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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도간증]김경라 자매님의 간증입니다.

    *이 글은 2022년 성령을 받으신 김경라 자매님의 회고록 입니다. 김경라 자매님이 직접 써주신  글을 토대로 작성되었습니다.*

     

    2022년 11월 5일 안식일 소모임 아비가일 방에서 기도 시간에 성령을 받았습니다.

    저는 60년 10월 9일생. 63세입니다.(2022년 기준) 14세 중 1때 처음 교회에 들어갔었고 49년만에 성령을 받았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뒤에서 애쓰시고 기도해 주신 에스더(제주)자매님, 문자(전주)자매님, 허진숙(천안교회 사모님), 정미식(서부교회), 이영숙언니(동부교회)자매님, 오점수언니(강남교회)자매님. 감사합니다.

    첫 교회 경험은 어린 시절 그때는 국민학교 시절에 교회를 따라갔어요. 국민학교 학생들이 참 많이 모였었고 특히 선생님들이 참 좋았던 하루의 경험이 교회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부모님께서 싫어하실걸 알기에 다신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여름방학 때 전북 전주로 전학을 갔어요. 엄마는 늘 환자였습니다. 심장병으로 중1 여름방학 때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는 군인이셨고 어린 남동생 2명이 있구요. 어느 날 새 엄마가 우리 집에 오신답니다.

    조건은 새 엄마 다니시는 교회에 함께 나가는 것! 저는 무척 기뻤습니다. 교회를 다닌다는 것이.꿈에 그리던 일이잖아요 .온 가족이 손에 손잡고 교회에 갔습니다. 교회 명칭은 참 예수 교회. 교회에 들어섰는데 일반 교회와 달랐습니다. 기도 시간에 전 너무 놀랬어요. 무서웠어요. 별 생각이 다 들더군요. 아니 그 많은 멋진 교회들도 많구만 하필 이상한 교회라니! 기가 막히고 두렵고 신기하고. 밖에 나가면 교회 얘기는 하기 싫었어요. 정말 창피 했어요. 이상한 교회니깐요.

    못 다니겠다고 반항도 못하겠고 그냥 놀러 다녔어요.  늘 가면 언니들 많고 오빠들 많고 친구들 많고 친구들이 좋아해주고 그런 기분으로 놀러 다니면서 세례도 받았습니다. 뭐가 뭔지 모르고 하라 하니깐 받았죠. 7년 정도 교복 시절을 전주 참 예수 교회에서 지냈어요. 그 시절 교복 학생 중에는 저만 성령을 받지 못했습니다. 밖에 나가서는  손가락질 받는 것이  싫어서 참 예수 교회 다닌다는 말을 안하고 살고 교회 안에서는 저만 성령을 못 받고..

    그때 기분은 부끄러웠고 두려웠습니다. 왜 난 성령을 못 받을까? 성령 받은 기분은 도대체 어떨까? 아마도 하나님 보시기에 난 앞으로 악을 저지를 사람인가보다. 난 죄가 참 많은 인간인가 하고 낙담하며 교회를 나가지 않았습니다.

    한 1, 2년 정도는 괴로움이 있더라구요. 시간이 흐를수록 교회 생활 안 하는 것이 편했습니다. 세상은 즐거움과 짜릿함이 많았구요 죄의식을 느끼지 않아도 되니 마음 편하고 교회 생각 안하고 사니 편했어요. 

    29세에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도 하고, 1남 1녀를 두었고 버젓한 남편 직장에 아주 그냥 남 부러울 게 없더라구요. 

    주부로써 친구들 좋아하고 자식들 사랑스럽게 키우면서 실컷 놀면서 살았습니다. 수영, 등산.. 한 이십년 정도 등산을 했나 봐요.

    산에 가면 가는 산 마다 절이 꼭 있어요. 같이 다니는 친구들 중에 절에 다니는 친구들이 있습니다.그 친구들은 절에 들어가서 절을 하고 기도를 드려요. 그 기도하는 모습이 뭔가 부럽더라구요. 신앙 생활 한다는게 부러웠어요. 일반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친구들도 부러웠어요. 신앙이 갖고 싶었어요.그래서 열심히 찾았어요. 참 예수 교회만 아니면 신앙 생활을 할 수 있겠다 생각했습니다.

    타인들 시선에 벗어난 이상한 신앙은 절대로 안 할 거라고 다짐, 다짐 또 다짐했습니다. 이단이니 날라리 교회이니 그런 집단에 속하고  싶지 않았어요. 정말이지 평범하고 소박한 신앙 하나 갖고 싶었어요.

    20년 전인지 25년 전인지 에스더 자매와 문자 자매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잘해주시는지 거부할 수 없는 친절함. 그래도 그건 제 마음속에 아니였답니다. 그때 서울로 이사하게 되었고 연락도 안 남기고 도망치듯 이사하였습니다. 얼마나 다행인지 그 분들을 피해 이사한 것이.

    시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천주교에서 장례를 치뤘습니다. 그때 참 고맙고 거룩했고 경건했고 좋았어요. 그래서 성당에 나갔어요. 근데 그 경건함이 우상숭배로 보여지잖아요.

    또 친한 친구들을 따라 여러 군데 장로 교회에 나갔습니다. 어머나, 근데 가르침이 들어 오질 않아요. 도덕 시간 같기도 하고 그냥 메아리로 그치는 설교 말씀. 아! 난 왜 이리고 못 됐을까? 친구들처럼 그냥 믿으면 안되나? 왜 자꾸 안 믿어질까?

    10년 전부터 바꾸었어요. 그래 절에 다니자. 절 신도가 되어보자. 내 성격과는 절이 잘 맞는 것 같아 이왕이면 명성 있는 절의 신도가 되면 좋겠다 해서 조계사에 나갔어요.

    언제 가는 줄도 모르고 그냥 마음 내키면 갔어요. 법당에 앉아서 다른 사람들 하는 거 따라하면서 누군가 나에게 말 걸어 오기 만을 기대하면서 .

    그런데 아무도 저에게 말 걸어 오질 않았어요. 그래 다른 절에 가보자. 봉은사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누군가 말을 걸면 바로 대답하리라.

    신도가 되고 싶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려고 기다렸지만 거기서도 저에게는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어요.

    나중에는 집 앞 소망 교회에 나가보자. 번듯한 교회이니 뭔가 다르겠지. 그러니 신도가  저리 많지. 참 무척 낯설었지만 웅장하고 세련된 건축물과 상류 사회 느낌이 물씬 풍기더라구요.

    그 안에 들어가 보니 여긴 연회장인가?  사교장인가? 과연 하나님은 계실까? 사람만 많네. 그런 느낌!

    난 정말 이방인 같았어요. 

    7년 전 용인 산골에 정말 소박한 너무도 소박한 아주 작은 집을 지어서 이사했답니다. 결혼해서 살면서 전부 다 내 멋대로 하고 살았습니다. 나이 들어 딱 하나 남편에게 양보하기로 했습니다.

    전원생활! 남편이 그리도 원하니 산골에서 살아주자. 나이도 들었고 한번 살아보자.

    전원생활 하면서 전 다(多) 종교인이 되었습니다. 교회에 갈 일이 있으면 오케이. 절에 갈 일이 있으면 오케이. 우상숭배도 오케이. 그래 이렇게 사는 것도 좋구만! 정하지 말고 이렇게 살자, 착하게만 살자! 빌고 싶으면 하나님이든 천주님이든 부처님이든 다 빌면 되지!

    압구정에 있었던 작은 사찰의 스님을 만나게 되었고 우리가 용인으로 이사할 때 즈음 그 절도 아산으로 터를 옮겼습니다. 딸을 데리고 그 곳까지 찾아가서 부적을 받아왔습니다. 아들 딸 지갑에 부적을 넣어서 갖고 다니고, 남편 컴퓨터 책상에 붙여 놓고, 딸 집에 부적을 붙여 놓고 뿐만 아니라 절에 있는 커다란 종에 우리 집 식구들 이름까지 전부 올리는 일까지 하였습니다. 남편 모르게 돈을 내가면서.

    소리 없는 악행을 계속 저지르고 살았습니다.그렇게 사는 것이 복 받는 일이라고 여겼으니까요. 그렇게 마구잡이식 종교를 이쪽저쪽에 두 발 담고 살았습니다.

    2년 전 쯤 허진숙(천안교회 사모님)에게 전화가 왔어요.친구가 너무 그립고 보고 싶고 만나고 싶다고. 오케이! 우리 집으로 와. 정미식 친구와 둘이 왔어요. 중학교 때 처음 갔던 전주 참 예수 교회 교복 친구들! 참 반갑고 좋았지만 얘들아, 나한테 교회 얘기전도 얘기는 절대 하지 말아라 내 남편도 기독교인들 안 좋아하고 나도 교회 얘기 할 거면 너희들 안 만날 거야.

    그래서 교회 얘기는 하지 않기로 하고 셋이서 모임을 만들었어요. “우리 과거 여행 하러 가자. 전주 가볼까?” “그래.”

    전주에 갔는데 다비다 집사님과 채길석 장로님과 문자 자매와 식사도 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또 한번은 “우리 그림 전시회 보러 가자.  영숙 언니 알지? 그 언니가 전시회 한다는데 가보자.””오케이!” 그래서 영숙 언니를 만났구요.

    근  40년 만에 만난 영숙 언니는 뭔가 귀한 분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교회 분들을 만나니 점수 언니가 궁금했어요. 영숙 언니가 저희 집에 놀러 오겠다고 연락이 왔어요. 점수 언니랑 같이 오겠다고.

    너무 반갑고 기다렸죠. 오는 날 연락이 왔어요. 점수 언니 부부, 영숙 언니 부부 네 분이서 출발 하셨답니다.

    너무 당황스러웠어요. “언니 우리 집은 산골에 작은 오두막이야. 우리 두 사람 움직이는 공간밖에 없어요” 했더니 “응, 알겠어 경라야! 우리 2인분 만큼만 움직이다가 올게!”

    어쩜 좋아. 너무 당황스러웠어요. 남편에게 어디서 아는 사이라고 말해야 하지? 정말 막막했지요. 여섯 명이서 작은 집에 옹기종기 앉아서 담소를 나누었고 전 심히 불편했습니다.

    그 날 가시면서 영숙 언니 남편 분께서 “가평에 초대하겠습니다.꼭 와주세요” 하고 헤어졌습니다.

    그날부터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어요. 왜 자꾸만 참 예수 교인들이 내 삶을 침범하는가?

    그날 밤부터 저는 코로나에 걸려 한 일주일 아팠어요. 이틀 뒤부터 남편도 코로나로 일주일 함께 아팠습니다. 그런데 네 분은 전혀 코로나로 아프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성경 책을 집어 들었습니다. 다락방으로 올라갔어요.

    “수지 아빠! 나 오늘부터 성경 책을 읽을거야. 이 성경책을 다 읽고 나서 내 신앙을 결정해야겠어. 이 책을 읽고도 아무런 느낌이 없으면 난 불교 신자가 될 거야!”. “잘해봐”

    그날 저녁부터 성경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시편부터 시작! 한 이틀 간은 재미 없었어요.

    참말로 성경 책처럼 재미없는 책이 있을까요? 어려운 수학,과학책 보다 어렵고 허구투성이 같고 믿어지지도 않는 이 책에 사람들은 왜 감명을 받을까?  의아하지만 참고 억지로 읽었습니다.

    며칠을 읽다 보니 신기한 일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어머나! 세상에! 믿어지는 거에요. 심장이 두근두근 계속 읽고만 싶은 거에요. 말씀이 소중하고  믿어지고 기도하게 만드는 거에요.

