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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음 메세지] 심령이 가능한 자는 복이 있나니(마5:1-12)

    [복음 메세지] 심령이 가능한 자는 복이 있나니(마5:1-12)

    [말씀 제목]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마5:1-12)

    [설교자] 김세한 목자

    [설교일] 2024년 11월 2일

    19세기 말 지식인들은 앞으로 다가올 20세기를 일컬어 인류의 황금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 장밋빛 미래 예측의 근거는 인간의 과학 기술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작 20세기에 이르렀을 때 그 예측은 크게 빗나갔다. 두 차례에 걸친 세계 대전을 통해 미래가 밝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또 다른 문제들도 있었다. 과학기술의 발달은 산업 혁명을 통해서 물질적 풍요는 이루었지만 빈부의 격차라는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고 또 오늘날에 와서 환경오염, 기후 변화 등의 문제가 인간의 목을 조르고 있다. 인류는 이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개선이 아니라 개악의 상황을 마주하고 있다. 그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사람이 물질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행복과 불행이라는 영혼의 문제를 물질에서 찾을 수 있다는 잘못된 전제와 남보다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높은 곳에 있고자 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들이다.

    인류의 역사도 그렇지만 오늘날 개인의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물질과 육체의 욕망에 집중하며 살면 인생이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한다. 과거 인류의 역사 속에서 그 전제가 틀렸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교훈을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잘못된 전제에 빠져 자기 인생을 허비하고 살아간다. 우리는 창세기에서 그런 어리석은 인간의 전형을 발견한다. 바로 소돔과 고모라 땅을 선택했던 롯이다. 롯은 눈에 끌리는 대로 풍요로워 보이는 소돔 땅을 선택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그 땅은 유황불에 멸망하고 그 멸망과 함께 롯도 모든 것을 잃는다. 욕망하는 것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모두 잃는 모순된 결과를 맞이한다. 이것이 똑똑한 것 같지만 어리석은 인간의 실상이다. 이러한 인간의 어리석음은 또 어디에서 발견되는가? 멀리 있는 유익을 보지 못하고 당장 눈앞에 유익에 집착한다. 자신에게 해가되는 것도 모르고 목숨을 바쳐 쟁취하려고 달려든다. 가장 소중한 것을 옆에 두고 가장 먼 곳에서 그것을 헤매기도 한다. 또 정작 가장 소중한 것을 찾았는데 변덕이 생겨서 그것을 헌신짝처럼 내버리기도 한다. 인간은 이렇게 어리석은 면이 많고 헤매는 존재임을 성경은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사 59:8) 『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며 그들의 행하는 곳에는 공의가 없으며 굽은 길을 스스로 만드나니 무릇 이 길을 밟는 자는 평강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는 어떻게 이런 오류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로서 천국의 백성으로서 평강을 누리고, 가치를 누리고, 하나님께 드릴 아름다운 보석으로 내 인생을 장식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서 나는 먼저 어떤 존재가 되어야할까? 오늘은 산상보훈의 팔복 설교의 첫 구절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는 이 말씀의 뜻을 되새기고 함께 은혜를 나누는 시간을 가지고자 한다.

    오늘 구절에 대해서 문법적으로 살펴보면 먼저 문장 순서가 원문의 것과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원문을 직역하면 “복이 있으리라, 심령이 가난한 자들에게, 왜냐하면 천국이 저희들의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순서로 기록되었다. 복이 있다는 기원의 말이 문장의 맨 앞에 등장하고 복이 주어진 이유를 맨 나중에 기록하고 있다. 주목되는 단어가 있는데 첫째는 심령이란 명사이고 둘째는 가난하다라는 동사이다. 심령이란 명사는 ‘프뉴마’(pneu’ma) 즉 ‘영’(靈)이란 뜻이다. 가난하다란 동사는 ‘프토코스’(ptwcov”)로 ‘가난하다, 불쌍하다, 연약하다, 빈궁하다’라는 뜻이다. 그래서 문자대로 옮기면 ‘심령이 가난하다’라는 것은 곧 영이 빈궁하다.’ ‘영이 결핍되어 있다.’ ‘영이 불쌍하다라는 뜻이다. 우리는 영이란 단어를 안다. 그리고 가난하다라는 단어도 안다. 그런데 ‘영이 가난하다’라는 말은 도대체 어떤 개념인가? 또 영이 가난한 자는 왜 천국이 보장됨을 선언하고 있는가? 여기서 말하는 영이 가난한 자는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가?

    첫째, 세상의 것으로 채울 수 없는 마음이다.

    (사 66: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

    사실 심령이 가난하다는 표현은 예수님이 처음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유사한 표현을 사용했다. 이사야 선지자의 글을 통해 알 수 있는, 영이 가난하다는 뜻은 곧 하나님을 의식하고 그분과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갈망의 마음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존재를 알고, 그분의 말씀을 존중하며, 그분을 경외하기 때문에 가지게 되는 마음의 상태가 바로 영이 가난한 상태이다. 여기서 오해하지 않아야 할 점은 세상 사람들이 흔히 말하기를 “물질은 없어도 마음만은 부자다”라는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음의 풍요가 중요하니 물질적 가난은 중요하지 않다”라는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심령의 가난하다는 개념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다. 하나님을 알고, 그분과 교제하고자 하고, 그분의 손길을 소망하기에 가지게 되는 영혼의 결핍 상태가 바로 심령이 가난한 상태라는 것이다.

