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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항 교회에 대한 우리의 믿음

    제3항 교회에 대한 우리의 믿음

     

    본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늦은 비 성령으로 세우신 교회로서 사도교회의 부흥된 참교회임을 믿는다.

     

    헬라어 ‘에클레시아’(ekklēsia)로 발음하는 교회라는 단어의 의미는 ‘부르심을 받아 나온 회중’이란 뜻입니다. 이 어휘적 의미를 살펴볼 때 교회는 유형의 건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며 무형의 모임 자체를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전 1: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교회는 예수님(하나님)이 세우신 믿는 자들의 공동체입니다. 예수님(하나님)이 세우신 교회이기 때문에 예수님(하나님)이 주인이시오 자신의 뜻대로 치리되는 곳이어야 합니다. 사람은 결코 교회의 주인 행세를 할 수 없으며 사람이 세우고 사람의 뜻대로 치리된다면 그것은 이미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세우신 것이고 따라서 그분의 뜻대로 치리되어야 하는 신령한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 제자들에게 장차 자신의 교회를 세우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예수님은 자신을 ‘그리스도’(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로 고백한 베드로에게 당신이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오순절 이후 성령 강림을 기점으로 초대교회가 서게 됩니다. 예수님이 교회를 세우신 목적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신 목적과도 일치합니다. 예수님이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교회를 세우신 목적도 바로 그것을 위해서였습니다. 비록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셔서 더 이상 이 땅에서 사역을 지속하실 수 없으시지만 그 동안 가르쳐 온 제자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시고 그로 인해 세워진 교회를 통해 영혼 구원의 사역이 지속되도록 계획하셨던 것입니다.

     

    본 교회는 예수님께서 늦은비 성령으로 세우신 교회입니다.

    신약 교회의 출발은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오순절이라는 유대인의 절기 때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 오순절 절기에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강림하셨고 약속의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비로소 권능을 받고 예수님이 명하신대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오늘날 한국에는 많은 교단 교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본래 초대교회는 이렇게 분열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분열된 배경은 기독교 역사 속에서 그 원인과 과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에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기독교 신앙 공동체에 유입되었습니다. 그러나 약 삼백년이 지날 무렵 순수한 초대교회의 신앙은 이교도의 우상숭배의 문화와 결합하면서 점점 변질되어갔습니다.

    동양의 신비종교의 사상이 담긴 영지주의라는 이단 사상과 헬라의 철학 사상이 교회에 침투해 들어온 것입니다. 더욱이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공인(A.D. 313년) 이후 교회는 잔혹한 핍박은 면하게 되었지만 로마의 정치 세력과 타협하면서 순수한 신앙의 공동체로서의 교회 모습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습니다. 세속 권력과 결탁한 종교 집단으로 타락하게 된 것입니다. 그 타락의 결과 교회는 교리적인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시고자 교회에 세워두셨던 온전한 교리들이 변질되고 제거되는 통탄할 일이 벌어졌습니다.

    유일신론은 이교에서 유래한 삼신론에 영향을 받아 삼위일체론으로 대치되었고, 세례는 본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하는 성례로 온 몸이 물에 잠기는 침례였지만 그 중생의 실효성을 부정하며 상징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 실내에서 이마에 물을 찍어 주는 약식 세례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또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하나님이 창조의 일을 마치신 직후 세우신 제칠일 안식일(토요일)을 당시 로마 태양신 숭배일인 일요일로 대치시켰습니다. 그 결과 예수께서 인간 영혼의 구원을 위해 세우신 구원의 교리들은 교회 안에서 사라졌고 교회로서의 영적인 권세를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바벨론 제국이 쳐들어와 솔로몬 성전을 훼파하고 그 안에 기물들을 다 약탈해 간 것처럼 초대 교회 안에 존재했던 영적 기물들(구원의 교리들)은 모두 이단 사상에 의해 약탈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가 타락하여 더 이상 교회라고 일컬을 수 없을만큼 부패하게 되자 성령 강림이 중단되게 됩니다. 로마 정부의 정치 세력과 타협한 교회는 더 이상 순수한 교회가 아니라 세속의 권력과 결탁한 타락한 집단으로 전락한 것입니다. 이 때부터 로마 천주교의 시대가 시작됩니다.

    (딤전 4:1)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20:30)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로마의 세속 권력과 결탁한 천주교는 역사 속에서 많은 불의를 자행했습니다. 교황은 베드로의 사도권을 직접 계승한 존재로 여겨졌으며 그 세속적 권세가 매우 강했습니다. 과거 역사를 살펴볼 때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가 로마 황제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한 ‘카놋사의 굴욕’ 사건은 그 당시 교황의 권세가 얼마나 위세를 떨쳤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또 교황의 절대 권력 아래 천주교는 종교재판을 통해 선량한 신앙인들을 탄압하고, 십자군 전쟁을 통해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하는 역사 속의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성 베드로 성당을 건축할 재원 마련을 위해 거짓된 교리까지 만듭니다. 그것은 죽은 사람을 위해 ‘면죄부’를 구매하면 그 영혼이 연옥에서 천국으로 격상된다는 허황된 연옥교리였습니다. 독일의 한 천주교 사제였던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이러한 천주교의 거짓 교리와 불의한 행태에 분개해서 1517년 10월 경 천주교의 여러 가지 모순을 지적하는 95개조의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성문에 내걸었고 이에 군중이 호응하고 연합하면서 종교 개혁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비로소 ‘프로테스탄트’ 즉 개신교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프로테스탄트 즉 개신교의 처음 동기와 출발은 순수했습니다. 그러나 루터의 ‘종교 개혁’의 본질적인 모습을 살펴보면 이는 ‘종교 분열’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종교 개혁이 시작된 때를 기점으로 지금까지 개신교는 교리상의 이견, 교회 정치상의 이견 등으로 수백 수천개의 교단 교파로 분열을 거듭해 왔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이렇게 많은 교단 교파가 난립하게 된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바로 종교 개혁기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 일례로 종교 개혁을 주도한 인물 가운데 루터와 동료였던 쯔빙글리(Vlrich Zwingli)라는 인물이 있는데 그는 ‘성찬례’에 대한 견해 차이로 인해 루터와 결별합니다. 이미 개신교는 출발부터가 이러했습니다. 프로테스탄트 즉 개혁교회는 ‘종교 개혁’이라고 기치를 내걸었지만 그 성격을 살펴볼 때 초대교회의 순수성을 온전히 회복한 개혁이 아니었습니다. 본래 루터는 종교 개혁의 의도가 없었습니다. 타락한 천주교의 부조리만 바로 잡으려고 했습니다. 출발이 이러하니 개신교는 천주교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 증거는 천주교에서 황제에 의해 변경된 성일, 즉 일요일 준수를 그대로 계승했고 천주교의 영세와 유사한 형태의 세례를 시행했습니다. 그리고 이 세례가 상징에 불과하고 단지 교회 입교 절차로 필요한 과정으로만 여기게 되었습니다.

     

    이 개신교의 종교 개혁 운동의 성격을 짚어보면 사실은 인류사에서 인문주의, 계몽운동이 싹트던 시대의 흐름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습니다. 종교 개혁은 인간이 과거보다 현명해지다보니 자연스럽게 촉발된 인간으로부터의 움직임이었습니다. 그러나 불완전한 인간에 의한 개혁인지라 불완전한 개혁에 머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이 세우셨던 진리의 기둥들, 영적 성전에 있어야할 진리의 기둥들(세례, 성령, 안식일 등)은 회복하지 못하고 사람의 생각대로 사람들이 만들어낸 교리들로 교회의 내소를 치장한 것입니다.

