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 축복하고 경배하는믿음 (히 11:21)

    축복하고 경배하는믿음 (히 11:21)

    참예수교회 대방교회 안식일 오전예배

    일시 : 2022. 10. 22.

    장소 : 서울특별시 동작구 알마타길 29 참예수교회 / 서울특별시 동작구 대방동 349-3

    설교자 : 김용준 목자

    제목 : 축복하고 경배하는믿음

    주제성구 : 히브리서11장 21절

    (히11:21)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 [복음메시지]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니 (마 16:18-19)

    [복음메시지]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니 (마 16:18-19)

    [말씀제목]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니 (마 16:18-19)

    [설교자] 정호민 전도자

    [설교일] 2022년 7월 30일 (토) 안식일 오전 예배

     

    [본문말씀 : 마 16 : 18 – 19]

    1.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2.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18절 말씀을 보시면, ‘교회’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성경에서 ‘교회’라는 단어가 가장 처음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교회라고 하는데 교회의 뜻은 무엇일까요?

    신약 성경은 헬라어로 쓰였습니다. 헬라어로 교회는 ‘에클레시아’입니다.

    ‘에클레시아’는 ‘에크+칼레오’의 합성어입니다.

    ‘에크‘라는 단어는 ‘~로부터’라는 뜻이고 ‘칼레오’는 ‘부르다’라는 뜻입니다.

    즉, ‘~로부터 불러낸 모임’입니다.

    교회라는 단어를 들으면 우리는 흔히 생각하는 모습은 ‘십자가가 있는 건물’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는 ‘어떤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구약을 보면 교회의 원형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고 에덴동산에 두셨지만 사람의 범죄로 인해서 사람은 에덴동산에서 쫒겨납니다. 그 범죄로 말미암아 세상에 죄가 들어오게 되고 그로 인해 모든 사람이 죄 아래 속하게 됩니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를 따라가면 그 죄악으로 인해서 전 인류가 심판받는 사건이 일어나게 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중에 노아를 부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노아를 통해서 방주를 짓게 하시고 그 방주를 통해서 노아와 그의 가족, 동물들을 구원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방주를 만들었고 그 안에 모여서 심판받는 세상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명령하십니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12:1) 아브라함은 원래 갈대아 우르에 있었는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가나안 땅에 나아가 그 땅에 들어오게 되고 그 믿음의 여정 가운데서 열국의 아비가 되어 아브라함을 통해 이스라엘이라는 족속이 나오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아브라함 역시 이방 땅에 있었는데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말미암아 가나안 땅으로 들어오게 되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 아래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게 됩니다.

     

    또 시간이 지나 야곱의 가족이 기근을 맞아 애굽에 내려오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창성하고 번성한 이스라엘을 두려워 한 애굽의 바로왕은 그들을 노예로 삼고 노역을 지우게 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고통에 부르짖게 되고 그 고통하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십니다. 그래서 모세를 통해 죄악이 관영한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불러내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를 거쳐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렇게 구약의 역사를 계속 따라가보면 원래 죄악이 관영한 곳에 있었는데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속하는 그러한 과정이 반복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시대에는 아직 교회라는 단어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교회의 원형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구약의 역사를 통해 교회의 의미를 더 분명히 할 수 있습니다.

    즉, ‘죄악이 관영한 세상으로부터 하나님의 은혜의 부르심을 받아 구별된 성도들의 모임이 바로 교회이다.’라는 것입니다.

     

    (고전 1: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바울은 교회를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부르심을 따라 모인, 그 부르심을 입은 성도들의 모임이 바로 교회임을 다시 한번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세상을 보면 수많은 교회, 수많은 교단, 교파들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참예수교회 성도들은 우리 교회에 대해서 어떤 교회관을 가져야 할까요? 그래서 우리가 교회의 의미부터 바로 알아야 합니다.

    어떠한 건물에 십자가를 달고 교회라고 등록했다고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의 부르심에 따라서 모여야지만 비로소 교회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누가 세우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교회를 세우겠다’(본문18절)

    교회를 세우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이 땅에 정말로 많은 교회가 있지만 결국은 두 교회로 나눌 수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세운 교회와 사람이 세운 교회라는 것입니다.

     

    (갈 4:22–23)

    1.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2.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아브라함에게는 총 몇 명의 자녀가 있었을까요? 구약을 보시면 8명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말합니다.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다.

    즉, 두 부류의 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육체를 따라 난 자녀와 약속을 따라 난 자녀로 나뉩니다. 여기서 약속을 따라 난 자녀는 이삭을 말하고 나머지 7명은 육체를 따라 난 자녀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교회들도 사람을 따라 난 교회와 예수님의 약속을 따라 난 교회로 나눌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내 교회’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단어를 원문으로 보면 ‘내 교회들’이 아닌 단수로 ‘내 교회’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가운데 사람의 눈으로 보면 수많은 교회가 있는 것 같지만 결국 그 수많은 곳 가운데 예수님의 약속을 따라 난, 하나님의 약속의 부르심을 따라 난 교회는 단 하나라는 것을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예표가 성경에 많이 있는데 대표적인 예가 앞서 살펴보았던 노아의 방주입니다.

    노아시대 세상은 죄악이 관영해서 물로 심판받게 됩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에서 구원받은 방주는 단 하나였습니다.

     

    (엡 4:4-6)

    1.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2.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3.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하나’라는 단어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한 분 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한 교회로 모이게 했다고 성경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우시는 참 교회는 하나입니다.

     

    (마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교회는 어디 위에 세워지는 것일까요? 반석 위에 세운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천주교에서는 이 말씀을 근거로 베드로라는 단어의 원뜻에 ‘반석’이 있기에 베드로가 초대교회의 교황됨을 주장합니다. 예수님께서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신다고 하는 것은 베드로를 기초로 교회를 세운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단어를 다시 자세히 살펴보면 ‘베드로’라는 이 단어의 헬라어는 ‘페트로스’이고 돌, 바위, 반석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반석’의 헬라어는 ‘페트라’이고 바위,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두 단어는 비슷하지만 분명히 다른 단어입니다.

