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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도간증]성령을 받고 두통이 사라지다!

    [성도간증]성령을 받고 두통이 사라지다!

    (이파자 모친 간증)

    저는 올해 79세인 이파자입니다. 제 고향은 남원군 사매면 서도리에요. 우리 집은 대가족이었고, 저는 무서운 할머니 밑에서 커서 밖에 잘 나가지 못하고 집안 일만 하며 자랐어요. 20세가 되었을 때 동네에 4명의 동갑내기가 있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같이 사는 고모였어요. 옛날에는 아이를 많이 낳다 보니 할머니가 낳은 딸이 저랑 동갑이었습니다.

    하루는 제가 고모에게 “고모, 교회에 한 번 가볼까?” 했어요. “무슨 교회를 가!” “교회에 가면 좋다고 하니 한 번 가보자.” 하고 동갑내기 4명이 같이 갔습니다. 처음에 간 교회는 장로교회였어요. 찬송을 부르는데, “수정같이 맑고 맑은 유리바다를~”라는 찬송이 듣기에 너무 좋아서 제가 “한 번 더 부를 수 없어요?”라고 말했어요. 그랬더니 다시 불러주시더라고요. 그래서 그 찬송을 따라서 부르다가 그날 그 찬송을 다 외워버렸어요. 4명중 저만 찬송을 다 외웠습니다.

    “수정같이 맑고 맑은 유리 바다를 하나님 보좌 앞에 있고 싶어라. 유리 바다 건너편에 믿는 성도들 이것 또한 유리같이 맑고 맑도다.”

    교회가 끝나고 집에 왔는데, 작은 아버지가 하시는 말씀이 대문 밖까지 들렸어요. “이놈의 계집애들! 오기만 오면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려야지! 그래야 이것들이 교회를 안가지.” 하고 막대기를 문 앞에 놓고 말씀하셨어요. ‘몰래 갔는데, 어떻게 아셨지? 다리 부러뜨리면 아무데도 못가고 이걸 어떡하면 좋아.’ 하고 가만가만 들어갔더니, 막대기만 있고 작은 아버지가 안보였어요. ‘옳다 되었다.’ 하고 얼른 방으로 들어가서 자는 척 했습니다.

    당시 저는 잠업(누에를 치는 일)시험장을 다녔어요. 우리 교회 권정자 자매 계시지요? 그분의 언니인 권정숙 언니가 같이 잠업시험장에 다녔는데, 저를 참 예뻐했어요. 하루는 “파자야, 너 교회 한 번 가볼래?” “네, 언니! 언니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가봐야지요.” 그런데 언니가 다니는 곳은 참예수교회라는 곳이었는데, 그때는 그 교회 평이 안 좋았어요. ‘참예수교회는…날라리 교회라고 그러던데, 팔짝팔짝 뛰면 어쩌지?’ 걱정이 좀 되었어요. 그런데 교회에 갔더니 교회가 조용했어요. 그 언니를 따라서 기도를 하고 나서 많은 시간이 흘렀어요. 저는 교회라는 그 두 글자를 항상 가슴에 품고 ‘언젠가는 나도 이 길을 가야겠다.’ 하고 다짐했어요.

    25세에 시집을 갔어요. 도시 축에 드는 마을을 떠나, 시골 골짜기 삼계로……. 시집을 가서 생활하던 중에 머리가 너무나 아팠습니다.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통증이었어요. 머리에 수건을 묶고, 그래도 안 되면 벽에 머리를 꽉 대고 있었는데, 머리가 안 아프면 이젠 배가 아프고, 배가 안 아프면 허리가 아팠어요. 아픈 것이 그치질 않아서 고통을 겪는 와중에도 가정 살림과 농삿일을 해나가고 있었어요.

    그러던 차에 남편이 세심이라는 마을로 민방위를 받으러 다녔어요. 남편은 제가 아픈 것을 안타깝게 보고 마음이 아팠던가 봐요. 제 남편은 교회라는 두 글자의 뜻도 모르고 지내다가 아내를 살려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는지, 저에게 “교회를 한 번 나가보면 머리가 안 아프고 몸이 건강해진다 하더라”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다 또 몇 년이 흘러 자식 다섯을 낳은 후에, 어느 날 이웃집 아주머니에게 교회에 나가자고 했더니, 어느 교회를 가려느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참예수교회에 가자고 했더니 이웃집 아주머니는 장로교회를 가자고 해서 하는 수 없이 따라가려고 신발을 신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 남동생이 찾아왔어요. 아침 시간에 잘 안 오는데 일찍 왔더라고요. 동생은 당시에 참예수교회를 다니고 있었어요. 현재 전주교회 이정천 형제가 제 남동생이에요.

    “누나 어디 가려고?” “자꾸 아프니까 자형이 교회 나가 보라고 해서 지금 가려고 한다.” 그랬더니 동생이 무릎을 딱 치면서 “어쩐지 누나 집엘 오고 싶더라니……. 참예수교회를 나가야지요.” 했어요. 남동생의 권유로 그날 장로교회를 가지 않고, 일주일을 기다려서 토요일에 참예수교회를 가게 되었어요. 그렇게 제 남동생이 저를 전도했습니다.

    그리고 제 남편도 참 고마워요. 살다보면 서로 맘이 안 맞을 때가 있잖아요. 그런데 두통에 시달릴 때마다 나에게 교회 나가 보라고 말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남편이 너무 고맙고 감사하고…….

    옆집 아주머니와 참예수교회를 갔는데, 기도소리를 듣고 옆집 아줌마는 계속 키득키득 웃었고, 저도 웃음을 겨우 참고 있었는데, 그 아줌마는 웃음이 너무 나오니까 밖으로 나가버리더라고요. 저는 끝까지 설교 말씀을 듣고 앉아 있었어요. 삼계는 오전 예배만 드리고 오후에는 예배가 없었어요. 그 다음 주에는 이웃집 아주머니는 가지 않고 저 혼자만 갔어요. 동생도 볼 겸해서…… ‘남편이 교회를 그렇게나 권했는데, 내가 머리 아프다 죽으면 남편이 뭐가 되겠나.’ 하고 결심을 하고 다녔어요. 오전 예배를 마치고 집에 오면 왜 그렇게 할 일이 많은지, 농사짓고 누에 치고 담배 농사하고, 그런 가운데서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내가 목숨을 걸고서라도 교회를 가야겠다.’ 라는 생각이었어요. 그래서 세 번째로 또 갔는데, 이번엔 남편하고 같이 갔어요. 기도할 때 안수 받을 사람 나오라고 해서 나갔습니다. 그날 저는 성령을 받았답니다. 진동이 오고 몸이 떨려서 움직인다는 것이 여기서 저기까지 갔어요. 그 때는 마룻바닥에 방석을 놓고 기도할 때였습니다. 그리고 어찌나 눈물이 많이 나오는지 주체할 수가 없었어요. 이 눈물이 기뻐서 나오는 건지, 슬퍼서 나오는 건지 몰라도 정말 펑펑 울었어요. 아! 살아나온 과정을 생각해볼 때 모든 뜻을 하나님 앞에 다 풀고 고백을 해야겠구나! 삼계교회가 떠나갈 정도로 그렇게 큰 소리로 기도하며 성령을 충만하게 받았어요. 성령 받는 광경을 남편이 다 봤어요. 울고 싶은 대로 다 울었어요. 누군가 자제를 안 시켰으면 하루 종일 가겠더라고요. 어찌나 충만하게 성령을 받았던지……

    종을 친 지는 오래 되었고, 기도하다 생각하니 너무 이렇게 해서는 문란하겠구나 해서 겨우 제가 마음을 가다듬고 있었더니, 누군가 그러더라고요. “기도 그만 하라고 해.” 그 소리가 귀에 들렸지만 아무 부끄러움이 없었어요. 일단 제 마음을 하나님 앞에 전부 털어놓고 싶은 생각뿐이었고, 마음을 가다듬었는데 웬만한 사람은 부끄러울 텐데 하나도 부끄럽지 않았어요. 그냥 담대하니 마음이 아주 편안하고 개운하고 부끄러움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 뒤로 지독히도 저를 괴롭혔던 두통이 완전히 사라졌어요. 성령을 받고 머리가 아프지 않았습니다. 머리가 아프면 눈이 떠지질 않고, 벽에 꽉 기대어도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는데, 성령을 받고 나서 오늘날까지도 그 때 느낀 그 두통은 전혀 없습니다. 가끔 신경 좀 쓰고 감기가 들면 머리가 조금 아프지만 그 때의 두통과는 완전 달라요. 믿음이 이렇게 좋은 것이구나. 하나님을 알고, 말씀의 뜻을 알고, 이제 교회 안다니고는 제가 도저히 두통을 감당할 수 없음을 깨닫고, 세상의 모든 걸 다 포기하고, 옛것은 다 버리고 하나님 말씀대로만 살려고 노력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살다보니 믿음의 시험이 찾아왔습니다. 우리 동네에서 교회 다니는 사람은 저 혼자뿐이었는데, 아이 다섯을 키우면서 가방만 흔들거리고 교회만 간다는 소문이 돌았어요. 그럴 때마다 다시 마음을 다잡았어요.  ‘당신들은 그렇게 얘기하지만 나는 내 갈 길을 간다. 내 인생 남이 살아 주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하나님께만 매달리면 내 삶이 평탄한데! ’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동네에 안 좋은 소문이 날까봐 우리 아이들한테는 엄마만 살짝 다닐 테니 너희는 나오지 마라. 제가 아직 믿음이 없었을 때다 보니 그렇게 말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자식 다섯 명이 전부 교회에 나와 있더라고요. 애들뿐만 아니라 집에서 키우는 개까지 교회차를 타고 다녔어요. 그 개도 교회 문 앞에 앉아 있다가 예배 끝나면 일어나서 같이 교회차 타고 집에 왔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크면서 작은 아들이 전주로 고등학교를 가다보니 교회를 안 나오게 된 것이 지금까지 이르렀네요. 큰 아들도 신앙에서 멀리 떠나 있어서 저는 현재 자식 전도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당시 또다른 시험거리로는 농사철에 안식일을 지키기가 쉽지 않았어요. 보리 농사하던 시절에 교회를 가려고 애들 다 학교 보내고 아침 8시쯤, 안식일이었는데 농사 기계가 들어온대요. 그럴 때마다 속으로 나는 교회 가야 하는데……. 그냥 가버리면 남편과 싸우게 생겼더라고요. 일단 내 임무는 힘껏 마치고 난 후 교회를 가도 가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직 남편이 믿지 않을 때였거든요.

    농사할 때 땅에 거름을 뿌리지요? 우리집 거름은 유달리 무거워요. 비를 자꾸 맞아서…… 안식일 이른 아침에 그 거름을 손으로 들어올렸는데, 그 무거운 거름이 하나도 무겁질 않는 거에요. 내 정신이 아니고 누군가 꼭 지켜주시는 것 같았고, 하나님이 거름을 같이 들어주신다는 기분이 들었어요. 그 무거운 거름이 그렇게 뿌려도 무거운 느낌이 전혀 없었어요. 참 신기했습니다. 교회차가 마을을 다니면서 신도들을 실러 오는데, 교회 다니는 모친이 논에 있는 저를 보더니, “아이구 오늘 안식일인데 일해요?” 하시기에  “아니요. 빨리 해놓고 가려고 해요.” 교회차가 멀리 세심을 돌아서 그 모친을 싣고 가는게 보였어요.

    ‘아이고! 이 일을 어떡하면 좋아! 빨리 해놓고 교회 가야겠는데…….’

    그런데 교회를 꼭 가려고 마음 먹으면 절대 안 될 것이 없었어요. 그 일을 다 해놓고 맨발로 집에까지 뛰어갔습니다. 세수를 대충 하고 신발 신고 2킬로미터 삼계까지 정신없이 내 정신이 없이 뛰어 갔더니 예배가 시작을 안했어요. 너무 감사하지요.  ‘아!  내가 꼭 교회를 가려고 마음을 먹고 나가야겠다 하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는구나! 꼭 교회를 가야겠다, 하나님을 믿고 살아야겠다.’ 하면 그 힘이 나도 모르게 다시 치솟더라고요. 하나님께선 저같이 믿음이 부족한 사람에게도 힘을 주시는구나. 열심히 말씀을 듣고 그렇게 집에 돌아왔습니다.

    어김없이 다음 안식일이 다가오는데, 이번에는 벼를 훑어야 했습니다. 제가 남편에게, 밤에 훑으면 안 되요? 탈곡기가 있잖아요. 호롱기 아시지요? 호롱기로 벼를 훑은데, 밤에 그걸 다 훑었어요. 안식일에 할 일을 전날 저녁에 다 끝냈어요. 끝내고 나니 이웃사람들이 무엇이 바빠서 밤에 벼를 훑냐고 하더라구요. 바빠서가 아니라 교회 가려고 밤에 일을 했다고 말하고 넘어갔어요. 일을 꼭 해놓고 가야겠다 맘을 먹으면 밤에라도 그 일을 마치게 해주시더라구요. 안식일에 모를 심어야 할 때도 있었습니다. 안식일마다 꼭 시험거리가 닥쳐와요. 닥치면 그것을 이겨 나가려고 노력을 했어요. 모를 심는데, 그때는 교회에서 논이 가까웠어요. 남편과 같이 모를 심다가 “어머 어떡해. 나 교회 가야 하는데.” 남편은 “갔다 와. 나 혼자 심을 테니까.” “그래요? 그러면 쉬엄쉬엄해요. 나 바로 빨리 갔다 와서 심을게요.” 갔다 와서 바로 논으로 들어가서 심고 그랬어요.