    (15:9)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불완전한 인간으로부터 시작된 아래로부터의 개혁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불완전한 교리로는 사람의 영혼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완전하신 하나님이 위로부터 완전한 개혁을 다시 시작하셨습니다. 종교 개혁 이후 세월이 흘러 19세기에 이르러서 그 전조가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사도시대 오순절과 같은 성령이 내리는 일이 발생합니다. 당시 미국의 세속화된 교회를 한탄하며 순수한 신앙을 추구하던 일부의 사람들이 성령을 체험하게 되고 그 세력은 점점 확대되었습니다. 이윽고 자신들의 새로운 복음에 사명을 느낀 자들은 오순절과 같은 체험의 성령을 세계 곳곳에 전파하기 시작했고 그 물결이 중국에도 전달되었습니다. 이런 위로부터 시작된 신앙 개혁의 과정 속에서 초대 교회와 동일한 구원의 교리를 갖춘 교회가 나타납니다. 중국 산동성에서 사도 시대의 진리를 추구하는 가운데 성령이 강림하시고 초대교회를 계승한 참교회가 출현하게 된 것입니다. 초대교회 시대에 타락했던 교회가 하늘로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개혁에 의해서 말세에 다시 회복된 것입니다.

    (2:23)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이른비와 늦은비가 전과 같을 것이라

     

    (34:26) 내가 그들에게 을 내리며 내 산 사면 모든 곳도 되게 하여 때를 따라 비를 내리되 복된 장마비를 내리리라

     

    이스라엘에서는 농사에 있어서 중요한 비가 두 차례 내리는데 그것은 이른비(가을비)와 봄비(늦은비)입니다. 밀이나 보리 파종 전에 반드시 이른비(가을비)가 내려야 파종할 수 있고 추수 전에는 반드시 늦은비(봄비)가 내려야 추수할 수 있습니다. 겨울은 우기로서 장마비가 오고 여름에는 비가 오지 않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땅에서 농사에 중요한 비가 두 차례 내리는 것처럼 하나님의 영적 농사, 즉 인류 구원의 밭인 지구상에 ‘영적인 비’가 두 차례 내릴 일에 대해서 성경은 상징적으로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팔레스틴의 기후와 관련한 농사문화를 통해 인류사에서 두 차례 나뉘어 내릴 성령 강림의 사건을 비유하셨습니다. 즉 이른비란 사도교회의 오순절 성령을 상징하고, 늦은비는 말세에 다시 회복된 참교회에 내릴 성령 강림을 상징합니다. 이 말세에 내리신 늦은비 성령 강림으로 설립된 교회가 바로 참예수교회입니다.

    16세기 마틴 루터에 의해 아래로부터의 불완전한 종교 개혁과는 달리 하나님은 20세기에 이르러서 성령께서 주관하시는 위로부터의 온전한 개혁을 진행하셨습니다. 그 개혁의 결과 죄사함의 은혜를 주는 성경적 세례(거듭남의 물세례), 천국 기업의 보증이 되는 약속의 성령(거듭남의 성령세례), 천주교에서 변경한 일요일을 다시 토요일로 회복하게 하셨습니다. 만약 루터의 종교 개혁이 완전한 것이고 만족스러운 것이었다면 하나님은 20세기에 이르러 굳이 성령을 이 땅에 다시 내려주시고 새로운 교회를 세우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루터에 의해 시작된 개혁 교회도 천주교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오류가 많고 불완전했기 때문에 참교회를 회복시키시고 인류의 구원 사역을 지속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개혁하시고 회복시키신 본 교회는 다른 교회와 비교할 때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요?

     

    첫째, 교회에 성령이 계십니다.

    초대교회는 오순절 성령강림 직후 탄생했습니다. 성령 강림을 체험한 사도들은 비로소 그 이후에야 복음 전파 사역을 시작했고 그 복음 전파 사역의 핵심은 바로 죄사함의 은혜를 주는 ‘물세례’와 천국 기업을 보증하는 ‘성령세례’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신 목적은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마땅히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두 가지 핵심 ‘물세례’와 ‘성령세례’의 진리를 소유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죄의 권세를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은 바로 성령이 임재하시는 교회에서 나타날 수 있습니다.

     

    (20:22-23) [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처음 나타나셔서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고 뒤이어 죄사함의 권세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성령의 내주’가 ‘죄사함의 권세’와 긴밀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성령의 내주가 없으면 사죄의 권세도 없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는 참 교회라면 초대 교회처럼 먼저 오순절과 같은 성령이 임재하셔야 합니다. 만약 오순절과 동일한 약속의 성령이 없으면 그 단체는 사죄의 권세가 나타날 수 없는 껍데기 단체에 불과합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발달한 한국에는 대단히 많은 단체가 교회 간판을 걸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형 건물, 다수의 신도, 치밀한 교회 조직, 끈끈한 인간관계, 유익한 문화 프로그램, 유명한 신학자와 기관들, 신도들의 강한 연대의식으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 교회에 성령이 계시지 않고 또 죄사함의 권세가 없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교회가 아니라 인간의 조직이나 단체에 불과합니다. 사람을 구원하려면 예수께서 교회 안에 두셨던 초대교회의 성경적 교리를 구비해야 하는데 그 교리가 없다면 사람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구원할 수 없다면 교회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것이므로 이미 교회라고 칭할 수 없습니다.

    둘째, 성경적인 기적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경험할 수 없는 초월적인 세계에 계십니다. 사람은 그 세계에 도달할 수 없고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때로는 천지만물에 부여하신 원리와 법칙을 넘어서는 특별한 현상을 보여주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연법칙을 거스려 나타나는 이러한 초자연적인 현상을 일컬어 사람들은 ‘기적’이라고 칭합니다. 하나님은 때로 성령이 내려주시는 기적을 통해 당신을 믿고 순종하는 성도에게 당신이 살아계신 분이며 큰 능력이 있는 분임을 증거하십니다. 예수님은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라고 성도에게 그런 기적이 따를 것을 언급하셨습니다.

    (14: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16:17-18) [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18]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에 병든 자가 치유되는 기적을 가장 많이 보여주셨듯이 오늘날에도 하나님이 주시는 기적 가운데 가장 많은 기적은 바로 병든 사람이 치유받는 은혜의 기적입니다. 개인 기도를 통해서, 안수를 통해서, 교회의 합심 기도를 통해서 병세가 호전되고 병자가 완치되는 예들이 적지 않습니다. 어떤 신앙인들은 이런 기적이 나타난다고 하면 ‘열광주의자’니 ‘신비주의자’라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런 기적이 나타나고 있으며 그것은 성경적인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참된 기적도 있지만 어떤 경우 마귀로부터 오는 거짓 기적도 있기 때문에 주의해야 합니다. 가령 어떤 자가 병을 고칠 때 무당의 주술하는 방법을 동원하여 고치거나, 병자의 환부를 상해하는 방법으로 고치거나, 안찰이라고 명목으로 환자를 눕히고 신체의 일부를 구타하는 방법을 쓰거나하는 것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는 해괴한 방법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그런 방법과 과정으로 병자를 치료한 적이 없습니다. 또 치료를 명목으로 금전을 요구하거나, 병고친 후 특정한 사람을 숭배하게 하거나, 완치되었다고 선언했지만 이후 그와 달리 오히려 악화되었거나 하면 그것은 성령께서 주시는 성경적인 기적이 아닙니다. 모두 마귀로부터 오는 거짓 기적이므로 이를 수행하는 사람을 거절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13:22)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백성을 미혹케 하려 하리라

     

    (7:11-12) [11] 바로도 박사와 박수를 부르매 그 애굽 술객들도 그 술법으로 그와 같이 행하되 [12] 각 사람이 지팡이를 던지매 뱀이 되었으나 아론의 지팡이가 그들의 지팡이를 삼키니라

     

    (13:13)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19:31) 너희는 신접한 자와 박수를 믿지 말며 그들을 추종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성령으로부터 오는 참다운 기적은 성경의 기록과 그 현상이 일치해야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기적은 조용히 기도하는 가운데 이루어지고, 병고침의 은사를 받은 성도나 교회 공인된 지도자를 통해서 조용히 안수를 받거나, 본인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금식하는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 치유의 은혜는 성령께서 비둘기같이 온유하게 임하시듯이 조용한 가운데 주어집니다. 또 그런 은사를 발휘한 자가 특정한 사람을 우상화하고 추종하도록 강요하거나 무속신앙인들이 복채를 요구하듯이 헌금을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는 주님의 교훈대로 오로지 하나님께 자원하는 마음으로 즐겁게 감사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기적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기적은 일어납니다. 본회에서는 종종 성령으로부터 오는 성경적인 기적을 체험하고 간증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사실은 본회가 성령이 임재하시는 참교회라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셋째, 전하는 진리가 성경과 일치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원의 진리를 자신의 몸인 교회 안에 담아 두셨습니다. 그래서 성도가 교회를 통해 거듭나게 하시고 자라게 하시고 구원받게 하셨습니다. 이는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류 구원 계획이 교회를 통해서 구현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교회를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말했습니다.