    그래서 주님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을 외우며 기도하기 시작했어요. 성경책을 읽으면서 내 죄를 고백하기 시작했어요. 다 잊고 있었던 과거의 잘 못 하나하나 기억나기 시작했어요. 죄라고 느끼지 못했던 것들도 죄라고 고백하기 시작했어요. 너무 많았어요. 생각나는 대로 다 고백했어요. 눈물이 나기 시작했어요. 살면서 이런 느낌 처음이었어요.

    영숙언니 연락이 왔습니다. 가평으로 초대한다고! 제 남편은 저 따라가는 모임 싫어해요. 안 갈 것 같았어요. “갈 거야?”하고 물어봤지요. “가지 뭐! “

    그래서 함께 또 가평에 갔어요. 영숙언니 부부, 점수언니 부부, 저희 부부. 허인숙언니, 허진숙, 정미숙 모두 모였어요.

    사도행전 6장 15절말씀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그날 모인 7분의 모습에서 스데반을 보는 것 같이 천사처럼 빛나 보이더라구요. 정말 잘 살아 온 아름다움이 영향력이 있고 빛나 보이는 겁니다. 제 스스로 제가 보잘 것 없고 부끄럽고 창피했습니다.

    주 하나님 안에서 특히 참 예수 교회 안에서 긴 여정을 성령의 사랑으로 살아오신 그 분들과 나와 내 주위 분들의 너무 다른 모습을 보면서 부끄러웠습니다.

    그리고 부러웠습니다.

    그분들의 아름다움에 제가 반하고 말았습니다.

    어느 날 점수 언니의 간곡한 메세지가 왔습니다, 영은회 하는데 꼭 한번만 와 봐. 초대할게. 참 다정하게 차분하게 그러면서도 강력하게 거부할 수 없는 초대였습니다.

    남편에게는 서울에서 점수 언니가 한번 만나자고 하네 한번 다녀올게 하고 다녀왔습니다.

    교회 다녀온 후로 여러 생각이 많았습니다.

    남편과 자식들에게,식구들에게,친구들에게 참 예수 교회 나간다는 말을 못 하겠더라구요.

    네이버 검색을 해보니 이단이라고 나오더라구요! 거기에서 기가 또 꺾이고 말았습니다. 그렇지! 난 이단을 나가면 절대 안돼. 그러나 인간적인 실수를 두 번이나 하지 말자 피하지 말고 만나서 사실을 얘기하고 고마운 건 고마운 거지만 난 참 예수 교인은 되고 싶지 않다고 얘기 하고 나오자.

    그렇게 양지에서 버스를 기다렸습니다. 줄이 길었는데 그 날은 두 대의 버스가 한, 두 사람만 태우고 가버렸어요. 그곳에 있던 20여명의 사람들이 화가 나서 난리가 났습니다.

    하늘의 뜻이구나! 집으로 다시 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검은색 차량이 남자 한 분을 태우고 출발하다가 문을 열더니 남부터미날 가실 분 세 분만 타세요 하는 거에요. 그 순간 제가 손을 번쩍 들고 차 안에 일착 했어요. 그 뒤에 저 따라서 두 명이 더 탔답니다. 염치고 체면이고 불안이고 생각이 하나도 안 나고 그냥 타보자는 마음이었습니다. 그 순간만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나요.

    감사해서요.

    전 참 소심하고 겁이 무척 많은 사람이에요. 모르는 차를 탄다는 것은 제 성격 상 있을 수 없는 상황이에요.

    남부터미날 도착, 지하철 6 정거장을 지나서 소모임 예배에 출석 했습니다.

    이제 예배 끝나면 점수 언니에게 다 얘기하고 저는 집에서 혼자 고요히 성경책 읽으면서 제 신앙 생활을 할 거라고 얘기만 하면 되었어요. 예배 시작하면서 점수 언니가 인도를  하시더라구요.

    “기도하고 시작하겠습니다.여기 나온  김경라 자매님 성령 받기 위해서 기도합시다.”

    깜짝 놀랬지요. 49년 동안 그냥 살아왔고 또 나에게 얼마나 상처를 남기려고 성령 받기 위해 기도 하자니 왜 이러시나! 큰일이네! 에고 모르겠다. 무릎 꿇고 않아서 두 손 모으고 가만히나 있자 하고 눈 감고 있었어요. 입 꾹 다물고 숨만 쉬고 있었어요.

    저는 분명히 눈을 꼭 감고 있는데 분명 눈을 감았고 안 뜨고 있는데 가슴에 황금 빛 큰 십자가가 있는 하얀 가운을 입고 어떤 분이 문을 열고 들어와서 제 왼쪽으로 걸어서 오시는 거에요.

    그때 순간 저는 ‘어머 내가 왜 이런 공상을 하고 있지? 이게 뭐지? 아니 근데 왜 뜨겁지? 아니 왜 자꾸 입술이 입안에서 움직이지? 입을 벌려야 하나?’

    그러면서 입을 벌리자 방언이 터지는 거에요. 그때 강력하게 느꼈습니다. 나 지금 성령 받고 있구나!

    그러면서 기쁨과 안도와 평안함의 눈물이 흘렀습니다.

    저는 그렇게 성령을 받았습니다.

    양지로 돌아와서 남편을 만났습니다. 만나자마자” 수지 아빠, 나 교회에 가서 성령을 받았어. 이건 기적이야” 하고 소리를 질렀어요.

    마당을 지키는 풍산개 백구에게 “백구야!엄마 성령 받았어.” 방안에 있는 푸들 강아지 두 마리에게 “대박아! 또복아! 엄마 성령 받았어.”

    그렇게 두 번 교회에 다녀 온 이야기를 남편에게 알리면서 새로운 신앙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축복은 제 남편과 함께 안식일 예배에 두 번 참석 했다는 것입니다.

    그 이후에도 성령의 체험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또 때가 되면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주 하나님 감사드리고 또 감사드리고 평생 감사드리며 살겠습니다. 기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아멘! 김경라 자매님의 신앙생활에 성도님들의 많은 기도와 관심 부탁드립니다.

  • [성도간증] 새 교회가 아닌  참 교회였습니다.

    [성도간증] 새 교회가 아닌 참 교회였습니다.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증하겠습니다. 지난 2022년 9월 17일 수령 확인을 받고 9월 18일 중생의 세례를 경험한 새내기 성도 박재한 입니다. 참교회 문화가 익숙지 않습니다. 옛날교회 다니던 습관이 남아있습니다. 널리 양해 바랍니다. 찬송하나 부르고 싶습니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 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종교적인 가정에서 출생하다

    저희 가정은 매우 종교적인 가정입니다. 특히 조부모님과 외조부모님들이 그랬습니다. 조부모님은 왜정 때부터 믿은 천리교 신자입니다. 식민지 시대를 지나 한국의 천리교를 재건하신 분들입니다. 저희 조부모님들은 천리교에서 아주 유명하신 분들입니다. 외조부모님들과 외가는 천주교 성당을 대구, 경북지역에 6개 정도를 자비로 지어서 헌납하실 정도로 대단하신 분들입니다.

    어릴적 천주교 신앙생활을 하다

    저를 포함하여 천주교 신앙이 4대째입니다. 저희 조카들에게는 5대째지요. 이런 종교적 배경속에서 자란 저는 어릴 때부터 종교에 대한 반감이나 거부감은 전혀 없었습니다. 종교적 문화 가운데에서 자연스럽게 융화되어서 사랑을 받았습니다. 믿음 생활을 한다거나 종교 생활을 한다는 것이 거북하거나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냥 자연히 뭔가를 믿어야 되고 빌어야 되고, 저희 할머니는 맨날 새벽에 물 떠놓고 기도했기 때문에… 그것만 보고 살아거든요. 그러다 보니 자연히 빌어야 된다, 사람은 빌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제 아버님은 조부모님의 신앙이 아닌 처가의 신앙을 받아들이셔서 열심있는 천주교인이었어요. 지금은 명목상의 신자이지만요. 그 덕분에 저도 유년시절을 천주교 유아 영세를 받아서 성당에서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개신교에 발을 디디다 

    그러던중 중학교때 ㅇㅇ교회가 장로회 통합측인데요. 노방전도단에 전도가 되어 처음으로 개신교에 발걸음을 하고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제2의 평양이라 불리우던 ㅇㅇ교회의 분위기상 열심있는 기도생활을 하였고 중학교 2학년때 처음으로 일반교회의 방언을 경험해 봤고, 병고침의 은사가 나타났었고, 귀신을 쫓아내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1992년도 휴거된다고 하던 다미선교회 아시죠? 휴거된다는 계시를 받은 소년중의 한명이 바로 저였습니다. 92년도에 휴거된다는 계시가 왔었거든요. 그래서 그걸로 인해 사회적으로 큰 무리를 일으켰지요. 각종 은사들이 나타나고 목이 터져라 통성기도도 하고 간구하고 부르짖는 기도생활을 하였지만 늘 마음이 갈급하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대한 갈급함

    성경을 보면 볼수록 궁금증은 많아져만 갔고, 목사님의 설교나 교사님들의 답변은 저의 질문에 명쾌한 답변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저 믿기만 하는 것이 덕목이고 미덕이란 답변뿐이었습니다. 그저 믿어라, 믿어야 된다! 믿어라, 그저 믿어….

    그랬는데 성경을 보니 마태복음 7장21~23절에

    21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내 아버지의 뜻이 뭡니까? 그것이 가장 궁금했어요. 그런데 목사님들이나 교사님들에게 물어보면 아무도 답변을 안해줬습니다. 그러다보니 성경을 찾아보기 시작하고 신령하다는 제단들을 다 다녀봤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찾기 위한 여정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때가 80년도, 90년도 였는데 다미선교회, 김천의 용문산 기도원, 용문산 기도원에서도 목이 터져라 기도하고 금식했습니다. 그 어린 나이에 금식을 밥먹듯이 했습니다. 밥먹듯이 철야하고 지금처럼 맑은 목 가져본 것이 얼마 안됩니다. 맨날 걸걸한 쇳소리였지요. 구원파, 신천지, 하나님의 교회, 통일교, 천부교 전도관, 여호와의 증인, 안식교, 승리제단, JMS, 증산도, 대순진리회, 불교, 천도교, 몰몬교, 장로교, 성결교, 침례교…. 하나님의 뜻이 있다! 신령하다! 하는 곳은 다 다녀봤습니다.

    말씀에 대한 갈급증은 계속 되다

    그러다보니까 성경을 180독 했습니다, 지식으로 알고 싶어서 한게 아니라 봐도 모르니까요. 봐도 또 봐야하고 봐도 또 봐야하고 이것 뒤져봐야 하고 저것 뒤져봐야하고 성경을 난도질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순복음교회는 계속 출석을 했습니다. 왜? 뜨겁게 기도는 해야 되니까요. 하나님께 빌어야 하니까요. 그 과정에서 말씀을 난도질하고 이것이 맞으면 저것이 틀리고 저것이 해결되면 이것이 다시 막히는 수도 없는 시행착오 가운데서, 한때는 예수님을 부정하는 지경까지 갔습니다. 예수님을 안믿었어요. 답도 없는 성경~ 내가 이렇게 까지 했는데 아직도 답이 없는 성경~ 목사님들이 아무것도 알려주는 것이 없는데 내가 믿어서 뭐하나, 이 생각이 들더라구요.

    침례교에 발을 디디다

    그러다가 칼빈주의 장로교회에서 개혁파 신앙을 따르는 침례교가 있어요. 침례교인데 칼빈주의를 따르는 침례교도들이 있어요. 그 사람들의 신학을 받아들이게 되었어요. 조나단 에드워즈 이런 신학이 있어요. ㅇㅇ동에 ㅇㅇ ㅇㅇ침례교회에 다시 정착을 하게 되었는데, 한구절은 맞고 한구절은 또 틀려요.