    남편도 교회를 나가라고는 했어도 농사일로 바쁠 때는 기분이 좋지 않더라구요. 교회를 괜히 나가라고 했다며 말도 했지만, 그때는 제가 말했어요. “머리가 안 아파서 건강해서 일을 잘하고 있잖아요. 당신이 교회 가라고 했잖아요. 당신이 가라고 해서 간 것이니 앞으로 당신도 교회에 다녀야 해요.” 그러면 남편은 “그래. 당신이 가는 길은 언젠가 나도 간다.” 저는 남편의 그 말 한마디를 믿고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습니다. 제 남편은 그 후로 20년이 더 지나서 교회에 나오게 되었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할렐루야! 그때가 1997년 10월이었어요. 그 뒤로 13년이 지난 2010년에 성령을 받았어요. 요즘은 몸이 불편해서 교회를 잘 못 나오는데, 제가 그렇게 말합니다. “믿음이 약하니까 그런가 봐요. 열심히 하나님께 구하면 낫지 못하더라도 고통은 없을 텐데, 기도 열심히 해요. 내가 당신을 위해서 얼마나 기도하는지 아세요?”

    신앙이라는 것이 그런 것 같습니다. 내가 열심히 믿어야 하나님도 그것을 허락해 주시는 하나님이세요. 저는 이왕 교회에 몸담고 하나님을 믿기로 했으면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교회 갈 때 할 일은 밤을 새워서라도 마치고 열심히 신앙을 지키며 살려고 합니다. 하나님 뜻대로만 살다 보면 길을 열어주시더라고요. 천국 갈 때까지 우리 열심히 믿고 삽시다. 저도 앞으로 이 몸이 다할 때까지 열심히 믿고 살겠습니다. 아멘!

    교회에서 나들이 가서 남편과 함께 찍은 사진. 모친은 남편이 교회나오실 때가 가장 행복하시답니다. 

  • [성도간증] 믿음의 가정을 통해 축복하시는 하나님 (수원교회 김*현 자매)

    [성도간증] 믿음의 가정을 통해 축복하시는 하나님 (수원교회 김*현 자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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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자의 후대가 복이 있으리로다

    부요와 재물이 그 집에 있음이여 그 의가 영원히 있으리로다 (시 112:1~3)

     

    저는 김*정 집사님과 하*순 자매님의 장녀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이 가정을 꾸리실 당시에 어머니는 비신앙이었지만,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세례 성령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셨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참 하나님을 섬기는 가정에 속한다는 것은 정말 하나님의 큰 자비와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린 시절 교회 출석에 대한 기억이 참 많습니다.

    당시 주 6일제여서 토요일에도 등교하고 출근을 하셨지만 저녁 예배, 안식일 예배를 꼭 참석했습니다.

    1) 성균관대역 근처 4층 건물에 교회가 세워졌던 것

    2) 저희 아버지 첫 차가 르망이었는데 미선이네 가정 혹은 세* 집사님 가정을 카풀해서 교회 다녔던 것

    3) 어린 나이이지만 저녁 예배 꼭 참석하고 떠들면 혼났던 것

    4) 당시 북부 찬양 한마당 비슷한 행사가 있었는데 드레스 입고 나가서 상을 탔던 것

    5) 송년의 밤 때 앞에 나와서 암송 성구들 외웠던 것

    6) 옥상에 아동부를 위해 가건물을 지어주셔서 실컷 놀았던 것

    7) 예배 끝나고 교회 앞 슈퍼에서 게임하거나 한나 언니네 집 놀러가서 같이 놀았던 것

    8) 사촌 동생들을 교회로 데려오기 위해 안식일 점심에 항상 추가로 차량 운행을 맡아 하셨던 것 등이 있는데요.

    이런 어린 시절 교회 출석에 대한 많은 기억들은 저로 하여금 예배 참석은 참 소중하고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하였습니다.

    교회 출석이 형식적이고 맹목적인 스케줄이 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어린 시절 예배 참석에 대한 이러한 부모님의 노력들 덕분에 언제 어느 곳에 있든 시간이 되면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신앙을 갖게 되어 참 다행이고 감사하는 바입니다.

     

    또한 부모님께서는 삶의 터전은 교회와 가까워야한다는 생각을 실천에 옮기셨습니다.

    막내 동생이 태어나고 기존의 집이 너무 좁아서 이사를 가야 하는 상황인데

    당시 저희는 세상적으로 살기 아주 좋은 인계동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사 장소를 고민하던 중 부모님께서는 교회가 오목천동임을 고려하여

    다른 후보지보다 교회에서 더 가까웠던 호매실동으로 이사하기로 결심하셨습니다.

    지금은 호매실동 역시 많이 발전하였지만, 당시에는 정말 논과 밭뿐이었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사춘기 때 이런 촌동네로 갑자기 이사온다는 것이 조금은 아쉽고 창피하기도 했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에는 인계동에 계속 거주하는 것, 혹은 집값 상승 기대지, 학군지로 이사하는 것이 더 좋아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든 교회를 가까이 두고 살겠다는 부모님의 결단으로 인해

    저는 신앙을 지키면서도 학생의 본분인 학업에 더욱 열중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 음악에 대한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하지만 이는 교회 반주 봉사에 대한 아버지의 간절한 소망을 하나님께서 기쁘게 여기셨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저를 반주 봉사자로 육성하기 위해 아버지께서는 저에게,

    매일 2~3장씩 통합찬송가 1장에서 끝장까지 악보 그대로 치는 연습을 시키셨습니다.

    만약에 178장 찬송가가 4절까지 있으면 악보 그대로 4번을 쳐야 인정입니다. 이 연습을 몇 바퀴를 돌리셨습니다.

    뭐든 연습은 생각보다 지루합니다. 하기 싫어서 피아노를 쾅쾅 내리친 적도 있고, 피아노 뚜껑을 세게 닫아버린 적도 있습니다.

    그래도 시키시니까 했습니다. 그리고 나이가 어렸음에도,

    실력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틈만 나면 교회에서 반주 봉사를 권하셨습니다.

    그 당시에는 그 방법이 너무 싫었는데, 돌이켜보면 적어도 저에게는 그것이 정답이었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다른 악기도 운지법만 배우면 바로 원하는 곡을 연주할 수 있게 되었고,

    교회에서뿐 아니라 사회에서도 제가 따로 음악 전공을 하지 않았는데도

    음악적 소양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인정을 받고 다방면에서 유용하게 작용했습니다.

    초등학교 4~5학년때까지 피아노 학원을 다니긴 했지만, 이렇다 할 대회 한번 나간 적 없고 체르니,

    소나타 이런거 친거 기억 하나도 안 납니다. 누군가가 저에게 음악적 재능을 칭찬하고 어떻게 해냈냐고 물어본다면

    저는 하나님 뜻에 맞는 부모님의 소망 덕분에 귀한 달란트를 갖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에게 이런 은사를 주신 하나님께 참 감사드립니다.

     

    직업을 선택하는 과정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저는 학업 성적에 대한 욕심이 남 못지 않게 많습니다. 그리고 절대적인 공부량도 많았습니다.

    누구보다 열심히 많은 시간 동안 공부를 할 수 있다고 자신했고,

    제가 원하는 진로는 법대에 입학하여 사법고시를 치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부모님께서는 저에게 교사라는 직업을 권하셨습니다.

    교사 중에서도 초등교사가 되기를 권하셨고 고 2 직전까지 의견에 분분하다가 결국 교대로 마음을 굳혔습니다.

    당시 교사라는 직업에 대한 인기가 많아, 교대에 입학하기 위해선 공부를 정말 많이 해야만 했습니다.

    상위 1%의 성적을 낼만큼 열심히 했지만, 결국 수능에서 처음 받아보는 점수로 고배를 마셔야만 했습니다.

    저는 그렇게 청주교대 영어교육과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열심히 공부를 해서 대학 성적도 나쁘지 않았는데, 제가 2학년 2학기 때 학점을 최고점으로 받았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마침 나라에서 지방대 인문계열 인재를 육성한다며 새로운 장학제도를 신설하였습니다.

    지방교대 문과 계열도 이에 해당하였고 학교당 1명만 해당했기에 1등만 주는 제도였습니다.

    사실 제가 그동안에는 그렇게까지 성적이 좋진 않았는데

    학생처에서 이런 소식을 들었을 때 처음에는 보이스피싱인 줄 알았습니다.

    감사하게도 제가 그 장학제도의 수혜자가 되어 저는 남은 2년의 대학 학비 전액을 면제받게 되었습니다.

    그 해에는 정기가 대학교 1학년에 입학했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교대 학비가 타 대학에 비해 크게 비싸진 않지만

    이런 모든게 맞아 떨어지는 과정이 하나님께서 저에게 큰 축복을 주신다고 느끼며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저희 가정은 어려울 때 함께 기도를 정말 많이 했습니다.

    학창 시절 저는 엄마 아빠의 기도 소리가 저의 모닝콜이었습니다.

    임용 준비 시절에는 아침, 점심, 저녁 식사 후 20분씩 매일 1시간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가족 구성원간의 대화도 많고 더욱 소통하고 화목한 가정의 모습일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공무원 외벌이로 자녀 셋을 키우시면서 많이 어려우셨겠지만 저는 커가면서 경제적으로 어렵다고 생각한 적이 없고,

    오히려 조금 부족할 수 있으나 각 자리에서 열심히 하면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꼭 갚아주시고 인도해주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저는 제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가정이라는 공동체의 믿음을 원하시고, 그 속에서 개개인에게 역사하신다’고 느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내리신 이런 축복들은 비단 저 혼자의 기도와 노력이 아니라

    믿음 하나로 살아가려는 가족 구성원 전체의 노력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족 구성원간의 믿음과 소망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서로를 끌어주고 성장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분명 원하신다고 믿습니다.

    제가 올해 결혼 5년차인데 결혼 전부터 지금까지도 매일 저의 가장 큰 기도 제목은 ‘믿음의 가정을 이루게 하소서’입니다.

    제 평생의 큰 기도 제목이 될 것 같습니다.

    하루하루 허덕이며 살면서 잘 꾸려나갈 수 있을까 라는 걱정과 두려움도 많지만

    매일 맞닥드리는 사소한 성장에 감사하기도, 부족한 실수에 회개도 하면서 나아가고 있습니다.

    부디 저희 가정을 위해 많은 기도를 부탁드리며 오늘 저의 간증이 여기 계신 모든 성도님들께 은혜로운 시간이었기를 바랍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감사합니다.

     

    편집 : 안*수 형제

  • [성도간증]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대방교회 다니엘회 김*준 형제)

    [성도간증]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대방교회 다니엘회 김*준 형제)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대방교회 다니엘회. 김*준 형제)

     

    안수를 받기 위해 걸어 나가는 길. 저의 발걸음마다 눈물이 터졌습니다.  뜨겁고 묵직한 것이 복받쳐 오르며 모든 성도가 지켜보는 가운데 흐느껴 울게 했습니다. 고작 몇 걸음이지만 거북이 엉금하듯 한 걸음 한 걸음 나아오는 제 모습에 많은 자매들이 “얼마나 아프면..” 했습니다. 너무나 쉬웠던 이 예배의 자리에 간절함으로 다시 서게 해주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간증하고자 합니다.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증하겠습니다.

     

    평범한 일상의 사건 

    지난 3월이었습니다. 저는 늘 그랬듯 평소와 같이 일요일에 출근하였습니다. 저는 일 욕심이 많은 편입니다. 바쁜 일상 중에 운동도 챙겨야 하기에 일요일은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하면서 일과 운동까지 해결하곤 했습니다. 안양천을 따라 구로 사무실로 이동하던 중. 자전거를 탄 어린아이가 아주 갑작스럽게 저의 자전거 앞에 가로질러 끼어들었습니다. 힘을 다해 급히 브레이크를 잡았습니다. 저의 자전거는 앞으로 쏠려 엎어지고 말았고, 제 머리는 바로 땅에 받아 버렸습니다. 순간이었습니다. 저는 혼자 힘으로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이었고, 그날 쓰고 나갔던 고글에는 피가 맺혔었습니다. 숨을 쉬는 것도 매우 힘이 들었습니다. 아이는 아무 문제 없이 무사하다는 것에 다행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아이의 아버지가 급히 응급차를 불렀고 인근 대학병원으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저의 병원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감사함은 다시 막연함으로 

    일요일의 응급실은 혼잡하고 대기 시간도 길었습니다. 심한 통증이 있었지만, 진통제를 맞고 호흡은 할 수 있는 정도였습니다. 스스로 걷기가 힘이 들었지만, CT 촬영 후 의사 선생님은 특별한 문제가 없다며 퇴원 조치를 하였습니다. 다행이면서도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습니다. 근육이 놀라서 그럴 것이라 마음을 다독였습니다. 자고 나면 괜찮을 거란 생각과 달리 새벽에 통증이 심해졌습니다. 아침만을 기다리다 인근 병원으로 다시 향했습니다. 전문의는 엑스레이에서 등뼈에 뼈가 뭉개져 있는 것을 어렵게 발견했습니다. 상태가 심각하여 바로 입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심각했다면 곧장 하반신 마비가 되었을 텐데. 아주 다행인 줄알라고 했습니다. 큰 대학병원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을 이 작은 병원에서 발견해 준 것이 감사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감사함과는 달리 의사 선생님과 대화는 항상 쉽지 않았습니다. 일방적인 대화 유형이었고, 저의 질문과 의견 등에 냉담하셨습니다. 의사의 처방은 3개월간 침대에 누워서 통나무와 같이 생활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식사는 물론, 대·소변도 누워서 해결하라고 했습니다. 겪어보지 않은 생활이라 실감 되지 않았지만, 상황의 심각성에 따라 뭐든 감수하겠다는 마음이었습니다. MRI 촬영 후 상태가 아주 좋지 않아서 수술의 필요가 있지만, 수술하기에는 위험하고 본인은 할 수도 없으니 알아서 판단하라고 했습니다. 저와 아내는 고민 끝에 전원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기약 없이 긴 시간

    수술과 치료를 위해 여러 차례 병원을 돌아다녀야 했습니다. 가까운 유명한 대학병원으로 이동했지만, 응급실 대기만 12시간 이상 되어 입원이 불가했습니다. 다시 가까운 병원으로 이동하기로 하고 또 이동했습니다. 응급실에서 MRI를 확인한 전문의는 환자분은 빨리 수술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병원에서는 수술할 전문의가 없으니 다른 병원에 가라고 했습니다. 그때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어찌할 바를 모르던 막연함 속에서 그토록 듣고 싶던 똑 부러지는 표현이었습니다. 명확한 의견만으로도 저희 부부에게는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추천 받은 한 척추 수술 전문병원으로 또다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이동한 병원에서도 MRI 상태를 보고서 의사들끼리 많은 논의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결론은 이 병원에서 수술을 할 수는 있지만 위험해서 못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수술이 가능한 다른 병원을 수소문해 찾아 줬습니다. 아침에 나섰던 길인데 시간은 저녁이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하루 종일 엠블런스(구급차)를 타고 이동한 지라 어지럽고 힘이 쭉 빠졌습니다. 다행히 이 병원에서는 입원 수속을 하게 되었고 드디어 병실 침대에 누울 수 있었습니다. 늦은 저녁 운동복 차림의 의사 선생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서둘러 수술을 해야겠다고 하셨고, 간호사 선생님께 곧장 스케줄을 조정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응급수술로 다음날 바로 수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휘파람 불며 할 수 있는 수술은 아니지만 못할 수술은 아닙니다” 오랫동안 마음 졸여온 저에게 의사 선생님의 표현은 큰 안도감을 주었습니다. 