    (딤전 3:15)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오늘날 그 진리는 복음 안에 담겨 있으며 교회가 표방하는 복음은 ‘교리'(dogma)로 선포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교리’가 다르다는 것은 복음이 다르다는 것이고 다른 복음이란 곧 진리를 변질시킨 거짓된 복음입니다. 심각한 점은 진리가 없으면 사람을 구원으로 이끌 수 없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초대교회 시대에 이미 다른 복음이 존재했고 그릇된 사상이 교회에 침투해 들어왔고 이에 대해 바울은 저주받을 일이라고 매우 강한 어조로 경계하고 있습니다.

    (1: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1: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바울 사도가 경계하고 우려했던대로 초대교회는 다른 복음에 미혹되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정치 세력과 결탁한 후 진리의 기둥을 이루었던 교리의 항목들은 하나 둘씩 변질되고 제거되었으며 그 결과 구원의 능력을 상실한 교회 아닌 교회로 전락했습니다. 또 천주교의 불법과 범죄에 분개하여 일어난 개혁교회도 오늘날 처음 개혁의 기치를 내걸었던 동기와는 모순되게 타락한 길을 걷고 있습니다. 구약의 율법은 폐해졌다고 주장하면서 어떤 경우 구약의 율법 준수를 강요하듯 행위를 강요합니다. 또 천주교의 면죄부 판매를 비판했던 그들이 오히려 헌금 강요로 교회의 부를 축적하는 모순된 모습을 보입니다. 힘있는 정치인과 관계를 맺기를 좋아하고 교회가 세상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모습은 천주교의 그것과 하나도 다를 바 없습니다. 성도들이 말씀에 순종하고 그 결과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기복신앙에 빠지게 만들고 장로, 권사, 집사 같은 직분 제도를 통해서 사사로운 명예심을 자랑하도록 부추깁니다. 이런 모든 문제의 출발은 사실 그들이 전하는 복음이 성경에서 멀어진 잘못된 교리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교리가 잘못되면 윤리도 잘못됩니다.

    (20:29-30) [29]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30]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8:20)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

     

    교회 분파의 요인은 몇 가지가 있는데 그 가운데 주목할 것이 교리에 의한 분파입니다. 교회는 표방하는 교리에 따라 여러 교단과 교파로 분열되어 왔습니다. 그 실상은 이렇습니다. 세례를 받되 침례로 받아야 한다고 강조한 교파가 침례교단, 일요일이 아닌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한 교파가 안식교단, 오순절과 같은 성령을 받아야 한다고 강조한 교파가 오순절교단입니다. 모두 나름대로 성경에서 옳은 것을 추구하여 주장하는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리는 완전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에 일부만 온전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완전해야 합니다. 즉 예수님이 세우신 모든 요소들을 다 갖추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라도 누락되면 그것은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노아가 방주를 만들되 하나님이 지시하신 잣나무로 만들지 않았다면, 역청으로 안팎을 칠하지 않았다면, 가로 세로 높이를 하나님이 지시하신 치수대로 만들지 않았다면 아마도 거센 물살에 끝내 파선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노아의 방주 사건은 교리적인 차원에서 하나의 비유입니다. 구원의 방주로 비유되는 교회가 완전한 구원의 교리를 구비해야 한다는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6:22)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7:5)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모든 것이 구비된 온전한 교리를 세우지 않으면 불완전한 인간이 완전한 하나님의 구원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 온전한 교리는 모두 예수께서 세우신 것이며 인간이 개입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인간의 육신을 입고 오신 것, 그분이 동정녀에게서 나신 것,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 부활하신 것, 승천하신 것, 약속의 성령을 내려주신 것, 거듭남의 물세례를 명령하신 것 등 모두 하나님 자신이 이루신 것입니다. 이들 중에서 어느 하나라도 불완전하다면 인간의 영혼은 구원받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구원을 위해서 그 완전한 교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하기만 하면 됩니다. 또 그렇게 온전한 교리에 순종할 때 우리는 온전한 윤리를 실천할 수 있는 길로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3: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따라서 위에서 살펴본대로 구원을 보장하는 참교회란 바로 인간 구원의 능력을 담은 온전한 교리를 소유한 교회여야 합니다. 성경적 죄사함의 ‘물세례’를 시행하고, 오순절과 같은 ‘약속의 성령’이 임재해야 하고, 성경적 기적 이사가 나타나야 하고, 창조 때부터 설립된 ‘은혜의 안식일’을 지켜야 합니다. 본회는 노아가 방주를 만들되 하나님이 명령하신 방주의 제도를 그대로 준행한 것처럼, 출애굽 광야시대에 모세가 하나님이 명하신 설계도대로 성막을 건축한 것처럼 온전한 구원의 교리를 순종하여 세워진 교회입니다. 오늘날 사람의 생각대로 세워진 교리가 아니라 초대교회가 소유했던 바로 그 교리, 그래서 인간을 구원하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온전한 교리를 실천하고 있는 교회가 바로 참예수교회입니다.

  • 제2항 성경에 대한 우리의 믿음

    제2항 성경에 대한 우리의 믿음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로 된 것임을 믿으며 참 진리의 유일한 근거가 됨과 동시에 신도생활의 기준이 됨을 믿는다.

     

    성경은 현재 2008년 12월 말 기준으로 전 세계에서 통용되는 6,500여개 언어 중에서 2,479개 언어로 번역되었습니다. 성경은 세계인이 가장 많이 구매하는 인류의 베스트셀러입니다. 이렇게 성경이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사람들의 많은 관심과 호응을 받고 있는 이유는 아마도 그 안에 모든 사람이 공감하는 진리가 담겨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성경은 모두 하나님의 감동로 된 것입니다.

