사해 댐을 명중시키고 와야하는, 마치 서커스와도 같은 그런 작전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작전은 성공했고 그 결과 연합군은 전쟁에서 유리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 작전을 이끈 깁슨 중령은 훈장을 받는 날 기자가 그에게 이렇게 질문했다. “어쩌면 그렇게 어려운 작전을 성공시킬 수 있었습니까?” 그는 대답하기를 “그것은 바로 철저한 훈련과 모험정신이었습니다. 저희는 준비 기간만 2개월이 걸렸고 2,000시간 동안 연습을 했고 연습하는데만 2,500개의 폭탄을 소모했습니다. 그리고 연습한대로 용감히 실전에 임했습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가야 한다는 말이 있다. 일을 성취하려면 모험을 각오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호랑이굴에 들어갈 용기가 있어도 호랑이를 잡을 능력이 없다면 역시 호랑이를 잡을 수 없다. 반대로 아무리 호랑이를 잡을 수 있는 능력이 있더라도 호랑이 굴에 들어가는 모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역시 호랑이를 잡을 수 없다. 이처럼 능력 없는 모험은 만용에 불과하고 반대로 모험을 감수할 용기가 없으면 아무리 큰 능력도 무용지물이다. 공부도 사업도 세상사도 신앙의 길에도 이 원리는 마찬가지이다.

    (딤전 6: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

    바울사도는 디모데에게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권면했다. 성도의 삶을 믿음의 싸움이라는 관점에서 보고 있다. 전쟁같은 긴급 상황이라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 땅이 재물을 모으기 위해, 명예를 얻기 위해, 더 좋은 자리 차지하기 위해 전쟁한다. 그러나 성도는 다른 차원의 전쟁이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한 영혼이 하나님 앞에 사느냐 죽느냐! 마귀의 지배를 받느냐 하나님의 지배를 받느냐! 성도가 복음으로 세상을 정복하느냐 세속의 가치관에 정복당하느냐의 전쟁이 있다. 성도는 영혼의 눈을 뜨고 이런 전쟁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성도님들은 이 세상 속의 불신자들처럼 밥먹고 사는데만 매달리는 삶을 살고 있는가 아니면 영적인 전쟁이 있음을 알고 승리하기 위해서 땀흘리고 있는가? 만약 실상이 그러하다면 나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오늘은 다윗이 골리앗과의 대결에서 승리한 기사를 통해 그가 면대한 영적 전쟁이 무엇이었는지 살펴보고 은혜를 나누는 시간을 가지고자 한다.

    어느 날 블레셋의 군대와 이스라엘의 군대가 전쟁을 위해 대치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전쟁터에 매우 위협적인 적군이 나타났으니 바로 키가 3m나 되는 거인 골리앗이었다.

    (삼상 17:4-7) 『[4] 블레셋 사람의 진에서 싸움을 돋우는 자가 왔는데 그 이름은 골리앗이요 가드 사람이라 그 신장은 여섯 규빗 한 뼘이요 [5] 머리에는 놋투구를 썼고 몸에는 어린갑을 입었으니 그 갑옷의 중수가 놋 오천 세겔이며 [6] 그 다리에는 놋경갑을 쳤고 어깨 사이에는 놋단창을 메었으니 [7] 그 창자루는 베틀채 같고 창날은 철 육백 세겔이며 방패 든 자는 앞서 행하더라』

    놋 오천 세겔의 갑옷의 무게 환산하면 57kg이다. 창날만 육백세겔의 무게는 7kg이다. 갑옷과 창날의 무게만 합산해서 64kg이니 평균적 성인 남자 몸무게에 이른다. 게다가 다리에 놋 각반을 찼고 머리에 놋투구까지 썼으니 그 위용이 가히 로보캅 수준이다. 이러한 골리앗의 모습을 본 이스라엘은 아마도 간담이 서늘했을 것이다. 감히 누가 나서서 맞설 엄두도 못내고 있을 때 붉은 얼굴의 미소년 다윗이 나타났다. 그리고 물매로 돌을 날려 골리앗을 죽이고 승리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유재석이 강호동과 씨름해서 이겼다는 것이다. 도대체 다윗의 승리 비결은 무엇이며 오늘날 성도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바로 이런 것들이다.

     

    첫째, 작은 승리의 경험들을 쌓아야 한다.