    예수님 공생애 초기에 예수님을 밤중에 찾아온 자가 있었다. 바로 니고데모이다. 그는 육신적으로 부족할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산헤드린 공회원이요, 바리새인이요 예수님 장례에 몰약을 백근 쯤 봉헌한 인물이다. 소위 명예와 신분과 재력을 모두 갖춘 자이다. 그런데 그가 뭐가 아쉬워서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는가? 자신이 소유한 것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내적인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천국에 들어가는 길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것을 알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은 거듭 나야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구원의 핵심을 말씀하셨다. 세상 기준으로 보면 다 가졌는데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영혼의 갈급함을 느끼는 자, 이와 같은 사람이 바로 심령이 가난한 자이다.

    또 마태가 있다. 그의 직업은 세리였다. 백성들에게 세금을 거둬서 로마 정부에 일정액만 잘 상납하면 나머지는 자신이 몫이 되었다. 그러니 욕심대로 부를 축적하고 물질의 풍요를 누릴 수 있는 직업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세관에서 일하는 그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신다. 그리고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신다. 마태는 놀랍게도 이 한 마디에 주저 없이 그 자리에서 일어나 예수님을 쫓는다. 가족과 의논하지도 않고 시간을 지체하지도 않았다. 그는 왜 이렇게 행동하고 있는가? 분명한 사실은 그는 그 풍요의 자리에 미련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응답이 즉각적인 것을 보면 그는 세리의 자리를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마태 같은 사람이 심령이 가난한 자이다. 이런 사람의 특징은 그 마음을 세상 것으로 채우지 못하고 하나님으로 채우려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가? 하나님에 대한 욕망보다 세상 물질에 대한 욕망 때문에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마치 쇼핑 중독에 걸린 사람이 물건을 사면 살수록 더 사고 싶고 사서 집에다 쌓아놓으면서 다시 사는 것처럼 물질에 집중하면서 살고 있지 않는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만족하고 이웃과 나누면서 행복한 삶을 사는가? 아니면 세상의 것을 끊임없이 욕망하면서 헛된 노력에 매달리고 있는가? 부디 육체의 욕망에 사로잡혀 물을 보관하지 못하는 터진 웅덩이가 되지 말고 하나님께 갈급하고 하나님 주신 것으로 채우고 만족할 수 있는 영혼이 되시길 바란다.

    (렘 2: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둘째, 세상의 것을 자랑하지 않는 마음이다.

    (왕상 8:27)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

    심령이 가난한 자의 두 번째 특징은 세상의 것으로 자랑하지 않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세상에서 추구하는 것은 한결같다. 자기 물질, 신분, 권세를 추구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것을 얻으면 자랑한다. 그러나 심령이 가난한 자는 그런 것으로 자랑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하나님 앞에 겸손하다.

    솔로몬 왕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둘도 없는 화려한 성전을 지은 인물이다. 그러나 정작 그가 성전을 완성했을 때 그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했다. 하나님은 세상을 초월해서 계시는 분이기 때문에, 자신의 손으로 지은 건물은 그 분을 모실만한 거처가 못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낙성식 기도에서 그는 이 생각을 고백한다. 초기의 솔로몬은 이렇게 심령이 가난한 자였다.

    솔로몬은 육적 성전을 지었지만 신약 시대에 이르러 영적인 성전을 지은 인물이 있다. 바울이다. 그는 바리새인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가말리엘 문하에서 배운 율법사였다. 오늘날 표현을 빌리면 개인적 스펙이 화려한 사람이다. 그러나 바울은 이 모든 것들을 오히려 배설물로 여긴다고 말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고 가장 가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 머리 속의 지식으로만 끝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알기 때문에 핍박과 위험을 감내하며 그분의 몸 된 교회를 세우는 일에 헌신했다. 그렇게 헌신의 삶을 살고 인생의 황혼기에 이르렀을 때 그의 태도는 어떠했는가? 오히려 나의 나 된 것은 주의 은혜로 되었다고 고백했다.

    (고전 15: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심령이 가난한 자의 특징은 자기를 낮춘다. 우리는 때로 세상 것을 포기했다고 말하면서 교회 안에서 세상 것을 추구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경우도 있다. 마치 베드로와 제자들이 배와 그물은 버리고 예수를 쫓았는데 예수님이 유대인의 임금이 되면 좌편과 우편에 앉아서 벼슬 좀 하사 받으려고 했던 것처럼 말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천국의 것을 세상 것 자랑하듯 자랑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 자기의 하찮음을 돌아볼 줄 알고 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잘 알기 때문이다. 부디 하나님이 너무 크심을 알고 자기의 작음을 고백하는 자가 되자.

    (고전 3:21)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셋째, 오로지 하나님만을 소망하는 마음이다.

    (시 42: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공급하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물질이든, 환경이든, 사람이든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면 하나님은 필요한 때 필요한 것을 우리에게 주실 수 있다. 그런데 시편의 기자는 물질도, 환경도, 사람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를 찾기에 갈급한다고 했다. 그래서 ‘주님이 주시는 복을 갈급해 한다’고 기록하지 않고 ‘주님을 찾기에 갈급함’을 노래했다. 이 마음을 어떻게 비유할 수 있을까?

