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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음메시지] 이것까지 참으라 (눅 22:47-53)

    [복음메시지] 이것까지 참으라 (눅 22:47-53)

    20241026() 오전예배

    설교제목 : 이것까지 참으라

    본문말씀 : 22:47-53

    설교자 : 박은진 목자님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고쳐주셨다. 그는 자신을 체포하러 온 핍박자였다. 자신을 핍박하는 사람에게까지 호의를 베풀 필요가 있을까? 어떻게 보면 마땅한 형벌로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오늘날 예수님께서는 교훈을 주시고 계신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눅 22:44)

    (44-45) 먼저 예수님은 십자가 고난을 앞두시고 기도하셨다. 십자가 고난을 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피할 수 있길,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라면 받아들이길 기도하셨다. (42)

    (47-48) 기도를 하자마자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잡으러 왔다.

    그는 예수님이 처음 부르신 12제자로서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르던 자였다. 그러나 그랬던 그가 예수님을 은 30에 팔려고 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조심해야 한다.

    (고전 10:2) 마귀에게 틈을 주는 순간 넘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귀에게 틈을 보이지 않고, 무엇보다 마음을 지키는 자가 되어야겠습니다.

    (47) 체포하러 온 사람들을 본 제자들은 검으로 무장하였다.

    검으로 치다 = 파라소(헬)

    매우 살벌한 단어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호해야겠다는 충성심에 칼을 무장한 것이다. 그 중에 성격이 가장 급한 자는 베드로였다. (요 18;10)

    말고는 왜 오른편 귀가 떨어졌을까? 말고는 검을 피하다가 귀가 떨어진 것이다. 만약 반대로 피했으면 목이 잘렸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를 책망하셨다. (요 18:11) 예수님은 검을 가진 자는 망한다고 말씀하셨다.

    베드로 입장에서는 서운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하나만 알아서는 안된다.

    예수님이 하시던 말씀을 귀담아 들었더라면 어떻게 대처할지 알았을 것이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늘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셨다. (마 5:44) 어떠한 경우에도 폭력은 안된다.

    우리는 예수님이 기도하신 내용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은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셨다. 예수님의 관심은 오로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데 있었다.

    베드로의 행동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결정적인 훼방꾼이 될 뻔 했다.

    사실 칼은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도 칼이 될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늘 조심해야 한다.

    베드로의 충동적인 행동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눅 22:51)

    (51) 이것까지 참으라

    참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고전 13장)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예수님께서 참으라고 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구속사에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전도하는 과정에서 조롱받을 때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참아야 한다.

    만약 참지 못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이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버린다.

    참는 것에 영혼구원이 달려있다.

    예수님께서 말고의 귀를 다시 붙여주신 것은 사랑으로 했다기 보다는 예수님의 관심이 하나님의 뜻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신 것에 있다.

    하나님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 사업이다.

    제자들 입장에서는 허망했을 것이다. 베드로는 참지 못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마지막까지 참으셨다.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아 참는 자가 되어야 한다.

    누군가에게 말을 할 때도 조심히 해야 한다. 참지 못하고 한 말이 누군가의 목을 베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영혼을 위해서라면 끝까지 참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유튜브 설교링크

  • [복음메시지] 참으로 자유하리라 (요 8:31-36)

    [복음메시지] 참으로 자유하리라 (요 8:31-36)

    [말씀제목] 참으로 자유하리라 (요 8:31-36)

    [설교자] 장종규 목자

    [설교일] 2024년 8월 31일(토) 안식일오전예배

    『31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32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33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34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35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36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오늘 말씀은 자유에 대해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역사 이래로 사람들이 자유를 얻으려고 많은 노력을 해왔습니다. 사람들에게 있어 자유라는 것은 생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유가 없는 삶을 우리가 상상해 본다면 그야말로 지옥입니다. 그만큼 우리 사람에게 있어서 자유라고 하는 것은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이런 자유에 대하여 말씀하시는데 예수님은 참 자유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참 자유가 필요하고 참 자유를 우리가 누려야 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 이 시간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참 자유’, ‘참으로 자유하리라’는 말씀을 통해서 참된 자유를 누리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 바랍니다.

     

    1.예수님 말씀에 거하여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라!

    31절 말씀을 다시 보시겠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성경은 예수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이다’라는 것에 대하여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미 ‘예수님을 믿은 유대인들이었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런 유대인들에게 바로 이 말씀을 하셨다는 것을 보면 예수님은 단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되기를 바라고 계시다’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 말씀은 ‘예수님을 믿어도 참 제자가 아닐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의 참 제자는 어떤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라는 말씀을 통해서 ‘말씀 안에 거하는 자’가 바로 예수님의 참된 제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에 거한다는 뜻이 무엇일까요? 예수님 말씀을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거한다’는 ‘산다는 것’입니다. 즉 거주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말씀 속에 거주하는 것입니다. 실제 우리 ‘삶’ 속에서 우리 삶이 말씀을 따라가는 삶 이것이 ‘예수님의 참된 제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따라 살아갈 때 참되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예수님께서는 인정하신다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을 따라서 실제 살아가는 삶이 예수님의 참된 제자요,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진짜 믿음이고 살아 있는 믿음입니다. 야고보서 2장을 보시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믿음은 살아 있는 믿음이 있고 죽어 있는 믿음도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죽은 믿음이라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살아 있는 믿음만이 진정으로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것이고 살아 있는 믿음을 가질 때 그 믿음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 은혜에 거하게 되고 예수님의 참된 제자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진정한 믿는 사람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난 예수님을 믿고 있으니까’라고 만족하고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참된 제자 그리고 ‘살아있는 진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되도록 해야 된다’는 것을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알아야겠다는 것입니다.

     

    2. 예수님 말씀에 거하여 진리를 알아라!

    본문 32절입니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예수님 말씀을 따라 행하는 그런 삶을 살아갈 때 진리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진리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삶을 살 때 진리를 알게 된다는 말씀에 진리가 예수님이라는 것을 적용한다면 우리가 말씀을 따라 사는 삶을 살아갈 때 누구를 알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예수님을 표면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제대로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도 어떤 사람에 대해서 그냥 표면적으로 아는 경우가 있고 그 사람에 대해서 잘 아는 경우도 있습니다. 내가 그 사람을 정말 잘 안다는 것은 그 사람의 생각 그 사람이 무엇을 원하는지 이런 것들을 다 알 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우리가 알아갈 때 예수님을 통해서 은혜와 평강이 우리에게 주어진다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전서 1장 2절 말씀에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 성경은 우리가 예수님을 알아갈 때 은혜와 평강이 더 많아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알면 알수록 은혜와 평강이 더욱 더 많아진다는 사실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을 우리가 알면 `아! 예수님이 참 좋으신 분이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 예수님을 우리가 더 믿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더 믿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따라갑니다. 내가 그 사람을 믿는다고 한다면 따라가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알면 더욱 더 예수님을 신뢰하게 되고 예수님을 우리가 믿음으로써 은혜와 평강이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을 더욱 알면 알수록 예수님을 통한 은혜와 평강이 더 많아지게 된다는 것을 우리가 자연스럽게 알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씀을 따라 행할 때 예수님을 더욱 알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따라가는’, ‘말씀에 순종하는그런 삶을 살아갈 때 예수님을 알고 이런 은혜와 평강이 우리에게 더 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고 말씀을 따라간다는 것은 머리로는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그 말씀을 다 따라가는 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 말씀을 하신 것을 보면 비록 그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었다 하더라도 예수님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 그런 유대인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있고, 예수님을 믿는다면서 말씀을 따라 행하는 삶을 살고 있을 텐데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을 따라 살아 가는게 쉬워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힘들어 보이는 것 같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님은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메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멘다는 것은 결국 예수님과 함께 행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요? 예수님께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말씀에 따라 사는 그런 삶을 살아갔던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멘다는 것은 우리가 말씀을 따라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멍에라고 하는 건 뭐지요? 두 마리 소가 함께 뭔가 무거운 것을 지고 그걸 끌고 가는 것이 멍에지 않습니까? 표면적으로 보면 무거워 보여 저렇게 가게 되면 힘들어 보인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행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표면적으로는 그렇게 보이지만 실제적으로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메게 되면 그래서 말씀에 따라 행한 삶을 살게 되면 사실은 그렇게 무겁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실제로 그렇게 메다 보면 그렇게 무겁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함께 멍에를 메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함께 멍에를 메 봐야 어! 별로 어렵지 않네! 별로 무겁지 않네! 그리고 그런 것에서 뭔가 쉼을 그리고 평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 말씀을 따라 행하게 될 때 비로서 그 가운데서 마음의 쉼과 평안을 얻게 되는 것이지 말씀을 따라 행하지 않는 가운데서는 이런 평안과 쉼은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진리를 알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진리’ 즉 예수님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는 바로 하나님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말씀에 거하고 따라가는 삶을 살 때 그 가운데서 우리가 예수님을 알게 되고 그 말씀을 우리가 진짜로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진짜로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하지 않으면 우리는 진리를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믿고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 알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대충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말씀을 제대로 알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정말 참된 하나님의 말씀이고 이 말씀이 우리에게 평안과 은혜를 주는 말씀인지, 이 말씀이 우리에게 정말로 살아 있는 생명의 말씀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왜 일까요?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경험을 해 봐야만 비로소 우리가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당시 유대인들이 많은 하나님 말씀을 들었지만 그들이 아무리 들어도 이 말씀을 모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행하는 그런 가운데에서 내가 믿는 예수님을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깨닫게 되고 그 말씀 속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더 말씀을 따라서, 더 예수님을 따라서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32절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이 말씀은 굉장히 유명한 말씀이지 않습니까? 어떤 대학에서는 이 말씀을 가지고 자기네 교명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하여튼 굉장히 유명한 말씀 중 하나가 바로 이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여기 있는 말씀을 인용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이 언제 이렇게 된다고 말씀하십니까?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말씀을 따라 행하는 그런 가운데 있을 때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한다, 예수님께서 혹은 그 말씀이 너희를 자유하게 하실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자유는 어떤 자유를 말하는 걸까요?

