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8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9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10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11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12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이사야 53장은 ‘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의 외모는 초라했고, 고난을 당할 뿐만 아니라 고난을 당할 때 잠잠했습니다. 그가 고난을 당할 수 밖에 없던 이유는 속건제물로 드려지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런 그는 일평생을 자신을 위해 살아간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살아갔습니다.
그는 바로 누구일까요?
(사 52:13) 바로 하나님의 종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요 1:41)
안드레는 예수님을 만났을 때 메시야, 즉 그리스도를 보았다고 고백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700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야로 오실 것을 예언했던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알려주셨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사 7:14) (사 9:6) 이사야서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이 여럿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 42:2-4) 예수님은 상한 갈대를 꺽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신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교회에는 믿음이 약한 자들이 있습니다. 그런 자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살살 어르고 돌봐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요 1:10-11)
1. 예수님은 초라한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1-3)
1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눅 2:7) 예수님은 마굿간에서 초라하게 태어나셨습니다. 또 아이를 죽이라는 헤롯왕의 칙령에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협 속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며 애굽으로 피난가기도 했습니다.
(사 53:2-3) 또한 예수님은 아름다운 것도 없을뿐더러 모든 이들에게 멸시를 받기까지 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사람들의 손에 죽게 됩니다. 예수님의 삶은 그저 고난이었습니다.
(마 8:20) 그의 길을 따르는 길은 고난이 가득합니다. 예수님은 고향 사람들에게 배척을 당하시기도 했고, 제자들에게 버림을 받기도 하셨습니다.
(요 1:10-11) 그렇다면 나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나요?
우리는 나의 삶 속에서 예수님을 영접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2.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4-6)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고난을 당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모든 이들의 죄를 사해주시기 위해 고난을 당하셨던 것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 1:21)
우리는 나를 위해 예수님께서 대신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6) 또한 마치 양처럼 내 일만 생각하고 교회 걱정은 안 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당하시면서 원망과 불평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신 삶은 존귀한 삶이었습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초라한 삶을 살아가며 고난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늘 생각하며 빚진 마음을 갖고 살아가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2020년은 인류사에서 잊지 못할 한 해로 기억될 것이다. 중국 우한에서 시작된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 세계로 퍼져 나갔고 이로 인해 수많은 확진자와 사망자를 낳았다. 그로 인해 팬데믹이라는 생소한 용어도 알게 되었고 그것이 얼마나 공포스러운 상황인지도 뼈저리게 알게 되었다. 비록 해제된 지 2년이 지났지만 바이러스로 인한 팬데믹 사건은 오늘 날 세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서 큰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세계의 학자들은 21세기를 코로나 이전 시대와 코로나 이후 시대로 양분한다. 이 사건이 역사의 전환점이 되었다는 뜻이다. 이 결과의 원인이 매우 놀랍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 매우 단순한 구조의 바이러스 때문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팬데믹의 경험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유익이 있다. 첫째는 미래를 예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쉽게 또 순식간에 멸망에 이를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따라서 우리는 경성해야 한다. 둘째 유익은 우리 교회의 가치와 영향력에 대한 낙관이다. 작은 바이러스가 이렇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 눈에 보이지도 않는 군소 교단인 우리 교회도 상상할 수 없었던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미래가 올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현재 다수냐 소수냐는 결코 중요하지 않다. 미래에는 소수가 다수도 될 수 있고 다수가 소수로 전락할 수 있다. 설사 소수의 규모에 머문다 할지라도 그 영향력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규모 때문에 위축될 필요가 없다. 또 이런 말씀도 있기 때문이다.
(눅 12:32)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우리는 지난 시간까지 산상보훈 가운데 팔복 설교를 살펴보았다. ‘복이 있나니’라는 주님의 선언의 내용이 여덟 개의 주제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팔복이라고 했다. 이 여덟 개의 주제는 천국 백성의 속성에 대해 말한다. “천국 백성은 이러한 성품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성품을 가진 자에게 이런 복이 있습니다.”라는 것이 그 내용이다. 거기에 이어서 오늘 말씀이 주어지고 있다. 이러한 성품의 천국 백성은 결국 “세상에 이런 영향력을 미칩니다.” “천국 백성은 이런 역할을 해야 합니다.”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설명하실 때 예수님이 비유를 사용하시고 있다. 바로 소금과 빛이다.
먼저 발견되는 점은 ‘너희는 소금’이다. ‘너희는 빛’이다. 라고 표현되지 않고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렇게 ‘세상의’라는 수식이 붙는 것은 성도란 세상을 등지고 산 속에 들어가 은둔하면서 살면 안된다는 뜻이다. 오히려 세상 속으로 들어가서 타인과 함께 생활하고 그들과 함께 생활하는 환경에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고전 5:10)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과 토색하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그러면 세상 속에서 소금과 빛이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이고 그런 존재가 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난다는 뜻인가? 그 교훈을 얻기 위해 우리는 소금과 빛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소금과 빛의 공통점을 주목하면 그 의미와 이루어질 일에 대해서 가늠할 수 있다. 둘의 공통점은 이렇다.
첫째, 소금과 빛은 부패와 오염을 방지한다.
(엡 5:8-9)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소금은 살균력이 있어서 부패를 방지하는 기능이 있다. 그래서 냉장고가 없던 시절에 음식물 오래 보관하는 방법은 바로 소금에 절여 놓는 것이다. 안동에 가면 꼭 먹어봐야 하는 음식 중에 간고등어가 있다. 바닷가로부터 멀리 떨어진 경북 안동 지방 사람들이 생선을 먹으려면 운송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부패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그래서 상하지 않게 하려고 고등어를 소금으로 절였던 것이다. 그래서 안동에서 간고등어가 명물이 되었다.
애굽에서는 죽은 시체를 미이라로 만들 때 소금물에 넣어두었었다.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그런가 하면 집안 살림 용품 중에 찌든 때를 제거하고 소독 청소하는 ‘락스’라는 제품이 있다. 이 ‘락스’는 화학상의 원료가 바로 소금이다. 이처럼 소금에는 부패와 오염을 방지하는 기능이 있다.
빛도 마찬가지로 부패를 방지하는 기능이 있다. 지하실 같은 어두운 장소에는 세균이 득실거린다. 그러나 그곳에 햇볕이 내리쬐거나 그곳의 물건들을 햇볕에 내놓으면 태양광 자외선에 의해서 깨끗이 살균된다.
병원에서는 질병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일에 사용하는 장비가 있다. 방사선을 사용하는 장비이다. 이런 장비는 빛을 고 에너지로 농축시킨다. 그래서 암환자의 환부에 쪼이면 암세포가 사멸하게 된다. 이처럼 빛에는 병을 치료하는 기능이 있다.
그런가하면 어두운 밤거리를 비추는 방범등이 있다. 방범등은 청색이 많은데 이는 흰색등보다 더 멀리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색등을 방범용으로 활용하면 범죄율이 감소한다는 설이 있다.
이처럼 빛과 소금에는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부패와 오염을 방지하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성도를 일컬어 “너희가 바로 그런 존재다”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소금이 그런 속성을 가지도록 만드신 것처럼 그리스도인을 그렇게 만드셨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빛 안에 그런 속성을 넣어두신 것처럼 천국 백성 안에 그런 성향을 가지게 하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무엇을 적극적으로 행하라는 뜻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지키라는 뜻이다. 그 정체성에 충실하면 세상 속에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골 4:6)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세상의 인간관계 속에서 들려오는 말에는 냄새나 향기가 있다. 비방의 말, 원망의 말, 남을 깍아내리는 말, 자기 신분에 걸맞지 않은 말은 마치 부패하는 음식 냄새와 같다. 역겨워서 그 자리를 떠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반면 칭찬의 말, 감사의 말, 은혜를 끼치는 말, 자기 신분에 합당한 말은 방향제를 뿌린 것처럼 향기롭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 곁에는 오래도록 함께 하고 싶다.
