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그:] 청주교회

  • [교회 행사] 아동부 포인트 행사

    [교회 행사] 아동부 포인트 행사

    한 학기 동안 아이들의 웃음과 노력이 차곡차곡 쌓여, 아동부에 아주 특별한 하루가 찾아왔습니다.

    바로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동부 포인트 행사입니다.

    이 날은 아이들이 그동안 열심히 참여하며 모은 포인트를 직접 사용해 보고, 기쁨을 마음껏 누리는 축제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아동부들이 모은 포인트는 성경 통독, 예배 출석, 바른 예배 태도, 말씀 암송 등 아이들의 일상적인 신앙 활동 속에서 하나씩 쌓여 왔습니다. 매주 말씀을 읽고, 예배 자리를 지키며, 하나님 앞에 집중하려 애썼던 작은 실천들이 모여 포인트가 되었고, 그 결과가 이날 환한 미소로 돌아왔습니다. 아이들은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면 이런 기쁜이 있구나”를 몸으로 느끼며 성취감을 경험했습니다.

      

    이번 포인트 행사에서는 특히 다양한 음식이 준비되어 분위기를 더욱 즐겁게 만들었습니다. 테이블 위에 놓인 먹거리를 바라보며 어떤 것을 고를지 고민하는 아이들의 눈빛은 설렘으로 가득했고, 계산대 앞에서는 스스로 모은 포인트를 하나하나 확인하며 뿌듯해하는 모습이 이어졌습니다. 친구와 함께 나누어 먹으며 웃는 모습, 서로의 선택을 응원해 주는 장면들은 행사장을 따뜻한 에너지로 채웠습니다.

    무엇보다 이 시간이 더 의미 있었던 이유는, 아이들이 포인트의 숫자보다 그 과정의 즐거움을 더 소중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말씀 외우는 게 재미있었어요”, “예배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했어요” 라는 말 속에는 한 학기 동안 자라난 아이들의 믿음과 자신감이 담겨 있었습니다.

    아동부 포인트 행사는 아이들에게 즐거운 추억을 선물함과 동시에, 신앙 생활이 기쁨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려주는 시간이었습니다. 앞으로도 아이들이 웃음 속에서 믿음을 키워 갈 수 있도록 계속해서 함께 응원해 주세요. 한 학기 동안 수고한 모든 아이들과 이를 함께 도와주신 교사, 부모님 그리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글작성 : 박은우 형제

  • [복음 메세지]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눅 12:32)

    [복음 메세지]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눅 12:32)

    [말씀 제목]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눅 12:32)

    [설교자] 김세한 목자

    [설교일] 2025.11.22

    분당교회 즉 전 성남 기도소에 첫 부임했을 때의 일이다. 당시 경제적인 형편이 넉넉지 않으니 인테리어 작업을 집사람과 직접했다. 전기톱을 빌려서 계단 하나 높이만한 단을 직접 제단했고 그 위에 붉은 색 융으로 덮었다. 벽면 페인트 칠을 하고 자모 예배실 창문 썬팅 작업도 했다. 그렇게 인테리어 작업을 마친 후 첫 안식일예배를 드려야 하는데 고민이 되었다. 왜냐하면 안식일 오전 예배에 참석할 사람이 몇 명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할머니 한분, 그리고 아기엄마 둘이었다. 게다가 정자동 할머니가 혼자 버스를 타고 40분이나 걸려서 하차한 후 교회까지 걸어오는 것은 불가능했다. 갓난 아기를 막 출산한 두 자매도 아기를 안고 버스를 타고 교회까지 오는 것이 불가능했다. 모든 형제들은 모두 직장에 매여 있었다. 그러니 참석자가 없을 것이 불보듯 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전 예배를 드리기로 결정했다. 금요일 오후까지 예배 준비를 모두 마쳤고 안식일 오전이 밝았다. 그렇게 우리 내외, 할머니, 두 자매와 두 아기 그렇게 7명으로 전세 얻은 회당에서 안식일 오전 첫 예배가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1년 뒤 예배 인원은 15명이 되었고 수세자도 다섯 명이나 되었다. 수세자는 박지영 문지혜 자매와 백소영 어린이 백하영 아기 최종민 아기 이렇게 다섯 사람이었다.

    그 과거를 회상하면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숫자에 관심이 많고 연연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현재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지금보다 나은 미래의 열매를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현재 눈에 보이는 것에 굴복하고 사는가? 아니면 믿음의 눈으로 미래를 보고 있는가? 무엇이 그리스도의 마음에 합당한 눈일까? 오늘은 제자들에게 주셨던 예수님의 말씀 중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라는 이 말씀의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고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우리는 어떤 가치를 평가할 때 많은 사람들이 따르는 의견을 수용하고 소수의 의견은 버린다. 이렇게 다수의 의견에 의해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을 다수결의 원칙이라고 한다. 당연히 민주주의 사회에 태어나 그것에 익숙한 우리는 그것에 매우 친숙하다. 그런데 이 성향은 종교를 선택하는 일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수의 사람이 다니는 교회, 다수의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사상을 따르려고 한다. 그러나 종교를 선택하고 진리를 분별하는 일에는 과연 그것이 합당한 기준인가? 그렇지 않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다수결의 맹점이 발견된다. 20세기까지 지구상의 절반의 나라들은 사회주의 사상에 현혹되어 공산주의 국가체제를 선택했다. 그러나 소련과 동유럽 국가의 붕괴와 함께 그 사상은 환상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이렇게 다수의 사람들이 좇았지만 그것은 허상이고 합당치 않은 것이라는 점이 발견되는 경우가 있다.

    또 중세 역사 속에 마녀사냥이 있었다. 유럽의 종교전쟁과 30년 전쟁, 그리고 페스트에 의한 팬데믹 기간을 경험하면서 사람들은 그 원인을 생각했다. 도대체 이 많은 재난과 재앙의 원인이 무엇일까? 그리고 사람들은 그 원인이 마법사, 마녀같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재난과 재앙이 임했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생각할 수 없는 미신적 결론에 도달한 결과는 암울했다. 죄없는 양민을 마법사나 마녀로 몰려 화형에 처했다. 소위 이것이 마녀사냥이다. 이 마녀사냥은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와 기타 유럽 전역으로 퍼졌고 많은 사람이 죽었다. 우매한 다수의 편견이 만들어낸 범죄의 역사였다.

