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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회 행사] 하남교회와 청주교회의 교류회

    어느덧 1년의 절반인 6월이 지나가고 그 마지막을 장식할 행사가 청주교회에서 열렸습니다.

    하남교회 성도분들이 청주교회를 방문하여 함께 교제를 나누며 주 안에서 하나 되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2023.06.24.-25) 서로 다른 지역에 자리하고 있지만 같은 참예수교회 성도이자 예수 안에서 한 가족이라는 사실을 느낄 수 있는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 133:1).

    교류 시간에는 각 교회에 대해 소개 하고 준비한 찬양을 서로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번 행사를 통해 각 교회의 역사와 현황을 살펴보며 서로의 교회에 대해 더욱 잘 알게 되었고 그동안 북부지역의 교회의 사정이나 현황에 대해 알 기회가 적었는데 다른 지역 교회에 대해 알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었습니다.

     

    각 교회가 준비한 찬양을 나누는 시간, 비록 한 곡이지만 함께 부르니 더욱 기쁘고 은혜롭게 느껴졌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를 지을 때의 기쁨이 이랬을까요? 아동부가 그 작은 입술과 몸짓으로 찬양할 때, 성도들이 함께 입을 모으고 마음을 합하여 찬송할 때 하나님도 이를 지켜보시고 분명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이런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보니 시간이 흐르는지도 모를 정도였습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사진을 찍으며 다음을 기약하는 시간 또한 감사했습니다.

    이번 행사를 진행하며 느낀 것은 더욱 많은 한국의 참예수교회가 서로 교류를 했으면 한다는 것입니다. 몸의 거리보다 마음의 거리가 더욱 중요하듯 서로 마음을 가까이하기 위해 노력하고 우리 모두 참예수교회 성도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앞으로 우리 참예수교회 안에서 더욱 많은 교류와 활동이 활발해지고 교제하는 장이 많이 열리길 소망하며, 더욱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과 그 마음이 실천으로 나타나기를 기도합니다.

     

    글작성 : 박은우 형제

  • [성도 간증] 하나님 주신 최고의 선물_이솔지 자매, 변지율 형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 1:8)

     

    성령은 참예수교회의 10대 신앙에도 ‘천국기업을 얻는 보증’이라고 언급하고 있듯이, 우리는 성령을 받기 위해 간구해야 하고 성령 충만을 위해 항상 말씀과 기도로 채우고 성령을 힘입어야 합니다.

     

    이번 2023년도에 그런 하나님의 가장 큰 은혜이자 선물인 성령을 받은 두 친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귀한 선물인 ‘성령’을 받은 두 친구의 간증을 통해 모든 성도님들과 은혜를 나누려합니다.

    이솔지 자매(18)

    Q1. 성령을 받은 소감은?

    항상 상상으로만 성령 받는 것을 생각했는데 성령을 받았다는 말을 듣고 뭔가 얼떨떨하면서 믿기지 않고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정말 감사하다는 마음이 컸습니다.

     

    Q2. 성령을 받기 위해 어떻게 기도했나요? (기도과정 또는 기도제목)

    학생부 영은회에서 받았는데, 당시 기도회가 한번 남아있던 상황이라 더욱 간절하게 기도했던 것 같습니다. ‘집에 돌아가기 전에 제가 최고의 선물을 받고 갈 수 있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습니다.

     

    Q3. 앞으로의 다짐이 있다면?

    성령을 받은 것으로 끝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성령을 의지해서 살아가야겠고, 더욱 기도에 힘쓰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변지율 형제(17)

    Q1. 성령을 받은 소감은?

    ‘너무 기쁘다’라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기쁩니다. 성령을 받을 때는 잘 느끼지 못했지만, 기도를 하면 할수록 제가 성령을 받았다는 것이 실감나고 믿겨졌습니다.

     

    Q2. 성령을 받기 위해 어떻게 기도했나요? (기도과정 또는 기도제목)

    학생부 영은회에서 아침에 금식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기도할 때 간절히 기도하고 제가 낼 수 있는 소리 중 가장 큰 소리로 기도했고 다른 생각하지 않으려고 오직 성령을 받을 생각만 가지고 눈을 뜨지 않으려 노력하며 기도했습니다.

     

    Q3. 앞으로의 다짐이 있다면?

    성령을 받았으니까 앞으로 성령을 의지해서 기도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매일 기도하는 것을 잊지 않고 실천해서 성령을 힘입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성령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반드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하지 않고 주시기만 바라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또한, 성령을 받음으로 끝이 아니라 아직 남은 구원의 여정을 위해 나아가야 합니다. 성령은 우리가 그런 여정을 걸어갈 때 힘을 주고 도움을 줍니다.

    아직 성령을 받지 못했다면 포기하지 말고 더욱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때에 맞게 주시기 위해 예비하고 계십니다.

    성령을 받았다면 그때부터 시작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날마다 성령 충만을 위해 기도에 게으르지 않고 말씀을 읽는 영성관리에 힘을 쓰고, 성령을 힘입어 세상을 살아갈 때 내 기준이 아닌 성령이 기준이 되는, 성령에 이끌리는 삶을 살아가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소망합니다.

     

    글작성 : 박은우 형제

  • [교회 방문기] 제주집회소 성도님들의 충청지역 교회 신앙여행

    [교회 방문기] 제주집회소 성도님들의 충청지역 교회 신앙여행

    할렐루야~

    청주교회와 연합교회인 제주집회소 성도님들께서 (이에스더. 이송애. 이해주) 구도자이신 박영란님과 함께 신앙여행으로 청주를 비롯한 충청권 참예수교회를 방문하셨습니다.

    청주교회에서 3박 4일 머무시면서 천안교회도 방문하시고 담임 목자님과 청주교회 성도들과 함께 인근의 아름다운 곳으로 경치도 구경하고 일정의 마지막 날에는 대전교회& 총회 헌당식까지 알찬 시간을 보냈습니다.

    실시간 영상 예배로만 만났던 청주교회 성도들과 제주집회소 성도들이 서로 만나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귀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함께 동행하신 구도자 박영란님께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시길 늘 생각하면 기도하겠습니다.

     

    글작성 : 김예영 자매

  • [복음메세지] 십자가 주변의 인물(6)-예수와 동행한 여인들(눅8:1-3, 마27:55-56, 막15:40-41)

    [말씀 제목] 십자가 주변의 인물(6)-예수와 동행한 여인들(눅8:1-3, 마27:55-56, 막15:40-41)

    [설교자] 김세한 목자

    [설교일] 2023년4월8일

    우리는 구약 성경 속에 등장하는 믿음의 인물들 가운데 가끔 여인들의 이름을 발견하곤 한다. 여리고 성의 기생 라합, 사사 시대를 이끌었던 여자 사사 드보라, 서원 기도를 통해 사무엘을 낳은 여인 한나, 시어머니를 위해 희생한 모압 여인 룻, 민족의 위기를 모면하려고 목숨을 걸었던 황후 에스더 등 믿음의 여인들이 있다. 그리고 평범하지만 신앙인들에게 잔잔한 교훈을 전달하는 소박한 믿음의 여인들도 있다. 엘리야 선지자를 접대한 사르밧 과부, 엘리사 선지자를 위해 섬세히 배려한 수넴 여인,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가 병이 낫게 만든 한 이름 없는 소녀 등 이렇게 성경에서는 믿음을 언급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여인들이 발견된다.