     

    3. 모든 사람은 죄의 종이라!

    33절, 34절 입니다.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예수님께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실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니까 유대인들이 아니 우리가 누구에게 종이 된 적이 없는데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이렇게 말하느냐고 했을 때 예수님이 하셨던 말씀이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실 때 `진실로 진실로`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진실로 진실로` 말씀하실 때는 그 말씀이 진짜 그렇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 말씀이 진짜죠, 진리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진실로 진실로`라는 이 표현을 쓰신 것은 그만큼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는 것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로마서 3장 23절 말씀을 보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성경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죄를 짓는,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미 모든 사람이 다 죄를 범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이 다 죄의 종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세상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다 죄의 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죄의 종이면 자유가 있습니까? 자유가 없는 것입니다. 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한다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다 죄의 종입니다. 그래서 자유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 ‘자신이’ 종이라고 생각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가운데 ‘내가 종이다’, ‘당신은 종입니다.’ ‘당신은 죄의 종입니다’라고 말하게 될 때 그것을 바로 이해하는 사람 또는 바로 그것을 인정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조금 생각해 보면 그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종은 자유가 없습니다. 자유라고 한다면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자유이지 않습니까? 성경은 우리가 이런 자유가 없다고 말씀합니다. 죄로부터 자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죄로부터 그래서 로마서 7장에 보게 되면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원하는 것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원하는, 내가 정말 이런 죄 가운데서 자유하다면, 내가 죄를 짓고 싶지 않다면 죄를 안 지어야죠, 하지만 그런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죄를 지어야지’라고 죄를 짓는게 아니라 내가 죄를 범하지 말아야지 하는데 죄를 짓는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죄의 종이고 죄에 대해서 자유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자유는 바로 죄로부터의 자유를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라는 말씀을 보게 되면 우리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이렇게 되는 이유가 내가 원하는 선은 하지 않고 악은 행하는 것, 내가 그 죄로부터 자유를 얻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 속에 거하는 죄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7장 24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여기 해당되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까?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결국 다 죄의 종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종은 다시 말하면 노예입니다. 그럼 노예의 삶이 어떨까요? 실제 노예의 삶을 살아보진 않았지만 노예의 삶이 결코 행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노예의 삶 자체가 어떤 것이라는 것은 우리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모든 삶이 다 죄 가운데 있다고 한다면, 그래서 죄의 종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면 그의 삶이 결코 행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만 스스로가 내가 죄의 종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할 뿐이지 사실은 매일 매일 죄의 종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평상시는 모르다가 내가 이거 해야 되는데, 내가 선을 행해야 되는데 그렇게 할 때 못하는 것입니다. 내가 마음에 원하는 어떤 선한 일, 하나님께서 보시기 기뻐하는 그런 일을 하려고 할 때 안 되는 것입니다. 왜 일까요? 자유가 없이 죄의 종이라는 것입니다. 내 안에 거하는 그 죄가 나로 하여금 그렇게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죄의 종의 모습입니다.

    그럼 그럴 때 어떤 느낌을 받습니까? 괴롭지 않습니까? 평상시 우리가 어떤 선을 따라 행하는 삶을 살아가지 않는 가운데서 우리가 느끼지 못할 뿐이지 정작 내가 선을 따라 행하는 삶을 살아가려고 하고 내가 더 많은 선을 따라 행하는 하나님이 더 기뻐하는 그런 삶을 살아가려고 할 때 우리는 반드시 이런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게 죄의 종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그렇게 죄의 종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자유하게 하겠다고 말씀합니다. 죄로부터 자유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할 때 일까요? 내 말에 거하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겠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진리 즉 예수님께서 혹은 말씀이 너희를 자유하게 하겠다`라는 것입니다. 내 말에 거하면, 말씀을 따라 행하는 그런 삶을 살아가게 되면 진리가 그 죄 가운데 살아가는 그 사람을 여기서 자유하게 하신다는 그런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본문의 말씀은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특별히 죄에서 벗어나 선하게 살아가려는 우리 믿는 사람들, 더 하나님의 그런 뜻을 따라서 하나님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려는 사람들에게 이 말씀은 너무나 중요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이 하셨던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신다는 그 말씀을 따라서 오늘 우리들은 죄로부터 자유하게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세상 어디도 죄로부터 자유하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오직 진리만이 너희를 자유하게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잘 깨달으셔야 합니다. 그럼 분명히 이 말씀대로 여러분 삶 속에서 진리가 여러분들을 그 가운데서 자유하게 하실 것입니다.

     

    4.  생명의 성령의 법을 너희 안에 기록하라!

    자 그러면 좀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 왜 죄에서 자유하지 못하는 걸까요? 왜 죄의 종이 되는 걸까요? 어렵지 않습니다. 죄에 지니까 그런 것이지 않습니까? 죄를 이길 수 없기 때문에 죄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신다는 그 말씀은 진리가 죄를 이기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예수님 혹은 하나님 말씀이죠, 그 진리가 우리로 하여금 죄,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소욕을 이기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시편 119편 11절 말씀을 보면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 말씀을 내 마음, 자기 마음에 두었다고 증거합니다. 왜냐하면 죄를 범하지 않으려고 하나님 말씀을 내 마음에 둘 때 그 말씀이 나로 하여금 죄를 짓지 않게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죄의 소욕, 즉 죄의 유혹을 이기게 할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 안에 있을 때 죄의 소욕을 이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무엇으로 비유합니까? 칼, 검이라고 비유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 말씀을 통해서 쪼개는 것입니다. 쪼개고 죽이는 것입니다. 성경은 특별히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 말씀이 우리 안에 기록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살아서 역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죄의 소욕을 이기게 하고, 죄의 소욕을 죽이고 결국은 죄를 이기게 해서 죄를 짓지 않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절과 2절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이 말씀은 제가 여러 번 말씀드렸기 때문에 어떤 말씀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대로 한다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날 해방한다는 것은 이 성령이 죄의 힘, 죄의 권세로 부터 우리를 이기게 해서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지지 않게 한다는 그런 말씀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은 우리가 거듭나서 세례를 받고 성령을 받아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거하게 됩니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거하는 삶이 어떤 삶이라는 것이냐 하면 말씀을 따라 사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앞에서 말씀드린 요한 8장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라는 말씀처럼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따라 행하는 삶을 살게될 때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그때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고 성령을 받아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을 때 그런 가운데 우리가 말씀을 따라 행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면 실질적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거하는 그런 삶을 살아가게 되고 그럴 때 성령이 우리 안에서 이렇게 역사하시게 되서 우리가 죄의 소욕을 이기게 하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것이 정말로 예수님의 참된 제자로서 살아가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말씀을 따라 행하는 삶을 살아가는 자, 그들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거하는 사람들이고 그럴 때 성령이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무엇입니까? 바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여러 차례 말씀하셨는데 에스겔 11장 말씀을 보겠습니다. 에스겔 11장 17절에서 20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너는 또 말하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희를 만민 가운데서 모으며 너희를 흩은 열방 가운데서 모아 내고 이스라엘 땅으로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다 하라 그들이 그리로 가서 그 가운데 모든 미운 물건과 가증한 것을 제하여 버릴찌라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내 율례를 좇으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목요일 기도회 시간에 말씀드렸던 본문의 말씀인데요 다시 한번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 말씀과 연결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 포로된 이들에게 하신 말씀이십니다. 내가 너희를 다시금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오게 하시겠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돌아올 때 18절 말씀을 보게되면 그들이 다시금 돌아와서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미운 물건과 가증한 것을 다 제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모든 미운 물건과 가증한 것은 바로 우상입니다. 그들이 우상을 다 제하여 버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이들이 바벨론의 포로로 사로잡혀 가게 된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이 우상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고 우상을 섬기는 가운데 있을 때 결국은 그 우상숭배 때문에 이들이 나라가 망하게 되고, 바벨론이라는 이방 나라에 사로잡혀 가서 그곳에서 종으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종과 노예의 삶을 살아가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그곳에서 나오게 하겠다고 하시는데 나오게 하겠다는 건 바로 종에서 나오게 하겠다는 것이고 이는 노예의 삶에서 벗어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 신을, 새 영을 그들에게 주겠다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영을 주시겠다는 것이고 영을 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거기서 나오게 하고, 그리고 그곳에서 나올 때 우상을 재해버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벨론에 사로잡혀 가게 된 그들이 그곳에서 종으로, 노예의 삶을 살게 된 근본적 이유가 우상을 숭배하였기 때문이고 그 우상을 제하도록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영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의 영을 통해서 비로소 그들이 우상을 제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 스스로는 그들을 불행하게 만들었던 우상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힘이 너무나 크니까 상대적으로 그들은 너무나 힘이 약하다 보니까 그 우상숭배라고 하는 죄로부터 스스로 이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나님이 영을 주셔서 그들을 그 가운데서 벗어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만큼 우상숭배에서 벗어나는 것이 너무나 어렵다는 것입니다.