    그런가하면 과학의 영역에도 다수결의 폐단이 있었다. 르네상스 문예부흥의 시대에 천체를 연구하는 과학자가 있었다. 그는 갈릴레오 갈릴레이였다. 망원경으로 열심히 천체를 관찰하던 그는 태양과 천체가 지구를 중심으로 회전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회전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전자를 천동설, 후자를 지동설이라고 한다. 지금은 지동설이 당연한 과학적 사실이지만 그 무렵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런데 갈릴레이는 지동설 때문에 종교 재판에 회부된다. 지동설을 주장하고 죽을 것이냐 철회하고 살 것이냐의 기로에서 그는 지동설을 철회하고 목숨은 구했다. 그러나 그는 법정에서 물러나면서 혼잣말을 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현대에 와서는 천동설을 믿는 바보는 아무도 없다. 이처럼 과학적 진리의 분별에도 우매한 다수의 판단이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인류 역사 속에 오히려 다수가 미신에 빠져 범죄하고 다수가 우매한 결론에 도달한 사례를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인류의 역사뿐만 아니라 성경의 역사를 살펴보아도 별다르지 않다. 노아 시대에 하나님은 죄악으로 가득찬 세상을 보시며 한탄하셨다. 그래서 부패한 인류를 물로 멸망시키고자 하셨다. 이에 대해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벧전 3: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겨우 여덟 명이라’ 대단히 적은 수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노아 홍수 시대에 절대 다수의 인류는 멸망하고 소수만 구원을 받은 성경의 역사가 있다.

    또 분열왕국 시대 아합 왕의 통치기에 이르러 유사한 사례를 발견한다. 당시 왕과 모든 백성들은 여호와만 섬기는 신앙을 떠나 다른 이방 신도 섬기는 우상숭배에 빠진다. 왕국이 죄악으로 멸망해 가는 그 때에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는 신앙 회복을 위해 갈멜산에서 다수의 거짓 선지자들과 대결한다.

    (왕상 18:22) 『엘리야가 백성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오십 인이로다』

    사백오십 인과 한 사람, 절대 다수와 절대소수가 대조되고 있다. 엘리야 선지자는 바울 선지자 사백오십에 아스다롯 숭배자 사백인을 합해 총 팔백 오십 인과 대결한다. 그 대결에서 승리하고 우상 숭배한 선지자들은 모두 죽임을 당한다.

    이처럼 세상의 인류 역사 속에서도 또 성경의 역사 속에서도 우매한 다수가 얼마나 악한 열매를 맺게 되는지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오히려 다수가 아닌 소수의 분별과 선택이 진리인 경우를 본다. 그렇다고 소수이기 때문에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가?그렇지 않다. 다수가 진리일 수도 거짓일 수도 있듯이 소수도 진리일 수도 있고 거짓일 수도 있다. 초점은 수적인 규모가 진리와 거짓의 기준이 될 수 없다는 점이다.

    진리의 기준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분명한 것은 진리란 시대를 초월해서 변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변하지 않으시듯이 진리를 시대를 초월해서 변하지 않아야 한다. 따라서 진리의 기준도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으로부터 기원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사 8:20)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은 구원과 멸망의 열쇠를 가지고 계신 분이다. 따라서 거짓과 진리의 기준도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다.

    종종 복음을 전할 때 이런 고민에 빠지는 사람들이 있다. “당신들이 전하는 세례에 대해서, 성령에 대해서, 안식일에 대해서 모두 성경과 일치하는 진리인 것은 알겠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 세상에 그렇게 많은 기독교회와 교인들이 다 지옥에 간다는 말입니까?” 이 의문에는 두 개의 생각이 충돌하고 있다.

    한편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라는 것을 안다. 반면 이미 익숙한 다수결의 원리가 기준이라는 생각도 있다. 그래서 이 두 가지가 마음속에서 서로 충돌할 때 이런 의문을 제기한다. 저는 장로교회에서 본교회로 개종하면서 이런 질문을 했었다. 이런 고민의 상황에 처한다면 어디서 해답을 찾을 수 있을까? 우리는 바울 사도의 상황에서 찾을 수 있다. 바울은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인물이다. 그에게도 마음 속에 그러한 고민이 있었다. 그리고 그 고민 가운데 그가 내린 결론은 이것이다.

    (롬 9:27)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로마서에서 바울은 한 가지 난제가 있었다. 그 난제로 고민했다. 그 고민이란 이스라엘 백성들은 택함받은 백성인데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왜 그들은 그분을 거절했는가였다. 하나님은 분명히 그들을 구원하시려고 선민으로 택하셨는데 메시야를 거절했으니 그들에게는 구원이 없는 것이 명확하다. 그래서 바울은 마음 속에 이런 의문이 생겼다. “그러면 유대인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은 헛된 것인가? 모두 거짓말인가?” 바울의 결론은 신실하신 하나님이 그럴 리 없다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남은 자에서 답을 찾아냈다.

    (사 10:20-21) 『[20]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 자기를 친 자를 의뢰치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 여호와를 진실히 의뢰하리니 [21]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남은 자란 바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지 않고 가나안 땅에 남아있던 자들, 또는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다가 본토로 돌아온 자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소수의 사람들이었다. 바울 사도는 이사야서에 기록된 ‘남은 자’를 이렇게 해석하고 있다. 마치 구약 시대에 그 남은 자가 있었듯이 사도시대에도 대부분의 유대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했지만 소수의 유대인들이 받아들이고 믿었다. 그 소수의 유대인들이 바로 사도시대의 ‘남은 자’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해석은 오늘날에도 역시 유효하다. 엘리야 선지자 시대의 남은 자처럼, 바울 사도 시대의 남은 자처럼, 오늘날 하나님의 약속을 떠나지 않고 남아 있는 자들, 복음을 떠나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는 자들이 바로 이 시대의 남은 자인 것이다. 그래서 사도시대의 세례, 사도시대의 성령, 사도시대의 안식일이라는 진리를 붙들고 있는 우리가 오늘 이 시대의 남은 자인 것이다.

    오늘날 우리 성도님들은 바로 내가 이 시대에 남은 자라는 의식이 있는가? 육신의 눈으로 볼 때 참예수교회는 척박한 가나안 땅처럼 보인다. 소수이고 결핍되고 풍요롭지 않다. 그러나 살아계신 성령이 계시고, 진리의 말씀이 있고, 신도들의 순수한 삶의 모습이 있다. 이것이 우리의 소유요 재산이다. 그 소유와 재산의 가치를 깨닫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자.

    엘리야 선지자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의 대결에서 승리했다.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제물을 살랐을 뿐 아니라 칼로 그 우상숭배의 선지자들을 다 죽였다. 그런데도 엘리야는 로뎀나무 아래서 하나님께 죽기를 구했다.

    (왕상 19:4)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 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엘리야 선지자의 이런 비관과 절망의 원인이 무엇이었는가?

    (왕상 19:14)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엘리야의 눈에는 갈멜산의 승리 뒤에 세상에 변화된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아합왕이 재를 뒤집어 쓰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지도 않았다. 백성들이 우상을 다 불태우고 하나님께 돌아온 것도 아니다. 오히려 왕후 이세벨이 죽이겠다고 협박까지 한다. 엘리야는 이런 상황을 놓고 크게 실망했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 나만 남았으니 죽여달라고 했다. 극도의 비관과 절망을 토로한 것이다. 그 때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했다.