이처럼 내가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신분에 맞는 언어를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세상에 긍정적인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 불신자들은 자신들의 무리 속에 경건한 성도가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긴장한다. 그래서 함부로 상스런 말도 못하고 함부로 행동하지 못한다. 부디 썩어져 가는 세상에서 가장 먼저 은혜로운 언어를 통해 부패를 막고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살아가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란다.
둘째, 소량이지만 끼치는 영향이 매우 크다.
바다에서 염분의 양은 3.4%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렇게 작은 비율의 염분 때문에 바다물은 썩지 않는다. 염분은 바다를 썩지 않게 할 뿐만 아니라 인체에도 필수적인 광물이다. 염분은 사람의 혈관 벽에 붙어있는 이물질을 제거하고 혈관이 딱딱해지는 것을 방지한다. 또 장내 소화액 분비를 촉진시키고 장의 움직임을 원활하게 해서 장내 음식물이 부패하는 것을 방지한다. 이처럼 아주 작은 양이지만 소금이 미치는 영향력은 매우 크다.
빛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한 밤중 망망대해에 떠있는 배들은 항구를 찾아오기 위해서 수많은 조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몇 십 개 몇 백 개의 등대가 필요하지 않다. 불이 켜진 한 개의 등대만 있어도 배들이 악천후에도 안전하게 항구로 되돌아오기에 충분하다.
가로등도 없는 시골길에서 행인이 보행하려면 어느 정도의 빛을 필요할까? 작은 손전등 하나만 있어도 밤길을 가기에는 충분하다. 그것으로 안전하게 보행할 수 있다.
작은 빛이라도 있다면 우리는 길을 찾을 수 있다. 이처럼 소금이 아무리 그 분량이 적을지라도, 또 빛이 광도가 아무리 미미할지라도 필요한 때에 필요한 곳에서는 그 영향력은 충분하다. 주님은 바로 천국 백성인 성도를 그런 존재로 만드신 것이다. 부디 그런 사실을 이해하고 세상 속에서 신앙인으로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되자.
(빌 2:15)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셋째, 자기 희생을 통해 유익을 준다.
팔레스틴의 소금은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소금과는 많이 다르다. 당시 그 사람들은 바다에서 소금을 취한 것이 아니라 육지에서 소금을 취했다. 이것을 암염이라고 하는데 한마디로 돌과 소금이 섞여 있는 것이다. 사해 주변에는 암염이 많이 있다. 이 암염으로부터 소금을 체취하는 과정은 이렇다. 암염을 물에 넣으면 염분 성분은 녹고 돌 성분만 남는다. 그렇게 물로 녹여낸 염분을 다시 증발시키면 소금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물로 염분을 녹이는 일을 반복하면 나중에는 염분이 다 빠지고 돌 성분만 남게 된다. 이렇게 염분이 다 빠졌으니 이제 소금을 얻을 수 없고 그런 암염은 길바닥에 내다버렸던 것이다. 그러면 그 맛잃은 암염이 오가는 사람들의 발에 밟혔던 것이다. 본문 말씀에 맛 잃은 소금이 발에 밟힌다는 뜻은 이런 배경아래 나온 표현이다. 이처럼 암염이 맛을 내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 있다. 그것은 바로 물에 자기를 녹여내는 과정이 필요하다. 바로 자기를 내어주는 희생이다.
빛도 유사한 특징이 있다. 예수님 공생애 시대에 이스라엘의 가옥 구조는 단순했다. 오늘날처럼 채광이 잘되는 구조가 아니다. 출입문이 하나요 창문은 작았다. 그래서 대낮에도 실내는 매우 어두웠다. 그렇다보니 사람들은 주간에도 항상 등잔불을 켜고 생활해야만 했다. 따라서 전기도 없던 그 시절에 등잔은 모든 가정이 구비하는 필수품이었다. 그 등잔에 불을 밝히려면 기름이 필요했는데 그 기름의 원료는 바로 감람유, 올리브유였다. 올리브유는 정제해서 가장 먼저 추출되는 것을 엑스트라 버진이라고 해서 식료품으로 사용한다. 보통 네 차례정도 추출하는데 가장 나중에 추출되는 질이 낮은 올리브 오일을 등불용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이처럼 실내에 빛을 비추려면 등불을 밝혀야 했고 등불을 밝히려면 기름이 태워져야 했다. 즉 자기를 내어주는 희생의 과정이 필요했다.
이렇듯 소금을 보아도 등잔불을 보아도 녹아지고 태워져야 한다. 녹아지고 태워지는 희생의 과정이 없으면 존재로서의 기능을 할 수 없다. 이처럼 성도가 천국 백성이라는 존재로서 의미가 있으려면, 자기 사명을 완수하려면 반드시 자기희생의 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교훈하고 있다. 그런데 그 희생은 그렇게 거창한 것이 아니다. 첫째는 내가 세상 속에서 신앙인이라는 것을 밝혀야 한다. 소위 커밍 아웃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다운 말과 행동을 통해서 세상과 소통하고 대화하며 사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빛과 소금의 사명을 다하는 참 성도의 모습이다. 만약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살아간다면 그것은 마치 염분이 다 빠진 암염과 같다. 그것은 마치 등잔불에 소쿠리를 덮어 놓은 것과 같다. 부디 자기 정체와 자기 신앙을 세상을 향해 적극적으로 밝히고 드러내는 성도가 되자.
예)참예수교회의 초기의 발전에 자기희생의 목자님들이 있었다. 세무서 공무원의 안정적인 신분도 마다하고 나아가 순교도 불사하고 목회의 길을 나선 박필선 목자님 같은 분들의 희생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그분 한 분이 아니었다. 한국전쟁 이후 가난하고 어려운 시대에 사회로 나가지 않고 한 달에 쌀 한 포대 정도의 노임만 받고 희생한 원로 목자님들이 있었다. 이렇게 자기를 내어주는 목자님들이 있었기 때문에 참예수교회가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그런 희생의 전통은 끊어지지 않고 대물림 되었다. 어떤 목자님은 사회 속의 안정된 직장을 그만두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위해서 목회의 길을 선택했다. 자기를 내어주는 희생의 정신은 앞으로도 그 전통이 되어 이어질 것이다.
그런 현실을 볼 때 저는 비록 우리 교회가 소수지만 미래가 매우 밝다고 확신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소금과 빛의 역할이 살아있다는 뜻이고 그것이 살아있으면 우리 교회는 미래에 세상을 변화시키는 큰 결과를 나타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성도님들은 어떻게 소금과 빛의 사명을 다할 수 있을까? 모두 목회자가 되어야할까? 박필선 목자님처럼 다른 원로 목자님들처럼 그렇게 목회자의 길을 가라는 것인가? 순교라도 하라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성도님들은 최전선에서 세상과 접촉하며 영적인 전쟁을 수행하고 있다. 그래서 자기가 소속한 사회와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면 소금과 빛의 사명을 완수하시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기독교인이라는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기를 두려워하지 말자. 그리고 그 자기 정체에 일치하는 삶을 살자. 세상으로부터 저들이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라는 칭찬을 듣자. 여기까지 가면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고전 6: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이 세상의 사람들은 소유를 추구하는 삶을 산다. 그러나 우리는 소유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지 않았다. 세상을 위해 내어주기 위해서 왔다. 주님이 먼저 십자가에서 그 모범을 보여주셨다. 부디 주님이 남기신 모범대로 빛과 소금의 본분을 다하는 성도가 되자. 나를 통해 세상이 변화될 것이다. 그리고 세상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올 것이다. 그 사명을 감당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천국의 기업을 상속하시는 저와 성도가 다 되시길 예수님 이름으로 기원한다.