    십자가 사건이 있었던 그 때 그 현장에도 여인들이 있었다. 오늘은 십자가 현장의 인물 가운데 주님을 따르고 섬겼고 동행했던 여인들의 족적을 살펴보고 그녀들의 신앙이 오늘날 우리에게 교훈하는 바가 무엇인지 함께 생각하고 은혜를 나누는 시간을 가지고자 한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사시는 기간 동안 그 분 곁에서 섬기는 여인들이 있었다. 누가는 당시 사회적 약자이지만 믿음의 주역인 여인들에 대한 관심이 깊었다. 그래서 마태나 마가와는 달리 여인들의 이름을 나열할 정도로 그 여인들에 대해 상세히 알고 있었다.

    (눅 8:1-3) 『이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반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2)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3) 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

    예수님의 곁에는 열 두 제자 뿐만 아니라 섬기는 여인들도 있었다. 그 여인들 중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여인은 바로 일곱 귀신이 들렸다 나간 자 막달라 마리아였다. 그리고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라는 여인도 있다. 이외에도 다른 여자들도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른 여자들은 구체적으로 누구일까?

    (막 16:1)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우리는 마가복음 16장에서 또 다른 여자들을 발견할 수 있다. 야고보의 어머니인 마리아와 살로메라는 여인이다. 이처럼 예수님의 주변에는 상당히 많은 여인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을 섬기고 있었다. 섬기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 그러면 이 여인들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신앙의 모범을 교훈하고 있는가?

    첫째,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모범.  

    (막 16:9)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누가복음 8장 뿐만 아니라 마가복음 16장에도 막달라 마리아가 첫 이름으로 등장한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처음으로 모습을 보이신 사람이었다. 그녀는 본래 일곱 귀신이 들렸었고, 예수님이 그녀를 치료해 주셨다. 그 은혜를 잊을 수 없어서 그녀는 주를 섬겼고 그 섬김은 주님이 죽으신 이후에도 지속되었던 것이다.

    아마도 막달라 마리아 외에 예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은 여인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예수님 일행을 섬기기 시작한 이유가 어디에 있었는가? 바로 이 여인들의 봉사와 섬김의 이유는 주님께 은혜를 입었고, 그 은혜를 기억하고 있었고, 감사했고 봉사와 섬김의 열매로 나타냈던 것이다. 이것은 주님이 관심을 두시는 열매이기도 하다.

    (눅 17:17-18)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언젠가 예수님이 열 명의 문둥병자를 치유해 주었을 때 그 중 한 사마리아 사람만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하다고 말했다. 또한, 귀신을 쫓아내어준 사람은 여럿 있었다.이렇게 여러 사람이 은혜를 입었지만 지속적으로 주님 곁에서 봉사와 섬김의 삶을 실천한 인물이 막달라 마리아였던 것처럼,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감사하는 일은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은혜 입으면 주님께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는 교훈을 발견할 수 있다.

    한국 교회 중에 손님 접대로 섬김의 믿음을 실천하는 장로님 내외 분이 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남편인 장로님은 젊었을 때 아내가 대만 손님을 지극히 섬기는 모습을 못 마땅히 여겼다. 또 회당 건축할 때 거금의 헌금을 한 것을 알고 더욱 못마땅해 했다. 그런데 장로님 부부가 대만을 방문해서 귀빈 대접을 받고는 그들의 섬김에 매우 감동했다. 그 섬김의 모습에 감동해서 장로님도 사모님처럼 손님 접대에 섬김을 다하게 되었다. 그리고 대만에서는 한국에 가면 모 장로님을 꼭 찾으라고 소문이 나기도 했다.

    섬기는 일에는 돈, 체력, 시간이 소모된다. 모든 수고와 비용을 상쇄하고도 남는 감사와 즐거움과 기쁨이 있다.

    오늘날 성도님들은 예수님이 내게 주신 구원의 은혜에 대해서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계시는지? 그리고 그 감사의 마음이 어떻게 나타나고 계신지? 막달라 마리아처럼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 수행하는 여러 봉사의 모습을 통해서도 나타낼 수 있다. 형태는 어찌되었건 항상 주님께 구원에 대한 감사의 열매를 나타내시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자.

    (롬 12: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둘째, 주님의 십자가에 동행하는 모범.

    (요 19:25)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예수님의 곁에서 가장 가까운 자로 자처했던 12 제자들은 정작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모두 그분을 떠나갔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 지실 때 울며 골고다의 현장까지 동행한 여인들이 있었다.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셔서 백성들의 주목을 받는 순간에도 십자가에서 가장 비참한 일을 당하는 순간에도 이 여인들은 주님의 곁을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성경은 그 상황에서 여인들이 나타낸 슬픔의 표현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눅 23:27-28) 『[27]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 오는지라 [28]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예수님이 걸어가시는 수난의 길을 좇아간 자들은 남자들이 아닌 여자들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자 이동하신 길에도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신 순간에도 그 곁을 떠나지 않고 동행한 여인들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신앙의 모범을 전달하고 있는가? 일반적인 사람들은 밝고 기쁘고 행복한 일에는 동행하길 원한다. 그러나 어둡고 슬프고 불행한 일에는 동행하길 원하지 않는다. 마음이 슬퍼지고 어둡고 무거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이 원하시는 신앙의 길은 바로 십자가와 동행하는 길이다. 그래서 성도가 슬픈 자들의 슬픔에 동참하고 아픈 자들의 아픔에 동참할 줄 알기를 원하신다. 이 여인들이 십자가와 동행한 모습은 바로 그런 믿음의 모범을 남기고 있다.

    주님은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부디 주님의 기쁨과 희락 뿐만 아니라 주님의 슬픔과 아픔에도  동참할 줄 아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길 바란다.

    (롬 12:15-16) 『[15]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16]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셋째, 복음 전파 사역에 참여하는 모범. 

    (요 20:18-19) 『[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예수님이 무덤에서 부활하셔서 최초로 모습을 나타낸 사람이 누구였는가?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아니라 막달라 마리아라는 여인이었다. 주님이 주신 그 은혜에 너무 감사해서 항상 주님을 따라다니며 섬겼던 여인, 그랬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주님은 부활하신 당신의 모습을 가장 먼저 나타내셨고, 마리아는 그 소식을 다른 이들에게 전파했다.

    누군가 내게 베풀어준 은혜에 대해 감사하고 그 감사를 표현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그런데 그 사람이 죽어서 눈앞에서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은혜를 기리고 감사한다면 더 아름다운 일이다. 다윗 왕은 죽은 친구 요나단에게 입은 은혜를 잊지 않고 다리를 저는 장애를 가진 그 아들 므비보셋에게 호의를 베풀지 않는가?