    엄마가 아이에게 말한다. “엄마가 장보고 돌아오기 전까지 집에서 잘 놀고 있거라! 돌아와서 맛있는 과자를 사줄테니 잘 놀고 있거라.” 그런데 아이는 싫다고 울면서 떼를 쓴다. 과자도 싫고 사탕도 싫고 장난감도 싫으니 엄마랑 떨어지지 않겠단다. 마치 어머니에게 함께 있기를 애원하는 이 어린 아기처럼 주님을 찾기에 갈급한 마음은 그런 마음이다. 마치 어린아이가 과자와 사탕과 장남감을 좋아하지만 과자도 사탕도 장난감도 엄마를 대신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이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 2년 동안 청계천 판자촌에서 산 경험이 있다. 그 때의 추억은 한마디로 가난이다. 판자촌은 합판을 덧대서 망치질한 방에 벽면은 도배지 대신 신문지로 발랐고 그렇게 만들어진 방과 방들이 끝없이 연결되어 있었다. 요즘은 한 집에 화장실이 둘도 있지만 그 때는 화장실이 한 집에 하나도 없었다. 화장실은 온 마을 사람이 함께 쓰는 공중 화장실이었다. 마을 앞에는 청계천이 흐르고 어머님은 직장에 다니시면서 매일 동생과 저에게 10원짜리 동전을 쥐어 주셨다. 형제는 행여나 주머니에 넣으면 빠져서 잃어버릴까봐 그냥 손에 꼭 쥐고 하루를 보냈다. 그러다 저녁이 되면 그 돈으로 동네 만화방에 갔다. 왜냐하면 티브이에서 방영하는 재미있는 만화 영화를 보기 위해서다. 만화가 끝날 때 쯤 퇴근하신 어머님은 저희 형제를 데리러 만화방으로 오셨다. 그리고 어머니가 사주시는 붕어빵을 맛있게 먹으며 판자촌 집으로 귀가했다. 이상한 것은 그 가난했던 시절이 지금은 행복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유가 무엇인가? 사랑하는 어머님과 함께한 시간들이었기 때문이다.

    (합 3:17-18) 『[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성도님들 오늘 나는 어떤 영혼의 사람인가? 나의 영혼은 세상의 것으로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다. 오로지 그분으로 우리의 마음을 채울 수 있다. 세상의 것으로 대신할 수 없다. 오로지 하나님을 갈망하며 겸허하게 그분과 동행하는 성도가 되자. 이것이 가난한 심령의 사람이다. 부디 이런 마음을 품고 하나님과 교제하시고 동행하시고 하늘의 속한 신령한 것으로 배부르고 만족해하시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길 예수 이름으로 기원한다.

     

  • [복음메시지] 동행하시는 예수님 (눅24:13~35)

    [복음메시지] 동행하시는 예수님 (눅24:13~35)

    동행하시는 예수님

    제목 : 동행하시는 예수님

    성경 : 눅24:13~35

     

     믿음 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주님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않는 다는 것은 믿음 생활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믿음 생활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향하는 두 제자의 모습이 나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두 제자와 함께 걸어가셨고, 두 제자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눅24:16)

    성경에선 그들의 눈이 가리워져 앞을 보지 못했다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지 못한다면,

    눈이 가리워져 있는 것과 같습니다.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마13:13)

    예수님을 보지 못한다면 우리가 어찌 예수님의 축복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눈이 깨어져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그들의 눈을 가리게 한 것일까요?

     

    1. 미련하여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가라사대 미렪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눅24:25)

    예수님의 부활은 성경에도 나와 있고, 분명히 보여주고 계십니다.

    또한 부활하신 이후엔, 천사들이 제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깨닫지도, 알지도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면 예수님을 알아볼 수 없습니다.

    보이는 것만 믿는 사람이 되어선 안 됩니다.

    제자들의 눈에는, 그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만 보였던 것입니다.

     

    2. 더디 믿었기 때문입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약1:19)

    하나님의 말씀은 속히 듣고, 속히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소식을 듣고도, 예수님의 제자들은 더디게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바로 앞에 계심에도 불구하고, 알아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깨닫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1)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살아계신 예수님을 뵙기 위해선, 예수님의 말씀을 계속해서 들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10:17)

    올바른 믿음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것에서 시작합니다.

     

    2) 예수님을 강권하여 예수님을 모셨습니다.

    예수님을 강권하여 모셔야 합니다. 선한 일을 할 때엔 이렇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 없이는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음을 인정하고 나와 함께 거하시길 강권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삶의 주인 되심을 받아들이고 인정해야 합니다.

    마치 많은 무리들 속에서 바디매오가 예수님께 소리 질렀던 것처럼 말입니다.

     

    3) 예수님께서 축사의 떡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보는 것은, 우리의 능력만으론 안 됩니다.

    예수님의 축복이 있어야 비로소 가능합니다.

    성찬은 예수님께서 직접적으로 은혜를 베푸시는 일입니다.

    우리에겐 실로 너무나 큰 은혜입니다.

    성찬을 할 때마다 주님의 살아계심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 지라”

    (눅24:31)

     

    예수님인줄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예수님께서 사라지셨습니다.

    이런 놀라운 경험을 했던 제자들은 그 즉시 다른 제자들을 찾아 떠났습니다.

    이미 제자들에게 도착했을 땐,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난 상태였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오늘날 부활하신 예수님은 직접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 교회는 참예수교회입니다. 예수님께서 살아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뜨거운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고, 전하는 우리가 돼야 합니다.