예레미야서를 자세히 읽으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과 마지막 날의 모습, 그리고 그때 우리 성도들이 가져야 하는 마음가짐을 배울 수 있습니다.
1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냐와 유다 방백들과 목공들과 철공들을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옮긴 후에 여호와께서 여호와의 전 앞에 놓인 무화과 두 광주리로 내게 보이셨는데
유다 왕 여호야긴이 재위에 있을 때에,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칩입하여 유다 왕, 방백들, 목공들과 철공들을 바벨론으로 사로잡아갔습니다. 이는 바벨론에 건물을 지을 사람들과 바벨론의 전쟁에 동원할 사람을 보충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왕하 24:10~16)
2 한 광주리에는 처음 익은 듯한 극히 좋은 무화과가 있고 한 광주리에는 악하여 먹을 수 없는 극히 악한 무화과가 있더라
3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무화과이온데 그 좋은 무화과는 극히 좋고 그 악한 것은 극히 악하여 먹을 수 없게 악하니이다
그렇게 유다의 많은 사람들이 사로잡혀간 이후,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여호와의 성전 앞의 무화과 두 광주리를 보여주십니다. 한 광주리에는 극히 좋은 무화과, 다른 광주리에는 극히 악한 무화과가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성전에 극히 좋은 무화과도 있고, 극히 악한 무화과도 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마지막 날, 오늘날 교회 안에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무화과와 나쁜 무화과가 있습니다. 성경을 읽으며 세상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좋은 무화과가 되어야겠다는 소망을 갖게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동부교회 성도님 모두가 좋은 무화과가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5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이곳에서 옮겨 갈대아인의 땅에 이르게 한 유다 포로를 이 좋은 무화과 같이 보아 좋게 할 것이라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갈대아인의 땅에 처참히 끌려간 유다 포로를 좋은 무화과 같이 보기에 좋게 할 것이라고 다시 한번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좋은 무화과와 같은 백성들을 왜 포로로 끌려가게 하신 것일까요?
(창15:6-7)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낸 여호와로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죄 가운데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우상이 창궐한,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곳에서조차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을 떠나자, 하나님께서는 결국 다시 그들을 갈대아 땅으로 돌려보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가나안 정탐을 한 후, 하나님을 원망하자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을 앞에 두고 다시 돌아가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끝까지 회개하지 않자 다시 죄악의 땅으로 돌려보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 가운데서 나오게 구원해 주셨지만, 우리가 회개하지 않고 죄악된 세상을 계속 좇는다면 우리 또한 죄의 근본인 지옥으로 갈 수 있습니다.
(벧후 2:22)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
베드로 사도는, 죄 가운데 구원받았으나 다시 죄악 가운데로 돌아가는 이들을 도로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눕는 돼지로 빗대어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서 극히 악한 무화과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우리 동부 교회 성도님들 또한 더러운 죄악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6 내가 그들을 돌아보아 좋게 하여 다시 이 땅으로 인도하고 세우고 헐지 아니하며 심고 뽑지 아니하겠고
7 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로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오늘 본문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 또한 하나님의 심판이 확정된 이들입니다. 이들은 죗값을 치르기 위해 갈대아인의 땅에서 70년이라는 시간을 채워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 동안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잘 돌보아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를 들어, 다니엘과 같은 국무총리, 에스더와 같은 왕비, 느헤미야와 같은 비서실장을 세우셨듯,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성공하며 살 수 있도록 잘 돌보아주셨습니다. 비록 죗값을 치르게 하셨지만, 그들이 회개하여 좋은 무화과가 되면 그들을 잘 돌보아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8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유다 왕 시드기야와 그 방백들과 예루살렘의 남은 자로서 이 땅에 남아 있는 자와 애굽 땅에 거하는 자들을 이 악하여 먹을 수 없는 악한 무화과같이 버리되
9 세상 모든 나라 중에 흩어서 그들로 환난을 당하게 할 것이며 또 그들로 내가 쫓아 보낼 모든 곳에서 치욕을 당하게 하며 말거리가 되게 하며 조롱과 저주를 받게 할 것이며
10 내가 칼과 기근과 염병을 그들 중에 보내어 그들로 내가 그들과 그 열조에게 준 땅에서 멸절하기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시니라
이어서 하나님께서는 악한 무화과 즉, 말씀을 순종하지 않고 끝까지 자기 생각으로 예루살렘에 남은 자, 애굽 땅으로 도망간 자들을 버리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회개하지 않고 성전 그 자체만을 중시하여 자만에 빠진 자, 죄값을 치르지 않고 도망하는 자들을 버리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자를 멸절하겠다고 하십니다. 우리 또한 우리 신앙에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예언은 실제로 이루어졌을까요. 나쁜 무화과 즉,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예루살렘에 남아있던 자들은 바벨론 군대에 3년 동안 포위당하며 혹독한 기근 가운데 죽게됩니다. 시드기야 왕은 자신이 보는 앞에서 자녀들이 죽임을 당하고, 자신의 두 눈이 뽑혀 짐승같이 살아가는 비참한 말로를 맞이합니다. (왕하 25:1-7)
(렘52:31-34) 유다 왕 여호야긴이 사로잡혀간지 삼십 칠년 곧 바벨론 왕 에윌므로닥의 즉위 원년 십이월 이십 오일에 그가 유다 왕 여호야긴을 옥에서 내어놓아 그 머리를 들게 하고 그에게 선히 말하고 그의 위를 그와 함께 바벨론에 있는 왕들의 위보다 높이고 그 죄수의 의복을 바꾸게 하고 그 일평생에 항상 왕의 앞에서 먹게 하였으며 그의 쓸 것은 날마다 바벨론 왕에게서 받는 정수가 있어서 죽는 날까지 곧 종신토록 끊이지 아니하였더라
한편 유다 왕 여호야긴은 포로로 사로잡혀간지 37년만에 왕의 의복을 입고, 왕의 정수를 받으며 살게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유다 왕 여호야긴을 회복시키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소망을 품게 하셨습니다. (왕하25:27-30) 절망의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은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처럼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마지막까지 그대로 믿는 것입니다. 우리 동부교회 성도님들 또한 어떠한 상황이 와도 하나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여러분들이 되길 소망합니다.
온 가족 초청전도 집회를 맞이하여 성경에 나온 어려운 환경에서 예수님의 초청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예수님의 손을 붙잡은 한 여인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25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26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인간의 삶 가운데 많은 힘듦이 있지요. 경제적인 가난 때문에 힘들게 살아가기도 하고, 인간관계 속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분들도 계시지만, 마음과 정신까지 무너뜨리는 것은 몸의 병입니다. 몸의 병이 깊이 들었을 때 사람은 점점 희망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성경에 이 여인은 혈루증(만성자궁출혈)을 12년 동안 앓았다고 나와 있습니다. 당시에도 전염병이 많아서 유대인의 사회에서는 유출병을 앓으면 부정하다고 레위기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전염 때문에 유출병을 앓는 자는 공동체와 마을에서 떨어져서 살아야 했습니다. 본문을 보면 여인은 치료를 위해 노력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고칠 수 없어서 점점 병으로 시들어갔습니다.