    하나님은 이런 성품의 사람을 사랑하신다. 또 성도가 모두 그런 신앙을 나타내기를 기대하신다. 우리는 모두 주님의 구원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다. 십자가 사건은 이미 이천년 전 사건이고 내가 세례 받은 사건도 이미 수년 전 사건이지만 감사의 마음을 잃지 않고 항상 그 은혜의 감동 속에서 사는 것 이 또한, 감사의 마음을 품고 사는 것은 아름다운 일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구원의 은혜에 감사할 줄 알고 감사에 합당한 믿음을 나타내야 하는 것이다. 결국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후 그녀는 다른 여인들과 더불어 성령을 구하고 성령을 받고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는 복음 전파자의 삶을 살게 된다.

    (행 1:14)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사도행전에는 이름은 없고 그저 여자들이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마가의 다락방에서 모여 기도하던 그 여자들 안에 주님을 섬기던 여인들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이처럼 여인들은 주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성령 강림을 준비하며 복음 전파의 사명에도 참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십자가의 현장에 있었던 여인들에 대한 기록을 통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다. 구원에 은혜에 대해 섬김의 삶으로 화답할 줄 아는 저와 성도님들 되시길 바란다. 고통과 슬픔과 아픔의 처지에 있는 성도들과 동행해서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우는 저와 성도님들 되시기 바란다. 하나님이 내게 허락하신 은사와 형편대로 복음 전파의 사역에 참여하고 협력하고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란다. 십자가 현장까지 동행했던 그 여인들의 믿음의 길을 좇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길 예수 이름으로 기원한다.

    https://youtu.be/BGpIMX0VsMs

    글작성 : 김세한 목자님

  • [복음 메세지] 극단의 결과를 가져온 불의의 고리들(삿 20:1-23)

    [말씀 제목] 극단의 결과를 가져온 불의의 고리들(삿 20:1-23)

    [설교자] 김세한 목자

    [설교일] 2023년 1월 21일(토) 안식일 예배

    1787년 에드워드라는 사람이 쓴 ‘로마 제국의 몰락’이라는 책에는 로마 제국 멸망의 이유에 대해 다섯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멸망의 이유 첫째, 이혼의 급속한 증가로 가정이 파괴된 점, 둘째, 사람들이 스포츠와 매춘 등 쾌락주의에 빠져든 점. 셋째, 세금은 점점 높아진 반면 지도자들은 시민들에게 공짜 빵과 서커스를 제공하는 포퓰리즘에 집중한 점. 넷째는 외적의 침입에 대비해 지나치게 군비를 확장한 점. 다섯째 종교의 순수성이 무너져 시민들이 건전한 정신으로 살아가도록 인도하지 못한 점 등이다.

    로마 제국의 멸망의 각각의 원인을 보면 대체 이런 정도 이유로 멸망까지 할 수 있나 싶게 대수롭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각각의 원인들이 합해지고 증폭되니까 예상치 못한 심각한 결과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2008년 금융 위기도 그렇다. 여러 계층의 작은 부정, 부패가 합해져 예기치 못한 심각한 결과에 도달했다. 학자들의 그릇된 경제 이론, 금융기관에서 남발한 부실 채권, 신용평가 기관의 부정직한 평가, 일반 대중들의 탐욕이 한 데 어울어지니까 금융 위기라는 암덩어리로 발병했던 것이다. 개인의 건강도 그렇다. 누구나 한 가지 요소로 건강을 잃지는 않는다. 수면 시간 부족, 영양 섭취의 불균형, 과도한 노동과 스트레스, 건강을 해치는 음주와 흡연, 이런 모든 악습관이 합해져 종합되니까 암같은 심각한 질병이 발병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은 작은 것이 작은 것이 아니다. 영육 간의 독소는 작은 씨앗이 자랄 때 제거해 주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전 10:1) 『죽은 파리가 향기름으로 악취가 나게 하는 것 같이 적은 우매가 지혜와 존귀로 패하게 하느니라』

    우리는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어우러져 살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 생활하느냐가 나 혼자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전체 사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특히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의 모임, 교회 공동체도 마찬가지이다. 성도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살아간다. 그 의미는 나 한사람의 신앙과 믿음이 내 안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한 분의 성도가 자리를 비우면 허전하다. 그분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으면 든든하다. 이런 사실에서 우리는 이미 하나의 공동체임을 증거한다.

    우리는 사회 속에서건 교회 안에서건 내가 속한 공동체 속에서 어떤 의식과 신앙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가? 어떤 의식과 신앙을 가지고 살 때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오늘은 레위인의 첩 사건이 불씨가 되어 베냐민 지파의 멸절하게 된 사건을 살펴보고 이런 문제를 생각하고 은혜를 나누는 시간을 가지고자 한다.

    레위인의 첩이 베냐민 지파 기브아에 속한 비류들에게 욕보임을 당하고 죽는 불행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피해자인 레위인은 마치 짐승의 제물을 각 뜨는 것처럼 여인의 시신을 12조각으로 쪼개어 이스라엘 12지파에게 보낸다. 이스라엘 12지파는 그것을 받고는 이 엽기적인 사건에 대해 경악한다. 그리고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이스라엘 최북단에서 최남단까지 모든 지파가 미스바에 모이게 된다. 그렇게 모여든 지파들 가운데 칼을 빼들고 전쟁하는 정병이 사십 만이나 되었다. 이 모인 규모로 봐서 이것이 이스라엘에 얼마나 큰 충격을 주는 사건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레위인은 그렇게 모인 백성의 장로들에게 그간의 자초지종을 설명한다. 레위인의 설명을 들은 장로들은 베냐민 지파에게 이런 일을 행한 자들을 처벌하겠으니 범죄자들을 내놓으라고 요구한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베냐민 지파는 이 요구에 대해 불응한다. 결국 이스라엘 전체 지파 연합군과 베냐민 지파 사이에 전쟁이 일어난다. 동족 간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일어난 결과는 어찌되었는가? 베냐민 지파의 장정이 거의 몰살하게 되는 상황에 가서야 전쟁이 끝나게 된다. 그리고 모든 사건의 끝에 그 원인에 대해서는 밝히고 있다.

    (삿 21: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참고. 삿 17:6, 삿 18:1 삿 19:1

    동족끼리 칼을 겨누고 베냐민 지파가 멸절당하기까지 죽이고 죽임당한 이 불행한 사건의 원인에 대해서 성경은 근본 원인을 진단하고 있다. 그 원인은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 이다.

