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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음 메시지] 그런즉 깨어 있으라

    [복음 메시지] 그런즉 깨어 있으라

    [말씀제목]: 그런즉 깨어 있으라

    [증 거 자]:  목자 이요셉

    [증거일자]: 2024년 7월 20일 안식일 오전예배

    [본문말씀]: 마 25:1~13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25;1)”

     

    본문의 말씀 중 신랑을 맞으러 나간 10명의 처녀는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모든 성도들을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10명의 처녀가 다가오는 신랑을 맞이하러 나갔습니다. 곧 신랑과 함께 집으로 돌아 와서 성대한 혼인잔치를 열게 될 것입니다. 이 혼인잔치는 성도들이 천국에서 누리게 될, 풍성한 행복을 상징하는 표현들입니다.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 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25:5~6)”

     

    10명의 처녀가 신랑을 맞으러 나갔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신랑이 오지 않았고, 밤에 신부가 졸며 자는 사이에 신랑이 도착하게 됩니다. 10명의 처녀 중에 5명의 처녀는 기름이 부족해서 불이 꺼져가고 있었고 기름을 사러 간 동안에 기름을 미리 예비한 5명의 처녀는 혼인잔치에 참여하였고 결국 문은 닫히고 말았습니다. 기름을 예비하지 못한 처녀들은 혼인잔치에 참여하지 못 했지요. 

     

    두 부류의 처녀들의 핵심적인 차이는 기름을 소유하고 있느냐, 있지 않으냐가 아닌 기름을 충분히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슬기로운 5명의 처녀는 기름 곧, 성령을 충만히 예비하였습니다.  성령이 충만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바로 자기의 통제력을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육체의 정욕으로 채우고자 했던 자신의 통제력을 잃어버리고 성령의 소욕대로 그 사람이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소욕대로 살아가기 때문에 그 사람의 말과 그 사람의 행실이 다 하나님 앞에서 보기에 값진 말과 행실이 되며, 나의 말과 행동이 성령의 지배력 안에 놓이게 됩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영적인 어두움이 세상을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는 지금과 같이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고, 이적을 행하는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 때 우리 앞에 오는 환난은 아주 무겁고 경험해 보지 못한 환난이기에. 믿는 자라 하더라도 미혹 받을 수 있으며 영적인 환란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낮이며, 밤이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25;10)”

     

    천국은 예비 된 자들, 성령이 충분히 준비된 사람들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지금부터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모습으로 기도와 전도에 힘써 행하여 성령을 충분히 준비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록자: 이현우

    편집자: 방태식

  • [복음 메세지] 과부의 두 렙돈 (눅 21:1~4)

    [복음 메세지] 과부의 두 렙돈 (눅 21:1~4)

    제목 : 과부의 두 렙돈
    누가복음 21:1~4

    옛 바리새인들은 너무나 어리석고 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해도, 그들은 늘 예수님을 죽일 생각만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보시며 안타까운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시련과 고통을 주시며 다시 마음을 돌이킬 기회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에수님을 걱정하게 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때에,

    예수님을 감동시킨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오늘날 그 여인을 공개적으로 칭찬하고 격려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선 왜 과부를 칭찬하셨을까요?

    오늘은 그 이유를 알아보고 우리 모두 그 모습을 본받아야겠습니다.

    오늘 성경에는 한 과부가 헌금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눅 21:1~2)

    헌금이란 무엇일까요? 바로 내가 받은 은혜를 재물로 하나님께 돌려 드리는 겁니다.

     

    가난한 과부가 아주 적은 금액의 헌금을 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선 우리가 헌금하는 모습과 마음을 보고 계십니다.

    그 금액이 크든 작든 하나님께선 항상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옛날의 과부는 오늘날의 과부와는 조금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옛날의 과부는 절대로 경제적인 활동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수입이 전혀 없는 신분이었습니다.

    따라서 굉장히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과부가 헌금을 하고 있습니다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돈의 단위인 렙돈은 ‘가장 적은 단위의 돈’ 입니다.

    이 시대에는 한 렙돈을 절대로 헌금하지 말라고 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가작 작은 단위의 돈이기 때문에 헌금으로써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과부는 한 렙돈이 아닌, 두 렙돈을 헌금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자도 헌금을 하고, 가난한 과부도 헌금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들을 어떻게 평가하고 계신가요?

    ‘가난한 과부가 많은 헌금을 하였다’ 고 말씀하셨다.

     

    (3) 심지어 이 가난한 “과부의 헌금이 모든 사람들 보다도 많이 헌금했다!” 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일반적인 생각을 해본다면 상식적이지 않은 말이다. 받은 만큼 돌려드리는 것이다.

    가난한 과부는 받은 은혜가 적기에 적은 금액을 헌금한 것으로 보인다. 이 부분을 잘못 생각하면,

    “아!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만 좋아 하시는 구나” 라고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가난한 과부의 적은 헌금을 칭찬 하셨을까?

     

    지금의 가치로 환산해본다면, 이 가난한 과부는 약 1달러가 되지 않는 금액을 헌금한 것이다.

    그런데 왜 칭찬을 받은 것일까?

     

    (4) 예수님께선 두 가지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첫 번째, 다른이들은 풍족한 상황에서 헌금을 했고,

    가난한 과부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헌금을 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헌금을 할 수 없는 상황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과부가 생활하기에도 부족한 상황속에서,

    예수님께 자신의 ‘전부’를 드린 것입니다.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행동하게 했을까? 바로 그녀의 믿음이 가능하게 한 것이다.

    그녀는 예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일반적인 사람들이라면,

    예수님께 복을 구하면 구했지 자신의 전부를 드릴 생각은 못할 것입니다.

    그만큼 그녀는 예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자신을 돌봐주신 분이 예수님이심을 믿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도 예수님께서 자신을 지켜주실 것이란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선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우리의 모든 상황을 인도하십니다.