  • [성도간증] 안산교회 김민준 형제

    할렐루야!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증하겠습니다. 저는 2023년 3월 14일에 나라의 부름을 받고 군에 입대하였습니다. 날씨가 아직 풀리지 않았던 때라 감기에 걸린 인원이 엄청 많았었고 코로나의 영향이 아직 끝나지 않았던 시점이라 마스크를 하루종일 착용하고 씻지도 못하는등 조금은 힘든 시기를 보냈었습니다. 감기와 훈련들로 훈련소 중반부터 컨디션이 좋지 않았고 마지막 각개전투와 행군을 진행하는 주에는 감기기운이 심해져서 제대로 훈련을 못 받을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다행히도 하나님께서 도와주셨습니다. 미세먼지가 심해져서 각개전투는 실시하지 않았고 행군은 약식으로 진행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모든 훈련을 무사히 끝낼 수 있었습니다.

    자대에 가서는 취사병을 하게 되었습니다. 소대단위로 생활하여서 많은 양을 하지 않았고 훈련은 훈련대로 다 빼면서 다른 사람들보다는 편한 군 생활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취사를 하는 1년 2개월 동안 큰 부상 없이 무사히 마무리 할 수 있었던 데에는 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군대에서 만난 선후임들도 불량하거나 삐뚫어진 사람 없이 다들 좋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사실 군대에 입대하면서 가장 크게 걱정했던 부분이 선후임과의 관계였는데 하나님께서 제 걱정을 하시고 그런 걱정 할 필요 없게 도와주신 것 같습니다. 이 외에도 군생활 기간동안 보통 사람들은 운이 좋았다라고 생각할만한 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비가 오다가 근무를 가야할 때 잠깐 안온다던가 예상치 못한 곳에서 포상휴가를 받는 일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운이 좋다고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이 나를 지켜봐주시고 도와주시는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1년 6개월이라는 기간이 짧게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그 기간동안 다치지 않고 무사히 전역했음에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비록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으로 군생활을 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느꼈고 앞으로 신앙생활을 더 열심히 하겠다고 다짐하게 되었습니다.

  • [복음메세지] 살인치 말라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 5:21-26)

    [복음메세지] 살인치 말라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 5:21-26)

    경북 예천에 “말 무덤(言塚)”이라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이 생긴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약 500년 전 그 마을 문중 간에 다툼과 싸움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원인은 말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낸 해결책이 미움, 원망, 비방의 말들을 사발에 담아 묻은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 후로 평화로워졌다고 합니다. 무덤 때문이 아니라 이후로 마을 사람들이 말조심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미움에서 나오는 말에 대한 교훈입니다. 오늘 가르침을 통해 미움과 미움에서 나오는 말을 다스리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미움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누군가 미워하면 마음에서 그 사람을 밀쳐 냅니다. 반대로 사랑하면 그 사람을 끌어옵니다. 그래서 형제를 미워하면 그 형제를 마음에서 밀어내는 것입니다. 이건 그럴 수도 있는 문제로 넘어갈 수 없습니다.

     

    (요일 3:14)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요일 3: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요일 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살인이기 때문입니다. 14절을 보면,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원인이고 그 결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간 것처럼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지금 형제를 사랑하고 상태는 그 사람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해 준다“는 뜻입니다. 즉, 생명 안에 있는 사람은 형제를 사랑한다는 것이죠.

    왜 세례 받은 사람은 형제 사랑할까요? 16절에서 보듯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사랑할 만한 사람을 골라서 목숨을 버리시지 않으셨습니다. 그 죽으심을 알기 때문에 그로써 사랑이 무엇인지 우리도 배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가 다른 형제를 미워한다고 그 형제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마음에서 밀쳐내면 영적으로 살인죄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누군가를 일시적으로 좋아하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합니다. 문제는 지속하는 것입니다. 미워하는 감정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대로 두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사망에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오늘 말씀으로 경고하십니다.

    (5: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세 사람이 나옵니다. 형제에게 노하는 자, 라가라 하는 자,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 뒤로 갈수록 이들이 받는 벌이 갈수록 중해집니다. 그러나 형제를 미워한다는 면에서는 동일합니다. 그래서 표현이야 어떻든 미워하는 마음을 그대로 두면 그에 대한 벌도 커집니다. 미움은 내가 알면서도 잘 멈춰지지 않습니다. 미움이라는 감정에 붙잡힌 것입니다, 그러면 그에 대한 책임에 붙잡힙니다.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미워하는 것은 죄이기 때문입니다.

     

    미움이 무서운 또 하나의 미움이 교회를 분열시키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내게 와서 어떤 사람을 미워하는 말을 한다면 그것을 이간질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 귀에 필터가 잘 달려 있어야 합니다. 그런 말들은 교회 공동체에 틈이 생기게 합니다.

     

    (12:1)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

    (12:2)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한 일로 인해 미리암과 아론이 비방했습니다. ”비방“했다는 것은 건설적이고 건전한 책망이 아니라 미움이 담긴 말입니다. 이 말을 누구에게 했을까요? 2절 보면, 모세가 아닙니다. 전체 백성 또는 지도자들 앞에서 했습니다. 미리암과 아론은 모세의 독점적 권위에 불만을 가졌습니다. 마침 트집을 잡을 만한 일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에 대한 미움을 대중 앞에 드러냈습니다. 모세는 이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가만히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미리암에게 문둥병이 생기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7일간 진 밖에 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미움은 문둥병과 같습니다. 공동체 안에 둘 수 없어 격리해야 합니다. 공동체에 틈이 생기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미움이 교회 안에 있게 해서는 안됩니다. 나만 잘한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를 생각해야 합니다.