    그런데 근본 원인은 그렇다 치고 우리는 이 불행한 결과에 이르기까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 불의의 고리들을 발견한다. 그 가운데 하나만 끊어져도 이런 자리에 도달하지 않았을 텐데 계속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결되다 보니 오늘의 극단적 결과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그 고리 중에 첫 번째, 만약 레위인이 첩을 취하지 않았다면 이런 불상사는 없었을 것이다. 레위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자기의 정욕에 끌려 첩을 취하는 악행이 불씨가 되었다. 또 레위인이 음행한 첩을 데려오겠다고 자기 자리를 떠나 장기간 타지에 체류하는 불성실함이 없었다면 이런 불행은 일어나지 않았다. 또 베냐민 지파가 순순히 기브아 비류들을 이스라엘 족속들 앞에 순순히 내놓았으면 이런 일을 벌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베냐민 자손들이 기브아 비류들을 찾아내서 그들을 징벌하는 것이 마땅치 않았을까? 그런데 베냐민 지파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다.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여러 계층의 부정직과 불의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되니까 나중에 전쟁이라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다는 사실이다. 로마시대 멸망의 이유가 그러했고 또 2008년 세계 금융 위기의 현상이 그렇고 개인이 암이란 질병이 발병하는 과정이 그러한 것처럼 이 악의 고리가 끊어지지 않은데 원인이 있었다. 영적인 세계도 마찬가지이다. 엄청난 사건과 극단적 결과의 이면에는 이렇게 작은 불의, 부정의 요소들이 합해지고 연결되다 보니 최악의 결과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악은 작은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면 오늘의 이 사건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남을 탓하기 전에 너의 흠을 고치라.

    (삿 20:5-6) 『[5] 기브아 사람들이 나를 치러 일어나서 밤에 나의 우거한 집을 에워싸고 나를 죽이려 하고 내 첩을 욕보여서 그로 죽게 한지라 [6] 내가 내 첩의 시체를 취하여 쪼개어 이스라엘 기업의 온 땅에 보내었노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중에서 음행과 망령된 일을 행하였음을 인함이로라

    이 레위인의 말을 보라. ‘그들이 이스라엘 중에서 음행과 망령된 일을 행하였음을 인함이로라’고 말했다. 레위기에 보면 제사장과 대제사장이 기생이나 부정한 여인이나 이혼당한 여인을 취하지 말라고 명령하고 있다(레 21:7, 14). 레위인은 제사장이 임명되는 지파이다. 그런데 레위인이 행음한 첩을 데리고 살려는 그 시도에 대해서 스스로 뉘우치는 모습이 없다. 만약 레위인이 그런 불행을 당했을 때 먼저 자신의 잘못을 바라보았다면 ‘내가 음행과 망령된 일을 했더니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망령된 사건을 만나게 하셨구나!’라고 뉘우치고 회개했을 것이다. 그런데 회개가 없다. 그리고 오히려 베냐민 지파의 비류들만 고발하고 있다.

    성도는 그리스도를 마음 속에 왕으로 모신 존재이다. 그분이 말씀하시는 대로 살고 그분이 말씀하시는 대로 멈춰서야 한다. 그래서 성도들의 마음 속에는 양심이 살아 있어야 한다. 그 양심이 살아있을 때 자기 합리화라는 우물에 빠지지 않고 남을 탓하는 모순에 빠지지 않는다. 그래서 예수님도 산상보훈에서 ‘남의 눈에 있는 티를 빼려고 하지 말고 자기 눈에 있는 들보를 먼저 빼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는가? 또 바울 사도는 디모데 전서에서 ‘남의 죄에 간섭하지 말고 네 자신을 지켜 정결케 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는가?

    이 레위인의 우물안 빠진 모습에서 우리는 교훈을 받을 수 있다. 부디 남을 탓하기 전에 자신을 먼저 돌아보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자.

    (딤전 5:22)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지 말고 네 자신을 지켜 정결케 하라』

    둘째, 인정에 끌리는 것이 아니라 공의로 판단해야 한다.

    (삿 20:13-14) 『[13] 그런즉 이제 기브아 사람 곧 그 비류를 우리에게 붙여서 우리로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하여 버리게 하라 하나 베냐민 자손이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14] 도리어 각 성읍에서 기브아에 모이고 나가서 이스라엘 자손과 싸우고자 하니』

    오늘 본문에 베냐민 지파의 이상한 태도를 발견하게 된다. 베냐민 지파는 기브아 지역의 불량배들을 내놓지 않았다. 그들이 먼저 나서서 죄악을 저지른 불량배들을 징벌하고 공동체의 악을 제거하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의 연합군과 전쟁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성경은 침묵하고 있지만 추정하건대 아마도 베냐민 지파 중 유력한 집안의 자제들이 그 불량배들 가운데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불투명한 사회일수록 옳고 그름의 기준보다 혈연, 지연, 학연과 같은 관계가 그 사회를 지배한다. 그래서 그런 사회는 배경이 있고 연줄이 있으면 안될 일도 되고 반대로 배경도 없고 연줄도 없으면 될 일도 안된다. 사실은 위험한 사회의 공의가 실종된 사회이다. 베냐민 지파의 행동을 보아 그 시대도 그러했던 것 같다. 공의의 기준으로 판결하고 적용한 것이 아니라 인정과 관계에 의해서 감싸고 죄악을 묵인했던 시대였던 것이다. 그래서 베냐민 지파도 이렇게 행동한 것이다.

    오늘날 나나 혹은 내가 속한 공동체가 이런 부패의 길을 걷지 않으려면 어떤 신앙의 길을 가야 할까? 성도 개인이 범죄할 때 그것은 나 혼자만의 상실이 아니라 내가 속한 공동체의 상실임을 알아야 한다. 나 한 사람으로 인해 공동체가 상처받을 수 있고 그 상처는 또 나에게 돌아올 수 있다. 그러니 나에게 순서가 왔을 때 그 고리를 끊어낼 결심이 필요하다.

    때로는 공동체에서 고리를 끊어낼 때 깊은 고민이 있다. 관용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관용에는 항상 악을 용납하는 것이 아닌가에 대한 의문과 부담이 있다. 만약 무조건의 관용이 이루어져 무제한 악이 용납되면 공동체의 악으로 확대될 때 제재할 방법이 없다. 그래서 관용이란 공동체의 질서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의 관용이어야 한다. 그래서 사랑과 공의는 함께 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과적으로 공동체의 존립이 흔들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사건으로 이스라엘 전체 지파가 한자리에 모인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에서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에게 한 몸 의식, 한 공동체 의식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 공동체가 존립하려면 정직과 공의와 공평의 정신이 기초 되어야 한다. 이것이 무너질 때 공동체도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전 이스라엘 지파가 베냐민과 전쟁을 불사한 것이다.

    (고전 12:26-27) 『[26]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고전 5:6)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셋째, 근시안이 아니라 원시안의 안목을 가져라.

    (삿 20:35)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앞에서 베냐민을 쳐서 파하게 하시매 당일에 이스라엘 자손이 베냐민 사람 이만 오천일백을 죽였으니 다 칼을 빼는 자이었더라』

    (삿 20:46-47) 『[46] 이 날에 베냐민의 칼을 빼는 자의 엎드러진 것이 모두 이만 오천이니 다 용사더라 [47] 베냐민 육백 명이 돌이켜 광야로 도망하여 림몬 바위에 이르러 거기서 넉 달을 지내었더라』

    민 26:41에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갈 무렵 인구수는 45,600명이었다. 그런데 삿20장에서 베냐민 지파의 죽은 자가 50,100명이었고 남은 자가 고작 육백 명에 불과했다.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베냐민 지파는 가나안 땅에 정착해 살아오는 동안 인구가 오천 명이나 늘어나는 복을 받았다. 그런데 이 전쟁을 통해서 전부 죽고 육백 명만 남았다. 이스라엘 연합군은 이에 대해 이렇게 한탄하고 있다.