    성경은 약 1,500년의 기간 동안 약 40여명의 인간 저자를 통해 기록되었습니다. 그 저자들의 출신, 학문의 정도, 직업, 살았던 시대, 개성 등이 매우 다양합니다. 그 가운데에는 왕족, 제사장도 있었지만 농부, 목동이 직업인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마치 한 사람의 저자가 그 내용을 구성하고 기록한 것처럼 일관된 주제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놀랍습니다. 그 일관된 주제란 바로 인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과 성취입니다. 따라서 이런 사실은 성경의 저자가 눈에 보이는 인간 저자들(이를 제 2저자라고 부름)이 아니라 사실은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이를 제 1저자라고 부름)이시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렇다고 인간의 개성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출신, 학문의 정도, 개성도 고스란히 나타납니다. 따라서 성경은 단순히 ‘하나님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해 감동(영감)된 사람들이 기록한 문서’로 이해하는 것이 옳습니다. 즉 하나님의 신이 인간 저자를 ‘감동’, 또는 ‘영감’시킨 상태에서 그를 도구로 삼아 기록한 것이 성경입니다. 신약 성경의 저자도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헬라어 원어의‘감동’ 또는 ‘영감’(inspiration)이란 의미는 ‘신의 바람을 쏘인’(데오스 퓨뉴스토스)이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의 신(영靈, 바람)에 쏘여져 하나님의 도구가 된 자들의 저작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딤후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벧후1:20-21)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을 가르치실 때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과 그와 관련된 일들을 자주 인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구약 성경을 인용하셨다는 것은 구약 성경의 진실성을 입증합니다(참고. 요5:46). 또 보편적인 유대인들은 구약 성경을 ‘토라’(Torah:율법서) ‘느비임’(Neviim:선지서) ‘크투빔’(Kethoubim:성문서)으로 삼분하는데 예수님도 그와 같이 구약 성경을 셋으로 분류하셨습니다. 위와 같은 사실들로 미루어 보아 예수님은 구약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로 된 글임을 받아들이셨고 그 권위를 인정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을 진실한 분이라고 믿는다면 그분이 구약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셨듯이 우리도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어야 마땅합니다.

    (24: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24:27)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예수님 시대의 ‘성경’은 구약 성경에 한정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시대에는 아직 신약 성경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신약 성경을 기록하신 적이 없고 또 제자들에게 기록하라고 명령하신 적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에게 신약이라는 것이 경전으로 존재합니다. 구약 성경은 앞서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수님이 구약성경을 인정하시니까 우리도 구약 성경을 믿고 받아들일 수 있지만 신약 성경은 무엇을 근거로 기독교 경전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이 신약 성경은 예수님 승천 이후 교회의 신앙생활의 소산물로 출현했습니다. 신약 성경은 본래 초대 교회 성도들이 교회를 이루고 신앙생활하는 가운데 예수님의 직계 제자나 그에 준하는 자들이 기록한 문서들입니다. 당시 예수님의 직계제자나 그에 준하는 인물들의 저작을 교회 공동체 내에서 일찍이 신령한 문서로 취급했습니다. 그 증거를 신약 성경 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후서에서 베드로는 바울의 편지를 언급합니다. 이 바울의 편지가 바로 오늘날 바울 서신이라고 일컫는 신약의 경권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는 이 바울의 편지를 마치 구약 성경과 동등한 권위를 가진 경전으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즉, 구약 성경을 억지로 해석하면 안되는 것처럼 바울의 편지(바울 서신)도 억지로 해석하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는 초대 교회가 구약 성경을 다루듯이 바울의 편지를 다루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즉 구약 성경을 권위있는 문서로 보듯이 바울의 편지도 권위있는 문서로 본 것입니다. 이는 조금 확대해서 해석하면 사도들의 편지를 구약 성경처럼 새로운 경전으로 삼게되는 근거가 됩니다. 이렇게 권위있는 문서로 인정받은 문서들이 수집되어 오늘날 우리에게 27권의 신약 경전으로 주어져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성도들을 신뢰합니까? 그러면 우리는 신약 성경을 새로운 언약의 경전으로 믿을 수 있습니다.

    (벧후 3:15-16) [15]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16]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구약 성경)과 같이 그것도(바울의 편지)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았던 사도들이 하나 둘씩 세상을 떠나자 더 이상 그분의 생생한 교훈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이에 교회는 평소 교훈의 내용을 상기시켜 기록으로 남기기 시작했고 오랜 시간이 지나는 동안 기독교 공동체의 신앙을 유지하고 가르치는 경전으로 자리잡았습니다. 그리고 이후 교회 공동체의 동의에 의해 편집이 완료되어 회의를 통해 경전으로 선포하게 됩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않아야할 점은 인간이 만든 회의체에서 성경을 결정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미 초대교회가 과거부터 순수한 신앙의 교본들로 삼았왔던 편지들을 회의의 과정을 통해 경전으로 재확인하고 천명한 것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신약 성경을 신앙의 경전으로 받아들일 수 있고 그 안에 담긴 교훈을 믿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진리를 증명하는 유일한 근거입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책들이 있습니다. 모두 사람들에게 특정한 유익을 주기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사람이 죽은 이후 영생으로 들어가게 할 목적으로 기록된 책은 성경 뿐입니다. 모든 책들 가운데 독특하고도 유일한 목적입니다. 이 성경의 기록 목적은 성경의 주제와 맞닿아 있습니다. 성경의 목적대로 그 주제도 하나님이 인간에게 어떻게 영생을 주시고 어떤 과정을 통해 천국으로 인도하시는지 그 계획과 성취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모아져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과 사건들은 모두 장래에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이 행하실 일들의 예표(예언 등을 미리 보여주는 조짐)입니다. 예를 들면 모세가 애굽 바로 왕의 노예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홍해를 건넌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악 세상의 노예가 된 인간들을 세례를 통해 거듭나게 하시고 구원하시는 일을 예표합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 정복 전쟁을 수행한 여호수아는 신약 시대의 성도들을 이끌고 천국을 침노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인물들과 그분이 장차 하실 일에 대해서 예표하는 사건들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심지어 구약의 모든 내용이 곧 자신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씀하실 정도였습니다.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개신교에서는 천주교와는 달리 오로지 구약 삽십 구권과 신약 이십칠 권만 정경으로 인정하며 그 외의 외경(성경외의 경전)이나 위경(올바른 신앙에서 벗어난 거짓 경전)과 같은 것들은 정경(바른 경전)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외경과 위경에는 본래의 신앙 정신에서 변질되거나 동방 신비 종교의 영향을 받은 이단적인 내용들이 녹아있기 때문입니다. 바른 기독교 신앙을 추구한다면 66권의 경권만 정경(正經)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떤 것은 성경에 포함되고 어떤 것은 제외하는 문제는 이미 기독교 역사 속에서 순수한 신앙의 정기를 소유했던 초대교회에서 판단하고 구별하여 정리되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동일한 신앙의 길을 가는 우리는 육십 육권의 성경만 정경으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8:20)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

     

    (고후 2:17)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고후 4:2)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궤휼 가운데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

     

    성경은 신도생활의 기준입니다.

    어떤 국가든지 그 나라 국민이라면 반드시 준수해야하는 국법이 있는 것처럼 천국의 시민인 성도도 반드시 준수해야 하는 천국의 법이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법 가운데 가장 상위의 법이 헌법이듯이 천국의 법에서 가장 근본적인 핵심의 법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루어주신 구원의 과정 즉,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하늘로 승천하시고, 성령을 내려주셔서 교회를 세우시고, 교회를 통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신 모든 과정에 대해서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란 주님이 우리에게 그와 같은 모든 구원의 과정을 마련해 주셨으니 그 사랑과 은혜를 입은 하늘나라 백성으로서 마땅히 나타낼 성결하고 의로운 삶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그 성결하고 의로운 삶도 우리 자신의 능력과 의지로 이루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안에 부어주신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여 말씀을 순종하는 실천의 의지가 발휘될 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령의 능력을 의지해서 나타낸 의로운 삶을 ‘성령의 열매’라고 부릅니다.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과 및 관절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선 검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속에 추악한 죄악을 제거하며 하나님 앞에서 거룩해지도록 인도합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신체를 그대로 비춰주는 거울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게 도와주고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아 고칠 수 있게 인도합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우리 자신의 영혼을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에 의한 변화의 과정이 없다면 우리는 성숙한 신앙인으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성숙한 신앙인으로 성장할 수 없으면 이웃 사랑의 계명도 실천할 수 없습니다. 마치 미성숙한 어린 아이는 자기보다 어린 동생을 배려하고 돌보아주지 못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처럼 말씀을 통해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한 어린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성도를 배려하고 돌보아주기는커녕 오히려 상처를 주고 아프게 할 수 있습니다(참고. 고전 1:10-13 3:1-4). 따라서 성도는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 뜻을 깨닫고 성령으로 기도하여 영혼의 성장과 성숙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런 노력이 지속될 때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닮은 인격의 사람으로 점점 변화하게 되고 이웃 사랑의 계명을 실천할 수 있게 됩니다.