    이것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도 과부와 같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성경에 엘리사와 과부가 등장합니다.

    엘리사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하나님의 공급이 중단 됐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선 엘리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방인의 땅으로 가라” 그리고 엘리사는 그곳에서 한 과부를 만났습니다.

    엘리사는 그 과부에게 먹을것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 과부는 자기와 자기 아들이 먹을 것 밖에 남지 않았고,

    그것을 먹고 이제 삶을 끝내고자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엘리사는 하나님을 믿고 자신에게 그 음식을 줄 것을 권했습니다.

    과부는 믿음으로 그렇게 행동했고,

    놀랍게도 그 과부와 자식들이 여러날을 먹을 음식이 계속해서 생겨났다.

     

    여러분은 시간이 남아서 교회에 오십니까? 돈이 남아서 하나님께 헌금을 하십니까?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의 삶속에서 어떤것이 중요한지를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의 시간속에서 중요한 시간을 내어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드리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오히려 우리가 어려움 속에 있을수록,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때로 적은 능력과, 적은 축복을 주실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 하나님께 기쁨과 감사를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면 그것은 예수님의 큰 뜻이 있는 것이며, 큰 계획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때마다 믿음으로 신앙생활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선정 하실 때, 세상에서 보는 능력으로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부자도 아니었고, 지식이 뛰어난 사람도 아니었고,

    능력있는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갖고 있지 않은것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믿음” 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부르셨을때 모든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자세로 예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스스로 똑똑하고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예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겸손한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것을 예수님 앞에 바칠 수 있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왜냐면 예수님은 부족한 사람들을 통하여 예수님의 능력을 보여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시의 “가난한 과부의 헌금”은,

    당시 어리석은 바리새인들에게 큰 충격과 가르침을 주는 사건이었습니다.

     

    두 번째, 과부는 “전부”를 드리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이들은 “일부”를 헌금했고, 과부는 “전부를” 헌금했습니다.

    즉, 이것은 최선을 다했는가? 나의 온 마음을 하나님꼐 드렸는가? 를 보고 계신 것입니다.

    과부에게 2개의 동전은 하루를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돈이었습니다.

    자신의 하루, 자신의 삶을 전부 드린 것입니다.

    여기 계신 성도님들은 하나님 앞에 “일부” 를 바치고 있나요? 아니면 “전부”를 바치고 있나요?

    우리는 온 마음을 다하여 예수님 앞에 나아와야 합니다.

    부자들은 자신의 돈과 명예에 집착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 앞에 나아가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우리 역시, 가난한 과부처럼 예수님께 온 마음을 다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앞에 나아갈 때,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손가락질 합니다.

    “저렇게 어리석은 행동을 하다니!, 저것은 낭비다” 라고 말합니다.

    과연 우리는 어리석은 사람들일까요? 예수님은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시지 않습니다

     

    세상에서는 사람을 바라볼 때 결과를 봅니다.

    잘 했는가? 결과물이 훌륭한가? 완벽했는가?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예배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frizeF92ahE

  • [복음메시지]내일의 희망을가졌나요?(예례미야 32:3~15)

    [복음메시지]내일의 희망을가졌나요?(예례미야 32:3~15)

    [말씀제목]  내일의 희망을 가졌나요? (렘 32:3~15)

    [설교자]   김용준 목자

    [설교일]   2024년 3월 2일

     

    (3) 이는 그가 예언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보라 내가 이 성을 바벨론 왕의 손에 붙이리니 그가 취할 것이며 유다 왕 시드기야는 갈대아 인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반드시 바벨론 왕의 손에 붙이운 바 되리니 입이 입을 대하여 말하고 눈이 서로 볼 것이며 (4) 그가 시드기야를 바벨론으로 끌어가리니 시드기야가 나의 권고할 때까지 거기 있으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5) 너희가 갈대아 인과 싸울지라도 승리치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더니 유다 왕 시드기야가 가로되 네가 어찌 이같이 예언하였느뇨 하고 그를 가두었음이었더라 (6) 예레미야가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였느니라 이르시기를 (7) 보라 네 숙부 살룸의 아들 하나멜이 네게 와서 말하기를 너는 아나돗에 있는 내 밭을 사라 이 기업을 무를 권리가 네게 있느니라 하리라 하시더니 (8) 여호와의 말씀 같이 나의 숙부의 아들 하나멜이 시위대 뜰 안 내게로 와서 이르되 청하노니 너는 베냐민 땅 아나돗에 있는 나의 밭을 사라 기업의 상속권이 네게 있고 무를 권리가 네게 있으니 너를 위하여 사라 하는지라 내가 이것이 여호와의 말씀인 줄 알았으므로 (9) 내 숙부의 아들 하나멜의 아나돗에 있는 밭을 사는데 은 십칠 세겔을 달아 주되 (10) 증서를 써서 인봉하고 증인을 세우고 은을 저울에 달아 주고 (11) 법과 규례대로 인봉하고 인봉치 아니한 매매 증서를 내가 취하여 (12) 나의 숙부의 아들 하나멜과 매매 증서에 인 친 증인의 앞과 시위대 뜰에 앉은 유다 모든 사람 앞에서 그 매매 증서를 마세야의 손자 네리야의 아들 바룩에게 부치며 (13) 그들의 앞에서 바룩에게 명하여 이르되 (14)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이 증서 곧 인봉하고 인봉치 않은 매매증서를 취하여 토기에 담아 많은 날 동안 보존케 하라 (15)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내가 이같이 말하노라 사람이 이 땅에서 집과 밭과 포도원을 다시 사게 되리라 하셨다 하니라​

    (시 16:3)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

    땅에 있다는 것은, 부족함이 많고 흠결투성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성도에게서 소망을 찾으시고, 즐거움을 느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귀하게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남을 격려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를 격려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나는 하나님께 사랑받는 하나님의 백성이므로, 하나님의 모든 관심이 나에게 있습니다. 사람이 절망에 빠지면 자살을 생각하게 되지만, 같은 사람이 소망을 가지면 위대한 인물이 됩니다. 그러므로, 어떤 생각을 가지느냐가 중요합니다. 언제든지 소망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소망이 있다면 무인도에서도 즐거울 수 있습니다. 심지어, 감옥에서도 행복할 수 있는 이유는 그 가운데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흙탕물 가운데서도 연꽃은 피웁니다. 우리도 연꽃 같은 삶을 살아야 하겠지요.