     

    우선 의미적으로 보면 ‘베드로’에 해당하는 ‘페트로스’는 반석이라는 뜻도 있지만, 정확히는 개별적인 하나의 돌, 바위 혹은 깨진 바윗조각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반석’에 해당하는 ‘페트라’는 크고 견고한, 교회의 기초석이 되는 반석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문법적으로도 이 두 단어는 분명히 다른 단어입니다. 헬라어는 흔히 단어에 명사에 성이 있다고 해서 남성명사, 여성명사, 중성명사로 구별됩니다. ‘베드로’에 해당하는 ‘페트로스’는 남성명사이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반석’은 여성명사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이것은 의미적으로도 문법적으로도 분명히 다른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반석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어디 위에 교회를 세우신다는 것일까요?

     

    (마 7: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이 말씀에 나오는 반석이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반석과 동일한 단어입니다.

    나의 이 말, 즉 예수님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일차적으로 본문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반석이라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됩니다. 그래서 오순절 날 성령이 강림하고 처음 사도교회가 세워진 직후의 모습을 (행 2:42)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행 2:42)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여기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들은 무엇을 가르쳤을까요?

    (요17:17)의 말씀을 보시면 사도들은 진리되는 하나님의 말씀, 예수님의 말씀을 전해듣었고 이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그 말씀을 교회의 성도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즉, 하나님은 진리의 말씀 위에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진리의 말씀은 흔들리지 않는 크고 견고한 반석이 되어서 바로 교회의 기초가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걸음 더 나아가 보면 이 진리의 말씀, 이 기초가 교회의 반석이 되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

    이 과정을 따라갈 때 결국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이 반석이라는 것은 진리되신 하나님의 말씀이고 더 나아가서는 이 반석이 곧 말씀되신 예수 그리스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엡 2: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벧전 2:4)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모퉁이 돌, 예수님께서 기초가 된다는 것입니다. 또 비록 사람들로부터 버림 받아서 십자가에 달리셨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교회의 기초, 보배로운 산 돌로 삼으셨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교회의 기초가 되는 반석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고 동시에 말씀이 육십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임을 우리가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반석 위에 세우신 교회는 음부의 권세도 이기지 못합니다. 음부의 권세라는 것은 곧 사망의 권세라는 의미입니다. 교회는 사망의 권세를 이긴다는 것입니다.

    출애굽 때 열재앙 중 마지막 재앙에서 어린 양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볼 수 있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당신의 피로 사신 참 교회 역시 사망의 권세를 이깁니다.

     

    본문 19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주었습니다. (교회를 대표하는 베드로에게 준 것이지 베드로 한 사람에게 온전히 준 것이 아닙니다.)

    그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천국열쇠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만약 이 천국 열쇠가 없다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에 음부의 권세를 이기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권세를 주신 것입니다. 즉, 교회를 통해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는 영적으로 큰 권세가 있는 곳입니다.

     

    이 권세는 무슨 권세일까요? 19절 후반부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이것은 교회에서 죄를 결박하고 죄를 푸는 권세, 죄사함의 권세가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요 20:22-23)과 (행 1:8) 말씀을 보면 ‘성령을 받으라’라고 합니다. 성령을 통해서 너희에게 죄사함의 권세를 주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참예수교회는 성령으로 세워진 교회입니다. 말세의 늦은 비 성령으로 세워진 교회가 바로 오늘날 우리 참예수교회입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교회에는 죄사함의 권세가 있습니다. 그것은 곧 천국 열쇠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세우신 교회는 단 하나입니다. 그래서 결국 죄사함을 얻고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교회는 참예수교회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참교회의 성도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고 우리 각 사람이 하나의 참교회로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며 모든 사람이 구원 얻기에 힘쓰는 우리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 [복음메세지]심령이 가난한 사람(마5:3)

    [말씀 제목] 심령이 가난한 사람(마 5:3)

    [설교자]  홍영석 목자

    [설교일] 2022.10.14(금) 저녁예배

     

    우리가 생각하는 복은 물질에 국한되어있다.

    쉽게 접하는 복권도 물질, 결국 돈에 관한 것이다.

     

    신앙인에게 복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도 산상수훈의 첫 시작부터 복을 말씀하신다.

    복 있는 자는 누구인가?

    참된 복은 무엇인가?

     

    1.”복 있는 자여”

    첫 말씀에 “복 있는 자여”라고 선포하신 대상에는 

    그 당시 말씀을 들으러 온 유대인, 

    이후 하나님을 믿는 백성 모두가 해당된다.

     

    헬라 사상에 영향을 받은 헬라인에게 복이란

    ‘마카디오스’ 즉 신들에 위해서 주어진 물질적, 정신적 개념을 지녔고

    유대인들에게 복이란

    ‘유다이즘’ 즉 율법대로 살면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는 율법 준수의 개념이 있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이미 복 있는 자이니 복 받은 사람답게 살아라는 말씀을 하고 계신다.

    복이 무엇인지 쫒기 전 이미 내가 복 있는 자임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2.마태복음 5장 3절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마태복음 5장 3절)

    하나님께 복을 받지 못해 가난에 처한다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이었으나 가난을 잘못 이해한 오해이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누가복음 6장 20절)

    가난의 원어 ‘푸토코스’는 쭈그러들고 움츠러있는 모습이라는 뜻으로 

    누가가 말한 가난은 물질적인 가난을 의미합니다.이 아니며

    마태가 말한 가난은 영적인 가난 입니다. 

     

    영적 가난은 어떤 상태를 말하는가?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시편 34편 6절)

    곤고한 자 역시 ‘푸토코스’가 쓰이며 나의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닫고 주님만 찾는 때를 의미한다.

    이렇듯 가난은 경제적인 가난이 아닌 심령이 가난함을 일컫는다.

     

    3. 어떻게 하면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될 수 있는가?

    심령이 가난하지 못하면 이후 나오는 7가지의 말씀이 어렵다.