     

    (마 5: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마 5: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예배를 드리러 교회에 와서 기도 중에 누군가 나를 원망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날 수 있습니다.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니더라도 나의 어떤 말과 행동으로 그 사람이 오해하거나 맘이 상해서 미워하고 원망할 수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 때 먼저 가서 화해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우선순위를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나의 예배보다 우리의 화목이 더 중요합니다. 나로 인해 그 형제가 죄를 지으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때는 많은 사람이 서로 미워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갈수록 미워하는 일들이 많아질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미움이란 감정에 붙잡히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나만 성숙해지는 것이 아니라 함께 성숙해져야 합니다. 먼저 생각난 사람이 화해와 손을 내미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 [복음메시지] 이것까지 참으라 (눅 22:47-53)

    [복음메시지] 이것까지 참으라 (눅 22:47-53)

    20241026() 오전예배

    설교제목 : 이것까지 참으라

    본문말씀 : 22:47-53

    설교자 : 박은진 목자님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고쳐주셨다. 그는 자신을 체포하러 온 핍박자였다. 자신을 핍박하는 사람에게까지 호의를 베풀 필요가 있을까? 어떻게 보면 마땅한 형벌로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오늘날 예수님께서는 교훈을 주시고 계신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눅 22:44)

    (44-45) 먼저 예수님은 십자가 고난을 앞두시고 기도하셨다. 십자가 고난을 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피할 수 있길,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라면 받아들이길 기도하셨다. (42)

    (47-48) 기도를 하자마자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잡으러 왔다.

    그는 예수님이 처음 부르신 12제자로서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르던 자였다. 그러나 그랬던 그가 예수님을 은 30에 팔려고 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조심해야 한다.

    (고전 10:2) 마귀에게 틈을 주는 순간 넘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귀에게 틈을 보이지 않고, 무엇보다 마음을 지키는 자가 되어야겠습니다.

    (47) 체포하러 온 사람들을 본 제자들은 검으로 무장하였다.

    검으로 치다 = 파라소(헬)

    매우 살벌한 단어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호해야겠다는 충성심에 칼을 무장한 것이다. 그 중에 성격이 가장 급한 자는 베드로였다. (요 18;10)

    말고는 왜 오른편 귀가 떨어졌을까? 말고는 검을 피하다가 귀가 떨어진 것이다. 만약 반대로 피했으면 목이 잘렸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를 책망하셨다. (요 18:11) 예수님은 검을 가진 자는 망한다고 말씀하셨다.

    베드로 입장에서는 서운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하나만 알아서는 안된다.

    예수님이 하시던 말씀을 귀담아 들었더라면 어떻게 대처할지 알았을 것이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늘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셨다. (마 5:44) 어떠한 경우에도 폭력은 안된다.

    우리는 예수님이 기도하신 내용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은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셨다. 예수님의 관심은 오로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데 있었다.

    베드로의 행동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결정적인 훼방꾼이 될 뻔 했다.

    사실 칼은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도 칼이 될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늘 조심해야 한다.

    베드로의 충동적인 행동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눅 22:51)

    (51) 이것까지 참으라

    참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고전 13장)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예수님께서 참으라고 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구속사에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전도하는 과정에서 조롱받을 때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참아야 한다.

    만약 참지 못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이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버린다.

    참는 것에 영혼구원이 달려있다.

    예수님께서 말고의 귀를 다시 붙여주신 것은 사랑으로 했다기 보다는 예수님의 관심이 하나님의 뜻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신 것에 있다.

    하나님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 사업이다.

    제자들 입장에서는 허망했을 것이다. 베드로는 참지 못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마지막까지 참으셨다.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아 참는 자가 되어야 한다.

    누군가에게 말을 할 때도 조심히 해야 한다. 참지 못하고 한 말이 누군가의 목을 베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영혼을 위해서라면 끝까지 참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유튜브 설교링크

  • [복음메시지]스스로 괴롭게 하라(레 16:29~31)

    [복음메시지]스스로 괴롭게 하라(레 16:29~31)

      우리 교회는 현재 가을 특별 전도 집회를 앞두고 한달간 릴레이 금식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풍성한 전도집회를 준비하기 위함입니다. 주님 앞에서 합당하고 기쁘게 받으시는 금식기도가 되기 위하여 오늘 말씀을 통해 금식기도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금식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요?

    (레위기 16:29) “너희는 영원히 이 규례를 지킬지니라. 칠월 곧 그 달 십일에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아무 일도 하지 말되 본토인이든지 너희 중에 우거하는 객이든지 그리하라.”

      이 말씀은 대속죄일에 관한 것입니다. 대속죄일은 온 민족이 자기의 죄를 생각하는 날이며, 대속의 피로 죄 사함을 받는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때 온 백성으로 하여금 스스로 괴롭게 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매우 합당한 일입니다. 백성들은 가만히 있어도 자신의 죄가 사해지는 것은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 용서를 구하고 죄 용서를 받으려면 마땅히 죄에 대해 통회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죄에 대해 뉘우치는 마음과 자신이 행한 행위에 대해 괴로운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죄 용서를 받는 자들의 당연한 태도 아닐까요?

     

    금식은 자신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괴롭게 하는 것입니다.

    (에스라 8:21) “때에 내가 아하와 강가에서 금식을 선포하고 우리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여 우리와 우리 어린 것과 모든 소유를 위하여 평탄한 길을 그에게 간구하였으니.”