그러던 가운데 여인은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27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다른 많은 사람들 또한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들었겠지만, 이 여인에게는 ‘정말 만나야겠다.’라는 결단을 내리게 하는 한 줄기 빛과도 같은 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여인은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가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습니다. 12년간의 만성유출병으로 부정하게 여겨져 온 여인이 공동체에 나타나게 된 것이 드러나면 사람들의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사람들 사이에 몰래 섞여서 온 것은 보통 용기가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 여인으로서는 예수님을 만나거나 대화할 방법이 없으니,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잡겠다고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댑니다. 당시 상황에서 이것 또한 죽을 수 있는 행동이었습니다. 부정한 사람이 고의로 남을 만지면 똑같은 병에 걸리게 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여겨 죽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여인은 목숨을 두 번 건 것이지요. 무리에 섞일 때 한 번, 예수님의 옷을 잡을 때에 또 한 번. 이 여인은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을 때 예수님을 붙잡아야겠다는 생각 외엔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참예수교회에 다니시는 많은 분들이 마음으로 예수님을 붙잡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붙잡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초청받으신 분들에게도 예수님을 붙잡겠다는 마음을 주님께서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 인생은 다 잘 사는 것 같아도 저마다 아픔이 있습니다. 좌절이 있습니다. 절망이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용기를 내어서 예수님께 향하고 예수님의 손을 붙잡기 위해서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29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여인이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을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혈루병이 나은 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본인이 깨달았다는 것은 즉각 나았다는 것이지요. 스스로 즉각 깨달을 정도로 몸이 나았습니다. 여러분들도 예수님을 붙잡으시고 이런 놀라운 축복을 받으시기를 원합니다.
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이 목숨을 걸고 내민 믿음의 손 때문에 구원을 얻었다고 말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평안히 가라고 하시고 건강의 축복을 해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만난 혈루증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이 여인은 결심을 하고 예수님 뒤에 가서 옷을 붙잡은 것밖에 없지만, 12년 동안 고통의 병 속에서 살다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건강한 몸으로, 구원받은 예수님의 딸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성도님들도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께 손을 내미는 작은 동작으로 여러분의 인생이 놀랍게 변하는, 인생 가운데 예수님의 축복이 임하는 귀한 오늘이 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제국주의 시대를 논할 때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나라가 있다. 바로 현재의 영국이다. 현재는 유럽 서쪽의 섬나라이지만 소위 대영제국이라 일컫던 황금시대가 있었다. 1607년, 북아메리카의 버지니아주 제임스 타운을 시작으로 전 세계 약소국을 대상으로 정복하고 식민지로 삼아갔다. 그래서 1815년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이하는데 이 기간이 무려 백년이나 지속되었다. 1920년에 이르러 대영제국은 지구상의 모든 식민지를 합하면 면적이 무려 3,550만 제곱미터가 되었다. 이는 대한민국의 355배 되는 면적이고 현재 러시아 땅보다 2배 이상 큰 면적이다. 그래서 가장 잘나가던 때에 세계 육지 면적의 4분의 1이 바로 영국의 것이었다. 그래서 소위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별명이 붙었던 것이다. 그런 대영제국도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많은 빚을 지는 바람에 국력이 쇠퇴해지고 미국에 그 패권을 넘겨주게 되었다. 1997년 홍콩을 중국에 반환하면서 대영제국주의의 잔재는 완전히 정리가 되었다.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지배하고 착취하려는 모습은 작게는 사회 곳곳에서 발견될 수 있는 ‘우리의 현실’이다. 인간관계 속에도 있고, 기업과 기업 사이에도 있고, 단체와 단체 사이에도 갑을 관계가 있다. 이런 일면을 보면 소위 양육강식 적자생존이라는 강자의 법칙이 지배하는 것이 이 세상의 원리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루시려는 나라는 그런 원리가 지배하는 나라도, 사회도, 개인도 아니다. 하나님이 이루시려는 나라는 이 땅에 속하지 않은 원리가 지배하는 나라, 절대 공의와 사랑을 품으신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그런 나라였다. 그것을 이루시기 위해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왕이 되게 하셨고 그를 말씀으로 지도하셨다.
(시 119:101-102) 『(101) 내가 주의 말씀을 지키려고 발을 금하여 모든 악한 길로 가지 아니하였사오며 (102) 주께서 나를 가르치셨으므로 내가 주의 규례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세움 받은 성도들은 오늘날 어떤 신앙의 길을 가고 있는가? 또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내가 어떤 길을 가고 있다고 고백할 수 있는가? 성도들이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이 이기게 해주시고, 형통한 길을 열어주시고, 땀 흘린 대가로 단 열매를 수확하게 하시기를 원한다. 그러나 육신의 눈으로 발견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영적인 눈을 뜨고 가려진 본질을 보고 있는가? 오늘은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이 이기게 해주셨다는 승리 기사를 통해 함께 생각하고 은혜를 나누는 시간을 가지고자 한다.
다윗이 왕이 되어 처음 하고자 한 일은 언약궤를 자신의 성으로 모셔 오는 일이었다. 그 과정에서 웃사가 죽는 불미스러운 일도 있었지만 그것은 곧 다윗의 겸손한 영성과 신앙을 발견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언약궤 앞에서 어린 아이처럼 낮아져 춤을 추는 다윗에게 하나님은 소위 ‘다윗 언약’이라고 하는 중요한 언약을 주신다. 다윗은 하나님을 위해서 집을 짓겠다고 했지만 오히려 하나님이 다윗에게 내가 너의 집을 지어주마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 주셨던 것이 바로 ‘다윗 언약’이었던 것이다. 그 다윗 언약은 단순히 육적인 면에서 다윗의 혈통에서 왕위를 계승할 것이라는 뜻이 아니었다. 그것은 영적인 면에서 그리스도께서 그 후손 가운데 오실 것이라는 축복의 언약이었다. 이처럼 하나님께 언약을 받은 다윗은 그 언약에 대한 믿음을 품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출정한다. 그리고 블레셋의 도시를 쳐서 항복을 받아낸다. 뿐만 아니라 그 외에 모압과 소바, 아람과 아말렉, 하맛과 에돔 족속까지 굴복시킨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명실공히 팔레스틴에서 주도권을 장악한 최강국으로 부상하게 된다. 그래서 다윗의 이러한 전과에 대해 성경은 6절과 14절에서 두 번씩이나 동일하게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이기게 하시니라” 또 다른 반복구가 있는데 “조공을 드리니라.”(2) “조공을 바치니라.”(6)이다. 이것은 다윗의 이스라엘이 대영제국처럼 다른 나라를 정복해서 착취하고 압제하는 제국주의의 길을 갔다는 뜻이 아니다. 다윗이 이룬 육적 승리를 통해 성도와 교회가 경험해야 할 영적 승리를 표상하고 있다. 다윗을 통해 성도가 신앙의 길을 걸을 때 하나님은 이런 복을 주신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또 그런 복을 받는 자의 태도는 이러해야 한다는 것을 교훈하고 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그 메시지는 어떤 것인가?
첫째, 약속을 믿으면 부끄러운 과거를 만회케 하신다.
(삼하 8:1) 『(1) 이 후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쳐서 항복 받고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메덱암마를 빼앗으니라』
‘메덱 암마’는 블레셋의 수도였던 가드와 그에 종속되었던 네 성읍, 곧 가사, 아스돗, 아스글론, 에그론을 통칭하는 표현이다. 대상 18:1에서는 그래서 메덱 암마를 ‘가드와 그 동네’라고 기록했다. 이 기록으로 보아 다윗은 블레셋을 완전히 정복했다. 비유하자면 과거에는 블레셋을 다운시켰는데 이제는 블레셋을 아예 K.O시켜 버린 것이다. 그 결과 블레셋이 점유하던 전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이런 승리가 값진 이유는 다윗이 블레셋 가드에서 경험한 뼈아픈 과거 때문이다.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해 도망자 생활할 때 그는 블레셋의 도시 가드 땅에서 아기스 왕을 만나게 된다. 그때 침을 흘리며 미친 척하면서 위기 상황을 넘겼던 치욕의 과거가 있었다. 그런데 다윗은 그 가드에 항복을 받아냈다. 쉽지 않은 결과이다. 왜냐하면 사람에게 과거의 상처는 현재 극복 못하는 핸디캡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윗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나갔을 때 그 치욕의 역사를 만회한 것이다.