    (삿 21:2-3) 『[2] 백성이 벧엘에 이르러 거기서 저녁까지 하나님 앞에 앉아서 대성 통곡하여 [3] 가로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오늘날 이스라엘 중에 어찌하여 한 지파가 이즈러졌나이까 하더니』

    베냐민 지파 뿐 만이 아니라 사실은 이스라엘의 연합군도 피해가 컸다.

    (삿 20:21,25) 『[21] 베냐민 자손이 기브아에서 나와서 당일에 이스라엘 사람 이만 이천을 땅에 엎드러뜨렸으나 [25] 베냐민도 그 이튿날에 기브아에서 그들을 치러 나와서 다시 이스라엘 자손 일만 팔천을 땅에 엎드러뜨렸으니 다 칼을 빼는 자였더라』

    결국 베냐민을 공격했던 이스라엘 지파 연합군도 무려 4만 명이 죽는 비참한 결과를 가져왔다. 거의 한 지파의 인구 규모와 같다. 하나님은 마치 광야에서 우상 숭배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서로 치게 하셔서 그들을 징계하셨던 것처럼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하고 불신의 길을 걸어간 죄과를 이렇게 징벌하셨던 것이다.

    애초에 레위인이 음행한 첩을 취한 잘못의 회개하고 물러섰다면 이런 불행은 일어나지 않았다. 베냐민 지파가 자기 종족의 악을 근절하기 위해서 노력했다면 이런 불행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스라엘 지파가 베냐민과 더욱 대화하려고 하고 원만히 사태를 해결하려고 했다면 이런 불행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들 모두는 이 고리가 끊어지지 않고 계속될 때 수확할 불행의 열매를 분별하는 눈이 없었다. 그리고 그 결과 열매는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가 고스란히 담당해야 했던 것이다.

    어린 아이는 불장난의 위험성을 모른다. 눈앞에 불의 신기한 능력에만 몰입한다. 그러다가 큰 불이 난 후에야 불은 재미있고 유익한 것이지만 정말 위험한 것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체험한다. 이처럼 죄악은 마치 눈 앞에는 작은 불씨에 불과하지만 그것이 확대되고 성장했을 때 엄청난 결과가 있다는 것을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는 분별해야 한다.

    (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옛날에 어느 왕이 부정부패가 심한 신하들을 연회에 초대했다. 그들을 교훈하기 위해서 왕은 모든 신하들에게 한 가지 명령을 내렸다. 그것은 연회에 참석할 때 안주는 왕이 부담하니 술은 신하들이 준비해서 포도주 한 병씩을 꼭 가져오라는 것이다. 모든 신하들의 포도주를 한 항아리에 부어서 함께 연회를 즐기겠다는 계획이었다. 그러자 한 신하가 이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많은 신하들이 포도주를 가져오면 내가 가져가는 포도주 한 병은 얼마나 되겠나! 난 포도주 대신 물을 담아 가야지.” 그리고 이윽고 연회가 열리는 날 왕과 신하들은 진수성찬으로 차려놓고 연회장 가운데 술항아리를 놓고 둘러 앉았다. 왕은 신하들에게 명해서 가져온 포도주들을 항아리에 부으라고 했다. 그리고 항아리에서 포도주를 퍼다가 모든 신하들에게 따라주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인가? 술잔 속에 담긴 것은 포도주가 아니라 물이었다. 나 하나쯤 하는 신하들의 생각이 모아져 술을 맹물로 만든 것이었다.

    하나님은 사사기라는 성경을 통해 성도에게 교훈하신다. 성도는 하나님을 마음 속의 왕으로 모시고 살아야 한다. 그런 삶을 산다면 하나님 나라에 해를 끼치는 존재가 아니라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존재가 될 것이다. 죄악의 고리를 끊고 선한 영향력의 고리를 형성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공동체가 되자! 하나님이 천국의 문에서 맞아들이실 그 날까지 하나님을 마음속의 왕으로 모시고 경성하며 살아가시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기원한다.

     

    글작성 : 김세한 목자님

    글편집 : 김예영 자매

  • [복음 메세지] 비천한 자를 존귀한 자로 (삿11:1-11,29-40)

    [말씀 제목] 비천한 자를 존귀한 자로 (삿11:1-11,29-40)

    [설교자] 김세한 목자

    [설교일] 2022년 10월 8일(토) 안식일 예배

    인도라는 나라에는 ‘카스트 제도’라는 뿌리 깊은 신분 제도가 있다. 카스트 제도의 내용은 태어날 때부터 사람을 네 계급으로 나누는데,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가 그것이다. 그런데 네 계급 외에 카스트 제도 안에도 못 들어가는 최하층민이 있다. 이 계층을 불가촉천민으로서 달리트라고 한다. 태생적으로 상호간의 신분 이동은 할 수 없다고 한다. 이는 1950년에 법적으로 폐지되었지만 아직도 인도인의 문화 속에 영향력은 여전하다. 이런 신분 제도의 기원은 흰두교의 원시종교였던 브라만교에서 기원했다. 힌두교가 인도의 지배종교로 지속되는 한 인도 사회에 신분 계급 관념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카스트 제도 같은 태생적 신분 제도는 없지만 자본주의 사회체제를 도입한 결과 자본이 계급이 되는 사회로 변모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최근 유행어를 보면 시대의 가치관을 발견할 수 있는데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 등의 표현들이 자본으로 사람을 분류하려는 씁쓸한 우리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은 그들이 사용하는 용어도 쓰면 안 된다. 세상의 가치와 관념에 휘둘리게 되면 우리는 속게 되기 때문이다. 천국의 가치와 기준으로 자신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와 관념의 잣대로 나 자신을 평가하면서 불행하다고 생각하고 남들도 그렇게 평가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갈 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

    나는 오늘날 나의 존재의 가치에 대해서 하나님이 평가하시는 기준으로 생각하고 행복한 존재임을 발견하고 있는가? 아니면 세상의 가치 기준에 휘둘려서 자신을 불행한 존재로 비하하고 있지 않는가?