      스스로 괴롭게 한다는 것은 자기의 생명과 혼을 괴롭게 하고 겸손하게 만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스스로 겸비하여”라는 표현은 원문에서 “스스로 괴롭게 하여”로 해석됩니다. 금식은 자기 자신을 괴롭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괴로운 일이 있고 간절한 일이 있기 때문에 금식을 하는 것입니다.

     

    다 함께 금식기도를 할 때에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십니다.

    (역대하 20:3) “여호사밧이 두려워하여 여호와께로 낯을 향하여 간구하고 온 유다 백성에게 금식하라 공포하매“ 이 말씀에는 금식 가운데 하나님의 큰 능력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때 모든 민족이 한 마음으로 금식하였고, 하나님의 응답이 나타났습니다.

    (역대하 20:15) “야하시엘이 가로되 온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과 여호사밧 왕이여 들을찌어다.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큰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 여호사밧과 유다 백성의 간절한 금식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었던 이 내용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금식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강건한 마음과 뜻을 깨닫는 지혜를 주십니다.

    (삼하 12:16) “다윗이 그 아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되 금식하고 안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으니.”

      다윗 왕은 인생에서 가장 큰 죄를 지었을 때 금식했습니다. 그는 충성된 종 우리아를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은 죄를 지었습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의 징계가 그의 자녀에게 임했고, 그렇게 태어난 아들이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이 상황을 보고 다윗은 마음에 괴로움이 심하여 무려 7일을 금식했습니다. 하지만 금식 기도의 결과는 아이가 죽는 것이었습니다. 금식 기도가 능력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윗은 모든 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그의 영성이 깊어지고 속 사람이 강건해졌습니다. 기도를 마쳤을 때 그의 속 사람이 매우 강건해져 그 일을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금식 기도의 열매입니다.

    금식의 올바른 태도는 하나님께 엎드리는 것입니다.

    (왕상 21:27~29) “아합이 이 모든 말씀을 들을 때에 그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행보도 천천히 하였더라. 여호와의 말씀이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합이 내 앞에서 겸비함을 네가 보느냐? 저가 내 앞에서 겸비함을 인하여 내가 재앙을 저의 시대에 내리지 아니하고 그 아들의 시대에 그 집에 재앙을 내리리라 하셨더라.”   

      아합 왕의 금식을 통해 금식의 바른 태도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아합의 겸비함을 기쁘게 보셨음을 나타냅니다.

     

    금식기도를 통해서, 복음이 전세계에 전파되는 하나님의 계획을 실행하셨습니다.

    (행 13:1~3)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사울이라.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신약 시대에도 여러 번의 금식이 있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교회가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게 됩니다. 바울 사도의 세계 전도 여행이 시작되던 때였기 때문입니다. 이 복음이 널리 전파되는 것은 사람의 계획이 아닌, 금식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섭리를 받았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바라옵기는 우리 모든 분들이 금식기도의 올바른 자세와 능력을 깨닫고 이 일에 참여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믿음이 더해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글: 이현우 자매

    편집: 방태식 형제

  • [성도간증] 부산교회 이재근형제

     <엡 1: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져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안녕하세요. 저는 참예수교회 부산교회에 다니고 있는 37살 이재근입니다.
     저의 부모님은 불교 집안이시고 어릴 때부터 절도 자주 따라 다녔고 아침마다 모닝 콜로 관세음보살을 들으면서 하루를 시작했었습니다.     이유는 모르지만 교회를 가는 것을 굉장히 싫어하셨고, 항상 저에게 가면 안된다고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절이든 교회를 다닐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지내고 있었습니다.

     

     *처음교회를 오게된 계기

     제가 처음 교회를 다닌 것은 고등학교때였습니다.  고등학교때 동아리 활동으로 악대부를 활동했었고 플룻을 불게되었습니다.
    너무 재밌었고 꿈이 생겨 계속 하고 싶었던 마음에 부모님께 말씀드렸더니 반대를 강력하게 하셨고 매일 밤까지 연습하다보니 학교 매점에서 저녁을 사먹는 일이 많아지면서 매점 아줌마와 친해지게 되었습니다. 매점 아줌마는 대한장로회 교회의 장로직은 맡고 계셨었고, 교회에 대구 교향악단의 플룻 선생님이 계시다고 저를 너무 안타까워 하셔서 말씀드려놓을테니 주말에 배우러 와라 라고 하셔서 주말마다 나가서 레슨을 받으면서 교회에 대한 거부감이 조금 없어졌고, 졸업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안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사회생활을 하다가 장항교회에 다니던 나소연 자매와 연이 닿으면서 만나게 되었고, 나소연 자매는 장항교회의 교무라는 직책을 맡고 열심히 교회에 봉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부산에 있었고 장항에 거주하고 있다보니 주말에만 만날 수 밖에 없었던 환경이었고, 그마저도 주말에 교회 행사가 많으면 길게 1달정도도 얼굴을 못보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던 중 장항교회에서 거제교회로 사청부 MT를 온다고 놀러오라고 놀러가게 되었는데 다들 많이 챙겨주시고 좋은 사람들이 많구나 라고 느꼈습니다. 이때 아마 마음이 열리게 된 계기였던거 같습니다.
     그래서 장항을 가는 날이면 안식일에 나소연 자매랑 교회를 조금씩 가게되었고, 성령으로 기도하는 것을 많이 놀라긴 했지만 성령을 받으면 알게 될거라고 주위에서 얘기를 많이했지만 믿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렇게 조금씩 다니다보니 전부 비슷한 모습으로 기도하는 것이 신기했고, 호기심이 생겼던거 같습니다. 그리고 나소연 자매와 결혼까지 생각했기 때문에 어쨌든 같이 다니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러는 중에 구도자 교육을 받아보는 건 어떠냐? 라고 하셔서 한번 들어보자 라는 마음으로 임성열 목자님께 구도자 교육을 받았고, 죄를 씻는 세례 부분도 듣게 되었습니다.