    에스겔 8장을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를 성전으로 데리고 오십니다. 그리고 성전 뜰 안으로 들어오게 한 다음에 에스겔 선지자로 하여금 담을 헐라고 하십니다. 담을 헐었더니 그 안에 문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에스겔 선지자에게 그 안에 들어가라고 말씀합니다. 또 들어가서 보라고 말씀합니다. 들어가서 보니까 뭐가 보입니까? 각종 우상들이 즐비하고 그런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우상숭배하는 모습이 그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 하나님의 백성들이 표면적으로는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의 실제 삶 속에서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상을 섬기고 있는 것을 하나님께서 이렇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백성들 삶 가운데 우상이라고 하는 것이 뿌리 깊게 박혀 있다는 것입니다.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벗어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요? 하나님의 영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거기서 벗어나게 하겠다는 것은 그 죄 가운데서 나오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죄의 종에서 사로잡혀 있던 가운데서 벗어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해 본다고 한다면 오늘 우리 성도들도 표면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아가지만 실제로 내 깊은 곳에서 내가 섬기는 건 하나님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상을 섬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우상이 뭐라는 것입니까?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말하는데 굉장히 추상적이지만 나로 하여금 하나님께 계속해서 순종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나로 하여금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지 못하게 하는 그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게 바로 우상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물질이든 명예든 혹은 내 자녀든, 좀 더 들어가서 보면 내가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게 하는 결정적인 것, 근본적인 것이 무엇일까요? 내 욕심입니다. 우상숭배의 본질은 결국 내 욕심을 추구하는 것이라 말씀드렸고 예수님께서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내가 나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행하지 않고 내 욕심을 죽이고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는 삶입니다. 그런데 이게 우리 스스로 할 수 있습니까? 안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뭘 약속하신 것이냐면 바로 성령을 약속하신 것이고 근본적으로 이 죄로부터 나올 수 있도록, 영적인 우상숭배로부터 우리를 자유하게 하도록 그래서 우리가 참으로 자유하도록 그래서 진정으로 하나님만 섬기는 하나님 백성 되도록 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 성령을 받은 성도들은 이 성령의 도움을 통해서 죄로부터 그리고 큰 유혹의 권세로부터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성령이 언제 우리를 도우시고 언제 역사하신다는 것입니까?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게 하라라는 말씀을 따라서 우리 하나님께 순종할 때입니다. 성령을 받은 성도들이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성령이 이 안에서 역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령을 받는 성도들이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려고 하고, 순종하도록 힘쓰는 가운데서 성령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조금 전 로마서 8장 1절, 2절 말씀처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십니다. 우리가 말씀을 따라 행하는 것에 힘을 쓰면 힘을 쓸수록 진리가 우리를 자유하게 한다는 말씀을 더 실제적으로 경험하게 되고 더 많은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된다라 것입니다. 이걸 위해서 우리가 기도하고 결국 우리가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가야 된다는 이유입니다.

    요한 8장 35절 말씀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보시면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는 말씀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그 말씀은 죄를 범하면 범할수록 죄의 종 되고 죄를 범하면 범할수록 거기에 매이게 되서 우리 성도들이 죄의 종이 되지 않도록 정말 노력하셔야 됩니다. 죄와 싸워야 됩니다. 물론 내 힘으로 된게 아니라 성령의 능력을 입어야 되죠. 치열하게 싸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죄에게 집니다. 그러면 종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례 받고 성령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다면 죄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5.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라!

    35절을 보시면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라고 되어 있습니다.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즉 종으로 살아가게 되면 종이 주인의 집에 영원히 거할 수 있습니까? 잠깐 잠깐 들어올 수 있지만 말 그대 그냥 종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언제든지 그 집에 계속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해고를 당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께서 주시고자 하신 말씀은 아들이 되어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아들이 되어야만 그 집에 영원히 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주인의 아들이라고 한다면 그 집이 그 아들의 집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종은 그 주인의 집이지 이 종의 집은 아닙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걸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신게 뭘까요? 우리가 종으로 살아가면 영원히 하나님 집에 거하지못한다는 뜻입니다 바로 우리가 죄의 종으로 살아가게 되면 하나님의 집에 영원히 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이 아니라 아들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살아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인가요? 너희가 내 안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바로 예수님의 참된 제자들, 참된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이들이 바로 하나님의 참된 아들이 되고 그런 아들이 영원히 하나님 집에 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으로 살아 가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받았지만 여기에 만족하시면 안됩니다. 실제 우리 삶이 하나님 아들의 삶,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하나님 아들의 삶,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말씀을 따라가는 그런 삶을 실적으로 살아갈 때에 하나님의 아들된 삶을 살아가게 되고 그럴 때 말씀처럼 영원히 하나님이 집에 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36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한다 즉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오 오셨으니까 예수님만이 우리를 자유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를 이런 죄로부터 자유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외에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하게 할 수 없습니다.

    물론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연약한 육신을 입고 있고 또한 부족하다 보니 완전히 죄로부터 자유한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우리는 죄 의 종된 삶에서는 벗어나고 죄의 종이 되어 살아가는 삶을 사는 사람들과 구별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 갔을 때 죄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누리는 삶, 바로 영원한 천국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다는 말씀이십니다. 바라옵기는 오늘 말씀이 각자에게 큰 깨달음이 되게 하시고 그로 인해서 죄로부터 자유하는 진정한 은혜와 하나님의 복을 누리시는 모두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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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음메시지] 좋은 무화과, 극히 악한 무화과(렘24: 1~10)

    [복음메시지] 좋은 무화과, 극히 악한 무화과(렘24: 1~10)

     

    [말씀제목] 좋은 무화과, 극히 악한 무화과(렘24:1~10)

    [설교자] 오희도 목자

    [설교일] 2024년 8월 24일(토) 안식일 오전 예배

    예레미야서를 자세히 읽으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과 마지막 날의 모습, 그리고 그때 우리 성도들이 가져야 하는 마음가짐을 배울 수 있습니다.

    1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냐와 유다 방백들과 목공들과 철공들을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옮긴 후에 여호와께서 여호와의 전 앞에 놓인 무화과 두 광주리로 내게 보이셨는데

    유다 왕 여호야긴이 재위에 있을 때에,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칩입하여 유다 왕, 방백들, 목공들과 철공들을 바벨론으로 사로잡아갔습니다. 이는 바벨론에 건물을 지을 사람들과 바벨론의 전쟁에 동원할 사람을 보충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왕하 24:10~16)

    2 한 광주리에는 처음 익은 듯한 극히 좋은 무화과가 있고 한 광주리에는 악하여 먹을 수 없는 극히 악한 무화과가 있더라

    3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무화과이온데 그 좋은 무화과는 극히 좋고 그 악한 것은 극히 악하여 먹을 수 없게 악하니이다

    그렇게 유다의 많은 사람들이 사로잡혀간 이후,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여호와의 성전 앞의 무화과 두 광주리를 보여주십니다. 한 광주리에는 극히 좋은 무화과, 다른 광주리에는 극히 악한 무화과가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성전에 극히 좋은 무화과도 있고, 극히 악한 무화과도 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마지막 날, 오늘날 교회 안에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무화과와 나쁜 무화과가 있습니다. 성경을 읽으며 세상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좋은 무화과가 되어야겠다는 소망을 갖게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동부교회 성도님 모두가 좋은 무화과가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5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이곳에서 옮겨 갈대아인의 땅에 이르게 한 유다 포로를 이 좋은 무화과 같이 보아 좋게 할 것이라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갈대아인의 땅에 처참히 끌려간 유다 포로를 좋은 무화과 같이 보기에 좋게 할 것이라고 다시 한번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좋은 무화과와 같은 백성들을 왜 포로로 끌려가게 하신 것일까요?

    (창15:6-7)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낸 여호와로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죄 가운데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우상이 창궐한,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곳에서조차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을 떠나자, 하나님께서는 결국 다시 그들을 갈대아 땅으로 돌려보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가나안 정탐을 한 후, 하나님을 원망하자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을 앞에 두고 다시 돌아가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끝까지 회개하지 않자 다시 죄악의 땅으로 돌려보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 가운데서 나오게 구원해 주셨지만, 우리가 회개하지 않고 죄악된 세상을 계속 좇는다면 우리 또한 죄의 근본인 지옥으로 갈 수 있습니다.