     본문은 희망의 중요성을 가르쳐줍니다.

    (렘 32:1) 유다 왕 시드기야의 제십년 곧 느부갓네살의 제십팔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시드기야의 제 십 년에 하나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포위당한 지 오래되었을 때 이런 멸망의 예언을 하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예언으로 인해 예레미야는 시위대 뜰에 갇히게 되었지요.

    (렘 32:6) 예레미야가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였느니라 이르시기를

    (렘 32:7) 보라 네 숙부 살룸의 아들 하나멜이 네게 와서 말하기를 너는 아나돗에 있는 내 밭을 사라 이 기업을 무를 권리가 네게 있느니라 하리라 하시더니​

    (렘 32:8) 여호와의 말씀 같이 나의 숙부의 아들 하나멜이 시위대 뜰 안 내게로 와서 이르되 청하노니 너는 베냐민 땅 아나돗에 있는 나의 밭을 사라 기업의 상속권이 네게 있고 무를 권리가 네게 있으니 너를 위하여 사라 하는지라 내가 이것이 여호와의 말씀인 줄 알았으므로

    하나멜은 바벨론에 의해 나라가 망하게 되었기 때문에 땅을 팔았습니다. 

     

    (렘 32:9~15) (9)내 숙부의 아들 하나멜의 아나돗에 있는 밭을 사는데 은 십칠 세겔을 달아 주되 (10) 증서를 써서 인봉하고 증인을 세우고 은을 저울에 달아 주고 (11) 법과 규례대로 인봉하고 인봉치 아니한 매매 증서를 내가 취하여 (12) 나의 숙부의 아들 하나멜과 매매 증서에 인 친 증인의 앞과 시위대 뜰에 앉은 유다 모든 사람 앞에서 그 매매 증서를 마세야의 손자 네리야의 아들 바룩에게 부치며​ (13) 그들의 앞에서 바룩에게 명하여 이르되 (14)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이 증서 곧 인봉하고 인봉치 않은 매매증서를 취하여 토기에 담아 많은 날 동안 보존케 하라 (15)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내가 이같이 말하노라 사람이 이 땅에서 집과 밭과 포도원을 다시 사게 되리라 하셨다 하니라​

     본문은 소망에 대한 교훈을 줍니다.

     *소망의 교훈

     1.소망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계산적인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멜은 ‘너를 위하여’ 밭을 사라고 했지만, 정말 그는 예레미야를 위해서 파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나라가 멸망당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멜의 마음을 알고 있었지만, 그 밭을 샀습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첫째로, 하나멜을 돕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몰라서 속은 것이 아니었지요. 살기가 어려워도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보다 어려운 사람들도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보다 어려운 사람을 돌보려 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을 기뻐하실 것입니다. 나 살 궁리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더 어렵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 백성임을 기억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살기가 어려워도, 더 어려운 사람을 돌보려고 마음을 써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어려움까지 돌아봐 주실 것입니다. 내 것을 힘써 나누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축복이 임할 것입니다. 나만 잘 살려고 하면 하나님께 외면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멜의 삶이 아니라 예레미야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2.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렘 32:8) 여호와의 말씀같이 나의 숙부의 아들 하나멜이 시위대 뜰 안 내게로 와서 이르되 청하노니 너는 베냐민 땅 아나돗에 있는 나의 밭을 사라 기업의 상속권이 네게 있고 무를 권리가 네게 있으니 너를 위하여 사라 하는지라 내가 이것이 여호와의 말씀인 줄 알았으므로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앞세워 살았습니다. 이것이 그가 희망을 잃지 않은 이유입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멸망할 나라의 땅을 사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예레미야는 오해받을 각오를 하고 그 땅을 샀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예레미야의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에 순종하려는 그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그 중심을 보시고 하늘 문을 우리에게 열어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려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시고 큰 축복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3. 내일에 대한 희망을 놓아서는 안 됩니다.

    (렘 32:15)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내가 이같이 말하노라 사람이 이 땅에서 집과 밭과 포도원을 다시 사게 되리라 하셨다 하니라

    ​​ 어떤 상황 속에서라도 내일의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밭을 사라고 명령하셨습니까? 왜 예레미야는 명령에 순종하였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예레미야에게 땅 매매를 명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멸망하겠지만,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회복해 주시리라고 말씀하신 약속을 믿은 것입니다. 시시때때로 절망할 거라면, 왜 하나님을 믿는 것일까요? 어려운 순간에 희망을 놓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희망을 놓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축복이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고 실망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인생에 보약이 되는 일들이 있습니다. 하늘의 별​이 멀리 있을 때 아름다운 것과도 같지요. 축복도 오랜 고통의 시간 후에 오는 축복이 내게 더 축복된 시간일 수도 있습니다. 눈앞의 축복만 진짜 축복은 아닙니다. 바위틈에서 자란 소나무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에게 시련이 있어야 튼튼한 뿌리가 형성됩니다. 시련은 뿌리를 내리는 과정이 되어야 합니다. 희망을 포기하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삶에 어려움과 고통이 온다고 삶을 포기하는 이유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꿈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꿈이 미완성이기에 자신을 독려하게 됩니다. 꿈을 다 이룬 후의 삶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무기력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므로 우리에게 희망이 중요합니다. 희망을 품고 노력하는 사람이 더 아름답고, 그의 삶이 더 힘찬 것입니다. 희망이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 줍니다. 희망이 있으면 어떤 어려움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꿈이 없는 것이 비극적인 일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꿈과 희망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의 참된 소망은 하늘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늘을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쇠똥구리는 은하수를 보고 길을 찾아갑니다. 땅에서 똥을 굴려도 그 눈은 하늘을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의 소망의 근원은 하나님뿐이십니다. 연이 연줄에 매여있을 때가 행복하겠습니까, 연줄이 끊어져 하늘로 날아갈 때가 행복하겠습니까? 연줄이 끊어지면 연이 날지 못합니다. 바로 땅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매여있는 것을 속박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 연결된 끈이 있어야 아름다운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매여있지 않으면 사람도 땅에 처박히게 됩니다. 성도는 하나님께 연결되어야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연줄을 끊어버리면 그 연은 하늘을 날 수 없습니다. 바로 땅에 곤두박질치게 될 것입니다.