     

    두려움보다는 설렘

    수술은 아주 이른 아침에 잡혔습니다. 수술에 대한 두려움은 별로 없었습니다. 수술 후에 대한 설렘만 있었습니다. 그리고 막연히 주님께서 잘 지켜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눈을 떴을 때, 저는 비닐에 싸여 있었습니다. 어수선하고 시끄러운 상황이지만 도통 알 수 없는 분위기였습니다. 잠시 후 우주복을 입은 간호사가 와서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환자분, 코로나 걸리셨어요!”  황당하게도 나 홀로 코로나 전용 병실에 있었습니다. 잠시 후 의사 선생님이 오셨습니다.  “환자분 코로나 걸렸던 거 아세요? 우리 병원이 피해가 막심합니다.”  코로나 신속 항원 결과에서는 음성이었지만, 수술 들어간 후 아내에게 맡겨 둔 휴대전화로 코로나 정밀검사 결과 문자가 왔습니다. 김희준 양성. 수술 후 병원은 난리가 났습니다. 병원 장비들도 못 쓰게 되었답니다. 법적으로 코로나 환자는 수술할 수 없으니 만약 수술을 조금이라도 늦췄거나 양성 문자가 조금이라도 빨리 왔다면, 이날 수술은 못 하게 되었을 테고 골든타임(적기)을 놓쳤을 것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천운을 타고났다며 말씀하셨습니다. 천운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심에 설레는 하루하루 였습니다. 고통 중에 기쁨이었습니다. 그리고 회복은 정말 빨랐습니다. 수술한 지 불과 2주 만에 퇴원하게 되었습니다. 

     

    느끼지 못했던 감정

    퇴원 후 안식일이 되어 교회를 가게 되었습니다. 그 전에 느낄 수 없는 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먼저는 다시 이렇게 예배드릴 수 있는 것에 감사했습니다. 하나님 앞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나오는 순간에 벅찬 감정과 하염없이 흐느껴졌던 마음은 아직도 무어라 한 단어, 한 문장으로 정리되지 못했습니다. 흐느낌 속에는 저를 안쓰럽게 바라보시던 성도들의 그 온기와 마음도 담겨 있었습니다. 제가 하염없이 이곳, 저곳 병원을 떠돌아다니는 중에도, 수술실에 있던 시간에도, 모든 성도님이 합심하여 기도해 주셨습니다.  주님 안에서 한 형제·자매로서의 위로와 응원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이전에는 미처 모르고 지냈던 주님 안의 형제·자매의 사랑을 아주 충만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사랑은 벅차게 제 온 마음으로 가득가득 안겨졌습니다. 그리고 이곳은 사랑이 가득한 성도님들이 모인 거룩한 성전이라는 마음 또한 생겼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그렇게 흐느끼게 되었습니다.                                

     

    우연이 아닌 섭리 

    병원 생활을 하면서 기도와 묵상 가운데 지난 삶을 찬찬히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신앙인들의 삶에 일어나는 일들은 우연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섭리가 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기도 합니다. 그 고난을 잘 이겨내고 나면 결국 우리가 깨달을 것을 깨닫게 되며, 바로 세울 것은 바로 세울 수 있게 됩니다. 저의 신앙생활은 안일하였습니다. 보기에 평범했습니다. 안식일을 지켰고 봉사도 해 왔습니다. 그러나 보고 싶지 않았던,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제 다른 마음을 찬찬히 보게 되었습니다. 일 욕심이 많은 저에게 신앙은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있었습니다. 율법적으로 안식일을 지킬 때도 많았습니다. 안식일 예배 때도 머릿속으로는 일에 대한 생각이 가득했고, 안식일 해가 지기만을 기다리며 안식일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였습니다. 사고 당일도 호렙산 연습이 있었지만 제가 좋아하는 일을 선택한 하루였습니다. 일이 중심이었던 삶. 저에게는 일이라는 우상이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것도 주님의 일이라며 합리화하며, 정당화 시키며 일이 중심인 삶을 살아왔습니다. 우선순위라는 작은 그 것에 제 신앙을 갉아먹는 아주 커다란 문제가 있었습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내가 바로 외식하는 자구나” 함을 뼈가 저리게 깨닫고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이 아니면 더는 깨우칠 기회가 없었겠구나. 그렇게 빠른 속도로 내가 빠져 들고 있었구나! 하나님은 이 것을 깨우치기 위해 기회의 시련을 주셨구나. 그 안에 묵상과 기도의 시간을 주셨구나.” 마침내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주관 하신다는 것을 정말 등뼈가 아프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예배의 소중함, 안식일의 소중함, 신앙생활의 소중함, 교회와 공동체의 소중함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새로운 소망

    마음고생이 심했던 아내와 걱정 많으셨던 부모님 앞에 죄송스럽지만 “이 사고가 나길 잘됐다”라고 저는 말합니다. 그리고 기도 제목이 생겼습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신앙생활에 경건히 임했으면 하는 소망입니다. 이번 사고는 워낙 크게 맞은 지라 깨달음과 변화됨이 오래 갈 것이라 기대하지만, 나약한 인간으로서 흐트러질 것이라 생각됩니다. 수술 후 등에 박힌 핀은 이제 평생 박힌 채로 살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평생 간직할 이 등에 꽂힌 핀은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증표라 생각합니다. 소망이 흐트러지는 매 순간 그때의 일을 생각나게 하시고, 등에 박힌 핀을 증거 삼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사고는 나에게 재앙이 아닌 참 평안을 얻게 하였고, 참된 소망을 갖게 해주셨습니다.

    기회를 주시고 참 소망 안에 다시 살려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아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예레미야서 29장 11절)

  • [성도간증]구원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성도간증]구원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구원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동부교회 이성자 모친)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시: 27:1)

     

    1. 친정 어머니가 유언하시다.

    벌써 30여년 전 일입니다.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남양주 경찰서 근처에 사셨을 때입니다. 어느 날 어머니를 뵈러 갔는데 저에게 유언이라고 하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멈도 숙이가 다니는 참예수교회에 다녀라!”   그 말씀을 듣고 그때 당시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숙이가 외할머니에게 그렇게 말씀해 달라고 부탁해서, 어머니가 저런 말씀을 하시는구나!’   숙이는 저의 큰 딸입니다.  그런데 나중에야  어머니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신 말씀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저의 막내동생을 매우  늦은 나이에 낳은 탓인지, 늘 애달파 하셨습니다. 현재는 늦둥이 막내동생은 물론이고,   저도  참예수교회에서 봄에 세례를 받고 돌아가신 어머니와 같은 곳에서 믿음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저도 나중에 자녀들이나 손주들에게 저의 어머니와 같은 유언을 하고 싶습니다.

    “참예수교회에 다니라고…(열심히!!)”

    그리고 나중에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고…(모두 모두!!)”
     

    2. 오랜 기간 불교를 믿다가 기독교로 개종하다.

    20년 전 일입니다.  하루는 손녀딸이 저에게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할머니, 딸이 할머니 전도하려고 저렇게 금식을 하고 있는데  부모가 돼서 교회에 좀 가 주시면 안돼요? 좀 가시지!”

    손녀(김솔)가 하는  말을 듣고,   딸이 다니는 교회를  몇 번 따라 나갔습니다. 그때는 수원에 있을때 였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 있다가  두 딸들이  가족들과 함께  직장 관계로 중국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교회를 몇 차례 나갔기 때문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젠 절에도 못 가겠고, 딸들이 없으니  교회도 갈수도 없구나!’

    그래서 몇 년동안 그냥 지내다가  ‘그래도 나는 종교를 가져야  되겠다!’ 생각하고  남편과 아들에게 “절에  좀 데려다 줄래?” 하였습니다. 그 뒤로 다시 절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몇 년 후 큰 딸이 중국에서 돌아와서  목자님을 모시고 꾸준히 심방을 왔습니다.

    심방 오지 말라고 딸을 야단 쳤는데도 계속 모시고 왔습니다.  “어휴~쟤가 왜 저러지? 내가 쟤를 잘못 가르쳤나?  나는 나대로 열심히 믿게 하고, 내 종교(불교)에  열심하도록 그냥 두지,  왜  저러나!” 하고 참 많이 힘들었습니다.

    불교 서적을  읽고 있노라면 딸은 죽자 살자  “엄마, 절에 좀 안가면 안돼요?”  했습니다.  저는 딸에게 “너 엄마한테 자꾸 그러지 말라고 했지!” 그렇게 야단 친 후 딸이 집으로 되돌아가면 저는 새벽까지 불교 서적을 읽곤 했습니다.

    외손주 병호, 병일이가  할아버지 팔순 때  성경책을 선물로 사서 가족들에게 한권씩 주면서 같이 교회 다니시자고 일일이 편지까지 써서 주었습니다.  그 때는 성경을 읽지 않았지만 지금은 아주 유용하게 잘 읽고 있습니다.

    작년에 남편이 몸이 안 좋아졌습니다.  나는 평소 남편과 부처님을 믿은후 죽으면 극락에 함께 있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목자님, 사모님,  교회분들이 자주 심방을 오시니 마음이 어지럽던 차였습니다. 하루는  같이 심방 오신 한 자매님이 가족에 대한 간증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그 간증을 듣고  ‘내가 이렇게 고집만 부릴 일은  아닌데…….마음을 좀 바꿔 보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아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니 누나가 계속 아버지한테 교회 얘기를 하니까 아버지 맘이 교회로 좀 끌리시는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되겠니?” 그 말에 아들은 “어머니! 아버지가 좋은 곳으로 가신다면 좋은 일이니까,  좋은 곳으로 가시도록 누나 말대로 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어머니 종교는 어머니 마음가는 대로 하시고요!” 아들은 이렇게 대답했고 나머지 딸들도 아들과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그 후  제 남편은  큰 사위의 권유와 많은 교회 분들의 수고를 통해 예수님을 믿고 기적적으로 세례(2022.8.15)를 받고 일주일 뒤에  낙원으로 갔습니다.  돌아가시기 전에 구원받은 것입니다. 저도 그곳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습니다.

    하늘나라로 간 남편의 옷 정리를 하는데 눈물이 너무 쏟아져서 자녀들이 대신 정리를 해주는 동안 큰 딸 집인 수원에 가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사위는 믿음에 관한 얘기들을 계속 해주었고  병호는 지극 정성으로 배려하고 저를 위로해 주었고 병일이는 차로 동부교회 예배에 참석하도록 데려다 주었습니다.  교회에 가서 조문에 대한  답례인사를 하고 난 후, 속으로  ‘나도 애들 아버지를 따라 가야지!’ 이런 마음으로 그동안 심취해서 보던 불교 서적들을 모두 정리해서 다 절에 가져다주고 와서 마음을 굳게 먹고 애들 아버지와의 약속대로 안식일마다 교회에 나가서  둘째 딸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특히 찬송가 가사가 구구절절 마음에 와 닿아서 이제 더욱 열심히 믿음 생활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즘 집에서는 간증집을 읽으며 지내고 있습니다.

     

    3. 세례 받기전  2주간 전혀 음식을 못 먹다가 세례(5.14)받고 다시 먹게 되다.

    올 봄에 있었던 일입니다.  세례식을 2주 앞두고 갑자기 음식을 먹으면 토하고  전혀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녀들이 저의 건강이 걱정되었는지 저를 큰 병원에 데려 가서 모든 검사를 다 마쳤는데도 건강상 문제는 없다는 진단이 나왔는데, 이상하게도  여전히 식사는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애들 아버지는 9일간 곡기를 못먹고  위중한 상황이 되었었는데,  저는 세례를 앞두고 10일 이상 식사를 못 하니까 교회는 비상이 걸려서 저를 위해 많은 기도를 해 주셨습니다.