     

    (딤후 3: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1: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성경은 말씀을 가까이하는 것이 복의 근원이라고 말합니다. 성도는 말씀을 열심히 읽고 묵상하고 실천할 때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을 읽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약 52시간 20분, 신약성경은 7시간 40분으로 육십 육권을 모두 읽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약 60시간 정도라고 합니다. 성경 전권을 단기간에 통독하는 일도 유익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적은 분량이라도 매일 일정한 분량을 정하고 정기적으로 읽고 묵상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말씀을 암송하여 마음판에 새기려고 노력하는 것도 좋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암송하면 더 깊은 감동과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3:3) 인자와 진리로 네게서 떠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 제1항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죄인을 구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대신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 승천하신 것을 믿으며 그분은 인류의 유일하신 구주시며 천지의 주재시고 홀로 하나이신 참 하나님이심을 믿는다.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초월해서 계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스스로의 감각으로 그분을 볼 수도 들을 수도 만질 수도 없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이 자신의 모습을 계시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역사 속에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해 주시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이천년 전 “예수 그리스도”(그리스도란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께서 이 땅에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이 땅에 오신 하나님 자신 이십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실 때 인간을 만물 가운데 가장 존귀한 피조물(조물주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로 만드셨습니다.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어졌고 그로 인해 그분과 교제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은 인간에게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위임하셨습니다. 이는 다른 피조물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는 인간에게만 주어진 특권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뿐만 아니라 만물에 대한 관리까지 맡기시고 에덴동산 안에서 모든 것을 누리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에게 금지하신 한 가지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동산 중앙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명령이 주어진 것은 하나님 자신이 창조주요, 인간은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뜻도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아담과 하와는 마귀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이 금하신 나무의 실과를 따먹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에덴동산에서 추방되고 이 땅에서 땀흘리며 수고하며 살다가 다시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사망의 굴레에 갇히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 일에 대해서 왜 사망에 이르는 무거운 징벌을 내리셨을까요? 이 일을 통해 아담과 하와는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다스리도록 맡기신 하나님의 말씀보다 마귀의 말을 더 신뢰하는 모순된 모습을 보였습니다. 게다가 마귀가 스스로 교만해져서 하나님처럼 높아진 것처럼 아담과 하와도 피조물의 자리를 지키지 않고 하나님처럼 높아지려는 교만한 마음을 품은 결과로 빚어진 일입니다(참조. 사 14:12 롬5:12-14). 이처럼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결과로 주어진 결과는 인간이 사망의 저주 아래 놓이게 된 것 이외에도 여러 가지 측면에서 그 영향이 끼쳐졌습니다. 그 일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피조물 사이에 분열과 파괴의 현상이 일어납니다. 조화와 질서 가운데 창조된 아름다운 만물은 모두 인간을 위해서 지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한 결과 만물에도 부조화와 무질서가 찾아왔고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파괴되고 최후에는 결국 멸망이 예정된 것입니다. 만물 가운데 가장 존귀한 피조물로 만들어진 인간은 결국 죽음 이후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고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아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9:27)

    비록 인간은 하나님을 반역하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질렀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인간을 사랑하셔서 이 상황을 해결할 방법을 일찍이 계획하셨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셔서 인간을 대신하여 죄의 대가를 치르시는 것이었습니다. 이천 년 전 이 땅에 내려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 자신이시오,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신 조물주 하나님이셨습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요일 1:1)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일 1:14)

    이처럼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신 사건을 ‘성육신’(Incarnation 하나님이 태어났다는 표현은 부적절하기 때문에 사용하는 표현)이라고 표현합니다. 구약 성경은 이 성육신 에 대해서 무려 40여 차례나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여러 차례 예언했다는 사실을 보면 성육신은 이미 오래 전부터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성육신은 인간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첫째, 하나님은 범죄한 인간을 여전히 사랑하시고 그가 구원받기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딤전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일반적인 사람들은 선한 사람이나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에게 가끔 호의를 베푸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악인을 위해서, 더욱이 내게 해를 입힌 사람에게 호의를 베풀고 희생하는 경우는 매우 드문 경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마귀에게 순종하여 반역의 길을 간 인간에게 최고의 호의를 베푸셨습니다. 그 호의란 사망의 그늘에 놓인 인간의 상황을 해결하시고자 ‘조물주’이신 그분이 ‘피조물’의 형상을 입고 기꺼이 이 땅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육신하신 일은 인간이 비록 범죄했지만 여전히 그를 사랑하시고 불쌍히 여기신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둘째, 인간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3:23) 모든 사람이 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신 사건은 인간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만약 인간 스스로 구원할 수 있는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하나님이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실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자기 능력으로 극복할 수 없고 반드시 타인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들을 만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가고 있으면 그 사람은 스스로 그 상황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혹 아무리 수영을 잘한다고 해도 급류의 상황에서 헤엄쳐 자신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외부로부터 구조대원이 구조 장비를 통해 도움을 주어야 그 상황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예를 들자면 어떤 노동자가 밖에서만 문을 열 수 있고 안에서는 문이 열리지 않는 냉동 창고에 갇혔다고 합시다. 냉동 창고 안에 들어갔다가 실수로 문이 닫히면 반드시 밖에서 열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그 상황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망의 그늘에 놓인 인간이 그 굴레에서 스스로 빠져 나올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따라서 성육신은 인간 스스로의 능력으로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셋째, 하나님이 자기를 부인하는 겸손을 보이셨습니다.

    (요일 4: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2:7) 오히려 자기를 비어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일은 그분의 겸손과 사랑을 증거합니다. 2005년 일본의 아키히토(明仁) 일본왕의 장녀 노리노미야 공주는 평범한 공무원과 결혼하였습니다. 그런데 일본 왕족이 평민과 결혼하게 되면 왕족이라는 자기 신분을 잃고 평민이 되어야 하는 규율이 있습니다. 따라서 결혼하게 되면 과거 왕실에서 누렸던 모든 혜택도 상실하는 상황을 감내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사랑하는 한 남자 때문에 모든 것을 기꺼이 포기하고 결혼을 선택합니다. 이처럼 사랑은 때로 자신의 특권을 기꺼이 내려놓게 만듭니다. 그리고 낮아지게 만듭니다.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인간의 몸이 되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높고 높은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 낮아지신 것을 의미합니다. 또 인간을 사랑하시되 조건없이 베풀어주시는 아가페의 사랑을 나타냅니다.

     

    1) 예수님은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대신 죽으셨습니다.