    (왕상 19:18)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하나님은 엘리야의 눈에 발견되지 않는 칠천인의 존재를 말씀하셨다. 구약의 엘리야 선지자 시대의 이 사건에 대해서 바울 사도는 로마서를 기록할 때 이렇게 인용한다.

    (롬 11:3-5) 『[3] 주여 저희가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4]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5]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바울사도는 엘리야 시대에 겉으로는 엘리야 선지자 하나만 남은 것으로 보였지만 하나님이 칠천을 남기신 것처럼 오늘날에도 그 수가 많건 적건 남은 자가 있을 것이라고 한다. 만약 바울 사도가 구약 역사에 대한 인식과 해석이 그렇다면 오늘날 참예수교회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해석도 그러해야 한다는 것이다.

    육적인 이스라엘은 세계 인구의 0.25%인 천 이백 만 밖에 안된다. 그러나 역대 노벨상 수상자의 45%가 바로 그들이다. 미국 백대 부호 중에 20%가 유대인이다. 세계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속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며 좌지우지하는 민족이 바로 이 소수의 유대민족이다.

    (신 7:7)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육적인 이스라엘도 이러하나 영적인 이스라엘인 참예수교회도 육적인 눈으로 볼 때 수적으로 얼마 되지 않는다. 지구상의 70억 인구 중에서 60여만 명은 사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비율이다. 절대 소수이다. 그러나 우리가 바로 영적인 이스라엘이요, 인류사의 끝에 있는 남은 자들이다.

    (눅 12:32)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하나님이 신약 시대에 영적 이스라엘을 향해 말씀하신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진리는 소수일 수 있다. 그러나 진리는 없어지거나 죽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가 남은 자로서 믿음을 가지고 있는 한 살아서 역사하실 것이다. 그 미래를 이루기 위해서 성도님들은 말세의 남은 자로 선택되었다. 엘리야 시대에 남은 자처럼, 사도 시대에 남은 자처럼, 하나님은 말세의 남은 자인 우리들을 통해 하나님이 뜻을 이루실 것이다. 그 믿음으로 자기 정체성을 세우시고 복음 전파의 사명을 다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한다.

    https://youtu.be/WxgvNVHMhKU?si=a0TpuieHnMB_2G-W

    글작성 : 김세한 목자

  • [교회 행사] 여름 세례식 – 새로운 믿음의 발걸음을 내딛다

    [교회 행사] 여름 세례식 – 새로운 믿음의 발걸음을 내딛다

     

    여름 세례식 – 새로운 믿음의 발걸음을 내딛다

     

     뜨거운 여름의 한가운데, 우리 청주 교회는 참으로 기쁜 소식을 함께 나누게 되었습니다. 바로 김우람(부), 조연교(모), 김재윤(첫째 아들), 김연지(둘째 딸) 가족이 같은 날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한 날에 이루어진 특별한 예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오랫동안 예비하신 은혜의 열매라 할 수 있습니다.

        

    세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세례를 통해 죄사함을 받았음을 확증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성례입니다. 이날 한 가족이 함께 세례를 받는 모습은,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우리 눈앞에 생생히 보여주는 장면이었습니다. 오랜 시간 기도하며 전도해 온 성도들의 눈시울과 가슴 속이 뜨거워진 것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이 가족은 결코 하루아침에 교회의 문을 두드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누군가의 인내 어린 기도와 정성, 지속적인 사랑의 손길이 있었기에 오늘의 결실을 맺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화려한 말이나 일시적인 감정이 아니었습니다. 오랜 시간에 걸친 교회의 섬김, 성도들의 따뜻한 교제,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결국 그 은혜가 이 가족을 주님의 품으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세례식 후에는 각 신도회별로 함께 교제를 나누는 시간이 이어졌습니다. 세례를 받은 가족을 축복하며, 신앙의 길에 함께 서겠다는 격려와 환영의 인사가 교회 안에 넘쳐났습니다. 함께 준비한 음식과 따뜻한 나눔 속에서, 교회가 단지 예배만 드리는 곳이 아니라 서로의 삶을 지지해 주는 공동체임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 여름 세례식은 우리 모두에게 믿음의 초심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한때 우리도 주님 앞에서 세례를 받고 새로운 길을 걷기 시작했음을 기억하고 이제 막 그 길을 걷기 시작한 새 가족을 위해 기도하며, 그들의 신앙 여정에 든든한 동행자가 되기를 다짐합니다.

     

     이 가족의 세례는 교회 전체의 기쁨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 확장의 소중한 사건입니다. 앞으로도 우리의 삶과 기도가 누군가의 영혼을 주님께로 이끌 수 있기를 소망하며, 이 여름의 은혜로운 순간을 마음에 깊이 새겨봅니다.

     

    글작성: 박은우 형제 

  • [신앙의 향기] 5주차 특별식 요리사는~?

    [신앙의 향기] 5주차 특별식 요리사는~?

    지난해 2024년부터 참예수교회 청주교회에서는 5주차 마다 특별식으로 저녁식사를 하고 있습니다. 

    사랑과 정성이 담긴 (어쩌면 땀방울 한스푼도 들어간) 맛있는 특별식을 만드는 요리사는 누구일까요??

    11월 5주차: 김밥 진짜 천국

     

     

    3월 5주차: 아빠손 떡볶이 튀김

     

    8월 5주차: 일본 여행? 메밀국수 오꼬노미야끼

     

    무슨 일에든 발 벗고 섬겨주시는 아빠들 여호수아 신도회의 솜씨랍니다~ 

    5주차 특별식만 손꼽아 기다리는 성도가 있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소문난 맛집~

    하나님께서 흠향하시기에 참으로 향기로운 신앙의 향기가 아닐까요?

     

    글작성: 김예영 자매 

  • [성도 간증] 변화와 성장의 의지를 품고 실천하는 신앙인이 되길_김진명 형제

    [성도 간증] 변화와 성장의 의지를 품고 실천하는 신앙인이 되길_김진명 형제

    할렐루야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증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대학부 영은회를 무사히 마치게 해 주시고 간증을 할 수 있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번 영은회를 준비하면서 받은 은혜와 영은회를 참가하며 받은 은혜에 대해 나누고자 합니다.