     *세례를 받아야 겠다고 생각하게 된 동기

     구도자 교육을 받다보니 하나님이 계실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교육을 받았고 여러 간증들을 들으면서 아, 나도 세례를 받고 하나님을 믿어봐야겠구나 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워낙 거리도 멀었고, 생업도 바빠서 주말에도 일하게 되는 날도 생기면서 구도자 교육을 중간에 못받았고, 결혼식 날짜는 점점 다가와서 세례교육부터 하고 믿음안에서 결혼을 해야된다는 주위의 권유에 따라 세례 교육부터 시작했고, 12/3일 결혼식이었는데 급하게 세례 교육을 하고 11/25일 세례를 받자 하셔서 날짜를 잡았습니다.
    세례교육 기간중 교통사고가 나서 2주동안 입원도 하고 여러가지 악재기 겹쳐지면서 세례교육도 매주 못받게 되면서 급하게 교육도 받게 되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교육은 마칠 수 있었습니다.

     

     *세례 받은 후 소감

     11월 중 계속 따뜻한 날이어서 걱정 안했는데 세례 당일은 굉장히 추웠습니다. 한번에 끝내야겠다 라는 생각밖에 없었고 침수를 하고 난 후에는 정신이 맑아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이제 죄사함을 얻고 새 인생 시작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성령 

     세례를 받고나서 제일 처음 드는 생각은 난 언제 성령을 받고 방언 기도를 할 수 있을까? 나에게 성령을 주실까? 였습니다.
    장항교회에서 부산교회로 출석하며 이요셉 목자님의 말씀을 매주 안식일에는 안수 기도도 나가서 받으면서 성령을 구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 저에게 성령을 주세요 라고 기도드렸지만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아무 느낌이 없어서 뭐가 문제일까?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더 간절하게 기도도 해 보았지만 안 주셨습니다. 그러는 중에 인생을 돌아보면서 세례 받으면서 죄사함은 얻었지만 인생의 조금이라도 잘못한 부분을 회개드리기 시작하고는 얼마지나지 않아 감동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봄 영은회가 시작되기전 이요셉 목자님이 안식일 때 성령을 간절히 구해보자 라고 해주셨고, 안식일때 정말 열심히 기도드렸습니다.
    기도 드리는 와중에 갑자기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안수 기도를 받던 중 저도 모르게 방언 기도를 하게되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저의 기도를 들어주시는구나. 정말 계시는구나’ 라고 절실히 느끼게 되었습니다.

     *성령받은 이후 변화,다짐

     출근길이든 무슨 일이 있든 없든지 마음 속으로도 항상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오늘도 저와 우리 가정을 잘 지켜달라는 마음 속으로도 늘 기도를 드립니다. 저희를 지켜주시는 여러가지 일도 많았고 일하는 중에 크게 다칠 수도 있을만한 일에도 다 피해가게 해주시는 하나님을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항상 경쟁으로만 치열하게 살아왔는데 성령을 받고는 하나님의 가정안에서 평안히 살 수 있게 해주신거에 대한 감사함을 느낍니다.
    교회를 다니면서 하나님을 믿게되니 마음의 안정감이 생겼고 기도의 힘도 요즘은 많이 느끼고 살게 해주신 하나님에게 감사함을 느끼게 된 부분이 가장 큰 변화입니다.

     끝으로 세례와 성령을 받으면 끝인 줄 알았지만 이제 시작이라는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
    성경의 말씀을 공부해서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올바른 자녀가 되어야겠다고 많이 느낍니다.
    많은 배움 속에서 올바르게 성장하는 성도가 되겠습니다. 

     

     

  • [교회행사] 전주교회 임마누엘 성가대세미나

    [교회행사] 전주교회 임마누엘 성가대세미나

    할렐루야~ 전주교회 임마누엘 성가대세미나를 소개합니다.

     

    ◎임마누엘 성가대 소개

    임마누엘 성가대는 찬양하길 원하시는 성도님들로 구성되었으며 매주 안식일 오전 예배 때 찬양으로 헌신하고 있습니다.

     

    ◎성가대 세미나의 목적 및 행사 소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

    (시편 51:12)

    구원받은 이들만 부를 수 있는 구속의 새 노래!!

    십사만 사천인이 되어 부를 수 있는 자격을 주신 하나님께 자원하는 심령으로 모인 성가대가 더 나은 찬송을 드리고자 성가대 세미나를 기획했습니다.(연 2회)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사만 사천 인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계14:3)

     

    ◎참석자 현황

    소프라노 17명, 알토 7명, 테너 9명, 베이스 4명, 반주자2명, 지휘자 1명, 총 40명이 참석하였고 이 중 성가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고자 4명의 성도님들께서 함께 하셨습니다.

     

    ◎전체적인 일정

    ◎행사를 통해 받은 은혜 및 기억에 남는 것

    개개인의 소리에 집중되었던 성가대의 소리를 세미나를 통해 하나의 목소리로 하나님께 찬양 드릴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특히 강사이셨던 임채경 형제가 성가대원 개별 코칭으로 성가에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고 세대간의 음색 격차를 좁힐 수 있었습니다.