    세례받기 전에 제가  두 번 꿈을 꾸었습니다.  화요일 저녁에는 애들 아버지가 꿈에서 나타나  “당신 때문에 내가 바늘에 찔리는 고통을 받는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얘기를 듣고 깜짝 놀라서 잠에서 깨었습니다. 문득 내가 불교와 관련된 것들을 다 정리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 정리한다고는 했는데 혹시나 남아 있는 것이 있는지 찾아보았습니다. 그런데 불경책 1권과 염주1개, 절에 다닐 때 입었던 바지 1개, 불교 달력 등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샅샅이 찾아서 모두 다 갖다 버렸습니다.

    세례 받기 하루 전에 또다시 꿈을 꾸었습니다.

    2주간 음식을 전혀 먹지 못해서 너무 너무 배가 고파 있던 나에게  아름답고 파아란 바다에서 어떤 두 사람이 밥을 주어서 너무 너무 맛있게 먹는 꿈을 꾼 것입니다.  저는 꿈을 꾸고 나서 힘이 났습니다. 지금도 그 꿈을 생각하면 너무나도 기쁩니다. 

    저는 꿈을 꾼 다음 날인 2023년 5월 14일에 애들 아버지가 세례받은 그 장소에서 둘째 딸과 함께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식후  교회에서 예약해준  식당에 갔는데 그동안 먹지 못한 식사를 세례받은 그날  점심 식사부터 아주 맛있게 할 수 있었습니다. 할렐루야!

     

    4. 대만교회 방문에 막내 딸과 손녀 현경이도 함께 갈 수 있도록 인도하시다.

    저는 자녀가 4명인데 큰 딸 숙이와 둘째 딸은 믿고, 아들과 막내 딸이 아직 믿지 않는데,  이번 가을에 교회에서 새신자와 구도자들을 위한 대만 여행(2023.10.30.~11.5)에 믿지않는 딸과 손녀 딸이 함께 가게 되었습니다.  목자님 이하 여러 교회 성도님들과 함께 참석할 수 있도록 해 주심에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을 어떻게 인도해 주실지 기대 반 설레임 반입니다. 감사주!

     

    5. 명절이나 남편 기일에 제사를 지내지 않고 온 가족이 온전한 예배를 드리다. 

    큰 사위 인도하에,  믿지 않는 자녀들까지 온 가족이 모여서 함께 가족 예배를 드리며 온전한 믿음의 가정으로 한걸음 한걸음……. 인도해 주시고 계십니다.  과거에  제가 하나님을 몰랐던 시간에도,  많은 목자님과 성도님들의 한없는 기도의 힘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가족들을 사랑으로 인도해 주고 계시다는 것을  깨달아 가고 있습니다. 남은 여생 그 은혜에 보답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모든 감사와 영광을 주님께 돌립니다.

    감사합니다.

    사진1 이성자모친과 둘째 따님의 세례식날

    사진2 자녀, 남동생, 사위, 손주와 함께

    사진3 성찬을 받는 모습

    사진4 모친의 전도대상 손주가 교회 온 날,   남동생 이수영 형제님, 큰 딸 남궁숙 자매님과 함께

    사진5  모친 어머니의 살아 생전 모습.  세례 받고 큰사위(박성구형제님)가 남양주까지 가서 수원교회 영은회 참석시키기 위해 차로 모시고와서  영은회 내내 업어서 예배당으로 가는 모습(30여년전 사진)

    사진6 모친의 손녀 솔이자매&가이자매가  이모 남궁숙자매님의 인도로 세례받고 수원교회 돌아와서 감사 찬양하는 모습(2003.10.3)

  • [성도간증] 사랑으로 앞길을 지도하시는 하나님 (수원교회 안*수 형제)

    [성도간증] 사랑으로 앞길을 지도하시는 하나님 (수원교회 안*수 형제)

    안희수 형제

     

    ‘사랑으로 앞길을 지도하시는 하나님’

     

    할렐루야.

    주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증하겠습니다.

    저는 이 시간 ‘사랑으로 앞길을 지도하시는 하나님’을 간증하고자 합니다.

     

    <잠언3:5~6>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먼저 이 자리에 서서 하나님의 사랑을 간증하도록 인도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지난 2020년 6월 수원교회로 전입하고, 그해 9월 온라인으로 성도님들께 간증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땐, 제 고등학생 시절부터 군생활 전역하기까지의 삶속에서 함께하신 하나님을 증거했었습니다.

    대학시절, 군생활 많은 어려움 속에서 앞길을 인도하시고 훈련시킨 내용이었습니다.

    내용을 요약하면, 하나님께서 놀라우신 은혜로 무사히 그리고 안정적으로 직업군인의 삶을 살았으나,

    그 속에서 안주하지 않고 신앙을 위해 전역을 결심하도록 인도하셨다.

    인간의 눈으로 바라볼 때, 한치앞도 내다볼 수 없는 지금의 현실이지만 지금까지 그래왔듯,

    앞으로 저와 저희 가정에 역사하실 하나님을 믿으며 미리 감사드린다. 그리고 기대가 된다. 였습니다.

     

    1. 나를 낮추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심

    그 간증 이후로 저는 본격적인 취업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저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어느 곳에서 어떤일을 하게 되든 잘 해낼 자신 말이죠. 그런데 바로 그것이,

    이 사회에 나와 첫걸음을 내딛는 저에게 아주 큰 문제였습니다.

    전역 직전 부대에서 늘 했던 생각 그리고 말이 있습니다.

    ‘내가 전역하는 것은 하나님께 더 다가가기 위함이다.’

    그러나 막상 전역하게된 이후 실천에 옮겨져야 했으나, 겉만 그랬습니다.

    수십 장의 이력서를 넣으면서, 저는 무늬만 기도했고 제 뜻을 관철했으며 제힘을 믿고 있었습니다.

    군 생활 내내 왜 전역하냐, 잘한다 등등 잘한다 잘한다 하니까 저 스스로 정말 나는 잘한다고 착각했던 것이죠.

    면접의 기회조차 없이 정~말 허무하게 많은 회사에서 불합격 통보를 받았습니다.

    모아놓은 퇴직금은 점점 줄어가며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가슴이 답답하고 불면증에 시달릴 정도로 마음이 불안했습니다.

    하루는 심야에 잠이 오지 않아, 효*자매랑 집 앞을 산책하며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우린 앞으로 어딜 가게 될까? 어디에서 뭘 하고 있을까? 하나님께서 우릴 인도하실 거란 믿음이 있지만,

    행동은 그렇게 안 됨을 보고 개탄스러웠습니다. 저희 가정엔 의지하고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20년 12월 한 공공기관의 논술시험을 치르고 집으로 오는 차에서 찬양을 듣는데 눈물이 났습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퇴직금을 믿고 있었고,

    제 능력을 믿고 있었던 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그리고 효주자매에게 우리 가정과 취업을 위해 기도하자고 했습니다.

    그리곤 조용히 재임용을 알아봤습니다. 이때까지도 믿음이 너무 부족했던 것이죠,

    하지만 며칠 후 면접제안이 왔습니다.

    제 군경력을 다 인정해주고 지금까지의 대우를 해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믿지 않았지만, 어쨌든 이것을 마지막으로 생각하고 면접을 준비하여 회사에 갔습니다.

    추운 겨울 수원 광교까지 *주자매가 친히 차로 데려다줬습니다.

    웃으며 면접 잘 보고 오라고 하지만, 아 이번에 면접 잘 못 보면 나는 돌아갈 곳이 없다.

    배수진을 치고 죽기 살기로 해내야 한다. 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어쨌든 2시간의 면접을 본 이후 저는 그 자리에서 채용이 됐습니다.

    저는 면접을 끝내고 나오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하지만 1년도 안 돼 우리 사업부는 폐지 순서를 밟게 됐고 모두 정리해고를 앞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대표님이 저를 따로 부르더니, 저만큼은 본사에서 계속 같이 일을 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저는 지금 회사 대표님의 양아들 대우를 받으며 행복한 직장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좋은 회사냐면, 군 생활 6년 동안은 매일 아침 출근하기 힘들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3년 차가 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회사에 나가기 싫다’라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아, 내가 너무 교만했구나, 지금까지 지내온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임을 잊었구나.’

    광야에서 하나님이 늘 함께하셨지만, 혼자라고 생각했던 저에게, 내가 너와 함께한다.

    라는 확신이 들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1. 함께하심을 알게 하심

    그렇게 저는 사회에서 첫 직장을 갖게 됐습니다.

    그런데 저희에겐 직장 외에도 걱정이 있었습니다. 바로 집이었습니다.

    전역 직후에 임시로 병점에 전셋집을 구했는데, 집값이 요동치며 한창 부동산 이슈들이 터질 때였습니다.

    그러던 중 청약에 관심을 두게 됐고, 밑도 끝도 없이 청약을 넣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일찍 효*자매가 와 됐다! 여보 일어나봐! 하더니 핸드폰을 저에게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청약이 당첨됐다는 것입니다. 저는 시큰둥했습니다.

    왜냐면 그 경쟁률이 얼마나 되고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뉴스에나 나오는 로또 청약이었습니다. 시세차익 15억 이상이 나는 그야말로 로또 청약이었습니다.

    이야 됐다! 하나님이 이렇게 나를 일으켜 세우시는구나! 뭐 제멋대로 아주 생각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상황에서의 ‘부’는 저에게 오히려 독이 됐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왜냐면 교회와 신앙생활이 뒷전인 채 오롯이 그 집만 바라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단순히 큰 재산을 가지게 됐다는 생각만 했습니다. 참 부끄럽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단 3일 만에 부적격 통보를 받았고, 남들이 다 당첨 서류를 제출하러 분양사무소에 갈 때,

    저희는 부적격 서류를 제출하러 가는 잔인한 일을 경험했습니다.

    당시 담당자가 말하길, 저희 청약통장은 1순위가 아닌 2순위로밖에 지원을 못 하게 되며,

    그 말인즉슨 20~30년 후에나 당첨을 노려볼 만 하단 절망적인 얘기를 들려줬습니다.

    저는 이 절망적인 순간을 왜 하나님께서 나와 우리 가족에게 주셨을까 생각했습니다.

    ‘아. 하나님의 큰 뜻이 있으리라. 세상의 것에 눈 돌리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자’

    절망 속에서 깨달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믿었습니다.

    이런 놀라운 당첨 경험을 주신 분이 나의 하나님인데, 나를 굶게는 안 하시겠구나.

    이 이후에 앞서 말씀드렸던 취업을 하게 됐고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취업 후 얼마 안 돼, 또 놀라운 경쟁률을 자랑하는 민간임대아파트에 당첨됐습니다.

    전국에서 핫하다는 신축아파트에 월 20~30만 원의 월세만 내고 살고 있습니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이 함께하고 계심을 알게 하신 은혜가 큰데,

    고난뿐만 아니라 저와 제 가족에게 필요한 것들.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취업과 집을 허락해주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나를 사랑하시는구나를 느낌과 동시에 두려움도 들었습니다.

    불가능한 일들이 짧은 기간 동안 물밀 듯 오다 보니 하나님이 함께하심이 두려웠습니다.

    정말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

    말만 감사가 아니라 행동해야 살아갈 수 있겠단 생각을 했습니다.

     

    1. 확인하심

    직장과 집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새집으로 이사한 후, 퇴근하며 *주자매에게 전화하며 이런 이야길 나눴습니다.

    우리가 작년만 해도 불면증에 시달리고 두려움과 불안감에 살았는데 지금의 삶을 살다 보니 너무 감사하다.

    하나님께서 어떤 일이든 시키면 감사함으로 해야겠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뜬금없이 이엘리사 목자님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2022년 재무임원을 맡아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불과 며칠 전 제가 얘기했던 걸 하나님께서 들으신 것이었습니다.

    저는 두려움에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습니다. ‘네 목자님 순종하겠습니다.’

    그래서 제가 지금 재무임원을 맡게 된 것입니다.

    제 삶 한순간도 하나님께서 놓치지 않고 보고 듣고 계심을 믿습니다.

    그리고 21년 12월, 생각지 못한 일이 일어납니다. 분양사무소 직원이 했던 말 기억하십니까?

    저희 청약통장은 이제 당첨될 일이 없다고 한 것.

    그러나 갑자기 저희에게 유리한 법이 생겼고,

    법적 신혼부부를 2~3주 남기고 신혼부부 특별공급 청약에 당첨이 됐습니다.

    이곳 분양사무소 계약을 하러 가서 담당 직원이 말하길, 운이 너무 좋다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믿습니다.

    지금 우리 집에서 40~50분 걸려 교회를 오고 있는데, 내년 2월이면 15분 거리로 이사 옵니다.

     

    성도님들 제가 좋은 직장 그리고 집을 갖게 된 것이 좋은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늘 제 말에 귀 기울여 주시고,

    마귀가 언제든 집어삼키기 위해 호시탐탐 노리는 이 세상에서,

    제가 신앙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도록 훈련시키시고

    사랑하고 계심을 느끼고 있기에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오늘도 연약한 저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감사함으로 나아와 예배드리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지금까지 저는 사랑으로 앞길을 지도하시는 하나님을 증거했습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아멘.

     

    글 : 안*수 형제

  • [성도간증] 나를 포기하지 않으신 주님 (천안교회 이찬우 형제)

    [성도간증] 나를 포기하지 않으신 주님 (천안교회 이찬우 형제)

    천안교회 이찬우 형제

    할렐루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증 하겠습니다.