    이번 영은회는 그냥 참석할 때와 달리 저에게 맡겨진 일이 있었는데요. 바로 찬양 인도였습니다. 제가 편안하게 느끼는 청주 교회에서도 찬양 인도를 할 때는 떨리는데요. 익숙하지 않은 대전 교회에서 그리고 청주 교회에서 보다 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선 다는 것을 생각만 해도 떨리게 되었습니다. 찬양 인도를 준비하게 되면 저의 옆에서 함께 찬양할 싱어들과 반주자 그리고 ppt를 넘겨줄 사람을 구하게 됩니다. 이를 위해 기도하고 청주 교회 대학부들에게 이 역할을 맡아줄 수 있냐고 물었습니다. 청주 교회 대학부들은 싫다는 말 없이 알겠다는 답변으로 즉각 순종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동역자를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했고 부담이 될 수 있지만 순종하여 준 청주교회 대학부에게 고마웠습니다. 이제는 멘트와 찬양할 곡들을 정해야 하는 순서였습니다. 이번 영은회는 {너희는 내게 거룩할지어다}를 주제로 성막과 제사 그리고 제사장에 대한 말씀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주제와 관련된 멘트와 찬양을 준비하기 위해 기도를 하고 생각 중에 있었습니다. 말할 멘트와 찬양할 곡들이 바로바로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생각만 하다가 대학부 영은회에서만 하는 사전 교재를 하며 세한 목자님께서 성막에 대한 설교를 하신 것이 생각났습니다. 세한 목자님께서 올려주신 자료와 설교를 참고하며 사전교재를 하였고 묵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한 묵상이 저의 멘트가 되었고 찬양할 곡들을 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멘트와 찬양할 곡들을 정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멘트와 곡을 정했다면 이제는 연습할 차례였습니다. 연습을 할 때에 대학부들은 자신이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저의 부족한 점을 채워주며 찬양 연습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동역자들을 보내주신 하나님께 한 번 더 감사하였습니다. 이제 진짜 찬양 인도할 일만 남았습니다. 저의 또래 친구들이 제가 찬양한다는 것을 듣고 제에게 와서 격려의 말과 긴장을 풀어주는 말을 해주었습니다. 그 말들 중에 ‘그냥 하나님께 찬양하면 된다’ 라는 말이 기억에 남았습니다. 연약한 저는 하나님께 찬양드린다는 것에 집중하기보다 사람들 앞에 선다는 것에 더 집중했던 것이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다른 것에 신경 쓰지 않고 하나님만을 찬양할 수 있게 해 주세요.” 라고 기도를 하고 찬양 인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동역자들의 기도와 저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제가 긴장하기보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순종하고 맡았을 때 부족한 저를 도와주시는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었고 아주 감사한 경험이었습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앞으로도 맡겨진 일에 즉각 순종하는 제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이번 대학부 영은회는 저의 두 번째 대학부 영은회였습니다. 첫 번째 대학부 영은회는 적응하느라 꽤나 고생을 했지만 이번 영은회는 쉽게 적응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이번 영은회 주제는 거룩이었습니다. 개회 예배 때 거룩은 구별된 것이라고 말씀을 하시며 세상을 쫓는 것이 아닌 하나님 말씀을 쫓고 추구해야 거룩을 지킬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개회 예배를 들음 이번 영은회는 저에게 필요한 말씀을 주실 것이라 생각을 하며 열심히 들어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강의를 들으며 목자님께서 강조하신 것은 예배에 대한 인식의 변화였습니다. 그렇기에 저의 변화된 예배에 대한 인식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원래 저의 예배에 대한 인식은 하나님 말씀을 듣는 시간이라고만 생각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말씀을 들을 뿐만 아니라 참된 예배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이고, 그 안에서 우리는 변화되고 새로워져서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아가는 시간이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표현이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감사의 표현을 할 수 있도록 해주시지 않았다면 인간인 저희는 세상 사람들이 우상을 대하듯이 하나님을 대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방법으로 하나님께 감사드리고자 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변화된 인식은 삶이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평소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만 의식하고 삶을 통해 하나님을 경배하지 못했기에 반성이 되었습니다. 번제는 전부를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입니다. 저의 일부만 드리는 것이 아닌 저의 모든 삶을 드릴 수 있는 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다음으로 제사장에 대해 배우게 되었습니다. 제사장의 역할 중 하나는 정결의 여부를 판단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세상에서 구별하기보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는 생각을 가지며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이번 영은회를 통해 제가 듣는 것과 보는 것을 구별하여 거룩을 잃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제사장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하는 특권을 가지게 됩니다. 하지만 저는 하나님께서 저를 불러주심으로써 세상에서 구별하시고 감사를 표현하는 방법까지 알려주셨지만 그것에 비해 저는 하나님께 너무 소홀하다고 느꼈고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는 이 특권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저와 성도님들 되기를 소망합니다.

    다음으로는 성막에 대해 배우게 되었습니다. 목자님께서는 집을 보면 그 집에 사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듯이 성막을 통해 하나님에 대하여 알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성막은 다들 아시는 것처럼 거룩한 곳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신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막을 중심으로 성막 가까이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하늘나라의 백성인 저희도 성막을 중심으로 한 예배의 삶을 드려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대학교를 천안에 가게 되면서 천안 교회 생활관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저는 청주에서 살고 싶었기에 천안에서 살게 된 것에 아쉬워하였습니다. 하지만 성막에 대해 배우고 성막을 중심으로 한 예배의 삶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며 천안 교회 생활관에서 사는 것은 축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생활관에서는 비슷한 나이에 형제들끼리 서로 부족한 점을 채워주고 연약한 부분을 도와주는 좋은 점이 있었고 서로 도와주고 배려하며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었다는 것에 감사하였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아쉽다고 여겨졌던 것이 이렇게 변화하였습니다. 천안으로 인도하여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성막을 중심으로 한 예배의 삶을 살아가는 저와 성도님들 되기를 소망합니다.

    강의를 듣고 조별 학습 시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조별 학습 시간에는 서로의 묵상을 나눕니다. 묵상을 나눌 때 고민을 말하기도 하는데요. 이때 말씀으로 답변해 주고 고민을 해결하며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이렇게 서로 교제하고 말씀을 나눌 수 있도록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영은회를 갔다 온 후 저녁 예배 설교 때 목자님께서는 영적 장애가 치유되기 위해 변화와 성장의 의지를 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번 영은회를 통해 배우고 느낀고 다짐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닌 변화와 성장의 의지를 품고 실천해야겠습니다. 사실 저는 영은회를 갔다 온 후 피곤하다는 이유로 잠을 자는 시간이 늘었고 게을러지게 된 것 같습니다. 이번 간증을 기회 삼아서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다짐함으로써 더욱 성장하는 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 모든 영광 하나님께 돌리며 간증 마치겠습니다.