    영적으로 가난한 마음을 갖는 것이 복의 첫 단추인 셈이다.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을 마주 볼 때

    내가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 깨닫게 된다.

    모세, 다윗, 이사야, 베드로, 바울사도 모두 인간적으로 훌륭한 사람이었으나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 자신을 부족한 사람이라고 고백한다.

     

    나의 부족함을 느끼지 못한다면 아직 하나님앞에 제대로 서지 못한 것이다.

    나의 부족함을 깨닫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복 있는 자” 가 되자. 

     

    작성자| 참예수교회 강남교회 김정남

  • [복음메시지] 므리바 반석의 물(민20:10~13)

    [설교 제목] 므리바 반석의 물(민20:10~13)

    [설교자] 허덕인 목자님

    [설교일] 2022년 12월 17일(토) 안식일 예배

      우리는 과연 말씀을 듣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주님 안에 변화된 삶을 살고 있습니까? 같은 실수나 과오를 범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한 후 시간이 흘러 또 다시 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다시 한번 이 문제를 생각해보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거기서 백성이 물에 갈하매 그들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생축으로 목말라 죽게 하느냐(출17:3)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당시 신 광야에서 떠나 르비딤에 장막을 치고 백성들이 마실 물이 없자 모세에게 원망을 하였습니다. 성경에서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출17:7) 모세는 곧 하나님께 기도하였고 반석을 쳐 물이 나오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민수기 20장에 와서 또 어디선가 본듯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온 회중이 신 광야에 이르러 가데스에 거하였는데 회중이 물이 없어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공박하였습니다. 왜 아직도 여전히 이 백성들은 예전의 잘못을 기억해내지 못하고 또 다시 같은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비슷한 시련 앞에서 어떤 모습입니까? 어떻게 하면 저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원망의 말을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첫째, 우리는 고통과 시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모세와 아론은 회막문에 이르러 엎드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응답하셨고 물을 얻을 수 있는 방법도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백성들이 있는 곳에서 마치 자신이 물을 내어 주는 냥 하나님 앞에서 분(忿)을 참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알려주시는 방법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라”고 하셨으나 모세는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매’ 물을 얻었습니다. 출애굽 신 광야에서는 하나님께서 “반석을 치라”고 명령하셨고 모세는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그러나 민수기 시대 신 광야에서 모세는 입술로 망령되이 행함으로써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결과를 맞게 되었습니다.

    저희가 또 므리바 물에서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으므로 저희로 인하여 얼이 모세에게 미쳤나니 이는 저희가 그 심령을 거역함을 인하여 모세가 그 입술로 망령되이 말하였음이로다(시106:32~33)

      둘째, 깨어있는 신앙 생활을 해야 합니다.

      출애굽 때 신 광야 물 사건이 난 그곳 이름은 맛사 또는 ‘므리바’라 불렀습니다. 민수기 때의 이 물 사건으로 인해 이스라엘 자손이 이를 두고 ‘므리바 물’이라 하였습니다. 물론 전자는 장소로써 가리킨 말이고 후자는 여호와께서 반석에서 내신 물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다투다, 싸우다, 다툼, 투쟁’의 의미로 보았을 때 물 때문에 백성들과 모세가 다투었다는 의미로 ‘므리바’는 상호 관련이 있는 명칭으로 보입니다.

      모세는 두 번의 므리바 물 사건을 통해 좀 더 깨어 있는 신앙 생활을 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해야 했고, 공의를 행해야 했습니다. 믿음 생활의 연륜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마치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는 양 말씀으로 다른 형제 자매를 향해 공의롭지 못한 말과 행동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부지런히 자신의 신앙 생활을 살펴야 합니다.

      오늘 이 두 번의 므리바 물 사건을 통해 변화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자신의 믿음 생활을 보면서 더욱 하나님의 자녀로서 거룩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합시다.

  • [복음메시지] 쉬게 하리라 (마11:28-30)

    [복음메시지] 쉬게 하리라 (마11:28-30)

    [말씀 제목] 쉬게 하리라 (마11:28-30)

    [설교자] 장종규 목자

    [설교일] 2022. 10.8(토) 안식일 예배

    인생을 살면서 감당해야 할 짐으로 사람들은 힘들어 합니다. 살아가면서 반드시 해내야 하는 삶의 짐, 그 보다 더 무거울 수 있는 죄의 짐, 그리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느끼는 신앙의 짐이 그것입니다.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감당할 수 없나이다 (38:4)”

    그런 사람들에게 주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듣기만 해도 은혜가 되고 마음에 평안을 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의 의미가 주님께서 사람들로 하여금 아무 수고도, 아무 짐도 안 지게 하시겠다는 의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전도서는 수고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주신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누리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이것이 그의 분복이로다 (5:18)”

    수고 자체가 안 좋은 것이 아니라 수고를 했는데도 아무런 즐거움, 보람, 열매가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결과적으로 헛된 삶을 살았을 때 사는 것이 힘들고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삶 뿐 아니라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럼, 수고가 헛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라는 시편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셔야 우리의 수고가 헛되지 않게 됩니다. 누가복음 5장에 베드로가 밤이 맞도록 그물을 내려 수고했으나 고기를 잡지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해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자 그물이 찢어지도록 많은 고기를 잡게 됩니다. 몸은 물론 힘들었지만 마음은 매우 기뻤을 것입니다. 진정한 쉼은 바로 주님이 함께 하심으로 열매와 즐거움이 있을 때 얻게 됩니다. 신앙생활도 수고만 있고 기쁨과 보람이 없으면 무거운 짐처럼 느껴집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진정한 쉼을 얻을 수 있을까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11:29)”

    먼저 예수님의 멍에를 메어야 합니다. 바로 예수님이 하신 일, 곧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는 멍에를 메야합니다. 전도서는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라(전12:13)”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분을 다하면 마음이 뿌듯하고 보람되고 평안합니다. 반대로 그렇지 않으면 불안하고 만족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궁극적인 쉼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누리게 되는 것으로 이 세상에서 순종의 삶을 마치고 난 후 비로소 누리는 참된 안식입니다.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더라(14:13)”