    안식교에 발을 디디다

    유튜브를 틀어놓고 헤매고 헤매고 또 헤매고 돌아다니다가 계시록, 다니엘 잘 풀이한다고 해서 안식교 설교를 2년 동안 듣다보니, 아! 이 말씀이 맞는거 같구나~ 어릴 때 안식일교회 다니던 생각이 나서 그 교회로 다시 가게 되었습니다. 안식일 지키고 계시록, 다니엘을 보게 된 것입니다. 여기가 가장 성경적이다! 가장 옳은 말씀이다! 마지막에 남은 교회다! 라는 확신을 가지고 안식일 교회에 있게 되었습니다. 안식일 교회 입교전에(코로나 전) 본교회도 몇 번 온 적이 있었습니다.

    새 교회를 찾기 위한 여정

    이러한 신앙생활은 새 교회를 찾기 위한 과정이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새 교회는 세상의 속된 교회와는 다른 오묘하고 성경적으로 참으로 정확한 단체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만족이 있을 리가 있겠습니까? 해아래 새 것이 없다고 했는데 새 것이 있겠습니까? 이게 맞으면 저게 틀리고 저게 맞으면 이게 틀리고, 다 끼워 맞추기 해놓은 것들이다 보니 맞을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안식교에서도 이건 맞지만 이건 또 아니고, 하! 그냥 눈감고 넘겨야 하나, 이젠 갈 때도 없는데……. 다 다녀봤고 전국에 있는 오만개 교회를 다 다닐수도 없잖아요. 그래서 고민을 하고 혼자 해결하고자 신학서적을 구해 가지고는… 제가 제 책장에 꽂힌 정독한 신학 서적이 890권이더라고요. 그러면서 성경을 난도질을 하는 겁니다. 그 덕분에 20독을 더 했지요. 구절구절 찾아가며 관주를 찾아가며 옛날 제가 가진 성경이 관주 성경입니다. 아시지요? 빨간 색칠 되어 있고 세로로 된 성경! 그 관주 구절을 다 일일이 찾아가면서 이게 그 말씀인가? 저게 그 말씀인가 그렇게 찾았습니다. 근데 안 되더라구요.

    새 교회가 아닌 참 교회에 발을 디디다

    그러던 중에 올 봄 영은회가 있게 되고 김성동 총무님이 저한테 문자를 보내 주셨어요. 그 영은회를 시작으로 본 교회에서 구도자의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의문이 있었습니다. 제가 과거에 배워왔던 여러 교리나 신학과 상충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세례를 결심하고 교회와 하나 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것은 오희도 목자님과의 대화중에 있었습니다. 시간상 자세히 말씀드리기 어렵겠지만 참예수교회는 사도시대로부터 이어져 온 참교회이며 누군가에 의해 새롭게 주창 되어진 교회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성경을 해석하는 거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본인의 증거! 곧 당신께서 우리 미약한 인간에게 보여주신 그 증거와 말씀을 믿고 그 약속을 믿는 것이 믿음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가죽 부대의 물이 다할때 만나주신 하나님

    이 깨달음이 온 계기는 바로 그 때 제가 읽기 시작한 창세기의 말씀이었습니다. 창세기 21:8~20에 가죽부대라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그 하갈이 가죽부대에 물이 있을때는 하나님을 찾지 않았어요. 내 안에 내 지식이 가득 할때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내 안에 있는 가죽부대! 내 지식의 가죽부대에 물이 다 떨어졌을 때, 그것을 초개같이 버렸을 때 하나님이 나를 만나주셨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 늦은 비 성령의 교회로 들어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를 결심케 되었고 그 약속을 의지하여 기도하고 주께서 선물로 성령을 부어주셔서 방언 말하게 되었음을 하나님과 교회 앞에 확실히 말씀드립니다.

    앞으로의 포부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저는 아직 어리고 아무것도 모르지만 감히 여러분께 드리고자 하는 말씀은 우리 주님은 거짓을 말하지 않는 분이시고 약속을 변개치 않는 분이십니다. 내 형편을 보지 말고 내 상황을 보지 말고 오직 주님의 약속 곧 성경 말씀만을 믿고 나아간다면 약속하신 모든 유업이 우리에게 임할 것이라 감히 확신하는 바입니다. 제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면 직장생활이나 다른 여러 일정들… 안식일에 부득이 나오지 못한다, 바빠서 못온다, 토요일날 일이 많아서 못 온다고 하는데 다 거짓말입니다. 사실, 오고 싶으면 새벽기도라도 왔다 가지요! 왜 못 옵니까? 제가 앞으로는 잘하겠습니다.(웃음) 그거 얘기하려고 실토하는 겁니다.(웃음) 사실 그렇잖습니까? 뭐가 바빠서? 직장이 어때서? 내가 뭐가 어때서? 라고 얘기하는데 정 안되면 새벽기도라도 왔다 갈수 있어요. 정 안되면 금요일 저녁 예배라도 왔다갈수 있죠. 근데 다들 핑계 대기가 좋거든요. 먹고 살아야 하는데 목자님도  월급 줄거 아닌데 오라고도 못하고 속은 터지지요. (웃음) 하여튼 우리 천국 가는 그날까지 하나님의 참 교회 안에서 함께 교제하며 걸어가며 승리하여 주의 나라에서 함께 찬송하기를 기도합니다. 간증 들어주신 형제 자매님들께 감사드리며 모든 영광 하나님께 돌립니다. 할렐루야!

  • [성도 간증] 믿음의 길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

    [성도 간증] 믿음의 길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

    * 이 간증은 2019년 8월 안양교회 열린 예배 시, 신정* 형제님이 하신 간증을 편집하여 올린 글입니다.

    믿음이 많이 부족하고 지금까지 하나님께 부족한 신앙생활을 한 사람이기 때문에 저 같은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간증할 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그러나 최근 2년간 저희 신앙생활에 많은 변화가 있어 이를 간증함으로 하나님께 회개의 기회를 삼고 앞으로 저의 신앙생활의 지표를 삼고자 간증을 드리기로 하였습니다.

    <대전 고등학교 시험에 떨어짐>

    먼저 저의 신앙 과정을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저는 59살로 대구에서 출생하였습니다. 저희 집안은 하나님을 믿는 가정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는 조상님께 열심히 제사 드렸고, 어머니는 아침마다 부엌에 물그릇을 떠다 놓고 누군가에게 열심히 비는 것을 항상 보았습니다. 저도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하나님을 모르고 밖에서 노는 것 밖에 몰랐습니다. 야구를 좋아해서 맨날 친구들과 까맣게 그을려가며 놀러만 다녔어요. 미래에 대해서 전혀 준비하지 않았고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집에서 공부한 기억은 없고 매일 학교 갈 때 가방에 도시락만 바꿔 갔어요. 어린 나이도 아닌 열여섯 살까지 저는 하나님도 모르고 인생에 대해서 전혀 준비하지 않는 영육 간에 정말 대책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중3 졸업할 때 이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공부도 안 하고 미래에 대한 준비 없이 살면 체격도 적고 힘도 없는 내 삶이 참 고단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어린 마음에 들었습니다. 40년 전 인터넷도 없고 정보도 거의 얻을 수 없었던 시절에 저는 대전에는 고등학교 입학할 때 학교별로 원서를 내고 시험을 치고 있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때 제가 살던 대구는 대도시이기 때문에 벌써 고교 평준화가 정착되어 일정 시험을 마치고 추첨으로 고등학교가 배정 되었습니다. 거기에 들어갈 수 있는 실력은 되지만 그 당시 어린 저에게 미래에 잘 살려면 시험을 쳐서 대전고등학교를 가야 내 미래가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생각이 어떻게 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제 생각일 뿐 대전은 대구하고 거리도 멀고 일가친척도 없는 전혀 낯선 곳이었습니다. 가정 형편도 대전에서 학습시킬 형편도 아니었고 무엇보다도 대전고등학교 갈 실력은 전혀 없는 상태였죠. 공부를 안했으니까요. 그런데 제가 간다고 하니까 아버지도 반대요, 담임 선생님도 반대요, 저의 마음을 이해해주고 도와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보통 때는 제가 고집을 부리지 않았는데 그때 대전 유학에 대해서는 고집을 안 꺾었어요. 계속 보내달라고 졸랐고 그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저는 대전고등학교 입시 원서를 내고 시험을 쳤어요. 불 보듯 뻔하게 제 실력대로 불합격했습니다. 대전고등학교 1차 시험, 또 후기 고등학교도 시험도 봤는데 모두 떨어졌어요. 그 열 여섯살 어린 나이에 대구 친구들은 다 고등학교를 갔는데 저는 학교도 못가고 집에서 그냥 놀았습니다.

    <참예수교회를 가게 됨>

    그때 시험에 떨어지고 대전에서 대구에 있는 집에 가야되는데 차비가 다 떨어졌습니다. 그때는 입시철이라 추운 겨울이었어요. 대구는 가야 되고 대전은 이방도시고 대전역 광장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걸인처럼 차비를 빌리려고 했어요. 지나가는 사람들 쫓아가면서 집에 가야 되는데 차비 좀 도와주라 하니까 아무도 안주더라고요. 시험 치려고 차고 온 손목시계가 생각이 나서 대전역 근방에 전당포를 찾아가 차비와 바꾸려 했지만 또 거절당했어요. 추운 날 참 힘들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대전에 시험 치러 와서 공부는 안하고 시내버스 타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참예수교회를 본 것이 생각이 났습니다. 누나가 한 명 있는데 대학 다닐 때 방학에 대구에 있는 참예수교회에 데리고 간 적이 몇 번 있었는데 낯선 대전에서 참예수교회를 보니 굉장히 반가웠었거든요. 그 기억이 나면서 참예수교회에 가서 돈을 빌려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하나님에 대해서, 참예수교회에 대해서 아무 생각도 없었습니다. 그때도 믿음이 생각나고 하나님 말씀이 생각 난 것이 아니라 그냥 돈을 빌리려고 갔습니다. 제가 길눈이 좋아 버스길 더듬어서 걸어갔어요. 그때 참예수교회는 보문산 밑에 있었어요. 차비를 얻으러 참예수교회를 찾아간 그때가 제 의지로 참예수교회를 간 첫 발걸음 이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들으러 간 것도 아니고 단지 돈을 얻으러 간 거였지요. 그때 배영도 장로님이 담임목자로 계셨습니다. 새까맣고 여드름 투성이인 전혀 모르는 어린 청년이 돈이 없어 차비 얻으러 왔다고 하니까 사택 작은 방에 들어오라고 하시며 밥도 차려주시고 차비도 주셨습니다. 그렇게 대구에 도착했고 아버지께서 참 대책 없는 사람이구나 하면서 무척 꾸중을 하셨습니다. 3, 4월까지 그냥 그렇게 집에서 놀아라 하시더니 자식이 그렇게 있으면 안 될 것 같은지 대전에서 재수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대전고등학교에 입학 그리고 참예수교회에서의 신앙생활>

    말씀드렸지만 저는 집에서 공부한 적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부터는 제가 바뀌었습니다. 참 신기하게도 공부가 재미있었고 참으로 열심히 했습니다. 그래서 대전 충남지역에서 중학생이면 가장 가고자 했던 대전고등학교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시험과목이 되게 많았어요. 대전고등학교에 합격했고 마침 학교가 대전교회하고 무척 가까웠습니다. 학교 주변에서 하숙을 해야 되기 때문에 그때부터 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돈 얻으러 갔던 학생이 이제 예배드리려 안식일에 학생 예배에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인 그때 저는 인생의 많은 죄가 생각이 났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며 구원을 받기를 간절히 바라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대전에서 세례를 받고 바로 목자님 안수할 때 성령도 받았습니다. 그 후 열심히 공부해서 졸업과 동시에 대구에 있는 약학대학에 입학하고 지금까지 약사로서 일하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 철없고 무모한 고집이 당시에는 고등학교 다 떨어지고 대전역 광장에서 집에 갈 차비를 얻으려고 구걸하는 참담한 모습이었지만 이 어려움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참된 참예수교회를 찾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만일 대구에 그냥 있었으면 저는 아직도 신앙생활을 안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많은 복을 주셨으나 신앙에 소홀한 삶>