     

    글작성 : 김진명 형제 

  • [복음 메세지]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눅 16:19-31)

    [복음 메세지]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눅 16:19-31)

    [말씀 제목]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눅 16:19-31)

    [설교자] 김세한 목자

    [설교일] 2025.08.16

    간혹 매스컴을 통해 접하는 소식에 의하면 죽음에서 부활한 사람들이 있다. 소위 임사체험을 한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의 진술을 살펴보면 부활한 후 몇 가지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는 매우 강렬한 빛을 목격했다고 진술한다. 그 빛에 따뜻하고 평화로운 느낌이었다고 한다. 둘째는 죽는 순간 길고 좁은 터널 같은 곳을 빠르게 통과하는 느낌을 받는다고 한다. 셋째 부활한 이후 사랑과 용서에 대한 말을 하는 사람이 많다. 과거의 삶을 되돌아보며 상처와 과오에 대해 이야기 한다는 것이다. 넷째, 삶과 죽음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가지게 된다고 한다. 더욱이 죽음 이후의 세계가 있음을 인정하고 그에 대해 말한다는 것이다. 다섯째,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적어지고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된다고 한다.

    하나 더하기 하나가 둘이라는 셈법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무조건 받아들여야 하는 산수의 기본 전제이다. 그 전제를 받아들일 때 비로소 이차방정식, 삼차방정식의 수학 문제를 다루는 것이 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신앙에도 우리가 기본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전제가 있다. 그 신앙의 기본전제 가운데 하나가 바로 내세의 존재이다. 즉 사람이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내세가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만약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신앙생활 한다면 그것은 마치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다. 미래 언젠가는 무너져 내릴 위험이 있다.

    (히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오늘 이 자리에 성도님들은 내세에 대해서 어떤 이해와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만약 우리가 그 미래를 확신한다면 오늘날 우리는 어떤 신앙생활을 해야 마땅할까? 오늘은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통해서 그 교훈에 대해 함께 생각하고 은혜를 나누는 시간을 가지고자 한다.

    오늘 본문에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이 비유가 전달하고 있는 내용은 매우 간단명료하다. 사람이 죽으면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내세가 있어서 사람이 다른 형태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죽어서 좋은 곳에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모두가 행복하고 또 그것이 영원히 지속된다면 정말 좋을 것 같다. 그러나 성경의 목소리는 그렇지 않다. 어떤 사람은 천국에 이르지만 다른 사람은 지옥에 이르러 영원한 고통의 자리에 속하게 된다는 것이다. 성경은 이것을 일관되게 이야기하고 있다. 이 목소리를 변경한 적이 없다. 그렇다면 성도는 그 상황에 대해서 보다 자세히 알 필요가 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것을 알기를 원하신다. 예수님이 부자와 나사로 비유를 통해서 전달하시는 교훈은 이런 것이다.

    첫째, 죽음 이후에는 반드시 두 개의 세계가 존재한다.

    (요 5: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불신자들은 하나님의 존재도 믿지 않듯이 내세의 존재도 믿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다면 내세의 존재도 믿어야 한다. 천국의 존재도 믿고 지옥의 존재도 믿어야 한다. 이 둘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분리할 수 없다. 어떤 불신자들은 내세를 믿지 않는다. 그 심리적인 이유는 천국의 존재를 인정하기보다 지옥의 존재를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천국 갈 자신은 없다. 그렇다고 지옥에 갈 것을 상상하면 끔찍하다. 그래서 죽으면 끝이지 천국과 지옥 같은 것이 어디 있느냐고 생각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세의 존재를 믿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듯이 천국과 지옥의 교리에 부인하는 나름의 논리로 반박한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이렇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지옥을 만들어서 사람들이 고통에 처하게 하십니까? 사랑의 하나님이라면 그것은 모순입니다.” 이처럼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표현과 지옥의 교리를 대조시키면서 마치 기독교가 모순된 종교라고 반박하며 부정한다. 그러나 이런 반문은 사실 성경에 대해서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생각이다.

    지옥은 사실 하나님이 마귀를 벌주기 위해서 만든 것이지 인간을 벌주기 위해서 만든 곳이 아니다. 다만 인간이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마귀의 길을 따르면 결국 마귀와 함께 지옥에 가게 되는 것이다. 이 선택에 대해서는 결코 하나님의 책임이 아니다. 마귀의 길을 따르기로 선택한 인간 자신의 책임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현실은 어떠한가? 세상에는 선한 사람만 존재하지 않는다. 악한 사람도 존재한다. 그래서 악인이 때로 선한 사람에게 손해를 끼치기도 하고 심지어 목숨까지 빼앗기도 한다. 이 세상에 그런 악인이 존재하고 선인의 억울한 일을 당하는 상황이 존재기에 우리는 마음속으로 악인에 대해서 뭔가 응징의 조치가 마땅히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선인에 대해서도 무엇인가 보상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임마누엘 칸트’라는 철학자가 말했다. “천국과 지옥은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부조리와 불공평으로 가득 찬 이 세상을 발견할 때마다 이것을 생각하게 된다. 형통해야 할 사람이 잘못되고 잘못되어야 할 사람이 오히려 형통하는 이런 부조리 때문에라도 천국과 지옥은 반드시 있어야한다”라고 말했다.

    나치 독일의 히틀러라는 미치광이 하나 때문에 수백 만 명의 죄없는 사람이 포로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어야 했다. 만약 내세가 없다면 이런 악인의 횡포에 대해서, 세상의 불의에 대해서 어떻게 그 억울함과 원통함을 해소할 수 있겠는가?이런 질문이다. 이 철학자의 눈에도 세상은 부조리와 불합리로 가득 찬 곳이며 그 부조리와 모순이 해소되려면 반드시 죽음 이후의 내세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칸트’라는 철학자뿐만 아니라 성경의 시편 기자의 노래 속에도 이 세상의 현실에 대해 동일하게 서술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시 73:3-6) 『[3]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4]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5]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6] 그러므로 교만이 저희 목걸이요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며』

    시편 기자는 철학자 ‘칸트’와 마찬가지로 악인이 형통한 현실에 대해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다. 이처럼 의인이 악인에게 해를 입는 사례는 이미 창세기부터 있었다. 아담의 장남 가인이 차남 아벨을 살해했다. 그런데 아벨이 죽음 이후 그 억울함이 어떻게 해소되었다는 기록이 없다. 성경은 이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이사야 예레미야 같은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순교했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의 죽음 이후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세례 요한은 입바른 소리 하다가 헤롯왕에게 참수형 당했다. 그러나 그의 죽음 이후에 어찌되었는지 성경은 침묵하고 있다. 그 외에도 얼마나 많은 성경의 인물들이 억울하게 죽었는지 모른다. 만약 천국과 지옥이 없다면 그 무수한 피해자들은 어떻게 억울함을 풀고 그에 대한 보상받을 수 있을까?

    이처럼 세상의 역사를 보아도, 성경의 역사를 보아도 우리가 사는 세상은 아름답지만은 않다. 악인이 의인을 가해하는 부조리한 상황이 비일비재하다. 여러들은 이런 사실에 대해서 어떤 견해를 가지고 계신가? 만약 내세가 없다면, 만약 천국과 지옥이 없다면 이런 상황을 해소할 방법이 없다. 그래서 지옥은 존재할 수밖에 없다.