    예수님의 멍에를 멘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멍에를 두 마리 소가 같이 메듯이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해야 합니다. 혼자 힘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예수님과 동행하면 어렵지 않습니다. 그 과정에서 예수님의 겸손과 온유의 마음을 체험하기도 하고 힘과 능을 주심으로 어려움을 감당케 하시기도 합니다. 또한 감당할 수 없는 환난에는 우리를 안으셔서 구원해 내십니다.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자기 앞의 사자로 그들을 구원하시며 그 사랑과 그 긍휼로 그들을 구속하시고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으나(63:9)”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메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예수님과 한 생각이 되어야 합니다. 내 생각과 뜻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어야 합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하듯 기존의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새로운 생각을 갖는 회개의 삶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두 번째로 진정한 쉼을 위해서는 예수님께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온전하게 하나님의 아들로서 순종하셨습니다. 항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함으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고 그 분의 도우심을 받았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8:29)”

    예수님이 그렇게 항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신 이유는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의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요14:31)”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5:3)” 말씀하셨습니다. 야곱이 라헬을 사랑하여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 라반에게 칠년간 봉사할 때 칠년을 수일같이 여겼다고 한 것처럼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그의 계명을 따를 때 우리의 짐은 더 이상 무겁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함이 많을수록 자원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행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부분에 본이 되셨고 바울사도 역시 예수님을 본받아 이와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는 자 된 바울 사도처럼 주님을 본받는 자 되길 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전11:1)”

    유튜브 예배링크

     

    글| 백현 자매

  • [복음메시지] 오직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 (살전 5:9~11)

    [복음메시지] 오직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 (살전 5:9~11)

    일시 : 7월 16일 토요일 오전예배

    제목 : 오직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

    본문 : 살전 5:9~11

     

    (살전 5:9~11)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같이 하라

     

    어떤 일반교회 신도가 항상 하나님께 매를 맞았다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말로만 매를 맞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하나님을 항상 징계의 하나님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늘 매를 들고 계시는 분은 아닙니다. 그분은 하나님은 잘못 알고 믿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가 믿고 있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정확히 알고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사람이 하나님을 소개하는 것보다 하나님 자신 스스로 소개하는 것이 더 정확할 수가 있습니다. 매를 드시는 하나님은 사람이 알고 있는 것이고, 직접 하나님이 자신을 소개한 성경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29:1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재앙을 줄려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장래에 소망을 줄려고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정확히 알고 믿어야 합니다.

     

    세상 끝날 종말에 관한 내용은 우리를 긴장하게 만듭니다. 종말은 크고 두려운 날이고 심판의 날이고 심판은 또 두 종류로 나누어지기 때문에 하나님을 막연히 두려운 대상으로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을 정확히 알고 믿어야 합니다.

    (살전 5:9)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은 노하심의 하나님이 아니요, 구원을 얻게 하실려고 우리를 세우셨습니다. 이렇게 거룩한 안식일에 성도들을 불러 모으신 것도 오직 구원을 얻게 하실려고 하나님께서 부르셨습니다.

    딤후 4:18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 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바울사도는 하나님을 구원의 하나님이라고 자신 있게 고백을 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무슨 근거로 하나님을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라고 자신 있게 고백을 했을까요?

    딤전 1:13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딤전 1:15~16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바울사도는 자신 스스로를 예수를 대적한 사람이요 믿는 사람을 훼방하고 핍박한 폭력자요 결국 스데반집사까지 죽게 한 죄인중에 괴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한테 정작 징계를 받아야 할 사람은 자신인데 어떻게 하나님을 구원의 하나님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요?

    바울 사도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이런 나 같은 죄인도 하나님이 만나주셨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예수 믿는 사람을 잔멸할 정도로 큰 죄를 지은 죄인중의 괴수인 나 같은 사람도 하나님이 오래 참으심을 보이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셨으니 하나님은 징계의 하나님이 아니라 구원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자기의 경험을 통해 자신있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 같은 사람도 하나님은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 구원의 하나님을 믿고 우리는 하나님을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우리를 구원해 주셨을까요? 바로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 예수그리스도를 보내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사실입니다.

    (살전 5:10)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내가 구원을 얻은 이유는 내가 착해서도 아니요 내 노력도 아니요 내 공로도 아닙니다.

    (롬5: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롬5:8)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십자가의 구속으로 나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 구원안에는 반드시 십자가위에서 나를 위해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원래는 내가 죽어야 할 죄인인데 예수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십자가의 형벌은 2000년전 가장 가혹하고 잔인한 형벌이었습니다. 나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 십자가를 대신 지신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안에는 나를 향한 구원이 들어 있고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 있습니다. 십자가를 향한 구속의 고마움을 알 때 믿음이 생기고 나의 믿음이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목숨까지 버리면서까지 십자가에 죽으셨을까요? 그 목적이 분명히 있습니다.

    (살전 5:10)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바로 사랑하는 우리와 함께 살든지 죽든지 영원히 함께 살고 싶어 하는 예수님의 사랑이 담겨져 있습니다.

     

    바울사도는 마지막으로 종말을 두려워하지 말고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살전 5:11)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같이 하라

    피차 권면하는 삶을 살으라는 것입니다. 권면은 옆에서 위로하다 라는 뜻이 있습니다. 바울사도가 확신하는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이셨습니다.

    (사40:1)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그럼 어떻게 하면 위로하고 권면을 할까요? 바로 덕을 세워야 합니다.

    피차 덕을 세우라는 것은 믿음의 집이 튼튼히 서갈 수 있도록 서로 돕고 협력하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럴 때 종말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종말이 가까울수록 예수님을 기쁘게 맞이할 수가 있습니다.

    (행 9: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살전4:9~10)형제 사라아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가 친히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너희가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를 대하여 과연 이것을 행하도다형제들아 권하노니 더 많이 하고

    데살로니가교회는 믿는 자의 본이 되는 모범적인 교회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잘했지만 앞으로 더 힘쓰고 노력하라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런 교회가 서로의 행복이 되고 기쁨이 됩니다.