    출애굽 시대에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달했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이 내려주신 율법을 다 준수하겠노라고 굳게 맹세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때로는 율법을 범할 수 있는 연약한 존재임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율법만 주시지 않고 혹 범죄할 경우 죄책을 면하도록 소, 양, 염소, 비둘기, 곡식가루를 제물로 삼아 속죄의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성막의 제도까지 주셨습니다. 만약 어떤 자가 율법을 범하게 되면 흠이 없는 가축을 성막으로 끌고 와서 그 가축에게 안수하고 죽여서 하나님께 제물로 불살라 드리고 피를 제단 주변에 뿌리는 제사 의식을 행해야했습니다. 그 후에야 비로소 범죄한 자는 하나님께 죄사함을 받고 사망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9: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함이 없느니라

     

    구약 시대 유대인들의 동물 제사 제도는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제사의 그림자입니다. 신약 성경의 저자들은 이천년 전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십자가 사건은 한 유대인 청년의 억울한 죽음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바로 모든 인류의 죄값을 대신 치르신 일종의 제사였다고 말합니다. 또 십자가를 지셨던 예수님 자신도 제자들에게 그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육체를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셔서 인간이 처한 사망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9:13-14) [13] 염소와 황소의 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벧전 1:18-19) [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로 한 것이니라

     

    (26: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언약의 피니라

     

    2) 예수님은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언대로 죽으실 뿐만 아니라 예언대로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구약 성경도 그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직・간접적으로 예언하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 ‘요나’라는 이름의 선지자가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여 도망가다가 하나님의 섭리로 물고기 뱃속에 갇히게 됩니다. 그 후 그가 뉘우치고 회개하자 사흘 만에 물고기가 그를 토해내서 살아납니다. 예수님은 구약 시대의 이 사건을 인용하시면서 곧 자신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할 것에 대한 예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2:40)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시편 16편은 다윗이란 인물이 지은 노래입니다. 그 노래 가운데 예수님의 부활을 예언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10절에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서 ‘내 영혼’이란 겉으로 보면 다윗 자신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행 2:29-31)는 다윗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증거합니다. 그렇게 보는 근거는 다윗은 이미 죽어서 그 무덤이 자신들의 곁에 있으니 다윗에게 적용될 말씀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6:10)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2:31)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이처럼 예수님은 성경의 예언대로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뿐만 아니라 부활도 믿어야 합니다. 만약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많은 모순점들이 발생합니다. 만약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부활도 없다는 뜻이고, 우리의 부활이 없다면 신앙생활의 목적도 사라집니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전하는 복음도 거짓말이라는 뜻이고 예수님과 제자들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정하면 모든 것들을 부정하게 되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긍정하면 모든 것들을 긍정하게 됩니다.

    (고전 15:17-19) [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8]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재물, 병나음, 마음의 평안, 출세, 권세와 같은 모든 것들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의 궁극적 목표는 그런 것을 얻고 누리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목표는 영원한 생명을 얻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신앙생활에 힘쓰는 궁극적인 목적이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최고의 복락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처럼 성도도 부활할 미래가 있다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부활한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그 때 나타날 현상과 부활의 과정에 대해서까지 매우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자세히 밝히고 있다는 것은 우리의 부활이 확실하다는 뜻입니다.

    (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도 살리시리라

     

    (살전 4:16-17) [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3) 예수님은 인류를 구원하실 유일한 구세주이십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모든 인류에게 구원을 줄 수 있으려면 첫째, 전 인류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 하고 둘째, 전 인류를 구원할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사랑이 있더라고 능력이 없으면 아무 것도 줄 수 없습니다. 또 아무리 능력이 있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심으로 인류에 대한 사랑을 증명해 보이셨고 부활하심으로 인류를 구원하실 능력을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인류사에서 어떤 종교의 교주나 훌륭한 성현도 죽음을 경험했거나 죽음에서 부활하였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 없습니다. 더욱이 그 죽음이 인류를 위한 것이고 부활이 또한 인류를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오로지 우리가 믿는 예수님만이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인류에 대한 사랑과 구원의 능력을 증명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류를 구원하실 유일한 구세주가 되실 수 있는 것입니다.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2: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고전 1: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세상은 기독교를 일컬어 독선적이라고 비판합니다. 다른 길은 없고 예수님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유일성에 대한 주장은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선언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분은 언젠가 제자들에게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살펴보면 이 보다 독선적인 선언은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자신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것은 다른 길은 모두 틀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독교라는 종교의 배타성은 바로 이 선언에서 출발합니다. 이와 같은 유일성은 제자들도 분명히 깨닫고 고백한 내용이었습니다. 사도행전에 초대교회를 막 시작한 사도와 성도들은 유대인의 산헤드린 공회(이스라엘의 종교재판소) 앞에서 예수님의 유일성에 대해서 고백했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 사실은 오늘날 우리도 같은 믿음을 가지고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 불신자들은 큰 의문이 있습니다. ‘내가 만나보지도 않은 수천 년 전의 인물 아담 한 사람으로 인해 왜 내가 죄인이 되어야하고 사망의 저주에 놓여야 하는가?’하는 의문입니다. 그런데 이 의문은 예수님을 믿으면 모두 풀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 한 사람으로 인해 일어난 모든 문제를 예수 한 분으로 인해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인류의 첫 번째 아담이 일으킨 문제를 인류의 두 번째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 책임지고 해결하게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을 부당하게 처벌한 것도 아니고 아담의 불행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무책임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십자가로 당신 자신이 모든 것을 책임지시려는 깊은 사랑과 관용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런 상황에 대한 성경의 명료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5: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5:19)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 방언에 두 종류가 있음을 알고 계십니까?

    방언에 두 종류가 있음을 알고 계십니까?

    1) 은사로 나타나는 방언

    은사의 방언은 하나님께서 필요에 따라서 특정한 사람에게 주시는 것이므로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어떤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고전 12:10)

    . 은사의 방언은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한 것이며 반드시 통역과 함께 나타납니다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고전 14:5)

     

    2) 성령을 받은 증거의 방언

    성령 받은 증거(표적,sign,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 고전 14:22)로 개인의 덕을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고전 14:4).

    개인의 덕을 세우는 방언은 성령을 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고 통역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기도하며 하나님께 성령으로 비밀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고전 14:2)

    .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최초로 성령을 받은 것을 포함해서 사람들은 성령을 받으면 공통적으로 방언으로 기도했습니다(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행 2:4

    ,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10:46

    ,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19:6).

     

    오늘날에도 성령을 받은 참예수교회 성도들은 기도할 때 방언으로 기도하며, 때로 방언 통역의 역사가 나타나기도 합니다. 성경상의 두 종류의 방언이 실제로 나타나는 것을 통해 방언에 대한 말씀이 정확함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 방언을 말하는 것만이 성령받은 증거인가요?

    방언을 말하는 것만이 성령받은 증거인가요?

    네. 그렇습니다.성령 받은 현상에 대해서 성경은 사도행전을 통해서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1) 오순절 성령 강림에 나타난 현상은 방언이었다.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셨을 때 세계 각처에서 오순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성령이 임한 순간, 초대교회 성도들은 방언을 말하기 시작했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이에 대해서 두 가지 태도를 보였습니다. 먼저 경건한 자들로 소개된 한 그룹은 방언이 자국 언어로 들리는 것을 신기하게 여겼습니다. 다른 그룹은 ‘새 술이 취했다’고 조롱했습니다. 반응이 이처럼 두 무리로 나뉘었다는 점은 무엇을 시사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이 방언이 물리적으로 영어, 중국어, 일본어로 발음된 방언이 아니라 물리적으로 한 종류의 방언이지만 이에 대해 들을 줄 아는 귀가 열리고 열리지 않았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설교를 시작한 직접적인 동기는 바로 이 조롱하는 무리들에게 이 사건을 납득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행2:1-4)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같이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행2:13-14)

    베드로는 자신의 설교의 종결부에서 조롱하는 무리들에게 너희가 조롱한 이 현상은 새 술이 취한 것이 아니라 성령을 주신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이 성령에 대해서 표현하기를 ‘보고 듣는 이것’이라고 했습니다. 부어주신 것은 성령인데 그것을 ‘보고 듣는 이것’이라고 설명함으로써 성령과 방언의 가시 가청의 현상을 동일시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행2:33)

    2) 사마리아 선교현장에서 마술사 시몬은 무엇을 보았는가?