     고등학교 때 나는 연약한 믿음의 소유자였다. 학교에서는 다른 세상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입에 욕을 달고 살았고, 두려움 때문에 식사 전에 기도를 하지 못하는 아이였다. 또한 예배시간에 항상 지각을 했으며 야간자율학습 때문에 학교를 빠지는 것에 대해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만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 그래도 하나님을 완전히 잊어버리지는 않을 정도의 미지근한 신앙은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고 진로를 결정해야하는 시기가 왔다. 대학을 진학하고 과를 정해야 했지만 쉽지가 않았다. 고3이 되기까지 나는 하고 싶은게 없었다. 그러던 중 고은쌤과 상담을 하게 되었고 체육교사로 진로를 정하게 되었다. 내 성적에서 가능한 교사 직업이었고 나 역시도 이 진로가 마음에 들었다.

     체육교사로 진로를 정한 이유에는 형의 영향이 있었다. 형은 기타를 전공하며 들인 돈과 시간과 노력을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다고 포기했다. 물론 그런 모습은 믿음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미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뜻에 맞는, 안식일을 잘 지킬 수 있는 직업을 선택하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공무원 아니면 교사를 하자는 마음가짐을 먹었고 체육교사가 되기 위해 체육입시 학원에 등록하게 되었다. 체육교육과는 성적도 어느 정도 나와야 했기 때문에 나는 수능 공부와 운동을 병행하게 되었다. 수능 전까지는 일주일에 3번씩 학원에 가서 운동을 했고, 학원을 가지 않는 날에는 학교에 남아서 야간자율학습을 했다. 이 당시에 처음으로 우리 교회에서 생긴 문화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고3들을 위해 밤마다 모여 기도를 하는 것이었다. 나는 나를 위해 기도해주는 것이었지만, 가끔씩 참여하지 않았다.

     그렇게 수능 당일이 되었고, 나는 수능을 망치고 말았다. 가채점을 한 나의 등에는 식은땀이 흘렀고 학원 선생님께 큰일이 났다고 전화 드렸다. 학원에서는 여러 가지 대안을 제시해주었다. 가장 먼저 권한 것은 재수하는 것이었다. 실기 점수로 부족한 수능점수를 만회하기에는 현실적으로 힘들었기 때문에 다음을 기약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부모님께서 재수하는 것을 반대하셔서 무산되었다. 두 번째 방법은 강원도에 있는 사범대를 가는 것이었다. 타 지역의 사범대에 비해 성적 커트라인이 낮았기 때문에 나도 충분히 지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엄마께서 신앙생활을 이유로 반대하셨다. 그래서 나는 그냥 더 열심히 해서 실기 성적을 올리기로 마음먹었다.

     수능이 끝나고 학교 측에 사정을 말해 학교 대신 체육학원을 가는 시즌이 되었다. 나는 매일 아침 9시에 학원에 가서 밤 9시까지 운동을 했다. 내 인생에 있어서 이때만큼 힘들고 이때만큼 열심히 해본 적이 없었다. 중간에 나는 손목 골절을 당했지만, 깁스를 하고 학원에 가서 운동을 할 만큼 열심히 했다. 그리고 수능을 망치게 된 것은 내가 기도를 소홀히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밤에 학원이 끝나면, 하루도 빠짐없이 교회에 가서 기도에 참여했다. 정말로 기도를 많이 했다. 실기 성적을 올리기가 그만큼 힘들었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이 해주셔야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드디어 실기 당일이 되었다. 나는 아침부터 실기 시험을 보는 중간까지도 마음속으로 기도를 했다. 그토록 무언가를 바라본 적이 없었을 만큼 나는 간절히 기적을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한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실기 성적은 그 자리에서 바로 알 수 있기 때문에 나는 내가 불합격이라는 것을 예측할 수 있었다. 집에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정말 많은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나는 최후의 수단이라고 생각했던 공무원을 하기로 결심했다. 버스 안에서는 학원 친구들이 자신들의 실기 성적을 얘기하며 떠들고 있었지만, 나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핸드폰으로 공무원 시험에 대해 알아보고 있었다. 저녁에 집에 도착해 부모님께 대학을 가지 않고 공무원을 하겠다고 말씀을 드렸다. 그러자 부모님께서는 나에게 화를 많이 내셨다. 내가 얼마나 많이 노력했는지, 이 결정이 얼마나 힘든 결정이었는지 아무도 이해해주지 못한다고 느꼈다. 더 이상의 방법이 없어진 나는 결국 현실을 도피하기로 했다.

     집에서 나와서 나는 친구들을 불러 피시방에 갔다. 아무 생각도 하기 싫어서 게임으로 시간을 보냈고, 어느덧 늦은 밤이 되어버렸다. 친구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갔지만, 나는 돌아가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눈이 많이 내리는 겨울에 가출을 하기로 결심했다. 대부분 찜질방에서 자고 낮에는 피시방에서 시간을 보냈다. 엄마는 내가 가출한 동안에 나에게 많이 연락했지만, 그 내용은 나를 더욱 화나게 만들었다. 그 때는 학생부 영은회를 가는 주였고, 엄마는 나에게 빨리 와서 영은회를 참석하라고 계속 연락하셨다. 나는 들어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이제는 돈도 없고 너무 추워서 결국 다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엄마에게 집에 들어가겠지만, 영은회는 참석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사실 나는 영은회에 참석하지 않기 위해서 일부러 안식일에도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영은회 출발하는 안식일까지 들어가지 않으면, 영은회를 참석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랜만에 들어온 집에는 초은이와 경석이가 있었다. 영은회를 참석하도록 설득하기 위해서 엄마가 부른 것이었다. 초은이는 입시 때문에 영은회 중간부터 참석하게 되었는데, 이 때 나도 같이 가라는 것이었다. 나는 완강하게 거부했다. 초은이가 영은회에 가는 날 아침에, 엄마는 나에게 영은회를 가라고 소리 지르며 내 짐을 대신 싸주셨다. 그리고 집사님께 전화해서 데리러 오라고 했고 경석이도 간다면서 나를 설득했다. 나는 정말로 억지로 차에 타게 되었다. 그런데 차에는 경석이가 없었고 엄마에게 속았다는 마음에 매우 화가 났다.

     이미 차는 전주로 향하고 있었지만, 나는 도저히 이런 마음으로 영은회에 참석할 수 없었다. 사실 나는 이때부터 이미 도망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전주에 도착한 이후에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 나는 화장실을 가는 척하면서 도망을 쳤다. 도망은 쳤지만, 어떻게 할지를 몰라서 그냥 나는 어떤 산 위에 올라가 벤치에 한 시간 정도 앉아있었다. 날씨는 너무 추웠고 나는 일단 천안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택시를 타고 터미널을 간 후에 천안 가는 버스를 탔다. 그 사이 집사님께 소식을 들은 엄마는 영은회에 참석하지 않아도 좋으니 집에 들어오라고 하셨다.

     천안에 도착한 후에 집에 가는 버스인 12번을 찾는데 아무리 찾아도 12번 버스가 없었다. 알고 보니 타는 곳에 사람들이 너무 몰려서 일부 버스 정류장이 바뀌게 된 것이었다. 그 사실을 몰랐던 나는 무슨 생각인지 몰라도 그냥 아무 버스나 타고 가기 시작했다. 아는 곳이 나오면 내리기로 생각했지만 점점 이상한 데로 가게 되었다. 결국 버스가 모여서 쉬는 곳까지 도착한 나는 그 곳에서 혼자 내리게 되었다. 그 날은 눈이 엄청 오는 날이었고 주위에는 온통 도로밖에 없었다. 나는 일단 걸어야겠다고 생각했고, 걷다보니 아파트 단지가 보였다. 그래서 거기로 가서 택시를 타든 버스를 타든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눈이 많이 왔기에 아파트 단지로 가는 길이 잘 보이지 않았고 주위를 살피던 중 하천에 돌다리를 건너가는 길을 발견했다. 나는 그 길을 통해 아파트를 가고자 언덕을 내려갔다. 그런데 그 순간, 나는 눈에 미끄러져 넘어졌고 손으로는 가시나무를 짚고 말았다. 손에서는 피가 흘렀지만, 나는 그런 것에 신경 쓸 수 없었다. 내가 넘어질 때 마귀의 웃음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웃음소리를 듣고 나는 뒤를 돌아봤지만 사람은커녕 새 한 마리도 지나가지 않았다. 집에 들어갈 마음이 없었지만, 나는 무서운 마음에 바로 집으로 향했다. 그 후 핸드폰을 확인해보니 교회의 친구들과 선생님에게 전화가 엄청나게 와 있었다. 이를 모두 무시했고, 신기한 체험은 했지만 여전히 내 신앙은 밑바닥이었다.

     아직 내 마음이 강퍅한 가운데, 총회 행사가 하나 더 남아있었다. 바로 고3수련회였다. 사람들은 이전보다 나를 더욱 강하게 설득했다. 나는 친구들의 전화를 모두 무시했다는 것과 강퍅한 마음 때문에 가기 싫었지만, 결국 억지로 참석하게 되었다. 고3수련회에 가서 들은 첫 강의는 정말 말도 안 되는 내용이었다. 어떤 형제가 공무원이 되었는데 지역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바꾸려고 다시 시험을 보았고 붙은 것을 자랑했다고 했다. 그런데 목자님께서는 그것이 불쌍하게 느껴졌다는 것이다. 내가 그토록 바라던 것인데 그것이 불쌍하다는 목자님의 말씀이 이해가 안됐다. 경쟁하지 말라는 강의를 시작으로 나는 요셉의 삶이 어떠했는지 고3수련회를 통해서 배우게 되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간다면, 세상에서 경쟁하며 살아가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고3수련회는 그동안의 나의 신앙생활을 돌아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조금은 똑바로 볼 수 있는 시야를 가지게 되었다.

     

     나는 대학입시의 「다」 군에 썼던 일반 4년제 컴퓨터공학에 합격하게 되어 대학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진학할 대학교와 전공할 과를 선택한 이유는 정말 아무것도 없다. 「다」 군에는 체육교육과를 쓸 수가 없으니까 그냥 아무거나 넣은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너무 자퇴가 하고 싶었다. 오고 싶지 않은 학교였던 것도 있지만, 수업에 따라가기가 너무 힘들었다. 하루는 무슨 프로그램을 짜라는데 어떻게 하는지 몰라서 친구들 것을 베끼는 내가 너무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자퇴하는 것은 부모님이 반대하실 것이 분명하였기 때문에 나는 학교를 다니면서 공무원을 준비하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수업 시간에 공무원 교재를 펴서 공부했고 수업도 가기 싫으면 그냥 안 갔다. 여전히 난 무엇을 해야 할 지 모른 채 내 계획만을 세우기에 바빴다.

     대학에 들어가면 빼놓을 수 없는 문제가 바로 술 문제이다. 아니나 다를까 나의 신앙에 다시 적신호가 들어온 것은 바로 술 때문이었다. 신앙 안에서 술에 대한 조언을 들으면 항상 처음이 중요하다고, 처음에 인식을 확실히 박아둬야 한다고 많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첫 개강파티에서 거부하지 못하고 술을 마셨다. 그 후에도 나는 술자리에 많이 갔고, 나와 술을 마시는 것을 좋아하는 선배가 있어 항상 옆에 나를 앉히고 술을 마시게 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뿐일 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과 삶에서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1학기가 끝이 나고 나는 내 기도제목을 내가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임을 밝히는 것으로 정했다. 기독교인임을 밝히고 술을 마시지 않고 기도할 때도 당당한 모습이 되는 것이 내 소망이었다. 방학동안 이 기도제목을 놓고 계속 기도했고, 방학이 거의 끝나갈 무렵 개강파티 날이 잡혔다. 개강파티 전 날, 날 좋아하는 선배에게 개강 파티 날에 자기 옆에 앉으라고 카톡이 왔다. 나는 두려웠다. 기도는 했지만, 여전히 나는 소심하고 연약했고 또 다시 같은 잘못을 저지를 것 같았다.

     개강파티 당일이 되었고 선배들이 술을 따라주기 시작했다. 내 차례가 다가올수록 내 두려움은 더욱 커져만 갔다. 그리고 내 차례가 되었을 때 나는 믿을 수 없는 행동을 하게 되었다. 선배들과 친구들이 모두 모여 있는 자리에서 나는 기독교인이라서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말한 것이다. 이미 많은 술자리에서 술을 먹었던 나였기에 이 말을 하자, 나는 많은 욕을 먹었다. 그러나 이후로 나는 한 번도 술을 마시지 않았고 밥 먹을 때도 당당하게 기도할 수 있게 되었다. 한 번도 목소리를 내지 못하던 겁 많은 내가 기독교인임을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으시고 용기를 주셨기 때문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나는 점점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인도해주시는 분이신지 내 안에 증거를 쌓아갔다. 그래서 원하지 않던 대학, 원하지 않던 과였지만 주어진 자리에서 열심히 하자고 결심하게 되었다.