이처럼 다윗이 블레셋의 도시들을 정복할 수 있었던 근원적 힘은 바로 그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붙들었기 때문이다.
(삼하 7:27-28) 『(27)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의 종에게 알게 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집을 세우리라 하신고로 주의 종이 이 기도로 구할 마음이 생겼나이다 (28) 주 여호와여 오직 주는 하나님이시며 말씀이 참되시니이다 주께서 이 좋은 것으로 종에게 허락하셨사오니』
이 약속의 말씀이 주어진 직후 다윗은 블레셋 사람들을 쳤다. 그래서 8장 1절에 ‘그 후에’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곧 다윗이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나가니까 블레셋의 도시들이 줄줄이 정복하게 되었고 그 결과 가드 땅에서의 부끄러운 과거를 씻어버리게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 신앙의 길을 가고 있는가? 성도님들 삶 속에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영적인 전쟁을 수행한 결과 나의 ‘메덱 암마’를 정복케 하시고 부끄러운 과거를 씻는 은혜를 주신다. 이런 복이 저와 성도들의 것이 되시기를 바란다.
둘째,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승리의 열매를 주신다.
(삼하 8:4) 『(4) 그 마병 일천칠백과 보병 이만을 사로잡고 병거 일백 승의 말만 남기고 그 외의 병거의 말은 다 발의 힘줄을 끊었더니』
다윗은 소바 왕 하닷에셀에게서 탈취한 말 가운데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발의 힘줄을 끊었다. 똑같은 사건을 기록한 다른 성경을 보자. 역대상 18:3-4을 보면 그때 노획한 병거와 군사와 말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기록하고 있다.
(대상 18:3-4) 『(3) 소바 왕 하닷에셀이 유브라데 강 가에서 자기 권세를 펴고자 하매 다윗이 저를 쳐서 하막까지 이르고 (4) 그 병거 일천 승과 기병 칠천과 보병 이만을 빼앗고 그 병거 일백 승의 말만 남기고 그 외의 병거의 말은 다 발의 힘줄을 끊었더니』
다윗은 병거 일천 승, 기병 칠천, 보병 이만을 빼앗았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발견된다. 다윗은 빼앗은 병거 일천 승 가운데 일백 승의 말, 즉 10%만 남기고는 다 발의 힘줄을 끊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었는가? 왜냐하면 모세오경 가운데 한 권인 신명기에 이러한 말씀을 주셨기 때문이다.
(신 17:16) 『왕 된 자는 말을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말을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말 것이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후에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이라 하셨음이며』
모세의 율법에 이스라엘의 왕이 된 자는 말을 많이 두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었다. 말을 많이 두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해야지 자기 육신의 능력을 신뢰하지 말라는 뜻이다. 다윗은 신명기의 이 말씀을 기억하고 그대로 실천하고자 말 발목의 힘줄을 끊었던 것이다. 이런 다윗의 행동은 과거 사울왕의 행동과 비교하면 그가 얼마나 말씀에 순종하고 있는지 뚜렷해진다. 사울 왕은 어떠했는가?
(삼상 15:18-19) 『[18] 또 왕을 길로 보내시며 이르시기를 가서 죄인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되 다 없어지기까지 치라 하셨거늘 [19]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의 악하게 여기시는 것을 행하였나이까』
이처럼 사울왕의 마음은 탈취하는 일에 모아져 있고 말씀을 순종하는 일은 안중에도 없었다. 반면 다윗은 말의 발목 힘줄을 끊는 행위로 순종의 모습을 보였기에 하나님은 ‘다윗 언약’에 충실하셨던 것이다.
구약 성경에서 다윗만큼 형통한 다른 한 사람이 있다. 여호수아 선지자이다. 그런데 형통만 같은 것이 아니라 형통의 이유도 똑같다. 그가 항상 승리한 비결이 어디에 있었는가?
(수 1: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수 11:15) 『여호와께서 그 종 모세에게 명하신 것을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명하였고 여호수아는 그대로 행하여 여호와께서 무릇 모세에게 명하신 것을 하나도 행치 아니한 것이 없었더라』
여호수아 역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의 명령을 받았고 그 명령대로 모든 것을 행했을 때 항상 승리하고 이길 수 있었다. 이런 사실에서 우리는 말씀에 대한 순종 여부가 항상 승리의 열매와 직결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2007년 3월 18일 서울국제마라톤 남자부 42.195㎞ 레이스에서 막판 1500여m를 남기고 대역전극을 펼치며 1위로 골인한 마라토너가 있다. 바로 이봉주 선수이다. 생애 35번째 풀코스를 완주이고 한국 역대 4위 기록이었다. 그런데 더 의미가 깊은 것은 그가 최근 3년간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해 ‘한물갔다’는 평가를 받던 터였고 38세의 나이는 마라톤 선수로는 환갑에 해당하던 때였다. 그런데 화려한 부활을 알리는 우승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이봉주 선수가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은 코치의 엄격한 지도를 순종했기 때문이다. 코치는 선수에게 시합이 가까워 오면 탄수화물을 피하고 고기만 먹인다. 한동안 고기만 먹이다가 시합 3,4일 전에 탄수화물을 같이 섭취시킨다. 그러면 몸에 축적되는 탄수화물의 양이 많아져서 레이스의 막판 스퍼트까지 끄떡 없이 달리게 된다고 한다. 이봉주 선수는 그 식사가 훈련보다 더 고통스럽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그런 고통을 인내하고 코치의 지도를 따랐기 때문에 우승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운동 선수가 코치의 엄격한 지도를 따라야 승리가 보장되듯이 신앙인은 인생의 코치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때 영적인 승리가 보장된다. 사울 왕처럼 세상의 것들을 취하려는 욕망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려는데 마음을 모으시는 성도가 되자. 거기에 축복의 열쇠가 있다.
(요일 5: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셋째, 감사하는 자에게 더 큰 은혜를 주신다.
(삼하 8:11-12) 『(11) 다윗 왕이 그것도 여호와께 드리되 저가 정복한 모든 나라에서 얻은 은금 (12) 곧 아람과 모압과 암몬 자손과 블레셋 사람과 아말렉에게서 얻은 것들과 소바 왕 르홉의 아들 하닷에셀에게서 노략한 것과 같이 드리니라』
다윗은 정복한 나라로부터 조공을 받았다. 그것은 금 은 놋과 같은 귀금속들이었다. 다윗은 그것을 자기 사욕을 채우고자 받았는가? 그렇지 않다. 사울 왕은 전쟁에서 승리하면 탈취물로 자기의 기념비를 세우고 자랑거리로 삼는데 활용했다. 그러나 다윗은 달랐다. 그 물질을 여호와께 봉헌했다. 그래서 이렇게 드려진 금과 은과 놋이 나중에 그의 아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는데 재원으로 소용되었던 것이다.
(대상 22:14-16) 『[14]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의 전을 위하여 금 십만 달란트와 은 일백만 달란트와 놋과 철을 그 중수를 셀 수 없을만큼 심히 많이 예비하였고 또 재목과 돌을 예비하였으나 너는 더할 것이며 [15] 또 공장이 네게 많이 있나니 곧 석수와 목수와 온갖 일에 익숙한 모든 사람이니라 [16] 금과 은과 놋과 철이 무수하니 너는 일어나 일하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실지로다』
다윗은 이처럼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을 하나님께 봉헌했다. 그는 자기의 승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봉헌은 바로 그러한 믿음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윗의 그런 믿음에 대해 큰 복으로 다윗에게 내려주셨다. 곧 그 복의 후광이 아들 솔로몬에게까지 계승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성도가 하나님께 헌신의 삶을 살았을 때 하나님이 주시는 흔들리지 않는 복이 있다. 바로 부모의 신앙이 자녀들에게 유산으로 물려지는 것이다. 이 땅에서 이보다 값진 유산은 없다. 부디 이러한 복이 저와 성도들의 것이 되시기를 바란다.