    스데반 집사의 순교로 복음이 사마리아에 전파되었는데 일곱 집사 중의 하나인 빌립은 그 지역에서 사역했습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기적과 이사를 행하며 세례를 주었는데 마술사 시몬이라는 자도 이에 믿고 세례를 받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사마리아 지역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그 지역에 방문합니다. 그런데 그 방문의 목적이 성령을 받게 하려는 목적으로 안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이 내려가서 저희를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행8:15-17)

    이 말씀이 내포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세례 받는 것과 성령 받는 것은 별개의 과정이라는 뜻입니다. 또 세례를 받았으면 당연히 성령을 받아야 한다는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술사 시몬은 이런 광경을 목격하고는 재빨리 돈을 내밀며 요구합니다.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마술사 시몬의 요구에 베드로는 그의 은과 그가 함께 망할 것이라고 저주합니다.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함으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가로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행8:18-19)

    마술사 시몬은 성령이 내리실 때 구체적으로 무엇을 보았기에 그 능력을 돈주고 사려고 했을까요? 성경은 그 구체적인 상황에 대해서는 침묵합니다. 그러나 성령 강림이 단지 마음속에서 내적으로만 일어나는 사건이라면 마술사 시몬의 이런 요구는 너무 이상한 것입니다. 사람의 주목을 받는데 관심이 있었던 마술사 시몬이 관심을 둘만한 성령 강림의 구체적인 현상은 무엇이었을까요?

    3) 고넬료 일가도 성령을 받고 방언을 했다.

    고넬료는 이미 하나님을 믿는 자였습니다. 그의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에게 무엇이 더 필요했는지 욥바 피장 시몬의 집에 머물고 있는 베드로를 청하라고 주의 사자를 보내서 명령하셨습니다. 한편, 베드로에게는 부정한 고기가 담긴 보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와 ‘잡아 먹으라’는 상징적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곧 이방인인 고넬료를 부정하게 여기지 말고 그로부터 온 사람들을 따라가라는 의미의 계시였습니다. 이렇듯 고넬료에게 천사를,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가능했던 두 사람의 만남은 전적인 성령의 중재로 이루어진 만남이었습니다. 그 만남을 주선한 하나님의 목적은 10장의 후반부에 나타납니다. 고넬료 일가와 그의 친구들은 함께 모여서 베드로로부터 설교를 듣던 중 갑자기 성령을 받게 되고 할례 받은 유대인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주심 때문에 놀랐는데 이는 방언을 말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 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행10:44-46)

    베드로는 예루살렘에 돌아가서 의혹과 의심에 찬 장로들에게 설명할 때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라고 말했습니다. 즉 오순절 성령 강림 때와 같이 그런 현상으로 임했다는 것 입니다. 이처럼 고넬료 가정의 성령강림은 방언을 말하는 것을 통해서 사도들에게 인지되었습니다. 이 성령세례를 꼭 받아야 거듭나는 것이고 거듭나야 천국의 시민이 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미 경건한 신앙을 가진 사람 고넬료를 베드로와 만나게 하시고 그로 인해 성령을 받게 하셨던 것 입니다.

    4) 에베소교회 제자들도 성령을 받고 방언을 했다.

    바울 사도가 에베소에 이르렀을 때 어떤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그들이 대답하기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돌연 바울은 성령세례에 대한 이야기에서 이제 물세례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를 돌립니다.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이런 대화의 흐름은 물세례와 성령세례가 대단히 긴밀한 관계에 있음을 뜻합니다. 바울의 질문에서 느낄 수 있는 의미는 ‘성령세례도 모른다니 그러면 물세례는 제대로 받았는가?’의 의문이 잠재합니다. 물세례를 받아야하고 성령의 세례도 받아야 한다는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다. 이처럼 ‘에베소 어떤 제자들’은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학자 아볼로처럼 요한의 세례만 아는 신앙의 단계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그들에게 물세례를 주고 다시 안수하여 성령세례를 받게 합니더. 그런데 바로 이 때 그들에게 성령이 임해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행19:5-6)

    이와같이 성경에 성령을 받고 방언 못 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성경에 성령을 받는 기록은 네 곳밖에 없습니다. 즉,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행2:1-4)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함으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가로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행8:16-19)

    베드로가 이 말 할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이에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 하고 (행10:44-47)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 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바울이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로라 바울이 가로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모두 열 두 사람쯤 되니라 (행19:1-7) 복음서(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는 성령이 내리는 시기가 아니기 때문에 성령을 받은 것에 대해 볼 수 없습니다.

    명절 끝날 곧 큰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요7:37-39)

    . 그리고 로마서부터 유다서까지는 성령을 받고 신도가 된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이고, 계시록은 요한이 받은 계시를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은 초대교회 역사서이고 교회가 되는 기본 교리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위의 네 곳 중에 성령을 받고 방언을 했다는 기록이 없는 곳은 8장입니다. 여기서는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라고 했는데, 시몬은 그 광경을 보고 돈을 드려 살려고 했음을 보아, 방언을 했다는 지극히 당연한 기록은 생략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요3:8)

    여기서 예수님은 성령과 바람의 같은 점을 말씀하셨습니다.

    ⑴ 소리가 납니다. 성령을 받으면 방언의 소리가 납니다.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행2:4)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행2:33)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행10:45-4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행19:6)

    ⑵ 움직입니다. 성령이 우리 몸을 격동시켜 몸이 진동합니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행2:33)

    ⑶ 성경에 성령이 내리신 광경이 네 곳밖에 없습니다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행2:1-4)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함으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가로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행8:16-19)

    베드로가 이 말 할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이에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 하고 (행10:44-47)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 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바울이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로라 바울이 가로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모두 열 두 사람쯤 되니라 (행19:1-7 이 네 곳의 공통점은 “방언”입니다.

  • 방언에 대해 정확히 알고 계십니까?

    1) 성령에 감동되어 말하는 혀의 소리입니다(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행2:4

    ,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19:6).

    2) 일반적으로 방언을 이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또 어떤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 행2:13

    ,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고전14:2

    ,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14

    ,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16).

    3) 이 세상의 언어가 아닙니다(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이같이 많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고전14:10

    ,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야만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야만이 되리니 11

    ,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찌니 13).

    4) 성령이 성도를 대신하여 대신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롬8:26-27

    ,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고전14:15).

    5) 영언을 말하면 믿음의 덕을 세울 수 있습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고전14:4).

    6) 영언은 원래 뜻이 있는 것으로서 필요시 하나님이 사람을 감동시켜 통역하게 하십니다(

    어떤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고전12:10,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림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가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 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행2:5-11).

    7) 만약 영언을 통역하는 은사, 즉 각종 방언을 말하는 사람의 영언을 통역하는 은사가 발휘되면 이 때 방언(영언)은 모든 이가 이해할 수 있는 예언이 됩니다(

    어떤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고전12:10

    ,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다불과 세 사람이 차서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14:26-28).

    8)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을 통역함을 주시나니』 (고전12:10)

    . 여기에서의 방언은 타인의 덕세움을 위해 말하는 영언으로서(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다불과 세 사람이 차서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고전14:26-28) 통역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특별한 은사이며 성령 받아 방언 말하는 사람 모두에게 주어지는 은사는 아닙니다(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고전12:30

    ,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14:5

    ,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찌니 13

    ,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28).

    9) 때로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영가(靈歌)를 부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고전14:15

    ,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골3:16

    ,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엡5:19).

    10) 자기의 덕을 세우든지 교회의 덕을 세우든지 영언 말함을 금하면 안 됩니다(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고전14:39

    ,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 40

    , 참조,

    성령을 소멸치 말며 살전5:19).

  • 세례는 반드시 물속에서 받아야 하는 것인가요?

    세례는 반드시 물속에서 받아야 하는 것인가요?

    세례는 헬라어로 ‘침수(浸水)한다’는 동사 ‘밥티조’(baptiz)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밥티스마’(βἀπτισμα)라고 합니다. 이를 영어로는 ‘뱁티즘’(baptism)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이와 같은 세례의 어휘적 뜻에 따르면 ‘세례’보다는 ‘침례’가 더 정확한 번역입니다. 신약 성경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세례’는 ‘침수’로 시행되었음을 간접적인 증거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물들이 많음이라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주니 거기 물들이 많음이라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요3:23)

    물에서 올라가실새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마3:16)

    물에서 올라갈새 둘이 물에서 올라갈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간지라 내시는 흔연히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행8:39)

    와 같은 표현은 침례를 행했다는 증거입니다. 또한 기독교 역사 자료를 제시한 여러 문헌들을 살펴보면 초대 교회에서 시행한 세례는 물에 완전히 잠기는 침례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례는 물속에서 받아야 합니다.