    (살전 4:1) 종말로 형제들아 우리가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회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께 기쁘시게 할 것을 우리에게 받았으니 곧 너희 행하는 바라더욱 많이 힘쓰라

    바울사도는 데살로니가교회를 생각하면 마음에서 기쁨이 샘솟는 행복한 교회였습니다. 이 행복과 기쁨이 성도님들의 행복이 되고 기쁨이 되길 소망합니다. 또한 구원의 하나님을 믿고 십자가의 사랑을 깨달아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님이 되시길 예수그리스도이름으로 소망합니다.

     

  • [복음메시지] 축복을이어가는 믿음 (히11:20)

    [복음메시지] 축복을이어가는 믿음 (히11:20)

    [말씀 제목] 축복을 이어가는 믿음 (히 11:20)

    [설교자] 김용준 목자

    [설교일] 2022년 10월 8일(토) 안식일 예배

     

    “(히 11:20)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

    이삭의 일생은 평범한 삶이었다. 특징적인 믿음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삭에 대해서는 이 짧은 구절밖에 없다. 그런데도 이삭은 믿음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히브리서 기자가 이삭의 일생 가운데 주목하는 것은 무엇인가? 축복을 후손들에게 이어주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이라고 증거하고 있다. 우리가 이삭을 통해서 배워야 할 믿음이 이것이다. 후손을 믿음으로 축복했던 믿음이다. 이삭의 특별한 믿음 세 가지는 무엇인가?

     

    첫째로,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믿음이다

    이삭이 자녀들을 축복한 것이 믿음이었는데, 믿음이 있는 사람이 자녀에게 축복할 수 있다. 믿음이 없으면 이런 축복을 할 수 없다. 사람은 자신을 어떻게 아는지에 따라 행동한다. 자신을 어떤 사람으로 인식하는지에 따라서도 축복이 달라지는 것이다. 이삭은 자신을 어떻게 인식했기에 자녀들을 믿음으로 축복할 수 있었는가? 이삭은 자신이 복의 근원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이렇게 축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자기 존재에 대해 확신이 없는 사람은 자녀에게 축복할 수 없다. 이삭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게 되었는가?

    “(창 22:16)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창 22: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창 22: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축복하고 계시다. 언제 아브라함을 축복하셨는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렸을 때이다. 이삭은 자신의 죽음 직전에 하나님께서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던 말씀을 체험했다. 이때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어떻게 인식되었는가? 하나님의 축복의 말이 이삭의 마음에 각인되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의 내용은, 아브라함의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되고, 그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는 말씀이다. 즉, ‘씨’에 관한 말씀이다. 이는 이삭을 말한다. 이삭은 이 말씀을 알아들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실 때 그 말씀이 이삭에게 매우 강하게 와닿았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이 자신을 통해 이루어짐을 알게 된 것이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복을 계승하였다.

    “(창 26:24)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나는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 하신지라”

    아브라함에게 복 주신 하나님께서 직접 이삭에게 나타나셔서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셨다. 이삭이 자녀에게 축복한 것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창 27:29)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아버지 이삭이 아들 야곱을 축복한 내용이 무엇인가? 그가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을 축복하신 말씀이 이삭이 야곱을 축복한 말씀과 동일한 것이다. 이것은 이삭이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명확히 인식했기 때문에 한 말이었다. 즉, 자신이 복의 근원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축복을 할 수 있었다. 자신이 복의 근원이라는 확신이 없다면 어떻게 자녀를 축복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지 알아야 한다. 우리가 얼마나 복받았는지 알아야 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출 3:11)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출 4:13) 모세가 가로되 주여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

    모세도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자기 존재에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내가 누구관대’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은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내가 어떤 존재인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께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고린도 교회가 자신을 인정하지 않았을 때에도 바울은 흔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복음을 위해 자신있게 살았던 이유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이삭이 야곱을 축복한 것도 자신이 복의 근원임을 알았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믿음의 행위인 것이다.

    우리는 자신에 대해 어떤 믿음이 있는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라고 생각하는가? 생을 마감하기 전에 이삭과 같이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선포할 수 있겠는가? 자녀들에게 축복하며 눈을 감을 수 있겠는가? 만약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복되겠는가? 하나님께서 나를 축복의 통로로 사용하신다는 믿음으로 자녀에게 축복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후손을 축복하는 일은 특정한 사람만 해야 하는 일이 아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 자녀이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우리는 복의 근원이고, 우리가 이것을 믿으며 자녀를 축복할 수 있는 것이다. 이삭이 이렇게 자녀를 축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의 신분을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부모가 되고싶은가? 자녀를 믿음으로 축복하는 부모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축복을 자녀에게 전달해야 한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허락하신 권세이다. 하나님의 자녀됨을 권세로 인식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엄청난 권세를 주셨기 때문이다. 내가 이 권세로 자녀를 축복하는 것이 믿음이다. 이삭에게는 이러한 믿음이 있었다.

     

    둘째로, 이삭의 믿음은 하나님의 뜻 아래 자신의 뜻을 두는 순종의 믿음이었다.

    자신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충돌할 때, 이삭은 자기 뜻을 하나님 뜻 밑으로 두었다. 이삭은 자기가 옳다고 믿는 것을 내려놓을 줄 아는 결단의 믿음이 있었다.

    “(히 11:20)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누구나 에서가 장자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면 에서가 먼저 축복받아야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야곱과 에서’로 표현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삭이 리브가를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자녀를 주셨다. 리브가 뱃속의 아이가 싸울 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창 25: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하지만 이삭은 둘째인 야곱을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로 생각하지 않았다. 에서를 더 사랑했다.

    “(창 25:28) 이삭은 에서의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

    그래서 이삭은 에서를 특별히 사랑하여 복주기 원했다. 자기의 판단 기준을 가지고 에서를 사랑하고 축복하기 원했던 것이다. 그래서 에서를 축복하려하는 것을 리브가가 알고 야곱을 변장시켜 대신 축복받도록 종용했다. 이삭은 이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야곱이 에서인 줄 알고 축복했다. 진짜 에서가 돌아오자 이삭은 이렇게 말했다.