    (벧후 2:22)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

    베드로 사도는, 죄 가운데 구원받았으나 다시 죄악 가운데로 돌아가는 이들을 도로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눕는 돼지로 빗대어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서 극히 악한 무화과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우리 동부 교회 성도님들 또한 더러운 죄악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6 내가 그들을 돌아보아 좋게 하여 다시 이 땅으로 인도하고 세우고 헐지 아니하며 심고 뽑지 아니하겠고

    7 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로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오늘 본문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 또한 하나님의 심판이 확정된 이들입니다. 이들은 죗값을 치르기 위해 갈대아인의 땅에서 70년이라는 시간을 채워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 동안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잘 돌보아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를 들어, 다니엘과 같은 국무총리, 에스더와 같은 왕비, 느헤미야와 같은 비서실장을 세우셨듯,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성공하며 살 수 있도록 잘 돌보아주셨습니다. 비록 죗값을 치르게 하셨지만, 그들이 회개하여 좋은 무화과가 되면 그들을 잘 돌보아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8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유다 왕 시드기야와 그 방백들과 예루살렘의 남은 자로서 이 땅에 남아 있는 자와 애굽 땅에 거하는 자들을 이 악하여 먹을 수 없는 악한 무화과같이 버리되

    9 세상 모든 나라 중에 흩어서 그들로 환난을 당하게 할 것이며 또 그들로 내가 쫓아 보낼 모든 곳에서 치욕을 당하게 하며 말거리가 되게 하며 조롱과 저주를 받게 할 것이며

    10 내가 칼과 기근과 염병을 그들 중에 보내어 그들로 내가 그들과 그 열조에게 준 땅에서 멸절하기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시니라

    이어서 하나님께서는 악한 무화과 즉, 말씀을 순종하지 않고 끝까지 자기 생각으로 예루살렘에 남은 자, 애굽 땅으로 도망간 자들을 버리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회개하지 않고 성전 그 자체만을 중시하여 자만에 빠진 자, 죄값을 치르지 않고 도망하는 자들을 버리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자를 멸절하겠다고 하십니다. 우리 또한 우리 신앙에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예언은 실제로 이루어졌을까요. 나쁜 무화과 즉,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예루살렘에 남아있던 자들은 바벨론 군대에 3년 동안 포위당하며 혹독한 기근 가운데 죽게됩니다. 시드기야 왕은 자신이 보는 앞에서 자녀들이 죽임을 당하고, 자신의 두 눈이 뽑혀 짐승같이 살아가는 비참한 말로를 맞이합니다. (왕하 25:1-7) 

    (렘52:31-34) 유다 왕 여호야긴이 사로잡혀간지 삼십 칠년 곧 바벨론 왕 에윌므로닥의 즉위 원년 십이월 이십 오일에 그가 유다 왕 여호야긴을 옥에서 내어놓아 그 머리를 들게 하고 그에게 선히 말하고 그의 위를 그와 함께 바벨론에 있는 왕들의 위보다 높이고 그 죄수의 의복을 바꾸게 하고 그 일평생에 항상 왕의 앞에서 먹게 하였으며 그의 쓸 것은 날마다 바벨론 왕에게서 받는 정수가 있어서 죽는 날까지 곧 종신토록 끊이지 아니하였더라

    한편 유다 왕 여호야긴은 포로로 사로잡혀간지 37년만에 왕의 의복을 입고, 왕의 정수를 받으며 살게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유다 왕 여호야긴을 회복시키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소망을 품게 하셨습니다. (왕하25:27-30) 절망의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은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처럼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마지막까지 그대로 믿는 것입니다. 우리 동부교회 성도님들 또한 어떠한 상황이 와도 하나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여러분들이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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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음메시지]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막 5:25-34)

    [복음메시지]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막 5:25-34)

    2024810() 오전예배

    설교제목 :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본문말씀 : (5:25-34)

    설교자 : 박은진 목자님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25-26)

    (25) 본문의 여인은 12년 동안 혈루증(하혈)을 앓고 있었다. 이는 극심한 인생의 고통을 겪고 있던 것이다. 많은 의사를 찾아갔음에도 그 누구도 병을 고칠 수 없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의사를 쉽게 만날 수 없는 시기였기에 여인은 경제적으로도 큰 손실을 입기까지 했다. 심지어 그 와중 여인의 병세는 더욱 심각해지기까지 했다.

    그때 여인은 하나의 소문을 듣는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소문이었다. 어떻게 여인은 그 소문을 들을 수 있었을까? 누군가가 그 소문을 냈기 때문에 여인에게까지 소문이 전해질 수 있던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소문을 내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 작은 소문이 누군가에게는 희망의 한줄기 빛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본문의 여인처럼 수많은 고난이 찾아올 수 있다. 우리는 그때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가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

    당시 유출병 있는 자가 손을 대는 것은 율법적으로 문제가 있는 행동이었다. (레 15:11)

    유출병 있는 자가 물로 손을 씻지 아니하고 아무든지 만지면 그 자는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레 5:11)

    그럼에도 여인은 자신이 들은 소문대로 예수님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고 믿은 것이다. 여인은 믿음대로 병이 낫게 되었다.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28)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신다. 당시에는 수많은 인파가 몰려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질문에 제자들은 당황을 금할 수 없었다. 여인은 예수님의 허락을 받지 않고 옷에 손을 대었지만 사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셨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둘러보시니 여인은 결국 두려움에 떨며 자신이 옷에 손을 대었음을 자백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여인을 책망하시지 않고 축복해주신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34)

    “ 딸아 ” -> 사랑이 담긴 단어이다. 사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주시면서 ‘딸,아들’이라고 부른 적이 본문 외에는 없다. 더불어 예수님께서는 여인에게 구원과 평안, 건강까지 주셔서 축복을 주신다.

    사실 예수님의 질문에는 그분의 뜻이 담겨있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이 여인의 믿음을 소개시켜주시기 위함이었다. 또한 그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 구원을 허락해주시겠다는 메시지를 전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 여인을 기어이 찾아 축복을 주시겠다는 예수님의 뜻이 담겨있었다.

    우리도 인생의 고통 속에 있을 때 절망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나아와 그 분의 옷에 손을 대는 믿음으로 구원을 갈구하는 자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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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음메시지] 병을 고치시는 주님 (요 4:46-54)

    [복음메시지] 병을 고치시는 주님 (요 4:46-54)

    [말씀제목] 병을 고치시는 주님 (요 4:46-54)

    [설교자] 장종규 목자

    [설교일] 2024년 6월 1일(토) 안식일오전예배

     

    『46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47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에 오심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주소서 하니 저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48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49신하가 가로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50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하신대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51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았다 하거늘 52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제 칠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53아비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 말씀하신 그 때인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이 다 믿으니라 54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

     

    본문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시는 내용입니다. 죽어가는 왕의 신하의 아들이 병을 고쳤다는 것은 ‘놀라운 이적’인 것입니다. 성경은 이 이적을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적’이라고 말씀합니다. ‘표적’이라고 하는 뜻은 ‘싸인’이란 뜻입니다. ‘싸인’은 ‘어떤 증거’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메시야’라고 하는 증거가 바로 ‘표적’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원자 되신다’라고 하는 것은 ‘이적을 행하셨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왕의 신하 아들의 병을 고쳐주심으로 인해 ‘예수님께서는 바로 구원자 되신다’라고 하는 것을 ‘이렇게 증거 하셨다’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믿는 예수님께서 구원자 되신다라고 하는 것을 분명히 깨닫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더욱더 갖기를 원합니다.

     

    1. 심령의 낙이 없다고 생각할 때 빨리 하나님을 생각하라!

    46절 말씀 다시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예수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셨다는 것은 그전에 45절을 말씀하게 되면 예루살렘에 계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 예루살렘에 계셨다가 지금 갈릴리 가나라고 하는 곳에 이르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가나를 가리켜 ‘예수님께서 전해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고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2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이적을 행하신 내용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성경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갈릴리 가나에서 그런 놀라운 이적을 행하셨던 것처럼 또 무엇인가 놀라운 어떤 일을 행하실 것을 암시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대상이 누구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까?

    왕의 신하가 있어 그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왕의 신하라는 사람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놀라운 일을 행하실 것을 미리 암시하고 미리 보여주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여기 왕의 신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왕의 말 그대로 왕의 신하인데 왕의 신하를 정확히 보면 왕에 속한 사람입니다. 왕의 신하는 여러 명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왕의 신하는 왕에 속한 사람입니다.

    (2:8)『…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것을 최고의 법이라고 말씀합니다. ‘최고’라고 하는 단어는 ‘왕의 신하’라는 단어와 동일한 단어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이 왕의 신하는 그냥 웬만한 신하가 아니라 굉장히 높은 관리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최고 관리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어린 아들’이라는 것을 뒤에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 아들이 ‘병들었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병들어서 죽어가고 있다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왕의 신하는 고위 관리입니다. 그러면 돈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위도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부족함이 없을 것 같은 그런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에게 어린 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들이 병들어서 지금 죽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왕의 신하는 어떤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있을까요? 마음이 평안과 마음의 즐거움은 없었을 것입니다.

    당연합니다. 다른 것을 다 가졌다 하더라도 자기가 사랑하는 아들이 이렇게 병들어서 죽어가는 이런 상황 속에서 이 왕의 신하는 결코 ‘마음의 즐거움이나 또한 평안이 없었다’라는 걸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런 걸 가리켜 ‘낙이 없다’라고 표현합니다. (6:3)사람이 비록 일백 자녀를 낳고 또 장수하여 사는 날이 많을찌라도 그 심령에 낙이 족하지 못하고 이르기를 낙태된 자가 저보다 낫다 하노니 무슨 말씀인지 아실 것입니다. 옛날 고대 신은 자녀를 많이 낳는 것을 굉장한 큰 복이라고 여겼습니다. 자녀를 100명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장수합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심령에 낙이 없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낙태된 자보다 못하다’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무엇보다 ‘심령의 낙’, ‘제 마음의 평안과 마음의 즐거움’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마음의 즐거움과 평안이 없다면, 아무리 다른 걸 다 가졌다 하더래도 여기 말씀하는 것처럼 낙태된 자보다 내가 못 하다라고 여겨진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 마음의 평안과 즐거움이 물질적인 것보다 훨씬 더 가치 있고 중요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심령의 낙’이라고 하는 것 ‘마음의 즐거움’‘마음의 평안함’이라고 하는 것이 내가 얻고 싶다고 해서 내가 갖고 싶다고 해서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2:24)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가운데서 심령으로 낙을 누리게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는 것이로다 성경은 ‘마음의 낙’, ‘마음의 즐거움’, ‘마음의 평안함’ 이것보다 더 좋은 게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의 손에서 난다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그것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왕의 신하를 보시면 아들이 건강만 하면 심령의 낙을 누릴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아무리 어떻게 해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능력을 초월하는 상황이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낙이 없다고 생각할 때 내가 어떤 일로 인해 마음의 평안과 즐거움이 없고 그래서 정말로 소망이 없는 그런 삶을 느낀다고 한다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까요?