    (시 146:5)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자들이 성도입니다. 그들이 복된 자들입니다. 우리는 소망 없이 살아갈 수 없습니다. 주님의 손을 붙들고, 하늘을 바라보고 소망을 노래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 [복음메시지]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 (누가복음 18:15~17)

    [복음메시지]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 (누가복음 18:15~17)

    [말씀 제목]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 (누가복음 18:15~17)

    [설교자] 전홍희 목자

    [설교일] 2024년 2월 17일 안식일 오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진 자들에게 보여주십니다.

    스스로 잘난체 하고, 자기를 높이는 사람들에겐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선 제자들에게 “과부처럼 기도하라” “낙심하지 말고 기도하라”

    “겸손하게 기도하라” 라고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눅18:15)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당시 이스라엘엔 유명한 랍비들에게 자녀들을 데려가 축복기도를 요청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시대에 유명한 랍비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께 아이들을 데리고 나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런 이들을 꾸짖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이들이 모이면 시끄럽고 정신이 없을 수 밖에 없습니다. 제자들은 이러한 상황이 예수님께

    닥치지 않도록 사람들을 꾸짖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행동이었을 뿐입니다.

     

    (눅18:16)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오늘 본문에 나오는 “어린아이”는 7세 미만의 아이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어른들은 아이들보다 지식도 많고,

    가진것도 많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가진것이 많을 수록 예수님을 가까이 두기 어렵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것들이 예수님을 가까이 하는데 장애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선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강조하셨습니다.

    7세 이하의 어린이들 보십시오. 이 아이들은 온전히 자기 부모님께 의지합니다. 그리고 매순간 부모님만 찾고,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모님이 잠시라도 떨어져 있으면 불안해 하지요.

    우리도 이런 아이들처럼 예수님을 항상 의지하고 바라봐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린아이 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받느는 것” 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오늘 3가지 의미를 알아보고자 합니다.

     

    1.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창12:1~4)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새로운 땅으로 가라는 말씀에 주저함 없이 순종하였습니다.

    전혀 모르는 땅임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모든 식구를 데리고 이사를 갔습니다.

    온전히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그 미음이 중요합니다.

    어린아이들은 아주 단순합니다. 아이들은 부모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입니다.

    그렇지만 신앙안에서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고, 나의 걱정과 나의 생각이 첨가됩니다.

    성도님들은 천국이 있다고 믿으십니까? 천국은 분명히 있습니다!

    어린아이의 마음과 같이 있는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저와 여러분 되길 소망합니다.

     

    2.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민수기14:6~8) 

    여호수아와 갈렙은 이방인들의 모습을 보고 전혀 두려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정탐꾼들은 겁을 먹고 말았습니다. 믿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땅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이 말씀을 순수하게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생각으로는 이 모든 일이 불가능하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불가능한 일이 있을까요?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히, 온전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베드로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유능한 어부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베드로에게,

    아무런 어업관련 경험이 없는 예수님께서 깊은곳에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그 말씀을 순수하게 받아들여, 깊은곳에 가서 그물을 던졌습니다.

    결과는 어땠나요? 예수님의 은혜와 축복은 순수한 믿음을 가진 자들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천국이 가까이 있는 것을 믿습니다.

     

    3.겸손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찾아라 (요3:5~6, 9~10)

    본문에 나오는 니고데모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니고데모는 당시 최고의회인 산헤드린의 의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를 꾸짖었을 때, 니고데모는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높은 직책에 있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겸손히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났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떠나 산다면 낙오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의 말씀처럼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을 가져서 천국에 가는 그날까지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반드시 하나님의 나라의 주인공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말씀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viUbGkdFJ6A

  • [복음 메시지] 기쁨을 주시는 주님 (요2:1-11)

    [복음 메시지] 기쁨을 주시는 주님 (요2:1-11)

    [말씀 제목] 기쁨을 주시는 주님 (요2:1-11)

    [설교자] 장종규 목자

    [설교일] 2024년 3월 9일 (안식일 오전)

      흥겨워야할 잔칫집에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즐거움이 그치게 될 상황에 예수님께서는 물로 포도주를 만드십니다. 성경에서 포도주는 기쁨을 의미합니다(시104:15). 인생에 있어 기쁨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기쁨이 사라지면 삶은 팍팍하고 공허해집니다. 솔로몬은 인생에 있어 기쁨을 무엇보다 중요하다 생각하여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그러나 더 큰 갈증과 허무함을 느낍니다. 오늘 가나안 잔칫집의 모습은 우리 인생의 축소판이라 볼 수 있습니다. 삶에서 기쁨을 느끼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고갈되어 버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기쁨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주시는지 말씀을 통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포도주가 없다는 사실을 마리아가 예수님께 말합니다. 이 문제를 예수님이 해결해 줄 것을 구합니다. 마리아는 그가 아들이었지만 특별하신 존재임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라며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때를 잘 알고 계셨고, 때에 따라 행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일을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시며 또한 모든 필요한 것을 때를 따라 채우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께 은혜를 구함과 동시에 그가 일하실 때를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3:11)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갈4:4)