    저는 사실 어떻게 해서 저의 삶이 이렇게 되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을 전혀 몰랐었을 사람이 대전이라는 곳에 오게 하셨고 또 세례, 성령을 받게 하셨고 죽은 영을 살려주셨습니다. 또 저 같이 세상을 헤쳐 갈 지혜와 능력이 부족한 사람에게 경제적으로 어려움 없이 살게 해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많은 복을 받고 육신적으로는 편안히 살았는데도 저는 교회를 위해서 영적인 형제자매님을 위해 충성된 인생을 살지 못했습니다. 제가 30대 초반까지는 약국을 운영했고, 50대 초반까지는 공무원으로 일했습니다. 그러나 제 삶을 살기에 급급하여 교회에 마음을 두지 않았습니다.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면서도 한편으로는 세상에서 처리할 일에 대해 생각을 했습니다. 또 교회의 어려운 일이나 행사에도 마음을 다하지 않았습니다. 저희 자녀들의 어린 시절 종교 교육도 소홀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저에게도 하나님께서는 계속 은혜를 내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섬기는 부인을 주셨습니다. 착한 아들과 딸을 주셨고요. 그리고 착한 아들과 딸에게 분에 넘치는 좋은 직장을 주셨습니다. 이런 복을 받을 당시에는 얼마 동안 하나님께 감사하다가도 곧 잊어버리고 세상일에 집중했습니다. 제가 건강했었는데 신경성 소화불량으로 한 2주간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저에게 하나님 말씀이 전과 다르게 마음에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얼마 못가서 또 믿음이 약해졌습니다. 교회에서 말씀하시는 ‘구원’이라는 말씀과 영원한 ‘천국’이라는 말씀이 참으로 멀리 느껴지고 가슴에 와 닿지 않았습니다. 믿음의 결국 영혼의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저와는 상관없는 것이라고 느끼며 하나님 은혜를 모르는 삶을 살았습니다. 세상적으로는 보통의 가정처럼 어려움 없이 살았으나 제 마음속은 기쁨이 없이 항상 공허했습니다.

    <아내의 암 진단, 그리고 신앙의 회복>

    이렇게 하나님 은혜를 가볍게 여기고 세상일에만 집중하던 어리석은 저에게 2년 전 2017년 7월에 제 인생에 최대의 아픈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믿음이 없는 우리 가족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 늘 간구하고, 어리석은 남편을 늘 이해하면서 어머니같이 사랑하며, 자녀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교육한 저희 아내가 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때 저에게 아픔과 두려움은 참으로 대단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혹시 먼저 아내가 하늘나라로 갈 수 있겠다. 그러면 우리 가정의 구원을 위해 누가 기도를 하지. 어리석은 이 자가 세상을 사는데 누가 위로하고 도와주고 지혜를 주지. 자녀들은 누구에게 안식을 얻지. 나는 누구하고 일상의 소소한 일들을 이야기하고 위로를 받지.’

    참으로 제 인생에 처음으로 이처럼 아픔과 고통을 느낀 적이 없었습니다. 이때 아내가 암 진단을 받고 한 말과 행동이 아직도 제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좀 더 살았으면 좋겠는데” 하고 눈물 한 방울 딱 흘리더니 소매에 눈물 닦고 그 이후에는 눈물을 흘린 흔적을 본 적이 아직까지 없습니다. 아내가 “지금까지 인생을 살면서 부모님에게나 가족에게나 친구들에게는 진짜 선한 진심을 대했고,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대해서는 후회가 없으나,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과 하나님과 교회에 봉사하는 것에 소홀한 것이 후회된다며 시간이 주어지는 데까지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고 싶고, 아들, 딸이 하나님께 경배하며 인생을 살아가도록 교육하지 못한 것이 후회되어 시간이 주어지는 데까지 아들, 딸의 구원을 위해 권면하며 살고 싶다”고 했습니다. 이 상황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것과 갈 수 있는 곳은 주님의 몸 된 교회밖에 없었습니다.

    그날 이후 저도 언젠가는 세상을 떠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며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 깊게 다가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날 이후 진짜 저는 많이 변했습니다. 제 마음 속 한 곳에 자리 잡고 있었던 아주 나쁜 마음이 있었습니다. 교회와 목자님, 성도님들이 그냥 불편했습니다. 교회에 대한 불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교회에서 선포된 하나님 말씀에 온전하게 집중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제 마음 한 곳에 자리 잡고 있던 교회에 대한 불만은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교회에서 선포되는 하나님 말씀에 온전히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목자님들과 성도님들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깨달아졌습니다. 또 매일 아침 일어나는 이날이 축복임을 깨달으며 지금 살고 있습니다. 이런 믿음은 제가 가지려고 해서 생긴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믿음의 길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

    2년간 참 많은 변화가 저에게 있었는데 믿음이라는 것이 사람이 다짐한다고 되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셔야 됨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아내의 암 진단이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자 엄중한 꾸중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녀이기에 자기 잘못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에 순종하여 천국 백성이 될 수 있도록 크신 은혜의 기회를 주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가벼이 여긴 저에게 주시는 엄중한 꾸중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지금 저희 가정은 아내가 암 진단을 받고 말한 것 같이 아내는 하나님 말씀 듣는 것에 최선을 다하고 교회를 참으로 섬기고 있다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딸도 하나님 말씀과 안양교회 성도님들의 선한 본으로 믿음이 조금씩 성장하고 있음을 느끼고 있습니다. 안양교회 성도님들의 선한 믿음이 딸에게도 믿음의 본이 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들 며느리도 아직은 안식일 예배드리는 수준이나 하나님의 은혜로 성도로 성장할 것을 간절히 기도드리고 있습니다.

    어린 청년 시절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던 저를 아무 연고 없는 대전으로 오게 하시고 고등학교 모두 떨어지는 아픔이 있었지만 저를 하나님의 참교회로 불러주는 계기가 되었고 참으로 부족한 저에게 많은 복을 주셨습니다. 그런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주님께서 주신 인생의 복과 자유함을 하나님께 드리지 못하고 오직 저의 교만으로 하나님께 충성하지 못한 삶을 살았는데도 하나님께서는 용서하시고 아내의 아픔을 통해서 다시 구원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성도들의 개인과 가정에 주시는 어려움이 단순히 고통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선한 구원의 말씀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안양교회 여호수아 회원님들이 세상 살기 힘든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충성하는 모습이 너무 아름답고 안양교회 아동부와 학생과 성도님들이 하나님께 열심을 다하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이것으로 간증 마칠까 합니다. 할렐루야!

  • [성도간증] 전주교회 이수규자매 간증

    [성도간증] 전주교회 이수규자매 간증

    할렐루야!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간증할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심으로 주께서 제게 일하신 날들을 돌아보며 주를 찬양하고 주의 행하심을 고백하는 시간을 갖게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교회에서는 간증의 자리가 많습니다. 전에는 간증을 하라고 하면 걱정이 앞섰습니다. 간증은 거창한 것을 말하는 시간이 아니라고 함에도 저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막연히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시지’라고 생각했지 제 일상을 어떻게 이루어 가시는지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간증을 하라고 말씀하시면 뭐부터 얘기해야 하나 고민하게 됩니다. 주께서 이루심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 하고’

    (행14:17)

    주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십니다. 제가 간증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을 때나 그 이후나 주님은 변함없이 일하셨습니다. 이를 알게 하심이, 주님의 손길을 선명히 느낄 수 있게 하심이 저의 간증입니다.

     

    저는 5년간 수험생활을 하고 올해 간호직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현재 보건소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오랜 시간 끝에 결국 합격했기 때문에 간증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셉은 형통한 사람의 대명사입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형통을 success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성공한 사람의 대명사라는 말이겠지요. 그런 요셉의 삶에서 success란 단어가 기록된 부분은 딱 두 군데 있습니다. 노예였을 때, 그리고 감옥에 있었을 때입니다. 요셉은 총리가 되었을 때에도 주님과 함께하는 형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굳이 노예와 죄수일 때 요셉을 형통한 자라고 기록한 건 성공이란 직업이나 직책에 있지 않고 삶은 살아가는 것, 하나님께서 내 삶을 이끄시는 과정임을 말씀해주시고자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

    (창39:2-3)

    성공이란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것임을 고백합니다. 어떻게 합격했는지가 아닌 5년간 주께서 저와 함께하신 발자취를 나누고자 합니다.

     

    직업으로 간호직 공무원을 선택하게 된 배경은 단순합니다. 병원은 대개 3교대를 하는데 공무원을 하면 안식일을 잘 지킬 수 있을거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1,2년 정도만 공부하면 될 거라 생각했던 수험기간은 점점 길어졌고 공부를 하는 동안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병원에 다니면서도 안식일을 지킬 수 있는 길이 생각보다 많이 열려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병원에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공무원을 하게 되면 학점이 필요하지 않아 학점 관리를 하지 않았었고 경력 단절인 상태로 병원을 지원하게 되면 제가 만족할 만한 곳에 취업을 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서였습니다. 사실상 저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최우선이 아니라 제가 원하는 모습으로 예배를 드리고 싶었던 것이었습니다. 겉모습으로는 예배를 드리고자 함이었지만 속마음은 제 욕심이 가득하였습니다.

     

    그렇게 수험기간은 더욱 길어지고 4년 차가 되었을 때 필기에 합격하고 면접에 떨어지는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1배수 합격이지만 동점자가 발생하였고 제가 그 동점자였던 것입니다. 면접에 떨어질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습니다. 오히려 동점자인 다른 사람을 안타깝게 생각하였었습니다. 그렇게 면접에서 떨어지고 나니 이 길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고 싶지 않던 제 속마음을 마주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다다른 것입니다. 공부를 계속 해야하는 지 병원에 가야할지 하는 선택의 기로에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선택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으로 하나님께서 정말 내게 원하시는 길이 무엇일지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기도 끝에 병원이 아닌 계속 학업을 하는 것으로 결정이 되었습니다. 욕심으로 시작했던 공부가 끝이나고 주님이 이끄시는 길대로 가겠다는 마음으로 공부를 다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5년차 수험이 시작되었고 그 해에 합격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선택해야 하는 것은 병원과 공부에 관한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내려놓음이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중에 주님을 선택하느냐를 물어보신 거였습니다. 애써 외면했지만 병원 스펙을 따졌고,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써왔음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주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에 가치를 두었던 것을 회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5년간 공부를 하면서 정말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습니다. 같은 공부를 하였지만 늘 새로운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여기에는 다 적지 못할 만큼 주님의 도우심과 채우심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5년의 세월을 통해 얻은 것은 합격이 아니라 세상 문화에 젖어 있지만 물들어 있는지조차 몰랐던 저를 일깨워 변화시켜 주신 것입니다. 5년간의 시절이 헛되이 흘러가게 두시지 않으시고 값진 시간으로 만들어 주심이 참 놀랍고 감사합니다. 제가 합격을 하지 않았더라도 저는 같은 고백을 하였을 것입니다. 제가 합격을 하게 된 것은 그동안 공부해 놓은 것이 있으니 합격할 때가 돼서 합격한 것도 아니고 사역을 열심히 해서도 아닙니다. 주께서 정하신 때가 이 때였음임을 압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합격을 주실 수도 있으시고 불합격을 주실 수도 있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했던 모든 전쟁의 승리와 패함이 그들의 능력이나 칼과 창에 있지 않았듯 수험에 있어서도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합격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단지 하루를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 중 일부임을 보게 됩니다. 효율성을 중요시하는 제게 하나님 나라에서는 방법이 중요한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놀랍게도 모든 것은 영성과 연관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하루를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옳은 것인지, 그리스도인에게 성공의 정의가 무엇인지 마음으로 깨달을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하심에 감사드립니다.