    ‘심령의 낙’이라고 하는 것이 누구 손에서 나는 거라고 언급했습니까? ‘하나님의 손에서 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이때 우리가 해야 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심령의 낙이 없다고 생각하실 때 빨리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왜 나는 이러지 나는 평안도 즐거움도 없고 나는 굉장히 다른 사람보다 불행하다는 생각이 들거든 빨리 하나님을 생각하시라는 것입니다.

     

    2. 절망적인 상황이 처했을 때 주님께 의지하라!

    본문 47절입니다.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에 오심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주소서 하니 저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왕인 신하가 예수님께서 갈릴리 가나로 오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가버나움에 있던 왕의 신하가 예수님을 만나러 가나로 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자기 아들의 병을 고쳐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왕의 신하가 예수님께 나아가게 됩니다. 생각해 보면 왕의 신하는 그 당시 사회에서 굉장히 고위층이었을 것입니다. 만약에 이런 상황이 아니라고 한다면, 예수님께 갈 일이 있었을까요? 없었을 것입니다. 뭐가 아쉽겠습니까? 그런데 왕의 신하가 지금 예수님께 가서 간청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요? 자기 아들이 병들었고 죽어가고 있다 보니까 왕의 신하를 예수님께 나아가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왕의 신하 모습을 보면 구약시대 생각나는 한 인물이 연상됩니다. 혹시 생각나는 사람 있습니까? ‘나아만’입니다. 성경은 나아만을 가리켜 ‘아람왕의 군대 장관’이요. 그리고 그의 주인 ‘왕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였다’라고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큰 용사나 그는 ‘문둥병자였다’라고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람 나라에서 아람 왕 그다음으로 가장 높은 그러한 지위를 갖고 있었던 사람이 나아만입니다.

    그런데 문둥병자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린 나아만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이 나아만이 나중에 어디로 갔습니까? 이스라엘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가게 됩니다. 왜? 찾아갔을까요? 자기가 문둥병에 걸렸으니까! 그런데 성경에서 보면 나아만이 어떻게 이스라엘에 있는 엘리사 선지자에게 가게 됩니까? 자기 집에 아내를 수종드는 여종이 있었습니다. 이 여종은 이스라엘에서 잡혀 온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이 계집아이가 자기 주모에게 “우리 이스라엘에는 선지자가 있는데, 그 선지자에 가면 우리 주인이 낫게 될 거다”라는 말을 합니다. 군대장관 나아만은 그 얘기를 듣고 자기 왕에게 말합니다. 생각해 보면 군대장관은 오늘날 국방부 장관입니다. 그런 사람이 자기 집 아주 비천한 작은 여자아이의 말을 귀담아듣습니다. 평소에는 그럴 상황이 없을 것입니다. 여자아이의 말을 귀담아듣고 자기가 섬기는 왕에게 직접 전달합니다. 결국 나중에 거기 가서 자신의 문둥병이 낫게 되었다고 성경에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 사람이 살아가면서 생기는 절망적인 상황들 특별히 몸의 질병들 그런 것들이 하나님께로 그 사람을 인도하는 역할을 하고 계기가 된다’라고 말씀합니다. (고전 1:8-9)『…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 아니 모든 상황은 하나님께 허락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상황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마음의 사형 선고를 받는 것 같은 그런 절망적인 상황을 허락하신다는 건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의뢰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뢰하도록 그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나아가서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상황을 허락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가 절망적인 상황을 경험하게 되는데 몸의 질병이라고 하는 것이 사람을 그렇게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그런 상황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께로 우리를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5에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까? 성경은 이 여자를 가리켜 자신이 병을 고치려고 많은 의원에게 갔는데 오히려 더 고통을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있는 것도 다 허비했고 아무 효용도 없고 도리어 더 상태가 중하던 차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가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는 ‘그의 병이 고침을 받았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여자는 자신의 병 속에서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나아가서 고침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어떤 절망적인 상황이 처했을 때 특별히 어떤 몸의 질병이라고 하는 상황이 되면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일단 주님을 의지하는 겁니다.

    우리가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일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방금 말했던 이 열두 해에 혈루증을 앓고 있던 여자도 예수의 소문을 듣지 않습니까? 그러다 보니 예수님께 나아가게 됐고 고침을 받게 되었습니다. 사실 우리 주변에는 이런 상황들로 인해서 낙심하고 절망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말을 하지 않을 뿐입니다. 그로 인해 심령의 낙이 없는 그런 인생을 살아가는 인생들이 허다하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그 영혼들 에게는 바로 하나님 대신 예수그리스도가 필요한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누군가에게 어떤 상황을 알았다고 한다면, 그 사람이 지금 이런 상황 속에서 굉장히 힘들어하는 것을 내가 안다면 우린 그가 예수님께 나아가서 의지하고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해야 된다는 것을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3. 예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믿음을 가져라!

    본문 48절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왕의 신하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내 아들의 병을 고쳐달라고 간청합니다. 아들이 죽어가는 상황 속에서 왕의 신하는 예수님께 간절히 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때 하셨던 말씀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너희는’이란 왕의 신하를 포함한 당시 유대인들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자들을 가리키면서 ‘표적과 기사를 보지 않으면 도무지 믿지 않는다’라고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표적과 기사를 보아야만 믿게 되고 보지 않으면 믿지 않는 신앙의 모습을 예수님께서는 책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 (16:4)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라고 말씀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계속 표적을 구합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야’ 된다는 그런 표적을 계속 구하더라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표적을 보여주지 않은 게 아닙니다. 계속 보여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계속 그걸 요구하더라는 것입니다. 소위 ‘표적 주의 신앙’이라고 하는 것들 ‘표적을 통해서 그걸 보고 예수님을 믿고 믿음을 갖는 신앙’은 결국 예수님께서 원하는 신앙 즉 예수님께서 기뻐하는 신앙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표적을 보면 안 믿을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놀라운 일을 행하십니다. 그것을 보고 안 믿을 사람 있겠습니까?

    문제는 그렇게 믿었을 때 그 믿음은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때는 정말 놀랍고, 기쁘고 해서 믿고 무엇인가 그의 삶이 변화될 것 같이 보이지만 막상 시간이 지나게 되면 다시 도로 원위치가 된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 광야에서 이스라엘 모습을 보시면 40년 동안에 하나님의 이적과 기사를 매일 같이 봅니다. 근데 성경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항상 하나님 앞에 완악했다’라고 했습니다.

    결국은 어떤 놀라운 이적을 보고 그것을 통해서 갖는 믿음은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신앙을 추구하는 믿음은 예수님께서 결코 원하시는 신앙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신앙은 무엇일까요? 표적을 보고 믿는 믿음 즉 뭔가를 보고 믿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믿는 것입니까? 말씀을 듣고 믿는 겁니다. 마태복음 8을 보게 되면 백부장 이야기가 나옵니다. 백부장 자신의 종이 병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백부장은 예수님께 종의 병을 고쳐 달라고 했더니, 예수님께서 내가 가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백부장이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주여 내 집에 오시는 것을 내가 감당치 못하겠습니다. ‘말씀으로만 족하다’라고 말합니다. 말씀으로만 하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이만한 믿음을 내가 보지 못했다’라고 말하면서 그 백 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십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믿음이 어떤 거라는 걸 알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하신 그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말씀을 가지고 믿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주님께서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어떤 것을 보아야만 믿는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 되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이렇게 말씀하셨다면 그것을 하나님 말씀으로 믿고 믿는 겁니다. 이걸 원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10:17)『…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 우리 믿음이 생기고 믿음이 성장하는 것 주인께서는 이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인들 대부분은 표적과 기사를 보아야만 믿는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그것에 대해서 경계하고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4.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다면 말씀대로 행하고 순종하라!

    본문 49절 50절 말씀입니다. 신하가 가로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하신대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신하가 예수님께 우리 집에 와달라고 간청합니다.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와 달라고 말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라! 내 아들이 살았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 사람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본래 이 신하는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요?

    예수님이 자기와 함께 집에 가면 아들이 병 고침을 받을 거라는 그런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사람에게 ‘내 아들이 살았다’라는 말씀했을 때 왕의 신하가 그 말씀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믿고 갔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원래 이 왕의 신하는 예수님과 함께 자기의 집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야 자기 아들의 병 고침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바뀐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혼자 간 것입니다. 왜요? 말씀을 믿은 것입니다.