다윗 왕처럼 세상과의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시는 성도들이 되길 바란다. 언약을 믿고 나가서 과거의 부끄러움을 씻으시고, 말씀에 순종해서 승리의 열매를 수확하고, 감사함으로 복이 계승되게 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나라, 사랑과 공의의 원리가 지배하는 나라가 되는 기적의 목격자가 되시는 저와 성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한다.
22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행하였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23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홍해를 건넌 것은 애굽의 손에서 구원받은 의미도 있고 세례를 통해 구원 받았음을 예표합니다. 홍해를 건너고 감사의 노래를 한후(15:1~21)광야길을 3일 행하였으나 이스라엘 백성은 물을 얻지 못합니다. 광야에서 제일 필요한 것은 물인데 마라의 물이 써서 마시지를 못했습니다.
우리가 세례받고 교회에서 축하해 주고, 찬양하고 기뻐하다가 3일이 됐는데 좋게 변한 게 없어요. 오히려 더 나빠지는 길로 가는 거죠. 삶이 더 팍팍하고 힘들어지는 상황이 된 거지요.
24백성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출애굽 후 원망이라는 단어가 처음 나온 곳이 이곳입니다. 하나님과 모세를 향해서 백성이 원망한 것이 한 달 후도 아니고 3일! 말하자면 세례받고 3일 만에도 원망이 나올 수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도해 가신 결과입니다. 왜 이렇게 인도하셨을까요? 세상에서 살던 우리의 태도를 고치시고 치유하기 위해서 마라로 인도하십니다. 또다른 이유는 마라의 고통의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은 내면에 절망이 생길 때 심리학적으로 원망하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민14:2~4) 원망은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게 합니다. 인간의 악한 모습이 원망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아주 조용히 이스라엘 백성을 꽃길이 아닌, 쓴물이 있는 곳으로 인도해 가신것은 깊은 섭리와 뜻이 있습니다. 세례받고 거듭난 백성이 됐을 때 알아야 될 깊은 인생의 가치는 광야의 가치입니다. 광야의 시련을 통해서 내가 얼마나 악하고 얼마나 무가치한 존재고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세상에서는 내가 왕이었어요. 내가 제일 잘 나갔어요. 또 그렇게 사는 것이 인생의 멋인 줄 알았어요. 하나님은 그러한 우리를 낮추시고 겸손한 사람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의 귀한 그릇으로 쓰기 위해서 나를 비우게 하기 위해서 쓴물로 조용히 인도해 가십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이 누구며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가를 체험하기 위해서 마라로 인도하십니다.
25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쌔
마라로 인도하지 않았으면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을까요? 우리가 세례받고 구원받았으면서도 고통과 아픔이 없으면 기도할 줄 모릅니다. 아픔이 있는 성도들은 기도의 모습이 달라요. 눈물을 흘리고 간절해집니다. 우리를 기도하게 만든다는 것은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을 보면 직접 물을 주시지 아니하고 한 나무를 지시하셨어요.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은 뭔가를 지시할 거예요. 이 나무는 영적인 눈이 있어야 보여요. 우리가 영적인 눈을 뜨지 않으면 하나님이 지시하는 것이 안 보여요. 영적인 눈을 뜨게 하는 훈련을 위해 마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한 나무는 성경 전체적으로 보면 십자가입니다.(벧전 2:24)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이 지시하는 것은 십자가를 바라보라는 거예요. 우리가 고난 속에서 십자가를 바라볼 때 십자가가 드디어 나의 십자가가 됩니다. 그 십자가가 나의 십자가가 될 때 물은 단물로 변해질 줄 믿습니다. 십자가를 고난 속에서 발견하십시오. 마라로 간 것은 고통, 고난이 아니고 영적으로는 은혜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했다고 돼 있어요. 하나님이 지시한 곳을 바라보는지를 시험하시겠다는 거예요.
26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는지(들을청, 따를종)를 보는 것이 첫 번째 시험이에요. 두번째는 하나님 보시기에 이 땅에서 의를 행하라는 거에요. 세번째는 하나님의 계명에 귀를 기울이라는 것입니다. 네번째는 내 모든 규례를 지키는지 본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 말씀을 순종 하는지를 보시는 것이 첫 번째 시험이자 최종의 시험이기도 해요.
그렇게 순종하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을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 임이니라. (여호와 라파) 하나님이 신기해요. 물이 써서 원망했는데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라고 표현했어요. 하나님 나라의 질병은 바로 원망입니다. 원망!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하는 마음을 치유해 주시겠다는 말이 들어있는 거예요. 원망이 나올때에 치료받을 수 있는 비결이 하나님을 청종하는 것입니다. 우리교회가 여호와 라파의 교회가 되길 원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시험의 장소이자 치유하는 장소입니다.
27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 물샘 열 둘과 종려 칠십 주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그들이 치유가 되고 그들이 회복이 됐을 때 하나님의 보상은, 그들을 엘림에 이르게 합니다. 엘림에 이른 후 마라로 인도한 게 아니라 마라로 인도하시고 , 치유하신후 엘림으로 보내셨어요. 엘림에 먼저 갔으면 그들은 치유되지 않았을 거예요. 엘림에 이르니 거기 하나님께서 물샘 12와 종려 70주를 주셨어요. 광야에서 제일 또 필요한 게 물과 그늘이에요. 거기서 그들이 물 곁에 장막을 칩니다.
오늘 본문 짧은 구절 속에서 하나님의 깊은 뜻을 발견하길 바랍니다. 2024년 우리가 삶의 꽃길은 아니더라도 나의 이러한 마라같이 쓴 인생 속에 하나님의 시험을 깨닫고 다 통과해서 엘림의 보상이 열릴 수 있는 놀라운 축복의 자리가 되는 2024년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024년 대만 방문 기간 중 낙야 교회에 방문했을 때의 일. 지난 2017년에 수원교회 성도님들과 방문했었는데 그 때도 건축을 위해서 대지를 마련하고 모금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전히 건물이 세워지지는 않았고 모금 중에 있었다. 속으로 ‘7백 평 넘는 땅에 건축이란 시골교회의 능력으로 버거운 일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담임 목자인 백목자가 연합 교류 집회를 가질 때 교회 소개 시간 중 조감도 영상을 보여주며 말했다 “낙야교회는 교회를 건축하려고 합니다. 방문단 여러분도 헌금하세요. 한국 돈도 받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간접적으로 조심스럽게 헌금을 권고하는 것이 아니라 직설적이고 노골적인 헌금 요청에 폭소를 터뜨렸다. 이윽고 청주교회를 소개하는 차례가 되었다. “청주교회는 회당 수용이 93석입니다. 그런데 지난 주에는 108명이 출석했습니다. 회당이 비좁습니다. 그래서 새롭게 건축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모금해야 합니다. 대만 돈도 받습니다.” 우리는 다시 폭소를 터뜨렸다. 전혀 모르는 남이 헌금하라는 말을 하면 매우 무례하고 상식적이지 않다고 여겼을 텐데 주 안에서 한 몸, 한 형제 자매라는 의식 때문에 오히려 박장대소가 나왔다. 우리가 주 안에서 한 성령을 받은 가족이라는 의식이 발견되는 순간이었다.