     

    끝으로 공부를 하면서 사역에 힘쓰는 동역자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공부가 사역을 하지 않는 핑계가 되지 않고, 사역이 공부를 하지 않는 핑계가 되지 않길 원합니다. 지금까지 잘해왔다고, 동역자로 있어 주심에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합니다.

     

    부족했고 여전히 부족한 저를 앞으로도 이끄실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주신 앞으로의 시간들이 더 가치 있고 빛날 수 있길 노력하며 기도합니다. 고난 중에 있을때에도 평안할 때에도 언제나 선하신 신실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제게 주신 기쁨은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여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합3:17-18)

  • [성도간증] 인도하시는 하나님 (천안교회 김기석 형제)

    [성도간증] 인도하시는 하나님 (천안교회 김기석 형제)

    할렐루야!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증하겠습니다.

     저는 모태신앙으로 믿음의 가정 안에서 자라왔습니다. 현재 저는 서울 송파구에서 군 복무를 하고 있으며  입대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했던 작은 간증을 하겠습니다.

     평소에 근심·걱정이 많은 저는 고등학생 때부터 군대가 큰 과제로 느껴졌습니다.  그곳에서는 가족을 떠나 나 홀로 신앙을 지켜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중 의경으로 군 복무를 한 교회 형들이 주 1회 외출을 나와 교회에서 안식일을 지키는 모습을 보며 나도 무조건 의경을 가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심지어 의경은 2달마다  3박 4일씩 외박을 나올 수 있었기때문에 교회 행사에 참여하기도 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의무경찰은 경쟁률도 높을뿐더러 곧 폐지를 앞두고 있었기에 기회가 얼마 남지 않았던 때였습니다. 저는 의경 시험을 기도 제목으로 삼았고, 제 사정을 아시던 몇몇 성도님들께서도 함께 기도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저는 신체검사를 받자마자  바로 의경 시험을 신청하게 되었습니다.

     2020년 10월, 저는 첫시험에서 팔굽혀펴기 2개를 남기고 철푸덕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조금만 준비하면 통과하는 체력시험이었기에 다시 한번 제 연약한 몸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포기하지 않고 12월 시험에 바로 재도전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팔굽혀펴기와  윗몸일으키기를 통과했지만, 가장 쉬운 제자리 멀리뛰기에서 선을 밟아 실격을 당하였습니다.  집에 돌아오면서 ‘의경은 내가 갈 곳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의 기도를 돌아 보면서 하나님의 뜻보다는 나의 욕심에 치우쳐서 기도하지는 않았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회에서 한 성도분은  ‘꼭 의경을 가지 않아도 된다. 육군을 가도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다.’ 라는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저는 그 말이 당연한 것은 알았지만 교회에 자주 나오고 싶다는 생각을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 당시에 저의  전도대상자인 친구도 제 권유로 같이 시험을 봤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는 체력까지 모두 통과하였고, 시험 권유를 한 제가 오히려 선을 밟고 탈락하자 그 친구는 저를 놀렸습니다. 그 친구는 중학생 때 몇번 우리 교회에 놀러 왔던 친구인데, 고등학교 올라와서는 교회를 다니는 저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코로나 이후로 교회를 가는 저를 더욱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이 친구가 싫어하는 것을 알면서도 틈이 날 때마다 같이 교회 가자고 농담반  진담반으로 얘기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 친구는 교회는 담배처럼 중독된다는 말을 하면서 교회를 다니면 자기도 모르게 해로워진다고 조롱을 하였습니다. 이 친구는 체력까지 통과한 상태에서 떨어진 저에게 카톡으로 ‘이 채팅방에서 의경 합격자 단 한 명’이라는 공지를 올렸습니다.  그러나 그 친구도 결국 추첨에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3번째 시험을 치를까 고민하던 찰나에 마지막 심정으로 시험을 보기로 했습니다.  그 시험에서는 체력시험 모두 통과하였고, 다음주에 나오는 추첨결과만 기다리는 상황이었습니다. 추첨결과 날, 아침과 점심을 금식하며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다면  의경에 합격하게 해달라는 기도였습니다.  만약 붙게 된다면 의경에서 나오는 휴가를 모두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기도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의 부르짖음에 긍휼하심으로 응답하셨고, 감사하게도 의경 막바지에 합격할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당시 400명이 지원하였고, 추첨에서 68명 중 7명이 뽑혔습니다. 사실 저는 추첨을 한 번밖에 안 했기에 거의 한 번에 통과한 거나 다름없었습니다. 이 기쁜 소식을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던 중에 그 친구에게도 알리고자 카톡에 들어 갔습니다. 그 친구에게 합격소식을 알리다가 상단에 떠 있는 공지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 공지처럼 제가 단 한 명의 합격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때 하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과 달리 자신의 자녀를 인도해 주시고 보호해 주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상황에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모르게 선으로 악을 갚으라는 성경구절이 떠올랐었습니다. 저를 긍휼히 여겨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군생활이 약 5개월이 남은 지금도 하나님과 맺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성도님들께서도 아시다시피 저는 지금까지 나왔던 휴가들 모두 지교회와 총회 행사에 참여해왔습니다.  대학부 영은회, 학생부 영은회, 천안교회 영은회, 대학부 비전여행 등 너무 자주 나오는 저를 보면서 성도님들은 항상 우스갯소리로 전역했냐고 물어보십니다. 지금도 저의 캘린더에는 교회 행사가 메모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로 믿습니다. 남은 군생활 중에도 세상 문화에 휩쓸리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며 무사 전역하기를 소망합니다. 감사주!

  • [성도간증] 천안교회 서민선 형제님 간증입니다

    [성도간증] 천안교회 서민선 형제님 간증입니다

    [성도간증]

     

    할렐루야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증하겠습니다

     

    저는 현재 1971년 3월 14일 충남 아산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느덧 신앙 생할을 시작하지도 13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성령의 충만함 하나로 시작한 신앙생활은 몇 번이나 세상과 주님 품을 오고가며 불안정한 신앙생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오래 참으심과 사랑으로 나를 돌봐 주시고 주의 길로

    인도해 주셨으니 그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출석한 기간 보다 세상에서 하나님을 등지고 지냈던 시간이 더 길었기에 다시

    믿음이 회복하기란 쉬운 건 아니었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 해 주시고 조금씩 조금씩 변해가는 내 모습에 나 조차도 신기하기도 하고 감사했습니다

    아직도 나의 옛 모습이 불쑥불쑥 튀어 나올 때도 있지만 차차 변해가겠지요

    그러길 바라며 짧은 간증 하나하겠습니다

     

    교회를 다시 출석하고 나서 1년후쯤에 하던 일을 그만 두고 직장을 알아보고 있던 중

    먼저 직장보다 연봉이 세배나 많은 곳을 찿았습니다

    하지만 그곳은 안식일을 온전히 지킬 수 없는 곳이었지만 연봉의 유혹에 그 일을

    하기로 마음먹고 일을 진행했습니다

    몇몇 성도님들은 내 이야기를 듣고 걱정을 하셨지만 내 의견을 존중해 주셨습니다

    내 생각에는 ‘시간 나는대로 예배에 참석 하면되지’란 자기 합리화를 하며 일을

    시작했습니다

    새로 시작한 그 일은 오전6시부터 저녁 6시까지, 저녁6시부터 다음날 오전6시까지

    12시간 맞교대로 일하며 토요일 일요일 명절도 없이 24시간 연속 돌아가며

    바쁠때는 14~15시간 까지 일해야 하는 곳 이었습니다

    그래도 그곳을 서로 오겠다고 알음알음 소문난 곳이었습니다

    막상 일을 시작하기는 하였지만 내 마음도 편치는 않았습니다

    비슷한 실수를 반복하는 내 자신이 너무나 초라하고 한없이 작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금전적인 유혹이 더욱 컸기에 일을 그만두기란 쉬운게 아니었습니다

    첫 출근을 하여 바쁘게 일할 때는 괜찮았지만 잠시 쉬는 순간에는 내 마음속 깊은

    심중에서 하나님과 안식일을 찾는 외침이 들려왔습니다.

    하지만 나의 주장이 더 강하였기에 애써 외면하면서 일을 했습니다

    하루 이틀 그렇게 일주일쯤 지날 무렵 피곤한 몸을 이끌고 퇴근을 하는데 문득 예수님을 세번 부인했던 베드로가 생각나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나 또한 ‘이번이 몇 번째의 잘못된 선택이었지?’란 생각이 드는 순간

    ‘안되겠다 돌아가자 지금 이라도 늦지 않았다’란 마음에 일을 더 이상 진행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다음날 회사에 가서 개인적인 사정으로 일을 그만두겠다고 통보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오는 차안에서 많은 회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돌이켜보면

    ‘세상은 항상 권세 잡은 자의 달콤한 유혹이 넘쳐나며 마귀는 성도의 가장 연약한 부분을 파고들며 유혹할 뿐 넘어지는 것은 본인 스스로다‘란 목자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하지만 막상 그 상황이 되면 알면서도 쉽게 빠져 나오기란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또한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것이 내 마음에 평강이 찾아온다는 것도 새삼 느꼈습니다 세상에서 욕심 부리지 않고, 주신 것에 감사를 하고 있는 것에 만족해 하며 사는 삶이

    이또한 하나님 은혜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쉽지만은 않지만 그래도 주님을 의지하고 말씀과 성도들과의 교제와 권면을 통해서 차차 좋아질거라 믿습니다.

    또한 헛되고 헛된 것을 좇는 자가 아닌 참되고 진실된 것을 좇는 삶이 되도록 기도에

    더욱 힘써야 할 것 같습니다

    성도님들 모두 항상 주안에서 승리하는 삶이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서민선 형제 간증 유튜브 영상

  • [성도간증] 형제라 부르심을 받은 은혜 _최경자 자매님

     나의 어릴 적 시절이 문득 떠오를 때면 ‘그때는 왜 그랬을까?’ 하며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올 때가 있다. 

     내가 국민(초등)학교 다니던 시절에는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순박한 얼굴을 하고 감히 선생님 얼굴을 바로 쳐다볼 수도, 목소리를 크게 낼 수도 없이 부끄러움이 많았던 것 같다. 그런데 그런 아이들이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는 길에 혹여 시비가 붙으면 순박한 얼굴은 어디로 가고 사나운 표정과 험악한 말로 자기 본성을 나타내었다. 그 누구도 상대에게 지지 않기 위해 더 험악하고 더 센 욕을 찾아 날리며 급기야는 몸싸움까지 하게 되었는데 그때는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한번은 우리 동네 친구들과 다른 동네 친구들이 서로 집단 싸움을 했던 기억이 있는데 내 생애 그렇게 죽기 살기로 열심히 싸워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어쩌자고 그렇게 온 힘을 다해 싸웠는지 지금 생각하면 헛웃음만 나온다. 그렇게 뒹굴며 자라 몸집이 커지고 중학생이 되니 자연스럽게 더 이상 몸싸움은 하지 않게 되었다. 