    ‘내 아들이 살았다’라는 말씀을 듣고 정말 그 말씀을 믿은 것입니다. 그리고 혼자 갔습니다. 성경은 그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갔다고 돼 있습니다. 그래서 왕의 신하는 그 말씀대로 간 것입니다. 믿으면 무엇으로 연결되는 것입니까? 믿으면 순종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진정으로 믿는다고 한다면 그 말씀을 따라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내가 가령 어떤 사람의 말을 정말 믿는다면 누군가와 어떤 말을 했는데 그 말을 정말 믿는다고 한다면, 그 말씀대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만 정말 믿는다면 하나님 말씀을 듣고 행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게 믿음이고 이것이 예수님께서 정말 바라시는 그런 믿음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51절 말씀입니다.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았다 하거늘 왕의 신하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자기 집 종들을 만납니다. 그는 그 종들을 통해서 ‘아들이 살았다’라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그대로 된 것입니다. ‘가라 내 아들이 살았다’라는 그 말씀이 ‘그대로 됐다’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 말씀은 그 말씀대로 되는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우리는 하나님 말씀이 그대로 된다는 것을 믿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건데 정말 우리가 그렇게 하고 있는가를 자신에게 물어보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정말 하나님 말씀대로 내가 믿고 있는가?’ 내가 정말 하나님 말씀을 믿는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걸 보면서 하나의 말씀을 정말 믿고 있구나’라는 것을 내가 알 수가 있습니다. 내 삶 속에서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고, 행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고 한다면, 그건 왜 그런 것입니까? 못 믿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성도님들의 그런 삶 속에서 어떤 부분들은 그 말씀대로 행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부분에서 그렇게 행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면 그 일은 분명합니다.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믿으면 당연히 그대로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믿었을 때 그 말씀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가라 내 아들이 나았다. 이 말씀을 ‘왕의 신하가 믿으니까’ 그의 말씀 그대로 되더라는 것입니다. (살전 2:13)『…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말씀이 믿는 자리에서 역사한다는 것은 그 말씀을 믿을 때 그 말씀 그대로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사실입니다. 내가 정말 그 말씀을 믿으면 말씀대로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을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다라는 말씀처럼 사람은 말을 내뱉고 그 말을 도로 입속에 넣습니다. 내가 이렇게 말했지만, 내가 그 말씀대로 내가 했던 말을 내가 책임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게 인생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번 입에서 하신 말씀은 반드시 그 말씀대로 행하게 하시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대로 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 말씀대로 되려면 그 말씀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씀이 내 삶 속에서 역사하지 못하고 말씀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이유는 우리가 말씀을 믿지 않아서라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아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믿고, 순종하면 반드시 말씀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할 때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엘리사가 나아만 장군에게 뭐라고 말합니까? 요단강에 가서 몸을 7번 씻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몸이 깨끗하게 날 거라고 깨끗해질 거라고 우여곡절 있었지만 나아만은 그 말씀을 듣고 갔습니다. 요단강에 가서 몸을 7번씩 씻고 나왔습니다. 그러자 말씀대로 아이의 살 같이 깨끗하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온통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때 말씀 그대로 역사 했다’라는 말씀으로 구약부터 신약까지 다 채워 있습니다. 결국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주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으로 오늘날 마찬가지로 말씀을 믿었을 때 말씀대로 역사 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 말씀을 믿는다면 그 말씀 그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믿는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순종하는 것입니다.

     

    5. 체험을 통해 믿음이 견고해지도록 순종에 힘쓰라!

    본문 51절 52절 말씀입니다.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았다 하거늘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제 칠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왕의 신하가 종들에게 물어봅니다. 아이가 언제 낫는지 그 시간이 보니까 예수님께서 왕의 신하에게 말씀했던 바로 그때였다는 것입니다.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라는 말씀했던 시간하고 실제 아들이 나았던 시간하고 같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됐을 때 그 때인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이 다 믿으니라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런 놀라운 일을 왕의 신하가 알게 되었을 때 왕의 신하도 믿고 그 온 집도 다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어떤 놀라운 일들을 행하실 때 그 일을 통해서 믿음을 갖게 되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왕의 신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체험했을 때 그의 신앙 즉 믿음이 더 견고해진 것입니다. 그리고 믿지 않던 그의 온 집은 이 일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보면 사람들은 믿음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체험하는 것도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원하시는 믿음이 어떤 것입니까? 말씀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러면 체험을 통한 믿음은 어떻습니까? 이런 체험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갖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했을 때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더 온전해지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믿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이유는 그런 일들을 통해서 더 분명히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 은혜를 체험하고 하나님 역사를 체험하는 이러한 믿음도 필요합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과 믿음의 본질은 아니나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제자들이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께서 이적과 기사를 함께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인해 제자들이 말씀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즉 사도와 제자들이 전하는 그 말씀이 정말 맞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이적과 기사를 통해 보여주심으로써 그 말씀을 더 믿게 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두 가지가 같이 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 보게 되면 초대교회가 한편으로는 이적과 기사를 행하고 그런 가운데서 복음을 전했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건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 참예수교회도 두 가지가 같이 가고 있으며 궁극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믿는 그 믿음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런 체험을 통한 믿음을 갖게 한 다음 현 상태에서 멈추면 안 된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어떤 이적을 보고 기적을 보고 뭔가 하나를 믿지 않습니까? 이 상태에서 머무르는 신앙은 변질해 버립니다. 반드시 하나님 말씀으로 연결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바른 믿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해서 ‘자기와 그 온 집이 다 믿었다’라고 말씀합니다. ‘자기와 그 온 집이 다 믿으니라’ 결국 그들이 믿었다는 건 무엇입니까? 믿음은 결국 영원의 구원을 받음이라 말씀합니다. 저와 그 어른들이 다 믿게 되었다고 한다는 것은 결국은 ‘그들이 다 이제 구원받는 그런 사람들이 되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온 집이 믿고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이건 하나님 뜻입니다. 하나님 한 개인만 믿고 구원받는 게 아니라 그 온 집이 다 구원받기를 바라신다는 겁니다. (7:1)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말씀하십니다. 노아에게 너와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하나님께서 노아의 방주를 만드신 것은 그를 구원시키려고 한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노아뿐 아니라 노아와 그의 온 집이 이 방주를 통해서 구원받도록 하셨습니다.

    (11:7)믿음으로 노아는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 라고 말씀합니다. 결국 이런 말씀들은 하나님은 내게 속한 온 집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내 집의 구원을 얻으리라라는 말씀도 사도행전에 나오는 그런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나 혼자가 아니라 나를 포함한 나의 집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먼저 믿은 그 사람을 통해서 온 가족을 다 구원받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 성도들은 나와 내 집이 다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항상 기도하고, 힘써야 된다라는 것을 또한 우리도 알아야 되겠습니다.

     

    6. 구원자 되시는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매고 동행하라!

    본문 54절 말씀입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 표적이라고 하는 것은 싸인이라는 것입니다. 메시아에 대한 ‘싸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왕의 신하의 병을 고쳐주심으로 인해서 ‘예수님께서 메시아 된다’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신 표적이었다는 것입니다.

    (8:16-17)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많은 병자들이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병자를 다 고쳐주셨는데 성경은 이 상황을 가리켜 이것은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기 위해 하신 거였다라고 말씀합니다. 선지사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었다는 것은 선지사 이사야를 통해서 그리스도 즉 메시아에 관한 말씀이 이루어졌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이걸 통해서 그가 바로 메시아라고 하는 것을 증거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는 이런 자고, 이런 분이라는 것입니다.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는 바로 그 메시아라는 것입니다. 구원자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보내시기로 약속하신 이 메시아 즉, 구원자는 병을 고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병으로부터 자유한 사람 있나요? 병으로부터 오늘 내가 건강했다고 하더라도 내일 병들 수 있는 게 우리 인생입니다.

    병은 육체의 병만 있는 게 아닙니다. 마음의 병도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살아가는 모든 사람 중에 이런 병으로부터 자유한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을까요?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메시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메시아는 병을 고치시는 분이시기에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주님께서 우리 모든 병을 다 고치십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의 병을 고쳐주시는 경우가 있고 병을 고쳐주시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병을 고쳐주시는 것은 알겠는데 병을 고쳐주지 않은 것에 의문을 가질 수 있는데, 오늘 말씀을 보면 메시아가 어떻게 하신다고 말씀하십니까? 병을 짊어지셨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11:28)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예수님께서 우리의 병을 짊어지신다고 말씀하셨습니까? 예수님께서 때로 우리의 병을 고쳐주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경우는 우리의 병을 짊어지셔서 우리를 쉬게 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비록 우리의 육체적인 병을 고쳐주지 않더라도 우리 마음에 평안과 안식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쉬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병을 다 고쳐주지 않으십니다. 왜?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입니다.

    바울사도가 육체의 가시를 다 제거해 달라고 예수님께 간청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그의 병을 고쳐주지 않습니다. 왜? 그가 받은 가시가 너무 많아 자고할까 싶어 예수님께서는 그의 병을 고쳐주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바울이 누구입니까? 바울은 나의 연약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결국 모든 걸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 유익을 위해서 때로 우리 병을 고쳐주기도 하시지만 때로는 병을 고쳐주지 않으실 수도 있습니다. 병을 고쳐주지 않으시는 것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입니다. 왜냐하면, 결국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가장 큰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 과정을 위해서 때론 우리의 병을 허락하시고 우리 병을 고치지 않으실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다 하더래도 하나님께서는 그 가운데 우리 쉼을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걸 능히 감당케 하신다는 겁니다. 우리 마음의 평안과 우리 마음의 즐거움을 허락하셔서 비록 내가 질병 가운데 있지만 그것으로 인해서 내가 마음이 평안할 수 있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쉬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쉬는 겁니까?