      5절에서 마리아가 하인들에게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라고 당부합니다. 이것은 마리아의 생각 속에 어떻게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행하려는 것이 강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처녀인 마리아에게 천사가 와서 아이를 낳을 것이라 말했을 때 마리아는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까?” 반문하지만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천사의 말을 듣습니다. 그리고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니이다”라며 순종합니다. 받아들이기 힘든 일임에도 마리아는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따르겠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오늘 혼인잔치에서도 예수님의 거절이 있었지만 하인들에게 그가 무슨 말씀을 하든지 그대로 하라고 요구한 것은 마리아 자신도 그렇게 순종하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구한 후에 자신이 기대한 응답을 받지 못하였다 해도 끝까지 순종하려는 생각, 사실 이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정말 믿는다면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믿음은 내가 구했던 대로, 내가 기대했던 것대로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여전히 따라 가는 것입니다. 계시록에 구원 받은 성도 십사만 사천 명은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약시대 광야에서 구름기둥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야 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믿음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 이미 보여 주셨습니다.

      7절에서 예수님은 하인들에게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제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하십니다. 마리아의 요청을 외면하지 않으심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진정으로 자신을 믿는 자들의 간구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 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저희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시145:18-19)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실로 들으셨으며 내 기도 소리에 주의하셨도다”(시66:18-20)

      하나님은 죄악을 품고 구하면 듣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면 그 기도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정욕으로 잘못 구하는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은 주의해서 들으십니다. 예수님 보시기에 때가 아직 되지 않았으나 마리아의 기도를 존중히 여기심처럼 말입니다. 민수기 14장에는 가나안 정탐보고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패역함과 하나님의 진노, 그리고 모세의 중보기도가 나옵니다. 하나님은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진노하시며 전염병으로 그들을 쳐서 멸하고 모세로 그들보다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루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민14:11-12). 이에 모세는 하나님께 간절히 그 뜻을 거두어 주실 것을 구합니다.

    “…이제 구하옵나니 이미 말씀하신대로 주의 큰 권능을 나타내옵소서. 이르시기를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가 많아 죄악과 과실을 사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사하지 아니하고 아비의 죄악을 자식에게 갚아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구하옵나니 주의 인자의 광대하심을 따라 이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되 애굽에서부터 지금까지 이 백성을 사하신 것 같이 사하옵소서”(민14:17-19)

      하나님께서는 “내가 네 말대로 사하노라”(민14:20) 하시며 모세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 주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생각이 바뀌거나 사람처럼 뜻을 번복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하게 간구하는 자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반드시 들으심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한편 하인들은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합니다.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니 아구까지 채우고 ‘떠서 연회장에 갖다 주라’ 하니 갖다 줍니다. 하인들의 순종함을 통해 두 가지를 생각해 봅니다. 첫째는 최선을 다해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인들은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는 명령에 ‘아구’까지 가득 채웁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지키되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신26:16). 하나님이 하신 이 모든 말씀에 대해서 우리는 이런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마음을 다해 행하는 것입니다. 가득 채운 물 만큼 포도주가 채워지는 것처럼 최선을 다해 순종한 만큼 복을 받게 됩니다. 두 번째는 순종하되 잠잠히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인들이 아직 포도주가 되지 않은 물을 연회장에게 갖다 줍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순종은 사실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이해되지 않지만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성을 정복할 때 여리고성을 하루에 한 바퀴씩 돌게 됩니다. 이해할 수 없고 의미 없어 보이지만 하나님은 들레지 말고 잠잠하라고 명하십니다. 세상에서도 모르면 가만히 있으라고 말합니다. 인간이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 앞에서 잠잠히 신뢰하며 순종할 때 마침내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경험하고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가 말씀하시되 너희가 돌이켜 안연히 처하여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어늘…”(사30:15)

      9절에서 마침내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어떤 상황이든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시30:11)라는 말씀처럼 슬픔의 상황을 기쁨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하나님이 바다를 변하여 육지 되게 하셨으므로 무리가 도보로 강을 통과하고 우리가 거기서 주로 인하여 기뻐하였도다”(시66:6)라는 말씀처럼 바다를 육지로 바꾸시어 기쁨이 되게 하십니다. 오늘 가나안 혼인 잔치의 사건은 예수님께서 바로 절망과 슬픔의 상황을 희망과 즐거움 되게 하시는 구약의 창조주 하나님과 동일한 분이심을 보여 줍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사35:1-2)

      메시아가 와서 이루실 하나님의 나라는 기쁨과 즐거움이 충만한 곳입니다. 이 기쁨과 즐거움은 예수님을 통한 변화가 있기에 가능합니다. 그리고 이 기쁨과 즐거움은 잠간이 아니라 영원한 것입니다.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계21:6)

      멈추지 않고 계속 솟아나는 샘물처럼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끊임없이 기쁨과 즐거움을 얻습니다. 그리고 이 복된 약속은 바로 이기는 자가 얻으리라 말씀하십니다. 내 생각, 내 욕심, 불순종과 사단의 유혹들을 이기면서 하나님께 순종한다면 이런 유업들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힘을 다해 순종할 때 충만한 기쁨과 즐거움이 계속됩니다. 바라옵기는 힘써 순종하고 이기는 자가 되어 이런 복된 것들을 풍성히 얻는 저와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 유튜브 설교방송 링크 |

    글| 백현 자매

  • [복음메세지] 말씀의 기갈을 경계하라 (암 8:11-14)

    [복음메세지] 말씀의 기갈을 경계하라 (암 8:11-14)

    [말씀제목] 말씀의 기갈을 경계하라 (암 8:11-14)