     당시에 이해하기 힘든 일이 하나 더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사역을 주시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자격 없고 능력 없는 사람인데 하나님께서는 왜 나를 세우시고 사용하려 하실까? 나에게 있어 큰 의문이었다. 자기 신앙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내가 어떻게 교사로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하나님께 감사보다는 원망만 했던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감사하는 찬양인도를 할 수 있는가? 처음에는 거부감이 들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셨기에 부족한 내가 쓰임 받을 수 있도록 나를 가르치시고 훈련시키셨다. 교사훈련학교와 단기신학을 통해서 교사는 어떤 직분이며 찬양은 어떤 것인지 배우게 되었다. 마귀의 음성을 들었던 내가, 이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모태신앙으로 듣기만 한 하나님은 그저 머리로만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대학입시를 거치면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눈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계획하시고 이루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육신적으로 보면, 나는 실패한 사람이었다. 수능을 망쳤을 때, 실기를 못 봤을 때, 대학에서 불합격 통지가 왔을 때, 부모님이 내 의견에 반대 했을 때 나는 언제나 실패한 사람이었고 내 모든 노력은 헛수고였다. 그래서 내 기도는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다. 모두가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그 걸음을 걸으셨고 아무도 생각지 못한 방법으로 나사로를 치유하셨다. 내 계획은 실패한 것이 맞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실패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생각지 못한, 나의 계획을 훨씬 초월하여 나를 만들어가고 계셨다. 내가 영은회에 가지 않고 도망쳤을 때, 버스 정류장이 바뀌어 있던 것, 내가 모르는 곳에 내리고 넘어져서 마귀의 웃음소리를 들은 것, 일반 4년제 컴퓨터공학에 입학한 모든 게 우연이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에게, 나를 인도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또한 하나님은 너무 끈질긴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의 사랑을 듣고 배워온 나이지만, 나는 그것을 잊고 그 사랑을 거부했다. 안식일을 범하였고 영은회에서 도망쳤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아 예배를 소홀히 여겼고 세상 사람과 같이 살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돌아오라고 쉬지 않고 말씀하셨다. 고3을 위한 기도를 만들어주신 것도, 엄마가 영은회에 참석하라고 하신 것도, 교회의 친구들과 선생님들이 나한테 전화한 것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부르짖음이었음을 이제는 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끈질긴 사랑이다. 변화하고 성장한 내 모습이 그것의 결실이며 증거이다. 그래서 또한 하나님은 나에게, 끈질긴 사랑의 하나님이다.

     고등학교 때의 일을 쓰는 것은 나에게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 당시의 일을 돌아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주심에 감사드린다. 아직도 하나님에 대해서 모르는 게 많지만, 여전히 내 삶에 역사해주심을 통해 하나님을 더욱 알아가는 내가 되기를 소망한다. 아멘.

  • [성도 간증]인천교회 한신민 집사님 간증으로 은혜 받으세요!

    [성도 간증]인천교회 한신민 집사님 간증으로 은혜 받으세요!

    할렐루야!

    큰 아드님과 설교 듣는 모습

    인천 교회 올해 84세 되신 한신민 집사님의 간증을 전해드립니다.  `집사님의 육성으로 간증을 직접 들으시면 더 풍성한 내용이 전달 될 텐데 `라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집사님은 삼계 교회 근처 봉현리가 고향이십니다. 20세 때 참예수 교회를 알게 되어 진리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청,장년 시절 교회를 위해 헌신하셨고, 여러 교회의 벽돌을 직접 쌓으셨습니다. 교회를 위해 재물과 시간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몇 해 전 사모님이 혈액암으로 소천하셨는데, 갑작스레 둘째 아드님이 심장마비로 소천하시는 슬픔을 경험하셨습니다. 집사님의 헌신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아시고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이야기를 통해 은혜가 되었습니다.

    집사님은 60세 이후에 첫 직장을 퇴직하고, 학교 관리직으로 재입사를 하셨습니다. 그 때 어느 교직원 분이 연금 상품을 소개해 주면서 집사님의 전 직장에서 받으신 퇴직금 2천만원을 연금 상품에 가입하라고 안내해 주셨다고 합니다. 그 연금 상품이 내년 2차 퇴직을 하시는 집사님에게 10배 이상의 수익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소개해 주신 그 분은  연금 상품 가입 후 곧 바로 다른 곳으로 이직을 하셨다고 합니다. 집사님은  그 교직원이 너무 고마워서 찾고 싶다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아마도 그 교직원은 하나님께서 집사님에게 보내주신 천사인 것 같다고 하십니다. 집사님은 여든이 넘을 때까지 성실하게 일하셨고, 하나님의 은혜로 더 이상 노후 걱정이 필요 없어졌습니다.

    갑작스럽게 심장 마비로 소천하신  둘째 아드님은 교회에 예배 참석을 안 하신지 30년이 넘었습니다. 그런데 사모님 장례 후 간혹 교회에 오셨고, 소천하시기 두 달여 전부터는 안식일마다 예배에 잘 참석하셨습니다. 성령기도도 충만하게 하셨습니다.  낙원에 계실거라 믿습니다. 최근에는 잃은 양인 큰 아드님이 아버지 한신민 집사님과 함께 안식일 예배에 출석하십니다. 집사님의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교회로 한 분 한 분 인도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각 사람을 향한 구원의 계획을 알 수 없습니다. 주님 안에서 묵묵히 청지기로서의 삶을 잘 살면 하나님께서 재물도 쏟아부어 주시고, 자녀들도 다시 교회로 돌아오게 하시는 것 같습니다.

    한신민 집사님께서 하늘나라 갈 때까지 영육 간에 강건하시길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그리고 자녀들이 다 구원의 방주 안으로 들어오길 빕니다.

    성도님들도 한신민 집사님과 가족을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임미누엘♥

  • [성도간증]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 (천안교회 유정아 자매)

    [성도간증]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 (천안교회 유정아 자매)

    할렐루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증하겠습니다.

     저희 가족 구성원은 할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저까지 3명입니다. 잦은 업무로 인해 바쁘셨던 아버지였기에 어려서부터 할머니와 더 많은 시간을 보냈고 할머니는 저의 엄마이자, 가장 가까운 친구였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1학년 당시 이모할머니(대방교회 서정임)께서는 할머니를 전도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주말에도 일을 나가시거나, 일이 없는 날에는 오랜만에 휴식을 취하셨고, 남은 저는 할머니와 시장 구경을 가거나 할머니들의 수다 모임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런데 유일한 친구였던 할머니가 없자 토요일은 제게 너무나도 심심했습니다. 하루는 심심한 나머지 ‘그냥 한 번만 따라갔다 와볼까?’라는 생각에 할머니께 나도 데려가라, 따라가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이모할머니를 만나 셋이 함께 천안교회에 도착했습니다. 천안교회에 대한 첫인상은 엄청난 환영이었습니다. 교회에 도착한 뒤부터 집으로 갈 때까지 엄청난 환대와 기쁨으로 가득 채워주셨습니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가고, 다음주 안식일이 찾아왔습니다. 할머니께서는 빈둥거리며 누워있는 저에게 “정아, 교회 갈 준비 안 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너무 당황했습니다. 그냥 딱 한 번만 다녀올 생각이었는데, 당연하단 듯 준비하라는 할머니의 모습에 적잖이 당황했지만, 왜 그랬는지 저는 아무 말 없이 일어나 교회 갈 준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다음주에도, 또 그 다음주에도.. 교회 갈 준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교회에 다니게 됩니다. 사실 저의 성격은 줏대 없이 누군가 하라면 하고, 하지 말라면 하지 않는, 그냥 흘러가듯 사는 성격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이 또한 하나님의 계획이심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감사드립니다.

     

     그렇게 신앙생활을 이어가던 중, 2018년 8월 2일 할머니께서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하나님께로 가셨고, 남겨진 아버지는 절망을 표했습니다. 한 편으로는 저에게 배신감과 서운함을 느끼셨습니다. 평소에는 그렇게 눈물이 많으면서 왜 할머니의 장례식엔 울지 않냐며 이해하지 못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선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가족들에게 많은 상처를 받았고, 가장이 아님에도 가장처럼 늘 가족을 챙겨오셨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장례식장에 얼굴도 비추지 않았던 몇 명의 가족들과, 어려서부터 저를 키우시고 보살펴주셨던 할머니인데 그에 비해 울지 않는 저에게 많은 서운함을 느끼셨던 것입니다. 물론 저도 당시 할머니를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슬프긴 하였지만, 그보다는 하나님께서 안전히 잘 데려가셨으리라는 생각으로, 안도와 평안이 더 컸던 것 같습니다.

     

     제가 이렇게 슬픔보단 평안의 마음이 클 수 있었던 이유는 기도가 있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저는 당시에 할머니에 비해 기도 생활이 좋지 않았습니다. 매일 아침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시고, 또 매일 밤 자기전 기도로 하루를 마무리하시는 할머니와 달리, 저는 아버지의 눈치를 보며 마치 ‘나는 이렇게 기도 안 하니까 안심하세요’라는 둥 아버지 앞에서는 기도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당시엔 저까지 성령으로 기도해버리면 늦둥이에 외동인 저를 망쳤다며 안 그래도 심했던 핍박이 더 심해질 것 같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시고 인도하실지 모르는 일인데, 하나님께 정말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 또, 그래서인지 기도 습관이 들지 않았고, 까먹는 날도 종종 있었습니다. 무튼, 할머니께서 편찮으신 뒤로 일어날 힘과 기도할 힘조차 없으셔서 이전보다는 기도를 많이 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또, 날로 악화되어서 나중엔 거의 못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저는 갑자기 조급함과 할머니를 위해 기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누워 계신 할머니 앞에서 성령으로 기도하였습니다. (할머니와 같은 방, 하나의 침대에서 생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날은 왜인지 잠도 잘 들지 않았고 새벽 2시쯤 물을 마시고 다시 침대로 돌아가 할머니께서 숨을 쉬시는지 확인하였습니다. 원래 같으면 한 번 깰수록 더 깊이, 더 오래 잠이 들었을 텐데 그날은 잤다 깨었다를 반복하였고 할머니의 상황을 연신 확인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 할머니께선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만약 제가 평소처럼 깊이 잠이 들었다면 저는 아침에 해가 밝아서야 할머니의 상황을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전날 밤 하나님께서 기도하고자 하는 마음을 주시지 않았다면 그렇게까지 평안한 마음과 하나님께서 안전히 잘 데려가셨으리라는 믿음이 들었을까 싶습니다. 하나님께 참 감사드립니다.

     

    허나 아버지는 믿음이 없으셨기에 이게 다 교회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셨습니다. 그로 인해 교회에 다니는 저의 모습을 극도로 싫어하셨고 슬퍼하셨습니다. 영은회의 시작을 알리는 영은회 엽서는 쓰레기통에서 발견된 적도 있고, 그 밖에도 직접적으로 싫음을 표현하셨습니다. 게다가 아버지께서는 원래도 교회, 특히 방언 소리를 싫어하셨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소리에 민감하고, 잠귀도 밝고, 업무로 인해 지쳐서 피곤한 아버지의 귀에 할머니께서는 매일 저녁 성령으로 기도하시고 주무셨습니다. 아버지의 마음도 이해는 갔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핍박이 심한 날도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19년도 코로나로 인해 아버지의 교회에 대한 핍박이 이제는 더 이상 핍박이 아니라, 교회에 가지 말라는 통보로 바뀌었습니다. 코로나가 뉴스로 보도된 날 이후로 저는 교회에 가지 못하였고, 몸이 멀어지니 마음도 멀어진 건지 점점 하나님과 멀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저는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하나님보다 사람을 보러 교회에 갔던 마음이 컸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멀어지고 저는 저의 욕심을 채우기에 바빴습니다. 이전에 목자님께서 아버지의 교회에 대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더 유해지기 위해선 교회 생활에도 열심을 다 해야 하지만, 지금 내가 세상에서 맡겨진 일(학생)에 대해서도 열심히 해야 한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처음엔 열심히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며 학업을 해왔습니다. 하지만 성적이 점점 좋아질수록 나의 욕심은 커져만 갔고, 이젠 더 이상 아버지를 위함보단 나를 위함이 되어버렸습니다. 공부의 습관도 처음엔 문제집을 풀기 전과 후에, 하나님께 기도하며 능력을 구하는 시간을 가졌지만 이후엔 점점 귀찮아하며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10초 정도 되는 시간 동안만 기도하거나 그마저도 하지 않는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는 처음엔 교회와 가깝다며 좋아했지만, 나중엔 교회 언니 오빠들을 만날까 조마조마한 적도 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한 것은, 언니 오빠들과 선생님이 언제나, 저를 포기하지 않고 시간 내서 만나러 학교 앞까지 와주고 계속해서 심방과 편지를 써주었다는 것입니다. 만나서 안부를 묻고, 가끔은 따끔한 권면도 그 당시에와 지금 모두 감사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지금도 가끔씩 써주신 편지들을 꺼내서 읽어보면 당시의 제 자신이 너무 답답하고 감사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교회와 학교가 가까웠던 것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과 멀어질수록 죄에 대한 생각도 커져만 갔습니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부터 시작해서 사소한 것 하나하나 의미부여를 하며 죄라고 생각했습니다. 공기업 취업을 희망하는 동아리인 공채반에 들어가면서 토요일에도 학교를 나와 강의를 듣고 자습을 하도록 했습니다. 이 규칙을 지키지 않는다면 퇴출이었습니다. 매주 안식일에 교회가 아닌 학교를 선택하는 제 모습을 보며 옳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저의 발걸음은 학교로 향했습니다. 세속적인 욕심이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당시 저는 피부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때, 마치 여드름의 개수가 내 죄의 개수라고 생각하며 죄책감에 시달렸고 주기도문을 할 때에도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와 같이 죄에 관한 내용에서는 더 온 마음을 다해 기도드렸습니다. 성경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마치 율법주의적인 행동을 보였습니다. 죄책감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이 아니라 마귀가 주는 마음인 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그 죄책감으로 인해 하나님과 더 멀어지는 것임을 알면서도 죄책감을 떨쳐낼 수 없었습니다. 율법을 모두 지키며 살아간다는 바리새인이라 해도 사랑은 실천할 수 없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온전히, 다 지킬 수 없음을 이제는 마음으로 조금이나마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저는 외식하는 자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내 부족함을 계속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고 사모한다면,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고 하나님께 메달린다면 하나님께서 기꺼이 이전보다 나은 거룩함을 허락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 참 감사한 것은, 제가 그렇게 방황하던 와중에도 매일 성경읽기와 기도하기에 힘썼다는 것입니다. 성도님들의 사랑과 권면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과 대화하는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 제가 다시 하나님께로 나아올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그 기도는 기도라 칭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매우 짧고 형식적인 기도였습니다. 가끔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기도 했습니다. 성경 읽기도 묵상은커녕 그냥 읽는 것 조차도 힘들어했고, 자기 전에 누워서 혹은 소위 랩을 하듯 무슨 소리인지도 모른 채 읽은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형식적인 기도와 말씀 읽기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역사하여 주셨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형식적으로 말씀을 읽는데, 그냥 또 아무생각 없이 읽었음에도 말씀의 내용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열처녀의 비유에 대한 내용이었는데, 미련한 5명의 처녀들을 보며 ‘이건 나다.‘라는 생각과 함께 정신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이전부터 교회로 가야지, 이제는 돌아가야지, 이제는 그만해야지라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앞서 말씀 드렸듯 세상을 향한 욕심과 부모님의 기대, 그리고 돌아갈 수 있을까?라는 의심과 부담감이 쌓여 계속해서 저를 망설여지게 만들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마귀가 심어준 생각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께선 저의 그동안의 이런 생각들이 무색할 정도로 말씀 하나만으로 저를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이 사건 이후로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위대하고 힘 있는지를 몸으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형식적이더라도 말씀 읽기와 기도가 습관화 되어야 함을, 그 중요성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 자리에 있기까지, 하나님께로 다시 나아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기도들과 눈물이 있었을지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 나를 위해 바쁜 와중에도 매일같이 새벽기도에 참석하며 기도해준 친구, 피곤한 와중에도 멀리 사는 저를 위해, 영은회에 더 오래 참석하게 하기 위해 차량 운행 해주시는 선생님과 성도님 등등..!! 정말 많은 성도님들을 보며 하나님의 넓으신 사랑과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이젠, 그 받은 사랑을 나도 전하고 실천할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싶습니다.