    (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의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예수님은 그 쉼을 얻는 방법에 대해서 내 멍에를 매라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멍에를 매는 게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처럼 함께 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두 마리 소가 같이 멍에를 맺었습니다. 예수님은 나와 함께 멍에를 매자라고 제안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처럼 이렇게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힘을 얻는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행한다는 게 뭡니까? 하나님께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았습니까? 그럼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진 짐도 있는데, 예수님의 멍에를 또 맨다! 더 무거워질 것 같은데, 사실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멍에를 매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인생의 멍에를 맬 때, 인생에 짐을 지고 갈 때, 특히 내가 어떤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을 때, 내가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매게 되면 예수님께서 내 멍에의 짐을 짊어주신다는 것입니다. (68:19)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찌로다하나님은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신다고 말씀합니다. 우리 인생의 여러 가지 문제, 특별히 우리가 어떤 질병의 문제로 인해 내가 짐을 지고 있을 때, 고통받고 있을 때 주님께서는 우리 짐을 대신 져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쉬게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과 멍에를 매게 될 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고 능히 그걸 감당할 수 있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그런 가운데서 내가 마음이 평안하고 마음이 즐거울 수 있도록 놀라운 그런 은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배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그런 삶을 살면서 점점 예수님과 같은 삶이 되도록, 예수님을 닮아가는 그러한 삶을 되도록, 더욱더 배우고 그런 삶을 살아가다 보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짐을 더 많이 져주시고 그로 인해 더 많은 쉼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인생의 짐이 다 해당하는 것으로 질병뿐 아니라 내가 겪고 있는 모든 인생의 문제들 인생의 멍에들 짐들 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메고 예수님을 배우는 그런 삶을 살아갈 수만 있다면 내가 병이 있을 때 예수님을 통해 쉬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내 병을 고쳐주셔서 쉬게 할 수도 있고, 내 육신의 병을 고치지 않으시지만 내 마음에 놀라운 예수그리스도의 평안을 허락하셔서 능히 감당할 수 있게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넉넉히 들어가게 하는 그런 은혜를 우리에게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이렇게 행하실 수 있는 바로 ‘우리 구원자 되신다’라는 것입니다.

     

    바라옵기는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구원자 되신다는 것을 믿으시고 실제 삶 속에서 날마다 날마다 예수님이 우리와 동행해 주셔서 비록 우리가 가는 이 과정이 힘들고 어렵겠지만 예수님을 통해 평안과 즐거움을 얻고 능히 우리가 걸어가는 이 모든 것을 감당하고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데까지 큰 은혜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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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음메시지] 예수님 손잡고 일어서세요(막5:25~34)

    [복음메시지] 예수님 손잡고 일어서세요(막5:25~34)

    [말씀제목] 예수님 손잡고 일어서세요(막5:25~34)

    [설교자] 오희도 목자

    [설교일] 2024년 4월 20일(토) 안식일 오전 예배

         온 가족 초청전도 집회를 맞이하여 성경에 나온 어려운 환경에서 예수님의 초청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예수님의 손을 붙잡은 한 여인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25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26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인간의 삶 가운데 많은 힘듦이 있지요. 경제적인 가난 때문에 힘들게 살아가기도 하고, 인간관계 속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분들도 계시지만, 마음과 정신까지 무너뜨리는 것은 몸의 병입니다. 몸의 병이 깊이 들었을 때 사람은 점점 희망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성경에 이 여인은 혈루증(만성자궁출혈)을 12년 동안 앓았다고 나와 있습니다. 당시에도 전염병이 많아서 유대인의 사회에서는 유출병을 앓으면 부정하다고 레위기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전염 때문에 유출병을 앓는 자는 공동체와 마을에서 떨어져서 살아야 했습니다. 본문을 보면 여인은 치료를 위해 노력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고칠 수 없어서 점점 병으로 시들어갔습니다.

         그러던 가운데 여인은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27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다른 많은 사람들 또한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들었겠지만, 이 여인에게는 ‘정말 만나야겠다.’라는 결단을 내리게 하는 한 줄기 빛과도 같은 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여인은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가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습니다. 12년간의 만성유출병으로 부정하게 여겨져 온 여인이 공동체에 나타나게 된 것이 드러나면 사람들의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사람들 사이에 몰래 섞여서 온 것은 보통 용기가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 여인으로서는 예수님을 만나거나 대화할 방법이 없으니,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잡겠다고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댑니다. 당시 상황에서 이것 또한 죽을 수 있는 행동이었습니다. 부정한 사람이 고의로 남을 만지면 똑같은 병에 걸리게 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여겨 죽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여인은 목숨을 두 번 건 것이지요. 무리에 섞일 때 한 번, 예수님의 옷을 잡을 때에 또 한 번. 이 여인은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을 때 예수님을 붙잡아야겠다는 생각 외엔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참예수교회에 다니시는 많은 분들이 마음으로 예수님을 붙잡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붙잡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초청받으신 분들에게도 예수님을 붙잡겠다는 마음을 주님께서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 인생은 다 잘 사는 것 같아도 저마다 아픔이 있습니다. 좌절이 있습니다. 절망이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용기를 내어서 예수님께 향하고 예수님의 손을 붙잡기 위해서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29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여인이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을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혈루병이 나은 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본인이 깨달았다는 것은 즉각 나았다는 것이지요. 스스로 즉각 깨달을 정도로 몸이 나았습니다. 여러분들도 예수님을 붙잡으시고 이런 놀라운 축복을 받으시기를 원합니다.

    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이 목숨을 걸고 내민 믿음의 손 때문에 구원을 얻었다고 말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평안히 가라고 하시고 건강의 축복을 해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만난 혈루증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이 여인은 결심을 하고 예수님 뒤에 가서 옷을 붙잡은 것밖에 없지만, 12년 동안 고통의 병 속에서 살다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건강한 몸으로, 구원받은 예수님의 딸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성도님들도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께 손을 내미는 작은 동작으로 여러분의 인생이 놀랍게 변하는, 인생 가운데 예수님의 축복이 임하는 귀한 오늘이 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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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음메시지] 네가 낫고자 하느냐? (요 5:1-9, 14)

    [복음메시지] 네가 낫고자 하느냐? (요 5:1-9, 14)

    2024년 5월 25일 (토) 오전예배

    설교제목 :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본문말씀 : (요 5:1-9, 14)

    설교자 : 박은진 목자님

     

    ‘베데스다’ : 자비의 집, 긍휼의 집

    당시 의술은 매우 희귀한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처럼 의사에게 치료받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기에 많은 병자들이 이곳 베데스다에 모인 것이다.

    (3-4)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 어떤 사본에는 있고, 어떤 사본에는 없음. 이는 중요하지 않고 우리는 그대로 믿으면 된다.

    당시에 천사가 물을 동하게 하면 가장 먼저 못에 들어간 자는 어떤 병이든지 낫게 된다는 소문이 있었다. 이것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많은 병자들에게 소문으로 퍼졌다.

    소문의 방식은 사실 선착순 방식이다. 그러나 이 선착순 방식은 매우 가혹한 방식일뿐더러 무자비한 방식이다. 그 이유는 서로 경쟁을 부추기게 하기 때문이다.

    베데스다는 늘 아비규환이었을 것이다. 경쟁 속에서 서로를 긍휼히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9)병자’ : 사회적 약자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이 베데스다와 같다. 매일을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자비하게 경쟁하고 있는 것이다.

    5 거기 삼십팔 년 된 병자가 있더라
    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요 5:5-6)

    (5) 30년 된 병자, 네가 낫고자 하느냐 => 예수님은 이미 병자의 형편을 모두 다 알고 계셨다.

    38이란 숫자는 이스라엘에게 고통을 의미하는 숫자이다. (신 2:14) 광야생활 38년

    아무도 그 병자를 도와주지 않았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병자의 형편을 모두 아시고 그 병자를 낫게 해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마 12:20)

    (마 12:20) 상한 갈대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 끄지 않으시는 예수님의 사랑이 이와 같다.

    (8) 경쟁의 자리에서 구할 것은 없다. 오로지 예수님 한분께 나아가야 한다.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 11:28-30)

    (마 11:29-30)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안식처가 되어주신다. 경제, 가족, 취업, 결혼 등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형편을 이미 다 아시고 문제를 해결해주신다.

    해결되지 않는 상황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께 나아가 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14) 예수님께서 그 병자를 다시 만나셨는데 더 심한 고통을 받지 않도록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중요한 것은 영혼의 구원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벧전 1:9) 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이다.

    먼저 경쟁의 자리에서 떠나야 한다. 또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영혼의 구원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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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음메시지]우리를 광야의 쓴물로 인도하시는 은혜 (출15:22~27)

    [복음메시지]우리를 광야의 쓴물로 인도하시는 은혜 (출15:22~27)

    ♣ 2024. 01. 20. 안식일 오전 (오희도 목자)

    22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행하였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23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홍해를 건넌 것은 애굽의 손에서 구원받은 의미도 있고 세례를 통해 구원 받았음을 예표합니다. 홍해를 건너고  감사의 노래를 한후(15:1~21)광야길을 3일 행하였으나 이스라엘 백성은 물을 얻지 못합니다. 광야에서 제일 필요한 것은 물인데 마라의 물이 써서 마시지를 못했습니다.

    우리가 세례받고 교회에서 축하해 주고, 찬양하고 기뻐하다가 3일이 됐는데  좋게 변한 게 없어요. 오히려 더 나빠지는 길로 가는 거죠. 삶이 더 팍팍하고 힘들어지는 상황이 된 거지요.

    24백성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출애굽 후 원망이라는 단어가 처음 나온 곳이 이곳입니다.  하나님과 모세를 향해서 백성이 원망한 것이 한 달 후도 아니고 3일!  말하자면 세례받고 3일 만에도 원망이 나올 수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도해 가신 결과입니다.  왜 이렇게 인도하셨을까요?  세상에서 살던 우리의 태도를 고치시고 치유하기 위해서 마라로 인도하십니다. 또다른 이유는 마라의 고통의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은 내면에 절망이 생길 때 심리학적으로 원망하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민14:2~4)  원망은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게 합니다. 인간의 악한 모습이 원망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아주 조용히 이스라엘 백성을 꽃길이 아닌, 쓴물이 있는 곳으로 인도해 가신것은  깊은 섭리와  뜻이 있습니다. 세례받고 거듭난 백성이 됐을 때 알아야 될 깊은 인생의 가치는 광야의 가치입니다. 광야의 시련을 통해서 내가 얼마나 악하고 얼마나 무가치한 존재고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세상에서는 내가 왕이었어요. 내가 제일 잘 나갔어요. 또 그렇게 사는 것이 인생의 멋인 줄 알았어요. 하나님은 그러한 우리를 낮추시고 겸손한 사람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의 귀한 그릇으로 쓰기 위해서 나를 비우게 하기 위해서 쓴물로 조용히 인도해 가십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이 누구며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가를 체험하기 위해서 마라로 인도하십니다.