인간관계에서 말하고 듣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 말 잘해서 생명을 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말 잘못해서 생명이 위경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 그런가 하면 들어야 할 말을 오해하는 경우도 있고 듣지 않아야 하는 말을 들어서 마음에 상처를 남기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말하는 사람의 의도대로 잘 듣는 것이 중요하고 또 잘 말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런데 이것이 쉽지 않다. 왜냐하면 듣고 말하는 일은 마음 속에 인격이 결부된 일이기 때문이다. 인격이란 것이 하루 아침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듣는 능력이나 말하는 능력이 한 순간에 변화하지 못한다. 오랜 세월동안 신앙 안에서 성숙한 인격은 남의 말을 듣되 오해하지 않고 듣고 상대의 선의대로 듣는다. 반면 인격이 성숙하지 못하면 좋은 뜻으로 한 말도 악의적으로 받아들인다. 성숙한 인격은 말을 건네되 상대가 오해하지 않도록 배려하는 화법을 구사한다. 반면 성숙하지 않은 인격은 거칠게 말해서 좋은 말도 오해하게 만들고 부정적 감정을 가지게 말한다. 그래서 잘 듣고 잘 말하기 위해서 신앙의 좋은 인격을 닦는 일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들으며 살고 있는가? 성경의 가르침대로 잘 듣고 잘 말해서 우리 속사람이 갖춘 인격을 나타내고 있는가? 오늘은 다윗과 관련된 한 기사 속에 등장하는 세 인물을 통해 함께 생각하고 은혜를 나누는 시간을 가지고자 한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다윗이 동굴에서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기회에도 그의 겉 옷자락만 베고 살려준 기사를 살펴보았다. 사울왕은 눈물을 흘리며 다윗의 의로움을 인정하고 자신의 잘못을 시인했다. 그러나 사실 완전히 회개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다윗이 사울 왕과 함께 왕궁으로 돌아가지는 않았고 계속 방랑하는 생활을 계속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울왕이 완전히 변화한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사울과 헤어지고 다시 길을 떠난 다윗 일행은 어느 날 갈멜이란 곳에 머물게 되었다. 갈멜은 아시다시피 열왕국 시대에 이르러 엘리야 선지자가 우상의 선지자들과 상대하게 될 바로 그 장소였다. 그런데 그곳에 나발이라는 이름의 목축인이 있었다. 그는 수천마리의 양과 염소를 치는 부자였다. 그 시대는 치안이 미흡한 지라 대규모 목축업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 어려움이란 도적들이 나타나 가축들을 약탈하고 심지어 목동들까지 죽이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런 가운데 다윗과 그의 수하에 육백 명이 나발의 양떼 곁에 머물러 주는 것은 그의 재산을 보호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당시 목축업에 종사하는 자들에게는 양털을 깎는 시기는 농부에게 추수하는 시기와 같았다. 그래서 이 시기에 목자는 이웃과 함께 음식을 나누며 수확의 기쁨을 누렸다. 바로 양털 깍는 그 잔치의 시기에 일이다. 다윗은 나발에게 소년들을 보내어 축복하면서 잔치의 음식을 좀 나누어 줄 것을 요청한다. 그런데 나발은 이를 거절하고 오히려 다윗을 향한 심한 모욕과 경멸의 말을 전한다. 이에 다윗은 분노하게 되고 4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나발과 그 가족들을 몰살시키고자 출정한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나발의 아내 ‘아비가엘’이란 여인이 다윗의 소년들에게 음식을 건네고 다윗 앞에 엎드려 자비를 구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의 지혜로운 말로 다윗은 칼을 거두고 되돌아갔다는 이야기이다.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세 인물을 주목해 볼 수 있다. 바로 나발과 아비가일과 다윗이다. 이 세 인물의 말하고 듣고 칼을 거두는 모습을 통해 우리는 소중한 신앙의 교훈을 받게 된다. 그러면 그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인가?
첫째, 나발과 같은 우매한 말을 삼가라.
(삼상 25:6) 『이같이 그 부하게 사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평강하라 네 집도 평강하라 네 소유의 모든 것도 평강하라』
다윗은 소년 열 명을 나발에게 보내면서 잔치의 음식을 좀 나누어 줄 것을 요구했는데 이것은 이스라엘 풍습으로나, 율법의 가르침으로나 매우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풍습이었다. 6절에서처럼 다윗은 ‘너는 네 집도 네 소유의 모든 것도 평강하라.’는 축복의 말을 건넨다. 다윗이 매우 정중하고 예의를 갖추어 요청했음을 알 수 있다. 또 8절에 ‘네 아들 다윗에게 주기를 원하노라’고 했다. 다윗이 나발에게 아들 뻘이란 뜻이 아니라 그만큼 자기를 낮춰 예의를 갖춘 표현이다. 이렇듯 정중한 인사와 겸손한 태도로 자선과 호의를 구했건만 나발의 태도는 어떠했는가?
(삼상 25:10-11) 『[10] 나발이 다윗의 사환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뇨 근일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11] 내가 어찌 내 떡과 물과 내 양털 깎는 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가져 어디로서인지 알지도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 한지라』
율법에는 나그네를 대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기록되어 있다. 이를 생각한다면 다윗의 요청을 들어주는 것이 마땅했다. 더욱이 곁에서 경비원처럼 양떼를 지켜준 노고를 생각한다면 감사한 마음으로 들어주는 것이 마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발은 다윗에게 면박을 주는 말과 더불어 음식을 건네주기를 거절한다. 오해하지 않아야 할 것은 다윗이 무슨 조직 폭력의 보스같이 위협하고 강압으로 요구한 것이 아니다. 정부가 대기업을 압박하면서 정치헌금 강요하듯이 요구한 것이 아니다. 지극히 상식적인 호의를 요구했던 것이다. 그런데 나발의 이러한 발언은 웃는 낮에 침뱉는 행동이었던 것이다.
나발은 ‘다윗이 누구냐?’라고 말했지만 사실 다윗을 모를 리 없었다. 골리앗을 물리친 용사로 이방인들에게까지 명성이 높았고 왕의 사위가 된 자요, 사울 밑에서 천부장직을 수행한 인물이니 잘 아는 인물이다. 다윗이 분개한 이유는 음식을 주지 않아서가 아니다. 나발이 ‘주인에게 반역하는 못된 종’이라고 모욕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나발은 정치적으로 사울을 추종하는 사람 중에 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옳고 그름을 떠나 사울의 편에서 다윗을 경멸했던 것이다. 그러나 진실을 말하자면 사울을 반역해서 떠난 것이 아니라 사울이 자신을 무고하게 죽이려고 하니까 생존을 위해서 왕의 곁을 떠난 것이었다. 사실 나발은 사실을 왜곡하는 거짓의 입술을 놀렸던 것이다. 사람은 언제 가장 분노하는지 아는가? 자기의 진실이 거짓으로 오해받을 때가 가장 분노하는 순간 중 하나이다. 결국 나발의 이 망언은 다윗의 노를 격동시켰고 목숨이 위태롭게 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잠 12:18) 『혹은 칼로 찌름 같이 함부로 말하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 같으니라』
오늘날 교회에서 일어나는 불미스러운 일의 대부분은 잘못된 언변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눅 6:45)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고 했다. ‘말’이라는 단어는 ‘마음의 알갱이’라는 뜻이다. 즉 말은 마음에 쌓인 것을 밖으로 드러나는 도구라는 것이다. 마음에 좋은 감정, 좋은 생각, 좋은 뜻을 채우면 좋은 말이 나오고, 나쁜 감정, 나쁜 생각, 나쁜 뜻이 채워지면 나쁜 말이 나온다. 성숙한 인격이란 바로 이것을 잘 통제해서 때로는 삼가고 때로는 말하는 것을 잘 분별하는 사람이다.