     

     끝으로, 제가 슬픔보단 평안을 느낄 수 있었던 이유를 아버지도 깨달을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사실 저희 아버지께서 교회에 나오는 것이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 아버지께서 자존심이나 세상적인 것들을 선망하는 모습들을 버리고 하나님을 따르는 모습을 상상할 땐, 저에겐 영화같은 이야기, 비현실적인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한편으로는 요리 솜씨가 있으신 아버지가 주방에서 봉사하는 모습도 상상해봅니다. 이렇게 소망하며, 계속해서 아버지를 위해 기도하다가도 중간에 한 번씩 소홀해지거나 지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어렸을 적에 이를 위해 ’분명 하나님의 때가 있을 것인데, 그보다 더 빨리 허락하여 주시고 싶을 만큼 간절히 기도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더 간절히, 그리고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께 계속해서 구한다면 곧 이루시리라 인도하시리라 믿습니다. 이를 위해서 함께 기도하여 주세요.

     

     

    지금까지,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을 오실 때까지 깨닫고, 사모하며 살기를

    내가 죽고 그가 사는 삶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간증을 마치겠습니다.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살전 5:24)

  • [성도간증] 멕시코의 첫 열매 (대방교회 우*실자매)

    [성도간증] 멕시코의 첫 열매 (대방교회 우*실자매)

    할렐루야! 주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증하겠습니다.

    먼저 저에게 간증의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몇 번의 경험과 긴 여정으로 저의 신앙을 다시 회복시켜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성도님들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멕시코에서 잠시 한국행을 결정 

    저의 자녀가 세 살 되던 해, 남편이 회사에서 멕시코 법인지사 법인장으로 발령을 받았고 그렇게 참예수교회도, 참예수교회 성도도 한 명 없는 나라(멕시코)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멕시코에서의 시간은 5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쑥스럽지만 지난 5년 동안 저희는 예배다운 예배를 드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남편과 어린아이를 데리고 가정예배를 드린다는 것이 저 혼자 힘으로는 어림도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물론 어린 딸과 함께 시도를 해보긴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어린아이는 예배가 무엇인지 기도가 무엇인지도 이해하지 못하였고 무릎 꿇는 것도 집중하는 것도 힘들어하였습니다. 

    그러던 차에 아이는 카톨릭 학교로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그 학교는 가톨릭 학교답게 매주 미사가 있었고 부활절, 성탄절 등등 때마다 각종 가톨릭 행사를 지켰습니다. 기도를 할 때는 삼위일체 성자·성부·성모 성호를 그으면서 기도를 가르쳐 주기 때문에 엄마가 기도하는 방법을 다시 알려주어야 했습니다. “*희야 너는 성호를 긋고 기도 하는 거 하면 안 돼! 우리는 주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를 해야 한다!” 나름대로 참예수교회의 진리를 가르쳐 주곤 했지만 가르침에 부족함이 있었고, 아이도 귀로는 엄마의 가르침을 듣지만, 머리로는 완벽히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아이의 신앙교육에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더욱 두려운 어려움이 찾아왔습니다. 바로 코로나였습니다. 멕시코에서는 코로나로 사망하는 사람들을 자주 볼 수 있었습니다. 코로나를 직면하면서 두려웠었고 남편의 비즈니스, 아이의 학업, 저의 일터인 대학강의 와 공연 등 모든 일상이 바뀌었습니다. 가장 큰 변화는 외부 출타가 제한되었고 모든 일상을 집에서 온라인(Zoom)을 통해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생활은 일 년 반 동안이나 지속되었습니다. 집이라는 제한적인 공간에서 모든 일상이 이뤄지면서 가족들은 수없이 부딪히기 시작했고 정신과 육체적으로 힘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은 남편대로 아이는 아이대로 그리고 저도 저대로 스트레스와 예민함이 극에 달하였습니다. 잦은 부딪힘으로 부부 사이에도 위기가 발생하였습니다. 이때 저희에게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신다는 믿음이 부족했으므로 오랜 팬데믹 속에 두려움과 우울함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랜 고민 끝에 잠시 한국행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제 판단에 코로나 시국에 가장 안전한 나라는 대한민국이었습니다. 그 당시 대한민국은 K-방역으로 이슈가 되고 있을 때였습니다. 평소 걱정되었던 자녀의 신앙교육과 한국어교육을 위해서이기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부부 사이의 위기의식을 느꼈던 저희 부부는 잠시 떨어져 서로 차분해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느꼈고 잠시 한국행에 대하여 합의 하였습니다. 그렇게 한국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부모님을 통해 오랜 문제를 해결 

    저와 아이가 한국에서 지낼 곳을 찾는 과정에서 미국에 계신 부모님(우요한 목자님, 故 이명주  사모님)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 지내는 동안 부모님을 모셔 와서 함께 지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이에게 할아버지·할머니의 정도 느끼게 해주고, 할아버지로부터 신앙교육도 받고, 가족들이 함께 교회에 나가서 예배도 드리고, 한국 이곳저곳을 여행도 다니며 한국이라는 나라와 문화도 경험해 주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부모님께 늘 사랑과 지원을 받기만 했기 때문에 보답할 기회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이런 상상에 마음이 설레 있었습니다. 형제들과 의논 끝에 부모님은 십여 년 만에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오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상상은 착각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상상과 현실은 극명하게 다르다는 것을 한 달도 안 되어 알게 되었습니다. 부모님은 미국에 계실 때부터 치매를 앓고 계셨습니다. 모시기 전까지 큰 염려는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저희 부모님은 흔히들 말하는 착한 치매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부모님이시니까 부모와 자식 간이기에 충분히 잘 모실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치매라는 병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습니다. 육체적으로 굉장히 고단했습니다. 눈을 뗄 수도 없었고 잠시라도 잊을 수 없었고 일어나서 잠들 때까지, 잠드셨을 때도 모든 신경을 쏟아야 했습니다. 간혹 부모님의 치매 증상으로 의도치 않게 폐를 끼치는 당황스러운 일들을 겪기도 했습니다. 때마다 과도한 신경 씀으로 인해 혈압이 오르기도 했습니다. 몸과 마음 모두 지쳐가고 있었습니다. 급기야 저는 급성 고혈압으로 응급실행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때에 저뿐 아니라 아이도 무척 스트레스를 받고 우울해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아이는 힘든 와중에도 신앙교육과 한국어교육, 한국 문화에 대한 교육을 잘 흡수하고 있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하나님께서 미쳐 세심히 돌보지 못했던 아이를 인도해 주셨음을 깨닫습니다.

    엄마로서 또 자녀로서 힘을 내야만 했습니다.  

    나 자신이 그다지 훌륭한 효녀는 아니지만 한국에서 부모님을 모시는 동안이라도 최선을 다해 보기로 했습니다. 치매라는 병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 치매 요양사 자격증을 취득하기도 하였고, 치매 노인을 보살피는 노하우도 습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요양사로서의 형편과 내 부모를 대하는 형편은 참 달랐습니다. 마음이 온전히 비워지지 않았습니다. 참 답이 없다는 심정으로 동동거릴 때쯤에 이 시간을 보상해 주는 듯 한 일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저희 가정은 남편의 실수로 인해 경제적인 파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법원에 파산을 신청하는 과정에서 뜻하지 못한 일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치매 걸린 두 부모님을 혼자 모시고 있다는 이유가 반영되어 판결이 아주 쉽게 진행되었고 파산 문제가 쉽게 해결되었습니다. 몇 년을 힘들고 고단했던 문제가 부모님으로 인해 쉽게 해결이 된 것이지요. 생각해 보면 매일같이 힘들다고 뱉어 내기만 했는데 말이죠.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부모님을 모시며 끙끙대는 저를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 주셨다는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은혜를 겪으며 다시 힘을 낼 수 있었습니다. 부모님이 살아 계신 동안 효도할 기회이며 하나님께서 부모님과 함께 보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시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회복시켜 주심

    다시 한국에서의 신앙생활은 지난 5년간 멕시코에서의 생활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먼저는 교회에 나와서 예배의 자리에 참예할 수 있었고, 설교 말씀을 마음에 새겨들을 수 있었고, 성도님들과 함께 부르는 찬양과 성도님들과 함께 영으로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이 너무나 은혜였고 감격스러웠습니다. 저희 모녀는 몸으로 느낄 수 있을 만큼 많은 성도님의 배려와 관심과 사랑을 받았습니다. 특히 우리 유니게회(소속 신도회) 자매님들의 사랑은 저의 영혼을  다시 촉촉하게 적시는 치료와도 같았습니다. 마치 딱딱하게 메말라 굳어 있던 저의 심장과 영혼이 재충전 되는 것 같았습니다. 믿음 안에서 자매님들과 교제를 나누며 진정한 신앙고백을 뱉을 수 있었습니다. 소중한 만남을 허락해 주셨고, 이렇게 저를 다시 단단하게 또 바로 세워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제 마음에 평안을 주셨을 때 비로소 남편의 마음도 헤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평소에 남편은 고혈압이 있었고 그 때문에 종종 힘들어하곤 했었습니다. 그때 저는 남편의 고통과 그 강도를 짐작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역지사지라는 말과 같이 제가 급성 고혈압으로 고통을 경험하게 되면서 평소 남편의 고통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하게 되었습니다. 남편의 육체적 고통과 남편의 입장에 대해서 더 많이 생각할 기회를 허락 해 주신 것입니다. 다시 남편과의 갈등을 직면하게 된다면 유니게회 자매들에게 받은 사랑의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남편의 마음을 더욱 헤아리며 이겨낼 힘이 생겼습니다. 감사주!

     

    믿음의 동역자로 세워주신 자녀

    *희(자녀/4학년)는 정말 많은 변화를 받아들였습니다. 신앙이 무엇인지, 참예수교회의 진리가 무엇인지, 성령이 우리를 어떻게 인도해 주시는지를 배우고 깨닫고 있습니다. 

    한 에피소드를 말씀드리자면, *희가 학교에서 선생님과 반 아이들이 비둘기 이미지에 대한 내용으로 생각을 나눌 때였습니다. 아마도 다른 아이들은 평화라든지, 공원이라든지 라고 말했을테지요. 그러나 다희는 당당히 “비둘기는 성령!”이라고 답했고, 아이들의 놀림에도 그 생각은 전혀 꺾이지 않았고 오히려 씩씩거리며 하교 했습니다. *희는 결국 아동부 소풍에 새 친구를 데리고 오기도 했습니다.

    어디서 이런 당당함이 나왔을까요?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겠지요? 

    저희 모녀는 행복하고 감사가 가득한 2년의 시간을 보냈고, 다시 멕시코에 돌아가야 할 때가 다가왔습니다. 그렇지만 이젠 더 이상 두렵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저희 모녀의 신앙을 회복시켜 주셨고 저와 아이는 서로에게 든든한 동역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돌아가더라도, 우리가 어느 곳에 지내며, 어떤 어려움에 부닥치게 된다고 하더라고 저와 아이는 함께 손잡고 기도하며 예배할 수 있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어쩌면 도망치듯 떠나온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2년의 시간 동안 저를 회복시키신 것도 모자라 자녀를 믿음의 동역자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예비 하심과 인도하심은 항상 제 생각을 뛰어넘었습니다. 임마누엘! 

     

    어머니의 소천

    얼마 전(3월 10일) 어머니(故 이명주 사모님)는 하나님 품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는 심장 판막 문제로 혈액순환이 원활하지 않으셨습니다. 늘 다리저 림으로 힘들어하셨지요. 

    어머니는 기력이 쇠하여지면서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 중이었습니다. 당연히 고령의 나이다 보니 여러 곳의 기능이 떨어진 상태로 쉽게 호전되지는  않았습니다. 

    멕시코로 다시 돌아갈 날은(4월 18일) 정해졌지만 이런 어머니를 뒤로하고 다시 멕시코로 돌아가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아주 괴로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의 증세가 급격히 악화되었습니다. 생전에 막내딸을 항상 애정 해 주시던 어머니는 제가 멕시코로 다시 돌아가기 전 소천 하셨습니다. 가족 모두가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가족 모두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려 주셨죠) 모든 장례도 무사히 치를 수 있었습니다. 무거웠던 제 발걸음의 무게를 그렇게 덜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소천은 저의 신앙을 한 번 더 다잡게 했습니다.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을 더욱 사모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신앙을 꼭 전승해야겠다 다짐하게 하셨지요.