    성경은 세례를 통하여 예수님의 죽으심에 우리가 참여하게 되는 것이며, 예수님과 함께 장사되고 더 나아가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하게 하는 예식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롬6:3-5)

    . 세례를 통해서 물속에 잠기고 물속에서 올라오는 세례의 예식이 이와 같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성경은,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벧전3:21). 그렇기 때문에 세례는 본래의 성경의 모습에서 언급하고 있는 바와 같이 물에서 잠기는 침례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교에서 행해지는 하나의 중요한 의식(儀式). 육체는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남을 상징하는 의식인데, 새 신자들은 세례를 통하여 교회의 정식 구성원이 된다. 세례를 뜻하는 그리스어 밥티스마(βπτσμ)는 ‘침수(浸水)한다’는 동사에서 나온 말인데, 원래의 세례는 몸통을 물속에 잠그는 침례(浸禮)예식이었기 때문이다.’

    두산세계대백과

     

    “헬라어 원어의 뜻은 ‘침수’. 초대 교회에서부터 시행된 그리스도인의 입교 의식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행2:41)

    . 그러나 세례의 발단은 구약 시대의 할례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창17:10,11)와 결례(레 11장 이후)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세례 요한의 세례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세례의식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일반적으로 물을 붓거나 떨어뜨리는 경우를 세례라고 하고 물에 잠기는 것을 침례라고 부른다. 침례가 본래의 의식이나 세례도 초대 교회부터 시작되었다. 중세까지는 주로 침례가 시행되다가 종교 개혁 이후에는 세례가 보편화되었다. (하략)”

    기독교사전. 기독교문사

     

    이러한 세례(침례)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자신에게 세례를 주라고 명령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고 증거했습니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줄 알라 하셨기에 (요1:33)

    . 또한 이처럼 세례자 요한이 베푼 세례의 기원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바리새인들과의 대화 가운데서도 간접적으로 인정하신 것 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무슨 권세로 가르치느냐는 물음에 예수께서는 오히려 반문하시기를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인지 사람으로부터인가?’를 물으셨고. 누구든 이 물음에 하늘로부터라고 대답하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눅20:4)

    . 누가는 자신의 복음서에서 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가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느냐 받아들이느냐의 여부를 가늠하는 기준으로 이해했습니다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 오직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그 세례를 받지 아니한지라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 (눅7:29-30). 이와 같은 사실들을 근거로 볼 때 세례는 분명히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시작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 참예수교회는 왜 세례를 그렇게 중요하게 여깁니까?

    바울 사도는 로마서 6장에서 언급했듯이 기독교 세례의 정의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인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인류가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세례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에 대해서 믿음으로 응답하는 자에게만 구원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세례는 십자가 사건처럼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이천 년 전 공생애의 세 번째 유월절이라는 시간적 배경과 예루살렘 영문 밖 골고다 언덕이라는 공간적 배경에서 이루어진 역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거듭나는 사건도 머리로만 이해하거나 마음으로만 믿는 것이 아니라 세례를 통해서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에서 십자가와 연합하는 역사적 사건이어야 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침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롬6:3-5)

    너희가 세례(침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골2:12)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빌3:10-12)

    성경은 세례가 단순히 형식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효과가 나타나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1) 죄 씻음(Washing sins)

    사도들은 세례가 죄를 씻는 효과가 있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행2:38)

    『이제는 왜 주저하느뇨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침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 (행22:16)

    2) 칭의(稱義)또는 의롭다 칭함(Justification)

    사도들은 세례를 통해 하나님이 인간을 ‘의롭다’고 여긴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롬6:6-7)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고전6:11)

    3) 중생(Regeneration)

    예수님과 사도들은 세례를 통해 사람이 거듭 태어난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딛3:5)

    4) 구원(Salvation)

    예수님과 사도들은 세례를 통해 인간이 구원에 이른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믿고 세례(침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막16:16)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침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벧전3:21)

  • 안식일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입니까?

    이 질문은 안식일은 율법과 함께 폐지되었기 때문에 지킬 필요가 없지 않느냐는 생각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안식일을 반포하시는 것은 맞습니다. 십계명 가운데 명확하게 들어가 있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출20:8)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신5:13)

    하지만 반드시 알아야할 것은 안식일은 율법 이전부터 존재했다는 사실입니다. 안식일은 모세에게 율법을 주실 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실 때부터 정하신 날입니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창2:1-3)

    뿐만 아니라 안식일은 세상 끝 날까지 존재할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마24:2)

    따라서 안식일은 구약시대에만 한시적으로 지켜야 하는 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이 존재하는 동안 변함없이 지켜야 하는 거룩하고 복된 날입니다.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창2:3)

    많은 주일일 준수자들은 기독교인이 은혜로 구원받는 것이기 때문에 십계명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다음의 성경을 보겠습니다.

    1)구원은 율법의 행위가 아닌 예수의 피와 주께 대한 믿음을 통해서입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롬3:25,28)

    2) 성도는 십계명을 폐할 수 없고 계명을 범해서도 안 됩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말하기를 믿음으로 율법을 굳게 세운다고 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롬3:31)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롬6:15)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마19:17)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고전7:19)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계12:17)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계14:12)

    율법의 규례는 십자가에 의해 폐해졌으므로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엡2:15)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골2:14)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골2:16)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히9:10)

    우리는 형식적인 방식으로 의식을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완성은 십계명을 제거하거나 오용하거나 왜곡한다는 뜻이 아니라 성령의 도움을 통해서 율법의 ‘정신’을 지켜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율법의 정신을 지키는 것은 율법의 형식을 지키는 것보다 더 높은 기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문자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새겨진 것입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마5:17-18)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줄 생각나거든 (마5:21-23)

    또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 (히8: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약2:10-12)

    3) 성도가 은혜 아래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구약에서 율법적으로 지키는 것과는 크게 다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의 온 회중을 모으고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사 행하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엿새 동안은 일하고 제 칠일은 너희에게 성일이니 여호와께 특별한 안식일이라 무릇 이날에 일하는 자를 죽일지니 안식일에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불도 피우지 말지니라 (출35:1-3)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 거할 때에 안식일에 어떤 사람이 나무하는 것을 발견한지라 그 나무하는 자를 발견한 자들이 그를 모세와 아론과 온 회중의 앞으로 끌어 왔으나 어떻게 처치할는지 지시하심을 받지 못한 고로 가두었더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그 사람을 반드시 죽일찌니 온 회중이 진 밖에서 돌로 그를 칠찌니라 온 회중이 곧 그를 진 밖으로 끌어내고 돌로 그를 쳐 죽여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하니라 (민15:32-36)

    은혜 아래서의 안식일 준수는 속박과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쌔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고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마12:1-2)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편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막3:1-2)

    에덴동산에서처럼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치료의 안식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안식일을 통해서 주님이 공급하시는 영육의 축복을 즐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창2:3)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일은 휴식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안식일이라 너희가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고 그 나머지는 다 너희를 위하여 아침까지 간수하라 그들이 모세의 명대로 아침까지 간수하였으나 냄새도 나지 아니하고 벌레도 생기지 아니한지라 모세가 가로되 오늘은 그것을 먹으라 오늘은 여호와께 안식일인즉 오늘은 너희가 그것을 들에서 얻지 못하리라 (출16:23-25)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함을 받으리라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사람이 너희를 회당과 정사 잡은 이와 권세 있는 이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 것을 염려치 말라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눅12:9-13)

      (요5: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