    “(창 27:33) 이삭이 심히 크게 떨며 가로되 그런즉 사냥한 고기를 내게 가져온 자가 누구냐 너 오기 전에 내가 다 먹고 그를 위하여 축복하였은즉 그가 정녕 복을 받을 것이니라”

    이것을 직역하면 큰 두려움으로 떨었다는 뜻이다. 이 ‘떤다’는 것은 ‘전율했다’는 의미이다. 이삭이 전율하며 떤 의미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큰 뜻을 저버릴 뻔 했다는 것에 대한 전율이다. 아마도 이때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했을 수도 있다. 에서에게 축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었음을 깨닫고 하나님 뜻에 순종한 것이다.

    살면서 내 뜻과 하나님 뜻이 충돌할 때가 있다. 하나님의 뜻 앞에 나를 내려놓는 사람이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다. 만약 하나님 뜻과 내 뜻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다면, 하나님의 뜻 앞에 나를 내려놓아야 한다. 주님께서는 이 결단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내 인생에서 이어주신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지경을 넓혀주시리라는 믿음이었다. 이삭의 축복에는 이러한 믿음이 담겨있다.

    “(히 11:20)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

    이삭이 바라보던 일은 어떤 것인가? 장차 오는 일이다. 아브라함을 통해 받은 땅의 축복이 있었고, 자손에 대한 축복이 있었다. 그러나 이 축복들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 자신이 그 축복을 이어받았지만 이 축복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자신이 잘난 인생을 살았기 때문에 자녀를 축복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의지하여 믿음으로 자녀를 축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삭이 믿음의 사람인 것이다.

    우리에게도 이런 믿음이 있어야 한다. 첫 임지에서 교회 성장에 대한 꿈이 있었으나, 현실 속에서 만나는 문제는 쉽지 않다. 그러면 첫 소망을 다시 가질 수 있는가? 우리의 현실이 어떠한가? 우리 현실에도 불구하고 복의 근원이 되는 꿈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이 꿈은 현실 속에서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꿈이기 때문이다.

    “(학 2:3) 너희 중에 남아 있는 자 곧 이 전의 이전 영광을 본 자가 누구냐 이제 이것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것이 너희 눈에 보잘것이 없지 아니하냐”

    ‘이것’은 현실이다. 현실이 우리 눈에 보잘것없어 보이는가?

    “(학 2:4) 그러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스룹바벨아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땅 모든 백성아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지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보잘것없는 현실 앞에 있을지라도 이 꿈을 굳건히 붙잡아야 한다.

    “(학 2:5)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언약한 말과 나의 신이 오히려 너희 중에 머물러 있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성령이 함께 하는 사람은 두려워할 것이 없다.

    “(학 2:6)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

    (학 2:7) 또한 만국을 진동시킬 것이며 만국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영광으로 이 전에 충만케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학 2:9)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꿈을 지금도 계속 가져야 한다.

    “(계 7: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는 하나님께서 보신 것이다. 이들은 누구인가?

    “(계 7:13)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계 7:14)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이것은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피로 사신 참 교회를 통해 이루실 약속이다.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되리라는 약속의 말씀이다. 이 약속에 근거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이 꿈을 꾸어야 한다. 이 소망을 놓아서는 안 된다. 소망의 근거는 내게 있는 것도, 현실에 있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다. 이삭은 그 믿음이 있었다. 이삭에게 있는 최고의 믿음은 장차 올 일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삭은 자기 신분에 대한 믿음과 하나님 뜻 앞에 자기를 내려놓을 줄 알았으며 약속을 이루실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믿음이 있었다.

    우리는 내가 누구인지 다시 확인하고, 내 뜻을 돌이켜 믿음의 선택을 해야 한다. 축복의 통로로 삼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메시지 앞에 이삭과 같은 믿음으로 응답해야 한다.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보고 선포하고 증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릍 통해 그 약속을 이루어가실 것이다. 하나님의 축복을 더욱 귀하게 여겨야 한다. 우리 믿음 속에 그 축복을 담아 후손에게 물려줘야 한다.

    유트브 예배링크

  • [복음 메세지] 비천한 자를 존귀한 자로 (삿11:1-11,29-40)

    [말씀 제목] 비천한 자를 존귀한 자로 (삿11:1-11,29-40)

    [설교자] 김세한 목자

    [설교일] 2022년 10월 8일(토) 안식일 예배

    인도라는 나라에는 ‘카스트 제도’라는 뿌리 깊은 신분 제도가 있다. 카스트 제도의 내용은 태어날 때부터 사람을 네 계급으로 나누는데,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가 그것이다. 그런데 네 계급 외에 카스트 제도 안에도 못 들어가는 최하층민이 있다. 이 계층을 불가촉천민으로서 달리트라고 한다. 태생적으로 상호간의 신분 이동은 할 수 없다고 한다. 이는 1950년에 법적으로 폐지되었지만 아직도 인도인의 문화 속에 영향력은 여전하다. 이런 신분 제도의 기원은 흰두교의 원시종교였던 브라만교에서 기원했다. 힌두교가 인도의 지배종교로 지속되는 한 인도 사회에 신분 계급 관념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카스트 제도 같은 태생적 신분 제도는 없지만 자본주의 사회체제를 도입한 결과 자본이 계급이 되는 사회로 변모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최근 유행어를 보면 시대의 가치관을 발견할 수 있는데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 등의 표현들이 자본으로 사람을 분류하려는 씁쓸한 우리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은 그들이 사용하는 용어도 쓰면 안 된다. 세상의 가치와 관념에 휘둘리게 되면 우리는 속게 되기 때문이다. 천국의 가치와 기준으로 자신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와 관념의 잣대로 나 자신을 평가하면서 불행하다고 생각하고 남들도 그렇게 평가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갈 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

    나는 오늘날 나의 존재의 가치에 대해서 하나님이 평가하시는 기준으로 생각하고 행복한 존재임을 발견하고 있는가? 아니면 세상의 가치 기준에 휘둘려서 자신을 불행한 존재로 비하하고 있지 않는가?