    (삼상 17:34-35) 『[34] 다윗이 사울에게 고하되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35]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 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 죽였었나이다』

    전쟁 영웅 사울 왕도 골리앗 앞에 감히 나서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는 상황에서 일개 어린 소년이 나서서 그와 대결하겠노라고 요청한다. 그는 사울왕에게 연이어 이렇게 말한다.

    (삼상 17:36)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골리앗을 상대하겠다는 이 미소년의 용기가 어디에서 나왔는가? 바로 과거에 곰과 사자와 대결해서 승리했던 경험들에서 나왔다. 다윗은 그 경험을 통해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다.

    이처럼 성도가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평소 작은 승리의 경험들을 쌓아나가야 한다. 여호수아를 보라. 그는 모세의 뒤를 이은 후계자가 되었고 가나안 정복의 과업을 부여받는다. 그런데 그 땅의 일곱 족속과 전쟁해서 몰아내고 정착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일은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그 어려운 과업을 완수했던 것이다. 여호수아가 이렇게 가나안 정복의 임무를 완수한 배경에는 그가 과거 작은 승리의 경험을 쌓아왔기 때문이다. 그는 가나안 족속과의 전쟁 전에 이미 광야에서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실전 경험이 있었다. 모세와 아론과 훌은 기도하고 있었고 칼을 들고 전쟁을 수행한 인물이 바로 여호수아였던 것이다.

    또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베드로는 성전 미문에 하체 장애자를 일으키는 기적을 행한다. 이것은 베드로가 어느 날 우연히 일으킨 기적이 아니다. 과거 승리의 경험들이 쌓인 결과였다.

    (마 10:1) 『예수께서 그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로마는 하루 아침에 완성되지 않았다’는 말이 있듯이 우리의 믿음도 하루아침에 완성되지 않는다. 과거의 작은 열매 작은 성공의 경험들이 모여서 큰 성과를 이룰 수 있다. 과거에는 믿음의 열매가 전혀 없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큰 일꾼이 되어 믿음의 열매를 맺는 일은 없다. 기도의 응답을 경험한 성도가 더 큰 기도의 응답을 확신하고 기도하게 된다. 희생의 경험이 있는 성도가 더 큰 희생의 자리에 헌신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개인이나 교회나 다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첫 번째 조건 바로 현재의 작은 믿음의 싸움에서 승리의 경험을 쌓는 것이다.

    (눅 16:10)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둘째, 멸시를 감내하는 겸손한 인격이 있었다.

    (삼상 17:28) 『장형 엘리압이 다윗이 사람들에게 하는 말을 들은지라 그가 다윗에게 노를 발하여 가로되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들에 있는 몇 양을 뉘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

    다윗이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형들에게 식량을 전달하기 위해서 전쟁터에 왔는데 그의 큰 형 엘리압이 다윗을 나무라고 꾸짖는다. 다윗은 순수한 믿음과 담대한 마음으로 왔는데 형은 교만하고 완악하다고 오해하고 멸시했다. 다윗은 그 멸시의 말을 들었지만 엘리압 형과 다투지 않았다. 의기소침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다윗이 사울왕 앞에 섰을 때 이번에도 다윗은 이런 이야기를 듣는다.

    (삼상 17:33)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기에 능치 못하리니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니라』

    큰 형 엘리압 뿐만 아니라 다윗은 사울왕에게도 멸시를 당한다. 이처럼 계속 멸시를 받았지만 다윗은 결코 분노의 감정을 품거나 다투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이처럼 다윗에게는 골리앗을 상대하기 전에 이미 영적 전쟁이 있었는데 그것은 멸시를 감내하는 겸손한 인격이 있느냐 없느냐였다. 그는 이 내적 전쟁에서 승리했기에 골리앗을 상대할 기회도 잡을 수 있었다.

    007 영화로 잘 알려진 숀코네리란 배우가 있다. 금세기 최고의 흥행작이란 불리는 ‘반지의 제왕’에서 간달프 역을 해달라고 의뢰받았다. 그러나 그는 거만하게도 스토리가 너무 복잡하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그런데 아뿔사! 이 영화를 거절하는 바람에 무려 사천 억 달러의 수입을 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친 것이다.