     

    ◎기도 제목

    자원하는 마음으로 모인 성가대가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드릴 수 있도록 기도해주세요.

     

    ◎행사 사진

     

  • [성도간증] 전주교회 이예슬자매의 간증 – 육아

    [성도간증] 전주교회 이예슬자매의 간증 – 육아

    할렐루야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증합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 허락해주셔서 저희 가정에 아기가 일찍 찾아왔습니다. 제가 몸이 허약해 걱정도 많이 했고 임신에서 출산까지 쉽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무사히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배 속에 있을 때와 달리 아기가 태어나니 부모로서 해야 하는 것들이 많아 처음에는 우왕좌왕 했지만 그 안에서 받은 하나님의 보살핌,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하나님 의지하기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잠언 3:5)‬‬

    요즘 정보가 넘치는 세상에서 아기를 키우기 위해 공부하다보니 위험한 것들, 조심해야하는 것들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아이가 아프지 않게 하려고 각종 바이러스며 미세플라스틱을 피하기 위해 항상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을 돌아보면 하나님께 의지하기보단, 그저 제 힘으로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고군분투했음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들과 다를 거 없이 아기를 키우고 있었습니다. 아기는 부모 행동 말 하나하나 다 따라하고 배우는데,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는 제 모습을 보며 아기가 닮아갈까 무서웠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지기 전에 아기와 같이 꼭 기도를 합니다. ‘기도하자’ 하면 손을 모으고 흔드는 아기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하나님도 저희가 하나님을 찾고 기도하는 모습을 얼마나 이쁘게 보실지 아기를 키우며 그 마음을 느끼고 있습니다. 어려울 때 뿐만 아니라 기쁠 때도 슬플 때도 항상 하나님 의지하는 가정 이룰 수 있길 기도합니다.

     

    내가 믿음이 약할 때도 하나님께서 보호해주심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시편‬121:5)‬

    아기가 뒤집기를 할 때까지 저와 함께 침대에서 잤습니다. 침대는 두면이 벽에 붙어 있고 한쪽은 제가 누워 막고 다른 한 면은 아기 침대로 막았습니다. 아직 아기가 움직이지 못해 안전할거라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다가 ‘에-에’ 하는 소리에 눈을 떠보니 아기가 침대들 사이 바닥에 있었습니다. 순간 심장이 내려앉아 얼른 안아 올렸습니다. 감사하게도 아기 밑에는 담요가 있었고 큰 상처 하나, 혹 하나 없었습니다. 발버둥 치면서 움직이다가 담요와 함께 침대 사이에 껴서 아기 침대가 밀리면서 천천히 떨어졌던 건지 쿵 소리도 나지 않았습니다. 그때만 생각하면 아기에게 미안하고 가슴이 벌렁거리지만 정말 하나님께서 지켜주셨음을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제 머리맡에 둔 담요가 아기 밑에 깔려있을 줄이야, 아기침대 바퀴가 뻑뻑해 잘 밀리지 않은 덕에 아기가 천천히 아래로 떨어질 줄이야, 이건 전부 우연일리가 없었습니다. 제가 사면을 막는다고 막아도, 제 힘으로 아기를 지키겠다고 옆에서 자도, 하나님께서 보호해주시지 않았다면 아기가 언제 어떻게 다칠지 모릅니다. 제 믿음이, 제 기도가 부족해도 지켜주셔서 감사드리고 그 은혜 기억하며 살아가겠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18:16-17)‬‬

    제가 부모가 되기 전에는 몰랐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가 어린 아이의 것이라 했는지를. 그런데 아기를 키워보니 조금은 알 거 같았습니다, 어린 아이의 믿음이 어떤 것인지를.

    아기의 세상은 부모가 전부일 때가 많습니다. 배가 고파도 엄마를 찾고 잠이 와도 엄마를 찾습니다. 낯선 곳에 갈 때도 무서울 때도 기쁠 때도 아기의 눈은 엄마를 향해 있습니다. 제가 웃어주면 ‘아 괜찮은가 보다’ 안심하고 따라 웃습니다. 이 작은 아이가 보잘 것 없는 저만 바라볼 때 그 마음이 너무 소중해 뭉클해질 때가 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아마 아기가 언제나 부모를 찾는 것처럼 저희가 언제나 하나님을 찾는 모습을 바라셨을 것입니다. 삶의 전부가 하나님이길 바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순수한 믿음의 가정 이룰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앞으로 아이에게 바라는 점하나님 사랑하는 아이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명기 6:5)‬‬

    요즘 세상은 ’사랑‘조차도 자신에게 이득이 되지 않으면 하지 않는 세상입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자신을 사랑하라고 가르칩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 아기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아이로 크길 소망합니다. 부모가 되니 아이에게 바라는 것이 하나 둘 생겼습니다. 전에는 그저 하나님 안에서 건강하게 자라기만을 기도했지만 지금은 믿음도 자라났으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아이로 자라기를, 안식일을 하나님을 소중히 여기는 아이로 자라기를 바라게 됩니다. 그중에 꼭 하나님을 사랑하는 아이로 자랐으면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믿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봉사,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모든 것들은 속이 빈 껍데기일 뿐입니다. 하지만 제가 바라기만 해서 그런 아이가 되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가르치고 부모가 삶으로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 저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 따라하는 아기를 보며 부모는 아이의 거울이라는 말을 실감합니다. 아이에게 가르치기 전에 제가 먼저 그러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힘쓰겠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정이 될 수 있게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