    [설교자] 장흥진 목자

    [설교일] 2024년 3월 21일(화) 저녁 예배 

     

    <1> 성도와 말씀의 관계

    1.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를 받는 성도의 특권
    2. 주의 복된 길
    3. 하나님의 기업을 받기에 합당한 성도

    <2> 말씀의 기갈의 결과

    <3> 말씀의 기갈이 오는 이유

    1. 강팍함
    2. 교만
    3. 하나님의 진노
    4. 마귀의 역사

     

    본문말씀 아모스 811-14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찌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피곤하리라 무릇 사마리아의 죄된 우상을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기를 단아 네 신의 생존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하거나 브엘세바의 위하는 것의 생존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하는 사람은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

     

     

    <1> 성도와 말씀의 관계 – 1.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를 받는 성도의 특권

    신명기 33장 3절 여호와께서 백성을 사랑하시나니 모든 성도가 그 수중에 있으며 주의 발 아래 앉아서 주의 말씀을 받는도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그의 소유된 백성들은 그 말씀을 받습니다. 발 앞에 조아리며 너무나 소중한 듯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서 예배하고자 하는 그런 모습이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건강한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출애굽기 19장 5절 6절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존중하는 것이며 언약을 지키는 것입니다. 말씀을 사모하며 받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확실성, 곧 사랑과 보호를 받는다는 증거입니다.

     

     

    <1> 성도와 말씀의 관계 – 2. 주의 복된 길

    시편 85편 8절 내가 하나님 여호와의 하실 말씀을 들으리니 대적 그 백성 그 성도에게 화평을 말씀하실 것이라 저희는 다시 망령된 대로 돌아가지 말지어다 망령된 길로 가는 것은 무지하여 쉬우나 나를 구원해 주실 말씀은 곧 화평입니다. 말씀에 흥미를 못 느낀다, 말씀을 들어야 될 이유를 모르겠다 이것은 망령된 길을 가는 것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복된 길로 다시 인도받아야 합니다.

     

     

    <1> 성도와 말씀의 관계 – 3. 하나님의 기업을 받기에 합당한 성도

    사도행전 20장 32절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우리는 앞으로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받아야 할 하늘의 천국 영광이 있습니다. 내 영혼의 인도자가 계신다면 따라가면 됩니다. 하나님의 기업을 얻을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히브리서 1장 3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주의 말씀은 만물을 붙드는 능력의 말씀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우주를 주관하시는 능력의 말씀으로 우리를 붙드시고 계십니다. 기업을 이끄시고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구원에까지 이르도록 역사하시는 말씀입니다.

    디도서 3장 14절 또 우리 사람들도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을 예비하는 좋은 일에 힘쓰기를 배우게 하라 하나님의 말씀은 놓치면 어떠한 결실도 얻을 수 없습니다.

     

     

    <2> 말씀의 기갈의 결과

    시편 74편 9절 우리의 표적이 보이지 아니하며 선지자도 다시 없으며 이런 일이 얼마나 오랠는지 우리중에 아는 자도 없나이다 말씀을 놓아버리면 영적 암흑의 시대가 오는 것과 같습니다. 육신적 삶은 변화가 없을 수 있으나 표적은 보이지 않고 선지자도 없습니다.

    사사기 17장 6절 그때는 이스라엘의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 하나님이 왕 되신 하나님으로 계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인도받는 자가 아니라 내 소견대로 살아가는 자가 됩니다.

    에스겔서 7장 26절,27절 환란에 환난이 더하고 소문에 소문이 더할 때에 그들이 선지자에게 묵시를 구하나 헛될 것이며 제사장에게 율법이 없어질 것이요 장로에게는 모략이 없어질 것이며 왕은 애통하고 방백은 놀람을 옷 입듯하며 거인의 손은 떨리리라 내가 그 행위대로 그들에게 갚고 그 죄악대로 그들을 국문한즉 그들이 여호와인 줄 알리라 말씀과 관계없는 삶으로 환란이 더하고 평안이 사라집니다. 말씀을 놓쳐버린 제사장과 장로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없고 가르칠 수 없습니다. 말씀의 기갈은 영적인 탕진을 의미합니다.

     

     

    <3> 말씀의 기갈이 오는 이유- 1. 강팍함

    스가랴서 7장 12절 그 마음을 금강석 같게 하여 율법과 만군의 여호와가 신으로 이전 선지자를 빙자하여 전한 말을 듣지 아니함으로 큰 노가 나 만군의 여호와께로서 나왔도다 돌처럼 마음이 굳어지면 하나님 말씀이 어떤 감동적인 말씀이라 할지라도 들어오지 않습니다. 말씀을 받으려면 깨끗한 마음이 준비돼 있어야 합니다. 교만하고 오만한 마음은 은총의 말씀 앞에 자신을 맡길 수가 없습니다

    누가복음 8장 15절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은총의 말씀이 좋은 마음과 착한 마음에 심어져 결실하게 될 것입니다. 성도들은 말씀으로 생각하는 성숙한 삶의 태도를 가져야겠습니다.

     

     

    <3> 말씀의 기갈이 오는 이유- 2. 교만

    누가복음 10장 21절 이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가라사대 천지의 주제이니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교만한 자들에게는 숨기십니다. 그러나 어린아이같이 깨끗한 마음의 영혼들에게, 겸손한 영혼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은 양약으로 역사하게 될 것입니다

     

     

    <3> 말씀의 기갈이 오는 이유- 3. 하나님의 진노

    사무엘상 3장 1절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사무엘이 이스라엘을 섬기는 당시에 하나님은 진노하심으로 이상을 보이시지 않으셨습니다. 말씀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회개할 일이 있는지 찾아야 합니다.