    오늘은 비천한 신분의 사람 입다가 사사가 되어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존귀한 자가 될 수 있었던 길이 어디에 있었는지 살펴보고 함께 은혜를 나누는 시간을 가지고자 한다. 사사시대 길르앗이란 사람이 기생에게서 낳은 아들이 있었다. 그 낳은 아들의 이름은 입다였다. 그는 서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집안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학대받았다. 결국 배다른 형제들로부터 쫓겨났고, 쫓겨나면서 재산 한 푼도 받지 못하고 떨려 났다. 혈혈단신 돕이란 땅에 거하게 되었는데 어느덧 이곳저곳을 떠돌던 사람들이 모여들어 부랑민의 우두머리가 된다. 이렇게 태생부터 비천한 처지였던 입다에게 어느 날 기회가 찾아왔다. 하나님은 우상숭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암몬 족속을 보내 괴로움 당하게 하셨고 그것은 전쟁까지 이르게 되었다. 암몬 족속이 쳐들어오는 위기상황에서 길르앗 장로들은 과거에 자신들이 쫓아낸 입다를 찾아가게 된다. 입다에게 전쟁을 수행할 장관이 되어 달라고 부탁을 하는데, 입다는 이스라엘을 인도할 지도자 신분까지 약속받고 그 제안을 수락하게 되고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입다에 대한 이 이야기는 세상 속에서 상처와 아픔으로 얼룩진 비천한 자일지라도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지면 존귀한 자가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도대체 입다는 어떤 사람이었기에 비천함에서 존귀함에 이를 수 있었을까?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이런 것이다.

    첫째, 신앙은 상처와 아픔을 치유하는 명약이다.

    (삿 11:1-2) 『[1] 길르앗 사람 큰 용사 입다는 기생이 길르앗에게 낳은 아들이었고 [2] 길르앗의 아내도 아들들을 낳았더라 아내의 아들들이 자라매 입다를 쫓아내며 그에게 이르되 너는 다른 여인의 자식이니 우리 아버지 집 기업을 잇지 못하리라 한지라』

    사람은 자기가 노력해서 개선할 수 있는 영역이 있고 개선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 스스로 개선할 수 없는 영역 가운데 태생이란 것이 있다. 태생은 자기 선택이나 노력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입다는 태생이 비천했다. 그런데 그의 고통은 여기에서 끝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했다. 그는 배다른 형들로부터 쫓겨났고 자기 몫의 재산은 한 푼도 받지 못했다. 사람이 건실한 인격체로 성장하려면 어렸을 때 가정에서부터 사랑을 경험해야 한다. 그런데 입다는 태어나면서부터 서자라는 낙인과 더불어 가정으로부터 거절당하고 쫓겨나는 상처와 아픔을 경험했다. 본문을 보면 입다의 추방은 한 가정에서가 아니라 한 가문의 차원에서 이루어진 일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입다에 대해서 성경은 ‘서자’라고 먼저 언급하지 않고 본문 1절 말씀처럼 ‘큰 용사’라고 소개하고 있다. 여기서 ‘큰 용사’란 ‘전쟁의 명수’ ‘싸움의 용사’ 즉 전쟁에 익숙한 자를 의미한다. 아마도 그에게는 전쟁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은사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은사 외에 그의 마음 속에 존귀하게 될 수 있는 다른 요소가 들어 있었다.

    (삿 11:9)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데리고 본향으로 돌아가서 암몬 자손과 싸우게 할 때에 만일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붙이시면 내가 과연 너희 머리가 되겠느냐』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한 말에서 우리는 입다의 마음 속에 여호와 신앙이 들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내가 그들과 싸워 이기면’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붙이시면’이라고 말했다. 이 표현은 전쟁의 승패가 내 능력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생각을 반영하고 있다. 그의 마음 속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마음이 있었다. 또 다른 곳에서 여호와 신앙이 발견된다.

    (삿 11:11) 『이에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과 함께 가니 백성이 그로 자기들의 머리와 장관을 삼은지라 입다가 미스바에서 자기의 말을 다 여호와 앞에 고하니라』

    입다가 미스바에서 자기의 말을 다 여호와 앞에 고했다. 이는 입다가 하나님께 기도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는 뜻이다. 여호와께서 전쟁의 승패를 좌지우지한다는 믿음, 여호와 앞에 자기의 말을 다 고하는 사람, 그런 신앙이 있던 사람이 바로 입다였다. 이것이 입다가 비천한 신분에서 존귀한 자가 될 수 있는 첫 번째 비결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비천한 처지였지만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존귀한 자가 되는 예를 많이 발견한다. 그 가운데 역대상에 야베스라는 인물이 있다.

    (대상 4:9) 『야베스는 그 형제보다 존귀한 자라 그 어미가 이름하여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역대상의 이 ‘야베스’란 이름은 ‘고통’이란 뜻이다. 그 어머니가 고통 중에 낳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태생적으로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거나 산모가 순탄하지 않은 탄생의 비화를 가졌던 것 같다. 그러나 야베스는 성장 후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있었다. 그는 하나님께 자신의 지경을 넓혀 달라는 간절한 기도를 드렸고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어주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상 4:10)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입다에게도 야베스와 같은 아픔과 고통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입다의 발목을 잡아 그의 인생을 넘어뜨리지 못했다. 그는 돕 땅에서 여러 사람들을 이끄는 리더가 되었다. 그 비결이 무엇이었는가? 바로 여호와 신앙이다. 신앙에는 이처럼 상처를 극복케 하는 능력이 있다. 신앙을 가진 자는 세상이 자신을 쓰레기 취급해도 ‘너는 내 형상을 닮은 존귀한 자야!’ 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나를 ‘서자’라고 손가락질해도 ‘너는 세례를 통해 하늘에서 태어난 내 아들이야!’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리 깊은 상처와 쓰라린 아픔으로 얼룩진 인생일지라도 하나님을 의지하면 치료되고 회복될 수 있고 존귀하게 될 수 있다. 그래서 믿음은 사람의 영혼을 고치는 명약이다. 과거에 어떤 상처와 아픔이 있더라도 입다가 그러했던 것처럼 오로지 하나님만 섬기는 믿음으로 치유받고 존귀하게 되시는 저와 성도님들 되시길 바란다.

    (시 16:3)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

    둘째, 신앙에는 원수와 화목하게 되는 복이 있다.

    (삿 11:7)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전에 나를 미워하여 내 아버지 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이제 너희가 환난을 당하였다고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입다가 길르앗 백성의 머리와 장관이 된 과정을 주목하자! 기드온처럼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나 그를 부르고 사사로 세운 것이 아니다. 삼손처럼 태중에서부터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것도 아니다. 이스라엘의 길르앗 족속 장로들이 직접 그에게 나아가 ‘장관’이 되어 달라. ‘머리’가 되어 달라는 부탁으로 사사로 발탁된다. 여기에 숨은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다. 입다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그렇게 천대하고 내쫓은 자들이 찾아와서 우두머리가 되어 달라고 부탁했을 때 입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이처럼 나를 힘들게 하고 모욕했던 사람에게 사과받고 화목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다. 입다가 그동안 여호와 하나님만 경외하고 그분을 의뢰하는 신앙을 지켰기 때문에 그에게 주어진 일종의 상급이었던 것이다. 창세기에 보면 믿음의 조상 삼인이 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다. 그런데 이 세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인생의 황혼기에 원수와 화목케 되는 일을 체험했다는 사실이다. 과거에 나를 괴롭히던 자들이 나를 찾아와 화친의 악수를 청했던 것이다.