    (마 25: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따라서 성도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다면 성경을 믿어야 하고 성경을 믿으면 성경이 말하는 내세의 존재도 믿어야 한다. 그래야 천국을 소망할 수 있고 또 지옥의 형벌을 두려워할 수 있다. 또 다른 영혼들이 그 영원한 형벌에 처하지 않도록 전도할 수 있다. 성도가 천국보다 왜 세상에 몰두하며 살아가는가? 이 기초 신앙이 굳건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도가 왜 가족 친척 전도하는데 미온적인지 아시는가? 내세에 대한 이 신앙이 약하기 때문이다. 부디 죽음 이후에 이 두 세계가 있다는 성경의 선언을 믿으시고 영원한 천국을 준비하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길 원한다.

    둘째, 이생과 내세의 삶은 크게 역전될 수 있다.

    (눅 16:25)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이 비유에서는 천국과 지옥의 존재뿐만 아니라 부자와 나사로의 인생이 대조되고 있다. 부자는 이생에서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했고 나사로는 상처가 난 곳을 개가 와서 핥을 만큼 생활이 비참했다. 그런데 죽음 이후 이들의 처지가 완전히 역전된다. 부자는 음부의 고통을 당하고 있고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이생과 내세는 전혀 다른 처지로 역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오해하지 않아야 할 점은 부자는 부요하기 때문에 불구덩이 떨어지고 반면 나사로는 가난하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것이 아니다. 니고데모처럼 물질이 풍족해도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있고 오히려 빈궁해도 마음이 교만하고 탐욕스러운 사람도 있다.

    부자는 음부의 고통에 있다고 했는데 여기서 음부는 어떤 곳인가? 음부는 헬라어로 ‘하데스’라고 하는데 이는 죽은 자가 거하는 임시 거처를 가리킨다. 이 음부에 대기하고 있다가 마지막 심판을 받고 지옥에 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음부는 지옥 이전의 임시 체류 장소로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지옥이란 뜻의 헬라어는 ‘게헨나’라고 하는데 이는 ‘힌놈의 골짜기’란 뜻이다. 음부와 지옥은 어휘상 달리 표현되지만 여기서는 같은 의미로 다루겠다. 지옥으로 번역된 게헨나는 예루살렘 동남쪽에 있는 실존 지명이다. 이 장소에 얽힌 역사적인 배경이 있다. 과거 구약시대에 우상 숭배자들은 이곳에서 인신 제사를 드렸다. 그래서 어린 아이를 불태워 우상에게 바쳤던 것이다. 그 후 유대인들은 이 저주스러운 장소에 쓰레기를 가져다 버렸다. 그리고 쓰레기들을 태우기 위해 항상 불을 피워놓았다. 그래서 꺼지지 않고 계속 불이 타오르는 곳이 바로 게헨나이다. 주님은 바로 이 게헨나를 지옥으로 말씀하고 있다.

    (막 9:48)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그래서 한마디로 지옥이란 어떤 곳이냐 바로 꺼지지 않고 항상 불이 붙어 있는 영적 쓰레기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생에서 잠시 동안 아무리 떵떵거리게 산들 저생에서 영원히 고통의 게헨나에 간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또 이생에서 아무리 고통을 받을지라도 저생에서 영원한 안식과 평안을 누릴 수 있다면 이 고통이 뭐 그리 대단한 것이겠는가? 주목할 점은 그 처지가 한 번 정해지면 바뀔 수 없고 영원히 지속된다는 것이다.

    부디 여러분들은 잠시 잠깐의 이생의 행복이나 고통보다 영원히 지속되는 내세에서의 행복과 고통에 더 큰 관심을 두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기원한다.

    셋째, 기억되는 이름과 망각되는 이름이 있다.

    (계 3: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오늘 본문에 부요한 사람은 성도 이름도 기록되지 않고 다만 부자라고 기록했다. 반면에 거지는 ‘나사로’라고 분명히 그 이름을 기록하고 있다. ‘나사로’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의 도우심’이란 뜻이다. 그 이름의 뜻으로 미루어 보건대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소망하며 살아간 신앙인이 아닌가 추측된다.

    이처럼 사람은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이름이 있고 기억하지 않으시는 이름이 있다. 이 사실을 잘 설명하는 성경의 기록이 있다.

    (계 20: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계 21:27)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

    성도는 믿고 세례를 받은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하신다. 말하자면 한국에서는 아기가 태어나면 그 이름이 주민등록부에 등재되듯이 사람은 세례를 받을 때 다시 태어나게 되고 그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미국 시민권이나 스웨덴 같은 복지국가의 시민권을 얻고자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그것이 있으면 육신의 혜택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늘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천국의 시민권은 이 땅의 어떤 시민권과 비교할 수 없다. 비록 이 땅에서 부자와 같이 호화롭고 평안한 생활은 못해도, 티브이에 나오는 유명인사는 못돼도, 가난하고 불편하게 살아도, 질병과 장애를 안고 힘겹게 살아가도 하나님은 우리의 이름을 기억하시고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실 미래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도는 잠깐이면 사라질 이 땅에 이름을 새겨지는 것보다 하늘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신앙을 갖는 저와 성도님들이 다 되기를 바란다.

    넷째, 이생은 내세를 준비하는 유일한 기회이다.

    (눅 16: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나사로를 살려서 돌려보내면 제 아들들이 믿지 않을까요?” 하고 질문한다. 이에 대해 아브라함은 “모세와 선지자들의 음성을 듣지 않으면 죽었다 살아난 자가 있어도 듣지 않을 것이다.”라고 대답한다. 이 대답으로 보건대 이 땅에서의 삶의 기간은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기를 준비하는 유일한 기회임을 알 수 있다. 죽으면 그 기회는 다시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태평양 어느 섬나라에 오랫동안 내려오는 풍습이 있었다. 그 풍습은 표류한 이방인을 일 년 동안 왕으로 모시다가 그 후 무인도로 추방해서 죽게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곳에 표류해서 왕위에 오른 일 년 동안 온갖 보물을 모아서 자기 집에 채우며 행복하게 생활했다. 그러나 일 년 후 보물은 내려놓고 무인도로 추방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곧 죽었다. 두 번째 사람이 그 섬에 표류했다. 그도 왕으로 추대되어서 일년 간 섬의 온갖 맛있는 음식을 즐기며 좋은 의복을 만들어 입었다. 그리고 일 년이 지나자 그도 무인도로 추방되어 죽었다. 그런데 세 번째 사람이 그 섬에 표류했다. 그는 도착 후 앞서 간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왕이 되자 섬의 백성들에게 명령했다. “저 무인도에 우물을 파고 나무를 심고 밭을 갈고 집을 지어라.” 섬의 백성들은 왕의 명령대로 모두 행했다. 그리고 일 년이 지날 무렵 무인도는 비옥한 곳으로 바뀌어 있었다. 결국 이 사람은 무인도에 추방되었지만 잘 가꾸어진 그 무인도에서 계속 행복하게 살았다.