    이처럼 겸손이라는 인격이 받쳐주지 않으면 임하는 복도 제 발로 차버리는 것이 인생이다. 만약 형 엘리압이 멸시의 말을 할 때 형과 싸우거나 사울왕의 말을 듣고 마음속에 자존심 상해서 토라져 떠나갔다면 아마 골리앗과의 대결은 성사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진짜 싸워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 알았다. 그 대상은 내부의 친형이나 사울왕이 아니라 블레셋의 골리앗임을 알았다.

    세상사에서 신앙 안에서 승리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다. 바로 인격이 받쳐준다는 사실이다. 인격의 결함이 있는 사람은 싸움의 대상을 분별하지 못한다. 그래서 엉뚱한 대상과 싸우다가 힘 다 빼고 정작 자기 사명을 그르친다. 그러나 멸시와 조롱을 인내할 인격이 있는 자는 힘써야할 것을 분별해서 승리의 기회를 경험하게 된다. 사울왕은 그런 차원에서 실패한 인물이다. 왜 실패했는가? 자기가 상대할 적들은 블레셋이고 아말렉 족속인데 허구헛날 다윗 죽이려고 추격한다. 그렇게 다윗 추격하는데 있는 힘 다 빼고는 나중에 기습한 적군에 의해 전사하고 만다. 그래서 어찌보면 능력보다는 인격이 먼저다. 능력이 있으면 무엇하는가? 엉뚱한데서 기운 다 빼는데. 돈 있으면 뭐하는가? 돈 제대로 활용할 인격이 없는데. 세상과의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시기를 원하시는가? 그렇다면 승리를 보장할 바른 인격으로 무장하시는 성도가 되자.

    (잠 12:16) 『미련한 자는 분노를 당장에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

     

    셋째, 적합한 무기를 선택하는 분별력이 있었다.

    (삼상 17:38-40) 『[38] 이에 사울이 자기 군복을 다윗에게 입히고 놋투구를 그 머리에 씌우고 또 그에게 갑옷을 입히매 [39] 다윗이 칼을 군복 위에 차고는 익숙치 못하므로 시험적으로 걸어 보다가 사울에게 고하되 익숙치 못하니 이것을 입고 가지 못하겠나이다 하고 곧 벗고

    로보캅 중무장을 한 골리앗을 상대로 다윗이 갖추고 나가려는 군장과 무기는 무엇이었는가? 아마 사울왕은 골리앗만큼은 아니지만 이 작은 미소년에게 최소한의 군장과 무기는 건네주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사울의 군장을 입어본 다윗은 말한다. 익숙하지 못하니 입고 가지 않겠단다. 그리고 다윗이 선택한 무기는 무엇이었는가?

    [40] 손에 막대기를 가지고 시내에서 매끄러운 돌 다섯을 골라서 자기 목자의 제구 곧 주머니에 넣고 손에 물매를 가지고 블레셋 사람에게로 나아가니라』

    다윗의 군장에는 갑옷도 투구도 검도 방패도 없었다. 오로지 막대기와 돌멩이와 물매였다. 이것이 다윗이 선택한 군장이었다. 사실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가장 허술한 선택인 것처럼 보이지만 깊이 생각해보면 다윗은 가장 지혜로운 선택을 했다. 그는 평소 자기에게 가장 익숙한 무기를 선택한 것이다. 군장의 양면성이 있다. 한편으로는 몸을 보호해주고 적을 공격하는 도구지만 무게가 문제가 된다. 너무 가벼우면 견고성이 떨어져 몸을 보호하지 못하고 너무 무거우면 싸움을 하지 못한다. , 기동성이 떨어지는 것이다. 저는 군대 있을 때 항상 고민한 것이 20kg의 완전군장하고 어떻게 전쟁을 수행하느냐?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다윗은 군장을 아예 벗어버린다. 그는 자신의 장단점을 알고 가장 적합한 무기를 분별하는 지혜가 있었다. 이것이 다윗의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런 지혜가 있는가? 남들이 입어 아름답다고 내가 그 옷 입어서 아름다울 것으로 착각하지 말라. 내게 어울리는 옷은 따로 있다. 그 가정이 이런 저런 것 소유해서 행복해 보인다고 나도 그것 소유하면 행복하겠지?”하고 착각하지 말라. 우리 가정에 맞는 행복의 조건은 따로 있다. 다른 교회에서 그 방법으로 교회가 발전한다고 우리 교회도 똑같이 하면 발전할 것으로 착각하지 말라. 우리에게 어울리는 적합한 길은 따로 있다. 나를 정확히 알고, 내 가정을 정확히 알고, 내 교회를 정확히 알 때 그에 어울리는 행복의 길을 찾을 수 있다.