     내가 다니던 중학교는 집에서 4km쯤 떨어져 있는 삼계면 소재지에 있는 곳이었다. 삼계에는 우리 동네엔 없는 점빵(소매점)도 두 개나 있고, 우체국도, 농협도, 교회도 두 개나 있는 곳이었다. 학교도 국민(초등)학교보다 크고 선생님도, 학생도 많은 곳이라 조그만 동네에서 올라온 나로서는 주눅이 들만도 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주눅이 들기는 커녕 ‘누군가 시비를 걸기만 걸어봐라 가만 안 놔둘테다’라는 마음으로 다녔던 것 같다. ‘무식이 용감하다’라는 말이 그 당시 나에게 딱 들어맞는 말이었다. 당차고 무식한 나에게 친구들은 오락부장을 시켜주고 학교에서는 규율부장을 시켜주어 거침없는 학교생활을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찔하고 얼굴이 저절로 붉어진다. 

     그러던 어느 날 2학년쯤 되었을 때 체육시간에 운동장 귀퉁이에서 풀을 뽑던 친구들이 패가 갈리어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나는 이 친구들이 무슨 다툼을 하는지 궁굼해 슬쩍 옆으로 다가가 엿들어 보았다. 가만히 들어보니 그야말로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옥신각신 다투는 것이 어이가 없었다. 삼계에는 교회가 딱 두 곳이 있었는데 하나는 삼계에 들어서는 초입에 참예수교회가, 하나는 삼계가 끝나는 지점에 장로교회가 있었다. 그러니까 참예수교회에 다니는 친구들 패와 장로교회에 다니는 친구들 패가 서로 옥신각신 다투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는 어이가 없고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같은 하나님을 가지고 교회가 갈리어 다투는 것이 마치 내가 초등학생 때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목숨 걸고 싸우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말려 보겠다는 생각으로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그리고 그날 어느 교회가 옳은지 각 교회를 한번씩 가보겠다는 약속을 하고 싸움을 말렸던 기억이 난다. 

     약속대로 친구들을 따라 참예수교회에 먼저 가게 되었는데 그 날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나는 처음부터 ‘참예수교회’라는 이름이 너무 마음에 들고 좋았다. 지금도 이 이름이 더할 나위 없이 좋고 자랑스럽지만 말이다. 그러나 교회이름이 좋은 것과 반대로 예배당에 들어서자마자 이상하게 주눅이 들기 시작했다. 예배시간 내내 내가 있을 곳이 아닌 것 같았고, 모두 깨끗하고, 순수하고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 가운데 나만 더럽고, 추하고, 너덜너덜한 옷을 입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뿐만 아니라 예배를 마치고 방언기도를 하는 걸 보고 너무 놀라 슬그머니 도망가야할지, 나도 따라서 흉내 내야할지 기도 시간 내내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다행히 방언기도에 대한 설명을 듣고 이상한 의심이 바로 사라졌던 기억도 생생하다. 그 후로 학교에서 맨날 만나던 교회 친구들이 이제는 달리 보였다. 같이 자란 동네 친구들보다 오히려 교회 친구들 앞에서의 행동이 왠지 더 조심스러웠다. 물론 참예수교회를 한번 발걸음 한 뒤로 ‘여기가 맞다’라는 뭔지 모를 막연한 느낌에 장로교회는 가볼 필요도 없겠다는 생각에 장로교회는 가지 않았다. 

     그렇게 삼계교회를 뭣도 모르고 다니다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전주로 고등학교를 가게 되었다. 나는 참예수교회는 삼계에만 있다는 생각에 교회를 찾아서 다닐 생각은 전혀 하지도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나의 친오빠가 “삼계에서 네가 다니던 참예수교회가 여기 전주에도 있더라” 라고 얘기해주었다. 나는 농담하지 말라고, 믿지 않겠다고 했는데 오빠가 집에서 가까우니 걸어가서 확인해 보라고 얘기했다. 오빠 말을 듣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확인해보니 정말 참예수교회가 집과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어찌나 반갑고 좋던지 당장에 교회에 들어가 보았다. 그 후로 전주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어느 샌가 교회와 나와의 이질감이 사라지고, 나의 객기도 사라지면서 고등학교는 정말 조용히 있는 듯 없는 듯 다녔던 것 같다.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히2:11-12)’

     교회에 들어오니 교회에서는 남자를 형제라, 여자를 자매라 칭하며 불러 주었는데 처음에는 얼마나 형제/자매라는 호칭이 어색 했던지 그냥 이름을 불러주거나 누나/언니/동생으로 불러 주는 것이 친근감 있고 좋았다. 그러나 말씀을 깨닫게 되고 부터는 형제라 칭함 받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좋은지 눈물이 날 지경이다. 맨 처음 참예수교회에 들어섰을 때 나는 나의 더럽고 누추한 느낌에 한없이 부끄러워 주눅 들어 있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누추하기 그지없던 내가, 무식하기 그지없던 내가 어찌 감히 주님 앞에 설 수 있을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를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신다는 그 말씀이 나에게 얼마나 큰 은혜로 다가왔는지 모른다. 나 같은 사람을 형제라 불러주시는 예수님께 감사하며, 그러한 주님께 누가 되지 않도록 항상 나 자신을 살피며 말씀에 비추어 살도록 힘써 싸울 것이다.  

  • 참 하나님을 찾은 서순애 모매님

    참 하나님을 찾은 서순애 모매님

    발걸음을 인도하심

    저는 1954년 김제에서 태어난 서순애입니다. 30여년동안 천안 구성동에서 살고 있으며 현재 참예수교회 천안교회를 다니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이 교회에 다니게된 동기와 하나님께서 제 병을 고쳐주신 것을 증거하고자합니다. 저를 이 자리에 있도록 이끄신 주님의 인도와 능력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14살정도부터 부모님을 따라 장로교회를 다녔습니다. 어머님부터 가진 처음 신앙을 버리고 새로운 교회로 옮길줄은 한번도 생각한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다니던 중 집안에 큰 시련이 찾아와 너무 견디기 힘든 고통 속에 있을 때 오귀은 사모님을 통해 참예수교회를 알게되었습니다. 한번은 교회에서 영은회를 한다기에 자리만 채워달라는 사모님의 권유로 당시 5살짜리 손자인 성찬이를 데리고 구경을 갔었습니다. 그런데 처음 참예수교회에 갔을 때 그곳 교인들의 따뜻한 인사와 관심에 알 수 없는 기쁨이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스스로 다짐하기를 참예수교회는 영은회 할때만 가고 절대로 교회는 옮길 수 없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이 끌렸습니다. 더군다나 우리 손자 성찬이가 갑자기 이제는 참예수교회가 아니면 안가겠다고 떼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한번은 택시를 타고 다니던 교회를 가는데 성찬이가 기사님에게 참예수교회 쪽으로 가달라고 길까지 알려주며 소리질러 재촉했습니다. 그런 손자의 모습을 보고 제 마음이 많이 복잡하였습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것이 우리 주님이 제 마음을 움직이게 하신 놀라운 역사라고 생각합니다.
     

    성령을 받고 거듭남

    성찬이 때문에 참예수교회를 계속다니면서 마음에 많은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적은 성도들의 찬양이지만 듣고 있노라면 왠지모를 마음의 감동이 밀려들어 스스로 많은 눈물을 흘리고 있는 나 자신을 보게되었습니다. 특히 저는 이전에 성경말씀도 나름대로 많이 통독하고 신앙생활도 열심히 한다고 했지만 참예수교회에서 말씀을 듣고 공부하면서 새로운 깨달음을 많이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부족한 저와 저희 가족을 받아주신다면 이곳에서 몸을 담고 열심히 헌신하며 살겠노라고 진심으로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마음을 가진지 오래지않아 성령을 받고 방언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린이들도 방언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도 간절한 마음으로 받기 원했던 것입니다. 성령을 받을 때 마음에 큰 성령의 감동과 뜨거움이 느껴지며 하염없는 눈물이 나왔습니다. 그때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신앙생활을 할지 모르겠지만 주님 속이지 않고 주님 뜻대로 살고 싶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나서 성경말씀대로 세례를 받고 온전히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심장 혈관이 막힘

    성령을 받고 약 1년이 되었을 2012년 10월말쯤이었습니다. 심장에 부정맥 증세가 있어서 순청향 병원에 가서 검사해보니 심장 한 곳이 완전히 심하게 막혀서 급하게 시술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의사가 말했습니다. 12월을 넘겨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그런상황에서 저는 하나님께 계속 기도하며 날짜를 미루어 왔습니다. 이제 나는 죽어도 주님의 자녀, 살아도 주님의 자녀이니 주님께서 책임져 주시겠지 생각하며 주님께 맡기고 자주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목자님의 말씀을 듣고 안수기도를 받고나면 늘 마음의 평안함이 찾아왔습니다.
    미루고 미루다 계속적인 증상과 가족들의 독촉등으로 시술을 받기로 하였습니다. 2013년 3월 27일 입원을 하여 다음날 시술하기로 했습니다. 막상 입원을 하니 저도 사람인지라 불안한 마음과 복잡한 생각이 마음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교회에서는 모든 성도님들이 합심해서 기도해주시고 또 목자님이 저녁 시간에 병문안을 오셔서 위로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저를 위해서 안수기도를 해주실 때 온 몸이 사정없이 떨리면서 하나님께서 함께 계심을 느끼며 감동 또 감동했습니다. 그때 그 느낌은 어떻게 표현할 수없는 벅찬 감격이었습니다.

    기적이 일어남

    다음날 오후 1시에 수술에 들어가는데 간호사가 곁에 있던 제 아들에게 하는 말이 이 시술은 위험하니 어머님께 잘 격려해주시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을 때 또 눈물이 많이 났습니다. 그러면서 수술대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수술을 앞두고 하나님께 기도가 나왔습니다. ‘주님, 저 두렵지 않아요. 저의 생명이 다 되었다면 어쩔수없겠지만 조금더 넉넉하게 배려해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주님, 그동안 저를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 사랑해요’ 하며 울며 떨리는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이제 마지막 다시 점검을 하신다는 말씀을 하시고 시작되었습니다. 잠시동안 요란한 소리가 나고 마취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잠시후 담당 교수님이 급히 저를 깨웠습니다. “서순애 환자 눈을 떠보세요.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네요. 막혔던 혈관도 뚤렸고 예전보다 더 깨끗하고 강심장이 되었네요” 의사도 믿기지 않는듯 놀라며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계신가보다고, 당신의 하나님이 고쳐주셨다고 말하며 축하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보며 부모님께 잘 해드리라고 조언해 주셨습니다.
    저는 이렇게 큰 기적을 체험함으로 제가 찾은 하나님을 확신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역시 하나님은 우주를 주관하시고 섬세하게 당신의 자녀들을 돌보신다는 믿음을 굳세게 했습니다. 저의 믿음을 정금처럼 연단하신 하나님. 주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믿음으로 실천하는 좋은 자녀로 남은 삶을 살겠노라고 약속했습니다.
    지금은 성찬이 뿐만아니라 제 며느리도 함께 참예수교회에 다니며 날마다 인생의 참된 의미를 발견하며 즐겁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립니다. 아멘

    현재 며느님 이원선자매, 손자 성찬이와 보미, 모두 예수님 이름으로 세례 받고 서순애 자매님과 함께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들들의 구원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성도여러분의 사랑의 관심과 기도 부탁드립니다.  하나님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 나를 만져주신 하나님

    나를 만져주신 하나님

    간증자 Pastor Vuthy (현 미국 참예수교회 목자)

    나는 캄보디아에서 태어나 9살 때인 1981년에 미국에 왔다. 1975년에서 1979년까지 캄보디아에서는 대량학살이 있었다.