    이처럼 이 땅에서의 삶은 화살과 같고 유수와 같다. 그 짧은 일생 동안 죽음 이후의 삶을 준비해야 한다. 부디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믿음의 기초를 확실히 세우자. 죽음 이후 우리에게 임할 그 때를 준비하자. 이 땅을 사는 동안 내가 거할 하늘 집을 위해서 열심히 땀 흘리며 준비할 뿐만 아니라 지옥을 향해 나아가는 다른 영혼을 구원하고 미래에 모두 함께 영원한 천국에서 영원한 복락을 누리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길 예수 이름으로 기원한다.

     

    글작성 : 김세한 목자

  • [신앙의 향기]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향기를 품은 교회교육 선생님들

    [신앙의 향기]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향기를 품은 교회교육 선생님들

    5월 15일 스승의 날을 맞이하여 교회교육에서 열심으로 애써주시는 선생님들에 대한 감사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새내기 대학생인 예비 교사를 포함한 열 분의 선생님들과 교회교육 시간에 방송을 담당해 주시는 김성민형제님까지

    모두 그간의 노고와 앞으로의 사역을 위해 감사하며 축하했습니다.

    아이들의 영혼을 사랑하고 자신들의 시간을 기꺼이 내어 쓰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품은 우리 선생님들 정말 멋있죠?  

    참예수교회의 아이들은 우리 신앙의 미래이며 선생님들은 그 미래들의 안내자입니다. 

    말씀 속에서 아이들을 잘 인도할 수 있도록 우리 성도님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기도 부탁드립니다.

     

    글작성 : 김예영 자매

  • [성도 간증] 순종의 예스맨_배태준 형제

    할렐루야~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단기신학 간증하겠습니다.

    먼저 단기신학을 무사히 다녀올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단기신학은 총 3년차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저는 이번에 1년차 과정을 신청해서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문득 제가 1년차를 처음 들었던 때를 떠올려보니 5년 전 2020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그때는 단기 신학에서 제일 막내였는데, 어느덧 단기신학에서 나이가 많은 OB쪽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시간이 흘렀어도 단기신학을 통해서 받는 은혜와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큰 것 같습니다.

     

    단기신학에서 받은 은혜와 기쁨을 몇 가지로 나누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교제의 기쁨과 은혜를 받았습니다. 단기신학은 약 2주간의 시간 동안 이루어집니다. 그러다 보니 2주 동안 함께 단기신학을 하는 단기신학생님들 모두의 얼굴을 계속해서 보면서 함께 말씀을 듣고, 함께 찬양하고, 함께 기도하는 시간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이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평소에 살아가는 삶의 자리에서는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 공간에서 2주 동안의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그 자체로 큰 기쁨과 위로와 은혜가 되었습니다. 또한 다른 단기신학생님들께서 하나님 말씀 배우기에 열심을 내고, 온몸과 마음으로 찬양드리고, 힘을 내어 기도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제 스스로의 신앙을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단기신학에 모인 신학생님들의 모습에서 제자도를 정말 충실히 걷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모습과 예수님을 닮아가고자 하는 모습이 보이면서 제 스스로가 부끄럽게 생각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저 또한 조금이라도 더 성장하기 위해서 발버둥치면서 열심히 강의를 듣고 생활했던 것 같습니다.

     

    단기신학에 가는 목적은 결국에 무엇이지요? 물론 다른 신학생님들과 교제하는 시간도 좋고 빼놓을 수 없는 은혜의 시간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할 수 있는 말씀의 은혜와 기쁨이 아니겠습니까? 두 번째로 간증하고자 하는 것은 말씀을 통한 기쁨과 은혜입니다. 1년 차 때 배우는 과목들은, 3년차도 물론 정규와 비교한다고 하면 개론서의 개론의 개론도 안되겠지만, 특히나 1년차는 더욱 개론적인 성격이 강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핑계를 대자면 5년 전에 들어서 그런지 모든 것이 새롭게 느껴졌습니다. 이제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평소에 설교를 듣거나 말씀을 묵상할 때도 느끼는 것이지만, 정말 제가 하나님 말씀에 무지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사실 그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했는데 제 스스로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정말 무지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런 깨달음을 얻은 것도 하나님의 은혜인 것 같습니다.

    제가 학생부 영은회 교사를 준비하다보니 자연스레 족장시대 인물들에 대한 말씀이 더욱 기억에 남는 것 같습니다. 족장 시대 인물들은 모두 개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는데요. 그들의 공통점을 찾아보자면 모두 미숙한 모습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신앙의 길을 포기 하지 않고 끝까지 걸어갈 때 하나님께서 이들을 성숙한 사람으로 만들어주셨고, 히브리서를 살펴보면 미숙한 모습이 아니라 이런 성숙한 모습을 기억하여 주심을 알 수 있습니다. 저도 제 부족함과 미성숙함에 자꾸만 눈길이 가서 신앙의 길을 걸어갈 때 많은 두려움과 주저함이 있었던 것 같은데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도록 격려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개성 넘치는 족장시대 인물들의 신앙의 길이 결국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을 찾아가는 행복의 길임을 알게 되었을 때, 제가 걷고 있는 이 길이 너무나 더욱 감사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이 외에도 신약개론, 구약개론, 사복음서, 민수기, 여호수아, 레위기, 창세기 등을 배우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할 수 있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기쁨을 나누고자 합니다. 말씀을 들었으면 실천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단기신학 중에 목자님께서 “단기 신학생들이 올해는 예스맨이 되었으면 좋겠다”라는 말씀을 하신 적 있습니다. 제가 단기신학을 마치고 본가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금요일 저녁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예배를 드려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안동교회에 가니까 어머니께서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태준아, 오늘 기도회다.” 그래서 저는 “아 그래요? 알겠습니다.”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그냥 오늘 어떤 예배를 드리는지 말씀해주시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자 어머니께서 “그래서 오늘 네가 기도회를 인도해야 한다.” 제가 무엇이라 답했을까요? “예 알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단기신학 때 배웠던 말씀들을 떠올리면서 기도하고, 비록 재탕이지만 단기신학 때 했던 기도회 인도 내용을 가지고 기도회를 인도했습니다. 그리고 기도회가 끝나자 어머니가 또 말씀하시더군요. “태준아, 내일 찬양 인도할 사람이 없다. 오전과 오후 둘 다 준비해 놓아라” 제가 또 무엇이라 답했을까요? “예, 알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순종의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단기신학을 통해서 정말 많은 기쁨과 은혜를 받았던 것 같습니다. 부족함 많은 이런 저를 사랑해주시고, 이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간증할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과 감사돌리며 이상으로 간증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글작성 : 배태준 형제

  • [교회 행사] 2025 봄 영은회를 마치며

    [교회 행사] 2025 봄 영은회를 마치며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 이는 능력이 예수께로 나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러라(눅 6:19)”

    이번 청주교회에서는 5월 22일(목)부터 24일(토)까지 봄 영은전도대회가 열렸습니다. 강사님으로는 현재 전주교회에 목회를 맡고 계신 유바나바 목자님께서 ‘우리 구주! 예수님 만나기를 힘쓰라!’라는 주제로 말씀을 증거해 주셨습니다.