    소위 균형감각! 내게 적합한 것을 분별하는 능력! 이것이 승리하는 신앙인의 세 번째 열쇠이다. 다윗처럼 이것을 분별하시는 저와 성도가 되자.

    (빌 1:10)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넷째, 하나님 이름을 높이려는 순수한 믿음이 있었다.

    (삼상 17: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사울왕이 골리앗을 이긴 자에게 내건 포상이 있었다. 포상의 내용은 만약 승리하면 왕의 사위라는 특별한 신분을 주고, 많은 재물을 주고, 세금 면제의 특혜를 주겠단다. 그런데 다윗이 골리앗을 상대한 동기는 그런 것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골리앗을 상대한 동기는 포상의 내용이 아니라 가슴 속에 담겨있는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신앙 때문이었다. 바로 하나님을 멸시하고 모욕하는 할례 없는 이방인을 죽여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만천하에 증거하려는 순수한 신앙이 있었다.

    우리가 삶의 현장에서 만나는 영적 전쟁은 어떤 차원에서 하나님이 계시고 안계시고의 문제이다. 불신자들은 성도의 말이나 행동을 통해서 우리 신앙을 저울질 한다. 나아가 우리의 형통과 불행을 통해 하나님이 살아느냐 죽었느냐를 가름하려고 한다. 이것이 영적 전쟁이다. 그런 도전의 상황에서 우리는 하나님은 이렇게 살아계신다고 증거할 수 있어야 한다.

    에스더라는 여인은 민족적인 멸절의 위기 앞에서 말한다. “내가 왕 앞에 나가겠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다.” 이렇게 믿음의 모험을 감수하는 모습이 있었기에 민족의 몰살 위기를 면하고 민족의 구원을 경험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붙들고 모험해야 한다. 모험하지 않으면 승리도 없다. 하나님은 모험하는 자에게 승리도 주시기 때문이다.

    (히 10:35)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이처럼 다윗이 골리앗과 대결해서도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은 과거 승리의 경험을 통한 확신, 멸시함을 참는 인격, 내게 맞는 무기를 분별하는 안목,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순수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성도님들은 오늘날 내 삶이 어떤 영적 전쟁의 상황에 있음을 발견하시고 있는가? 다윗과 같은 믿음과 인격과 담대함으로 마귀의 도전을 물리치고 승리하시는 성도가 되시길 바란다. 이와 같이 축복이 항상 함께하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기원한다.

     

    https://youtu.be/3RrubN1vL80?si=Cw4dZPEe8vyA-MAF

  • [복음메세지]행복한 가정의 비결(엡5:28~6:4)

    [말씀제목] 행복한 가정의 비결(엡5:28~6:4)

    [설교자] 홍영석 목자님

    [설교일] 2023년 5월 5일(토) 오전예배

     

    톨스토이는 사람이 가정에서 행복을 찾을 수  없다면 어디서도 행복을 찾을 수 없다고 말한다.

    가정을 대체할 곳이 어디 있는가? 바로  하나님이 이 세상에 세운 신 천국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천국 같은 가정을 가꾸는 노력을 소홀히 하고 있지 않는가 되돌아보자.

    우리의 수고는 가정에 필요한 것을 위해 수고해야 한다.

    하나님이 친히 세우신 기관은 교회와 가정 두 개 뿐이다.

    바울사도는 에베소교회에게 교회와 가정의 비밀이 얼마나 큰 하나님의 비밀인지 말해준다.

    신앙 생활이 구원과 관련 있다면 가정 생활은 행복과 관련 있다.

    구원의 행복을 바로 교회와 가정에 숨겨두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으로 교회가 세워졌듯이 아담을 잠재우시고 갈비뼈를 취하여 가정을 만드셨다.

    교회와 가정의 공통점은 희생과 헌신,죽음으로 탄생했다는 것이다.

    가정의 행복을 위해 수고와 헌신이 있을 때 행복을 누릴 수 있다.