    (창 21:22) 『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창 26:26-27) 『아비멜렉이 그 친구 아훗삿과 군대장관 비골로 더불어 그랄에서부터 이삭에게로 온지라 (27) 이삭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미워하여 나로 너희를 떠나가게 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창 33:10) 『야곱이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형님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청컨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 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이처럼 성도님들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원수 관계의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미움을 거둘 수 없게 깨져버린 관계가 있을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을 경외하고 올바른 신앙의 길에 가다보면 미래의 언젠가 그가 찾아와 악수하고 화목케 되는 날이 있다는 것이다. 믿음의 조상 삼인에게도, 그리고 오늘 본문의 입다에게 임했던 화평의 복이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는 저와 성도님들의 것이 되기를 기원한다.

    (잠 16:7)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

    셋째, 신앙에는 좋은 성품을 가지는 복이 있다.

    (삿 11:27-28) 『[27] 내가 네게 죄를 짓지 아니하였거늘 네가 나를 쳐서 내게 악을 행하고자 하는도다 원컨대 심판하시는 여호와는 오늘날 이스라엘 자손과 암몬 자손의 사이에 판결하시옵소서 하나 [28] 암몬 자손의 왕이 입다의 보내어 말한 것을 듣지 아니하였더라』

    사람은 상처와 아픔을 경험하면 난폭하고 모난 성격이 되기 쉽다. 남을 원망하거나, 환경을 원망하거나, 부모나 태생을 원망하는 자가 될 수도 있다. 자기를 잃고 방황하는 인생이 되기 쉽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좋은 은사를 받은 사람도 방탕으로 치달아 인생을 망친다. 태생이나 자란 환경으로 볼 때 입다는 그럴 위험성이 높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암몬과 전쟁하기 전에 사신을 보내 담판을 짓는 장면을 보면 얼마나 평화를 사랑하는 좋은 성품의 사람인지 가늠할 수 있다. 그는 암몬 족속과 즉시 전쟁을 수행하지 않았다. 먼저 협상을 통해 전쟁을 피할 수 있는 길을 모색했다. 이처럼 입다는 전쟁보다 협상을 원하는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아마도 신앙을 가졌기에 이런 성품의 사람으로 성장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화평케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이처럼 여호와 신앙의 길을 간 입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또 다른 상급이 있었다. 그 상급이란 하나님 닮은 아름다운 성품이다.

    (잠 4:8) 『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만일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오늘날 우리 성도님들 가운데 입다와 같은 깊은 상처와 쓰라린 아픔의 과거를 가지고 있는 분들이 계신가? 그렇다면 실망하지 말라. 사람도 환경도 원망하지도 말고 하나님의 섭리로 주어진 것임을 믿자. 결심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의 길에 정진하면 비천한 나도 존귀한 자가 되게 하실 것이다. 좋은 성품을 가지고 존귀한 인생을 살게 하실 것이다. 부디 상처와 아픔으로 뒤범벅된 인생의 전쟁터에서 믿음으로 치유받고 승리하시는 입다와 같은 믿음의 ‘큰 용사’가 다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기원한다.

    글작성 : 김세한 목자님

    글편집 : 박은우 형제

    https://youtu.be/7LdzDnn3EzU

  • [교회행사] 사랑이 넘치는 신도회 행사

    할렐루야~

    청주교회는 [마리아, 갈렙, 한나, 여호수아, 에스더, 루디아, 대학사청부] 이렇게 7개의 신도회가 있습니다.

    올해 많은 행사들이 있었지만 신도회별로 가졌던 뜻 깊은 시간들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마리아신도회]

    언제나 꽃과 같이 활기찬 모습으로 모든 성도 분들에게 본이 되어주시는 마리아 신도회. 올 봄에도 꽃을 구경하러 가셨지만, 꽃은 이 분들의 배경만 될 뿐이었죠. 하나님이 주신 시간 속에서 어떻게 신앙 생활을 하며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지 보여주시는 마리아회 감사합니다!

    [갈렙신도회]

    갈렙신도회는 얼마 전 첫 1박2일 신앙여행을 잘 다녀왔습니다. 청주, 안동, 남원교회의 장년 남신도회와 연합하여 진행한 행사였습니다. 성도 분 중에는 그동안 다른 교회를 방문한 적이 없어 이번 행사가 아주 좋은 시간이 되었다고 합니다. 코로나로 인해 모이기 어려웠던 시간으로 성도와 교회 간에 교제가 없던 중 이처럼 단비같은 소식과 행사를 이끌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한나신도회]

    한나 신도회는 주로 다과 모임을 가집니다. 소소한 모임 속에도 성도 간의 사랑을 느끼며 교제를 나누는 모습을 보여주시면서 건강한 신도회의 기준이 됩니다.

    [루디아신도회]

    ‘위로와 권면의 성도 바나바’라면 청주에는 ‘루디아 신도회’가 있습니다. 전도의 좋은 모습을 보여주며 사랑과 교제가 넘치는 루디아 신도회. 이번 심방을 통해서도 교제하며 신앙의 이야기 꽃을 피웠다고 하는데요, 이 꽃이 더욱 많이 피어 그 향기가 넘쳐흘러 많은 열매를 맺기를 소망합니다.

    [여호수아신도회]

    초복을 맞이하여 여호수아 신도회는 저녁식사 모임을 가졌습니다.

    막국수와 수육은 맛도 맛이었지만 오랜만에 신도회 형제들이 모두 함께 할 수 있어서 더 좋은 시간이었다고 하는데요, 더욱 특별한 것은 이번 활동에 올 봄 세례를 함께 받으신 세 분의 형제님도 함께 하신 것입니다. 사도교회의 ‘매일 모이기를 힘쓰며 떡을 뗀다’의 모습을 보여주고, 성도 서로의 사랑을 잘 보여주시는 것에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에스더신도회]

    아직 어린 자녀들이 있는 에스더신도회는 그동안 코로나로 갈 수 없었던 수련회를 1박 2일로 다녀왔습니다. 처음에는 아이들과 남편 생각에 걱정이 되었지만 그것도 잠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먹고 보드게임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합니다. 천안 교회 특별손님의 방문으로 더욱 풍성한 시간을 보냈다는데 주 안에서 이렇게 하나 되고 함께할 수 있는 것이 복이라는 것을 다시 깨달을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대학사청부]

    하나님의 은혜로 최근 대학사청부의 모임이 활발해져 다양한 활동으로 함께 교제하기 위해 고민하던 중 이번 여름에는 계곡으로 갔습니다. 계획했던 당일 날씨 예보가 좋지 않아 연기를 하려 했으나 기도하며 차선책을 준비하던 중 하나님께서 좋은 날씨를 주셔서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청주교회 백종원이신 김세한 목자님의 솜씨로 좋은 음식과 좋은 시간을 보내고 왔습니다.

     

    청주교회가 이처럼 코로나 속에서도 교재와 행사들을 이어 나갈 수 있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 모든 영광 돌려드립니다.