부디 나발과 같은 우매한 입술에서 벗어나는 성도님들이 되자.
(잠 13:3) 『입을 지키는 자는 그 생명을 보전하나 입술을 크게 벌리는 자에게는 멸망이 오느니라』
둘째, 아비가일과 같은 지혜로운 입술의 사람이 되라.
다윗은 나발의 모욕에 참지 못하고 그와 그 일가를 죽이겠다고 칼을 빼어들었다. 그런데 이렇게 격노한 다윗의 마음을 누그러뜨린 한 여인이 있었는데 바로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이었다. 이 여인의 언행은 도대체 어떠했기에 다윗의 분노를 잠재울 수 있었는가?그녀는 상황의 심각성을 감지하고 급하게 종들을 시켜 양식을 준비하게 했다. 그리고 모욕을 말을 건네받은 열 명의 소년들에게 양식을 건네 주었다. 그리고 그 후에 이어진 그녀의 일변은 무엇이었는가?(삼상 25:28-31) 에 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아비가일이 이야기한 내용의 핵심은 이것이다. “다윗 당신은 지금껏 악을 행한 적이 없습니다. 당신의 생명은 하나님이 생명 싸개에 싸서 보호하십니다. 당신은 장차 이스라엘의 임금이 될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선한 싸움을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오늘 무죄한 피를 흘리면 장래에 왕이 되었을 경우 괴로워하고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라는 뜻이다. 아비가일의 말을 통해 발견되는 그녀의 지혜는 이런 것이다. 그녀는 목숨이 경각에 달린 현재의 상황을 잘 알았다. 또 다윗의 의로움, 정직함에 대한 분별력이 있었다. 또 하나님이 그의 생명을 섬세히 보호하고 계신다는 영적인 혜안도 있었다. 게다가 다윗의 미래를 예측하는 안목도 있었다. 그리고 만약 다윗이 칼로 살육하는 실수를 저지르면 그 일이 미래에 어떤 악영향을 가져올지에 대해서 내다볼 줄 알았다. 아비가일은 이런 모든 미래사를 꿰뚫어 보고 다윗에게 그것들을 말했던 것이다.
(잠 25:11)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니라』
우리는 인간관계 속에서 때로 대화의 핵심을 벗어나서 헤매는 경우가 있다. 상대의 문제점과 본질을 헤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니 상대의 마음을 알 수 없고 기울여도 깨닫는 지혜가 없으니 상황 전달이 안된다. 그래서 대화는 겉돌고 핵심을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면 오해하게 되고 마음을 터놓을 수 없게 된다. 대화에는 이해하려는 마음, 배려하는 마음이 기초가 되어야 한다. 만약 그것이 없으면 감정에 이끌려 말하게 되고 무례하게 말하게 되고 상대에게 상처를 주게 된다. 아비가일을 보라. 다윗의 마음을 정확하게 헤아리고 상황도 종합적으로 파악하고 미래사도 읽어낼 줄 아니까 그런 지혜로운 말이 나오고 그 말로 인해 치켜올린 다윗의 칼이 점점 내려졌다. 아비가일의 지혜로운 혀가 다윗의 뻣뻣한 감정을 꺾었던 것이다.
(잠 25:15) 『오래 참으면 관원이 그 말을 용납하나니 부드러운 혀는 뼈를 꺾느니라』
오늘날 우리도 사랑과 배려가 녹아있는 말 한마디가 사람의 생명까지 살릴 수 있음을 알아야겠다. 그래서 생각하고 말하고, 배려해서 말하고, 부드럽게 말하고, 진실을 말하는 것을 연습하시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란다.
셋째, 다윗과 같은 열린 귀를 가진 사람이 되라.
다윗이 나발에 대해 분개한 모습은 사울을 대할 때와는 대조적이다. 다윗은 사울 왕에게 직접 보복하지 않았다. 하나님께 심판을 맡겼다. 그런데 오늘은 나발의 모욕을 참지 못하고 자제력을 잃었다. 그래서 즉시 칼을 차고 벌떡 일어선다. 만약 다윗이 사울 왕과의 관계에서 잘 인내해 왔는데 나발이라는 인물을 죽인다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 수 있는 순간이다. 다윗을 보건대 인간은 이처럼 연약한 존재이다. 만약 다윗이 분노의 감정에만 사로잡혀서 아비가일의 말에 “하찮은 일개 여인이 누구 앞에서 감히 입을 놀리느냐?”고 듣기를 거절했다면 나발과 그 일가는 몰살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에게는 타인의 말을 들을 줄 아는 귀가 있었다.
다윗은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있음을 알았다. 그런데 아비가일이 그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 싸움이 의로움의 기초가 아니라 죄악의 기초 위에 세워지면 그 나라가 길지 못함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아비가일이 그것을 말한다. 다윗은 칼과 피로 세워지지 않고 하나님의 공의와 뜻으로 나라를 세워야할 사명이 있었다. 그래서 온 백성이 고개를 끄덕이고 기뻐하고 환영하는 가운데 등극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런데 아비가일이 그것을 말한다. 우리는 여기서 아비가일의 지혜로운 발언에 호응하고 받아들일 줄 아는 다윗의 인격을 발견한다. 아무리 분노의 감정이 일어나도 이치에 맞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분노를 누그러 뜨리고 자기 마음을 다스릴 줄 알았다. 마음을 추스린 다윗이 이렇게 말한다.
(삼상 25:32-33) 『[32] 다윗이 아비가일에게 이르되 오늘날 너를 보내어 나를 영접케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33] 또 네 지혜를 칭찬할지며 또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오늘날 내가 피를 흘릴 것과 친히 보수하는 것을 네가 막았느니라』
다윗은 이 여인을 통해 위기를 모면하게 해준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했다. 이렇게 잘 말하는 지혜로운 여인 아비가일도 있었지만 그 말에 담긴 진실과 혜안을 분별하는 다윗의 귀가 있었기에 그는 분노의 감정으로 일가를 몰살시키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게 된다.
(잠 29:11) 『어리석은 자는 그 노를 다 드러내어도 지혜로운 자는 그 노를 억제하느니라』
강경화 장관 이야기. 문재인 대통령 시절에 외교부 장관을 역임한 퍼스트 레이디. 김대중 대통령 집권기에도 3년 간 그분의 곁에서 보좌한 경력도 있었다. 그녀는 코비드 19 팬데믹 상황에서 한국의 방역체계를 외국에 홍보해서 국위선양하는데 매우 큰 역할을 했다. 앵커들의 까다로운 질문에도 투명하고 정직하고 정확한 발언으로 한국의 위상을 높인 바로 유명하다. 독일의 앵커가 ‘한국은 봉쇄령으로 인해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아니냐?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것이 아니냐?는 집요하고 까다로운 질문도 모두 잘 설명했다. 인텨뷰 내용에는 구구절절히 그녀의 겸손함이 한국 사람의 겸손함을 대변했다. 그래서 그분의 활약으로 한국의 명예가 매우 드높아지는 계기가 되었다. 현재 국제 사회에서 한국의 높은 위상은 단지 한류의 가수나 탤런트 때문 뿐만 아니라 이런 외교부 장관의 노고와 활약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다른 성도와의 관계에서 혹은 이 세상의 불신자와의 인간관계에서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들으며 살고 있는가? 나발과 같이 우매한 말로 문제를 일으키고 상처를 주는 것이 아니라 아비가일과 같이 지혜의 말로 죄의 싹은 잘라내고 의의 열매가 맺히게 만드는 길을 가시기 바란다. 다윗처럼 타인의 입술을 통해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자가 되자. 이런 아름다운 인격, 이런 향기로운 입술을 가지는 참교회의 성도들이 다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