     

    예수님 만나 평안을 찾은 사람(마5:25-34), 예수님 만나 만족을 얻은 사람(요4:5-18), 예수님 만나 두려움을 극복한 사람(막4:35-41), 예수님 만나 칭찬받은 사람(마8:5-13)이란 제목의 말씀을 들었고 깨달음과 은혜를 받았습니다.

    영은회 마지막 날은 성찬례와 세족례가 있었습니다. 지난 5월 11일에 세례를 받으신 장한옥 자매님의 세족례가 진행되었는데 모든 성도님들의 축복 속에서 한 영혼이 예수님과 상관을 맺는 은혜를 함께 누렸습니다. 또 성찬례 시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참예하여 주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후 진행된 오후 예배와 저녁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마지막 기도를 하던 중 한 형제님이 성령을 받으셨습니다. 성령을 받은 형제님을 다 함께 축하하고 그 기쁨을 함께 나누며 주님의 은혜를 찬양했습니다.

    또한, 이번 영은회에도 하나님께서는 귀한 영혼들을 보내주셨습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그들 속에 심어진 하나님의 씨앗이 자라 언젠가 그 발걸음이 다시 예수님께로 돌아올 수 있길 소망합니다. 영은회는 마무리가 되었지만 주신 말씀을 기억하고 실천한다면 우리 속에 은혜와 감동은 계속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히 4:12)”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 1:8)”

    영은회의 시작과 끝을 함께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이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립니다. 할렐루야!

     

    글작성 : 박은우 형제

  • [성도 소개] “아빠도 성령 받았다!!!” 장치성 형제님을 소개합니다.

    [성도 소개] “아빠도 성령 받았다!!!” 장치성 형제님을 소개합니다.

    할렐루야! 높으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청주 참예수교회 장치성 형제님은 22년 5월 세례를 받은 지 3년만인 이번 봄 영은회 마지막 날에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날의 생생함을 담은 장치성 형제님의 간증을 성도 여러분들과 나누고자 합니다.

     

    할렐루야! 안녕하세요, 저의 가정은 아내(김연숙자매)와 큰 딸(장아영), 둘째 딸(장아윤), 저 순으로 세례를 받고 참예수교회에서 함께 기쁨으로 신앙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출석하고 말씀을 배울수록 가족이 한 믿음 안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첫째 딸은 올해 아동부 영은회때 먼저 성령을 받았습니다. 주님께 너무 감사했으며 열심히 간구했을 딸이 자랑스러우면서도 아직 성령을 받지 못한 저에게 아주 살짝 자극이 되긴 했습니다.

    그래도 제 나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언젠가 저에게도 성령을 주실거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더욱더 기도에 집중할 수 있었고, 드디어 이번 봄영은회에서 성령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매일 아침 출근 전에 단 몇 분이라도 기도를 했었습니다. 그렇게 아침마다 기도를 하면서 가끔 몸이 떨리고 혀가 꼬이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었지만, 그럴수록 더욱더 “이건 아닐꺼야~~아니야~~기도를 장난식으로하면 안되지~!! ” 부정을 하면서, 더욱더 분명하고 천천히~ “할! 렐! 루! 야!”를 외치고 기도를 멈췄습니다. 저는 제가 아직 성령을 받기에는 부족하다고 느꼈기에,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고 그냥 저의 생각으로 부정하고 거부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몰랐는데, 저의 기도 소리를 아내인 연숙자매가 계속 듣고 있었더라고요. 그러면서 기도 소리가 이상했는지, 이번 영은회 때 목자님께 안수 기도를 부탁했다고 했습니다.

     

    오후 예배 후 안수를 받고, 김세한 목자님께서는 성령의 감동이 있으니 조금 더 간절히 기도하면 성령을 받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아직 잘 모르겠는데요”라고 말씀을 드리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빨리 받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영은회 기간내내 몸살로 몸이 안 좋았고, 마지막 날은 앉아있는것 조차 힘들 정도로 온몸이 쑤시고, 열도 나서 빨리 저녁 예배를 마치고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저녁 예배를 마쳤을 때, 원래는 계획에 없었던 것 같은데 안수 기도를 한다고 하더라구요~ 저를 위해 기도시간을 마련해 주신 것 같아 감사했습니다. 오후에 목자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조금 더 노력하면 성령을 받을 수 있다고 하셨기에, 몸은 힘들었지만 기쁜 마음으로 안수를 받으러 나갔습니다.

    그렇게 앉아있기도 힘들 정도로 아픈 몸이었지만, 무릎을 꿇고 기도 하는데 평안함이 느껴졌습니다. 평안함을 느끼면서 평소에는 몇분만 기도를 해도 다리가 많이 아팠는데 몸이 공중으로 붕~~ 뜨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제 입에서는 저의 의지와 상관없는 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예전 집에서 기도할 때처럼 기도를 멈출 수도 있었지만, 오늘은 그냥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에 맡기면서 기도를 마쳤습니다. 눈가에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조금 맺혀 있었고 자리로 돌아와 앉자 목자님께서 제가 성령을 받았다고 선포해주셨습니다. 기쁜 감정도 있었으나, 좀 얼떨떨하고 정말 내가 성령을 받은 건지 의심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연숙자매한테 얘기를 했더니 목자님 두 분이 맞다고 하면 틀림없는 거니깐 의심하지 말고 더 열심히 기도하라고 얘기해 주더라고요.

    모든 성도님들이 자기 일들처럼 기뻐해 주시고 환호해 주셔서 너무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의심하기 보다는 성령 충만을 위해 기도에 더 집중하자는 생각으로 집에 와서 기도 시간에 더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매일 아침의 일상도 조금 변했습니다. 예전에는 저의 일정에 시간을 조금 내서 기도를 했다면, 이제는 기도 시간에 저의 일정을 맞추고 있습니다. 지금보다 더 성령 충만할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저에게도 이런 축복과 은혜와 사랑을 주신 주님께 감사드리며, 주님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는 성도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주님께 감사드리며 간증 마치겠습니다.

    (성령 받은 장치성 형제님을 축하하는 여호수아 신도회 형제님들)

     

    글작성 : 장치성 형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