    사도행전 28장 27절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하였으니 혹시라도 내가 변화될까 두려워서 귀를 막고 눈을 막았다는 것입니다 날마다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삶을 사모하지 않는다면 말씀은 결코 유익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3> 말씀의 기갈이 오는 이유- 4. 마귀의 역사

    마태복음 13장 19절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는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리운 자요 말씀을 들으면서 마음에 은혜를 담는다면 여러분은 마귀에게 그 마음의 땅을 빼앗기지 않은 것입니다 말씀이 들리지 않는 것은 사탄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마치며_

    계시록 1장 3절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하나님 말씀의 인도가 절실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세상은 죄악으로 어두워져 가는데 무엇으로 이곳에서 나를 건질 수 있을까요?

    다니엘서 9장 13절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이 모든 재앙이 이미 우리에게 임하였사오나 우리는 우리의 죄악을 떠나고 주의 진리를 깨닫도록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은총을 간구치 아니하였나이다 말씀에 흥미와 관심이 사라진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말씀의 기갈은 곧 하나님 백성의 실패입니다. 오직 우주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만이 우리를 붙드실 수 있습니다. 주의 발 앞에서 하나님 말씀을 기쁨으로 받길 간구하시고 사모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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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음메시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 (마27:45-54)

    [복음메시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 (마27:45-54)

    [말씀 제목]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마27:45-54)

    [설교자] 장종규 목자

    [설교일] 2023년 12월 16일 안식일 오전 

    예수님께서 제 삼시(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리시고 제 육시(정오)부터 제 구시(오후 3시)까지 온 땅에 어둠에 임합니다. 가장 밝을 이 시간 어둠이 임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성경에서 어둠이 임함은 심판을 의미합니다.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마24:29)”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로 볼 수도 있지만, 구속사적 측면에서 볼 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죄의 형벌을 받는 심판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죽기 전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며 절규하시는데 바로 죄의 대가인 사망의 형벌을 온전히 받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죄의 대가인 사망, 즉 죽음은 무엇입니까? 육적인 죽음이 아닌 영적 죽음을 의미합니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하나님과 단절됩니다. 생명의 근원되신 하나님과의 단절은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는 생명과 은혜가 끊기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고통 중에 부르짖으나 모든 사람을 대신해 죄의 형벌을 받아야만 했기 때문에 그 은혜와 긍휼을 받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 빛을 비취사 우리로 구원을 얻게 하소서 (시80:3)”

    예수님의 모든 것은 성경의 말씀을 이루려 하신 것입니다. 시편 22편은 일차적으로는 개인의 고통과 간구이나 근본적으로는 예수그리스도의 수난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으나 응답받지 못함도(1-2절), 로마 군인들에게 겉옷을 나뉘고 속옷을 제비 뽑히는 모욕도(18절), 이후 하나님의 은혜가 회복됨도(22-24절) 모두 그렇습니다. 그러나 죄로 인한 형벌을 순히 받으심으로(레26:40)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살리십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심은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해 반드시 징계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그가 진심으로 회개하면 용서해 주시는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이심을 알게 됩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히5:7)”

    예수님께서 마지막 운명하실 때 ‘영혼이 떠나시다(50절)’라고 함은 이제 그 영혼이 떠나 하나님께서 가심을 의미합니다.

    “내가 아버지께로 나와서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요16:28)”

    같은 내용을 기록한 눅23장에서 예수님은 회개한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라고 말씀하시며 당신이 낙원에 가심을 말씀하십니다.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며 운명하심도 이제 그 영혼이 아버지께 가심을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들도 죽은 후 몸은 비록 흙으로 돌아가나 그 영혼은 하나님께로 가게 됩니다. 영혼만이 진정한 ‘나’이며 가장 중요한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에서 여전히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자는 죽어서도 영원히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로 어떠한 은혜와 긍휼도 없는 곳에 가게 됩니다.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 빨리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 곧 회개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고후6:2)”

    또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특별한 일들이 일어남을 보게 됩니다. 먼저 하나님과의 분리, 단절의 상징이었던 성소의 휘장이 찢어지게 됩니다. 이 휘장에는 그룹들이 수놓아져 있는데 이 들은 아담이 범죄 한 후 에덴동산을 지켰던 천사들이었습니다. 이 휘장이 찢어짐은 하나님과의 막혔던 담이 허물어지고 에덴동산의 은혜가 회복되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됨을 의미합니다.

    두 번째로는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게 됩니다. 바위처럼 단단한 죄의 권세를 부수어 이김으로 더 이상 죄에 대해 메이지 않음을, 무덤이 열리고 죽은 자가 일어남은 더 이상 사망에 메이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죄에 대해 종노릇하는 삶에서 벗어나는 결정적 사건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며 이는 우리를 자유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능력임을 알게 됩니다.

    바라옵기는 너무도 놀라운 십자가의 능력과 은혜를 깊이 깨달아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고 섬기는 저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골2:14)”

     

    | 유튜브 설교방송 링크 |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1편)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2편)

     

    글| 백현 자매

  • [복음 메세지]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복음 메세지]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23.10.28 안식일 오전 윤석원 목자님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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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앙생활은 결국 죄와 싸우는 것이다.

    그렇다면 천국에 가서도 우리는 죄와 싸우게 될까? 타락의 가능성이 있을까?

     

    죄 = 하나님에게서 벗어난 것.

     

    실질적으로 창조주이신, 전능하신 하나님에게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면 피조물은 반드시 그 명령을 따라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하는 로봇으로 만든 것이 아닌, 감히 그의 명령을 거부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셨다.

     

    천국에 가서는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있을까? “있다.”

    그렇다면 거기에서도 죄를 지어 재타락할 수 있는 걸까? “전혀 없다.”

     

    천국과 지옥의 차이: 관계 (화목하냐, 불화하냐)

     

    하나님과 함께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을 때 그곳(집, 교회, 학교 등)이 천국이 됨.