    오늘은 비천한 신분의 사람 입다가 사사가 되어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존귀한 자가 될 수 있었던 길이 어디에 있었는지 살펴보고 함께 은혜를 나누는 시간을 가지고자 한다. 사사시대 길르앗이란 사람이 기생에게서 낳은 아들이 있었다. 그 낳은 아들의 이름은 입다였다. 그는 서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집안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학대받았다. 결국 배다른 형제들로부터 쫓겨났고, 쫓겨나면서 재산 한 푼도 받지 못하고 떨려 났다. 혈혈단신 돕이란 땅에 거하게 되었는데 어느덧 이곳저곳을 떠돌던 사람들이 모여들어 부랑민의 우두머리가 된다. 이렇게 태생부터 비천한 처지였던 입다에게 어느 날 기회가 찾아왔다. 하나님은 우상숭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암몬 족속을 보내 괴로움 당하게 하셨고 그것은 전쟁까지 이르게 되었다. 암몬 족속이 쳐들어오는 위기상황에서 길르앗 장로들은 과거에 자신들이 쫓아낸 입다를 찾아가게 된다. 입다에게 전쟁을 수행할 장관이 되어 달라고 부탁을 하는데, 입다는 이스라엘을 인도할 지도자 신분까지 약속받고 그 제안을 수락하게 되고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입다에 대한 이 이야기는 세상 속에서 상처와 아픔으로 얼룩진 비천한 자일지라도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지면 존귀한 자가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도대체 입다는 어떤 사람이었기에 비천함에서 존귀함에 이를 수 있었을까?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이런 것이다.

    첫째, 신앙은 상처와 아픔을 치유하는 명약이다.

    (삿 11:1-2) 『[1] 길르앗 사람 큰 용사 입다는 기생이 길르앗에게 낳은 아들이었고 [2] 길르앗의 아내도 아들들을 낳았더라 아내의 아들들이 자라매 입다를 쫓아내며 그에게 이르되 너는 다른 여인의 자식이니 우리 아버지 집 기업을 잇지 못하리라 한지라』

    사람은 자기가 노력해서 개선할 수 있는 영역이 있고 개선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 스스로 개선할 수 없는 영역 가운데 태생이란 것이 있다. 태생은 자기 선택이나 노력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입다는 태생이 비천했다. 그런데 그의 고통은 여기에서 끝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했다. 그는 배다른 형들로부터 쫓겨났고 자기 몫의 재산은 한 푼도 받지 못했다. 사람이 건실한 인격체로 성장하려면 어렸을 때 가정에서부터 사랑을 경험해야 한다. 그런데 입다는 태어나면서부터 서자라는 낙인과 더불어 가정으로부터 거절당하고 쫓겨나는 상처와 아픔을 경험했다. 본문을 보면 입다의 추방은 한 가정에서가 아니라 한 가문의 차원에서 이루어진 일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입다에 대해서 성경은 ‘서자’라고 먼저 언급하지 않고 본문 1절 말씀처럼 ‘큰 용사’라고 소개하고 있다. 여기서 ‘큰 용사’란 ‘전쟁의 명수’ ‘싸움의 용사’ 즉 전쟁에 익숙한 자를 의미한다. 아마도 그에게는 전쟁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은사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은사 외에 그의 마음 속에 존귀하게 될 수 있는 다른 요소가 들어 있었다.

    (삿 11:9)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데리고 본향으로 돌아가서 암몬 자손과 싸우게 할 때에 만일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붙이시면 내가 과연 너희 머리가 되겠느냐』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한 말에서 우리는 입다의 마음 속에 여호와 신앙이 들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내가 그들과 싸워 이기면’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붙이시면’이라고 말했다. 이 표현은 전쟁의 승패가 내 능력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생각을 반영하고 있다. 그의 마음 속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마음이 있었다. 또 다른 곳에서 여호와 신앙이 발견된다.

    (삿 11:11) 『이에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과 함께 가니 백성이 그로 자기들의 머리와 장관을 삼은지라 입다가 미스바에서 자기의 말을 다 여호와 앞에 고하니라』

    입다가 미스바에서 자기의 말을 다 여호와 앞에 고했다. 이는 입다가 하나님께 기도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는 뜻이다. 여호와께서 전쟁의 승패를 좌지우지한다는 믿음, 여호와 앞에 자기의 말을 다 고하는 사람, 그런 신앙이 있던 사람이 바로 입다였다. 이것이 입다가 비천한 신분에서 존귀한 자가 될 수 있는 첫 번째 비결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비천한 처지였지만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존귀한 자가 되는 예를 많이 발견한다. 그 가운데 역대상에 야베스라는 인물이 있다.

    (대상 4:9) 『야베스는 그 형제보다 존귀한 자라 그 어미가 이름하여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역대상의 이 ‘야베스’란 이름은 ‘고통’이란 뜻이다. 그 어머니가 고통 중에 낳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태생적으로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거나 산모가 순탄하지 않은 탄생의 비화를 가졌던 것 같다. 그러나 야베스는 성장 후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있었다. 그는 하나님께 자신의 지경을 넓혀 달라는 간절한 기도를 드렸고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어주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상 4:10)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입다에게도 야베스와 같은 아픔과 고통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입다의 발목을 잡아 그의 인생을 넘어뜨리지 못했다. 그는 돕 땅에서 여러 사람들을 이끄는 리더가 되었다. 그 비결이 무엇이었는가? 바로 여호와 신앙이다. 신앙에는 이처럼 상처를 극복케 하는 능력이 있다. 신앙을 가진 자는 세상이 자신을 쓰레기 취급해도 ‘너는 내 형상을 닮은 존귀한 자야!’ 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나를 ‘서자’라고 손가락질해도 ‘너는 세례를 통해 하늘에서 태어난 내 아들이야!’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리 깊은 상처와 쓰라린 아픔으로 얼룩진 인생일지라도 하나님을 의지하면 치료되고 회복될 수 있고 존귀하게 될 수 있다. 그래서 믿음은 사람의 영혼을 고치는 명약이다. 과거에 어떤 상처와 아픔이 있더라도 입다가 그러했던 것처럼 오로지 하나님만 섬기는 믿음으로 치유받고 존귀하게 되시는 저와 성도님들 되시길 바란다.