    약 6백만명의 사람들 중 350만명이 그 기간에 죽음을 당했다. 매일같이 사람들은 배고픔과 처형으로 인하여 죽어갔다. 심지어 나의 친척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까지도 ….

    난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신은 대체 어떠한 존재이길래 사람을 창조해 놓고 그냥 이렇게 죽게끔 놔두는 것인가? 이런 신이 어떻게 좋은 신이라 할 수 있는가? 신의 눈에는 사람들이 이렇게 비참하게 죽어가는 것이 도무지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미국에 온 뒤 나는 악몽을 꾸기 시작했다. 매일 밤 똑같은 악몽이었다. 다섯 악령들이 나를 잡아 둘은 나의 손을 묶고, 둘은 나의 다리를 묶고, 나머지 한 영은 나의 목을 졸랐다.

    나는 잠을 자는 것이 너무나 두려웠다. 커 가면서 잠자는 것이 두려워 나는 두 세가지 일을 한꺼번에 했다.

    이 시간 동안 난 너무나 두려웠고 외로웠다. 불교의 경전에는 이 세상이 온갖 고통으로 가득하다는 것이 쓰여 있었고 난 정말로 그렇게 믿었다.

    격동의 세월들

    난 진리를 갈망했고 삶에서 계속하여 하나님을 찾았다. 그러나 내 마음은 여전히 외로웠다. 난 스스로에게 ” 인생은 분명 이보다 더 나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 라고 물었다.

    대학에서 나는 춤추고 술 마시며 사람들이 너무나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파티에 가 보았다. 그리고 ” 와! 정말 이런게 바로 행복이란 것이구나…! 맞지? ” 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학 1학년과 2학년 때 데이트 하고 술 마시고 춤도 추며 시간을 보냈다. 파티에 가면 난 무대 위에 올라가 미친듯이 춤을 췄다. 사람들은 ” 버디 ! 버디 ! ” 라며 내 이름을 외쳐댔다.

    그러나 난 행복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난 ” 이것이 행복의 길은 아니다… ” 라며 스스로에게 말했다. 대학 2학년때엔 성적이 너무 안 좋아 학교에서 거의 퇴학을 당할 뻔했다. 나에게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깨달을 때 쯤인 대학 3학년 때엔 조금 진정이 되었다.

    그래도 난 여전히 너무 외로웠다. 난 학교를 마치고 직업을 구하여 돈을 번다면 삶이 더 행복해 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대학을 졸업하고 좋은 직장을 구했어도 나의 마음은 여전히 외로움과 공허함으로 가득했다.

    진리를 찾아서

    이 때에도 난 계속해서 진리를 찾고 있었지만 아무런 소득도 없었다. 잠깐동안 나는 내가 처음으로 세례를 받았던 크리스쳔 교회에 갔다. 하지만 하나님은 나의 마음을 움직이지 않으셨고 그 교회에서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난 그 교회를 떠났다.

    그 후 어머니는 나를 그리스 정교회에 데리고 가셨고 그 곳에서 나는 두번째 세례를 받았다.

    하지만 그곳에서는 그리스어로 설교했기 때문에 난 항상 졸았고 그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결국 이 두번째 교회에서도 나온 뒤 난 자신에게 말했다. ” 잊어버리자…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 “

    난 그저 직장에서 일하는 것에 집중했다. 그런데 직장에서 함께 일하는 여직원 가운데 한 명이 참예수교회에 다니고 있었다. 하루는 그녀가 내 책상위에 있던 성경책을 발견하고는 함께 성경공부에 가지 않겠냐고 물어보았다.

    나는 아무 것도 잃을 것이 없다고 생각하여 성경공부에 참석하기로 했다. 성경공부가 끝날 때 쯤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방언 기도 하는 것을 보고 난 너무 무서웠다. 그런데 자매들 중 한 명은 분명히 날 위해서 기도했나보다. 왜냐면 다음날 성경공부에 가고 싶어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성경 공부 모임에서 난 하나님이 내 마음을 움직이시는 것을 느꼈다. 난 성경공부에 본격적으로 나가기 시작했고 예배에도 정기적으로 참석하기 시작했다.

    난 우리가 비록 기도소에 모이긴 했어도 하나님께서 분명히 그 곳에 함께 하신다고 느꼈다. 하나님이 나의 마음을 움직이시는 것을 느꼈기 때문에 매일밤 진심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내가 공부한 성경의 모든 가르침들이 실제로 이해되어졌다.

    하나님께서 나를 만지시다

    하루는 잠을 자고 있는데 하나님의 권능이 나에게 임하여 말씀하셨다. “버디야 일어나 기도해라” 그래서 난 ” 네 ” 라고 대답하고 일어나 기도하기 시작했다.

    난 “할렐루야” 라고 말했고 곧 어떤 힘이 나에게 들어와 방언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난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자비가 느껴져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이것은 내가 처음으로 기쁨을 느낀 순간이었고 나는 그 기쁨은 분명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기도시간에 하나님은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내가 고등학교와 대학교 때 저질렀던 모든 죄악된 행위들을 깨닫게 해 주셨다.

    기도를 하는 도중 하나님은 다시 나의 마음을 움직여 말씀하셨다. “베드로전서를 펴 보아라” 난 성경에 베드로전서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지만 어쨌든 일어나서 불을 켰다. 그리고 베드로전서 1장을 펴 보았다.

    읽기 시작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마치 3D 입체와 같이 살아서 나에게 전해지는 것 같았다. 말씀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것 같아 나의 마음에 진정으로 큰 감동을 주었다.

    영적 전투

    몇 일 뒤 나는 다시 악몽을 꿨다. 난 2~3년간 악몽을 꾸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같은 다섯 영들 이었고 이번엔 더욱 강하게 나의 목을 졸랐다. 난 숨을 쉴 수 없었고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다. 비명도 지를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 ” 라고 말했고 그들은 바로 떠나갔다.

    난 교회의 형제자매들에게 왜 성령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밤에 악몽을 꾸는지를 물어봤다. 그들은 혹시 내가 집에 어떤 우상을 가지고 있냐고 물어보았다. 사실 나에겐 금으로 된 작은 부처의 머리모양이 있었다. 그들은 내가 그것을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것을 변기에 버리고 물까지 내렸다.

    다음날 밤 나는 또 다른 악몽을 꾸었다. 이번에는 단 하나의 영이었다. 한 크고 검은 영이 나의 목을 졸랐고 난 그 영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뭔가 다른 것 같아 정말로 무서웠다.

    그래도 난 ”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 ” 라고 외치며 오히려 그 영의 목을 졸랐다. 난 그 영을 침대에 엎어버렸고 그 영의 얼굴을 보았다. 얼굴은 온통 좀 먹었고 벌레들로 가득했다. 곧 그것이 사라졌다.

    나는 다시 교회의 한 자매에게 왜 아직도 내가 악몽을 꾸는지 물어보았다. 무엇 때문에 계속 악몽을 꾸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집에 뭔가 또 다른 것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매는 나에게 다시 한 번 집을 확인해 보라고 했다.

    그래서 난 집안을 뒤지고 또 뒤졌다. 그리고 어머니께서 오래전에 내게 주셨던 또 하나의 부처 머리 우상을 찾게 되었다. 난 그것이 내 보석함에 들어 있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다시 한 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는 그것을 변기에 버리고 물을 내렸다.

    아버지의 개종

    내가 참예수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난 후 나는 아버지에게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기 시작했다. 나의 아버지는 73세이다. 아버지는 캄보디아에서 젊은 시절부터 주술을 시행하셨다.

    그 때문에 예전부터 아버지를 총으로 쏴 죽이거나 칼로 찔러 죽일 수 없다는 것을 동네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난 어릴적엔 이것을 자랑스러워 했지만 실제로는 믿지는 않았다.

    1981년도에 우리 가족이 미국에 왔을 때 우리는 굉장히 심한 핍박을 받았다. 우리 집은 두 번이나 불에 탔다. 두 번째 불이 났을 때는 아버지가 밖에 나가 방화범들과 싸우셨다. 그들 중 한명이 아버지를 야구방망이로 때리려고 했지만 아버지는 오히려 손으로 그것을 잡아 반으로 쪼개 버렸다. 그 후 난 아버지가 실제로 주술의 힘이 있다는 것을 믿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미국에 오신 뒤 처음으로 교회에 가셨을 때 아버지는 너무나 편찮으셔 거의 돌아가실 뻔했다. 아버지가 시행하는 주술의 “정령”은 만일 아버지가 계속 교회에 나간다면 아버지를 죽일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그래서 1981년부터 1999년까지 아버지는 교회를 한 번도 나가지 않으셨다.

    1999년 6월에 난 아버지와 낚시를 갔다. 그 때 나는 참예수교회 예배에 정기적으로 참석하고 있었다. 난 진정으로 하나님이 계시는 것과 하나님의 사랑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이번이 아버지께 하나님에 대하여 이야기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난 아버지께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께 평생동안 무엇을 해 달라고 부탁한 적이 없었어요. 그렇지만 난 하나님을 만났어요. 아버지가 교회에 딱 다섯번만 나가보시길 원해요. 만일 다섯번 나오신 후에도 아무 느낌도 없으시다면 다시는 교회에 나가지 않으셔도 돼요.”

    아버지는 “그래 아들아 내가 너를 위하여 그렇게 하마” 라고 말씀하시며 동의하셨다. 그 날 밤 조카가 아버지 방에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가 소리쳤다. “할머니 할아버지, 누가 날 죽이려고 해요 !! “

    아버지는 주변을 둘러보셨지만 아무도 없었다. 아버지는 그 때 그것이 아버지의 정령이란 것을 깨달았다. 아버지는 다음 날 그 사실을 내게 말씀하셨지만 나는 아버지께 하나님은 전능하시며 하나님만이 사람의 생명을 취할 수 있다고 말하며 아버지께 걱정하지 마시라고 했다.

    옛 것을 버리다

    그 다음주 금요일 성경 공부시간에 아버지 방에 있는 모든 불교용품들에 대하여 어떻게 해야 할 지를 교회의 형제자매들에게 물어 보았다. 그들은 나에게 일단 기도하고 그것을 모두 다 치워 버리라고 말했다. 그러나 과연 누가 감히 아버지 방에 들어가서 그것을 다 치운단 말인가?

    아버지는 절대 그렇게 하지 않으실 것이며 나 스스로 그렇게 할 수 있는 믿음도 없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기도 뿐이었다.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그 주 토요일에 아버지는 교회에 나오셨다.

    기도 후 난 아버지께 느낌이 어떻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춥고 몸이 떨린다고 했다. 난 그것은 좋은 반응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럼 그렇지, 아버지는 큰 부처 머리 형상의 목걸이에 목에 두르고 있었다.

    난 아버지께 말했다. ” 바로 그것이 문제에요. 그 목걸이를 갖다 버리셔야 해요… 만일 아버지가 진심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원하신다면, 아버지 방안에 있는 모든 다른 것들도 다 갖다 버리셔야 해요… “

    감사하게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아버지는 목걸이와 그 외 모든 불교용품들을 다 제거하셨고 매일 밤 기도하기 시작하셨다.

    새로운 생명

    다음 안식일날 아버지는 교회에 나오셔서 무릎꿇고 다시 기도하셨다. 난 아버지에게 성령을 받으면 어떤 느낌인지 한 번도 설명한 적이 없었다. 기도 후 아버지는 온 몸이 얼얼한 느낌이라고 하시며 그래도 너무나 기분이 좋다고 하셨다. 난 정말로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그런데 그 주, 아버지의 왼발이 굉장히 아프기 시작했고 심지어 걸을 수조차 없었다. 아버지는 왜 이런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었다. 교회로 가는 길에 아버지는 나에게 “만일 네가 믿는 하나님이 진정한 하나님이시라면 하나님께서 나의 발을 낫게 하시겠지… 기다려보자.” 라고 말씀하셨다. 난 “하나님 이제 아버지가 하나님께로 나아 오셨습니다” 라고 마음으로 말했다.