    (출 19:22) 하나님과 불화하면 하나님은 죄를 싫어하시기 때문에 돌격을 당하게 됨. (진노를 받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는 진노를 받아야 했던 대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바뀌게 됨. (하나님과의 관계가 형성됨)

     

    단순히 성경 통독을 열심히 한다고 해서, 기도를 많이 한다고 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진 않음. 어떠한 계기를 통해 더 고차원의 관계를 가지게 되는 것. (ex. 욥)

     

    ?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만드시고 우리를 부르신 걸까 ?

     

    1. 우리를 단순히 적당히 착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부르신 것이 아니라 나를 하나님과 같은 존재,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완전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부르심.
    2.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추구하지 않으면 말세의 죄의 유혹을 견디지 못함.
      -> 나중에는 성막만 무사한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계시는 성소와 지성소만 무사함. 그곳을 제외한 나머지도 밟히게 됨.

     

    즉,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맺지 못하면 결국 떨어져 나갈 수밖에 없음.

     

    ? 어떻게 하면 더 깊은 관계를 만들 수 있을까 ?

     

    관계의 종류

    1. 원수 같은 아들
    2. 종 같은 아들
    3. 친구 같은 아들 (요 15:15)
    4. 신부 같은 아들 (계 21:2) = 교회의 마지막, 완전한 모습. = 하나님과 내가 완전히 하나가 된 상태.

     

     

    <웬수 같은 아들>

     

    (눅 15:11) 아비에게는 2명의 웬수 같은 아들이 있었으나, 둘째는 재산을 미리 상속받고 떠나 방탕한 생활을 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여도 방탕하게 쾌락을 추구하며 살다보면 하나님에게서 떨어질 수밖에 없음.

     

    세상을 사랑해 세상으로 향했다. = (요일 2:15-16) 세상의 것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했다.

    => 웬수 같은 아들.

     

    둘째는 집 나간 웬수라면, 첫째는 집 안의 웬수였다.

     

    집으로 돌아온 둘째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첫째는 헤아리지 못함.

    첫째가 웬수인 이유는,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이 행복이고 은혜임에도, 그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이지 못함. (아버지와의 관계가 깊지 못함)

  • [복음메시지]그리스도의 심판대 (고후5:1-10)

    [복음메시지]그리스도의 심판대 (고후5:1-10)

    ♣ 2023. 11. 25. 안식일 오전 (오희도 목자)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고후 5:1)

    1절 말씀을 보면 두 개의 집이 나온다.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 &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 장막집은 임시 거하는 처소이다.(고후4:18) 내가 살았던 집도 나의 몸도 결국 무너진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영원한 집이 있다.(요14:2) 하나님의 백성이 내집 마련의 꿈을 어떻게 이룰수 있는가?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은  하나님께서 지으신다.  사람의 으로 짓는 것이 아니다.  손으로 짓는 것은 실수가 많고, 엉망으로 짓기도 한다. 그러나 영원하고 완전한 집이 우리에게 있다. 이 땅에 집이 없어도 소망을 가질수 있고  살아가는 의미가 된다. 이것이 인생의 중요한 결론이다.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고후 5:2)

    우리는 땅에 있으면서 탄식한다.  부정적인 탄식이 아닌 하늘에 있는 영원한 처소를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탄식이다. 또한  삶의 고단함과 정욕과 욕심으로 인해 나약한 자기의 모습을 보며 탄식한다.  하늘의 처소는  이 땅의 장막집이 무너져야 들어간다. 그러나 바울사도는 하늘의 영원한 처소를 이 땅에 살아갈때 덧입는다고 표현하고 있다.

    덧입는다는 것이 무엇일까?  하늘나라의 영원한 집은 두 구조가 있다. 하늘나라에 가서 거하는 처소도 있지만  이 땅에 살아갈 때 하늘나라의 영원한 집을 영적으로 덧입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3)

    벗은 자들로 발견되는 시점은 죽었을 때이다. 하나님 믿지 않고 죽으면 마치 벗은자들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이 땅에서 영원한 처소를 사모하고 믿었던 자들은 영원한 처소가  덧입혀져 있다.

    우리는 이 장막에 살면서 무거운 인생의 짐에 눌려 지게를 지고 살아가는 것과 같다.  헬라적인 사고는 육신과 영혼을 분리해서 생각했다. 이원론적인 사고이다. 극단적으로는 영혼은 이미 하늘나라에 가 있기 때문에 육신은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고 생각을 했다.  매우 위험한 생각이다.

    육신을 갖고 있을때 무슨 일을 했는지에 따라 그것을 근거로 구원이 결정된다. 육과 영이 분리되어 있는것이 아니다.  육신의 행위와 함께 하나님 앞에 심판 받는것이다.

    죽을 몸이 생명에게 삼킨자 된자들은 영원한 처소를 덧입는 자가 된다. 세례받으면 주의 죽으심과 함께 장사되었고 물에서 올라오는 순간 새생명 가운데 살게 된다.(롬6:4) 이 일을 하나님이 이루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주셨다.(5절) 성령을 받은 우리는 속으로 탄식하며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린다.(롬8:18~23) 성령은 영원한 삶을 보증해주기 때문에 우리는 이 땅에서 담대하게 살 수 있다.(6절)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이 본질임을 깨달을 때 담대해진다. 세례받고 올라올때 이미 내집 마련이 되었다.  우리는 주님과 살기 위해 빨리 떠나기를 바라지만(8절) 이 땅에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게 하기를 힘써야 한다.(9절)  고린도 성도들은 자신을 기쁘게 하기에 바빴다. 교회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고후 5:9~10)

    우리는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날 것이다.(10절) 벗어날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교회의 수많은 문제가 생기는 이유는 심판대가 있음을 생각지 못해서이다.  영원한 세계에 들어가는 순간 서야 할 곳이 심판대이다. 그때에는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 날마다 주를 기쁘게 하는 자가 되고 담대히 주님 오시는 날을 기다리며 주안에서 날마다 행복한 신앙 생활 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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