    25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쌔

     마라로 인도하지 않았으면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을까요?  우리가 세례받고 구원받았으면서도  고통과 아픔이 없으면 기도할 줄 모릅니다. 아픔이 있는 성도들은 기도의 모습이 달라요. 눈물을 흘리고 간절해집니다.  우리를 기도하게 만든다는 것은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을 보면 직접 물을 주시지 아니하고  한 나무를 지시하셨어요.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은 뭔가를 지시할 거예요.  이 나무는 영적인 눈이 있어야 보여요. 우리가 영적인 눈을 뜨지 않으면 하나님이 지시하는 것이 안 보여요. 영적인 눈을 뜨게 하는  훈련을 위해 마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한 나무는  성경 전체적으로 보면 십자가입니다.(벧전 2:24)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이 지시하는 것은 십자가를 바라보라는 거예요.  우리가 고난 속에서 십자가를 바라볼 때 십자가가 드디어 나의 십자가가  됩니다. 그 십자가가 나의 십자가가 될 때 물은 단물로 변해질 줄 믿습니다. 십자가를 고난 속에서 발견하십시오. 마라로 간 것은 고통, 고난이 아니고 영적으로는 은혜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했다고 돼 있어요.  하나님이 지시한 곳을 바라보는지를 시험하시겠다는 거예요.  

    26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는지(들을청,  따를종)를 보는 것이  첫 번째 시험이에요.   두번째는 하나님 보시기에 이 땅에서 의를 행하라는 거에요. 세번째는 하나님의 계명에 귀를 기울이라는 것입니다.  네번째는 내 모든 규례를 지키는지 본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 말씀을 순종 하는지를 보시는 것이  첫 번째 시험이자 최종의 시험이기도 해요.

    그렇게 순종하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을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 임이니라. (여호와 라파) 하나님이 신기해요. 물이 써서 원망했는데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라고 표현했어요.  하나님 나라의 질병은 바로 원망입니다.  원망!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하는 마음을 치유해 주시겠다는 말이 들어있는 거예요. 원망이 나올때에  치료받을 수 있는 비결이 하나님을 청종하는 것입니다. 우리교회가 여호와 라파의 교회가 되길 원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시험의 장소이자 치유하는 장소입니다.

    27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 물샘 열 둘과 종려 칠십 주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그들이 치유가 되고 그들이 회복이 됐을 때 하나님의 보상은, 그들을 엘림에 이르게 합니다. 엘림에 이른 후 마라로 인도한 게 아니라 마라로 인도하시고 , 치유하신후  엘림으로 보내셨어요. 엘림에 먼저 갔으면 그들은 치유되지 않았을 거예요. 엘림에 이르니 거기 하나님께서  물샘 12와 종려 70주를 주셨어요. 광야에서 제일 또 필요한 게 물과 그늘이에요. 거기서 그들이 물 곁에 장막을 칩니다.

    오늘 본문 짧은 구절 속에서 하나님의 깊은 뜻을 발견하길 바랍니다. 2024년 우리가 삶의 꽃길은 아니더라도 나의 이러한 마라같이 쓴 인생 속에 하나님의 시험을 깨닫고 다 통과해서 엘림의 보상이 열릴 수 있는 놀라운 축복의 자리가 되는 2024년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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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음메시지] 복음에 빚진 자 (롬 1:8-15)

    [복음메시지] 복음에 빚진 자 (롬 1:8-15)

    2024년 2월 13일 (화) 저녁예배

    설교제목 : 복음에 빚진 자

    본문말씀 : 로마서 1장 8-15절

    설교자 : 박은진 목자님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딤전 1:13) 바울 사도는 복음 믿는 자들을 핍박하는 자였지만 예수님을 만난 후로 복음에 빚진 자로 변화되었다. 심지어 자신의 생명을 바칠 각오로 복음을 위해 힘썼다.

    복음에 빚진 자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떤 것이 필요할까?

    ◈ 복음에 빚진 자의 삶

    1. 복음이 전파되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8)

    첫째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8)

    (살전 1:8) 복음에는 놀라운 전파력이 있다. 한 사람의 믿음이 전파되어 넓게 확장된다.

    한국 참예수교회가 그 예이다. 일본에서 복음을 들고 온 한 사람의 믿음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전국에 전파되어 현재 한국 참예수교회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처럼 하나의 씨앗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잊지 않고 감사해야 한다.

     

    2. 쉬지 않고 기도를 해야 한다. (9)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9)

    (고전 3:6-7) 믿음을 자라게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이시다.

    (고전 2:1-5) 전도는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다. 온전히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서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고전 2:4-5)

     

    3. 만나도록 노력해야 한다. (10-15)

    어떠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10)

    기도 후에 해야하는 것은 바로 ‘만남’이다. 만남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주신다.

    전도과정에서 만나려고 할 때 항상 무슨 일이 생길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바울 사도도 감옥 중에도 복음을 위해 힘쓰고 소망했다.

    쉬지 않고 기도했다면 만나야 한다. 그 과정에서 다른 누군가가 복음을 받아들일 수도 있다.

    (행 1:8) 땅 끝에 있는 사람들까지 만나고, 복음을 전해야 한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 1:8)

    모든 이들을 구원해주시는 복음의 능력을 믿고, 기도로써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간구하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유튜브 예배링크

  • [복음메시지]그리스도의 심판대 (고후5:1-10)

    [복음메시지]그리스도의 심판대 (고후5:1-10)

    ♣ 2023. 11. 25. 안식일 오전 (오희도 목자)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고후 5:1)

    1절 말씀을 보면 두 개의 집이 나온다.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 &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 장막집은 임시 거하는 처소이다.(고후4:18) 내가 살았던 집도 나의 몸도 결국 무너진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영원한 집이 있다.(요14:2) 하나님의 백성이 내집 마련의 꿈을 어떻게 이룰수 있는가?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은  하나님께서 지으신다.  사람의 으로 짓는 것이 아니다.  손으로 짓는 것은 실수가 많고, 엉망으로 짓기도 한다. 그러나 영원하고 완전한 집이 우리에게 있다. 이 땅에 집이 없어도 소망을 가질수 있고  살아가는 의미가 된다. 이것이 인생의 중요한 결론이다.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고후 5:2)

    우리는 땅에 있으면서 탄식한다.  부정적인 탄식이 아닌 하늘에 있는 영원한 처소를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탄식이다. 또한  삶의 고단함과 정욕과 욕심으로 인해 나약한 자기의 모습을 보며 탄식한다.  하늘의 처소는  이 땅의 장막집이 무너져야 들어간다. 그러나 바울사도는 하늘의 영원한 처소를 이 땅에 살아갈때 덧입는다고 표현하고 있다.

    덧입는다는 것이 무엇일까?  하늘나라의 영원한 집은 두 구조가 있다. 하늘나라에 가서 거하는 처소도 있지만  이 땅에 살아갈 때 하늘나라의 영원한 집을 영적으로 덧입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3)

    벗은 자들로 발견되는 시점은 죽었을 때이다. 하나님 믿지 않고 죽으면 마치 벗은자들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이 땅에서 영원한 처소를 사모하고 믿었던 자들은 영원한 처소가  덧입혀져 있다.

    우리는 이 장막에 살면서 무거운 인생의 짐에 눌려 지게를 지고 살아가는 것과 같다.  헬라적인 사고는 육신과 영혼을 분리해서 생각했다. 이원론적인 사고이다. 극단적으로는 영혼은 이미 하늘나라에 가 있기 때문에 육신은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고 생각을 했다.  매우 위험한 생각이다.

    육신을 갖고 있을때 무슨 일을 했는지에 따라 그것을 근거로 구원이 결정된다. 육과 영이 분리되어 있는것이 아니다.  육신의 행위와 함께 하나님 앞에 심판 받는것이다.

    죽을 몸이 생명에게 삼킨자 된자들은 영원한 처소를 덧입는 자가 된다. 세례받으면 주의 죽으심과 함께 장사되었고 물에서 올라오는 순간 새생명 가운데 살게 된다.(롬6:4) 이 일을 하나님이 이루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주셨다.(5절) 성령을 받은 우리는 속으로 탄식하며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린다.(롬8:18~23) 성령은 영원한 삶을 보증해주기 때문에 우리는 이 땅에서 담대하게 살 수 있다.(6절)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이 본질임을 깨달을 때 담대해진다. 세례받고 올라올때 이미 내집 마련이 되었다.  우리는 주님과 살기 위해 빨리 떠나기를 바라지만(8절) 이 땅에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게 하기를 힘써야 한다.(9절)  고린도 성도들은 자신을 기쁘게 하기에 바빴다. 교회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고후 5:9~10)

    우리는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날 것이다.(10절) 벗어날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교회의 수많은 문제가 생기는 이유는 심판대가 있음을 생각지 못해서이다.  영원한 세계에 들어가는 순간 서야 할 곳이 심판대이다. 그때에는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 날마다 주를 기쁘게 하는 자가 되고 담대히 주님 오시는 날을 기다리며 주안에서 날마다 행복한 신앙 생활 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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