    아버지는 말씀하는 그대로 행하시는 분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며 하나님께서 아버지의 발을 꼭 치료해 주실 것이라고 믿는 것 이었다. 1주일간 아버지는 다리가 아프셨다. 어느날 다리에 통증이 너무 심해 밤에 자다가다 깨어나 울기까지 하셨다.

    그런데 아버지가 일어 나셨을 때 아버지는 어떤 힘을 발에서부터 무릎까지 임하는 것을 느끼셨고 후에 아버지는 걸을 수 있게 되셨다. 아버지는 나를 불러 이야기 하셨고, 난 너무나 기뻤다.

    교회 형제 자매들도 아버지를 위하여 정말 열심히 기도했다. 다음 안식일 교회에 가는 길에 아버지는 “아들아 나도 너의 믿음을 따르겠다. 난 이미 너의 엄마에게 너의 믿음과 너의 하나님을 따르겠다고 말했다” 고 하셨다.

    난 정말로 하나님께 감사했다. 아버지는 평생 동안 할아버지와 그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를 따라 불교를 숭상하셨다. 아버지가 하나님을 믿고 교회에 나오신다는 것은 그야말로 기적이었다.

    이제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 남동생까지도 안식일 예배에 정기적으로 참석하신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는 내가 상상했던 것 그 이상이었다. 우리가 신실함과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면 하나님을 통하여 진실로 모든 것이 가능하다.

    모든 영광과 찬송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드립니다.

    할렐루야 아멘.

    출처: Manna 31호

  • 우리 가족이 기독교로 개종함(My Family’s Conversion to Christianity)

    우리 가족이 기독교로 개종함(My Family’s Conversion to Christianity)

    간증자 제임스 리(James Lee) / 말레이시아 수방 자야(Subang Jaya) 교회 / 안효상 역

    도교를 따르다

    28년전 우리 가족은 말레이시아 페락주의 작은 마을인 시티아완(Sitiawan)에서 살았다. 대부분의 중국 복주 이민자들은 시티아완(Sitiawan)으로 이주하여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도교를 믿었고 조상신을 숭배했다. 나의 어머니는 조상신을 모시는 제단에 매일 음식을 올려놓는 일을 절대 잊지 않으셨다. 어린 소년이었던 나는 조상신에게 벌을 받을까봐 두려워 제단에 가까이 가지도 못했다.

    난 우상이 바라보는 그 표정도 무서웠고 우상을 숭배하는 것을 게을리 하면 벌을 받을 것이 무서워 우상을 숭배했다. 나는 예수라는 신이 있다는 것도 알았지만 그는 오직 서양 사람들만을 위한 신이라고 생각했다.

    1981년 6월 어느 날, 어머니께서 시장에 가는 길이었다. 어머니는 자전거를 타고 가시는데 갑자기 굉장히 어지러웠다고 한다. 어지러움이 너무 심해 자전거를 타기도 힘들었다. 집에 도착했을 때 어머니는 너무 피곤했고 입맛도 없으셨다. 즉시 병원에 가셨지만 의사도 어머니 병의 원인을 알 수 없었다.

    나의 아버지는 매우 열성적인 도교 신자여서 무당에게 상담 하려고 절에 가셨다. 무당은 40년전 우리집 앞에 있던 우물에 뛰어들어 자살한 한 남자의 영혼이 어머니에게 들어갔다고 했다. 어머니가 집 앞에서 빨래를 말리고 있을 무렵 이 귀신이 어머니에게 들어갔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는 어머니가 그의 혼 때문에 아프기 시작했다며 부적을 태워 물과 함께 마시라고 말하며 부적을 건네주었다. 그는 이것이 어머니의 몸 안에 들어간 귀신을 내 쫓을 수 있다고 아버지께 말했다. 아버지는 무당의 말을 따라 조심스럽게 불에 태운 부적을 물에 타 어머니께 마시게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어머니는 더욱 괴로워하며 잠도 못 잤고 계속 오한에 시달렸다. 어머니의 가슴이 마치 얼음처럼 차갑게 느껴졌다. 이 때 어머니는 계속 하늘에 자신을 도와달라고 부르짖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자신이 누구에게 부르짖는지는 몰랐지만 “하나님 제발 도와주세요!” 라고 마음으로 외쳤다고 한다. 3개월 동안이나 병이 계속되자 어머니는 집안 일 대부분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나는 설겆이나 마루닦기 등 7살 짜리 아이가 하기에는 힘든 집안 일들을 해야했다. 아버지는 타피오카 농장을 관리하셨기 때문에 굉장히 바쁘셔서 곧 우리는 할머니께 집안일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병에서 완전히 회복하다

    외할머니는 바로 옆 마을인 수가이 시푸트(Sungai Siput)에 살고 계셨다. 외할머니댁에는 전화가 없어서 아버지는 같은 동네에 살고 있는 이모에게 전화를 걸어 외할머니께 말씀을 전해달라고 부탁하셨다.

    그런데 우연하게도 이모는 참예수교회의 성도였다. 이모가 어머니의 병 소식을 듣게 되었을 때 몇 분의 교회 집사님을 모셔와 어머니를 위해 기도해 주어도 괜찮겠냐고 물으셨다. 절망스러웠던 우리는 비록 예수님이 서양의 신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별 방법이 없어 이모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몇일 뒤 이모는 두 분의 집사님과 함께 집에 오셨다. 집사님은 어머니를 위해 약 30분간 기도하셨고 안수도 하셨다. 처음에 우리는 집사님들이 큰 소리로 방언기도 하는 것을 듣고는 조금 불편했지만 그래도 그 분들과 함께 기도를 했다.

    기도가 끝난 후 우리는 어머니의 표정이 완전히 달라진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머니의 얼굴이 더 이상 창백해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는 심지어 집사님들과 이모에게 점심을 드시고 가라고 권하셨다. 식사 때도 어머니는 음식을 다 드셨다. 그날 단 한번의 기도로 어머니는 완전히 낳으셨고 다시 정상적인 삶으로 되돌아 오셨다.

    참교회에서 세례받다

    우리 가족은 전능하신 하나님께 계속해서 기도했고 시티완(Sitiawan)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캄풍 코(Kampung Koh) 참예수교회 예배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여동생과 나는 곧 아동반 종교 교육학습에 참석하기 시작했고 나는 성경 이야기와 어린이 찬송을 부르는 것도 좋아하게 되었다.

    약 3개월간의 예배 참석 후 어머니는 우리 가족 모두가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결심을 하셨다. 아버지도 어머니에게 일어난 기적을 경험한 후 세례 받는 것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갖으셨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조상신을 숭배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 생각하셨고 그럼으로써 부모님께 자식된 도리를 한다고 생각하셨다. 특히 친할머니께서 아버지가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을 반대하셨기에 아버지는 기독교 신자가 되는 것을 망설이셨다.

    이모는 싱가폴 참예수교회에서 연말에 열리는 영은회에 참석해 세례를 받는 것이 어떻냐고 하셨다. 우리는 아버지만 그냥 말레이시아에 남겨둔 채 싱가폴에서 열리는 3일간의 참예수교회 영은회로 향했다.

    영은회에서 우리가 받을 세례식은 일요일 아침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금요일 영은회 저녁에 어머니는 갑자기 다시 아프기 시작했다. 그날 밤 어머니는 꿈을 꾸셨다.

    꿈 속에서 어머니는 불빛이 희미한 어느 방안에 계셨는데, 갑자기 토하고 싶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어머니가 토하려고 할 때 두 손으로 입을 막았는데 손에 무엇인가가 느껴졌다. 어머니는 그것이 무엇인지 보려고 불빛쪽으로 걸어가셨다. 놀랍게도 어머니가 본 것은 몇 달 전 어머니가 아프기 시작했을 때 먹었던 부적이었다.

    그 꿈 이후, 어머니는 더 이상 아프지 않았고 다시 한번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계시고 실제로 계신다는 것을 확신했다. 어머니는 참예수교회가 참된 교회라는 믿음을 갖으셨다.

    뜻밖에도 세례받기 바로 전 안식일에 어머니는 성령도 받으셨다. 성령을 받으실 때 느꼈던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고 마음에 말할 수 없는 평안이 느껴졌다고 한다. 다음 날 어머니와 여동생, 그리고 나는 세례를 받았다. 난 비록 7살이었지만 세례를 받고 난 뒤 더 이상 죄 없는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평안 속에서 고난을 극복하다

    세례를 받은 후 어머니의 병이 다시는 재발하지 않았다. 우리는 계속해서 예배에 참석했다. 아버지는 친할머니와의 관계가 나빠질 것을 걱정하여 세례받기를 망설이셨지만 어머니는 계속해서 아버지를 설득하셨다.

    어머니는 참예수교회는 하나님이 계시는 참된 교회라고 말하며 이미 (아버지께서) 하나님을 믿기 시작했으니 세례 받지 않고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은 정말 삶을 모두 다 버리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다.

    매일 매일 어머니는 아버지를 전도하려고 힘썼다. 3년 후 아버지는 친할머니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세례를 받기로 결심하셨다. 나는 아버지가 세례 받으실 때 드디어 우리 가족 모두가 하나님 안에 거하게 된다는 사실에 너무나 기뻤다. 그러나 친척을 포함한 우리가족 모두가 다 모였을 때에는 아버지께서 세례를 받으셨다는 기쁨이 조금 덜 했다.

    나는 할머니께서 제삿상에 정성스럽게 만든 음식을 올린 후에야 우리의 식탁에 음식을 올리시던 것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아주 적은 양의 음식만이 우리 넷이 먹을 수 있게 남겨졌다. 영혼의 날 (또는 묘를 다듬는 날 이라고도 한다 ) 삼촌과 이모는 부모님이 제사에 참석하지도 않는 불효자라며 부모님을 모욕했다. 나는 친척들에게 그런 모욕과 질타를 듣는 것이 굉장히 괴로웠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함으로 우리 가족은 친척들의 핍박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평안을 얻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 (요14:27)

    몇년 후 할머니는 노인성 치매에 걸리셨다. 할머니는 기억을 잃어가셨고 더 이상 혼자는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없게 되었다. 처음에는 할머니의 9명 자녀들이 각각 3개월씩 돌아가며 할머니를 돌봐 드렸다. 그러나 한 번씩 할머니를 돌본 후 모두들 할머니를 돌보는 것이 너무나 힘들다고 했다.

    할머니는 어머니가 우리 가족을 예수님께 인도한 것에 대하여 여러번 엄마를 욕하셨지만, 어머니는 마치 친어머니처럼 할머니를 정성스럽게 돌보셨다. 결국 어머니는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4년간을 정성껏 돌보셨다. 삼촌들과 고모들은 엄마가 보여준 진정한 효도에 크게 감동하셨다. 그 후 그들은 더 이상 우리를 핍박하지 않았다.

    난 하나님께서 우리가족에게 어렵고 힘든 시간 중에도 힘과 평안을 주시며 하나님을 향한 굳건한 믿음을 지킬 수 있게 해 주신 것에 대해 정말 감사드린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벧전 2:12)

    내가 참교회 안에 있다는 것과 교회 안에서 자랐다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주신 진정한 축복이다. 천국에 가는 길은 결코 쉽지 않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인내하며 한걸음 한걸음 나아간다면 우리는 마침내 의의 면류관을 받고 하나님께 영광 돌릴 것이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들의 신분을 귀히 여기고 복음을 전하기를 소망한다.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