     

    글쓴이 : 박은우 형제

  • [복음 메시지]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면 (삿 4:1-22)

    [말씀 제목]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면 (삿 4:1-22)

    [설교자] 김세한 목자

    [설교일] 2022년 7월 2일(토) 안식일 예배

    구약 성경에서 사사시대는 어떤 시대였는가? 여러 가지 특징 중에 하나는 사사의 생존하는 동안에는 천하가 태평하다가 사사가 죽으면 고통이 다시 찾아오는 악순환의 시대였다. 이것은 오늘날 홀로서기하지 못하고 타인 의존적으로 신앙생활하는 연약한 성도들의 모습을 상징한다고 했다. 이끌어줄 사사가 있으면 태평하고 사사가 사라지면 평안이 사라지듯이 나를 이끌어 주는 성도가 있으면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고 나를 이끌어 줄 사람이 없으면 점점 교회도 신앙도 멀어지는 그런 상태의 신앙인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사사시대의 백성들이건 오늘날 성도들이건 선민을 향한 우리 하나님의 뜻이 있다.

    (엡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그 하나님의 뜻이란 바로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성장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 자신이나 교회의 신앙이 스스로 성장하지 못하고 정체된 상태에 있다면 어떻게 그 자리를 벗어나 장성한 분량에까지 성장할 수 있는지,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면 어떤 기적을 경험하고 복의 열매를 수확하는지 오늘은 여자 사사인 드보라와 헤벨의 아내 야엘의 활약상을 통해서 함께 생각하고 은혜를 나누는 시간을 가지고자 한다.

    첫째, 하나님 능력을 의지하면 약한 자도 승리할 수 있다.

    (삿 4:4-5) 『[4] 그 때에 랍비돗의 아내 여선지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는데 [5] 그는 에브라임 산지 라마와 벧엘 사이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 거하였고 이스라엘 자손은 그에게 나아가 재판을 받더라』

    성경을 보면 좋은 믿음을 가진 신앙인들 중에 여성이 많이 등장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의 지배를 벗어나 자유를 누리는 승리의 역사가 한 여자 사사를 통해서 이루어지게 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이 선민 이스라엘을 향한 일종의 풍자이다. 여자 사사 드보라를 당신의 도구로 쓰시면서 선민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아무리 고통 중에 있더라도 다른 신을 버리고 나만 온전히 의지한다면 이렇게 연약한 여자일지라도 승리하게 해주는데 왜 나를 온전히 의지하지 않느냐?”라는 하나님의 음성이다. 일종의 질책이 담겨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당하는 것은 바로 가나안 족속이 강하기 때문도 아니요, 군사와 무기가 열등하기 때문도 아니요, 다만 우상숭배에 빠져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오늘날 우리도 물질이 부족해서, 좋은 가정 출신이 아니어서, 사회적 지위와 권력이 없어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굳은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보편적으로 여자는 남자보다 유약하지만 남자보다 강한 경우가 있다. 신앙 안에서 남자 같은 강건한 믿음만 있다면 하나님은 유약한 여자라도 그를 높이 들어 쓰신다. 그리고 남자들도 이루지 못한 업적을 이루게 하신다. 이런 측면에서 신앙의 세계는 하나님 앞에 남자나 여자나 평등하다고 할 수 있다.

    둘째,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면 영광을 얻게 된다.

    (삿 4:8-9) 『[8] 바락이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내가 가려니와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나는 가지 않겠노라 [9] 가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가리라 그러나 네가 이제 가는 일로는 영광을 얻지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여인의 손에 파실 것임이니라 하고 드보라가 일어나 바락과 함께 게데스로 가니라』

    드보라의 명령을 들은 바락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일만 명을 데리고 다볼산으로 가라니까 “드보라 당신이 함께 간다면 나도 가고 당신이 함께 가지 않으면 안가겠다.”고 말한다. 마치 초등학교 1학년 어린 아이가 부모님이 함께 가면 학교 가고 함께 가지 않으면 안가겠다고 떼 쓰는 모습과 같다.

    우리는 때로 바락처럼 하나님께 조건부 순종을 내걸기도 한다. 내가 원하는 만큼 해주시면 순종하고 안 해주시면 순종하지 않겠다는 심산을 가진다. 순종의 정신이 사라지고 상거래의 정신이 남는다. 그런 삐딱한 믿음에는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복이 없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믿는 만큼 복 주신다. 믿음으로 행하는만큼 영광을 누리게 하신다. 드보라같이 대장부의 신앙을 나타내면 대장부의 상급을 주시고 바락같이 졸장부 신앙을 나타내면 영광에서 제외된다.

    셋째,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면 큰 승리를 경험한다.

    (삿 4:12-13) 『[12]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이 다볼 산에 오른 것을 혹이 시스라에게 고하매 [13] 시스라가 모든 병거 곧 철병거 구백 승과 자기와 함께 있는 온 군사를 이방 하로셋에서부터 기손 강으로 모은지라』

    철병거 900승을 소유한 야빈의 군대에 대행해서 싸운다는 것은 오늘날로 말하면 소총부대가 탱크부대를 상대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다. 그야말로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만큼 무모한 짓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예언을 믿고 실천했을 때 계란으로 바위를 깨뜨리는 것 같은 기적은 일어났다. 바락이 드보라의 명령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알고 납달리와 스불론의 일만 명을 모아 가나안 족속과 전쟁하려고 다볼산에 올랐던 것이다. 비록 불완전했지만 바락이 그 말씀을 믿었으니까 이렇게 행동한 것이다. 이런 정도의 믿음도 하나님은 칭찬해주신다. 그 믿음을 인정하신다는 증거는 히브리서 기자가 바락을 칭찬하고 있기 때문이다.

    (히 11:32)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무엇을 교훈하고 있는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전략이 승리를 가져온다. 그래서 여인이 전하든, 어린이가 전하든 그 말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포되는 것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만약 바락이 드보라의 말을 여자라고 무시했다면 이 기적은 없었다. 누가 전하든 하나님 말씀으로 받을 줄 아는 겸손이 있어야 한다.

    우리 삶의 승리는 겸손히 말씀에 순종하는데서 시작된다. 때로 번지점프하는 것처럼 무모해 보이지만 말씀이라는 동아줄을 믿고 뛰어내려야 한다. 실제 번지 점프에서는 때로 끊어지는 사고가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끊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말씀에 의지해서 자신을 맡길 줄 아는 성도가 되자. 그러면 인생이 평안하고 기대치 않은 축복의 열매들로 가득할 것이다.

    (시 37:5-6) 『[5]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6]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졸장부 믿음이 아니라 대장부 믿음으로 무장할 때 내 삶의 장애물인 철병거가 사라지고 영광을 누리는 꽃마차에 올라타게 될 것이다. 이런 믿음으로 승리하시고 천국의 영광에 참여하시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기원한다.

    글작성 : 김세한 목자님

    글편집 : 박은우 형제

     https://youtu.be/b6rzCKe8Wr0

  • 신약개론 2권 [요한계시록]

    신약개론 2권 [요한계시록]

    참예수교회 천안교회 안식일 저녁예배

    일시 : 2022. 01. 28

    장소 :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쌍용대로 43 진주빌딩  4층

    설교자 : 김세한 목자

    제목 : 신약개론 [요한계시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