    그리스도의 가정은 이 가정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생각하고 말씀을 경청하는 가정임을 잊지 말고 언제나 하나님을 중심에 두는 가정이 되길 바란다.

     

    1.부부의 관계 (엡6:24-25)

    [엡5:33]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 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

    노력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것이 가정의 행복이다. 그 비결은 바로 긍휼의 눈이다.

    어떤 형편에 있든지 긍휼의 마음으로 바라보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의 눈으로 바라봐 주신 것처럼 우리도 남편을, 아내를 긍휼의 눈을 가지고 바라보아야 한다.

    [창2:25]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수치가 있더라도 사랑으로 허물을 감싸주고 긍휼의 눈으로 바라봐 주는 것이 부부 사이의 첫걸음이다.

    남편의 수치나 아내의 부족함을 드러내지 말아라. 오직 서로 경외하고 사랑하라 .

    가정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서는 많은 헌신과 수고가 필요한 법이다.

    긍휼의 마음이 회복되기를 바란다.

    이제부터라도 반드시 실천해야 될 말 3가지가 있다.

    고미사

    ‘고’: 고마워요. ‘미’:미안해요. ‘사’:사랑해요.

    2.부모와 자녀의 관계(엡6:1~4)

    1)자녀는 부모를 공경, 부모는 자녀를 사랑해야 한다.

    철이 드는 순간 부모와 함께 하는 시간이 많이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부모가 우리를 사랑한 것은 무조건적인 사랑이었다.

    부모들도 자식들에게 사랑 받고 있구나 라는 것을 느끼게 하는 것이 사랑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어느 자녀든지 부모를 공경. 존중.사랑하시길 축원 드린다.

    2)[엡 6:4]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자녀의 문제는 부모의 문제다.

    자녀를 사랑한다면 소망을 품고, 희망을 품어 대해야 한다.

    눈물의 기도로 키운 자녀는 절대 망하지 않는다.

    3.하나님과의 관계

    [엡5: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교회가 거룩하길 원하는 것 같이 가정이 거룩하기를 원하신다.

    가정에 부모를 세운 것은 신앙을 잘 지켜서 다음 세대에 전승 하라는 것이 다.

    우리는 신앙의 가치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

    세속적인 교육이 우리 아이들의 영혼을 죽이고 있다.

    세속과 교회 사이에 있는 가정에서 아이들을 붙들고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알려주는 것이 중요하다.

    [엡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성령충만”

    부부가 서로 사랑하고 부모를 공경하며 자녀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오직  성령충만 할 때이다.

    늘 기도로 성령충만하기를 간구하는 삶이 되길 바란다.

    성령이 충만해졌을때, 긍휼의 눈이 회복되어 부부-부모가 행복한 가정이 완성된다.

     

  • [복음메세지] 세상의 소금과 빛

    [말씀 제목] 세상의 소금과 빛(마 5:13~16)

    [설교자] 홍영석 목자

    [설교일] 2023년 2월 3일(금) 저녁 예배

    https://www.youtube.com/watch?v=mHvq8umXzsQ

    마태복음 5장13~16절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안타깝게도 이 시대의 기독교에 대한 사람들의 신뢰도는 점점 떨어지고 있다.

    종교에 대한 호감도 또한 불교>천주교>기독교 순이다.

    그러면 기독교는 세상일에 관여하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기독교는 노인복지,  아동복지, 무료급식, 구호활동 등 선한 일에 앞장서고 있다.

    기독교가 좋은 일을 많이 하고 홍보를 많이 한다 해도 세상은 기독교에 호의적이지 않다.

    세상의 권세자가 마귀이고 교회의 권세자가 하나님이기에

    교회와 세상은 대척점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이 교회를 싫어할 것을 미리 말씀하셨다.

    세상을 섬길 때 사람들이 좋아하는가 아닌가 같은 본질을 빗겨간 고민 말고

    하나님인 누구인지를 전파하는 , 세상이 진짜 필요한 것을 전하는 삶이 되어야겠다.

     

    1.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산상수훈의 서론 격인 팔복의 이야기가  끝나고 처음 설교에서 하신 말씀인  “빛과 소금”.

    팔복은 거듭난 그리스도인들만이 가질 수 있는 성품으로   

    그리스도인이란  분리성향, 즉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다르다 ‘라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직접적인 예수님의 대답으로써 

    하나님의 성품을 가지고 세상에서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살아가는 것이 빛과 소금 된 그리스도의 삶이라 하셨다. 