    (시 16:3)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

    둘째, 신앙에는 원수와 화목하게 되는 복이 있다.

    (삿 11:7)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전에 나를 미워하여 내 아버지 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이제 너희가 환난을 당하였다고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입다가 길르앗 백성의 머리와 장관이 된 과정을 주목하자! 기드온처럼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나 그를 부르고 사사로 세운 것이 아니다. 삼손처럼 태중에서부터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것도 아니다. 이스라엘의 길르앗 족속 장로들이 직접 그에게 나아가 ‘장관’이 되어 달라. ‘머리’가 되어 달라는 부탁으로 사사로 발탁된다. 여기에 숨은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다. 입다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그렇게 천대하고 내쫓은 자들이 찾아와서 우두머리가 되어 달라고 부탁했을 때 입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이처럼 나를 힘들게 하고 모욕했던 사람에게 사과받고 화목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다. 입다가 그동안 여호와 하나님만 경외하고 그분을 의뢰하는 신앙을 지켰기 때문에 그에게 주어진 일종의 상급이었던 것이다. 창세기에 보면 믿음의 조상 삼인이 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다. 그런데 이 세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인생의 황혼기에 원수와 화목케 되는 일을 체험했다는 사실이다. 과거에 나를 괴롭히던 자들이 나를 찾아와 화친의 악수를 청했던 것이다.

    (창 21:22) 『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창 26:26-27) 『아비멜렉이 그 친구 아훗삿과 군대장관 비골로 더불어 그랄에서부터 이삭에게로 온지라 (27) 이삭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미워하여 나로 너희를 떠나가게 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창 33:10) 『야곱이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형님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청컨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 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이처럼 성도님들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원수 관계의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미움을 거둘 수 없게 깨져버린 관계가 있을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을 경외하고 올바른 신앙의 길에 가다보면 미래의 언젠가 그가 찾아와 악수하고 화목케 되는 날이 있다는 것이다. 믿음의 조상 삼인에게도, 그리고 오늘 본문의 입다에게 임했던 화평의 복이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는 저와 성도님들의 것이 되기를 기원한다.

    (잠 16:7)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

    셋째, 신앙에는 좋은 성품을 가지는 복이 있다.

    (삿 11:27-28) 『[27] 내가 네게 죄를 짓지 아니하였거늘 네가 나를 쳐서 내게 악을 행하고자 하는도다 원컨대 심판하시는 여호와는 오늘날 이스라엘 자손과 암몬 자손의 사이에 판결하시옵소서 하나 [28] 암몬 자손의 왕이 입다의 보내어 말한 것을 듣지 아니하였더라』

    사람은 상처와 아픔을 경험하면 난폭하고 모난 성격이 되기 쉽다. 남을 원망하거나, 환경을 원망하거나, 부모나 태생을 원망하는 자가 될 수도 있다. 자기를 잃고 방황하는 인생이 되기 쉽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좋은 은사를 받은 사람도 방탕으로 치달아 인생을 망친다. 태생이나 자란 환경으로 볼 때 입다는 그럴 위험성이 높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암몬과 전쟁하기 전에 사신을 보내 담판을 짓는 장면을 보면 얼마나 평화를 사랑하는 좋은 성품의 사람인지 가늠할 수 있다. 그는 암몬 족속과 즉시 전쟁을 수행하지 않았다. 먼저 협상을 통해 전쟁을 피할 수 있는 길을 모색했다. 이처럼 입다는 전쟁보다 협상을 원하는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아마도 신앙을 가졌기에 이런 성품의 사람으로 성장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화평케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이처럼 여호와 신앙의 길을 간 입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또 다른 상급이 있었다. 그 상급이란 하나님 닮은 아름다운 성품이다.

    (잠 4:8) 『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만일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오늘날 우리 성도님들 가운데 입다와 같은 깊은 상처와 쓰라린 아픔의 과거를 가지고 있는 분들이 계신가? 그렇다면 실망하지 말라. 사람도 환경도 원망하지도 말고 하나님의 섭리로 주어진 것임을 믿자. 결심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의 길에 정진하면 비천한 나도 존귀한 자가 되게 하실 것이다. 좋은 성품을 가지고 존귀한 인생을 살게 하실 것이다. 부디 상처와 아픔으로 뒤범벅된 인생의 전쟁터에서 믿음으로 치유받고 승리하시는 입다와 같은 믿음의 ‘큰 용사’가 다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기원한다.

    글작성 : 김세한 목자님

    글편집 : 박은우 형제

    https://youtu.be/7LdzDnn3EzU

  • 축복을 이어가는 믿음 (히 11:20)

    축복을 이어가는 믿음 (히 11:20)

    참예수교회 대방교회 안식일 오전예배

    일시 : 2022. 10. 08.

    장소 : 서울특별시 동작구 알마타길 29 참예수교회 / 서울특별시 동작구 대방동 349-3

    설교자 : 김용준 목자

    제목 : 축복을 이어가는 믿음

    주제성구 : 히브리서11장 20절

    (히11:20)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 하나님이 자랑하시는 믿음 (히 11:8~19)

    하나님이 자랑하시는 믿음 (히 11:8~19)

    참예수교회 대방교회 안식일 오전예배

    일시 : 2022. 10. 01.

    장소 : 서울특별시 동작구 알마타길 29 참예수교회 / 서울특별시 동작구 대방동 349-3

    설교자 : 김용준 목자

    제목 : 하나님이 자랑하시는 믿음

    주제성구 : 히브리서11장 8~19절

    (히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히11:9)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히11:10)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히11: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히11:12)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

    (히11: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히11:14)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히11:15)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히11: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히11: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히11:18)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히11:19)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