    엄마!  하늘나라에 소망을 가지고 물려주신 이 믿음 끝까지 잘 지키며 굳건히 살아가겠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아멘!

    [유니게회.  2022년 하늘공원 나들이]

  • [성도 간증] 예수님을 믿음으로 얻게 된 구원

    [성도 간증] 예수님을 믿음으로 얻게 된 구원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 하리요(27:1)”

    ◊ 안양 참예수교회로 전도

    저의 엄마는 30년 동안 잃은 양이셨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친구들과 장로교회를 다니며 엄마는 교회 다니고 싶은 생각이 없으시냐고 했을 때 엄마는 교회를 다니게 된다면 어릴 적 다니던 참예수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그때 저는 주변에 교회가 이렇게 많은데 아무데나 가면 되지 왜 꼭 참예수교회를 고집하시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엄마는 제가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아 암에 걸리시면서 다시 하나님을 찾으셨습니다. 마침 외삼촌댁이 안양에 정착하시고 안양에 교회가 세워 지면서 엄마는 서울에서 2시간여를 전철을 타시고 안양교회의 예배에 참석하셨습니다. 여러 가지 고난 가운데 엄마는 믿음을 회복해 가시며 변화되어가는 모습이 제가 곁에서 보기에도 신기하고 참예수교회에는 뭔가 있나 보다 하는 궁금증이 생겨났습니다.

    저는 결혼해서 경기도 시흥에 살며 동네에 있는 감리교회를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엄마는 엄마가 다니고 계신 교회에 가보자고 계속 저를 권면 하셨습니다. 저는 그때 교회를 다니기는 하였으나 신실하게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그저 일요일에만 문화생활처럼 교회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교회는 다니고 있으나 성경적 지식도 없었고 천국에 대한 소망도 없었습니다. 그저 하나님이 막연히 계시겠거니 생각만 했지 신앙생활이나 믿음에는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외삼촌과 어머니는 이왕 교회 다니려면 참 진리가 있는 곳에서 구원을 받아야 하지 않겠냐며 참예수교회에 나가자고 권면 하시고 안식일 마다 저를 데리러 오셨습니다. 저는 그때 둘째를 임신 중이었고 남편은 주말에 쉬는 직장이 아니어서 첫째 아이와 함께 몇 번 안양 참예수 교회에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믿기 전 저는 참예수교회에만 진리가 있다는 말씀에 교회가 다 똑같지 무슨 여기에만 진리가 있겠는가 하며 속으로 반문하였고, 방언 기도에 대한 설명을 들었지만 기도시간에 기도하시는 성도 분들이 몹시도 낯설고 이상했습니다. 이야기 나눌 때는 모두 친절하시고 평범하신데 기도하는 모습은 너무나 당황스럽고 우스꽝스러워 보이기도 했었습니다. 성령에 대해 잘 모르던 그때 저는 기도시간마다 무척 적응하기 어려웠던 생각이 납니다. 그렇게 한동안 토요일에는 안양교회를 나가고, 일요일에는 일반교회에 나가는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시간이 길어지니 마음은 혼란스러웠고 교회를 두 군데에 걸쳐 있는 것이 답답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께 참예수교회가 진리가 있는 교회라고 하는데 그럼 하나님께서 제가 참예수교회에 다니도록 인도해 보세요 라는 마음으로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저는 둘째딸을 출산하였습니다.

    뜻하지 않은 시련

    첫째가 아들이고 둘째는 딸이어서 너무 기뻤고 임신기간 동안 정상이라는 소견을 듣고 무사히 출산하였습니다. 그런데 아기의 얼굴이 어딘가 달라 보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주변의 반응도 그렇고 남편의 표정은 어둡기만 하였습니다. 그래도 저는 별일 아니겠거니 하고 태어난 아기와 홀가분한 마음으로 퇴원하였습니다. 그렇게 20여일이 지나고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어 남편에게 주변 반응과 아기에 대해 이것저것 묻고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굳은 표정으로 마음 단단히 먹고 지금부터 내 얘기를 잘 들으라 하면서 우리 아기가 다운증후군이라는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고 말을 했습니다. 아기의 지능이 낮고 발달장애와 신체 합병증도 여러 가지 생길 수 있으며 오래 살 수 없을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남편도 믿고 싶지 않아 큰 병원에 검사의뢰는 해놓았고 같이 가서 검사를 해보자는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도저히 믿을 수도 믿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내 아이가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세상의 어떤 말로도 표현 할 수 없는 아픔이고 절망감이었습니다. 아이를 키울 용기도 자신도 없었고 지금의 상황이 너무 무서워 피하고만 싶었습니다.

    며칠 후 유 바나바 목자님께서 저희 집에 심방을 오셨고 목자님은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이 있으실 거라는 위로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하나님은 왜 내게 이런 계획을 세우셨을까 하며 하나님을 원망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인력으로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저는 하나님을 찾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하나님 너무 무섭고 두렵습니다. 아기가 다운증후군이 아닌 그보다 증상이 덜한 모자이크증후군만이라도 되게 해 주세요” 라며 기도하였습니다. 아기를 볼 때 마다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된 건가 자책하게 되고 다운증후군이라는 단어를 검색하면 온갖 안 좋은 내용들만 있어서 수십 번 마음이 무너지곤 하였습니다. 검사 결과 아이는 다운증후군이었고 그해 가을은 정말 저와 남편에게는 너무나 아픈 계절이었습니다.

    광주에서의 신앙생활

    너무나 힘들어하는 저에게 남편은 환경도 바꾸고 아기가 자라면서 재활도 하고 병원 가야할 일도 종종 생길 수 있으니 광주로 이사를 가서 친구가 소개해 주는 시간적으로 여유로운 직장을 다니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저희는 둘째를 낳고 3개월 후에 광주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세례도 받지 않고 저희가 지방으로 이사를 가게 되자 안타까워하시며 광주에도 참예수교회가 있다고 소개해 주셨고 당시 김한길 목자님께 저희 가정을 잘 부탁드린다고 통화도 하신 것으로 압니다. 힘든 일은 한꺼번에 온다고 힘든 상황에 원치 않는 지방으로의 이사는 마음의 부담이 컸고 저는 광주로 내려가는 내내 울며 이사를 했습니다.

    그날은 1월이라 눈도 많이 내렸고 날도 무척 추웠습니다. 그런데 광주교회에서 저희가 이사를 온다고 교회에 저녁준비를 해놓을 테니 와서 식사를 하자고 연락이 왔습니다. 저는 아기의 장애가 구경거리가 될까 굳어진 마음에 가고 싶지 않다고 하였으나 어머니는 그래도 감사하지 않냐 하시며 함께 가자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광주교회 목자님, 성도 분들과 첫 인사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인도하심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낯선 지방에서 제가 어린 두 아이를 데리고 갈 수 있는 곳은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안식일마다 남편 부재시 성도님들이 돌아가면서 저와 아이들을 데리러 와주셨고, 교회에 가면 아이들을 사랑으로 돌봐 주셔서 교회에 가면 유일하게 제가 육아에서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찬양의 가사들은 너무나 제게 위로가 되었고 말씀이 다 이해는 안 되지만 조금씩 조금씩 들리기 시작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세례와 성령을 받지 않은 제게 기도시간은 난처하기만 하였습니다.

    온 가족이 세례를 받았으나 열심을 내지 못하는 신앙

    그러던 중 세례교육을 받고 성경대로 세례를 받아야 함을 알게 되었고 온 가족이 그해 10월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를 받고 간절하게 성령을 구해야 한다고 그래야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배웠으나 제 마음에 와 닿지 않아 저는 간절히 성령을 구하지 않고 그렇게 1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사이 저는 셋째 딸을 임신하고 두 아이를 돌보며 정신없이 하루하루를 살고 있었습니다. 교회는 다녔지만 믿음은 성장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평일 저녁예배는 거의 참석하지 않고 안식일에만 출석하고 있었습니다. 안식일 하루 교회 가는 날도 남편과 갈 때마다 싸우게 되고 상한 마음으로 예배를 온전히 드리지 못하는 날이 많았습니다. 저는 셋째한비를 낳고 혼자 아이 셋을 돌보며 마음의 여유를 잃고 늘 바쁜 남편에게 자주 화를 내곤 하였습니다. 급기야 안식일 예배도 빠지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믿지 않으니 삶이 휘청거리고 사단의 덫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둘째 아민이를 잃은 슬픔과 절망

    한비가 11월에 태어나고 다음해 3월 어느 날 아민이가 열이 나고 감기 증상이 있어 급히 동네 소아과를 갔습니다. 아이를 안고 병원을 뛰어 가는데 제 품에서 밝게 웃던 아이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잘 웃는 아이를 보며 심하게 아픈 건 아닌가 보다 안심을 하였고 의사 선생님도 단순 열감기라고 하셨기에 3일 동안 해열제와 약을 먹였습니다. 그런데 4일째 되는 날 부터는 아이가 밥도 잘 안 먹고 밤에 잠도 못자고 귀 아래로 부은 모습도 보여 심상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고 우선 남편에게 좀 더 큰 소아과로 가보자고 하였습니다. 그 병원에선 검사결과 염증수치가 높으니 우선 주사를 놓고 좀 지켜보자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너무 힘들어 하고 귀 아래 부은 것은 왜 그러냐고 묻자 의사선생님은 잠시 고민하시더니 대학병원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때 목자님께 연락을 드리고 병원에 같이 가주시기를 부탁 드렸습니다. 소식을 듣고 성도 분들은 다함께 기도해 주셨고 저희 가정을 많이 챙겨 주시던 자매님도 병원에 함께 동행 해 주셨습니다. 병원까지 가는 길은 너무나 불안하고 마음이 안정이 되지 않아 ‘하나님 제발 도와주세요!’ 라는 기도만 하게 되었습니다.

    병원에서는 각종 검사를 하였고 아이는 지쳐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중환자실에서 검사를 하던 중 갑자기 아이가 호흡이 없는 모습을 보고 저는 의사선생님께 아이가 숨을 쉬지 않는다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이에겐 급하게 산소호흡기가 씌워 졌고 저는 너무 흥분한 상태여서 병실 밖에 나가 있게 되었습니다. 목자님께서는 아이 옆에서 계속 기도해 주셨고 저는 떨리는 몸을 가눌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울면서 “하나님 아이가 죽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살려 주세요” 라며 기도하였습니다. 몇 분 후 목자님께서 중환자실에서 나오셨고 “진아 자매님, 아민이를 하나님께서 데려가셨으니 들어가서 아민이에게 인사를 하셔야겠어요.”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목자님 손을 잡고 “목자님 이건 아니잖아요, 저는 못 들어가겠어요!” 하며 그 자리에 주저 않아 목 놓아 울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허망하게 아이를 떠나보낼 것은 상상도 해보지 못했기에 도저히 받아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성령으로 인한 기쁨과 위로, 그리고 성장

    아이를 보내고 저는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친정인 안양으로 올라왔고 예배에 참석하여 기도시간에 간절한 마음으로 저의 고통스러운 마음을 만져주시라고 기도드렸습니다. 그때 제 입에서 방언 기도가 나왔고 마음이 평안해 지면서 성령이 내게도 임하셨구나 하는 안도의 눈물이 흘러 나왔습니다. 그리고 목자님께서는 “진아 자매님, 성령을 받으셨습니다.” 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저는 가장 낮은 마음일 때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은 아이가 보고 싶어 울며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커튼 틈 사이로 한줄기 강하고 밝은 빛이 방을 비추고 들어와 누워있는 저를 향하여 비춰지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저는 눈을 감고도 그 빛이 너무 강하여 눈이 부셨고 그대로 깊은 잠이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평안한 마음으로 푹 자고 일어났고 전날 밤의 기억이 너무도 또렷하여 하나님께서 나를 위로하여 주심에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마음이 괴로울 때마다 하늘을 향해 기도드렸고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해주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남부교회에 영은회는 다 찾아다니며 말씀을 들었고 안수를 받을 때마다 물같이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꼈습니다. 저는 기쁨이 넘쳐 기도 중 일어나서 춤을 추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 찬 교회가 바로 천국처럼 느껴졌습니다. 아민이를 보내고 장례식장을 한해에 다섯 번이나 가게 되면서 죽음과 죽음이후의 세계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되었고 천국을 소망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니 구원의 기쁨이 내 안에 있었습니다. 길에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저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까? 이 놀라운 구원에 대해 어떻게 알려줘야 할까?’ 라는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습니다. 저는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친구초청 예배 때 지인들을 초대하고 그들도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이처럼 주의 도우심으로 저는 변화되어가고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기도 중 뼛속까지 죄인임을 고백하며 회개하게 되었고, 아름다운 자연을 보면 창조주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만드셨다는 것이 신비로웠습니다. 다시는 웃을 수 없을 줄 알았던 저는 말씀과 기도생활을 통해 웃음을 되찾아 가면서 하나님의 일도 기쁨으로 감당하며 하나님과 가까워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고난이 없는 인생이 있을 수 있을까요? 고난이 없이 평탄한 인생은 없을 것입니다. 인생의 짐을 하나님께 맡겨 보세요. 하나님은 하나를 드리면 전부를 내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저희 가정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분이 계신다면 예수님을 믿으심으로 꼭 완전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기쁨을 누리시길 소망합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아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16:31)

    <다정한 모녀, 엄마와 함께 >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열린 예배에 간증하고 계신 김진* 자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