    [팔복; 그리스도인의 내면,  빛과 소금;  외적으로 드러나는 선한 영향력]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은 세 가지가 있다

    1. 세상을 배척하는 삶
    2. 세상에 속한 삶
    3. 세상에 존재하나 세상에 속하지 않고 세상을 변화 시키는 삶 

    벧전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2.세상의 소금이다

    마5:13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소금은 부패를 막은 역할과 맛을 내는 역할을 한다

    1. 부패를 막음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정하신 국가와 가정 같은 부패를 막는 제도 외에 

    세상의 부패를 막을 수 있는 것은 팔복의 성품을 가진 그리스도인 뿐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소금이 맛을 잃는 이유는 불순물이 들어 왔을 때이다.

    불순물이 섞여  맛을 잃어버린 소금은 버리워진다.

    세상의 죄, 세상의 가치에 물들여져 맛을 잃은 그리스도인은 구원을 받지 못함을 깨달아 세속적인 것이 들어오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일이지 인지하고 주의해야 할 것이다. 

     

          2.맛을 냄

    세상의 맛은 먹고 마시고 즐기는 맛이다. 세상의 맛보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성도들과 나누는 교제의 기쁨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참 맛임을 기억하자.

     

    마5: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맛을 잃지 않는 소금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 되도록 살아가자.

     

    작성자|참예수교회 강남교회 김정남

  • [복음메세지]심령이 가난한 사람(마5:3)

    [말씀 제목] 심령이 가난한 사람(마 5:3)

    [설교자]  홍영석 목자

    [설교일] 2022.10.14(금) 저녁예배

     

    우리가 생각하는 복은 물질에 국한되어있다.

    쉽게 접하는 복권도 물질, 결국 돈에 관한 것이다.

     

    신앙인에게 복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도 산상수훈의 첫 시작부터 복을 말씀하신다.

    복 있는 자는 누구인가?

    참된 복은 무엇인가?

     

    1.”복 있는 자여”

    첫 말씀에 “복 있는 자여”라고 선포하신 대상에는 

    그 당시 말씀을 들으러 온 유대인, 

    이후 하나님을 믿는 백성 모두가 해당된다.

     

    헬라 사상에 영향을 받은 헬라인에게 복이란

    ‘마카디오스’ 즉 신들에 위해서 주어진 물질적, 정신적 개념을 지녔고

    유대인들에게 복이란

    ‘유다이즘’ 즉 율법대로 살면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는 율법 준수의 개념이 있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이미 복 있는 자이니 복 받은 사람답게 살아라는 말씀을 하고 계신다.

    복이 무엇인지 쫒기 전 이미 내가 복 있는 자임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2.마태복음 5장 3절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마태복음 5장 3절)

    하나님께 복을 받지 못해 가난에 처한다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이었으나 가난을 잘못 이해한 오해이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누가복음 6장 20절)

    가난의 원어 ‘푸토코스’는 쭈그러들고 움츠러있는 모습이라는 뜻으로 

    누가가 말한 가난은 물질적인 가난을 의미합니다.이 아니며

    마태가 말한 가난은 영적인 가난 입니다. 

     

    영적 가난은 어떤 상태를 말하는가?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시편 34편 6절)

    곤고한 자 역시 ‘푸토코스’가 쓰이며 나의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닫고 주님만 찾는 때를 의미한다.

    이렇듯 가난은 경제적인 가난이 아닌 심령이 가난함을 일컫는다.

     

    3. 어떻게 하면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될 수 있는가?

    심령이 가난하지 못하면 이후 나오는 7가지의 말씀이 어렵다.

    영적으로 가난한 마음을 갖는 것이 복의 첫 단추인 셈이다.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을 마주 볼 때

    내가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 깨닫게 된다.

    모세, 다윗, 이사야, 베드로, 바울사도 모두 인간적으로 훌륭한 사람이었으나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 자신을 부족한 사람이라고 고백한다.

     

    나의 부족함을 느끼지 못한다면 아직 하나님앞에 제대로 서지 못한 것이다.

    나의 부족함을 깨닫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복 있는 자” 가 되자. 

     

    작성자| 참예수교회 강남교회 김정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